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정년퇴임 앞둔 김윤식교수,102번째 저작 펴내

  • 입력 2001년 7월 30일 18시 19분


김윤식(65) 서울대 교수가 새 책을 냈다는 소식은 사실 대서특필할 뉴스가 되기 힘들다. 젊은 연구자들도 혀를 내두르는 정력적인 연구는 지난해 100권이 넘는 저술을 채우면서 증명된 바 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이 정도로는 성이 안찬다는 듯 최근 102번째 저작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양상 신론'(서울대출판부)을 상재했다. 개인적으로는 정년퇴임을 한 달 앞둔 그가 재임중 발표하는 마지막 저술이란 의미를 갖는다. 또한 27년 재직기간의 대미를 그간 천착해온 한국근대문학 연구에 대한 자기점검이자, 후배 연구자들을 위한 새로운 길트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깊다.

27일 폭염이 기승을 부르던 날에도 김 교수는 27년간 집처럼 드나들었던 서울대 인문관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10년은 넘었을 낡은 선풍기 한 대가 힘겹게 더위를 내쫓는 댓평 남짓한 공간에는 잘 곰삭은 책향이 가득했다. 9월 10일로 예정된 퇴임강의를 끝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듯 집과 도서관으로 분리 수송될 책들이 보따리로 묶여 있었다.

"이번 책은 '한일문학의 관련양상'(일지사·1974년)이란 졸저의 문제의식을 이 시대에 맞게 수정한 책이요. 1970년대는 근대문학을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담론의 시각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말이지. 하지만 21세기 글로벌시대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시선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로 봐야한다는 새로운 연구방향을 보여주려고 했소."

구체적으로 김 교수는 이 책에서 일본어로 쓰여진 한국 근대문학 작품을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통해 20세기적 거대담론을 벗어나고자 한다.

"신소설의 효시인 이인직의 '혈의 누'나 모더니즘시의 선구작인 이상의 '오감도' 등도 처음에는 일어로 창작된거 아시오? 사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일본 이식문학'라고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이같은 우리 근대문학의 아킬레스건은 "일본어로 쓰여졌다고 다 친일문학으로 볼 수 없다"는 김 교수에 주장에 의해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오가며 작품을 써서 '이중언어 글쓰기(bilingual Writing)'의 전형을 보여준 김사량 유진오 이효석 등에서 구체적인 실례를 찾았다. 이들에게 일본어란 '준민족어' 혹은 '인공어'로서 단지 문학을 표현하기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언어의 국적을 따지지 말고 문학 표현을 위한 '기호'로서 바라보자는 것이 내 생각이오. 이런 탈이데올기적인 시각이야말로 21세기 지구촌 시대에 맞는 사고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소. 퇴임 강연할 때는 이런 당부를 후배들에게 남겨주고 싶어요."

퇴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정든 강단을 떠나는 소회를 묻었다. 그는 "살아서 정년을 맞게해준 천지신명과 제 맘대로 공부하게 놔둬 준 선후배와 동료에게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제자들의 안부를 챙기는 살가운 스승이라기보다는 자기 학문에만 몰두해온 묵묵한 연구자에 가까운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평론으로만 보자면 김 교수는 그동안 비판에는 인색했고 반대로 칭찬과 격려에는 후덕했다. 남 싫은 소리 못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런 품성이 웬만한 소설은 모두 섭렵하는 성실함과 합쳐져 많은 작가를 북돋아 주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현재 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작가치고 그의 비평의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지금도 그는 "작가는 내 인생의 스승"이라거나 "내 비평은 작가를 칭찬하기 위한 정교한 기술"이라고 습관처럼 말한다.

하지만 김 교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문학의 미래는 암담하기 그지 없다. "문학이 살아남으려면 꽃도 피우지 않은 채 포자를 만들어서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는 곰팡이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 소설이 오래가려면 골방에서 머리로 쓸게 게 아니라 발바닥으로 써야한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는 최근 소설중에서 치밀한 취재와 발랄한 상상력을 결합한 김연수의 '굳빠이 이상'을 으뜸으로 꼽았다(최근 박상륭씨와 함께 한 동서문학상 심사에서 올해 나온 소설중에서 '진짜'는 이것뿐이라는데 합의했다고 한다). 마르시아스 심, 이혜경, 천운영, 윤성희 같은 젊은 작가들의 가능성에도 기대를 걸고 있었다.

퇴임후 계획을 물었더니 김 교수는 "책 읽고 글쓰는 생활이야 달라질게 뭐 있겠냐"며 희미하게 웃었다. "소설평에만 힘쓰다가 소홀했던 시 공부를 새로 시작해보고 싶어서" 시인 서정주(1914∼2000년)의 평전을 쓰겠다는 계획은 다소 뜻밖이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