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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바느질! 바느질!/가난과 굶주림, 더러움 속에서/나는 두 겹 실로/셔츠와 수의를 꿰매고 있네.”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인 19세기 영국, 수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1970, 80년대 한국 여공들의 고단한 삶을 담은 노래 ‘사계’가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고 한탄했듯, 영국 시인 토머스 후드는 끊임없이 바느질하며 노동에 지쳐 수의를 꿰맬 지경이라는 내용을 담은 ‘셔츠의 노래’를 1843년 익명으로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는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한 땀! 한 땀!’(1876년)을 그렸다. 이 그림은 밀레이의 대표작과 스타일이 매우 다르다. 밀레이는 비극적 죽음을 맞은 햄릿의 연인을 그린 ‘오필리아’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1851∼1852년 그린 ‘오필리아’는 당시 영국 화가들이 시작했던 ‘라파엘 전파 운동’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오필리아’에는 실성해 물에 빠져 익사한 오필리아의 모습이 알록달록한 꽃과 함께 로맨틱하게 그려져 있다.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은 그리스신화나 역사를 그리는 고전주의에 반발해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미술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를 표방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도 라파엘 전파의 대표작이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대체로 두드러진다. 그런데 ‘한 땀! 한 땀!’은 과거가 아닌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밀레이는 라파엘 전파와 거리를 두며 이런 스타일의 그림을 자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평론가들로부터 상업적인 그림 양식에 무릎을 꿇었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이런 풍속화와 초상화를 그리면서 밀레이는 동시대에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화가가 됐다. 비록 밀레이가 ‘셔츠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림 속 바느질하는 여인은 평온하고 낭만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림을 마주하면 전성기 스타일보다 색채는 매우 절제됐지만, 물감을 두껍게 겹겹이 쌓아 올려 붓 터치가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장식적인 느낌이 강하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 전시장에선 비슷한 스타일을 하고 있는 밀레이의 후기 작품 ‘뻐꾹’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두 그림을 통해 19세기 영국의 컬렉터들은 어떤 작품을 좋아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바느질! 바느질! 바느질!/ 가난과 굶주림, 더러움 속에서/ 나는 두 겹 실로 / 셔츠와 수의를 꿰매고 있네.”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인 19세기 영국, 수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1970, 80년대 한국 여공들의 고단한 삶을 담은 노래 ‘사계’가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고 한탄했듯, 영국 시인 토마스 후드는 끊임없이 바느질하며 노동에 지쳐 수의를 꿰맬 지경이라는 내용을 담은 ‘셔츠의 노래’를 1843년 익명으로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는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한 땀! 한 땀!’(1876년)을 그렸다.이 그림은 밀레이의 대표작과 스타일이 매우 다르다. 밀레이는 비극적 죽음을 맞은 햄릿의 연인을 그린 ‘오필리아’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1851~1852년 그린 ‘오필리아’는 당시 영국 화가들이 시작했던 ‘라파엘 전파 운동’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오필리아’에는 실성해 물에 빠져 익사한 오필리아의 모습이 알록달록한 꽃과 함께 로맨틱하게 그려져 있다.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은 그리스 신화나 역사를 그리는 고전주의에 반발해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미술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를 표방했다. 밀레이는 이 밖에도 존 키츠의 시를 모티프로 한 ‘이사벨라’를 그렸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도 라파엘 전파의 대표작이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대체로 두드러진다.그런데 ‘한 땀! 한 땀!’은 과거가 아닌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밀레이는 라파엘 전파와 거리를 두며 이런 스타일의 그림을 자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평론가들로부터 상업적인 그림 양식에 무릎을 꿇었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이런 풍속화와 초상화를 그리면서 밀레이는 동시대에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화가가 됐다.비록 밀레이가 ‘셔츠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림 속 바느질하는 여인은 평온하고 낭만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림을 마주하면 전성기 스타일보다 색채는 매우 절제됐지만, 물감을 두껍게 겹겹이 쌓아 올려 붓 터치가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장식적인 느낌이 강하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 전시장에선 비슷한 스타일을 하고 있는 밀레이의 후기 작품 ‘뻐꾹’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두 그림을 통해 19세기 영국의 컬렉터들은 어떤 작품을 좋아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이 그래픽노블 혹은 만화책에서 ‘파랑’은 무얼 뜻하는 걸까. 책을 짓고 그린 이는 프랑스 만화가 겸 탐사 보도 기자. 1년 동안 난민 구조선에 승선해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을 풀어냈다. 수많은 난민이 새로운 삶을 찾아 건너는 길이자, 동시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의 현장인 ‘지중해’가 배경이다. 푸른 지중해는 아프리카 중동 남아시아 등에서 유럽연합(EU) 국가로 이주하려는 난민 상당수가 이용하는 루트. 한데 2015년 4월 그 바다를 건너려던 난민 구조선 다섯 척이 한꺼번에 난파돼 1200명 이상이 숨졌다. 그해 9월에는 그리스 바닷가에 떠밀려 온 시리아 난민 아이 쿠르디의 사진이 세계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책은 이런 지중해에서 난민을 구하는 구조선 ‘오션 바이킹호’의 일상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션 바이킹호에는 구조대원과 간호사, 의사, 물류 담당자 등이 탑승해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려 힘을 합친다. 바다 위를 떠도는 이 배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난민들을 마주한다. 전쟁과 빈곤, 박해 등 다양한 이유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이들. 그들에게 유럽은 새로운 삶을 꿈꾸고픈 터전이다. 하지만 이들을 구하는 선행들이 구조대원을 행복하게만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는 비판이 따르거나, 내륙에서 구조를 지원하는 사무소는 극우 단체의 테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빚어지는 높은 현실의 벽. 특히 작품의 배경이 된 시기는 팬데믹이 세계를 공포와 불안에 몰아넣던 2020년. 난민 구조를 껄끄럽게 여기던 국가들은 방역 지침을 문제 삼아 구조선을 억류하기 일쑤였다. 저자와 동료들이라고 힘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인류의 존엄과 연대의 가치를 지키려 고군분투한다. 그 현장은 저자의 사실적이면서도 따스한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매일 무전기로 들려오는 구조 요청. 구조된 이들의 희망과 불안.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다양한 갈등. 이를 목도한 저자의 펜 끝에서 푸른 바다는 아름다움과 잔혹함이란 두 얼굴을 드러낸다. 이 책의 큰 매력은 이처럼 예술성과 다큐멘터리적 시선의 오묘한 결합이다. 섬세한 그림 속에서 실제 구조 현장의 긴박함과 참여자로서 저자가 느끼는 내면의 고민이 서로 맞물린다. 이를테면 저자는 구조선 경험을 통해 일상에서도 여러 단상을 느낀다. 아프리카 대륙의 프랑스 영토인 레위니옹섬에 사는 프랑스 시민인 그는, 해수 풀에서 헤엄 치며 깔깔거리는 친구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물에서 건졌던 난민 아이 아이샤를 떠올린다.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2014∼2024년 지중해를 건너다 세상을 떠난 난민은 3만1180명. 숫자로는 막연하게 느껴지던 참담함이, 책에선 저자가 직접 겪은 일화들을 통해 피부로 와닿는다. 누군가에겐 출발일 수도 마지막일 수도 있는 지중해의 ‘파랑’은, 그래서 왠지 더 처연하기도 하다. 책의 끝자락도 잘 살펴봐 주시길. 