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08]중편소설/날려, 훅<요약>

  • 입력 2008년 1월 1일 02시 58분


컴퓨터 게임에 빠져 지내던 백수 휴학생 ‘나’는 사무보조직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기 위해 낡은 건물로 들어선다. 지저분한 화장실과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사무실. 나는 어쩐지 불안하다.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는 두 명의 직원, 이상한 면접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장, 나는 별 기대 없이 건물을 빠져나온다. 갈 곳은 없고 봄 거리는 활기차다. 때마침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뜻밖에도 면접 합격 소식이다.

출근 첫날 사장은 나를 부르더니 수상한 계약서를 보여 준다. 계약서에 의하면 나의 업무는 사무보조직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업무내용이 명시된 계약서를 내던지면서 나는 ‘취업사기’라고 화를 낸다. 사장은 조용히 묻는다. 누굴 죽이고 싶도록 미워해 본 적 있나? 이게 바로 배부른 인스턴트식 복수,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우아한 복수, 소심하고 나약한 이들의 정신적 만족을 위한 최첨단 시스템이지. 나는 고객의 고통을 덜어 주고 치유해 주는 서비스업일 뿐이라는 사장의 말에 흔들린다. 게다가 사장이 제시한 성과급 액수는 놀랍다. 나는 계약서를 들춰 보다가 결국 서명을 하게 된다. 사장실을 나서자 회사 동료 이반 씨과 언데드가 서 있다. 이제 나는 그들과 복수를 원하는 고객을 만나야 한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고객을 대신해 가상현실에서 청부복수를 해주는 회사의 업무에 대해 사장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최첨단기계인 영혼스캐닝 장비를 통해 의뢰인의 복수대상자를 온라인 게임 속에 프로그램화한 뒤 가상현실에서 증오하는 사람을 좀비 캐릭터로 등장시키는 이 시스템의 핵심은 DNA 추출을 위한 대상자의 머리카락이다. DNA와 영혼이라니, 비웃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의뢰인이 지정한 대상자의 멀쩡한 머리카락을 뽑아 오는 일이다. 이반 씨와 함께 만난 첫 고객은 중학생 남자아이로 자신은 물론 몇몇 녀석을 주기적으로 괴롭히는 ‘학교 짱’을 복수 대상자로 삼는다. 폭력에 시달려 온 녀석들은 돈을 모아 선금을 입금한 뒤 이 실감나는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스꽝스러운 기계를 들고 심각한 척 떠드는 이반 씨나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을 믿고 찾아 온 여드름 중학생이나 우습게 보일 뿐이다.

나는 특유의 거침없는 성격으로 대상자의 머리카락을 채취하는 임무를 가볍게 성공한다. 머리카락을 비닐 팩 속에 넣고 ‘영혼스캐닝 장비’라는 낡은 고철 기계 안에 비닐 팩을 끼워 넣은 이반 씨는 USB포트를 연결해 캐릭터 제작을 시작한다. 나는 호기심이 생긴다. 화면에는 실제 모습과 똑같은 ‘학교짱’이 좀비 캐릭터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나는 실제와 똑같은 게임 캐릭터의 정교함에 환호성을 지른다.

한편 늘 주먹으로만 얻어맞던 여드름 중학생은 게임옵션의 여러 항목 중 오직 주먹만을 공격무기로 원한다. 나는 여태껏 보아 온 게임 속 현란한 무기와 달리 한 방에 날리는 시원한 훅이 왠지 더 근사해 보인다. 복수에 찬 여드름의 계속되는 훅, 나는 점차 이런 관람을 즐기게 된다.

어느 날 다른 의뢰인인 웨딩플래너를 만나기 위해 언데드와 출동하게 된 나. 서른 중반의 웨딩플래너가 의뢰해 온 복수 대상자는 그녀의 남자친구다. 언데드는 이런 남녀문제가 골치라며 애정인지 증오인지 구분 못해 갈팡질팡하는 것들을 질색해 한다. 그러나 난 같은 여자로서 바람난 남자친구에게 차인 주름진 그녀의 얼굴이 안쓰러워진다.

복수 대상자인 웨딩플래너의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언데드와 나는 잠복에 들어간다. 운전이든 식사매너든 뭐든 제멋대로인 언데드는 잠복은 뒷전이다. 그가 느긋하게 식사를 하러 간 사이 나는 예상치 못한 웨딩플래너의 남자친구를 발견한다. 그는 어린 여자와 바짝 붙어 다정히 걸어가고 있다. 남자친구의 엉덩이문신까지 캐릭터에 정확히 새겨 달라던 웨딩플래너의 부탁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미친 척 달려 나간다.

지하경로를 통해 전투게임을 즐기려는 고객들은 날로 늘어간다. 나 역시 점차 업무가 즐거워지고 능수능란해진다. 그러면서 낡은 건물의 화장실과 눅눅한 사무실, 고철기계에서 피어오르는 저주받은 영혼의 연기, 그리고 공격을 하면 할수록 실감에 접근하는 게임 속 캐릭터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현실 속 인물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은밀한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된다.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고객의 내면을 치료하며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돈도 많이 버는 이 일이 마음에 들 뿐이다. 사장은 나로 인해 매출이 늘었다며 칭찬하고 회사는 갈수록 성장한다. 이제 곧 환기구와 배수구가 멀쩡한 새 건물로 사무실을 이전할 계획이다. 게임치료전문가라는 명함까지 만든 나는 더 이상 초라한 백수가 아니다. 반짝이는 명함을 주위에 돌리면서 나는 마냥 뿌듯해진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지금까지 들어 준 몸이 불편한 ‘너’에게 나는 걱정스러운 한 마디를 건네고 헤어진다.

정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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