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97년 작가 염상섭 출생

  • 입력 2005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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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이년 시대에 박물시험실에서 수염 텁석부리 선생이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가지고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장을….”

냉혈동물에서 어찌 김이?

얼마든지 이리 따져 물을 수도 있을 터이나 이 명백한 오류를 모질게 시비하지 않음은 그것 또한 문학적 특권이기 때문일까.

백설처럼 흰 것이 찔레꽃이건만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이요, 돛대는 다는 것이 아니라 박는 것이지만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가지 않던가.(평론가 김윤식)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이라는 ‘표본실의 청개구리’.

1921년 작품이 발표되자 이인직, 이광수에 이어 ‘1인 문단시대’를 다지던 김동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 외에 문예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 자가 있는가”라고 큰소리치던 그에게 강적이 나타난 것이다.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을 이루었던 횡보 염상섭.

이 다작의 작가는 장편 28편, 단편 129편에 평론 101편을 발표하며 우리 근대문학의 뼈대를 세웠다. 남북을 통틀어 ‘최대의 작가’로 꼽힌다.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생을 마친 횡보의 소설은 순수 고유어의 보고였다. 그는 서울 중산층의 풍속과 의식, 토박이 서울말씨를 창작의 텃밭으로 삼았다. 당대의 삶에 녹아 있던 생활어, 그 감칠맛 나는 우리말의 어감과 묘미를 한껏 살려 내 현대소설의 싹을 틔웠다.

횡보의 문학은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가로지른다. 그의 작품에는 20세기 한국문학이 ‘근대성의 육체’를 획득해 가는 고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일제 치하 오사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했고, 마흔 살 되던 해 만주로 떠나 10년을 떠돌았다. 1948년 신민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그의 현실 인식은 치열했다. “횡보문학의 무서운 동시대성! 이것이 근대문학의 진정한 중심, 횡보에게서 우리가 배울 핵심이다.”(최원식)

재물과 담을 쌓았던 횡보. 그의 살림살이는 마치 물에 씻겨 나간 듯 적막했다. 적빈여세(赤貧如洗)! 그 가난을 달랜 것은 말술이었다. 수제비 한 그릇을 놓고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횡보(橫步)’란 술에 취해 게걸음을 침이 아닌가.

그는 암으로 숨지기 직전에도 부인이 청주를 숟가락에 떠 입에 넣어 주어야 했으니, 당대의 문호는 이렇듯 술내를 풍기며 세상을 떴다….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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