저자가 오션 바이킹호에서 틈틈이 그린 다양한 인물화와 스케치가 수첩 형태로 실려 있다. 부록으로 오션 바이킹호의 중앙 지중해 항로와 2015년부터 난민 구조 활동을 해온 비정부기구(NGO)인 ‘SOS 메디테라네’의 구조 활동 연표도 수록됐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드라마 ‘오징어 게임’ 복장을 입은 한 한국인 남성 배우가 고대 로마에 가는 영상을 만들어줘.” 지난달 출시된 구글의 인공지능(AI) 영상 생성 플랫폼 ‘Veo3’(비오3). 비오3에 영어로 이 문장을 입력하자, 약 2분 만에 8초짜리 영상이 만들어졌다. 영상엔 고대 로마 시대의 거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배경에 오징어 게임 속 트레이닝복을 입은 한 남성이 등장했다.》영상 속 남성은 거리를 걷다가 자연스러운 한국어 발음으로 “여기 어디예요?”라고 외쳤다. 이윽고 옛 로마의 복장을 한 주변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이게 다 뭐예요? 왜 다들 이상하게 입고 있어요?”라며 궁금한 표정까지 지었다. 입 모양이나 표정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텍스트 한 줄로 음성까지 구현된 완성도 높은 영상이 겨우 몇 분 만에 만들어졌다. 생성형 AI는 과연 어디까지 갈까. 위 사례처럼 벌써 비디오뿐 아니라 영상 속 등장인물들의 대사나 음성, 효과음, 배경음악 등까지도 한 번에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영상 제작 기술이나 지식이 전혀 없는 일반인도 AI 영상 생성 플랫폼을 가지고 ‘고퀄리티’ 영상을 뚝딱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이에 AI 영상 플랫폼이 향후 영화나 드라마, 광고 제작의 판도를 뒤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카메라도 배우도 없이 오디오까지 한 번에 ‘OK’AI 영상 플랫폼인 비오3는 최근 국내외 영상 제작자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AI 영상 생성 플랫폼이 급속히 발전해 왔지만, 다양한 언어 등 오디오까지 통합해 구현한 건 비오3가 처음이다. 특히 비오3는 등장인물이 발화(發話)하는 상황에 맞는 어조, 억양, 높낮이 등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표현해 영상의 맥락을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사가 없는 영상이라도 상황이나 장소에 어울리는 효과음과 소음, 배경음악 등이 주문에 따라 자동으로 삽입된다. 예를 들어, ‘커피숍에서 편안한 음악을 들으며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는 여성의 모습을 감성적인 분위기로 만들어 줘’라는 문장을 입력하면 카메라가 여성 주변을 도는 듯한 동적인 비디오와 함께 어울리는 음악까지 입힌 영상이 만들어진다. 라면을 먹는 ‘1인 먹방’ 영상을 주문하면 면발을 먹는 ‘면치기’ 소리까지 매끄럽게 구현된다. 비오3로 폐쇄회로(CC)TV 화면을 만들어 봤다는 한 누리꾼은 “실제 CCTV 영상을 틀었을 때 나오는 묘한 잡음까지도 담겨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앞서 만들어 본 영상에서도 오징어 게임 복장의 숫자와 한글이 살짝 어색한 점을 빼면, 여느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완성도를 보였다. 현재 유료 구독(첫 달 무료) 형태로 서비스되는 비오3에서 제작 가능한 영상의 길이는 최대 8초. 하지만 비오3와 이미지 생성에 특화된 AI 모델 이마젠(Imagen) 등이 통합 적용된 영상 작업 툴 ‘구글 플로우’에선 생성된 여러 짧은 영상(클립)을 만들어 이어 붙일 수 있다. 평범한 사람도 프로 영화 제작자처럼 긴 영상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구글은 요금제별로 생성 가능한 클립의 개수를 약 10∼125개로 제한하고 있는데, 향후 AI 모델을 업데이트하며 1회 생성 시 가능한 영상의 길이를 늘릴 계획이다. 이 밖에 오픈AI의 Sora(소라)와 Runway(런웨이), Pika(피카), Kling(클링) 등 다른 AI 영상 생성 플랫폼도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등 숏폼 영상 플랫폼에서 인기를 모으는 ‘과거 시간 여행’ 영상도 거의 이런 AI로 생성한 것이다. 현대인이 19세기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떠나 여행 유튜버처럼 행동하는 영상이나 스마트폰을 들고 조선을 방문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라는 반응을 담은 영상 등을 AI는 뚝딱뚝딱 만들고 있다.● AI 영화, 예술 장르로 발돋움실제 영화에서도 AI를 활용한 사례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올해로 29회를 맞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3∼13일)는 지난해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을 신설했다. 올해는 세계 각지에서 출품된 작품 350편 중 11편을 선정해 상영했다. 7일 찾은 영화제 ‘AI 컨퍼런스’에선 관객 200여 명이 객석을 가득 채운 채 다양한 방식으로 AI가 활용된 영화를 관람하고, 창작자들과도 만났다. 이날 연달아 상영된 작품 6편은 각각 전쟁과 종교, 미래 도시 등을 주제로 했는데 표현 방식도 다채로웠다. 일반 단편영화와 구별하기 어려운 작품도 있었지만, 마치 유화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가 연이어 등장하는 그래픽 노블 같은 작품도 있었다. 완성도 면에서도 AI 영화는 일반 영화와 그다지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AI로 영상을 생성한 영화 ‘라스트 드림’은 핵전쟁이 발발해 미사일이 폭발하고 지구 곳곳이 불타는 장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듯한 장면을 웬만한 기존 영화보다 더 실감나게 구현했다. 관객 사이에선 “상상력을 표현한 방식이 신선했다”는 평이 나왔다. 특히 로이 오 감독의 AI 영화 ‘컬러 오브 마이 가든’을 본 영화계 관계자들은 “이젠 AI 영화 속 등장인물이 감성에 호소하는 연기를 보이는 수준”이라고 입을 모았다. 멕시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의 삶을 그린 25분 분량의 이 영화는 주인공의 육체적 장애와 고통스러운 삶, 실연의 아픔 등을 작가의 그림처럼 진한 색채의 화풍으로 스크린에 펼쳐 냈다. 다만 몇몇 영화는 등장인물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거나 신체 움직임이 어색할 때가 있어 영화별로 편차는 있었다. 공세원 부천국제영화제 전문위원은 “AI 영화라고 해서 뭔가 특이하거나 미흡한 구석이 있다는 편견이 있는데, 요즘엔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을 이미 넘어서 하루하루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작비 99% 줄어… 안 쓸 이유가 없다” 김운하 감독은 이 영화제에 AI로 만든 영화 ‘곰팡이’를 출품했다. 김 감독은 원래 영화, 광고업계에서 일하다가 지난해부터 AI 영상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는 AI 영화 제작을 두고 “일반 영화 제작과 비교하면 인건비 포함 제작비가 99%는 줄어든 것 같다”고 했다. 김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완벽하게 멸균된 미래를 배경으로 빵에 피어났던 곰팡이가 사회 구석구석과 사람 몸속으로 퍼지는 모습을 영상으로 그려냈다. 실사 촬영으로는 쉽지 않은 이런 상상의 표현은 “AI라 가능했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유명 영화 감독처럼 많은 제작비를 투입해 고성능 장비를 쓰고, 컴퓨터그래픽(CG)도 잘 구현했다면 제 영화보다 뛰어난 실사 영화가 나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장면을 AI를 통해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AI와 실사 각각의 강점을 살리는 방식으로 활용한다면 앞으로 더 훌륭한 영화들이 나올 겁니다.” 장권호 감독은 미래에 한 휴머노이드가 성당의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한다는 AI 영화 ‘고해성사’를 연출했다. 장 감독은 “처음 AI를 쓸 땐 평생 작업해 온 영화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면서도 “20년 전부터 머릿속에 떠돌던 시나리오를 혼자서 돈도 별로 안 들이고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과감하게 뛰어들었다”고 했다. “성당, 인물 등을 원하는 대로 구현하기 위해 며칠 동안 한 장면을 계속 만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일반 영화였다면 몇 달 걸릴 일을 하루 만에 끝낼 수도 있었죠.”● 저작권·학습 콘텐츠 등 숙제도 많아 하지만 다른 생성형 AI와 마찬가지로, AI 영상 생성 역시 원창작자의 권리 침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미 경제매체 CNBC 등은 구글이 유튜브에 존재하는 방대한 영상을 비오3 등 AI 모델 학습에 활용했다고 보도했다. 구글 관계자는 “전체가 아닌 일부 영상만을 사용했다”고 해명했지만 어떤 영상이 사용됐는지, 원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았는지 등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CNBC는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영 잡지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생성형 AI를 사용한 창작물 제작은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할 위험이 따른다”고 분석했다. AI가 영상 속 인물의 얼굴, 목소리 등을 학습해 활용한다는 점에서 프라이버시(사생활)를 침해할 우려 역시 제기된다. AI 영상 생성이 자리를 잡기 위해선 이 같은 법적·윤리적 문제를 제도적으로 선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공 전문위원은 “영상 생성 AI를 만든 글로벌 기업들은 학습한 콘텐츠의 공개를 꺼리고 있으나, 사실 드러난 데이터는 모두 잠재적 학습의 대상이라고 봐야 한다”며 “원창작자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적극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오렌지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 풀과 꽃들이 화려한 양탄자처럼 깔린 이곳에 투명하고 가벼운 실크 같은, 고급스러운 천을 두른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가장 왼쪽에 있는 남자는 날개가 달린 가죽 샌들을 신고 있고, 그 옆 세 여인은 반투명한 흰색 드레스에 진주 머리 장식, 화려한 목걸이를 달고 춤을 추고 있네요.