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홍

이원홍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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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홍 기자입니다.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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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8~202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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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베… 포를란… ‘퍼거슨의 실패작’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6일 취임 25주년을 맞았다. 수많은 선수가 명장 퍼거슨 감독 밑에서 빛을 발했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도 있다. 영국 대중지 더 선은 7일 ‘퍼거슨의 실패작’ 10명을 선정했다.1위는 포르투갈 3부 리그에서 뛰다 지난해 맨유에 합류했던 베베(포르투갈)다. 그는 이적료 740만 파운드(약 132억 원)를 기록했지만 기량이 기대 이하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시즌 맨유에서 7경기에 출전해 2골을 넣는 데 그쳤다. 맨유는 베베를 임대 형식으로 터키의 베식타쉬로 보냈다.두 번째는 ‘장님’이라는 별명을 얻은 은퇴한 골키퍼 마시모 타이비가 꼽혔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1999년 450만 파운드(약 8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베네치아에서 이적했다. 그는 리버풀과의 데뷔전에서는 훌륭한 기량을 선보였지만 이후 연달아 대실수를 저지르며 짐을 꾸려야 했다. 한때 중국의 자랑이던 둥팡줘(미카 FC)도 혹평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최악의 선수 7위에 올랐다. 2004년 맨유에 입단한 둥팡줘는 많은 중국인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어리그에서 한 경기만 출전했다.특이한 점은 지난해 남아공 월드컵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던 우루과이의 디에고 포를란(인터밀란)이 명단에 든 것이다. 더 선은 포를란에 대해 “그는 늘 세계적인 스트라이커였다. 맨유에서 활동할 때만 빼고…”라고 표현했다. 포를란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맨유에서 뛸 당시 교체 멤버로 활동했고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63경기 10골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이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비야 레알로 옮겨 2005년 25골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펄펄 날았고 올해 이탈리아 무대로 옮겼다.이 밖에 ‘토털사커’의 창시자로 불리는 네덜란드 축구 영웅 요한 크라위프의 아들 요르디 크라위프, 미드필더 에릭 드젬바드젬바(카메룬), 2800만 파운드(약 50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한 미드필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아르헨티나), 수비수 윌리암 프뤼니에(프랑스) 등이 최악의 선수로 꼽혔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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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임 25주년 맞은 퍼거슨의 실패작 10명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6일 취임 25주년을 맞았다. 수많은 선수들이 명장 퍼거슨 감독 밑에서 빛을 발했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도 있다. 영국 대중지 더 선은 7일 '퍼거슨의 실패작' 10명을 선정했다.1위는 포르투갈 3부 리그에서 뛰다 지난해 맨유에 합류했던 베베(포르투갈)다. 그는 이적료 740만 파운드(약 132억원)를 기록했지만 기대 이하의 기량을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시즌 맨유에서 7경기에 출전해 2골을 넣는데 그쳤다. 맨유는 베베를 임대 형식으로 터키의 베식타스로 보냈다.두 번째는 '장님'이라는 별명을 얻은 은퇴한 골키퍼 마시모 타이비가 꼽혔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1999년 450만 파운드(약 8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베네치아에서 이적했다. 그는 리버풀과의 데뷔전에서는 훌륭한 기량을 선보였지만 이후 연달아 대실수를 저지르며 짐을 꾸려야 했다. 한때 중국의 자랑이었던 덩팡저우(미카 FC)도 혹평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최악의 선수 7위에 올랐다. 2004년 맨유에 입단했던 덩팡저우는 많은 중국인들의 기대에도 프리미어리그에 1경기만을 출전했다.특이한 점은 지난해 남아공 월드컵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던 우루과이의 디에고 포를란(인터밀란)이 명단에 든 것이다. 더 선은 포를란에 대해 "그는 늘 세계적인 스트라이커였다. 맨유에서 활동할 때만 빼고…"라고 표현했다. 