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뒤 몸이야기]<26>하피스트의 바쁜 발

  • 입력 2006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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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하피스트(하프 연주자)의 공통점은 뭘까?

첫째, 둘 다 우아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 둘째, 우아한 이미지와 달리 두 발은 보이지 않게 ‘중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

흔히 ‘하피스트’ 하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처럼, 부드럽게 양손을 움직이며 우아하게 하프 줄을 뜯는 모습을 떠올린다. 관객들도 무대 위 하피스트의 손놀림만 바라볼 뿐, 긴 드레스 자락에 숨은 발은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이는 손’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발’은 하피스트에게는 없으면 연주가 불가능할 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한 신체 부위다.

하프는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발이 바쁜 악기’다. 하프에서 양손은 줄을 튕겨 소리를 낼 뿐, 실제 음을 만들어 내는 것은 페달을 밟는 두 발이기 때문이다.

하프에는 페달이 7개나 달려 있다. 피아노의 페달은 강약을 조절하지만, 하프의 페달은 피아노의 건반처럼 고유의 음을 갖는다. 각 페달은 세 단계(올림, 제자리, 내림)로 움직이는데 단계마다 각기 다른 음을 낸다. 오른발이 4개를, 왼발이 3개의 페달을 ‘연주한다’. 조바꿈(변조)도 물론 두 발의 몫. 수시로 페달 방향을 바꾸며, 부지런히 페달 위를 화려하게 수놓는 하피스트의 두 발은 손만큼이나, 아니 때론 손보다 더 바쁘다.

발의 역할이 크다 보니 신발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하피스트는 연주회 당일에 신을 구두를 미리 정한 뒤 내내 그 신을 신고 연습한다. 발이 그 구두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구두 밑창이 너무 매끈할 경우 발이 페달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특수 창을 대거나 급하면 파스를 붙이기도 한다.

구두도 앞 발바닥이 페달을 누르는 감각을 잘 느낄 수 있도록 밑창이 얇은 것을 선호한다. 여성 하피스트에게는 올해 유행인 ‘플랫폼 슈즈’(구두 밑바닥이 매우 두꺼운 디자인의 구두)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자유로운 발놀림을 위해 여성 하피스트는 뾰족한 하이힐도 피한다.

서울시 교향악단의 하피스트 박은정 씨는 “굽이 5cm를 넘는 구두는 신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초보자나 학생들은 아예 구두 대신 밑바닥이 말랑말랑한 무용 신발을 신기도 한다.

한 여성 하피스트는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맨발”이라며 “독주회에서는 맨발 연주가 안 되지만 오케스트라에서는 하프의 위치가 뒤쪽이라 관객에게 발이 보이지 않는 만큼, 무대 입장 후 슬쩍 구두를 벗어 의자 밑에 놓고 맨발로 연주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누가 물 위에 고고히 떠있는 백조의 ‘물밑 작업’을 내숭이라 했던가! 겉으로 보이는 백조(하피스트)의 우아한 자태가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쉴 새 없이 땀 흘리는 두 발에 갈채를!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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