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소박하고 넉넉… 독학으로 최고의 경지 오른 예술가 2人

  • 입력 2006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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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상원(71) 씨의 ‘영원의 초상’전(갤러리 상)과 도예가 박영숙(59) 씨의 ‘달항아리전’(갤러리 현대). 하나는 가난하고 소박한 인도 사람들의 얼굴을,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현대적으로 되살려 보여 준다. 번잡한 일상과 삶을 잠시나마 잊고, 마음의 고요를 찾게 해주는 전시들이다. 늦깎이로 도전했으나, 치열한 열정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독창적 세계를 보여 준 이들의 전시를 만나 본다.》

▽‘영원의 초상’전=굵게 골이 파인 주름에 흰 머리카락, 웃거나 찡그리는 희로애락의 표정을 담은 얼굴, 얼굴, 얼굴들. 작가 이상원 씨가 인도 바라나시와 구 델리의 시장과 기차역에서 마주친 사람들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상에 걸린 인도 사람들의 초상 40여 점을 보면 소외된 사람들, 소박한 삶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읽힌다. 그는 곤궁하고 단순한 삶을 살면서도 순하고 여유로운 성격, 고난과 슬픔을 받아들이는 욕심 없는 마음에 매료됐다고 말한다. 예전에도 작가는 자동차 바퀴 자국과 마대 등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하찮은 것, 동해안 어부들의 거칠고 투박한 일상 같은 비주류의 삶에 애정을 보여 왔다. 아마도 이는 작가의 인생역정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한번도 미술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자신의 직관과 훈련을 토대로 그림을 익혔을 뿐이다. 10대 중반 춘천농업학교를 다니다 무작정 상경한 그는 극장 간판과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로 생계를 이었다. 타고난 솜씨 덕에 1960, 70년대 초상화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안중근 의사의 초상화도 그렸다. 국빈들과 중동 지역의 왕족에게 그가 그린 초상화는 귀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불혹의 나이에 그는 돈을 위한 그림을 접고 순수미술을 시작했다. 1978년과 1984년 동아미술제에서 동아미술상을 수상하는 등 독창성과 실력을 인정받았다. 러시아와 프랑스 등 해외 초대전도 열었다.

순수미술로 돌아선 뒤엔 그림을 팔지 않은 작가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이번엔 작품을 팔기로 했다. 춘천에 설립할 예정인 미술관의 재원 마련 때문이다.

5월 21일까지. 02-730-0030

▽달항아리전=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달이 벙긋벙긋 웃는 듯하다. 입구는 크고 굽은 좁아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듯 보이는 백자 달항아리들이다. 아무 문양도 장식도 없는 달항아리들은 바라볼수록 정이 간다.

전시장에서 만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마음을 빼앗긴 듯 자꾸만 쓰다듬고, 보듬어보고, 들여다본다.

높이 60cm 안팎의 대형 달항아리들은 현대 미감에 맞춰 재창조된 작품들이다. 조선시대 달항아리보다 훨씬 크고, 풍만함보다 준수함에 무게를 실어 날렵함을 더했다.

작가는 1979년 ‘박영숙 요’를 설립한 뒤 27년을 흙과 함께 지냈다. 늦은 나이에 도자기를 시작해, 생활자기로 첫걸음을 뗀 그의 작업이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때론 작품이 고가(高價)란 점도 흠이었다.

“서양 찻잔은 하나에 30만 원을 호가해도 상관없고, 우리 것은 안 되나요.” 그는 되묻는다. 주변 평가에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작업을 했고 1999년 4월 방한한 엘리자베스 여왕도 그의 작업에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분신같은 달항아리를 가지고 해외에서 순회전을 열 생각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기는 ‘날 좀 봐 주세요’ 하며 뛰어가서 부르는 자태라면, 조선 백자는 앉아서 부른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점잖고 기품이 넘치는 작품으로 세상과 만나야죠.”

전시장에서 보물 1439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5월 4일까지. 02-734-6111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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