정중앙에 선 여자가 신은 신발은 지금 신어도 어색하지 않을 디자인입니다. 무려 500여 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그려진 이 그림,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 ‘프리마베라’입니다.유명하지만 수수께끼인 그림‘봄’으로도 불리는 이 작품은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보티첼리의 또 다른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과 함께 걸려 있습니다.두 작품은 1990년대 이후 패션 디자인이나 팝 가수들의 화보 같은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등장했는데요.이를테면 ‘비너스의 탄생’은 가수 레이디 가가의 2013년 앨범 ‘아트팝’ 재킷 사진에, ‘프리마베라’는 비욘세가 쌍둥이를 낳고 찍은 화보에서 패러디했습니다.덕분에 르네상스 걸작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프리마베라’나 ‘비너스의 탄생’을 머릿속에 떠올리죠.그런데 ‘프리마베라’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인 데 반해, 그 그림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완벽히 밝혀진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프리마베라’는 무슨 내용으로 그렸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논쟁적인 그림’으로 꼽힙니다.이 시기 유럽 미술을 생각해 보면 독특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들을 토대로 볼 때, 이때 미술가들은 대부분 교회의 의뢰를 받아 성경의 내용을 주제로 그리거나, 왕족의 요청으로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 인물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그리스 로마 신화적 코드그림 속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요정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먼저 가장 왼쪽에 있는 남자는 신들의 전령사, 머큐리입니다. 날개 달린 샌들, 투구,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머큐리의 표현이죠.그 옆 원을 그리며 춤추는 여자들은 ‘아름다움의 세 여신’(카리테스)이며 중앙에 있는 인물은 큐피드와 함께 있어 비너스로 추정합니다. 비너스의 오른쪽에 있는 두 여자는 더욱 그 정체가 모호한데요.학자들은 고대 로마 시인 오비드의 ‘변신 이야기’를 참고해서, 왼쪽부터 플로라(봄의 여신), 클로리스(님프), 제피로스(서풍신)이라고 추측합니다. ‘변신 이야기’에서 제피로스가 클로리스를 납치해 결혼하고, 그녀가 플로라로 변신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이 인물들을 모두 합쳤을 때 이야기는 미궁으로 빠집니다. 그 이유는 제피로스∙클로리스∙플로라를 제외하면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보기에도 그림을 4등분할 수 있을 정도로 인물들이 조각조각 짜깁기한 듯 독립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신을 그렸지만 세속적인 그림이런 상황에서 ‘프리마베라’를 두고 ‘봄의 도래와 자연의 풍요로움’, ‘육체적 사랑에서 정신적 사랑으로의 승화’ 등 다소 추상적인 해석이 이어졌습니다.그런데 최근 미술사학자들은 신비주의를 걷어내고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을 시도합니다. 그중 흥미로운 건 이 그림이 신을 그렸지만 사실은 아주 세속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는 세속적 모습은 바로 옷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신처럼 표현했지만 입은 옷은 당시 피렌체에서 유행한 패션입니다.일부 연구자들은 중앙의 비너스가 머큐리가 메디치 가문 일원의 초상화라는 주장도 내놓았는데요. 그 단서는 이 작품이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 걸려 있었고, 이 가문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스팔리에라(벽이나 가구를 장식하는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료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정말 이 작품이 스팔리에라라면 그림의 내용은 좀 더 선명해집니다. 결혼을 기념해 아름다운 여신과 풍요로운 봄의 상징을 공간에 맞는 디자인으로 구성해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서로 만날 일 없는 신들의 짜깁기 구성은 어쩌면 ‘결혼사진’처럼 메디치 가문 일원을 그리스 신처럼 표현했거나, 이 그림을 받을 사람이 좋아하는 신들로 골라서 그린 것일지도 모릅니다.보티첼리를 비롯한 피렌체 미술의 깊이 있는 연구로 알려진 레오폴드 에틀링거(1913~1989)는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이 메디치 빌라에 수백 년 동안 감춰져 극소수의 사람만 즐기다가 20세기 들어서야 우피치 미술관에서 공개됐다는 사실을 짚으면서, “두 작품은 10만명이 살던 도시(피렌체)의 극소수 사람들의 취향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설명합니다.즉 두 명작은 ‘15세기 이탈리아’보다는, 15세기 피렌체에서 앞서갔던 몇몇 사람들의 취향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이야기입니다.미스터리로 가득한 보티첼리의 정원. ‘은행업과 직물 무역으로 15~17세기 피렌체에서 번영한 메디치 가문의 취향’을 단서로 다시 한번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부자(父子) 작가인 류경채(1920∼1995)와 류훈(1954∼2013)의 2인전 ‘공(空)-존’이 9일부터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개최됐다. 전시엔 류경채 작가의 추상 회화 15점과 류훈 작가의 조각 24점이 출품됐다. 초기엔 서정적 풍경화를 그렸던 류경채 작가는 1960년대 이후 비구상 회화를 그렸다. 전시장에선 ‘염원 95-2’(1995년), ‘축전 92-5’(1992년), ‘날 82-5’(1982년) 등 후기에 그린 비구상 회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류훈 작가는 인체 조각에서 출발해 그것을 기하학적 형태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공존의 표상’(1998년), ‘공존-꿈’(2013년), ‘공존’(2022년) 등이 전시된다. 다음 달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폭 25cm, 높이 20cm. 생각보다도 더 조그마한 크기인 이 그림은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에서 클로드 모네의 작품 다음으로 관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불꽃이 타오르듯 굽이치는 여성의 빨간 머리카락, 하트 모양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손에 들고 있는 보랏빛 팬지꽃에 화려한 금박을 두른 배경까지. 영국 화가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1828∼1882)가 그린 연인 엘리자베스 시달의 초상화 ‘마음의 여왕’(레지나 코르디움)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시달은 19세기 영국 화가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모델이다. 상점 점원으로 일하던 시달을 1850년 화가 월터 데버럴이 발견하고 처음으로 자기 작품에 그려 넣었다. 이후 시달은 윌리엄 홀먼 헌트, 존 에버렛 밀레이 등 여러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했다. 시달이 모델을 섰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밀레이의 ‘오필리아’.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에서 햄릿의 연인이지만 정신적 학대를 당하고 아버지마저 살해당하는 비극에 휘말린 오필리아는 결국 실성해 배회하다가 실수로 물에 빠져 익사한다. 이 장면을 그리려는 밀레이를 위해, 시달이 몇 시간 동안 물속에서 불편한 자세로 포즈를 취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달은 물을 채운 욕조에 들어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물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램프를 켜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밀레이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 나머지 램프가 꺼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에 시달은 차가운 물속에서 오랜 시간 포즈를 취하다 감기에 걸려 폐렴 증세까지 보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린 밀레이의 ‘오필리아’가 공개되며 시달은 더욱 유명해졌다. 로세티도 그런 시달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로세티와 시달은 연인 관계가 됐지만 10년에 걸친 연애 끝에 시달의 건강이 나빠지고 나서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부부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둘의 집은 늘 어둡고 습기가 가득했으며, 시달은 결혼 생활 2년 만에 숨진 채로 발견된다. 그 옆에는 빈 아편 병이 놓여 있었다. 