포를란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맨유에서 뛸 당시 교체 멤버로 활동했고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63경기 10골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이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비야 레알로 옮겨 2005년 25골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펄펄 날았고 올해 이탈리아 무대로 옮겼다. 이밖에 '토털사커'의 창시자로 불리는 네덜란드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의 아들 요루디 크루이프, 미드필더 에릭 드젬바-드젬바(카메룬), 2800만 파운드(약 50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했던 미드필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아르헨티나), 수비수 윌리엄 프루니어(프랑스), 미드필더 클레베르손(브라질), 미드필더 다비드 벨리온(프랑스) 등이 최악의 선수로 꼽혔다.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 201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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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산사나이들의 도전 잊지않겠습니다, 어제 영결식

    “위대한 도전과 탐험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가겠습니다.”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의 합동 영결식이 3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열렸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조사를 통해 “이들이 남긴 뜨거운 열정의 메아리는 역사로 기억될 것”이라며 실종자들을 기렸다. 박 대장의 모교인 동국대 김희옥 총장은 “박 대장이 추구한 높이는 물리적 높이가 아니라 인류정신의 높이였다”며 “대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 백전불굴의 정신이 박영석 정신이었다”고 추도했다.이날 영결식에는 유인촌 대통령실 문화특별보좌관, 박 대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만화가 허영만 씨와 엄홍길 씨를 비롯한 많은 산악인이 참석했다. “산을 제일로 사랑했던 그 악우(岳友)여. 어이해 눈보라 속에 사라졌나 그 친구, 그 악우여….” 산악인들이 ‘악우가’를 부르는 동안 식장엔 흐느낌이 가득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본보 기자들이 지켜본 박영석 ▼박영석 대장(사진)의 도전에는 동아일보도 함께했다. 박 대장의 2005년 북극 원정과 안나푸르나 트레킹, 2006년 에베레스트 횡단, 2007년 베링해협 횡단 때는 전창 기자가, 2008년 중국 쓰촨 성 미답봉 원정에는 김성규 기자가 한 달가량 동행했다. 2009년 ‘코리안 루트’를 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 때는 황인찬 기자가 두 달 넘게 원정대와 함께했다. 동아일보는 2004년부터 박영석 대장이 대학생들과 함께했던 국토 순례 행사 ‘대한민국 희망원정대’도 후원했다.박 대장의 원정대는 상명하복의 질서가 뚜렷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엄한 겉모습 뒤로 일일이 대원들을 챙기는 ‘따뜻한 맏형’이었다.김 기자는 “내가 3900m 높이의 베이스캠프에서 고산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했을 때 취사 담당이었던 신동민 대원에게 ‘식욕 좀 돋우게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등 마음이 따뜻한 대장이었다”고 회상했다.김 기자는 “지친 대원들에게 먹이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30만 원짜리 6년산 홍삼을 배낭에서 주섬주섬 꺼내 박 대장이 손수 달이곤 했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김 기자는 “원정 지역에서 무언가를 끓이는 냄비는 모두 뚜껑을 열어보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라면 꼭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등 호기심이 왕성했다”고 기억했다.황 기자는 “처음에는 거만하고 무례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볼수록 잔정이 많았다”고 했다. 동행 취재가 확정되자 박 대장은 “대원이니까 이제 말 놔도 되지”라고 말해 기자를 잠시 당황하게 만들었다.황 기자는 한 달 반 동안 해발 5364m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단것이 너무 먹고 싶었다. 밤에 몰래 비품 텐트에서 500mL 콜라 한 병을 꺼내 먹었다가 이튿날 박 대장에게 호되게 혼났다. 대원의 몫을 기자가 축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며칠 뒤 박 대장은 콜라와 사이다를 비롯한 탄산음료를 한 무더기 구입해 줬다. 희망원정대를 동행 취재했던 한우신 기자는 “박 대장은 대학생들이 ‘힘들다’ ‘아프다’고 말하면 감싸 주기보다는 더 호되게 꾸짖는다. 학생들은 원정 중에 박 대장의 독선적 태도에 자주 불만을 토로했지만 끝난 다음에는 박 대장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따랐다”고 했다. 한 기자는 원정이 끝난 뒤 박 대장이 대학생들에게 남긴 말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여러분, 많이 비웠습니까. 이제 그 속에 꿈을 채워 넣으세요.”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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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탐험정신 이어가겠다” 박영석 원정대 영결식 엄수

