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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인 젊은 연인이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다정한 모습이다. 서로에게 무어라 속삭이고 있을까. 달콤한 말일까, 아니면 염려 섞인 말일까. 그렇게 상상하던 찰나, 그들은 내게 뒷모습을 들켜버렸다. 앞에선 보이지 않던 손짓들이 그들의 등 뒤에 얽혀 있었다. 잡아 세우는 남자와 벗어나려는 여자. 혹은 막아서는 남자와 나아가려는 여자.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를 관계의 또 다른 장면이 등 뒤에 있었다.뒷모습은 생의 살코기 같다. 가장 붉고, 가장 연약한 부위. 가지런히 정돈된 앞모습에 ‘보여주려는 힘’이 있다면, 뒷모습에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이는’, 혹은 ‘들켜버리는 힘’이 있다. 인간의 급소는 실은 뒷모습에 있다는 생각이다. 시인 이규리는 ‘뒷모습’이란 시에서 “뒷모습은 남의 것”이라 말했다. 뒷모습은 분명 내 것이지만, 정작 나는 보지 못하는 삶의 또 다른 단면이기에 그렇다.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론 뮤익’ 전시를 보며, 나는 마치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나의 뒷모습을 들켜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빚은 인물상들은 모두 각자의 뒷모습을 갖고 있다. 단지 입체적인 조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조각들은 마치 자신이 통제하지 못한 삶의 단면 하나를 등에 달고 있는 듯하다. 골똘한 생각에 잠긴 인물의 얼굴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듯하지만, 그 뒷모습은 다르다. 삶의 무게와 허무, 긴장을 이고 있는 몸. 생생한 삶의 단면 하나가 그곳에 있다.론 뮤익의 대표작 ‘마스크Ⅱ’의 뒷면은 텅 비어 있다. 작가 자신의 얼굴을 본뜬 이 조각은 정면에서는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남자의 얼굴이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그런 인상을 더한다. 그러나 그 얼굴의 뒤는 아무것도 없다. 뒤통수가 없는 납작한 얼굴. 문득 생각한다. 내 얼굴의 뒷면도 그렇게 텅 비어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얼굴에 관해 가장 들키기 싫은 진실은 이것인지 모른다. 타인에게 내보이는 낯짝의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나뭇가지를 든 여인’과 ‘치킨/맨’은 또 어떤가. 제 몸보다 큰 나뭇가지를 이고 선 여인의 등에는 삶의 구김살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식탁 위, 자신을 노려보는 닭과 눈싸움을 벌이는 노인의 등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굽은 등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 곤두세운 근육들. 이들의 뒷모습을 지배하는 건 다름 아닌 안간힘이다. 버텨내는 힘, 짊어지는 힘, 벗어나려는 힘, 붙드는 힘. 삶이라는 일순간의 압력에 저항하는 가장 인간적인 자세.인간이 타인에게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진실이란 실은 누구나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뒷모습을 갖고 있다는 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누구나 들키고 싶지 않은 붉은 살코기 한 점을 등에 매단 채 살아가니까. “기름 냄새 피울 저 쓸쓸한 부위는 나에게도 있”으니까. 누군가에게 내 뒷모습이 들켜도 혹은 내가 누군가의 뒤를 봐버려도 괜찮다. 우리는 모두 가장 연약한 단면으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으니 말이다.“누군가 내 뒷모습 본다면역시 분홍색으로 읽을 것이다”― 시인 이규리의 시 ‘뒷모습’ 중나는 이 시구를 이렇게 뒤집어 읽어본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면, 나 역시 그것을 분홍색으로 읽어줄 것이다. 분홍색은 갓 태어난 아기의 온몸에 흐르는 혈색 같은 것. 이제 막 세상에 내던져진 핏덩이의 연약한 살색으로 타인의 뒷모습을 바라봐줄 것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3주 전 주말, 청첩장 모임에 가려 서울 지하철 1·5호선 신길역 환승 구간을 지날 때였다. 그날따라 두 다리를 좀 움직이게 하고 싶었던 나는 에스컬레이터 대신 기나긴 계단을 내려가기로 했고. 동굴같이 깊은 계단참으로 발을 내딛으려다가 오른쪽 기둥에, 우연히, 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팻말 하나를 보게 됐다. “이 엘리베이터는 2017.10.20. 휠체어 이용 장애인(故 한경덕 님) 신길역 리프트 사고를 계기로 교통약자 이용 편의를 위하여 설치되었습니다.”나는 이 팻말 앞에서 내가 내려가야 할 계단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내가 만약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면 아득하게 느껴질 높이였다. 몇 해 전 읽었던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김영사) 속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이 세상은 누구를 위해 설계되었는가?” 이 책은 ‘정상성’의 범주 바깥으로 밀려난 장애인들이 이 세상에 자기 몸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 맞게 이 세상을 바꿔나간 실제 사례를 다룬다. 일례로 이 책에 소개된 저신장 장애인이자 현대미술 큐레이터인 어맨다는 150cm 이상인 정상인들 기준에 맞게 설계된 강연대에 제 몸을 맞추지 않았다. 키 높이 상자를 깔고 강연대에 올라서는 방식 대신 제 몸에 맞는 강연대를 개발했다. 이제 그녀에게 강단은 더는 장벽이 아니며, 그녀가 발명한 ‘접이식 강연대’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강연을 펼칠 수 있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잃어버린 신체를 대체하는 재활 공학의 필요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긍정한다는 데 있다. 더 가볍고 편리한 의수와 의족이 개발돼 ‘온전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고 지적한다. 팔다리가 모두 절단된 신디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녀에겐 최신 기술을 접목한 의수가 있지만, 일상에선 사용하기 번거로워 그녀는 이를 “다스베이더의 팔”이라 부른다고 한다. 팔다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집이 장벽이다. 세면대, 서랍장, 침대 등 가구의 높이가 ‘몸의 정상성’을 가정하고 설계됐기 때문이다. 그 모든 부엌 서랍 하나를 열 때마다 일일이 의수를 조립할 수는 없는 노릇. 그 무거운 ‘다스베이더의 팔’을 장롱에 집어넣으며, 신디는 자기만의 방식을 터득해 냈다. 집 안 서랍장마다 케이블 타이를 걸어놓은 것. 서랍장 손잡이, 립스틱을 넣은 가방의 지퍼 손잡이 곳곳에 케이블 타이를 입으로 잡아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번거롭게 의수를 조립할 필요 없이 순식간에 일상의 일들을 처리할 수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번거롭고 몸을 느려지게 할 뿐인 ‘정상’ 기능을 복원하는 대신, 지금 몸 그대로도 서랍을 열 수 있는 바람직한 확장”이라고 했다. 몸의 온전성을 ‘회복(또는 복원)’하지 않고도 온전해질 수 있을까. 문득 어느 기사에서 보았던 우크라이나 상이군인의 사진이 떠올랐다. 살아남았지만 팔다리가 절단된 그를, 그의 아내가 껴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절단된 몸으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의 자선단체 ‘리섹스(Resex)’는 상이군인들을 대상으로 성생활 재활을 돕는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절단된 몸 위에 새로운 장비를 입히는 데 있지 않다. 바뀐 몸을 그 자신과 파트너가 함께 인식하는 것이 ‘리섹스(Resex)’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전과 같을 수 없는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작년 2월에 본 또 다른 기사에선 부상 복귀한 우크라이나 상이군인이 댄스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자신의 결핍을 그대로 껴안은 채 이 세상과 춤추는 법을 터득한 그 상이군인은 “춤을 출 때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 재건일 테고. 무너진 건물과 도시를 다시 세우는 것만큼 팔다리가 절단된 우크라이나 상이군인들의 일상을 다시 세우는 것도 먼저일 것이다. 의수와 의족의 개발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절단된 몸을 끌어안는 사회로 변화하는 것이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절단된 몸으로 밥 짓고, 춤추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재건하는 필요조건일 것이므로.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얼떨결에 화분 하나를 들였다. 옆자리 동료가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기며 내게 남겨준 것이다. 본의 아닌 ‘식집사’ 노릇이 영 서툴러서일까. 처음 맡겨졌을 땐 다섯 개였던 잎이 자꾸만 하엽 지더니 이젠 두 잎만 간신히 남아 있다. 사무실에서 볕을 못 쬐어 그런가 싶어 창가 앞에도 내놔 보고, 화분 속 흙이 흠뻑 젖을 때까지 물도 줘봤지만, 남은 이파리마저 시들하다.한 뼘도 안 되는 조그마한 화분이 왜 이리 신경 쓰이는지. 설 연휴가 끝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화분의 안부를 물었다. 화분을 돌보는 건 분명 나인데, 도리어 화분이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왜 너만 물 마시고 나는 물 안 주냐고, 왜 너만 볕 쬐고 나는 사무실 속에 가둬놓냐고 따져 묻는 듯하다.안희연 시인의 시집 ‘당근밭 걷기’(문학동네)에 수록된 ‘자귀’라는 시에는 한 식물(자귀나무)과 함께 1년을 건너온 시인의 경험이 담겨 있다. 시인에게 하나의 식물을 내 삶의 안쪽으로 들이는 일이란 “한 존재를 안다고 말하기까지/매일매일 건너왔고//건너왔다는 건 두 번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자귀나무와 매일매일의 시간을 함께 건너온 시인은 자신이 이 식물을 돌보았듯, 식물 역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기에 이른다. 내가 볼 때너도 보았겠지‘자귀’ 중에서서로를 지켜본다는 것은 단순히 본다는 것의 의미를 뛰어넘는다. 