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미 스님 “포교위해 美서 평생 살 각오”

  • 입력 2007년 6월 14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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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서울 조계사에서 모처럼 만난 일미 스님(앞)과 엇나간 조카인 일미 스님을 불가로 인도한 삼촌 지범 스님. 안철민 기자
13일 서울 조계사에서 모처럼 만난 일미 스님(앞)과 엇나간 조카인 일미 스님을 불가로 인도한 삼촌 지범 스님. 안철민 기자
《그는 ‘불량소년’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떴다. 알코올의존증 환자인 아버지, 가난했던 어린 시절. 욕구불만에 찬 반항아. 삼촌의 친구 지갑에서 돈 몇 천 원을 훔쳤다. 그리고 삼촌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아 정신을 잃었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면제를 100알이나 모았다. 그러나 죽기도 어려웠다. 삼촌의 손에 이끌려 백양사로 갔다. 머리를 깎았다. 16세 때였다. 3년 전 미국에서 잠시 귀국했을 때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모두들 자신을 알아보고 반가워했지만 그 누구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어버린 것이다.》

불량아 방황 딛고 하버드 박사된 일미 스님

그는 미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달 7일이다. 바로 일미(37) 스님이다.

삼촌은 ‘노래하는 스님’으로 잘 알려진 제주 불광사의 지범(53) 스님이다. 5남 4녀 중 막내. 9남매 중 큰형만 빼고 형과 누나 7명이 병으로 세상을 떴다. 자식 잃은 슬픔에 비통해하던 모친은 “막내라도 살려야겠다”며 손을 이끌고 백양사로 갔다. 서옹 큰스님의 계사를 받았다. 13세 때였다.

출가 후 7명의 어린 조카를 돌봤다. 큰형의 아들인 일미 스님이 가장 문제였다. 도벽이 있는 데다 천재적인 머리로 문제가 생겨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그냥 놔두면 큰일나겠다’ 싶어 백양사로 끌고 갔다.

출가 후 일미 스님은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2년 만에 중고교 검정고시를 패스했다. 동국대 불교학과도 3년 반 만에 조기 졸업했다. 1994년 불교종단 개혁사태 때 데모도 했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유학을 결심했다. 능인선원 지광 스님, 정우 스님 등 많은 스님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1999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불교학생회장인 수미 런던 양을 만나 운명적 사랑에 빠졌다. 예일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그녀와의 결혼을 놓고 4년을 고민했다. 결국 ‘인연’을 따랐다.

조계종에서 비구계를 받았던 일미 스님은 결혼 후 대처(帶妻)가 인정되는 태고종으로 종단을 바꿔 담양 용화사로 재출가했다. 3년 만에 석사를 마치고 한일불교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속가에서도 삼촌이었지만 출가해서도 사숙(師叔)인 지범 스님은 “평생 나만 바라보고 절에서 바느질하며 보살님으로 살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모친이 하버드대 박사가 된 손자를 봤다면 얼마나 좋아하셨겠느냐”고 말했다. 지범 스님의 모친인 고 이순덕 여사는 지난해 5월 8일 ‘장한 어머니상’을 받은 다음 날부터 ‘온 곳으로 가야겠다’며 곡기를 끊고 염불을 외다 손자인 일미 스님이 미국서 급거 귀국한 뒤 20여 분 만에 좌탈입망(坐脫立亡·앉은 채로 열반함)했다.

도벽이 있던 불량소년은 이제 미국 지성계의 한복판에서 한국 불교를 알리는 ‘전도사’가 됐다. 12일 귀국한 일미 스님은 “불교의 명상이 미국 사회에서 일반화되고 있지만 불교 신자가 늘고 있다고 보진 않는다”며 “조계종과 태고종 종단에 관계없이 한국 불교를 전파하고 알리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와서 평생을 살지 않았느냐, 심지어 2대 3대까지 살았다”며 “불교 포교를 위해서는 스님들의 영어 공부가 필요하고 평생을 미국 땅에서 살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어와 중국어 범어(梵語) 등 6개 국어에 능통한 일미 스님은 1년간의 박사 후 과정을 마친 뒤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할 예정이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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