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2001 문학뉴웨이브]오수연 '부엌'

  • 입력 2001년 12월 9일 18시 09분


8년 전 ‘현대문학’지의 ‘새로운 작가상’(1994) 심사에 참가한 적이 있다. 오수연씨(37)의 ‘난쟁이 나라의 국경일’이 당선작으로 힘겹게 뽑혔던 것으로 회고된다. 인간의 위엄에 어울리는 그러한 문학이 주류였던 이 나라 문학판이 크게 흔들리는 시점이었다.

역사·사회학적 상상력에서 생물학적 상상력으로 방향전환되는 그러한 고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방황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었다. 후일담계가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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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적 성격을 띤 심도 있는 자기분석이 아무리 깊더라도, 자학적인 요인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던 만큼 거쳐야 될 과정의 의의 외에 새로운 상상력에로 나아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유서와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고 한강에 투신한 83학번 박혜정과 동급생인 작가 오수연씨인지라, 이 후일담계 작품은 그에겐 절실한 그 무엇이었지만, 그의 작품 역시 나아갈 지평이 불투명해 보였다.

인간의 위엄에 어울리는 그러한 문학에 삶의 의의를 건 그들은 그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생물학적 상상력에서 병리학 상상력에로까지 멋대로 나아가버린 오늘의 문단 문학판에 멀미가 난 독자들에게 위의 물음은 김훈의 ‘칼의 노래’를 불러올 만큼 단연 안타까움이자 그리움이다. 이에 대한 8년 만의 새로운 문학적 응답의 하나로 나는 오씨의 연작 장편 ‘부엌’(이룸)을 들겠다.

부엌이란 무엇이겠느뇨. 작가 오씨는 이를 화두로 삼았다. 부엌이란 음식 만드는 장소이자 여인만의 성소(聖所) 공간이 아니겠는가. 부엌이 저절로 세상 속의 중심부로 됨은 이 때문이다. 먼저 작가 오씨가 찾아간 곳이 인도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것은 무슨 명상 나부랭이라든가 관광 따위가 아니라 최소한 지방성을 떠난 진짜 사람살이의 중심부인 세상을 가리킴이다. 인도인도 아프리카인도 동양인도 마구 뒤섞여 있기에 그것은 정말 그러하다.

거기서 산다는 것의 원초적 단위가 ‘부엌’이란 사실은 단연 문학적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채식주의자인 일본인도 육식주의자인 흑인도, 주인공처럼 둘을 겸비한 ‘나’도 같은 부엌을 사용한다는 것. 이 두 남자 틈에 낀 여인의 상황 설정은 그 자체로 사람 사는 얘기이자 우주적이다. ‘부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나는 음식이다’ ‘땅위의 영광’으로 된 연작의 결론격인 중편 ‘땅위의 영광’은 그 때문에 너무도 원초적이어서 투명하기 그지없다.

인간의 위엄이란 무엇이뇨. 다른 문명권에 나를 밀어넣는 방식이란 음식에 있다는 것, 부엌에서 비롯된다는 것, 함께 먹는 일에서 가장 확실해질 수 있다는 것. 이 화두를 떠나면 문명의 충돌에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것. 문명의 충돌이냐 아니냐를 두고 세상이 어지러운 오늘의 시점에서 ‘부엌’의 화두가 새삼 빛나고 있거니와, 게다가 이 작품엔 음식 먹기가 피식자와 가식자의 카니발스런 속죄의식을 통해 성숙된 구원을 암시해 놓고 있기까지 하다.

인도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것. “에싸 라그때 해 끼앞……까 도스뜨카야 자 뚜까 해. 유아 프렌드 초따. 초따 프렌드.”(어린애처럼 자그마한 그 남자가 얼굴이 누런 여자한테 잡혀 먹혔다. 너랑 비슷하게 생긴 동양인 여자가 몸집이 작은 네 친구를 잡아먹었다.)

문명의 충돌은 없다. 다만 부엌이 있을 뿐이다.

김윤식(명지대 석좌교수)

▼오수연은 누구?

△1964년 서울 출생.

△1987년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1988∼1991년 ‘여성신문’ 기자 등 활동

△1994년 장편 ‘난쟁이 나라의 국경일’로 등단, ‘새로운 작가상’ 수상.

△1997년 작품집 ‘빈집’ 출간.

△1997∼1999년 인도에서 생활.

△2001년 연작장편 ‘부엌’ 발표,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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