서로의 목격자가 되어 이 작은 생물의 생사에 나를 연루시키고, 나와 전혀 무관한 한 생명을 내 삶의 안쪽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이 시의 가장 마지막 연은 그래서 아프다. 멀리서 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겪고 있다잎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귀가 아프다‘자귀’ 중에서무언가(혹은 누군가)를 오랜 시간 지켜본다는 것은 겨울마다 이파리가 떨어지는 것 같은 당연한 아픔조차 함께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원작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역시 아주 사소한 목격에서 비롯된다. 다섯 딸을 둔 가장 펄롱(킬리언 머피)은 석탄, 토탄, 무연탄, 분탄, 장작을 팔아 근근이 살아간다. 여느 때처럼 동네 수녀원에 석탄을 나르던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 석탄 창고에 갇힌 한 소녀를 목격한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그가 소녀를 봤을 때 소녀도 그를 보았다. 수녀원으로부터 학대받은 흔적이 역력한 소녀와 마주친 그날 이후, 펄롱은 그 소녀도 나를 보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이 컴컴한 창고에 나를 홀로 내버려둔 채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거냐고 따져 묻는 것만 같은 시선이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낼 때도 그는 마냥 행복하지 않다. 창고에 두고 온 그 소녀가 자꾸만 생각나서다. 외면할 수 없는 소녀의 시선이 그의 발길을 자꾸만 멈춰 세운다. 아내까지 더해 일곱 식구가 먹고살기도 빠듯한 형편이건만 그의 발걸음은 수녀원으로 향한다. 어두컴컴한 석탄 창고에 갇혀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소녀를 구출한다. 마침내 펄롱은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이 소녀를 자기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멀리서 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함께 겪고 있다.” 이게 다, 외면할 수 없는 그 시선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늘 사무실에 놓은 화분을 집으로 가져와야겠다. 따뜻한 창가 자리에 화분을 놓고, 오래도록 볕을 쬐게 해줄 생각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출퇴근길 오며 가며 담배를 태우는 한 남자를 본 기억은 있다. 그뿐이다. 이름을 묻진 않았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와도 애써 외면해 왔다. 흉흉한 세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는 나와는 무관한 남이니까. 인파 속에서 만난다면 모르고 지나칠 딱 그 정도의 사이가 편했다. 내 얘기처럼 써놓았지만 실은 남의 얘기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2021년) 속 주인공 진아는 제 곁에 다가오려는 모든 이들과 애써 거리를 둔다. 두 귀엔 이어폰을 꽂고, 고개는 땅바닥을 향한 채 집 문밖을 나선다. 그 모습이 꼭 “내게 말 걸지 말라”는 암묵적인 신호 같다. ‘타인과 거리 두기’는 진아가 카드사 고객 상담원으로 늘 1등 실적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진아는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고객들의 말에 온 마음을 다하는 대신 ‘유체이탈’을 한다. “미래로 시간 이동하는 기술을 개발했다”라는 둥 “미래에서 쓸 수 있는 카드가 있냐”는 둥 헛소리를 내뱉는 고객에게 진아는 감정 한 톨 섞지 않고 이렇게 답한다. “네, 미래로 이동하는 기술을 개발하셨군요. 그런데 아직 미래에서 쓸 수 있는 카드는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고객님.” 그런데 1인분의 삶조차 버거워 애써 외면한 ‘옆집’의 존재가 자꾸만 거슬리기 시작한다. 옆집에서 새어 나오던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실은 옆집 남자가 죽어 부패한 데서 비롯된 냄새였단 걸 알게 된 뒤부터. 늘 지나쳐오던 것처럼 내 갈 길 가면 그뿐인데, 진아는 텅 비어 버린 옆집 앞에서 자꾸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어렴풋이 그 남자의 옆얼굴을 그려본다. 그러다 가물가물한 기억 끝에서, 어느 날엔가 옆집에서 ‘쿵’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던 새벽을 떠올린다. 옆집 남자는 그날 죽었을까. 그날의 ‘쿵’ 소리를 모르는 체하지 않았다면 살았을까. 부재함으로써 옆집의 존재가 드러난 그날 이후, 진아는 자꾸만 자기 너머의 세계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옆자리에 앉은 신입 상담원 수진이 눈에 띈다. 수진에게 쏟아지는 고객들의 폭언이 거슬린다. 그 폭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는 수진의 입술과 체념하는 두 눈을 바라본다. 수진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날부터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일이라 애써 모른 척해보려 해도 앳된 그 얼굴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진아는 이제 헤드셋 너머 고객의 폭언에 더는 유체이탈로 응대할 수가 없다. 그토록 거리 두려 했던 ‘타인의 고통’이 진아에게 옮아서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타인이라는 세계가 열린 밤, 진아는 밤새 뒤척인다. 옆자리 수진의 안부가 궁금해서. 그가 무탈하길 바라는 마음이 내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더 커져서. ‘거리 두기’라는 삶의 철칙을 깨버리고 타인의 삶에 끼어든다. 고객들의 전화만 받아봤던 진아가 수진에게 전화를 건다. 휴대전화 너머 수진의 안부를 확인하곤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그간 못다 전한 진심을 터놓는다. “근데 저 사실 혼자 밥 못 먹는 거 같아요. 혼자 잠도 못 자고, 버스도 못 타고, 혼자 담배도 못 피우고…. 사실 저 혼자 아무것도 못 해요. 그런 척하는 거예요.”유치원생 때부터 “혼자서도 잘하기”를 교육받는 세상에서, ‘혼자로는 모자람’을 고백하는 다 큰 성인의 이 한마디가 내 마음을 관통한 이유는 뭘까.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그들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됐기 때문일까. 옆집 남자가 홀로 맞이한 죽음은 언젠가 내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옆자리 신입 직원이 겪은 폭언은 머지않아 내게도 닿게 될 일이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혼자 겪는 일이 아니었다. 어떤 사건이 들이닥쳤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건, 목격자이자 보호자인 타인이 내게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나에게서 타인에게로 향하는 이 영화의 결말이 비단 영화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벌어진 무안공항의 합동분향소에는 새해 첫날부터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공항 안 카페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유가족과 봉사활동가들을 위해 ‘커피 200잔 선결제’를 해뒀다고 한다. 안유성 명장을 비롯한 셰프들은 유가족들에게 따듯한 전복죽 1000그릇을 대접했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르지만 홀로 남겨진 슬픔을 알기에.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유족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한 일일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서 견뎌지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성장하는 자네를 보러 온다네.”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 中일본 시골 출신 고교생 다이(大)에게 ‘재즈’는 심장을 펄펄 끓어오르게 만드는 100℃의 온도 같다. 다이에겐 이름에 걸맞은 큰 꿈이 있다. 세계 최고의 색소폰 연주자가 되는 것이다. 밤마다 아무도 없는 강가에 나가 홀로 색소폰을 연마하던 소년은 일본 최고의 재즈 클럽 무대에 오르기 위해 무작정 도쿄로 향한다. 그곳에서 또래 천재 피아니스트 ‘유키노리’와 초보 드러머 ‘슌지’를 만난다. 자기 자신보다 재즈를 더 사랑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돈 한 푼 없다는 거다. 그리하여 연습실 빌릴 돈은 한 푼도 없지만, 포부는 세계 최고에 버금가는 10대 재즈 밴드 ‘JASS’가 탄생한다.일본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는 저 녀석들의 무모한 여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생의 박동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제 몸집보다 더 큰 꿈을 꾸었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훌쩍 자라 그 꿈을 제 것으로 만들 땐 짜릿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돈 한 푼 없는 녀석들을 품어주고, 무대에 오를 기회를 주고, 계속 나아가라며 용기를 건넨 어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도쿄에서 작은 두부 가게를 운영하는 한 할아버지는 녀석들의 1호 팬이다. 영화에서 그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지지는 않지만, 그는 아마도 새벽부터 가게를 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평범한 어른일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최소 4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이어오면서도 그가 자기 삶을 위해서 놓지 않은 한 가지, 바로 재즈다. 일을 마친 뒤 라이브 재즈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를 바라보며 칵테일 한 잔을 즐긴다. 무아지경 연주하는 초짜 밴드들의 실수를 모른 척 눈감아주고, 그들의 다음 무대를 일부러 찾아가 지켜본다.그의 눈에 비친 슌지는 실수투성이였을 거다. 이미 프로급인 두 친구와 달리 슌지는 드럼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초급자다. 