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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5월 7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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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기자로서 오다가다 ‘TV 스타’를 지켜본 나의 결론이었다. 촉촉한 눈빛과 뭘 해도 요염함이 흘러 넘치는 ‘섹시한 그녀’를 막상 만나니, 늠름하고 씩씩하고 털털한 ‘중성적인 그’였다.
또한 TV에서 아주 권위적인 시어머니만 단골로 연기하는 ‘아줌마같은 그녀’를 만나니, 그 요요한 성적 매력에 여자인 나도 아찔해 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TV 속의 스타의 이미지를 믿지 않았다. 어쨌든 TV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적 매력을 죽이거나 왜곡하는 특성이 있으므로.
그러나 그것은 내가 뭘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게 그 깨우침을 준 것은 바로 배용준이었다. 배용준은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모자랄 것 하나 없는 착한 대학생 역할로 데뷔했다. 정돈된 얼굴과 참신한 이미지로 순식간에 떴다.
나를 그를 별로 눈여겨 보지 않았다. 원래 나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순한 이미지의 연예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사무실 책상에 남편이나 아이 사진을 놓지 않는 이유와 같다. 집에 가면 매일 보는데 사무실 책상에까지 놓을 필요가 없듯이, 내 주변에 널린 ‘평범하고 착한’ 오빠나 아저씨와 똑같은 배우를 굳이 내가 눈여겨 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모름지기 배우라면 예측불허에 일탈적이며 엽기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때 선배 언니가 내게 말했다. “얘, 너 배용준 알지? 차암 매력적이더라.” 40을 넘긴 그 언니는 앤틱을 사랑하고 멋부리길 좋아하고 와인을 벗했다.
“아, 그 어린애? 어디가 그래?” 뚱하게 대답했다.
그 언니는 나를 약간 불쌍하다는 듯이 보며 그래도 한마디를 던졌다. “아직 니가 어려서 모르는구나. 배용준의 허리를 봐. 한번은 몸에 착붙은 옷을 입었는데 허리선이 다비드 조각같더라. 내가 본 남자 탤런트 중에 제일 섹시하더라.”
오호, 역시 도사는 다르구나 했다. 벗은 것도 아니고 티셔츠를 통해 허리선을 투사하는 초능력을 가진, 뭘 아는 여성의 안목에 선발된 배용준이었다. 일본의 여성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남자의 ‘허벅지’를 가장 매력적이라고 보았는데 그 언니는 한 수 위였다.
그간 남자의 우람한 근육질의 팔뚝에서 성적 매력을 느꼈던 무식한 나는 그 뒤 배용준의 허리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배용준이 나왔던 드라마를 눈여겨 보았다. 과연 허리선이 멋졌다. 오랜만에 얼굴을 내미는 <호텔리어>에서 체중조절을 거친 군살하나 없는 그의 허리선을 유심히 관찰하며 미디어적 상상 속에 배용준을 듬뿍 즐긴다.
그러나 그뿐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몇 년전 드라마에서 16메가급 영어 대사도 훌륭히 소화했고 내가 특별히 좋아했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는 냉정과 열정이 교차하는 모호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발전을 보였다. <호텔리어>에서 차가운 시선은 그 어느 배우보다도 지적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배용준은 내게 또 하나의 배신이다. ‘잘생기고 성적매력이 넘치는 남자’는 결코 지적이지 않다는 나의 섣부른 결론을 여지없이 배신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전여옥 <방송인·㈜인류사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