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씨 "청년과 할머니의 사랑 만나세요"

  • 입력 2002년 11월 13일 18시 01분


‘19 그리고 80’에서 모드역을 맡은 박정자씨(앞)와 해롤드역의 이종혁씨./이종승기자
‘19 그리고 80’에서 모드역을 맡은 박정자씨(앞)와 해롤드역의 이종혁씨./이종승기자
올해 나이 꼭 예순 하나. 1962년 이화여대 재학 시절 ‘페드라’의 시녀 역으로 연극을 시작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선 지 올해로 꼭 40년.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4막 5장의 인생에서 4막 1장쯤’에 서 있는 셈이다.

‘그녀’라는 여성형보다 ‘그’라는 중성의 표현이 더 어울리는 배우, 박정자를 11일 대학로에서 만났다. 그는 내년 1월 9일부터 무대에 올릴 ‘19 그리고 80’의 준비로 바쁘다. ‘19 그리고 80’은 연출을 맡은 장두이씨와 7년만의 만남이라는 점에서도 연극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장두이씨와는 오랜만인데.

“1994년 ‘11월의 왈츠’ 이후 처음이다. 이번 작품은 어느 연출자보다 장두이씨가 제일 잘 할 것 같아 직접 부탁했다.”

두 사람이 다시 뭉친 ‘19 그리고 80’은 80세 할머니 모드와 19세 청년 해롤드의 사랑을 그렸다.

-모드는 어떤 역인가.

“작은 풀 한포기까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무공해 할머니’다. 해롤드와의 사랑은 남녀보다는 인간과 인간 혹은 생명에 대한 사랑에 가깝다. 이 작품은 각박한 사회에서 꼭 필요한, ‘나눔’에 관한 따뜻한 얘기다”

모드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해롤드는 모드에게 청혼을 결심하지만 모드는 80세 생일을 맞는 날 자살한다.

-삶을 그렇게 마감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며 죽는 것,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15년전 이 작품이 초연될 당시에는 탤런트인 김혜자와 김주승이 남녀 주인공을 맡았다. 이번 공연에서 해롤드는 신인 이종혁(29)이 맡는다.

이날 이종혁은 15분가량 늦었다. 그러자 그는 특유의 저음으로 이날로 두 번째 만나는 까마득한 후배를 조용히, 그러나 매섭게 야단쳤다. 이어지는 질문.

“대본은 읽어봤니?” “앞부분만 조금요….” “앞부분 조금 어디까지?” “….” “네가 좀 게으른가 보구나.”

작품에 관한 한 그는 ‘적당히’를 용납하지 않는다. 후배에게 엄한 것 이상으로 스스로에게는 더욱 엄격하다. 만삭일 때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순간에도 그는 어김없이 무대를 지켰다. 이런 열정과 자세는 그에게 팬클럽까지 거느리게 했다.

1991년 17명의 회원으로 시작된 팬클럽 꽃봉지회의 현재 회원은 232명. 이들은 그가 출연하는 작품 티켓을 4장씩 구매하는 방식으로 11년째 후원해 오고 있다. 회원은 전업 주부가 60%쯤 되지만 전문직은 물론, 정치인과 정치인의 부인들도 적지 않다.

그는 평소 정치와 문화의 교류에 대해 관심이 많다. 공연을 순수하게 후원하는 정치인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정치인들이 문화 현장을 자주 찾고, 관심을 기울여야 제대로된 문화 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접 정치를 할 생각은 없나?

“절대로!! 나에겐 오직 연극뿐이다. 연극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최근 출간된 책, ‘연극 배우 박정자’에 실린 그의 인터뷰 한 대목이 떠올랐다.

-당신은 스무살이다. ‘평생 사랑을 할 수 없다’와 ‘평생 연극을 할 수 없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당신의 선택은?

“물론 연극을 택하겠다. 사랑은 언제나 나를 떠날 준비가 돼있을 테니까.”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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