손가락 마디마다 파스를 붙여가며 연습해도 실력 차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그래도 좋아서 시작한 일. 슌지는 크고 작은 실수들을 숨기기보다 “오늘 나 몇 번이나 틀렸지?”라고 친구들에게 물어가며 정면 돌파해왔다. 혹여 화려한 색소폰과 피아노 선율에 폐가 될까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연주를 마친 슌지에게 어느 날 두부 가게 노인이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자네의 드럼은 좋아지고 있어. 나는 성장하는 자네의 드럼을 보러 온다네.”슌지의 심장을 관통한 이 한마디 덕분에 그는 계속 나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때로는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더 잘 해내고 싶어지는 법이니까.이제 더는 라이브 무대를 열지 않는 낡은 재즈 바 ‘TAKE TWO’를 운영하는 아키코 사장은 어떤가. 그녀는 한때 일본 최고 밴드만이 설 수 있다는 클럽 무대에 오른 재즈 밴드의 일원이었다. 열정으로 끓었던 100℃의 시절을 지나 지금 그녀에게는 도쿄 변두리에 자그마한 재즈 바를 운영할 정도의 온기만이 남아 있다. 차곡차곡 모아온 재즈 음반을 단골과 함께 듣는 낙으로 살아가던 그녀 가게에 저 녀석들이 들어섰을 때, 그녀는 선뜻 자신의 재즈 바를 연습실로 내어준다. 그것도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세계 최고의 밴드로 성장하는 녀석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어쩌면 저 녀석들의 뜨거운 성취는 두 어른이 삶 속에서 지켜낸 온기가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바쁜 일상 가운데에서도 재즈 공연만은 놓지 않은 두부 가게 할아버지와 큰 꿈을 이뤄낸 뒤에도 은근한 온도로 재즈를 사랑해 온 아키코 사장처럼. 열정이 언제나 100℃로 끓을 순 없고, 삶의 의지가 모두 사라져 심장이 얼어붙는 순간도 생기기 마련이기에, ‘그럼에도 사랑하는 무언가’를 끈덕지게 지켜내는 보온이 중요한 것이다. 끓는 점에 도달하는 일만큼이나.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그의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그녀는 아주 조금씩 몸을 움직여 기척을 낸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이 2011년 출간한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속 한 문장이다. ‘어둠 속의 대화’라는 소제목이 말해주듯, 그와 그녀는 지금 어둠 속에 있다. 학원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그는 선천적 질병으로 시력을 잃어간다. 하필 이날 저녁 학원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희미하게나마 사물을 가늠하게 해주던 안경마저 잃은 참이다. 그에게 어두컴컴한 계단 아래는 다시 일어설 힘마저 삼켜버리는 어둠이다.그런데 이때 피 흘리며 쓰러진 그에게 한 여자가 다가온다. 그녀는 그가 가르치는 고대 그리스어 수업을 듣는 수강생이다. 그녀는 이혼 후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말을 잃어버렸다. 말을 할 수 없는 그녀가 어둠 속에 놓인 그를 일으켜 세운다. 온몸으로 그를 부축해 그가 사는 단칸방으로 이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에서 그는 그녀에게 자기 삶의 이야기를 터놓기 시작한다. 침묵 속에 놓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은 기척을 내는 것뿐이다.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이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식으로. 그러면 끊어질 듯했던 이야기가 자꾸만 이어진다. 진정한 어둠 속에서 우리는 볼 수 있을까. 말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말의 부재는 사랑마저 침묵 속으로 삼켜버릴까. ‘희랍어 시간’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데 꼭 한마디 말이 필요한 건 아님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저 누군가의 곁을 지키며 내어주는 기척이면 된다. 볼 수 없는 남자와 말할 수 없는 여자가 ‘어둠 속의 대화’를 나눈 것처럼. “나 여기 있다”는 몸짓만으로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그러나 나는 엄마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됐을 때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던 엄마는 1년간의 투병 끝에 다다랐을 무렵 말을 하지 못했다. 식도까지 암이 전이돼 물조차 삼킬 수 없었던 탓이다. 당시 중학교에 갓 입학했던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급식으로 스파게티가 나왔는데 맛있었다는 둥 교복 치마 밑단을 조금 줄이고 싶다는 둥 미주알고주알 떠들면 엄마는 말없이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고 병실에 놓인 TV를 틀었다. 무거웠던 병실 안의 침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엄마와 작별할 순간이 찾아왔을 땐 막막함이 밀려왔다. 내가 질문했을 때 답을 주던 사람이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임종 직전 엄마의 귀에 대고 내가 가까운 미래에 해낼 수 있는 일들을 해내기로 약속했다. “중간고사 잘 볼게. 밥 잘 챙겨 먹고 동생이랑 잘 지낼게. 교복도 잘 다려 입고 다닐게.” 그때 엄마가 내게 할 수 있는 일은 두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눈꺼풀을 가까스로 깜빡이는 엄마의 붉은 두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물 한 방울 목으로 넘길 수 없는 사람의 눈에서 흘러나온 물이었다. 엄마에게 듣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던 것 같은데, 듣고 싶은 답을 모두 들은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언어가 있기 전 태초에 기척이 있었고, 돌이켜 보면 엄마와 나 역시 기척으로 만났다. 10개월은커녕 9개월도 못 채우고 세상에 나왔던 나는 엄마 품에 안기기도 전에 인큐베이터에 머물러야 했다고 한다. 1993년 31세 늦은 나이(당시 기준)에 첫 아이를 낳은 초보 엄마가 울며불며 나를 찾아온 어느 날, 나는 이마에 주삿바늘을 꽂은 채로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때의 기척을 기적이라 생각했는지 내 이름을 밝을 소, 그럴 연 “그렇게 밝게 자라라”고 지었다. ‘작가의 말’에서 한강은 “소설 속 그와 그녀의 침묵과 목소리와 체온, 각별했던 그 순간들의 빛을 잊지 않고 싶다”고 썼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소설을 원서로 읽는 기쁨을 누리며, 나는 오래전 어두컴컴한 병실을 밝혔던 희미한 빛을 떠올렸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화려한 기술이나 값비싼 장비 없는 손맛이 이겼다. 내로라하는 요리사 100명을 추려 그중에서도 1등을 꼽는 넷플릭스 요리 대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서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인 요리는 다름 아닌 급식이다. 15년간 경남 양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먹인 ‘급식 대가’ 이미영 씨가 그 주인공. 도마와 칼 한 자루가 그녀의 전부다. 그런데 그녀가 내놓은 식판 앞에 선 미쉐린 3스타 셰프(심사위원 안성재)는 4교시 종이 ‘땡’ 치면 급식실로 부리나케 내달리던 초등학생처럼 허겁지겁 배를 채우기 바쁘다. 그러곤 감탄에 가까운 심사평을 내놓는다. “초딩 입맛이다. 근데 와, 맛있다. 계속 먹게 된다.”사실 그녀의 식판에 특별한 요리는 없다. 흰 쌀밥과 육개장, 수육, 상추 등이 고루 담겼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입맛 까다로운 아이들을 고려해 수육 양념으로 새우젓 대신 매실청 소스를 곁들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작은 배려가 아이들을 먹이고, 살찌운다. 제 이름을 내건 식당을 운영하는 쟁쟁한 셰프들 사이에서 심사위원들이 이토록 평범한 급식에 ‘통(通)’을 외친 건 본래 요리란 한 사람을 먹이고 살찌우는 일임을 알아서가 아닐까. 내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 하는 어른이 되기 전, 우리를 키운 건 비범한 미식이 아니라 평범한 반찬들이었다.‘흑백요리사’를 보며 이토록 평범한 밥상을 매일 차려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의 할머니 황태연 씨다. 할머니는 환갑이 넘은 65세 때부터 갓 태어난 나를 돌봤다. 맞벌이하는 막내아들 부부가 안타까워 한집에 살며 거둬 먹이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14년 뒤 며느리가 먼저 세상을 떠나며 영락없이 부엌일을 도맡게 됐다.65년 살며 할 줄 아는 요리는 나물이나 찌개, 찜, 국 등 어른을 위한 요리밖에 몰랐던 할머니는 늘그막에 떠맡은 두 손녀를 살찌우려 돈가스, 토스트, 서양 국수(스파게티) 등 요즘 요리를 배워야 했다. 그중 케첩과 마요네즈를 섞어 설탕을 솔솔 뿌린 햄 치즈 토스트는 지금도 종종 생각날 정도로 별미였다. 매일 평범한 한 끼를 짓고 차려내느라 할머니의 손끝이 갈라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제법 우람해졌다. 유전적 한계로 160㎝를 넘기진 못했지만, 엄마보다는 조금 더 큰 키도 갖게 됐다.할머니가 나를 위해 해준 음식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 평생 잊지 못할 것은 푹 끓인 홍삼 물이다. 3년 전 5월 6일 갑작스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출장 갔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을 때 홍삼 달인 물이 주전자째로 베란다에 놓여 있었다. 주전자 표면에 손을 대보니 아직 열이 식지 않아 따뜻했다. 요리라 부를 수도 없는 그 평범한 물을 먹이겠다고 우리 할머니 세상 떠나기 직전까지 참 바빴겠다 싶었다. 평소라면 사계절 내내 끓여놓아 질려버렸을 그 물이 그날은 왜 그렇게 아깝게 느껴지던지. 혹시나 장례 치르고 집에 돌아오면 다 쉬어버릴까 봐 온 가족이 달라붙어 주전자 속 물을 순식간에 다 마셨다.그날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분명 그날 마신 홍삼 성분 대부분은 흘러가 버렸겠지만, 내 몸 어딘가에 아직 그 효험이 남아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더웠다는 올여름 더위를 먹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술을 진탕 마신 다음날에도 쌩쌩한 것도 그 덕인 것만 같다. 