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주말시대]고종 아관파천, 그 역사의 길을 걷다

  • 입력 2004년 6월 24일 17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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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교회

《고통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가슴 아팠던기억을 기꺼이 되살리려는 사람은 드물다. 학창 시절, 대한제국 성립을 전후 한 근세사가 꼭 그랬다. 어떤 심리적 기제가 작용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당시의 사실(史實)은 쉽사리 내 것이 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마음속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일요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을 걸었다. 신문로와 서소문, 태평로에 둘러싸인 정동은 말하자면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그 아픈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공간이다. 한편으로는 개화와 개혁 운동의 진원지로 신식학교와 교회가 모여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미 열강의 공사관과

을사조약의 현장이 있다. 건축사만 놓고 봐도 정동은 근대 서양 건축이 처음으로 도입되던 시기의 모습이 보존된 곳이기도 하다.》

○“아, 조선이여” 舊러시아공사관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싣고 경복궁을 나선다. 행선지는 정동의 러시아공사관. 그 전해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낸 지 4개월 만의 일이다. 역사는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예원학교 옆 골목 난타극장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언덕 위에 우아한 모습의 흰 탑이 나오는데 바로 러시아공사관의 흔적이다. 1890년 준공된 이 건물은 6·25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탑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고종이 약 1년간 이곳에 피신해 있는 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졌고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됐다.

일설에는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덕수궁까지 연결됐다고 하는데 겉으로 봐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탑 아래에 자그마한 정동공원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꽤나 운치가 있어 산책길에 땀을 식히기에도, 연인과 속삭이기에도 좋을 법하다.

○한국최초 감리교회인 정동교회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덕수궁쪽으로 걷다보면 오른편으로 붉은색의 오래된 교회가 하나 나온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다.

1885년 제물포에 도착한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는 정동에 한옥 한 채를 구입해 1887년 첫 예배를 드렸다. 10여년이 지난 후 그 자리에 세운 이 건물은 고종 광무 2년(1898년) 준공됐으니 벌써 100년 넘게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교회의 겉모습은 단순하다. 세월이나 종교 건축물이 주는 중압감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하다.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과 아치형의 하얀 창틀이 잔잔한 감흥을 일으킨다. 서재필 이승만 같은 인사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봤다고 한다. 본래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하면서 양쪽 날개 부분을 넓혔다.



○ 서울시립미술관

정동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언덕을 오르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온다. 1927년 건립된 이 건물은 애당초 경성재판소 건물로 지어졌는데 광복 후에는 그대로 대법원 건물로 사용됐다.

비탈길 오른편으로는 잘 꾸며진 정원과 고목이 근사하다. 법원 건물답게 도로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 권위와 군림을 상징한다. 법정에 섰을 우국지사들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대법원이 1989년 서초동으로 이사한 후 2002년 시립미술관으로 신축하면서 건물 전면부만 그대로 남겼다.

○동양 첫 로마네스크式성공회성당

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광화문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궁궐을 둘러싼 담장의 처마 끝을 감상하며 길을 걷다보면 서울시의회 뒤편으로 우아한 건물이 보인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인 성공회성당이다. 1926년 준공된 이 건물은 동양 최초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붉은 벽돌과 화강암이 이국적인 조화를 이룬다.

아치형 출입구가 있는 건물은 벽체가 두껍고 견고하다. 둥근 창은 크기가 작아 실내가 어둑하다. 겉모습은 중후하면서도 높낮이가 있어 리듬감이 느껴진다. 처마 끝을 처리한 모습이나 창살 문양, 기와 지붕이 이채롭다.

○ 에필로그

이렇게 정동 산책은 끝났다. 강북삼성병원에서 정동 길을 거쳐 세종로사거리까지, 느긋한 마음으로 시작한 오후의 산책길은 꼭 2시간이 걸렸다. 도심이지만 도심을 비켜난 곳, 초여름의 정동은 새소리가 들리고 초록이 우거졌다. 근세사의 아픈 기억을 접어두고 한 번쯤 걸어볼 만하다.

강북삼성병원의 본관 현관으로 쓰이는 양옥 건물이 바로 경교장. 백범 김구 선생이 묵었고 서거한 곳으로 행정구역으로는 종로구 평동이지만 근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정동은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리는 게 가장 가깝지만 서대문역이나 광화문역도 괜찮다.

글=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사진=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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