사인은 사고였지만 극단적 선택이나 다름없는 죽음이었다. 시달이 떠난 뒤 로세티도 술과 마약으로 망가졌다. 10년 뒤 부인과 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직후 기념으로 그린 이 초상화는 관능과 신비, 숭고함이 공존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음의 여왕’이란 제목에는 시달을 향한 로세티의 뒤늦은 속죄와 사랑 고백이 담겼다는 해석이 많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요즘처럼 폭염이 지속되는 날엔 간담을 서늘하게 할 공포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번 여름에는 공포를 다룬 연극 두 편이 연달아 무대에 오른다. 뱀파이어 소녀와 외로운 소년의 잔혹한 사랑을 그린 ‘렛미인’과 오전 2시 22분에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 ‘2시 22분’이다. ‘렛미인’은 장르물로는 드물게 대극장에서 공연을 열고, ‘2시 22분’은 초연 때 반응이 좋아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두 작품은 크게 보면 같은 장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포와 긴장감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 새하얀 눈밭 위 핏빛 공포7월 3일 개막해 8월 1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이는 연극 ‘렛미인’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동명 소설이 원작. 눈 내리는 스웨덴 교외를 배경으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외롭게 살아가는 소년 오스카와 신비롭고 기묘한 분위기의 소녀 일라이가 만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각자 처지는 다르지만 ‘외로움’을 공유하는 오스카와 일라이는 깊은 교감을 나누며 가까워진다. 그런데 둘이 사는 마을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피가 모두 빠진 시신들이 발견되는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관객은 일라이와 그를 보살피는 의문의 남성 하칸이 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렛미인’의 연극 무대가 더 인상적인 점은 뱀파이어의 잔혹함이 바로 눈앞에서 직접 펼쳐진다는 데 있다. 안무가 스티븐 호겟이 배우들의 몸짓을 연출(국내 협력 김준태)했는데, 일라이는 신비로우면서 어딘가 동물적인 몸짓을 선보인다. 그런 그가 살인 장면에서 입에 가득 피를 묻힌 채 포효하는 모습은 소름이 끼친다. 다만 이러한 잔인함은 무대 위 가득한 흰 눈송이, 푸른 조명 가운데 비친 노란 가로등 불빛, 아이슬란드 작곡가 올라퓌르 아르날즈의 몽환적인 음악 등을 통해 묘한 서정성이 더해진다. 뮤지컬 ‘원스’,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로 주목받은 연출가 존 티파니(국내협력 연출 이지영)는 “영화 ‘괴물’과 ‘부산행’처럼 호러 장르가 강한 한국에 맞춰 관객들이 최대한 깜짝 놀라고 겁에 질리도록 연출해 달라고 부탁했다”면서도 “이 연극은 죽음과 불멸을 주제로 다루며, 죽지 않는 삶은 오히려 지극히 외롭고 슬픈 것이 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매일 밤 들리는 의문의 소리‘렛미인’이 북유럽의 서늘한 서정성과 무한한 고독이 가미된 공포라면, 7월 5일 개막한 ‘2시 22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로 관객을 수시로 놀래 주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새집으로 이사 온 제니가 매일 오전 2시 22분에 들리는 정체불명의 소리에 시달리며 시작한다. 제니는 남편 샘의 친구 로렌과 벤을 집으로 초대하는데, 이들에게 매일 들리는 수상한 소리에 대해 털어놓고 함께 오전 2시 22분까지 기다려 달라고 제안한다. 이상한 소리의 정체를 알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네 사람은 ‘세상에 유령이 있느냐’를 두고 팽팽한 토론을 벌인다. 과학을 중시하는 샘, 심리상담가로 감정과 인간관계에 관심이 많은 로렌, 전기 기술자인 벤과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제니는 과학과 감성, 이성과 초자연적 현상 등 서로 다른 가치관을 중심으로 논쟁한다. 이 과정에서 대화가 길어질 만하면 집 밖에서 동물 짖는 소리가 들리거나, 찢어질 듯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커다랗게 들리며 스릴을 조성한다. 또 오전 2시 22분이 가까워질수록 ‘정말 귀신이 등장할까’ 하는 불안과 긴장이 고조된다. 이 작품은 영국 극작가 대니 로빈스가 2021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원작을 황석희 번역가가 번역하고 김태훈이 연출했다. 김태훈 연출가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에 ‘시간’이 더해져 긴장감이 극대화하는 것이 특징”이라며 “때문에 무대 위에 디지털시계를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을 법한 거대한 사이즈로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김 연출가는 또 “등장인물 4명이 급박한 상황에서 바닥을 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등 인간 심리와 관계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8월 1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오렌지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 풀과 꽃들이 화려한 양탄자처럼 깔린 이곳에 투명하고 가벼운 비단 같은, 고급스러운 천을 두른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남성은 날개가 달린 가죽 샌들을 신고 있고, 그 옆 세 여성은 반투명한 흰색 드레스에 진주 머리 장식과 화려한 목걸이를 달고 춤을 추고 있네요. 정중앙에 선 여성이 신은 신발은 지금 신어도 어색하지 않을 디자인입니다. 무려 500여 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그려진 이 그림,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의 작품 ‘프리마베라’입니다.유명하지만 수수께끼인 그림‘봄’으로도 불리는 이 작품은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보티첼리의 또 다른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과 함께 걸려 있습니다. 두 작품은 1990년대 이후 패션 디자인이나 팝 가수들의 화보 같은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등장했는데요. 이를테면 ‘비너스의 탄생’은 가수 레이디 가가의 2013년 앨범 ‘아트팝’ 재킷 사진이, ‘프리마베라’는 비욘세가 쌍둥이를 낳고 찍은 화보에서 패러디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르네상스 걸작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프리마베라’나 ‘비너스의 탄생’을 머릿속에 떠올리죠. 그런데 ‘프리마베라’가 이렇게 유명한 그림인 데 반해,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완벽히 밝혀진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프리마베라’는 그림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논쟁적인 그림’으로 꼽힙니다. 이 시기 유럽 미술을 생각해 보면 더 독특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들을 토대로 볼 때, 이 시기 미술가들은 대부분 교회의 의뢰를 받아 성경의 내용을 주제로 그리거나 왕족의 요청으로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 인물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그리스 로마 신화의 코드 그림 속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요정처럼 표현돼 있습니다. 먼저 가장 왼쪽에 있는 남성은 신들의 전령사, 머큐리(헤르메스)입니다. 날개 달린 샌들, 투구,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머큐리의 표현이죠. 그 옆 원을 그리며 춤추는 여자들은 ‘아름다움의 세 여신’(카리테스)이며 중앙에 있는 인물은 큐피드(에로스)와 함께 있어 비너스(아프로디테)로 추정합니다. 비너스의 오른쪽에 있는 두 여성은 더욱 정체가 모호한데요. 학자들은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참고해서, 왼쪽부터 플로라(봄의 여신), 클로리스(님프), 제피로스(서풍신)라고 추측합니다. ‘변신 이야기’에서 제피로스가 클로리스를 납치해 결혼하고, 그녀가 플로라로 변신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들을 모두 합쳤을 때 이야기는 미궁으로 빠집니다. 그 이유는 제피로스 클로리스 플로라를 제외하면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보기에도 그림을 4등분할 수 있을 정도로 인물들이 조각조각 짜깁기한 듯 독립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신을 그렸지만 세속적인 그림 이런 상황에서 ‘프리마베라’를 두고 ‘봄의 도래와 자연의 풍요로움’, ‘육체적 사랑에서 정신적 사랑으로의 승화’ 등 다소 추상적인 해석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술사학자들은 신비주의를 걷어내고 역사·사회적 맥락에서 해석을 시도합니다. 그중 흥미로운 건 이 그림이 신을 그렸지만 실은 아주 세속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는 세속적 모습은 바로 옷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신처럼 표현됐지만, 입은 옷은 당시 피렌체에서 유행한 패션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중앙의 비너스나 왼쪽의 머큐리가 메디치 가문 일원의 초상화라는 주장도 내놓았는데요. 