누군가를 살찌우려 매일 분주히 움직인 손은 이렇게나 힘이 세다. 흑백요리사의 ‘급식 대가’도, 나의 할머니도. 당신이 기억하는 그 누군가도.[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난 주말, 정오의 땡볕에 달궈진 철로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때였다. 비둘기 한 마리가 1호선 온수역 철로에 내려앉았다. 몇 걸음 안 가 비둘기는 철로와 승강장 틈새로 몸을 숨겼다. 50㎝도 채 돼 보이지 않는 틈에서 그늘을 찾은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양주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가 울려 퍼졌다. 비둘기는 승강장 코앞으로 열차가 몸을 들이민 순간까지도 틈새를 떠나지 않다가 간발의 차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마터면 열차에 치일 뻔했는데, 비둘기는 태연히 역사 위 전깃줄에 걸터앉아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닌 듯싶었다. 올여름 한 점 그늘을 찾기 위해 새들은 몇 번이나 생을 걸고 틈새를 찾아 헤맸을까.그늘이 간절한 여름이 오기 전까지, 나는 틈새의 효용을 미처 몰랐다. 수년 전 겨울의 일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담벼락에 달라붙은 넝쿨을 제거해 달라”는 민원이 들어온 적 있었다. 주민회에선 넝쿨 가지가 창문에 들러붙는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1층 가구들이 함께 해결할 일이란 결론을 내렸다. 동마다 1층에 사는 집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태 사설 업체를 불러 아예 넝쿨을 뿌리째 뽑기로 작정했는데, 1층 가구원 가운데 최고령 노인인 우리 할머니만 극구 말렸다. “갱신히(‘간신히’의 충청도 사투리) 붙어 있는디 부러 떼 내지 말라”며.최고령 할머니의 한마디를 차마 꺾지 못했던 아파트 1층 주민들은 결국 우리 집 담벼락만 쏙 빼놓고 나머지 넝쿨의 싹을 모두 뽑아냈다. 그때의 나에게 ‘넝쿨 뽑기’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심한 일에 속했다. 다만, 할머니의 고집으로 아파트 주민들에게 괜한 폐를 끼친 건 아닌지 조심스러웠을 뿐이었다.1층 살림을 누가 밖에서 들여다볼까 싶어, 거실부터 방까지 커튼 치고 사느라 잊고 지냈던 넝쿨의 존재를 깨닫게 된 건 1년 반 뒤 여름. 창문을 에워싼 넝쿨 사이사이마다 주황빛 능소화가 한가득 피어났다. 그동안 한 번도 피워낸 적 없던 첫 꽃을 피워낸 거였다. 우리 집 창문과 방음벽 사이 1m 남짓한 틈새에 뻗친 넝쿨 그늘로 새들이 드나들며 한낮의 땡볕을 피했다. 초록이 우거진 넝쿨 덕에 한여름엔 커튼을 치지 않아도 되는 건 덤이다.검색해 보니 넝쿨은 ‘그 자체의 힘으로는 서지 못하고 다른 식물이나 물체에 의지하면서 자라는 식물 줄기’라 한다. 식물과 물체뿐일까. 살아남으려면 사람의 힘도 빌려야 할 것이다. 할머니의 말처럼 여러 존재의 힘을 빌려 ‘갱신히’ 자라난 넝쿨은 새를 비롯한 다른 동식물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준다. 한낮의 땡볕에서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도록. 그러면 힘을 빌려야 했던 작은 넝쿨은 다른 생명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할머니는 3년 전 돌아가셨지만, 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마다 할머니가 애써 지킨 넝쿨 정원을 누리고 있다. 창문 밖을 포위한 넝쿨을 보고 있자면 넝쿨이란 틈새를 만드는 식물임을, 그해 겨울 할머니가 지킨 것은 넝쿨보다 더 큰 ‘틈새’라는 시공간임을 깨닫게 된다.이틀 후면 처서. 이날 이후 무더위가 한풀 꺾인다 하여 우리 속담엔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올여름엔 ‘처서의 마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지만, 그래도 가을은 올 것이다. 무성한 초록 잎들 다 떨어져 넝쿨의 시간은 가고, 볼품없는 잔가지의 시간이 온다 해도 지난 수년간 그래 왔듯 나는 넝쿨을 애써 베어내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귀차니즘’ 때문인데, 올여름엔 한 가지 이유를 더 찾았다. 애써 베어내지만 않으면 애써 가꾸지 않아도 자라나는 틈새라는 세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비단 내 집 앞뿐일까. 여름은 벌어진 틈을 채우는 계절. 쪼개진 아스팔트 도로 틈에 자리한 조금의 흙 속에서도 싹이 튼다. 풀이 우거진다. 틈새에도 삶이 피어난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여름이었다.[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4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CD를 굽던 시절이 있었다. 토스터에 굽는 것도 아니요, 프라이팬에 볶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좋아해 줄 누군가를 생각하며, 한 곡 한 곡 노래를 내려받은 다음 한 사람만을 위한 CD를 만드는 일이다. 이 행위는 광학 저장매체인 CD에 레이저를 쏘아 표면을 ‘구워’ 데이터를 저장한다고 하여 영어로나 한국어로나 굽는다(‘Burn CD’)는 표현을 얻었다. 실제로 막 구워져 나온 CD는 따끈따끈하기도 했다.MP3와 CDP의 과도기, 나는 장시간 차를 모는 아빠를 위해 CD를 구웠다. 아빠가 좋아하는 이문세와 김광석, 이상은의 옛 노래와 내가 좋아하는 빅뱅, 소녀시대, 2PM 등 아이돌 노래를 함께 버무렸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함께 좋아해 줄 타인을 상상하며 CD를 굽고, 반짝이는 CD 표면 위에 플레이리스트를 네임펜으로 손수 적었다. 그 시절 음악은 만질 수 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 그래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MP3가 퍼지기 시작하더니, 음악을 실시간으로 재생해 듣는 스트리밍 시대가 열렸다(나는 중3 때 처음 MP3를 샀다). 머지않아 MP3는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갔다. CD 최후의 보루 자동차마저 CDP를 없앴다. 이젠 알고리즘이 내가 듣는 음악의 경향성에 따라 내 입맛에 맞는 노래를 추천하는 시대. 어쩐지 요즘 듣는 음악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떤 음악에도 쉽사리 마음을 못 주겠는 거다. 그러다 2주 전, 서로에게 CD를 구워주곤 했던 오랜 친구의 집에 놀러 간 날. 아무 생각 없이 거실에 앉아 유튜브 쇼츠를 보며 낄낄거리다 문득 친구가 “너한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며 노래 한 곡을 틀었다.제목은 ‘아침만 남겨주고(가수 김현창)’. 기타 선율에 조곤조곤한 낮은 목소리. 사랑하는 이가 슬픔에 겨워 잠 못 이루는 밤. “네가 되어서 가라앉는 맘/밤새 대신 울어주고/볕이 드는 아침만/남겨주고 싶어요”라는 노랫말. 멜론과 유튜브 뮤직이 자랑하는 음악 추천 기능이 내게 단 한 번도 추천한 적 없던 미지의 노래가 그 순간 내게로 왔다. 눈을 감고 노랫말을 곱씹고 있던 내게 친구는 말했다. “이 노래를 처음 알게 된 건 겨울이었어. 이 노랠 들으면 그해 겨울의 온도와 습도가 전부 기억나.” 노래는 이 친구가 가족들과 함께 살다 홀로서기를 택한 2020년 9월 처음 나왔다. 아직은 내 집 같지 않은 낯선 방, 좀처럼 깊이 잠들지 못하는 친구에게 가뜩이나 겨울밤은 더 길게 느껴졌을 텐데. 그해 겨울 친구는 이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했을까. 포근한 노랫말이 친구를 잠재워주었을 거라 생각하니, 노래가 괜히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출근길 노래를 반복해 듣다 친구에게 이런 답장을 보냈다. “너에겐 겨울인 이 노래가 내겐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아.”유행가도, 틱톡에서 뜨는 배경음악도 아닌 이 노래를 다들 어디서 알게 된 건지. 멜론 댓글 창엔 이 노랠 처음 알려준 이들에 대한 사연이 빼곡했다. 그중 내 마음을 사로잡은 글 하나. “이거 네가 추천해줬던 노랜데, 오랜만에 들으니까 감정이 확 오네. 요즘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잠을 잘못 자는데 새벽에 혼자 깨어있을 때면 너 생각이 나. 너도 잠 못 잤는데. 지금도 안 자고 있을 것 같아. 잘자, 보고 싶어, 연락하고 싶어. 좋은 노래 추천해줘서 고마워. 이 노래 들으면 너 생각은 평생 나겠다. 네가 우리 사이 끝나도 너 평생 기억해달라고 했었는데.”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준 노래엔 그가 건네준 따뜻한 말 한마디의 온기가 담겨 있는 걸까. 어떤 노래는 누군가와 함께 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또 어떤 노래는 그 사람 자체가 되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순위권 밖을 한참 벗어나 있는 이 노래는 음악을 추천해 주는 AI엔 관심 밖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노래엔 이미 3만4665개의 하트(좋아요·멜론 기준)가 눌려 있었다. 이제 더는 CD를 굽지 않는대도, 음악이 ‘만질 수 없는 것’이 됐대도. 어떤 노래는 여전히 알음알음 마음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증거. 줄줄이 이어진 댓글과 ‘좋아요’들. 겹겹이 포개어진 마음의 흔적들 위에 나도 하트 하나를 더 보탰다. 검지로 스마트폰 위 앨범 화면에 하트를 누르고 나니, 어쩐지 이 노래는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 칼럼엔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퓨리오사는 미련하다. 어릴 적 젖과 꿀이 흐르는 ‘녹색의 땅’에서 황무지로 납치당하던 날, 그녀를 구하러 머나먼 길을 달려온 엄마는 분명 당부했다. 뒤돌아보지 말 것, 떠나온 길대로 앞만 보고 내달릴 것, 부디 혼자라도 살아남을 것. 굳게 지키려던 당부는 황무지의 야만인들이 엄마를 향해 겨눈 총소리 한 방에 무너지고 만다. 결국 뒤돌아 제 발로 야만의 세계에 들어선 퓨리오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엄마를 지켜보는 수밖에.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퓨리오사가 미련(未練)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렸다면 애초에 시작되지 않았을 이야기다.미련은 고질병인지 퓨리오사는 이후로도 제 버릇 남 못 주고 자꾸만 뒤돌아본다. 수년을 버티며 마침내 황무지에서 탈출할 기회를 잡았는데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처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핸들을 적진으로 돌린다. 자기 살길 내팽개치고 또다시 지옥행. 그 대가로 퓨리오사는 팔을 잃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도 잃지만, 끝내 자기 뒤에 남겨진 이들을 향한 연민만은 잃지 않는다. 