    "위대한 도전과 탐험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의 합동 영결식이 3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조사를 통해 "이들이 남긴 뜨거운 열정의 메아리는 역사로 기억될 것"이라며 실종자들을 기렸다. 박 대장의 모교인 동국대 김희옥 총장은 "박 대장이 추구한 높이는 물리적 높이가 아니라 인류정신의 높이였다"며 "대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 백전불굴의 정신이 박영석 정신이었다"고 추도했다. 이날 영결식에는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 대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만화가 허영만 씨 및 엄홍길 씨를 비롯한 많은 산악인들이 참석했다. "산을 제일로 사랑했던 그 악우(岳友)여. 어이해 눈보라 속에 사라졌나 그 친구, 그 악우여…." 산악인들이 '악우가'를 부르는 동안 식장엔 흐느낌이 가득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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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없는 눈… 한번의 시도로 정상 올라야 한다”

    ‘2010년 3월 12일 선발대가 출국해서 5월 23일 귀국할 때까지 73일간의 등반기간 중 매일같이 내리는 눈 때문에 눈사태의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철수를 결정했다.’지난달 18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사진)은 이미 지난해 초 안나푸르나 남벽에 도전했다 철수했다. 그들은 1년 뒤의 운명을 예감하지 못했던 것일까. 당시 원정기에는 이미 눈사태의 위험이 생생히 적혀 있었다. 한국산서회(山書會)의 이병태 고문(치과의사)은 실종 대원들의 합동 영결식을 하루 앞둔 2일 박영석 원정대가 지난해 안나푸르나 남벽에 나섰을 때의 기록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강 대원은 산을 좋아하는 인사들의 모임인 산서회 총무로 활동했다. 지난해 말 산서회에 글을 남겼다.기록에 따르면 박 대장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4월 3일 한국으로 떠나 14일 다시 베이스캠프에 돌아왔다. 이때 박 대장은 술에 취해 울면서 “밖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지만 가족들에게는 (위험한 일을 한다며) 그렇지 못했다”면서 자책했다. 하지만 부친상을 치르자마자 다시 산으로 돌아오는 집념을 발휘했다.부상도 잇따랐다. 강 대원은 떨어지는 돌에 맞아 오른 무릎이 10cm가량 찢어져 인대가 파열됐다. 그러나 원정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기존 루트의 이점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 위험성에 대해 강 대원은 이렇게 적었다.‘한번 올라가면 후퇴할 고정 로프가 없고, 확보물 부족으로 내려가는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한정된 장비와 식량을 대원들이 배낭에 지고, 미리 설치된 고정 로프와 캠프도 없이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단 한 번의 시도로 성공해야 한다.’하지만 강 대원은 ‘끝없이 내리는 눈 때문에 눈사태 위험이 커져 원정대는 철수를 결정했다. 박영석 대장과 대원들은 2011년 가을 시즌에 다시 도전할 것을 약속했다’고 글을 맺었다. 그들은 약속대로 올해 가을 다시 이곳을 찾았지만 눈사태로 실종됐다. 한편 이 고문은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과 박 대장이 한때 남북한 합동 에베레스트 등반을 구상했던 일화를 밝혔다. 이 회장과 박 대장은 이를 위한 남북한 산악인 교류를 위해 2006년 1월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이 회장과 박 대장은 북한의 치과병원이 낡은 것을 보고 건물을 수리해주기도 했다고 이 고문은 회고했다.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일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을 찾아 실종자들에게 체육훈장을 추서했다. 대한체육회 박용성 회장, 박선규 문화부 차관, 산악인 엄흥길 오은선 씨, 박 대장의 원정활동을 후원해온 동아일보사 김재호 사장, 배인준 주필 등도 분향소를 찾아 헌화하고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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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 박영석-신동민-강기석 합동 분향소, 마르지 않는 눈물

