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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1월 24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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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39·사진) 씨는 사랑의 기억을 노래한다. 추억이 아니라 기억. 열정도 상처도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말을, 그 대상을 떠올리면 낯설게 된 지점에서 이 씨는 시를 쓴다.
올해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한 이 씨가 두 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을 펴냈다(창비). 한강에서 다리 공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다리를 놓아 서로 그리워하는 것들의 맥을 잇는 일이 시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건널 수 없는 대상을 이제 건널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도 한다”고도 했다. ‘건너다’라는 단어의 자리에 ‘사랑하다’를 넣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공들여 고른 언어로 빚어진 이 씨의 많은 시는 그래서 차분하고 절제돼 있다. 절실히 사랑했을 때를 회고할지라도 시인의 목소리는 들뜨지 않는다. 기억하되, 그때의 감정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그는 시를 쓴다.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무늬들’에서)
왜 기억은 추억이 되지 못할까. 어느 날 문득, 사랑은 반복된다는 걸 깨달아서다. 시인은 수천 년의 역사에서 유전돼 온 것은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상처와 성찰이라는 깨달음을 시에 담는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당신이라는 제국’에서)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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