그 단서는 이 작품이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 걸려 있었고, 이 가문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스팔리에라(벽이나 가구를 장식하는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료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작품이 스팔리에라라면 그림의 내용은 좀 더 선명해집니다. 결혼을 기념해 아름다운 여신과 풍요로운 봄의 상징을 공간에 맞는 디자인으로 구성해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서로 만날 일 없는 신들의 짜깁기 구성은 어쩌면 ‘결혼사진’처럼 메디치 가문 일원을 신처럼 표현했거나, 이 그림을 받을 사람이 좋아하는 신들로 골라서 그린 것일지도 모릅니다.보티첼리를 비롯한 피렌체 미술의 깊이 있는 연구로 알려진 레오폴트 에틀링거(1913∼1989)는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이 메디치 빌라에 수백 년 동안 감춰져 일부 사람만 즐기다가 20세기 들어서야 우피치 미술관에서 공개됐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두 작품은 10만 명이 살던 도시(피렌체)의 극소수 사람들의 취향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두 명작은 ‘15세기 이탈리아’보다, ‘15세기 인구 10만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앞서갔던 ‘몇몇 사람들의 취향’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의견입니다. 미스터리로 가득한 보티첼리의 정원. ‘은행업과 직물 무역으로 15∼17세기 피렌체에서 번영한 메디치 가문의 취향’을 단서로, 다시 한번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초겨울 깊은 산속. 한 작은 산사엔 어린 승려 도념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괴로워하는 도념에게 주지 스님은 수행에 전념하라고 타이르지만, 속세에 대한 호기심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그를 끊임없이 흔든다.배우 지춘성(60)은 26세였던 1991년 연극 ‘동승’(함세덕 원작, 박원근 연출)에서 도념 역을 연기했다. 당시 연극계 스타로 떠오르며 ‘영원한 동승’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로부터 34년이 흐른 지금. 지 배우는 ‘동승’을 바탕으로 재창작된 작품 ‘삼매경’(극본·연출 이철희)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른다.‘삼매경’은 나이 든 배우가 34년 전 자신의 ‘도념’ 연기가 실패라 여기며 살고 있다는 설정. 저승길에서 삼도천으로 뛰어들어 과거와 현재, 연극과 현실이 혼재된 ‘삼매경’을 경험한다는 줄거리다. 지 배우의 연기 인생을 작품의 직접적인 모티브로 삼고 있는 셈이다.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17일)을 열흘 앞둔 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지 배우와 이철희 연출을 만났다.지 배우는 “34년 전 연기했던 순간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며 1991년 ‘동승’이 개막하고 이튿날 무대에 올랐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날은 유독 역할에 격하게 빠져 헤어날 수 없을 만큼 눈물을 흘렸는데, 어느 평론가로부터 ‘얕은 눈물샘에 호소하는 연기는 가짜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죠. 그런데 이번에도 얕은 눈물샘에 호소해야 하나 걱정입니다. 연습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울음이 나고 있거든요.” 과거의 눈물은 연출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며 몰입한 울음이었다면, 현재의 울음은 살아온 세월까지 더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지 배우는 “20대에 처음 ‘동승’을 만났을 땐 혈기로 ‘이건 나밖에 못 할 거야’라고 생각했다”며 “도념이 우는 장면에서 ‘1분 25초에 기승전결을 갖춰 울어달라’는 등 연출의 요청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삼매경’의 연기는 또 다르다. 지 배우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걸리고, 후배들이 걸리고, 그들이 겪어야 할 지난한 세월이 마음에 걸린다”며 “연기를 하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고 했다. 그는 무대 밖에서도 역할에 몰입한 듯 또 눈물을 훔쳤다. 비교적 작은 체구인 지 배우는 10년 전에도 ‘알리바이 연대기’에서 소년 역을 연기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엔 평생 어린아이 몸으로 살아가는 ‘양철북’의 오스카가 자기 같다고 여겼단다. 한때는 콤플렉스라고 여겨 극복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콤플렉스는 사라지고 무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원동력이 된다고 한다. “(극 중 배우처럼) 지금 삼도천에 빠져도 아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저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 석 달째 수도승처럼 연습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연출은 이번 연극이 “‘지춘성 배우가 이 작품(‘동승’)을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극”이라며 “상실을 키워드로 두 가지 이야기를 겹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원작에서 도념이 갖고 있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이죠. ‘삼매경’에서 배우의 상실감은 34년 전 완성하지 못한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상실감이 나란히 전개되다가 나중에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우연이 생깁니다. 그 두 이야기가 만나 완성되는 결말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고만 말씀드릴게요.” 이 연출은 “배우의 마음을 따라가는 여정에서 모두가 ‘나는 나답게 살기 위해 이렇게 뜨거워 본 적이 있었나’라고 되물을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8월 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저는 여러분이 안개나 구름이 자욱한 곳을 비행하는 조종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럴 땐 앞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계기판에 의존해야 하죠.또는 눈보라가 몰아쳐서 온통 흰색만 보이는 곳에서 스키를 탄다고 생각해 보세요.”미국 작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페이스갤러리 서울 개인전 ‘리턴’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이 전시는 ‘글라스워크’ 연작 4점과 신작 ‘웨지워크’ 등 설치 작품 5점과 판화 20점을 소개합니다.전시 개막을 앞두고 11일 한국을 찾은 터렐은 지평선이 사라지고 경계를 알 수 없는 어지러운 공간 속에서, 관객들이 내면에 각자 갖고 있는 ‘빛’을 발견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을 전해드립니다.나의 인식이 세상을 구성한다터렐이 말한 내용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지평선(horizon) 없는 풍경’에 대한 비유였습니다.안개나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조종사, 눈보라로 온통 흰 풍경 속의 스키 타는 사람처럼 관객이 느끼기를 바란다는 것인데요.터렐은 이런 공간에서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세계관을 벗어나 ‘나’의 감각과 주변 관계에 집중하도록 만듭니다.“중성 부력 벨트를 찬 잠수부가 물속에서 어떠한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머물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여기서 잠수부는 땅에 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가 위아래인지를 익숙한 감각으로는 알 수 없고, 공기 방울이 올라가는 방향을 보면서 그것을 구분하게 됩니다.이렇게 ‘지평선을 잃게 되는 경험’은 최근 우리가 자주 보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주 공간에서 무중력 상태가 확실히 그렇고요. 인터넷 공간에서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는 지평선이 없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있죠.”터렐이 말한 ‘지평선을 잃어버린 세상’은 달리 말하면 “나의 인식에 따라 구조가 결정되는” 세상입니다.좀 더 풀어서 설명해 볼까요. 지평선이 있는 세상은 하늘과 땅, 위아래가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이미 결정된 ‘세팅’ 안에서 인간은 하나의 부속품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연역적 사고’로 빗대어 생각해 볼 수도 있겠죠.그런데 지평선이 없는 세상에서는 ‘내’가 중심이 됩니다. 나를 중심으로 나와 관계 맺는 것들, 내가 느끼는 것들이 세상을 구성하게 됩니다. ‘귀납적 사고’로 구성되는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를테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오라클을 만나거나 정신을 집중해서 무언가를 생겨나게 하는 가능성의 공간인 ‘화이트룸’(The Construct)과 같은 것을 터렐은 현실에서 만들어 보려고 한 것입니다.“어떤 사람들은 이 경험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곡예비행을 할 때처럼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곡예비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 감각을 추구하고 즐기게 됩니다.