어쩌면 처절한 복수심보다도 제 뒤에 남겨진 인간에 대한 미련이, 황무지 속에서 그녀를 인간으로 살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퓨리오사뿐일까. 인간의 마음은 대체로 미련 가득해서인지 “뒤돌아보지 말라”는 신의 금기를 어기고 기꺼이 돌이 된 인간의 이야기는 만국 공통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에도 있다. 옛날 옛적 길 가던 스님에게 시주한 공으로 목숨을 부지할 뻔했던 할머니가 있었더랬다. 풍족히 살면서도 타인의 굶주림을 외면한 마을 사람들에겐 천벌을 내릴 테니 당신은 뒤돌아보지 말고 이 산을 넘어가 살아남으라고 스님은 할머니에게 당부했다. 단, 뒤돌아보면 돌이 될 거라고. 그러나 그 할머니, 집도 절도 모두 잃고 그토록 미워했던 영감 죽을 적에 기어이 뒤돌아보고 만다. 미련한 일이다. 그런데 스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홀로 살아남은 그 할머니는 과연 행복했을까. 두고 온 이들, 남기고 온 추억 돌아보지 못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망연히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도 차라리 그 죽음의 목격자가 되길 선택했던 퓨리오사처럼. 설화 속 그 할머니도 자기 뒤에 남겨진 이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돌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돌이 될지라도….돌이켜보니 그렇게 미련 가득한 사람이 내 곁에도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무렵 일이다.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엄마는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려 전날 밤 짐을 한 보따리 싸놓곤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하지 못했다. 4교시 체육 시간, 운동장 옆 계단에 엄마 닮은 사람이 앉아 있어 달려가 봤더니 병원에 있어야 할 엄마가 그곳에 있었던 거다. 그땐 몰랐지만, 그날 엄마가 병원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내게로 온 이유를 이젠 안다. 남겨 두고 온 어떤 마음들이 눈에 밟혀서. 그날 한참 동안 운동장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종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멈춰 서서 나를 향해 뒤돌아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덩달아 엄마가 정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손 흔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기억은 꽤나 힘이 세서 지금껏 내 삶의 의지가 되어주었다. 미련의 힘일 것이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느껴져요. 이건 확신의 미소예요.” 지난해 7월 20일 전맹 시각장애인이자 서울 맹학교 교사인 이진석 씨(45)와 함께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오감’ 전시실을 함께 살펴보던 때였다.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배치된 ‘사유의 방’처럼, 이 전시실엔 실제 유물 크기와 재질을 그대로 재현한 불상 모형 두 점이 놓여 있었다. 손끝으로 불상 모형을 어루만지던 이 씨가 옅은 미소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두 반가사유상의 미소가 같아 보여도 실은 달라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발끝엔 힘이 들어가 있어요. 확신에 찬 듯해요.”그의 말을 듣고 불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제야 두 불상의 차이가 보였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발끝은 온몸에 힘을 실은 듯 하늘을 향해 솟은 반면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온몸에 힘을 푼 듯 발끝이 평평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여태 이 차이를 몰랐다”는 나의 말에 이 씨는 “때로 다른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앞으로 이 전시실을 비(非)장애인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유”라고 덧붙였다. 박물관은 ‘오감’ 전시실 개관 전부터 이 씨 등 시각장애인과 협업해 전시실의 미래를 함께 그렸고, 이 씨의 제안을 적극 반영했다. 올 2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 ‘여기, 우리, 반가사유상’을 선보인 것. 나와 이 씨가 경험한 것처럼 앞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함께 반가사유상을 만지고 본 뒤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식이다. 박물관에 따르면 ‘오감’의 방문객 수는 지난달 24일 관람객 1000명을 넘어섰다. 흔히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장벽을 없앰)’라고 하면 ‘장애인만을 위한 서비스’라고 여기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본인 전맹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 씨(55)는 배리어프리라는 말이 지금처럼 널리 퍼지기 전인 1990년대부터 미술관 문을 두드린 사람 중 하나다. 그저 사랑하는 연인과 미술관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그는 1995년 무렵부터 일본 미술관 곳곳에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이렇게 요청했다고 한다. “저는 전맹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안내를 해주면서 작품을 말로 설명해주었으면 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선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그런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오기 일쑤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상관없다” “한 번만 부탁한다”는 말로 끈질기게 미술관 직원을 설득한 끝에 기어코 “그럼 오세요”라는 답변을 얻어낸 것.그렇게 전화 한 통으로 예기치 못한 ‘배리어프리 서비스’가 시작됐다. “그림 속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그림 속의 빛은 따뜻한가요?” 쏟아지는 시라토리 씨의 질문을 받아든 미술관 직원들은 그제야 그림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림 속 여자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녀의 눈빛은 기쁜지 슬픈지, 눈동자 속엔 빛이 있는지 없는지…. 그에게 답하기 위해 자신의 말로 작품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도, 다 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무너지기도 했다. 한 직원은 그에게 작품을 설명하다 여태껏 호수인 줄 알았던 작품 속 배경이 어쩌면 들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고 한다. 그를 위해 시작한 배리어프리 서비스가 뜻밖에도 미술관의 시야를 넓힌 것이다. 시라토리 씨가 개인적으로 요구했던 그 배리어프리 서비스는 오늘날 미술계의 화두가 됐다. 1998년 도쿄도 미술관에서 그를 연사로 초청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기 위한 워크숍’을 연 것을 시작으로, 2년 뒤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모임 ‘뮤지엄 액세스 그룹 MAR’이 만들어졌다. 요즘엔 일본 미술관 곳곳에서 이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국 역시 ‘모두의 박물관’을 기조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진 박물관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2019년부터 시라토리 씨와 함께 일본 곳곳의 미술관을 탐방한 비장애인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 씨(53)는 저서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다다서재·지난해 10월)에서 시라토리 씨와 함께 작품을 감상한 경험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내 눈의 해상도를 높여주고, 작품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해줘요.” 두 사람이 함께 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 홀로 반가사유상을 감상했을 땐 미처 보지 못했던 ‘확신의 미소’가 시각장애인 이 씨와 함께 작품을 본 뒤 보이기 시작한 것처럼. 함께 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열리는 세계일 것이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부재함으로써 드러나는 존재가 있다. 일주일 전 출근길 집 앞 정류장에서 버스에 오를 때였다. 분주하게 버스 계단에 올라타려는 내 발아래 무언가 탁, 하고 걸렸다. 고개를 숙여 발밑을 내려다보니 몸통이 잘려 나간 나무 밑동이 보였다. 일주일이 또 흐른 어제(15일) 아침에는 나무 밑동의 흔적마저 사라진 채였다. 여기 언제 나무가 있었냐는 듯 새 보도블록이 나무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도 집 근처 지하철 앞 정류장에 있던 나무가 같은 방식으로 잘려 나갔었다. 어떤 이유로 나무들이 잘려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나무 곁엔 지켜줄 누군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어쩌면 오래 살아남았다는 건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경남 창원시 북부리 동부마을에 살아 있는 수령 약 500세의 노거수(老巨樹) ‘창원 북부리 팽나무’가 대표적이다. 2022년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와 ‘우영우 팽나무’로도 유명한 이 나무 곁엔 ‘당산나무 할아버지’ 윤종한 씨(62)가 있다. 문화재청은 2022년 3월부터 전국 천연기념물 가운데 수령이 오래된 노거수 179그루를 꼽아 이를 지킬 수호자를 임명해오고 있는데, 윤 씨가 그중 하나다.수고비 한 푼 받지 못하는 명예직인데도 그해 12월 내가 만난 윤 씨는 나무를 제 자식처럼 돌봤다. 