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섹스&젠더]있는 그대로 사랑?

  • 입력 2002년 10월 24일 16시 28분


(이 글은 18일 낮부터 밤까지 12시간 동안 있었던 일과 그에 따른 의식의 흐름을 기술한 것이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영화관 ‘하이퍼텍 나다’에 갔다. 그곳에서는 ‘뽀삐’라는 제목의, 개를 소재로 한 디지털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상영 시작 20분전. 영화관에 딸린 카페에서 초콜릿 머핀과 아메리칸 커피를 주문했다.

바깥 풍경이 고스란히 내다보이는 카페의 네모난 창문으로 가을 햇볕이 비쳐 들어왔다가 이내 피부 속으로 파고 들었다. 따뜻했다.

‘다열 37번’이라고 적힌 영화표를 들고 입장하니, 좌석 뒷면에 ‘god’라는 작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나, 영화를 보는 나, 영화를 이야기하는 나의 경계를 허문다 해서 ‘나다’라고 이름지어진 이 영화관은 우리시대 문화예술인 147명의 이름을 각 좌석에 새겼다.

영화는 시작됐다.

개를 ‘자식처럼’ 기르는 사람들의 인터뷰 형식을 빌린 영화는 개도 생각을 하는지, 개도 꿈을 꾸는지 관객에게 묻는다. 무엇보다 개가 좋은 이유가 소개된다.

“왜 개를 좋아하냐면, 개들은 사람에게 상처를 안 주는 것 같아요. 전혀 요구도 하지 않고, 마치 해바라기처럼….” (배우 오윤홍)

“아무튼 사람들하고는 쓸데없이 생각이 너무 복잡해져요. 표정관리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진주(개 이름)는 안 그래요. 날 사랑하는지, 필요로 하는지 의심도 하지 않아요. 진주의 습성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배우 서영화)

출연-뽀삐, 두마, 자비, 재키, 점박이, 뽀봉이, 비비….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개들의 이름이 죽 오른다.

‘날 사랑하는지, 필요로 하는지 의심도 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영화관을 나선 이후에도 여배우의 대사는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스타일리시한 카페와 패션상점이 즐비해 서울 청담동에 비견되는 일본 도쿄 오모테산도(表參道)에 지난달 갔을 때, 그곳에는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노란색 루이뷔통 모노그램 가방을 든 여자는 개(치와와)에게 자신의 가방과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혀 한가로이 느티나무 그늘 아래를 걷고 있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는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면서.

오래간만에 동숭동의 중고 비디오테이프 판매 상점에 들러 미국 영화 ‘뉴욕 스토리’ 비디오테이프를 집어들고, 값을 치렀다. 동숭동에 여기저기 붙은 연극 홍보 포스터들을 무심히 지나치는데, 문득 최근 만난 30대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나 아직 한번도 섹스 경험이 없어.”

그녀는 수년간의 외국 유학 후 전문직에 종사하는 자신이 숫처녀라고 고백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했다. “나는 성적 매력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여자”라고 확성기에 대고 떠드는 것과 매한가지라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섹스 경험이 많은 것처럼 아예 거짓말을 해. 내가 어딘가 부족하거나 비정상적인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잖아. 남자와 적당한 긴장도 유지할 수 있고.”

얼마전 만나 타로 버블티를 함께 마신 30대 남자는 말했다.

“주5일 근무제에 따른 부부관계를 ‘섹스 & 젠더’ 칼럼에 다뤄 보세요. 제 경우에는 주중에는 부부가 서로 바쁘니까 주말에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어요. 단, 테크닉이 중요해요. 토요일의 섹스를 ‘코스요리’에 비유한다면, 일요일의 섹스는 ‘일품요리’라고나 할까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뉴욕 스토리’ 비디오를 틀었다. 화질은 나쁘지 않았다.

마틴 스콜세지, 프랜시스 코폴라, 우디 앨런 등 3명의 영화감독이 각각 영화를 만들어 한데 묶은 옴니버스영화다.

첫번째 작품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인생수업’에서 배우 닉 놀테는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과 유사한 화법으로 섹스의 절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유명 화가 역을 연기한다. 그는 그림을 가르쳐준다는 빌미로 여자 제자의 육체를 끊임없이 갈구한다.

그러나 화가를 거부하는 여자 제자는 냉소한다.

“날 진정 사랑한다면 택시 운전사(남자)에게 다가가 키스해보세요.”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증오하는 남자에게조차 여자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날 사랑하는지, 필요로 하는지 의심도 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개를 소재로 한 영화와 루이뷔통 브랜드 옷을 입은 도쿄의 개, 숫처녀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는 여자와 일상의 변화에 섹스를 적응시키고 있는 남자, 영화 ‘뉴욕 스토리’ 중 ‘인생수업’….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 하루의 절반이었다.

kimsunm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