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그녀와 ‘노스탤지어’를 보다

  • 입력 2005년 3월 23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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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8일 오후 1시45분, 서울 종로구 신문로의 예술영화 전용관 씨네큐브. ‘20세기 최고의 영상시인’으로 불리는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보았다. 기자는 28세 직장여성과 함께였다. 자신을 “직장여성의 딱 평균 눈높이를 가진 관객”이라고 주장하는 그녀는 3년 3개월간 사귄 애인과 2003년 가을 안타까운 이별을 한 뒤 매주 1∼2회 빼놓지 않고 영화를 관람해 왔다고 밝혔다. 영화를 본 뒤 결정적 장면 3곳에 대해 우리는 서로의 느낌을 말했다.

①이탈리아로 간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가 종말론자인 도메니코의 집을 방문한다. 지붕이 뚫려 있어 실내에도 비가 쏟아진다.

▽기자=바닥 여기저기 놓인 물병은 정물화처럼 다가오면서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시간과 공간은 모두 죽어버린…. 입구가 좁은 물병으론 어차피 빗물을 받아내지 못한다. 물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티브다. 물병은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찾아 이탈리아로 망명한 뒤 지독한 향수에 시달리는 감독 자신에 대한 은유다. 채워지길 갈망하지만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그녀=좁다란 물병으로 설마 비를 다 받아내려는 건 아니겠지. 분명 뭔가 ‘있어 보이게 하려는’ 장치임에 틀림없다. 맨 바닥은 너무 황량할 테니까…

②종말론자 도메니코는 로마의 광장에서 세상의 종말을 경고한 뒤 분신자살한다.

▽기자=도메니코의 이상은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다. “세계는 경계를 없애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유언은 이국땅에 버려진 감독의 외침에 다름 아니다. 세계가 하나 된다면 지금 이 시간과 공간이 바로 그의 고향일 텐데. 도메니코의 거대담론 속에 감독은 자신의 사적(私的)인 향수를 투사시킨다.

▽그녀=가장 볼만한 장면이다. 분신자살은 뭔가 강렬하고 스펙터클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사람이 왜 자살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세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We are the world’와 똑같은 말 아닌가. 예술영화의 주제론 너무 식상한데…. 주위 사람들이 불타 죽어가는 이 노인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 빨리 살릴 생각은 안 하고.

③안드레이는 도메니코가 남기고 간 양초에 불을 밝힌 뒤 온천의 한 모퉁이까지 옮기기를 시도한다.

▽기자=걸어가다 불은 꺼지고, 또 다시 불을 켜고 걸어가다 또 꺼진다. 겨우 촛불을 옮긴 뒤 시인은 죽는다. 물(水)이 향수에 대한 상징이라면, 불(火)은 희생과 구원의 상징이다. 도메니코는 분신자살을 통해 자신을 희생하고, 같은 시간 시인 안드레이는 촛불을 가까스로 옮긴 뒤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 아, 20세기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

▽그녀=촛불 하나 옮기는데 영화 속에서 무려 10분이 걸렸다. 뭘 표현하려는지 알겠지만 너무 길다. 이건 관객을 위한 장면이 아니라 감독 자신을 위한 장면이다. 카메라는 안드레이만 쫓아다녔다(롱 테이크 기법). 처음 촛불이 꺼질 땐 그러려니 했지만, 두 번째엔 성공할 줄 알았다. 세 번째엔 성공하기로 감독과 배우가 짜고 한 걸까, 아니면 그냥 찍다보니 세 번째에 성공한 걸까. 근데 멀쩡하던 사람이 촛불을 옮긴 뒤 왜 갑작스레 죽지?

#에필로그: 우리는 엄청난 견해차에 놀랐다. 그녀는 “감독에 얽힌 사연을 사전에 공부했더라면 훨씬 덜 지루했을 것”이라며 ‘아는 만큼 보이는’ 예술영화의 묘미에 감탄했다. 한편 기자는 지루한 걸 지루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를 저버린 채 평소 가식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깊이 반성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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