우리는 이런 지평선이 없는 세상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지러워 바닥에 주저앉아야 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긍정적인 감정들을 느끼게 됩니다. 이 전과 후의 차이는, 세상과 삶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깨닫는 것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물질’로서의 빛을 재료로 하다이렇게 지평선을 제거한 무한의 공간에 터렐이 집어넣는 것은 바로 ‘빛’입니다.터렐은 빛이 무언가를 비추는 조명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물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소리를 녹음해서 레코드나 음원 파일로 다시 듣는 것처럼, 터렐은 빛 그 자체를 조각처럼 빚어서 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당신에게 빛은 물리적 재료인지, 철학적 도구인지 묻는 질문에 답)“우선 빛은 물리적인 실체입니다. 광자를 질량을 갖고 있죠. 때로는 파동 현상을 보이지만 빛은 물리적 존재(thing)입니다.하지만 우리는 빛을 덧없고 순간적인 형태로 보는 걸 더 좋아하고 그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독서할 때 책을 비추거나 회화, 조각을 밝히는 등 다른 것을 비추는 데 사용하는 정도였죠.그렇지만 우리는 빛을 먹기도 합니다. 우리의 피부를 통해 자외선이 들어와서 비타민D를 만드니, 빛을 ‘먹는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빛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뇌의 세로토닌 균형이 깨지고 우울증이 생기죠.또 소리처럼 빛 역시 우리에게 감정적인 무언가를 전달합니다. TV 출연자들이 스튜디오에 나오기 전에 휴식과 안정을 취하는 방을 ‘그린 룸’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 빛은 영적인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영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루시드 드림(자각몽)’에서도 ‘빛’에 관한 표현이 쓰이죠.저는 빛을 묘사하기보다 빛 자체를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빛은 나무나 돌처럼 구부릴 수도 없고 점토처럼 형태를 만들거나 금속처럼 용접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빛을 만들어내는 어떤 도구가 필요합니다. 소리를 만들기 위해 바이올린, 트럼펫, 피아노, 하프, 리라 등 다양한 악기가 있는 것처럼요.그래서 1960년대에는 ‘투영’ 시리즈를 만들었고, 이제는 LED 기술이나 컴퓨터로 제어하는 다이오드가 있으니 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오래 살아 운이 좋았습니다.이제 빛을 다루는 여러 도구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물리적 존재로 빛을 보여주는 것은 부족합니다.고속도로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보고 멍해져서 꼼짝 못 하는 사슴을 상상해 보세요. 인간 역시 빛에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저는 빛의 힘이 그런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빛 한 조각 전하고 싶은 예술가질의응답이 오가던 막바지. 터렐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몇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그저 빛 한 조각을 전하고 싶었던 평범한 예술가 한 사람입니다.저는 여러분이 빛 자체를 경험하길 바랍니다. 모든 작품이 성공적이지는 못하지만 그게 인생이죠.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보여드리는 것이고, 단지 제가 보여주고 싶은 건 빛에 대한 사랑, 예술에 대한 사랑입니다.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문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대중음악이나 케이팝부터 클래식 음악가까지 다양한 곳에서 한국인들이 한계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저도 제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래서 한국인들이 정말 멋지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기술과 산업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가운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과 포스텍 총장 등을 지낸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이 한국 사회의 미래와 교육의 역할을 정리한 책을 잇달아 펴냈다.‘젊은이를 위한 미래 엿보기’에서 저자는 산업 문명에서 디지털 문명으로의 전환이 석기 시대가 청동기 시대로 바뀌는 것 같은 변화라고 진단한다.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는데도 돌 다루는 방법을 계속 고집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것이 저자의 문제 의식이다. 영어 교육처럼 인공지능(AI)으로 획기적으로 바뀔 분야에 계속해서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지 되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계적 점수로 학생을 평가하는 경쟁적 교육, 사교육에 유리할 수밖에 없는 주입과 암기 위주의 시험 제도를 지양하고 미래 지향적인 교육을 위한 긴 호흡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문명 전환과 대학교육’은 2023년 개교한 사이버대 태재대를 대학 혁신의 사례로 소개한 책이다. 학생이 자신만의 전공을 설계하도록 하는 등 역량 중심의 교육을 펼치는 이 대학의 철학과 지향점을 여러 공저자가 담았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자연의 장미조차/세허르스의 그림 앞에서는/그저 그림자에 불과하다네. (…) 세허르스는 그림으로 장미에 향기를 불어넣었네.’ 17세기 네덜란드 시인 콘스탄테인 하위헌스(1596∼1687)가 화가 다니엘 세허르스(1590∼1661)의 장미 그림을 극찬하며 남긴 시 구절이다. 세허르스는 플랑드르(현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수사이자 꽃병이 있는 정물화와 탐스러운 화환(garland)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였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에는 그의 그림 ‘꽃병에 꽂힌 꽃’이 전시되고 있다. 해당 그림은 유리병에 꽂힌 각양각색 꽃들의 자태가 담겨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화려한 줄무늬 튤립이다. 빨강과 하양, 보라 등 다양한 색과 무늬를 자랑하는 튤립은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에서 튤립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줄무늬’나 ‘불꽃무늬’가 있는 튤립은 엄청난 고가에 거래됐다. 지금은 튤립 품종 개량이 활발해졌지만, 이때만 해도 무작위로 생겨나는 해당 무늬의 꽃들은 매우 희귀해 인기였다. 요즘 식물 애호가들이 ‘갈라진 잎’이나 무늬가 생기는 식물을 더 높은 값에 사고파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 시기에 줄무늬 튤립을 갖기 위한 사람들의 욕망은 역사적인 대규모 투기와 거품 현상을 낳았다. 바로 1630년대 일어난 ‘튤립 버블’이다. 귀족과 부유층은 앞다투어 줄무늬 튤립을 갖고 싶어 했지만, 꽃은 피우는 데 수년이 걸리니 공급이 부족했다. 이에 아직 피지도 않은 꽃 구근을 미리 계약하는 등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당시 튤립 한 뿌리 가격이 숙련된 장인의 10년 소득이나 집 한 채, 맥주 공장과 맞먹는 정도로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튤립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어음은 부도가 나고 극심한 혼란이 벌어졌다. 이에 당국이 거래를 일시 보류하면서 튤립 버블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렇게 귀했던 줄무늬 튤립을, 실물은 아니더라도 그림으로 감상하려는 듯 세허르스의 정물에는 줄무늬 튤립이 자주 등장한다. 또 이 그림엔 연분홍·노랑 장미, 푸른 아네모네가 조연으로 그려져 있다. 화려한 튤립이 부유함의 상징이었다면, 장미는 사랑을 상징한다. 들풀 같은 아네모네는 인생의 무상함을 뜻한다. 세허르스의 극도로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는 유럽 왕실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과 영국 찰스 1세, 스페인 펠리페 4세,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등이 세허르스의 정물화를 수집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행복과 이상향을 주제로 현대미술 작품 5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기획전 ‘우리들의 낙원’이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13일 개막했다. 조선 산수화를 소재로 한 미디어 작품부터 아파트 단지 속 가족들의 일상을 포착한 사진 연작 등 다양한 작품이 망라됐다. ‘우리들의 낙원’은 옛 서울역 역사 공간을 활용해 가상현실(VR)과 사진, 설치, 영상, 몰입형 미디어 아트 등 한국 현대 작가 21명(팀)의 작품을 소개한다. 가장 큰 전시 공간인 1층 중앙홀에선 겸재 정선(1676∼1759)의 ‘해악전신첩’에 있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의 풍경을 직접 여행하듯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든 영상 ‘금강내산: 허(虛)와 실(實)의 조화’가 대형 스크린으로 상영된다. 1·2등 대합실과 부인 대합실 등 다른 공간에선 문경원·전준호 작가가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축지법과 비행술’, 김기라 작가의 영상 설치 ‘비비디바비디부’ 등이 전시된다. 