[현대시 100년-사랑의 詩]박재삼/‘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 입력 2008년 4월 4일 03시 00분


못 견디게 하는 봄이다. 이제 살아 있는 것들은 봄볕 속에서 못 견딜 것이다. 못물은 논에 모를 내는 데 필요한 물이다. 그 물은 벼농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생명의 조건이다. ‘찰랑찰랑’이라는 어감이 말해 주는 것처럼, 그 물은 넘칠 듯 넘치지 않는다. 그것이 생명을 만드는 물의 상태이다. 이 못물은 못물이면서, 하나의 거울이다. 생명의 물은 사물의 빛과 무늬들을 그 몸 안에서 비추어낸다. 그 비춤은 수동의 의미가 아니라, 생성의 의미다. 못물은 무늬를 주고, 보석을 만들어낸다. 거울은 다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사물을 만들어낸다.

못물의 절묘한 물높이는 사랑하는 당신의 눈물의 무게와 비유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괸 눈물은, 그 자신의 무게와 중력의 법칙에도 불구하고 흐를 듯 흐르지 않는다. 흐를 듯 흐르지 않는 순간의 눈물이야말로, 우주의 아름다움을 다시 창조하는 못물처럼 그렇게,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다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눈물은 참담한 아름다움을 내게 보낸다.

당신이 내게 보내는 것,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와 ‘어지러운 바람’은 못물에 담긴 이미지들처럼, 고요하고 부드럽지는 않다. 죽은 나무의 잎사귀와 어지럽게 부는 바람은, 당신 눈물 속의 불안, 당신이 발견한 나의 견딜 수 없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의 무게는 당신과 내가 나누어 갖는 불안의 무게이다. 박재삼은 한국어의 질감과 그리움의 서정에 놀랍도록 예민한 감각을 가졌던 서정 시인이다. 그가 발견한 당신 눈물의 글썽임은, 흘러넘치지 않아서 오히려 나를 못 견디게 하는, 어쩌지 못하는 사랑의 신호이다.

이광호 평론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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