드라마 유명세로 몰려든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모아 버리는 일도 그의 몫. 하루에 50L짜리로 여덟 포대 쓰레기를 치우는 날도 있었지만,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식에게 물려줄 논도 땅도 없다. 시골 사는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라는 이유였다.물론 윤 씨 혼자서 해낸 일만은 아니다. 그의 답변 속 ‘우리’는 온마을을 아우른다. 마을회관에 꽂혀 있는 사진첩엔 나무와 함께 한 마을 사람들의 역사가 빼곡했다. 여름철 나무 그늘에서 수박을 먹고 축제를 벌였던 흑백사진 속 아이들이 이젠 마을의 어른이 되었다. 마을회관에 앉아계시던 한 어르신은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내게 수십 년 전 이 나무 덕에 목숨을 구한 사연을 꺼냈다. 억수 같이 비가 와 물난리가 났을 때, 나무가 뿌리 내린 언덕에 올라간 덕에 물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얘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지켰듯, 나무도 오랜 시간 마을을 지켜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무와 마을 사이를 잇는 끈끈한 유대 속엔 나무 한 그루도 우리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지난달부터 전국 최초로 시범 운영 중인 제주도의 ‘반려 가로수 입양제도’는 바로 이런 믿음을 이어 나가려는 시도다. 봄·여름철만 되면 제주도 가로수 관리 부서엔 “가로수를 베어 달라”는 민원이 쏟아진다고 한다. 우거진 나뭇가지가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가 상당수라고. 이 제도를 기획·운영하고 있는 제주도 산림녹지과 관계자는 15일 전화 통화에서 “‘가로수를 제거해 달라’는 민원과 도시 녹화 사업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지자체 혼자 힘만으론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역민들과 함께 나무를 지켜보자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입양 대상은 도내 6개 구간, 총 2660m 길이 거리에 심어진 가로수 4360본이다. 운영 첫해인 올해엔 총 6개 구간을 지킬 6개 팀을 모집한다. 신청서를 낸 기관이나 단체가 최종 입양자로 결정되면 이들이 나서서 가로수 주변 쓰레기를 치우고, 물을 주고, 화단을 가꿔나가는 식이다.나 혼자 먹고살기도 빠듯한 마당에 누가 이런 번거로운 일을 신청할까 싶지만, 곳곳에서 신청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마감(22일)이 일주일 남은 가운데 벌써 2개 기관에서 신청서를 냈는데, 그중 한 곳이 도내 어린이집이다. 신청서에는 다음과 같은 사유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연과 교감을 쌓을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아이들이 나무와 함께 건강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성가시고 귀찮은 것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어른들의 세상에서, 꿋꿋이 가로수를 지켜내는 아이들을 상상해 본다. 봄여름엔 가로수 때문에 거리에 벌레가 좀 꼬일 것이고, 가을 무렵엔 낙엽 탓에 거리가 지저분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나무들 덕분에 도심 속 갈 곳 잃은 새들은 둥지를 틀 것이고, 한여름 땡볕을 거닐던 사람들은 선선한 그늘을 얻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나무들을 가꾸고 지켜낸 경험이 아이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4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늙은 부인들은 발을 구르며 남자들의 기개가 부족함을 통매(痛罵·몹시 꾸짖음)했다. 이들은 “일제히 광주로 가서 매 맞고 굶어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해 일하다 철창에서 신음하는 동지와 같이 하자”고 말했다.’ 1925년 10월 23일자 동아일보 5면에 실린 전남 무안군 도초도(현 신안군 도초도) 소작쟁의 사건 기사 중 일부다.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들이 소작료를 터무니없이 올려 섬 주민들이 반발하자, 일제는 주동자 20여 명을 체포하는 등 강제 진압에 나섰다. 이에 도초도 주민 200여 명이 나룻배를 타고 목포경찰서까지 몰려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시 찍힌 시위대 사진에서 맨 앞줄에 앉은 이들은 모두 한복 치마를 입은 중년 여성들이다. 이들은 광주형무소에도 주민들이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주로 이동해 시위를 계속하자”며 강하게 맞섰다. 시위대 해산 과정에서 부상자가 여럿 발생했는데, 이 중 병원 치료를 받은 중상자 명단에는 ‘김성녀(金姓女·김씨 성을 가진 여성)’ ‘김소사(金召史·김씨 성의 과부)’ 등 이름 없는 50, 60대 여성 3명이 포함돼 있다. 백정 해방운동이 벌어질 정도로 봉건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던 1920년대에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게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기준 국가보훈부의 국내 항일운동 서훈자 3060명 중 농민 여성은 2명에 불과하지만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았으리라는 추정이 나온다. 독립기념관과 한국역사연구회, 역사공장이 공동 발간한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 시리즈(전 5권·사진)가 최근 완간됐다. 독립기념관은 2019년 ‘3·1운동에 앞장선 여성들’을 시작으로 항일 무장투쟁, 국내 사회운동, 국외 한인사회, 여성단체를 주제로 한 단행본을 매년 한 권씩 펴냈다. 공동 저자 13명이 집필한 다섯 권을 통틀어 총 100여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등장한다. 여성들의 항일운동은 뭍에만 그치지 않았다. 1931년 12월∼1932년 1월 제주도 내 어촌마을 6곳의 해녀 약 1만7000명도 공동 항일투쟁을 벌였다. 일제의 어업령에 따라 설립된 해녀조합에서 감태와 전복 값을 강제로 내린 데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일경에 맞서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고, 주동자를 체포하러 온 배를 에워싸며 시위를 벌였다. 이 중 100여 명이 일제에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제주 해녀들의 집단행동은 최대 규모의 항일 여성운동이었다. 그러나 항쟁을 주도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세 해녀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시리즈 전반을 기획한 이지원 대림대 교수(한국근현대사)는 “독립운동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하거나 일제의 재판 기록으로 확인된 여성 독립운동가 자료는 남성보다 적다”며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이나 아들을 지원한 경우 ‘사적 영역’으로 취급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시리즈에선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딸로만 여겨졌던 여성 광복군의 활약상도 새롭게 조명됐다. 예를 들어 지복영은 교과서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딸로만 간략히 언급돼 있지만 그는 여군으로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16세에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만주로 온 오희영은 지복영과 함께 적진 부근에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조선인들을 탈출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한승훈 부산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정부가 훈장을 수여한 여성 광복군은 30여 명이지만 증언 등을 토대로 보면 100여 명의 여성이 광복군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양 지도를 탐구하면 제3국이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중구 문화복합공간 순화동천에서 만난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57·사진)의 말이다. 이날은 독도재단과 한국해연구소가 함께 연 ‘해양 경계선이 그려진 고지도 속 독도’ 전시의 마지막 날이었다. 전시에서는 이 소장이 모은 서양 10여 개국의 지도 24점이 공개됐다. 모두 1870∼1910년대 영국, 독일, 튀르키예, 미국 등에서 제작된 지도들이다. 1870년대는 이양선(조선 후기 한반도 바닷가에 나타난 서양의 배)이 한국에 드나들면서 서양이 독도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된 시기다. 이 소장은 “당시 지도들을 확인해 보니 공통적으로 독도와 울릉도가 일본의 해양 경계선 바깥에 있었다”며 “이는 당시 서구 열강들도 독도를 대한제국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가 모은 고지도들은 대부분 각 나라가 인정한 교과서용 지도이거나, 명성 있는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소장은 지도 제작 업체의 온라인 아카이브 등을 뒤져 지도를 찾아냈다. 가령 1901년 독일에서 제작된 ‘슈틸러 교육용 지리부도’ 내 아시아 지도에는 독도와 불과 87.4km 떨어진 울릉도가 명백히 일본의 해양 경계선 바깥에 있다. 독도가 너무 작아 지도에 직접 표시되진 않았지만, 울릉도 바로 옆 독도의 위·경도상 위치도 해양 경계선 밖에 있다. 1877년 미국 아돌프 폰 슈타인베어가 제작한 ‘아시아의 자연 및 정치 지도’, 1905년 튀르키예에서 메흐메드 렘지가 제작한 ‘군사학교용 지리부도’ 등에서도 독도의 위·경도상 위치는 일본 해양 경계선 밖에 있다. 이 소장은 독도에 대한 제3국의 시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10여 년 전부터 한국과 일본이 아닌 나라들의 고지도를 모았다. 해양 경계선을 근거로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를 찾기 위해서다. 