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29)

  • 입력 1997년 1월 30일 20시 09분


짧은 봄에 온 남자 〈11〉 그녀는 다시 아저씨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녀를 데려다준 그날 밤 대문 앞에서 아저씨는 마치 무슨 선서를 하듯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내가 서영이가 못 찾아오는 곳으로 피해야겠는 걸』 그 말이 씨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며칠 후 아침 신문에서 아저씨의 소식을 보았다. 「본사 하석윤 기자 輪死」. 처음엔 신문을 보면서도 신문사가 아닌 아저씨가 자신을 상대로 어떤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짧은 순간 이 장난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심정이었다. 이름만 아니라면 아저씨인지 아닌지도 잘 모를 만큼 젊었을 때의 아저씨 사진이 그 옆에 났다. 사고는 어젯밤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일어났다고 했다. 아저씨는 차를 잡기 위해 거리에 있었으며, 달려온 택시가 아저씨를 덮친 것 같았다. 정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사를 읽다가 왈칵 눈물이 나왔다. 『얘. 너, 왜 그러니?』 엄마의 물음에도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보던 신문을 놓고 욕실로 들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 것도 마시지 못했다. 이제 아저씨가 없다. 이 땅 어디에도. 오후 늦게 병원의 빈소를 찾아갔던 것도 어쩌면 그 일이 장난이 아닐까, 아니 장난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찾아가면 「그런 사람 빈소 여기 없는데요」하고 누군가 말해줄 것만 같았다. 『참, 이 친구 말이야. 이번뿐이 아니야. 전에도 술만 마시면 답답하다고 인도보다는 차도쪽으로 자꾸 들어가는 거야. 자기도 모르게』 『돌아온 지 얼마 됐다고. 그럴 거면 그냥 차라리 거기 있지. 이혼한 마누라 재혼하니까 아이 맡으러 들어온 건데. 공부도 중간에 그만두고』 『그래도 최근엔 얼마나 얼굴이 밝았는데. 그래서 연애를 하냐니까 그런 것 같냐고 빙긋이 웃고 말고』 회사 동료들끼리 빈소 앞에서 그런 말을 주고 받는 걸 들었다. 어느 정도 장난이 아니었다. 빈소 위에 꽃 한송이 올려놓을 때 사진 속의 아저씨가 「영광인 걸. 감동적이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다섯살쯤 된 아저씨 딸의 눈이 참 깊어 보였다. 다시 왈칵 눈물이 났다. 이제 서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저씨는 그해 짧은 봄 너무 늦게 그녀에게로 왔다가 너무 일찍 그녀 곁을 떠났다. 짧은 봄이 가고 있었다. <글:이 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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