    돌아오지 않은 이들을 향한 통곡과 눈물이 뜨겁고 깊게 흘렀다. 가지런히 놓인 흰 국화 사이로 그들이 더 높은 곳에서 새 삶을 살기를 바라는 염원이 향과 함께 피어올랐다. 남은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듯 사진 속의 그들은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1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의 분향소.남편을 잃은 신동민 대원의 부인 조순희 씨는 아들 호준 군(8)의 손을 잡고 들어와 함께 절을 올렸다.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던 강기석 대원의 어머니 최시연 씨는 울다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아들이 히말라야에 간 소식을 모른 채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고 난 뒤였다. 링거를 맞으며 남편의 무사귀환을 빌었던 박영석 대장의 부인 홍경희 씨는 큰아들을 끌어안고 울었다. 박 대장의 두 아들 성우, 성민 씨는 눈물을 참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가족들은 분향소가 문을 열기 전 미리 입장해 실종자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언니를 부축하고 들어온 강 대원의 이모 최주희 씨는 “기석이 불쌍해서 어떡해…. 결혼도 안 하고 애인도 없어요. 부모한테만 잘하고…. 산에 갈 때 한 번도 산에 간다 말한 적이 없어요. 이번 원정에 나서기 전 ‘엄마 아프지 말아요’라고 한 게 마지막이었어요. 우리 기석이는 죽으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되지…”라고 했다.박 대장의 누나 혜록 씨는 “영석이가 아버지 장례식 때 술에 취해 울면서 그러더라고요. 밖에서는 영웅 대접 받아도 형제들한테는 인정을 못 받았다고. 형제들은 너무 위험한 일을 한다고 산악 활동을 말리고 있었어요. 내가 영석이 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영석이는 밖에서도 영웅이었지만 우리한테도 영웅이었어요”라고 말했다.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은 “그들을 다시 찾아와야 하는데 큰 고민이다. 날씨가 좋아지면 찾아오겠다. 그 생각밖에 없다”고 했다. 침통한 표정의 이 회장은 “그러나 박영석과 대원들은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며 실종자들을 기렸다.이명박 대통령은 박범훈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통해 보낸 친서에서 “박 대장은 세계 최고의 산악인이었습니다. 한평생 사랑하던 산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국민과 전 세계 산악인들은 박 대장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떠나보내야 하는 가족들의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박 대장이 남긴 위대한 용기와 불굴의 도전정신을 오랫동안 잊지 않을 것임을 아시고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전했다.산악인 엄홍길 대장은 “얘들아 얼마나 춥겠니. 모든 한을 다 풀고 좋아하던 안나푸르나에서 편히 쉬어라”라고 힘겹게 말했다.박 대장 일행을 후원해 왔던 LIG손해보험 구자준 회장,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직접 분향소를 방문했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김희옥 동국대 총장은 조화를 보냈다. 각계의 헌화와 조문이 이어졌다. 이재오 전특임장관, 만화가 허영만 씨, 박 대장 일행의 탐험을 소재로 했던 ‘남극일기’의 주연배우 송강호 유지태 씨, 체육인 이에리사 장미란 씨 등이 분향소를 찾았다.정부는 실종자들에게 체육훈장을 추서할 것으로 알려졌다. 산악계는 3일 합동영결식을 치른다. 연맹은 실종자들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별도의 장지를 마련하지는 않을 계획이지만 가족들과 더 논의하기로 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정윤식 기자 jys@donga.com  }

    • 201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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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사면 오른쪽 한번 더 수색을” 朴대장 부인 예감도 빗나가고…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48) 일행의 구조작업을 진행하던 한국구조대가 수색을 거의 종료할 즈음 박 대장의 부인이 한국에서 전화를 했다.남편의 실종소식에 쓰러져 한국에서 링거를 맞고 있던 부인은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했다. 구조대는 이때 그동안 박 대장 일행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던 균열지역 수색을 마친 뒤 절벽 밑의 빙하지역을 살피던 중이었다. 구조대의 김창호 대원이 직접 균열 속에 들어간 뒤 균열 내 좌우 벽에 긁힌 흔적이 없고 바닥에도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구조대는 수색 범위를 넓힌 결과 박 대장 일행이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경로에서 사용한 로프를 추가로 발견했다. 로프는 바위에 매어져 있었고 일부는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원들이 균열지역을 벗어나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던 길이었음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일대는 높은 봉우리에서 쏟아진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탐침봉으로 얼음 밑을 수색하기는 불가능했다. 대원들은 더는 수색이 어렵다고 판단했다.이때 박 대장의 부인이 수색지역 경사면의 오른쪽을 한 번만 더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며 구조대의 이한구 대원이 지난달 30일 실종자 가족을 위한 마지막 브리핑에서 밝혔다. 꿈이라도 꾼 것일까. 부인의 예감은 적중하는 듯했다. 대원들이 오른쪽 측면을 살피자 그곳에 깊이 4m의 동굴이 나타났다. 