이 소장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지리적 인식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공유됐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 독도 문제를 다룰 때 한국과 일본의 고지도뿐 아니라 제3국의 지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 소장은 “앞으로 과거 서양 지도 제작자들이 왜 독도를 일본 해양 경계선 바깥으로 그렸는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원자료를 찾을 것”이라고 밝혔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시간 19분. 3일 하루 동안 기자가 스마트폰을 통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접속한 시간이다. 주간으로 보면 일평균 1시간 49분을 SNS에 썼다. 잠들기 2시간가량 SNS 화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습관처럼 굳어졌다. 기자만 겪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2014년 기준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한 해 동안 페이스북에 쏟아부은 시간은 총 3만9757년. 페이스북에 눈길을 쏟느라 가족이나 친구, 자신에게 쓰지 않은 시간이 4만 시간 가까이 된다는 얘기다. 이 책은 작정의 새해,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스마트폰 중독과 ‘헤어질 결심’을 한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실용서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한 저자는 스마트폰이 우리 뇌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스마트폰과 이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담았다. 시간뿐일까. 스마트폰은 기억도 좀먹는다. 인간이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4, 5가지로 한정돼 있다. 이보다 많은 정보 조각은 ‘인지 부하’로 머릿속에 기억되지 못한다. 문제는 스마트폰 화면에 인지 부하를 일으키는 무수히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는 것. 저자는 “스마트폰은 앱, 이메일, 뉴스 피드, 헤드라인, 심지어 홈 화면 자체까지 정보의 눈사태나 다름없다”며 “그 결과 단기적으로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집중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탓에 도둑맞은 집중력을 되찾을 방법은 무얼까. 저자는 112∼113쪽에 ‘도둑맞은 내 시간을 되찾는 30일 계획표’를 담았다. 4주간 총 4단계로 스마트폰 중독과 작별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첫 주의 과제는 얼마나 자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지 측정하는 ‘시간 트래킹 앱’을 이용해 중독의 실태부터 파악하는 것이다. 지난 24시간 동안 언제, 왜 스마트폰을 사용했는지 분석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앱과 그렇지 않은 걸 구분할 수 있다. 이 작업을 거치면 SNS에 필요 이상의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다음 단계로 ‘SNS 앱 삭제’를 권하는 이유다. 소셜미디어와 아예 작별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저자는 “소셜미디어로 발송된 메일과 초청장을 놓칠까 걱정된다면 하루 한두 번 정도 컴퓨터로 확인하는 시간을 정해 자기만의 ‘과속 방지턱’을 만들라”고 말한다. 밤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중증 중독자들은 충전 장소를 바꾸는 걸 추천한다. 침실 대신 다른 공간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는 변화만으로 충분한 수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총 3주간 각 단계를 차근차근 거친 이들에게 저자는 끝으로 ‘스마트폰 단식’을 권한다. 금요일 밤에 잠들 때 스마트폰 전원을 껐다가 주말 내내 스마트폰 없이 하이킹, 여행, 독서 등 자기만의 취미를 즐기라는 것. 이를 주변으로 확장해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스마트폰 없는 파티를 열어보라”는 권유도 덧붙였다. 저자의 조언대로 30일 계획표를 완수한 이의 후기는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이의 충만함이 느껴진다. “마침내 그 일을 마친 순간, 전반적인 스트레스 수준이 현저히 낮아졌고 상황을 스스로 주도한다는 성취감이 놀라울 정도로 컸어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난달 스프레이 낙서로 훼손된 경복궁 담장이 19일 만에 응급복구를 마치고 4일 공개됐다. 복구에 투입된 인건비, 재료비 등으로 약 1억 원의 예산이 투입돼 문화재청이 범인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로 했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번 사건과 같은 악의적인 훼손 행위에 대해 엄정 대응하겠다”며 “(경복궁 담장을 낙서로 훼손한 범인들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해 문화재청의 강경한 입장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지정문화유산을 낙서로 훼손한 자에게 원상 복구 비용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복구 비용 전액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것. 이는 2020년 6월 이 법 개정 이후 첫 적용 사례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날 기준으로 담장 복구 비용은 약 1억 원으로 추산된다. 레이저 세척기 등 전문장비 임차료(946만 원)와 방진복을 비롯한 소모품 비용(1207만 원)까지 재료비만 2153만 원이 들었다. 복구 과정에 투입된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고궁박물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직영보수단 직원 234명(연인원)의 인건비는 약 8000만 원이다. 향후 석재 표면을 점검하고 색을 맞추는 2차 복구 작업까지 더하면 실제 복구 비용은 늘어날 전망이다. 문화재계에선 그동안 낙서 등 오염 훼손에 대한 문화재 예방 관리가 취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다음 달까지 전국의 지정 문화유산에 대해 낙서 실태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이번 사건 전까지 낙서로 훼손된 문화유산을 파악하는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이종훈 문화재청 보존정책국장은 “이전까지 문화유산의 보호대책이 방화나 실화로부터 목조 건축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며 “이 때문에 낙서 등 오염물에 의한 훼손은 문화유산 관리의 중점사항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규호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는 “그동안 문화유산 관리체계는 ‘수리’ 위주로 사건이 터져야 방지 대책을 세우는 식이었다”며 “훼손 사건이 추가로 벌어지기 전에 문화유산에 대한 전반적인 보존체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담장 주변으로 연내 폐쇄회로(CC)TV 20대를 증설할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내년까지 4대 궁궐과 종묘, 사직단에 총 110대의 CCTV를 추가 설치할 계획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아버지는 아들이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길 바랐다. 영상을 만들고 싶다 했을 땐 “방송국 PD가 돼라”고 했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땐 ‘공채 개그맨 합격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이 원하는 건 이름표가 아니었다. “어떤 매체든 저는 그저 사람을 웃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이름표를 달고 싶은 게 아니었어요.” 구독자 136만 명을 보유한 코미디 유튜브 채널 ‘빠더너스(BDNS)’의 크리에이터이자 코미디언 문상훈 씨(33)가 2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 씨는 유튜브 크리에이터란 말이 떠오르기도 전인 2016년 5월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지리강사 문쌤, 문상 기자, 복학생 문당훈…. 천연덕스럽게 다채로운 얼굴로 변모하며 ‘부캐’의 시대를 연 그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린 날 일기장에 이렇게 끄적였다. “누군가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을 때 내가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기대에 못 미친 나도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문 씨는 자신이 수년간 일기장에 끄적인 글을 모아 최근 첫 산문집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위너스북·사진)을 출간했다. 책엔 자신조차 믿지 못했던 때를 지나온 한 소년의 성장통이 담겼다. 문 씨는 “작가나 코미디언이 자기를 검열한다는 건 창작에 발목을 잡는 일”이라며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기 위해 갑각류가 탈피하듯 나를 깨고, 또다시 깨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고 말했다. 일기장은 그가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탈피의 공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랑 분리불안 있었던 거 알지?”, “기회만 있으면 남 탓하는 거, 너도 알지?” 문 씨는 ‘내 모든 결핍들에게’라는 제목의 일기에서 자신의 실수와 결핍까지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나의 잘못과 결함까지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싶어서”, “결함을 꺼내 보일 때 비로소 그 결함으로부터 졸업할 수 있어서”다. “나의 결함을 받아들여야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는 어른이 될 수 있어요. 저는 어른이 돼서도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미안하다’ 말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의 소년으로 남고 싶거든요.” 누굴 탓하지도, 누군가의 기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도 않았던 그는 “‘빠더너스’를 운영하며 자기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첫 2년간 구독자 수가 늘지 않던 때에도 영상 업로드를 거른 적은 없었다. 