양정욱 작가의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는 플라스틱 페트병, 나뭇조각, 실, 모터와 조명 등 아날로그 재료만을 사용해 움직이는 설치작이다. 새벽 경비 초소에서 졸고 있던 경비원의 모습을 관찰해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이 밖에 전통 산수화를 레고로 만든 황인기 작가의 작품, 서울 금천구 시흥동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30여 가구의 가족사진을 담은 정연두 작가의 연작 ‘남서울 무지개’ 등도 만날 수 있다. 다음 달 2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행복과 이상향을 주제로 현대미술 작품 5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기획전 ‘우리들의 낙원’이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13일 개막했다. 조선 산수화를 소재로 한 미디어 작품부터 아파트 단지 속 가족들의 일상을 포착한 사진 연작 등 다양한 작품들이 망라됐다.‘우리들의 낙원’은 옛 서울역 역사 공간을 활용해 가상현실(VR)과 사진, 설치, 영상, 몰입형 미디어 아트 등 한국 현대 작가 21명(팀)의 작품을 소개한다. 가장 큰 전시 공간인 1층 중앙홀에선 겸재 정선(1676∼1759)의 ‘해악전신첩’에 있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의 풍경을 직접 여행하듯 컴퓨터그래픽(CG)로 만든 영상 ‘금강내선: 허와 실의 조화’가 대형 스크린으로 상영된다.1∙2등대합실과 부인대합실 등 다른 공간에선 문경원∙전준호 작가가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축지법과 비행술’, 김기라 작가의 영상 설치 ‘비비디바비디부’ 등이 전시된다. 양정욱 작가의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는 플라스틱 페트병, 나뭇조각, 실, 모터와 조명 등 아날로그 재료만을 사용해 움직이는 설치작이다. 새벽 경비 초소에서 졸고 있던 경비원의 모습을 관찰해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이밖에 전통 산수화를 레고로 만든 황인기 작가의 작품, 서울 금천구 시흥동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30여 세대의 가족사진을 담은 정연두 작가의 연작 ‘남서울 무지개’ 등도 만날 수 있다. 다음 달 2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마른 체구와 차분한 성격에 스니커즈 차림으로 출근하는 30대 후반의 기업가와 체스 챔피언 경력이 있는 40대 후반의 게임광 기업가. 이들은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며 우리 일상의 모습까지 바꾸고 있는 기술, 인공지능(AI)의 개발을 주도해 온 ‘두 거물’이다. 전자는 오픈AI의 샘 올트먼, 후자는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AI 시대 패권의 행방과 AI 기술이 가져올 변화를 조망한 책이다. 블룸버그의 기술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실리콘밸리와 혁신 기술, AI와 소셜미디어 정책 분야에서 오래 활동하며 얻은 통찰과 13년간 진행한 자료 조사 및 업계 관계자와의 독점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 분야의 격동적인 변화와 이면에 숨은 인간적 드라마를 생생하게 다뤘다. 책에 따르면 올트먼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리더십과 자기 확신이 강했다. 대학생 때 투자자와 창업가를 연결하는 서비스인 와이콤비네이터를 설립하며 실리콘밸리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고, 이후 AI가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도구이자 유망한 신사업이라고 보고 개발에 뛰어들게 된다. 그는 AI를 통해 인류 모두에게 경제적 풍요를 주고 더 나은 삶을 살게 한다는, 실용적이고 공익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다. 허사비스는 게임 개발자이자 과학자로, 학자로서 ‘지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AI 기술과 마주하게 된다. 다만 허사비스 역시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AI를 활용해 인류나 생명의 기원, 우주의 본질을 밝히고 질병을 치료하는 등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허사비스가 설립한 딥마인드는 ‘윤리적이고 과학 중심’인 조직을 표방했다. 딥마인드는 AI 기술을 상업적으로, 특히 군사적으로 활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최초의 AI 스타트업이었다. 그러나 AI 기술이 점점 현실화할수록 자본과 자원, 즉 빅테크 기업의 도움이 필요했다. 딥마인드는 결국 2014년 구글에 인수됐고 공격적 개발 끝에 ‘알파고’를 탄생시켰다. 올트먼은 2015년 일론 머스크 등 유명 투자자와 함께 비영리조직 ‘오픈AI’를 설립하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 역시 인류를 위한, 안전한 AI를 추구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자금과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머스크는 오픈AI를 테슬라에 흡수해 AI 기술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려 했고, 올트먼은 머스크와 작별하고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막대한 투자를 유치했다. 이 과정에서 당장 세상에 내놓을 AI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탄생한 것이 챗GPT다. 책은 기업의 구조, 의사결정 과정, 투자자와 경영진의 갈등 등을 통해 AI 기술이 실리콘밸리의 기업 논리 아래 어떻게 빅테크 기업의 경영 도구로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허사비스와 올트먼은 모두 고귀한 이상을 품고 AI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결과적으로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거대 기업이 기술을 장악했고, 부(富)가 집중됐다. 이 과정에서 올트먼과 허사비스가 겪은 인간적인 고민을 조명하며 책은 독자에게 “기술 발전은 누가 주도해야 하는가?” “윤리와 상업, 이상과 실제 사이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등의 질문을 던진다. AI를 둘러싼 윤리 문제, 데이터 편향, 안전성 논란은 물론 실업, 가짜 뉴스, 인간과 기계와의 관계 변화 등 사회적 리스크를 조명하며 기술 발전 이면의 권력과 이해관계, 인간의 욕망을 포착한다. 이를 통해 AI가 가져올 미래의 위험과 기회를 균형 있게 조명한 책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제주도립미술관이 마르크 샤갈(1887∼1985)의 원화 300여 점을 선보이는 ‘마르크 샤갈: 20세기 그래픽 아트의 거장, 환상과 색채를 노래하다’전을 24일부터 개최했다. 제주도에서 샤갈의 작품을 전시하는 건 처음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샤갈의 유화, 템페라, 구아슈, 드로잉, 오리지널 판화, 아트북 등을 소개한다. 특히 샤갈이 1592년 작업을 시작해 1961년에 완성한 판화집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전 작품이 공개돼 눈길을 끈다. 총 42점의 컬러 석판화 작품이 수록된 이 판화집은 프랑스의 유명 출판업자 테리아드가 샤갈에게 의뢰한 것이다. 샤갈은 컬러 석판화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평균 25개의 색판을 만들었고, 10년 동안 석판 약 1000장을 제작했다. 그리스신화의 가장 오래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판화집은 계절과 자연, 동물, 사랑의 순수함을 환상적인 색채로 표현했다. 전시는 샤갈의 작품을 6개 주제로 나눠 선보였다. △사랑을 노래하다 △환상의 세계에서 △신에게 다가가다 △파리, 파리, 파리 △빛과 색채 △영원한 이방인 등이다. 또 로버트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설립한 사진가 그룹 ‘매그넘 포토스’의 글로벌 디렉터 안드레아 홀저가 선정한 필리프 할스만의 샤갈 초상 사진 6점도 만날 수 있다. 1940년대 샤갈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 작품을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영화감독 장유록이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유럽 각지의 성당을 찾아 촬영한 미디어 아트 영상도 전시된다. 장 감독은 영국 켄트 지역 올세인츠 교회, 프랑스 메츠 대성당, 알프스 인근 아시시의 성모 대성당, 독일 마인츠의 성 스테판 대성당을 영상에 담았다. 전시 기간 내내 판화 체험 코너도 운영된다. 관람객이 샤갈의 석판화 기법을 스탬프로 간편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 도슨트 프로그램은 수·금·토·일요일에 진행된다. 2층 기획전시실2에는 제주 출신 작가 강태석의 작품도 함께 전시한다. 10월 1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제주도립미술관이 마르크 샤갈(1887~1987)의 원화 300여 점을 선보이는 ‘마르크 샤갈: 20세기 그래픽 아트의 거장, 환상과 색채를 노래하다’ 전을 24일부터 개최했다. 제주도에서 샤갈의 작품을 전시하는 건 처음이다.이번 전시는 샤갈의 유화, 템페라, 과슈, 드로잉, 오리지널 판화, 아트북 등을 소개한다. 특히 샤갈이 1592년 작업을 시작해 1961년에 완성한 판화집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전 작품이 공개돼 눈길을 끈다. 총 42점의 컬러 석판화 작품이 수록된 이 판화집은 프랑스의 유명 출판업자 테리아드가 샤갈에게 의뢰한 것이다. 샤갈은 컬러 석판화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평균 25개의 색판을 만들었고, 10년 동안 석판 약 1000장을 제작했다. 