대원들은 서둘러 동굴을 수색했다. 그러나 동굴엔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을 찾지는 못했지만 부인의 특이한 예감은 바다 건너에서도 미처 찾지 못했던 동굴로 구조대를 이끌었다. 박 대장 일행이 눈사태를 피해 이 동굴로 피신했다면 살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박 대장 일행의 실종 유력 지역이 균열지역이 아닌 베이스캠프 이동경로 일대임을 확인한 것은 구조대의 마지막 성과였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실종 추정지가 균열지역이 아닌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고 말했다. 실종자들이 균열 속에 빠졌다면 찾기가 어렵지만 다른 평탄한 지역에 묻혔다면 눈과 얼음이 녹는 계절에 발견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한편 가족들과 구조대원, 사고대책반 관계자들은 이날 저녁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구조대 진재창 대원은 “박 대장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는 울면서 수색지역의 눈 속에 박 대장 일행의 사진과 책을 묻고 왔다. 김재수 대원은 “후배들이 희생돼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박 대장이었을 것”이라고 했다.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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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석 대장 부인의 특이한 예감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48) 일행의 구조작업을 진행하던 한국구조대가 수색을 거의 종료할 즈음 박 대장의 부인은 한국에서 전화를 했다.남편의 실종소식에 쓰러져 한국에서 링거를 맞고 있던 부인은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했다. 구조대는 이 때 그동안 박 대장 일행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던 균열 지역 수색을 마친 뒤 절벽 밑의 빙하 지역을 살피던 중이었다. 구조대의 김창호 대원이 직접 균열 속에 들어간 뒤 균열 내 좌우 벽에 긁힌 흔적이 없고 바닥에도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구조대는 수색 범위를 넓힌 결과 박 대장 일행이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경로에서 사용한 로프를 추가로 발견했다. 로프는 바위에 매어져 있었고 일부는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원들이 균열 지역을 벗어나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던 길이었음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일대는 높은 봉우리에서 쏟아진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탐침봉으로 얼음 밑을 수색하기는 불가능했다. 대원들은 더 이상의 수색은 어렵다고 판단했다.이 때 박 대장의 부인은 수색 지역 경사면의 오른쪽을 한 번만 더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고 구조대의 이한구 대원이 지난달 30일 실종자 가족을 위한 마지막 브리핑에서 밝혔다. 꿈이라도 꾼 것일까. 부인의 예감은 적중하는 듯했다. 대원들이 오른쪽 측면을 살피자 그 곳에 깊이 4m의 동굴이 나타났던 것이다. 대원들은 서둘러 동굴을 수색했다. 그러나 동굴엔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을 찾지는 못했지만 부인의 특이한 예감은 바다 건너에서도 미처 찾지 못했던 동굴로 구조대를 이끌었다. 박 대장 일행이 눈사태를 피해 이 동굴로 피신했다면 살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박 대장 일행의 실종 유력 지역이 균열 지역이 아닌 베이스캠프 이동 경로 일대임을 확인 한 것은 구조대의 마지막 성과였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실종 추정지가 균열 지역이 아닌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고 말했다. 실종자들이 균열 속에 빠졌다면 찾기가 어렵지만 다른 평탄한 지역에 묻혔다면 눈과 얼음이 녹는 계절에 발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한편 가족들과 구조대원, 사고대책반 관계자들은 이날 저녁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구조대 진재창 대원은 "박 대장의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는 울면서 수색 지역의 눈 속에 박 대장 일행의 사진과 책을 묻고 왔다. 김재수 대원은 "후배들이 희생돼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박 대장이었을 것"이라고 했다.모두가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가족들은 고생한 구조대원들을, 구조대원들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 가족들을 위로했다. 박 대장 일행을 묻은 설산 아래의 밤은 상처받은 자들이 서로를 다시 이해하는 가운데 깊어갔다.카트만두=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 201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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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山 사나이들 안나푸르나에 잠들다]雪山은 말없이 그들을 품었다