그러자 100명 남짓했던 구독자 수가 1000명, 1만 명이 되더니 7년 만에 1만 배 넘게 불었다. 무엇보다 그가 쓴 대본과 연기가 사람들을 웃겼다. 슬랩스틱이나 분장으로 웃기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인물을 관찰한 각본으로 사람들의 ‘뇌를 웃기는’ 그의 코미디가 통한 것. 문 씨는 “참고서나 해설서 없이 내가 찾은 답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기분”이라며 웃었다. “학창 시절 선생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찾은 해답은 그 풀이 과정을 절대 안 까먹잖아요. ‘빠더너스’가 몸소 부딪혀 찾은 이 해답은 까먹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문 씨의 인기를 증명하듯 책은 출간과 동시에 3만 부 넘게 팔렸다. 문 씨는 덤덤한 얼굴로 “저처럼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제 책을 참고서처럼 여겨주세요. 원래 자기가 스스로 찾은 답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거든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충무공의 위토(位土·묘소 관리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토지)를 지켰던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요즘 거의 없는 것 같아요.” 6년째 ‘현충사 청소년 문화유산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김동현 군(13·서울 잠신중 1학년)은 “일제강점기 충무공의 위토를 지켜낸 선조들의 역사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 군은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와 사회적 협동조합 씨드콥이 2018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청소년 문화유산지킴이 프로그램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참여하고 있다. 매달 하루 충남 아산시 현충사와 서울 종로구 광화문 등을 찾아가 사람들에게 충무공 위토를 지킨 역사를 알리고 있다. 김 군을 비롯한 청소년 문화유산지킴이 100여 명은 거북선 조립 장난감 등 기념품을 직접 기획해 온·오프라인에서 판매한 수익금을 매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부하고 있다. 이들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전달한 기부액은 1400만 원에 달한다. 서울 중구 씨드콥 사무실에서 지난해 12월 28일 만난 김 군과 홍라희 양(12·용인 청곡초 6학년)은 “충무공 위토를 지킨 역사를 알게 된 뒤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충무공 유적 보존 모금운동은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2000원에 경매 당하는 이충무공 묘소 위토’에서 비롯됐다. 충무공 종가의 가세가 기울어 충무공 묘소와 위토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던 위당 정인보(1893∼1950)는 사설에서 “충무공의 묘소와 위토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책임”이라고 호소했다. 이후 기사를 접한 이들이 동아일보사로 돈봉투를 보냈다. 1년간 2만 명, 400여 개 단체가 보낸 기부금 1만6021원30전(현재 가치로 약 10억 원)으로 충무공 묘소와 위토에 걸린 빚을 갚고, 현충사를 중건했다. 홍 양은 “당시 많은 분들이 충무공 위토 지키기를 자기 일로 여기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기부했다”며 “청소년 문화유산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부를 이끌어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김 군은 “광화문에서 충무공 기념품을 팔며 ‘기부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하는 저희들에게 ‘이런 짓 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말하는 어른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날카로운 말과 차가운 시선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할 일을 대신 해줘서 고맙다’면서 기부에 동참하는 어른들이 더 많다는 걸 알거든요. 충무공 위토의 역사를 몰랐던 어른들이 기부에 동참해줄 때 가장 뿌듯해요.” 이들은 기부금이 문화유산을 지키는 여러 일에 소중하게 쓰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해외로 불법 반출된 문화유산을 환수하는 데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어요.”(김 군) “부서지고 다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요.”(홍 양)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문화재청은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간직한 강원 홍천군의 ‘수타사 대적광전(壽陀寺 大寂光殿·사진)’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29일 밝혔다. 수타사는 원효대사(617∼686)가 신라시대 우적산에 창건한 일월사(日月寺)가 그 시초로 전해진다. 이후 1569년 현 위치인 공작산으로 사찰을 옮기는 과정에서 ‘수타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사찰이 모두 전소됐으나 1636년 공잠대사(工岑大師)가 중건했다. 수타사 대적광전은 빛을 내비치며 중생을 인도하는 부처인 비로자나불을 본존(本尊·법당에 모신 부처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부처)으로 봉안한 법당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서까래와 부연(처마 서까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이 있는 겹처마 다포(多包) 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미국에서 그 누구도 성별을 이유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서 제외되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차별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72년 미국에서 제정된 남녀교육평등법 ‘타이틀 나인’의 첫 문장이다. 미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서 성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기까지 차별의 장벽을 몸으로 부딪혀 넘어야 했던 한 여자가 있었다. 바로 버니스 레스닉 샌들러(1928∼2019)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NYT) 등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한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샌들러의 ‘타이틀 나인’ 법 제정 투쟁기와 이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책은 자신이 겪은 ‘입학 불허’, ‘면접 탈락’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 샌들러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1968년 미국 메릴랜드대 교육학과 박사 학위 취득을 앞둔 샌들러는 교원 채용 프로그램에 수차례 지원했지만 면접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전문직 일자리 공고란 곳곳엔 ‘남성 학자’라는 식으로 성별을 특정한 자격 요건이 적혀 있었다. 계속되는 탈락의 장벽 앞에서 샌들러는 좌절하기보다 성차별을 입증할 근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버지니아대는 여성 지원자 2만1000명을 불합격 처리했다. 같은 시기 불합격시킨 남성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미국 노동부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 하버드대 법학전문대학원과 인문대학원 정년 보장 교수 473명 가운데 여성은 없었다. 교육계의 성차별이 구조적 관행이란 증거였다. 교육계 성차별을 뿌리 뽑기 위해선 강력한 법이 필요했다. 연방정부와 계약을 맺은 대다수 대학에서의 성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 11375호가 1967년 발표됐지만, 한계가 있었다. 행정명령은 법률의 지위를 갖고 있지 않은 탓에 대통령이 바뀌면 언제든 바뀔 수 있었던 것. 샌들러는 전국여성단체 등과 힘을 합쳐 미국의 모든 법학전문대학원을 고발하는 동시에 이들과 함께 새로운 법 제정에 나섰다. 교육에 있어 성차별을 금지하는 법안 통과에 힘을 보탤 의원들을 접촉하고, 언론과 대학에 교육계 성차별 철폐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2년간 벌였다. 그 결과 1972년 6월 23일 닉슨 대통령은 타이틀 나인이 담긴 ‘교육수정법’에 사인했다. 무엇보다 타이틀 나인은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스포츠 교육계의 풍경을 바꿨다. 법 제정 첫해인 1973년 고등학교 대표팀에서 선수로 뛰는 여학생의 수는 1년 전과 비교해 약 3배로 늘어 81만7073명이 됐다. 2017년 고등학교 여자 운동선수는 50년 전보다 10배 이상 많아졌다. 지난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가 미국 의회가 타이틀 나인을 통과시킨 일에 대해 “우리 브랜드의 유전자(DNA)를 구축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한 배경이다. 그렇다면 50년 전 샌들러를 가로막았던 성차별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2018년 미국의 여성 전임 교수 비율은 거의 절반에 가까웠지만, 여성 정교수는 3분의 1에 그쳤다. 2017년 고교 여자 운동선수는 50년 전보다 10배 이상 많아졌지만, 여자 운동팀 지도자는 59%가 남성이었다. 타이틀 나인의 불씨를 지폈던 샌들러는 법 제정 후 2년 뒤면 교육 분야의 성차별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 믿었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2019년 세상을 떠나기 전, 샌들러는 성차별이 자신의 생애보다 더 길고 질길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원제는 ‘37 Words’. 타이틀 나인의 첫 문장은 37개 어절로 이뤄져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