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문화는 ‘희생양’ 먹고 자란다…‘문화의 기원’

  • 입력 2006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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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화의 기원을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의 제의에서 찾고 있는 르네 지라르 스탠퍼드대 교수. 사진 제공 기파랑
인류문화의 기원을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의 제의에서 찾고 있는 르네 지라르 스탠퍼드대 교수. 사진 제공 기파랑
◇문화의 기원/르네 지라르 지음·김진식 옮김/328쪽·1만2000원·기파랑

르네 지라르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이다.

지라르의 사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이번 월드컵을 지라르적으로 해석해 보자.

먼저 승승장구하고 있는 지네딘 지단이라는 걸출한 축구스타에게 눈길을 돌리자. 그는 수많은 한국 축구팬은 물론 축구선수들에게 축구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놀라운 개인기와 날카로운 패스, 경기를 지배하는 카리스마…. 그를 통해서 축구에 대한 열정을 배운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한국-프랑스전이 열리면서 그는 ‘늙은 수탉’이라는 야유의 대상으로 급전직하한다. 그를 숭모했던 한국 선수들도 “지단, 별거 아닙니다”라고 자기최면 걸기에 급급해진다.

지라르에 따르면 우리는 지단을 통해 월드컵 우승 또는 16강 진출이라는 욕망에 눈을 뜬다. 지단은 월드컵에 대한 우리의 몰랐던 열정을 일깨우는 욕망의 중개자다. 그러나 선망은 그가 유럽의 축구무대에서 활약하는 한에서다. 그와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욕망으로 마주치는 순간 그는 우리에게 경쟁의 대상, 제거의 대상이 된다. 곧 지라르가 말하는 욕망의 ‘짝패’다.

다음으로 한국-스위스전으로 넘어가 보자. 한국인들에게 있어 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오라시오 엘리손도 주심. 그는 한국인들의 ‘한국 16강 진출’이라는 집단적 욕망을 방해하는 돌부리, 곧 스캔들(그리스어로 스칸달론)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모방을 통한 욕망은 그 욕망의 중개자(짝패)와의 경쟁으로 바뀌고, 짝패를 죽이려는 폭력적 양상으로까지 발전한다. 그 순간 욕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욕망의 경쟁자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만이 중요해진다. 한 사회에서 이런 폭력성이 극에 달했을 때 필요한 것이 희생양이다. 모든 책임과 원한을 뒤집어씌우고 집단적 따돌림(이지메)을 가할 대상. 엘리손도 주심은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그런 희생양이다.

듣고 나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지라르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이런 모방-희생양의 메커니즘을 몰랐다. 현대사회에서 욕망의 주체는 늘 개인이었고,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당당한 소비 주체로서의 개인으로 발전하면서 신성불가침한 믿음이 됐다. 지라르는 그 신성한 봉인을 뜯어내고 ‘나의 욕망은 나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폭로한 것이다.

지라르가 피에라올로 안토넬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이탈리어과 교수와 주앙 세자르 드 카스트로 로크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대 비교문학 교수와 더불어 펼친 장기간의 대담을 정리한 이 책은 지라르의 사상뿐 아니라 인간 지라르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서 태어나 파리고문서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 지라르는 프랑스문학을 가르치는 문학평론가에서 문화인류학자로 변신한 하이브리드(잡종) 지식인이다. 그는 어느 학파에도, 심지어 어느 학문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독학으로 문학평론을 펼치다가 심리학에 눈을 떴고, 신화를 연구하면서 인류의 문화적 기원이 집단적 폭력을 제어하기 위한 희생양의 제의에서 출발했다는 가설을 세우며 이제는 문화인류학자가 됐다.

“저는 학교나 대학에서 결코 대단한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독학 스타일인 것 같아요. 항상 어깨 너머로 다른 영역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겨난 데는 아마 이런 스타일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이런 고백처럼 그는 늘 이방인이었다. 미국에서는 프랑스인이었고, 프랑스에서는 미국인이었다. 문학과 심리학, 신화학, 종교학, 인류학을 모두 건드리는 그는 학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았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찰스 다윈과 같은 자세로 인류문화의 기원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을 펼쳤다. 이 책의 제목이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의식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이 출간된 1년 후인 2005년 지라르는 ‘불멸의 40인’으로도 불리는 프랑스학술원(아카데미 프랑세즈) 정회원이 됐다. 원제 ‘Les Origines de la Culture’(2004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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