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시나리오 당선작]오화영/「그녀들의 저녁식탁」

  • 입력 1998년 1월 13일 08시 11분


▼ 줄거리 밤거리. 혜리가 미친듯이 달리고 있다. 연신 시계를 확인하며 마라톤 경주자처럼 달린다. 그 시각. 정자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식탁에 앉는다. 타임 오분 전에서… ‘재깍재깍’ 초침이 12에 붙기만을 기다리는 정자.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찰칵. 땀에 젖은 얼굴로 정자 앞에 서는 혜리. 두 사람은 말없이 수저를 든다. 자매에겐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저녁 여덟시. 세상이 두쪽이 나도 그들은 ‘그녀들의 저녁식탁’에 마주앉아야 한다. 정자에겐 혜리를 구속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혜리에겐 얄팍한 죄의식을 표현하는 행위였다. 쇼핑중. 사내 아이가 짓궂게 놀려대자 어린시절,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혜리의 눈꼴신 어리광을 상기하는 정자. 한씨 애좀 봐… 아주 사람 잡아먹겠네. 정자 아빠가 신문을 못보시잖아요. 혜리 바보! 한씨 애교도 못떠는 주제에… 쯔쯧… 꼴을 못봐요. 김사장 음음! 한씨 빨리가서 설거지나 해! 어서!! 간단히 사내아이의 발을 걸어서 넘어뜨린다. 로즈버드 305호. 혜리는 우식과 점심시간의 쇼트타임 밀회를 갖는다. 우식에겐 혜리가 풀리지 않는 암호문과 같은 여자였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가정을 이루고 싶은 우식. 그 시각. 치매상태의 엄마 한씨는 오랜만에 돌아온 그나마의 정신으로 정자에게 죽여 달라며 매달린다. 한씨 …약 줘… 제발…. 정자 난 살인자가 아냐. 엄마.(음산하다) 죽고 싶으면 혼자서 죽어. 날 끌어들이지 말란 말야! 한씨 제발… 약…. 정자 고 이쁜년한테 죽여달라구 해봐. 눈도 깜짝 안하고 베란다밑으로 손가락 하나로 밀어버릴걸! 한씨 아냐! 그럴리가…. 정자 모처럼 제정신이 드셔서 하는 말인데 이쁜년이 엄마가 싫대. 미워 죽겠대. 아니! 죽이고 싶대! 몰랐지? 한씨 …(두려움에 고개를 흔든다) 정자 아직도 여전히 이쁜년이야! 십오년 동안 똥걸레 빨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준 게 누군데? 엄마말대로 정말 싹수가 없군! 한씨 …(두렵다) 정자 난 절대로 엄말 안죽여. 왠지 알어? 한씨 …. 정자 뿌린대로거두는거야.엄마. 엄마는짐승처럼살자격이 있어….(으르렁) ‘엄만 짐승처럼 살 자격이 있어. 고 이쁜년한테 죽여 달래봐….’ 그러나 혜리는 애정을 갈구하는 한씨 앞에서 차라리 자살을 하라며 소리친다. 정자는 수면제 없인 잠들지 못하고 혜리는 젊음이 빠져나가는 얼굴을 보고 절망한다. 어느 날. 정자의 여고 동창인 순이가 한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정자를 찾아온다. 순이는 정자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꿈과 아름다운 시절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기억장치였던 셈인데, 정자는 자신들을 희롱하는 운명을 저주한다. 틈만 있으면 베란다로 뛰어내릴 궁리만 하는 한씨 때문에 온 창문에 열쇠를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달아놨지만 역부족이었다. 베란다로 한씨를 밀며 위협하는 정자, 한씨는 본능적으로 정자에게 매달리고, 정자는 뛰어내리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낀다. ‘우린 짐승이야.’ 한편, 우식은 혜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습적으로 아파트를 방문한다. 잘 생긴 우식을 본 정자는 순간적으로 묘한 감정을 느끼는데. 김우식 하두 집에 오는 걸 반대해서 제가 몰래 찾아왔습니다.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군요. 정자 (독백)생쥐같은 년. 남자나 뒷구멍으로 살살 만나다니. 김우식 언니께서 정말 인상이 좋으시군요. 저혼자 괜한 상상을 했나봅니다. 정자 무슨말을 들으신 거예요? 김우식 통 말을 안해요. 그래서 저혼자 억측을 했죠. 정자 제가 괴물이라도 되는 줄 아셨군요. ‘뺏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혜리와 한씨가 한통속이 돼 자신의 인생을 뺏은 것처럼…. 이후 정자는 도취된 사랑에 빠진다. 혜리와 한씨에겐 낯설기만 한 과잉친절을 베풀고 한씨는 더욱 정자가 무서울 뿐이다. 파마에 홈웨어, 사랑에 관한 비디오까지 섭렵하면서 정자는 그동안 잃어버린 성인 ‘여성’을 되찾는다. 이제 정자는 우식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정자는 우식을 그녀들의 저녁식탁에 초대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정자는 우식에게 과잉친절을 베푼다. 마치 남편이나 되는 것처럼 우식의 모든것을 챙기는 것이다. ‘저건 정상이 아냐.’ 혜리는 위기감을 느낀다. 정자 이거 한번 먹어봐요. 기름기를 쫙 뺐더니 아주 부드러워졌어요. 김우식 정말 맛있군요. 요리 솜씨가 대단하신데요? 혜리 그건 사실이야. 요리 하난 끝내주지. 정자 소스도 듬뿍 묻혀서 먹어요.(듬뿍 따라준다) 김우식 ….(황공스럽다) 정자 어머! 어머! 입에 묻었네….