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한기호]책시장 거덜내는 할인경쟁

  • 입력 2007년 2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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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 할인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은 정가의 10% 이상 할인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일리지, 할인쿠폰 등의 명목을 붙인 실제 할인율은 30%를 넘는다.

최근에는 40% 이상 할인하는 책이 늘어나 이제 곧 반액 할인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예 책 한 권을 덤으로 끼워 주거나 책값의 몇 배에 해당하는 사은품을 얹어 주기도 한다. 할인 경쟁이 어디까지 치달을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부 출판사는 구태여 그럴 가치가 없어 보이는 책을 화려한 양장본으로 만들어 책값을 높게 매긴 후 대대적인 할인 정책으로 독자의 선택을 받으려 한다. 그렇게 해서 판매량이 늘어난 책은 대단한 화젯거리로 언론에 소개된다.

이런 할인 정책을 도입하고도 어느 정도 이익을 남기려면 베스트셀러가 돼야 한다. 그나마 잘 팔리는 책이 ‘자기 계발서’라고 하니 출판사가 일제히 매달린다. 그 통에 베스트셀러가 온통 비슷비슷한 자기계발서 일색이다.

한국 소설 시장은 초판을 3000부도 소화하기 어렵지만 일본 소설은 그래도 좀 팔린다. 출판사가 너나없이 일본 소설 계약에 나서 선(先)인세를 10배 이상 높여 버렸다.

읽힐 만한 ‘물건’은 이미 싹쓸이가 돼서 후발 주자는 그럴듯한 원고를 손에 넣을 수 없는 형편이다. 요즘 한 신생 출판사는 20만 달러에 이르는 선인세를 건지기 위해 연일 신문 전면광고를 쏟아낸다.

인터넷 서점과 홈 쇼핑의 할인 정책 덕분에 독자가 책을 싸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맞다. 심지어 책값의 10%에 구입할 수 있는 신간도 보인다.

그러나 독자가 할인을 즐기는 사이에 정말 좋은 책을 펴내려고 애쓰는 출판사는 처참하게 고사한다. 대형 할인마트의 등장으로 소비자는 생필품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지만 수익이 줄어든 제조업체가 큰 부담을 지게 된 현상과 비슷하다.

생필품은 부족할 경우 외국에서 수입할 수 있다. 한글로 된 책은 다른 나라에서 만들 이유가 없다. 결국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아 볼 수 없게 됐고, 출판 시장은 크게 위축된다. ‘겨울방학에는 책이 좀 팔리겠지’ 하는 기대마저 처참하게 무너졌다. 출판인은 이제 무슨 책을 펴내야 하느냐고 아우성이다.

출판 시장의 무한 할인 경쟁이 불러온 가장 심각한 폐해는 유통 시장의 집중화다. 대형 서점 구매 담당자가 책의 질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구매 가격이 싼 책만 선택하기 시작하면 출판 시장이 황폐화될 것이 뻔하다. 불행하게도 지금 출판 시장에서는 그런 사태가 실제로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할인 정책이 이뤄지더라도 소수의 베스트셀러는 대대적으로 팔리기 때문에 출판의 전체 매출액은 크게 줄어들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오히려 출간한 책의 종류는 늘어날지 모른다. 요즘 출판 장에는 태어난 책이 즉시 사라지는 ‘유아 사망’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장에서는 판매 부수는 많지 않지만 꼭 필요한 책이 탄생하기 어렵고 오로지 팔리기만을 기대하며 탄생한 책이 늘어나게 된다.

책 시장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든 1차적 책임은 출판인 자신에게 있다. 출판인은 하루빨리 출판사, 도매상, 소매서점이 상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복원하고 끝도 없는 할인 경쟁이 아닌 ‘우량서적 내기 경쟁’에 매진해야 한다.

정책 당국도 인터넷서점 등이 무리한 가격 할인을 하면서 현행법을 어기지 않았는지 강력히 계도해야 한다. 부실한 현행법을 하루빨리 정비해 출판문화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바란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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