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인화/흥 풍류 그리고 월드컵

  • 입력 2002년 6월 21일 18시 43분


2002년 월드컵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너무 자랑스럽다는 새삼스러운 감격이다. 한국인들은 지금 전국 방방곡곡의 거리와 술집에서 엄청난 열광을 분출하면서도 어떤 불미스러운 사고도 없이 세계적인 축제를 훌륭하게 치러내고 있다.

▼거리응원, 풍류문화의 산물▼

미국전이 있었던 10일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울의 대학로와 세종로, 시청 앞, 신촌 대학가에서 그 비를 맞으면서 유쾌하게 놀았다. 형형색색의 보디페인팅을 하고 북과 장구를 치며 유쾌하게 떠들고 박수치고 노래부르며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으로 시작하는 신해철 작곡의 ‘경기장 속으로’와 크라잉 넛 편곡의 ‘오 필승 코리아’가 빠른 비트의 강렬한 리듬으로 하늘과 땅에 울려 퍼졌다. 이 같은 열기는 포르투갈전, 이탈리아전을 거치며 점점 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이처럼 어떤 악조건 속에도 잘 놀 수 있는 한국인들의 탁월한 유락능력(遊樂能力)은 세계 언론을 감동시키고 우리 자신도 감동시켰다. 아무리 외부적인 환경이 절망스러워도 스스로의 내부에서 명랑(明朗)을 길어올리며 살아온 한국인들. 여럿이 함께 떠들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이어온 한국 문화의 보이지 않는 저력이 월드컵을 계기로 재현되고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증언하듯이 한국인들은 본래 집단적 축제에서 잘 놀 줄 아는, 음주가무(飮酒歌舞)에 능한 민족이다. 이 같은 민족적 특징은 신라시대에 이르러 고유한 신앙의 차원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깊고 미묘한 도(道)가 있으니 이름하여 풍류(風流)다”라고 말한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을 들 수 있다.

풍류를 숭상하는 한국인들은 산과 강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여럿이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자연에 깃든 모든 존재들의 조화로운 살림(화생만물·化生萬物)을 체득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놀이와 예술을 통해 종교에 도달하는 한국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들어 있다. 한반도라는 생활의 터전에는 생존을 위협하는 혹독한 자연환경이 없는 대신, 시시로 다른 미감을 자아내는 뚜렷한 사계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같은 자연 속에 유구한 역사를 보내면서 한국의 풍류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독특한 유산을 물려주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너무 작고 소박한 문화적 조형물들을 보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곧 한국의 나이트 라이프, 즉 밤의 유흥 문화가 갖는 흥겨움에 매혹되곤 한다. 한국의 도시 어디에도, 저녁만 먹으면 갈 곳이 없는 서구적 무력감은 찾아볼 수 없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탄력을 받는 흥청거림과 떠들썩함이 곳곳의 거리를 메우고 있다. 월드컵 한국전이 열리던 날 밤 한국인들은 새벽 5시까지 거리거리에서 고성방가하며 “무슨 짓을 해도 서로 다 용서받는 분위기”를 난생 처음 체험했다. 그것은 한국인이라는 단일민족 특유의 융합적 활력, 즉 ‘흥(興)’이라는 미감의 인상적인 이미지들이었다.

어쩌면 한국의 미래는 월드컵을 계기로 재인식되는 이런 풍류 문명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제조업에서 중국의 맹렬한 추격을 받고 있지만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오락산업에서 현재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을 압도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은 몇 년 전부터 일어난 한류(韓流) 열풍이 당대의 일시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문화 현상이라는 행복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21세기 오락산업 이끌자▼

물질에 대한 욕구는 유한하지만 재미와 의미에 대한 욕구는 무한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울프는 제조업에서 시장의 한계에 부닥친 인류사회는 결국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의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욕구를 창출해가야 한다고 예언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와 가요와 컴퓨터 게임과 디지털 콘텐츠는 21세기의 주력산업이다. 풍류 문명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이코노미’가 우리의 코앞에 와 있는 것이다.

월드컵의 감동은 한국의 풍류문명이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전성기를 꽃피우는 그날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것은 한국의 풍류문명이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환경 속에 찬란하게 꽃피는 감격적인 시대가 될 것이다.

이인화 소설가 이화여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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