그리스 신화의 가장 오래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판화집은 계절과 자연, 동물, 사랑의 순수함을 환상적인 색채로 표현했다.전시는 샤갈의 작품을 6개 주제로 나눠 선보였다. △사랑을 노래하다 △환상의 세계에서 △신에게 다가가다 △파리, 파리, 파리 △빛과 색채 △영원한 이방인 등이다. 또 로버트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설립한 사진가 그룹 ‘매그넘 포토스’의 글로벌 디렉터 안드레아 호저가 선정한 필립 할스만의 샤갈 초상 사진 6점도 만날 수 있다. 1940년대 샤갈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 작품을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영화감독 장유록이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유럽 각지의 성당을 찾아 촬영한 미디어 아트 영상도 전시된다. 장 감독은 영국 켄트 지역 올세인츠 교회, 프랑스 메츠 대성당, 알프스 인근 아씨의 성모대성당, 독일 마인츠의 성 스테판 대성당을 영상에 담았다.전시 기간 내내 판화 체험 코너도 운영된다. 관람객이 샤갈의 석판화 기법을 스탬프로 간편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 도슨트 프로그램은 수∙금∙토∙일요일에 진행된다. 2층 기획전시실2에는 제주 출신 작가 강태석의 작품도 함께 전시한다. 10월 1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국립현대미술관(MMCA)이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사를 조명하는 상설 전시의 전체 모습이 MMCA 과천에서 공개됐다. 지난달 1일 MMCA 과천은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 I’이 개막하며 1900∼1950년대 미술 작품 145점을 먼저 소개했다. 25일 공개된 ‘한국근현대미술 II’는 1950∼1990년대 작품 110여 점을 전시한다. MMCA가 조명한 20세기 한국 미술은 어떤 작품들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정의되는 걸까.● ‘작가의 방’을 주목하라 미술관의 20세기 소장품 상설전은 2020∼2022년 MMCA 과천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전’을 통해 선보인 적 있다. 당시 전시와 이번 전시에서 먼저 눈에 띄는 차별점은 전시장 중간마다 마련된 ‘작가의 방’이다. 전시장의 다른 곳에는 한 작가의 작품이 1, 2점 전시되는 것과 달리, 작가의 방은 한 작가의 작품을 최소 5점 이상으로 구성했다. 영상 인터뷰나 도록, 의자를 비치해 진짜 하나의 방처럼 공간을 구성했다. 미술관은 ‘방’으로 초대한 작가들을 앞으로 1년마다 교체할 예정이다. 이번 첫 전시에선 오지호, 박래현, 김기창, 이중섭, 김환기, 윤형근이 선택됐다. 이를테면 오지호의 방에는 인상파 화풍으로 한국의 초가집을 담은 ‘남향집’이나 미완성 유작 ‘세네갈의 소년들’ 등 대표작 15점이 소개됐다. 도록을 볼 수 있는 소파도 마련됐다. 상설 전시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인데, 백남준이나 이우환처럼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작가는 왜 ‘작가의 방’ 목록에 오르지 못한 걸까. 이는 미술관의 소장품 규모나 전시 가능 여부 등 현실적인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시대를 보는 눈’ 전시 때는 외부 대여를 받기도 했지만, 이번 전시는 미술관 소장품으로만 구성해 더욱 제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술관 측은 “1년마다 작가의 방이 교체되는 만큼 향후 보완해 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불 ‘스턴바우 No.23’ 첫 공개 또 이번 상설전은 근대 초상화나 조선 명승 유적을 담은 풍경화, 1980년대 한국화, 모더니스트 여성 미술 등 평소에 보기 어려웠던 미술관 소장품들을 전시하기도 했다. 이현주 학예연구사는 “전체적으로 전시는 시대나 사조 흐름을 크게 바탕에 두고 있지만, 주요 사조나 양식사에서 배제되거나 주목하지 못한 부분을 ‘주제’로 들여다보고자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남관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과 최욱경 ‘환희’, 이신자 ‘노이로제’, 황창배 ‘20-1’, 서용선 ‘청계천에서’ 같은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크다. 주요 사조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다. 이불의 ‘스턴바우 No.23’은 올해 초 미술관이 새롭게 소장한 작품이다. 아쉬운 점도 명확하다. 작품들을 전시하는 주제는 시간 순서에 따라 배치됐지만 그 기준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시기는 추상이나 구상 등 그림 속 주제를 조명하고, 어떤 때는 한국화와 유화 등 매체에 초점을 맞췄다. 20세기 한국 미술사를 재구성했다기보단 MMCA 소장품을 시대순으로 분류한 전시에 가깝다. 따라서 명확한 가치를 기준으로 정리된 한국 미술사를 살펴보기보다는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훑어 본다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미술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소장품을 다시 연구하고 돌아보며 분류했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며 “이 과정에서 빠진 작품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비어 있는 것은 적극 소장하려 노력했다. 이불 작품도 그중 하나”라고 했다.과천=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클로드 모네, 파블로 피카소는 물론이고 라파엘 전파와 나비파 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8월 31일까지 이어진다. 이 전시에서 관객의 눈길이 집중되는 작품부터, 놓치기 쉽지만 눈여겨볼 만한 작품을 선별해 매주 지면에 소개한다.》“집에는 동전 한 푼 없고, 냄비에는 오늘 먹을거리조차 없다.”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가 1875년 문학가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 쓴 글이다. 이 무렵 모네는 파리를 떠나 북서쪽 아르장퇴유에서 부인 카미유, 여덟 살 아들 장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가끔 팔리는 그림과 후원자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 모네는 매일 화구를 들고 들판으로 나가 자연 풍경을 그렸다. 이때 모네가 남긴 그림 ‘봄’이 이번 전시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다.● 봄볕과 산들바람을 담은 그림‘봄’을 자세히 보면 점을 찍듯 짧고 빠르게 그린 붓 터치가 그림에 가득하다. 이를테면 오른쪽 아래 꽃나무는 멀리서 보면 나무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콕콕 찍어 넣은 흰 점과 까만 선이 전부다. 만약 당시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면 나뭇가지 뼈대를 그리고 꽃의 형태도 충실히 묘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선을 긋고 점만 찍은 나무라니. 당시 사람들 눈에는 흐리멍덩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에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혹평과 비난을 받았다. 모네는 ‘봄’을 그리기 1년 전인 1874년에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세잔, 시슬리, 모리조와 함께 파리에서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를 연다. 여기에 모네가 출품한 ‘인상, 해돋이’에 대해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이 작품이 인상에 불과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얼마나 마음대로,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 벽지도 이 작품보다는 더 완성도가 있겠다”고 악평했다. 당대 평론가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인상’이란 이런 것이다. 모네가 점과 선으로 그린 나무는 ‘봄꽃이 어떤 구조와 형태를 지니고 있는지’가 아니라 ‘봄볕을 만난 꽃이 반짝이는 모습이 어떻게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지’를 보여준다. 또 봄이 오면 들판 위로 부는 ‘산들바람’이 주는 선선하고 따스한 느낌을, 모네는 구불구불하게 그린 파란 선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림 좌측에 멀리 있는 나무는 더 흐리고 간략하게 묘사했는데, 실제로 우리들의 눈이 멀리 있는 것은 흐릿하게 인식한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모네는 1871년부터 1878년까지 아르장퇴유에 머물며 그림 180여 점을 그렸다. 아르장퇴유로 이주한 초기에는 작품을 대량으로 판매해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1874년부터 어려움을 겪었고 이 지역에 도시화가 진행돼 자연 풍경이 사라지면서 결국 아르장퇴유를 떠나게 된다.● 로댕존에서 강의형 도슨트 운영‘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은 평일마다 매일 3차례 무료 도슨트를 운영한다. 참가 인원이 많아지면 1층과 지하 1층 전시장 사이에 있는 계단식 공간인 ‘로댕존’에서 강의형 도슨트를 진행한다. 관객은 앉은 상태에서 프로젝터를 통해 작품 슬라이드를 보며 설명을 듣고, 작품 감상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전시 관계자는 “사람이 많아지면 작품이 잘 안 보이는데 서 있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 2주 전부터 강의형 도슨트를 진행했다. 관객의 반응이 좋아 확대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