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입적한 서암 전 조계종 종정

  • 입력 2003년 3월 30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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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입적하시고 나서 대중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거 없고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29일 열반한 서암 스님은 생애 마지막까지 ‘본무생사(本無生死·본래 삶도 죽음도 없다)’를 대중에게 남겼다.

30세 충남 계룡산 나한굴에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오도송(悟道頌)에 대해서도 “오도송인지 육도송인지 그런 거 없다”고 일축했을 만큼 ‘무위’의 삶을 살았다. 속명이 송홍근(宋鴻根)인 스님은 부친의 의병 활동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유랑하며 보내다가 16세 경북 예천 서악사에서 출가했다. 스님은 21세 때 일본으로 유학갔으나 폐결핵 말기 판정을 받고 귀국해 선방에서 정진했다. 특히 1948년부터 2년간 지리산 칠불암에서 스승 금오 스님과 ‘공부하다 죽어도 좋다’고 서약하고 용맹정진한 일화가 유명하다.

스님의 업적은 봉암사를 조계종 최고의 선방으로 만든 것이다. 봉암사는 광복 전 성철 청담 자운 우봉 스님 등 20명이 참여해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결사를 한 곳으로 유명했지만 6·25전쟁 뒤 쇠퇴해갔다. 스님은 78년 이곳 조실을 맡아 낙후된 가람을 중창한 뒤 일반 관광객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엄격한 수행 기풍을 진작해 조계종 종립 선원으로 만들었다.1993년 제8대 종정으로 추대된 스님은 이듬해 종단분규 당시 서의현 전 총무원장을 절차에 따라 물러나게 하는 견해를 피력했으나 개혁회의쪽이 이를 서 원장 비호로 받아들이자 ‘불신받은 종정은 더 이상 필요 없다’며 사임했다.스님은 이후 태백산 자락에 무위정사(無爲精舍)를 짓고 7년간 은둔했다.

스님은 제자의 시봉을 거절했으며 서울 등에 법문하러 갈 때도 통일호 열차를 타는 등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스님은 봉암사 대중의 간청으로 2001년 봉암사 조실로 복귀해 말년을 보냈다.

스님이 즐겨쓴 휘호는 ‘자비무적(慈悲無敵)’. 자비로운 사람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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