(김우식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는다) 혜리 ….(놀랐다) 김우식 ….(당황스럽다) 정자 한잔 더? 김우식 예….(혜리의 눈치를 살핀다) 혜리 (독백)미쳤어! 정자 (독백)내 남자야! 우식이 돌아간 후에 정자에게 대판 따지는 혜리. 그러나 의외로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정자앞에 혜리는 풀리지 않는 의혹을 느낀다. ‘기회를 줘. 다신 실수하지 않을게.’ 또다시 순이가 멍이 든 얼굴로 정자를 찾아온다. 자살을 결심한 순이를 데리고 한강대교 위에 서는 정자.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리는 가운데 결국 순이는 구두 한짝만을 강물에 떨어뜨린다. ‘아이들을 사랑해….’ 전철 안. 구두 한짝만을 신은 순이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틈에 끼여서 정자는 이를 악문다. 당장 순이의 남편 이사장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이사장을 협박하는데. ‘마누란 샌드백이 아냐!’ 정자 마누란 샌드백이 아냐. 스파링 상대는 더더욱 아니지. 다시 한번 이 주먹을 함부로 사용하면 그땐 각오해….(으르렁) 이사장 …. 정자 니 왼팔 주먹을 찾으려면 온 한강을 다 뒤져야 할거야. 사우스 포라며? 다시 초대받은 우식. 정자는 미래의 제부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춘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우식은 혜리와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자매는 각각 다른 이유로 인해 당황한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혜리는 지난날의 악몽을 떠올린다. 전화로 몇번씩이나 양해를 구하고 또 구했지만, 그날 저녁 회식을 마치고 도착한 집안은 지옥이었다. 쑥밭이 된 거실 한복판에서 한씨는 자신의 오물로 벽에 도배를 하고 있었다. 정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정자의 복수는 확실했다. 그때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미친듯이 흐르고 있었다. 혜리 (독백)불안하다. 이거야 말로 정상이 아니다. 평화는 우리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정자 (독백)최후의 만찬을 즐겨봐. 그래야 지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 수 있잖아? 김우식 라흐마니노프죠? 정자 평소엔 잘 듣지 않지만 특별한 날에는 가끔씩 들어요. 그치? 혜리 ….(놀라는 눈) 순간. 정자가 고의로 열어놓은 문을 박차고 한씨가 광란의 모습을 한 채 식탁으로 돌진한다. 이후, 아수라장이 되고 우식은 말없이 혜리의 곁을 떠난다. ‘언닌, 악마야.’ ‘나한테 감사해. 그 정도밖에 안되는 인간이야.’그런 와중에도 자매의 저녁식사는 한결같이 계속된다. 그러나 최씨가 방문한 그날 이후 마침내 한씨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린다. 혜리는 정자의 짓이라며 미련없이 가방을 꾸린다. 이모의 입을 통해 정자의 출생의 비밀이 벗겨진 후였지만. 모두가 떠난 텅빈 자리에서 오열하는 정자. 이모 (독백)엄마의 첫사랑은 그렇게 떠났어. 자포자기적 심정으로 니 아빠와 결혼했단다. 그땐 그런 일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애를 떼주는 병원도 흔치 않았으니까… 널 구박하는 것으로 니 아빠에 대한 죄의식을 무마시켰어… 정자 그래, 잘먹고 잘살아라. 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한 사람은 또 어디에선가에서 실컷 저주를 퍼붓고 있겠지? 내가 뭘 어쨌는데! 첫사랑이 떠난 게 내 잘못이란 말야!…웃겨….(마신다) 십 오년 동안 헌신하고 봉사한 대가가 바로 이거야! 적어도 엄마라면 딸한테 한마디라도 남겼어야 할 것 아냐! 사랑한다는 말은 기대하지도 않아…흑흑…적어도 안녕이라는 말을 했었어야지… 흑흑흑…다 떠나가 버려…. 생을 견뎌온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종의 심리적인 공황상태를 맞은 정자는 생의 의욕을 잃는다. 단순히 증오 하나만이었을까? 그 숱한 식탁들이 오직 미움과 광기 하나로 차려졌을까?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단순할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마치 환청을 듣듯 힘없이 주방으로 향하는 정자. 그곳엔 에이프런을 두른 혜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바라본다. 따뜻한 커피를 정자에게 타주는 혜리. 커피를 마시며 혜리가 식사준비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자. 혜리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진 마. 정자 …. 혜리 나두 이럴 줄 몰랐어. 정자 그건 나두 마찬가지야. 양손으로 커피잔을 잡고 한모금 마시는 정자. 열심히 상을 차리는 혜리. 정자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떨어진다.-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