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저녁 뉴욕 브로드웨이 63번가 링컨센터.
오후 8시 뮤지컬 「명성황후」개막을 앞두고 「작은 보석상자」라 불리는 뉴욕스테이트극장 입구에 서있던 윤호진씨(극단 에이콤 대표)의 눈가가 벌개지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 사람들…. 이날 아침 뉴욕타임스지에 「정말 볼만한 뮤지컬」이라는 격찬이 나온 뒤 2천8백석 전석 유료 매진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됐다. 이대로 서서 죽어도 괜찮다…』
그가 제 정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지난 15일 밤 우리 뮤지컬 사상 최초로 링컨센터 무대에 선 「명성황후」가 관객 전원의 기립박수를 받기 전까지는.
돈 한푼없이, 『뗏목이라도 타고 미국에 가겠다』며 스스로 만든 작품을 뮤지컬의 본거리 브로드웨이에서 검증을 받겠다던 연출자. 명성황후 시해 1백주기였던 1995년말 친구 이문열씨를 살살 꼬드겨 희곡 「여우사냥」을 쓰게 하고 12억원을 들여 예술의 전당에서 뮤지컬 「명성황후」 초연을 가진 제작자. 뉴욕대에서 공연예술을 공부한지 10년만에, 『우리 뮤지컬이 브로드웨이 어느 작품과 겨뤄도 손색이 없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고집스런 연극인.
1997년 8월24일 폐막되는 10일간의 「명성황후」 뉴욕공연은 윤씨 개인뿐 아니라 우리 연극사에 기록될 만한 획기적 사건이다.
1866년 브로드웨이 최초의 뮤지컬 「흉악한 사기꾼」이 선보인지 1백31년만에, 그리고 우리나라 뮤지컬의 효시라 불리는 「살짜기 옵서예」가 초연된지 31년만에 우리가 만든 우리말 뮤지컬이 사상최초로 브로드웨이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것이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링컨센터를 대관, 12회 공연된 「명성황후」는 작품성과 흥행의 두마리 토끼를 다잡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뉴욕타임스지는 21일 『탁월한 가창력 조명 무대미술 의상으로 관객을 매료시켜 진정한 장관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고 평했다.
일본의 교도통신도 윤대표와 인터뷰를 갖고 『일본인이 잘 모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했다』며 일본공연 계획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처럼 호평이 쏟아지면서 스티븐 메리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프로덕션 5,6개사가 뉴욕 장기공연과 미국순회공연 의사를 타진하고 있으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에비타」의 연출자 해럴드 프린스가 「명성황후」를 「탐색」하고 돌아갔을 만큼 브로드웨이는 지금 「비상」이 걸려 있는 상태다.
흥행에 있어서도 「명성황후」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연 첫날 관객수는 2천5백명. 이어 16, 17일 하루2회 공연에 각각 1천5백명이 든데 이어 19, 20일은 각각 2천명, 그리고 뉴욕타임스지에 공연평이 게재된 이후부터는 전석 매진이 기록됐다(18일 공연없음). 전체 관객수는 2만3천여명으로 예상 수익금은 60만달러(5억4천여만원).
그러나 수지타산을 맞춰보면 「명성황후」는 적자를 면치 못한다.
작품 제작비가 2백만달러(18억원). 여기에는 60여명 배우와 40여명 제작진의 개런티가 포함되지 않았다. 모두 「내가 브로드웨이에 선다」는 꿈에 부풀어 노개런티를 감수했던 것.
그렇지만 링컨센터 대관료 18만달러(1억6천여만원) 현지스태프 인건비 35만달러(3억1천여만원) 오케스트라 비용 13만달러(1억1천여만원) 등 현지비용만 81만달러(7억3천여만원)가 넘어 하루하루 「달러 빚」을 얻어 눈물겹게 메워나가는 형편이다.
사실 이같은 사정은 예견됐던 것이었다. 제작비 가운데 문화체육부가 지원한 1억원과 삼성의 1억원, 대한항공의 50% 항공료 할인, 그리고 두 독지가가 각각 3천만원과 3백만원을 내놓은 것 외에는 모두 빚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제작진은 당당하다.
50년대에 이민왔다는 허리굽은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면서 『한국에서 이렇게 좋은 뮤지컬을 들고 와주어 고맙다』고 했을 만큼 돈으로도 못할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 덕택이다.
『「명성황후」 노래말에 나오듯이 어려울 때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해낸 일이 한국연극 발전에 탄탄한 밑거름이 되리라고 믿으니까요』
한국뮤지컬의 새 역사와 함께 우리 문화상품의 세계화를 이뤄낸 윤대표는 27일 귀국한다. 미국을 놀라게 한 「명성황후」의 명성은 오는 11월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뉴욕〓이규민특파원·김순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