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돌기획] 안두희에 「심판」내린 응징자들

  • 입력 1999년 3월 11일 19시 37분


50년대엔 거리를 활보했던 백범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씨는 60년 4·19혁명 직후 ‘백범살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위원장 김창숙·金昌淑)가 결성되면서 ‘도망자’가 된다.

‘법적 시효’로부터는 자유로운 몸이었지만 ‘역사의 시효’를 믿으며 그를 응징하려는 사람들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65년 12월 20대후반의 청년이던 곽태영(郭泰榮·63·백범독서회회장)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고 있던 안씨를 공격한다.

그는 칼로 안씨의 목을 두 군데나 찔렀으나 안씨는 세 차례에 걸친 뇌수술 끝에 극적으로 살아났고 그때부터 ‘심판자’들을 피해 더욱 필사적인 은신에 들어갔다.

민족정기구현회회장인 권중희(權重熙·63)씨는 ‘집요한 응징자’였다.

15세 때 ‘백범일지’를 읽고 백범을 민족혼으로 받아들였다는 그는 80년대초 안씨가 미국이민을 시도하고 있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추적에 나섰다.

권씨는 87년 서울 마포구청앞에서 몽둥이로 안씨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91년 한 차례, 92년 세 차례에 걸쳐 응징을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암살배후에 대한 안씨의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최후의 응징자’는 박기서(朴琦緖·49)씨. 버스운전기사였던 그는 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안씨의 집을 찾아가 이른바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박씨의 집에서는 권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등 백범 관련서적 10여 권이 발견됐다.

〈문 철기자〉full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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