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책]박범신/지독한 소설사랑서 꿰뚫은「삶의 본질」

  • 입력 1999년 7월 16일 19시 53분


어린아이에겐 은혜로운 어머니가 곧 위험일 수 있듯이 예민한 십대에겐책또한위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책은 인간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으므로.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교과서 이외의 책을 거의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다. 헐벗고 피폐한 내 주변 사람들 중 책을 읽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새학기에 들어와서야 교과서 이외에도 세상엔 책이 많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장서(藏書)라야 겨우 오륙백권 될까말까한 시골 중학교의 도서관이 문을 열었던 것이다. 수많은 책들 앞에서 서성거리는 내게 사서선생님이 무심코 집어 빌려준 책 한 권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이야.

바로 김내성선생이 쓴 소설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었다. 내가 최초로 읽어본 교과서 이외의 책이고, 내가 또 최초로 감동해서 운 책이다. 쌍둥이 자매의 운명이 뒤바뀌는 멜로드라마적 이야기였는데, 밤을 꼬박 새우며 읽었고 눈물로 책장을 적시며 읽었다. 세상엔 이처럼 놀라운 세계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야기’라는 눈물나고 신나고 아름답고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걸 그 소설을 통해 극적으로 경험했던 것이다.

나는 변화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맹목적 질주로 책과의 사랑에 빠져들었고, 책을 읽는만큼 나의 생활, 나의 사유로 내면화돼 갔다. 말수 적은 소년이 됐으며 그 대신 놀라운 상상의 세계 속에서 몽환적으로 살았다. 그러나 아무런 길잡이가 없었기 때문에 닥치는대로 읽고 받아들이는 남독(濫讀)이 문제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무절제하고 광포한 그 사랑이 계속됐다.

고등학교 앞엔 책대여소 한 곳이 있었다. 대여소주인은 문학지망가였는데,나의 남독이 안타까웠던지 따로 불러 책 한 권을 선물해주었다. 동아출판사 세계문학전집 중 생 텍쥐페리 편이었다. 나는 ‘인간의 대지’를 읽었다. 스토리에 길들여진 내게 ‘인간의 대지’는 또다른 충격을 주었다. 별 재미도 없어뵈는 여덟개의 에피소드로 짜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은유적이고 시적인 문체 안에 담긴 생 텍쥐페리의 삶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계기로 정음사판 을유문화사판의 세계문학전집을 차례차례 읽었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 마음에 남는 것은 이스마일 카다레가 쓴 ‘부서진 4월’이다. 알바니아 고원에 살고 있는 산악민족의 원형적이고 잔인한 습속을 다룬 그 소설을 읽고 코소보문제를 오히려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소설은 거짓말이라고들 하지만 삶의 본질을 꿰뚫어 이해하는 데 소설만한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점을 ‘부서진 4월’은 상기시켜 주었다.

박범신(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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