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1년 5월 18일 19시 20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감각의 제국 권택영 지음 300쪽 1만원 민음사핏빛을 머금은 장미를 겹겹이 떼어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들이 남기고 간 마지막 종착역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우주만이 들어앉아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속세의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 애 띤 수도승은 끝끝내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남긴 장미의 향기만은 잊을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없음의 행간’으로 스크린을 그물질하는 장미의 이름 같은 책이다. 저자는 프로이트와 라캉을 거쳐 또한 문학과 영화를 넘나들며 우리 곁에 있지만,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기호와 상징의 세계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재차 깨우쳐 준다. 그러면서도 난해한 분석학적 용어의 범람을 피하고 삶 가까이에 분석학을 끌어 앉힌다. 영화의 분석학적 독해를 그 근본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 친절함을 발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저자는 리비도를 삶의 충동으로, ‘타나토스’를 죽음의 충동 같은 쉬운 언어로 번역해 낸다. 그리고 죽음의 충동을 이성을 무너뜨리는 구멍, 문명을 한 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블랙홀로 비유하면서, 우울증이나 파시즘, 미디어와 과소비의 사회적 구조 안에서 죽음의 충동을 읽어 낸다.
그리곤 이 죽음의 충동을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검투와 연관시킨다. 주인공 막시무스의 검투는 관중을 움직이는 최면과 같은 죽음의 충동이 아니라, 죽음의 충동을 승화해 열반에 이르는 구원의 행위, 즉 몸을 파괴하고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 존재론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막시무스가 고향의 밀밭을 스쳐가던 손으로 다시 검투장의 흙을 움켜쥐고 손바닥을 문지르는 행위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이 역시 죽음으로 가는 통로를 삶의 연장으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공동경비구역 JSA’나 ‘러브 레터’같은 인구에 회자된 최신의 영화 텍스트 속에 정신분석학을 적용시킨다.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나오는 핍쇼의 유리창이 대상과의 거리를 두어 사랑을 지키는 칸막이가 되는 것처럼, ‘라캉으로 영화읽기’는 우리와 너무 밀착되어 있어 쉽게 볼 수 없는 영화의 맹점에 유용한 유리 칸막이를 쳐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책은 범람하는 영화 담론의 홍수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의 지층을 형성하는 흔치 않는 영화 독해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
심 영 섭(영화평론가)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