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따라 세계일주]아일랜드 국제연극제

  • 입력 2007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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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시, 숙소 예약도 하지 않은 채 아일랜드 더블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찾은 더블린은 거리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절반은 아일랜드 최고 자랑인 검은 맥주-기네스-를 들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조차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인파가 넘쳤는데 무슨 일인가 했더니 하필이면 이날이 그룹 ‘스팅’의 콘서트가 있는 날이라고 했다.》

배우들, 거리로 쏟아지다

○ 술집마다 흥겨운 아이리시 댄스… 싸고 알찬 연극 즐비

2시간을 2층 버스 안에 갇혀 있는데 거리의 펍(술집)마다 안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열린 틈으로 보니 어디서 많이 봤다 싶은 춤동작이 보였다. ‘아이리시 댄스’였다. 흥겨운 분위기에 흠뻑 젖은 사람들이 구수한 흑맥주에 취해 너나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발을 구르는 모습은, 비록 박자는 엉터리였지만, 그 어떤 춤보다 정겹고 구수했다.

아일랜드의 더블린 국제연극제(Dublin International Theatre Festival)는 올해로 50년째를 맞는데 유럽에서는 중급 규모에 해당하는 연극제다. 우리나라에는 ‘아이리시 리버댄스’팀이 두어 차례 내한하여 공연한 적이 있고 일부 연극이 소개됐을 뿐 우리에게 아일랜드의 공연예술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래서 한번 와 봤다.

처음 와 본 더블린 축제는 한마디로 추운 겨울 동네 가게에서 파는 뜨끈뜨끈한 찐빵 같은 느낌이었다. 싸고 맛난 찐빵 하나면 밥 한 끼도 해결할 수도 있고 맛까지 좋으니, 이보다 더한 실속여행이 또 있겠는가. 규모가 너무 크고 방대해 좋은 작품을 만날 확률도 그만큼 낮았던 다른 예술축제들에 비해 더블린의 연극축제는 소박했지만 알찼고, 열이면 열 모두 확실한 작품들이었다.

다음 날. 이번 축제의 최고 화제작이라는 호주 연극 ‘스몰 메탈 오브젝츠(Small Metal Objects)’를 보러 갔다. 광장에 마련된 연극 공연장은 마치 서울 외곽에 있는 비닐하우스로 된 분재상 같이 생긴 간이 부스였다. 근데 이상했다. 무대가 없었다. 배우도 없었다. 아니, 배우는 있었지만 멀리 있었다. 100m도 족히 넘는 거리에. 4명의 배우는 뺨에 작은 무선 마이크를 달고 시내 곳곳을 오가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고 무선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는 광장 부스에 모인 관객들이 헤드폰을 쓰고 군중 속에 숨어있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형식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숨어,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도청하는’ 연극인 셈이다. 정말 너무나 기발했고, 현대 사회의 건조한 인간관계에 대해 쉽고 명쾌하면서도 충분히 진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 멀리서 배우 이야기 엿듣는 기발한 형식

배우들은 거리를 다니다가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사 마시기도 했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담뱃불을 빌리기도 했다. 멀리 광장의 관객 부스에 앉아있던 나는 헤드폰을 통해 배우가 커피값을 내는 동전 소리까지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리얼리티가 또 있을까. 그리고 감탄했다. 이런 것도 연극일 수 있구나!

어릴 적 즐겨 보던 외화 중에 초능력에 가까운 청력으로 정의를 지키던 ‘소머즈’라는 TV 시리즈가 있었는데 군중 속에 묻힌 행인(배우)들이 나누는 일상적 이야기들을 생생히 엿들으면서 나는 마치 소머즈가 된 것 같았다. 남을 훔쳐보는 것, 남의 대화를 훔쳐듣는 것에 대한 스릴도 느껴지고 기분이 묘했다. 관객인 우리는 군중 속에서 돌아다니는 배우들을 엿보며 즐거워했지만, 지나가던 진짜 행인은 관객인 우리를 보고 자꾸 웃었다. 생각해 보라. 배우는 온데간데없고 관객들만 더블린 시내 광장 한복판에 모여 앉아 머리에 헤드폰을 끼고 뭔가 열심히 엿듣고 연신 신기해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길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의 눈엔 또 엉뚱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우를 몰래 구경하는 관객 스스로의 행동 역시 또 다른 볼거리가 되는 작품. 생각할수록 기발한 연극이었다.

55분간의 공연이 끝나고, 거리를 돌아다니던 4명의 배우가 커튼콜을 위해 관객이 있는 곳에 모여 인사를 하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멀리서 연기했던 이들 중 한 명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관객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 일어서서 배우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스몰 메탈 오브젝츠’는 나에게 많은 충격을 줬다, 한국에 있을 때 나도 그랬지만 많은 공연관계자들이 입버릇처럼 한탄하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공연장이 없어서 안 돼….” 실제로 공연계 사람들은 습관처럼 ‘공연장이 없어서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물론 공연장은 당연히 필요하다. 정부 지원도 있어야겠고 공연계 스스로의 자구책도 필요하다. 하지만 공연장이 많이 생기기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우리가 먼저 공연장 밖으로 나가 관객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한국의 예술가들이 공연장 밖으로 나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문화 선진국일수록 ‘거리 공연’이 발달된 것을 보면 그다지 틀린 생각도 아닌 것 같다.

유경숙 공연기획자 prniki1220@hotmail.com

▼ 어린이극장‘아크’▼

관람연령 구체적 표시

배우-관객 끝없는 토론

더블린 시내 한가운데에는 아크(The Ark)극장이라는 어린이 전용극장이 있다.

어린이 문화체험실, 세미나실, 아담한 소극장까지 각종 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었는데 어린이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보였다. 공연장은 130여 석으로 옆 친구와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하는 긴 벤치식 의자였고, 2층은 그나마도 크고 둥근 연기통 같은 것으로 의자를 대신했다.

내가 찾아간 날은 ‘프라이빗 피스풀(Private Peaceful)’이라는 젊은 남자배우의 독백극이었는데 두 달 전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1인극 부문에 노미네이트될 만큼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했다.

공연이 끝나자 배우들과 어린이 관객의 토론시간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사소한 궁금증이라도 거침없이 질문을 했다. “왜 신발이 검은 색이에요?” “공연 준비엔 얼마나 걸려요?” “’어릴 때 병정놀이 많이 해 봤어요?” “왜 해피엔딩이 아니에요?” 질문은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 눈에 띈 건 공연관람 나이 표시였다. 이 공연장의 월간 프로그램 북에는 작품별로 자세한 내용 소개와 함께 6세 이상, 9세 이상, 또는 11∼14세 하는 식으로 작품 관람에 적당한 연령을 아주 구체적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실제로는 성인들이 보는 공연도 명목상으로는 7세 이상 관람가로 돼 있는 경우가 많고 어린이 공연은 구체적인 연령 표시를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모처럼 자녀를 데리고 공연장을 찾았다가 낯 뜨거운 장면이 나왔다며 항의하는 관객이 생기는 안타까운 상황이 곧잘 있기 때문에 아크극장의 섬세한 배려는 더욱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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