    설산은 말없이 그들을 품에 안았다. 지구상의 3극점인 남극, 북극, 에베레스트와 히말라야 8000m급 14좌, 그리고 7대륙 최고봉에 모두 올라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산악인 박영석 대장(48)의 위령제가 30일 네팔 안나푸르나의 해발 4200m 베이스캠프에서 열렸다. 박 대장과 함께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신동민(37) 강기석 대원(33)의 위령제도 함께 열렸다.실종자 가족들은 헬리콥터 2대에 나눠 타고 현지에 도착한 뒤 돌탑과 장대를 세우고 깃발을 매단 제단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어 한국에서 가져온 막걸리가 뿌려졌다. 가족들은 네팔 카트만두 시내 보우다 사원에서 영정을 모시고 지상에서 한 번 더 위령제를 지냈다. 위령제는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형식으로 치러졌다.대한산악연맹은 11월 1일부터 사흘간 서울대병원에 위패를 모시고 산악인장으로 장례를 치를 계획이다. 산악인장은 국내 최초다. 연맹 이인정 회장은 “11월부터 날씨가 나빠지고 낙석이 심해 추가 수색이 어렵다. 올해 수색은 종결한다. 현장 구조대가 더 이상 수색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내년 봄에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이들을 찾으러 올 것이다. 이들의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연맹은 18일 대원들이 실종된 뒤 이례적으로 한국에서 구조대와 사고대책반을 급파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대원들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한편 대한산악연맹은 최종 브리핑에서 박 대장 일행이 지금까지 파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균열지역 밖의 빙하지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구조대와 사고대책반 및 실종자 가족들은 31일 귀국할 예정이다. 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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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山 사나이들 안나푸르나에 잠들다]안나푸르나서 위령제

    여신의 뜻인 걸까. 아침부터 까마귀가 몹시 울었다. 이곳에서 까마귀는 신성한 동물이다.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여긴다. 영원히 녹지 않는 흰 눈을 쓰고 있는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8091m). 30일 여신의 품속인 해발 4200m의 산기슭. 헬리콥터가 수차례 절벽을 선회한 뒤 내렸다. 가족들은 차가운 돌로 쌓은 제단 앞에 섰다. 돌탑에 꽂힌 장대 위에 수많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산에서 잠든 영혼들이여, 이 장대를 이정표 삼아 하늘로 오르소서. 깃발엔 영혼을 기리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곳 사람들은 깃발이 펄럭일 때마다 영혼이 바람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다.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48)과 신동민(37) 강기석 대원(33)의 위령제가 열렸다. 박영석 대장의 동생 박상석 씨, 아들 박성우 씨, 신동민 대원의 부인 조순희 씨, 강기석 대원의 동생 강민석 씨가 차례로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친 이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바람결에 가족들의 염원과 회한이 높고 깊은 봉우리 사이로 흩어졌다. 이제 불러도 더는 대답 없는 이름들이었다.열 살 연하의 남편을 보내야 하는 신 대원의 부인 조순희 씨는 한때 식사를 거의 못했다. 절을 한 뒤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여성 산악인으로 활동했던 그는 산에서 남편을 만나 산으로 보내야 했다. 10년 전 히말라야 푸모리에서 친구와 함께 산에 오르다 친구가 사망했고 그때 신 대원이 위로하며 사랑에 빠졌다. 그때도 지금도 슬픔은 눈물로 위로를 받는다. 끼니를 거르던 부인은 한국구조대의 유학재 대원이 산에서 내려와 대성통곡을 한 뒤에야 겨우 조금씩 식사를 하는 형편이었다. 구조작업을 하던 이한구 대원이 손목에 감고 있던 팔찌를 꺼내 박성우 씨에게 건넸다. “이거 아버지께서 갖고 있으라고 한 거야. 이제 너에게 줄게.” 아들은 소리 없이 울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이 울먹였다. “이제 어떻게 하나….”가족들은 산에서 내려와 카트만두 시내의 보우다 사원에 들렀다. 이곳에 실종자들의 사진을 놓고 라마식 위령제를 다시 지냈다. 심벌즈처럼 생긴 전통악기 묵찰이 은은히 울려 퍼졌고 승려들은 불경을 외우며 모두를 위로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지상에서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대한산악연맹은 27일 오후 늦게 가족들에게 수색 중단을 통보했다. 가족들은 서운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절망과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이인정 회장은 진정제를 꺼내 들었다. 구조대에게 수색 종결을 지시한 그는 “나는 이제 평생 박영석 얼굴을 똑바로 못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박영석을 산에 가지 못하게 하면 그것이 그에게는 죽음이었다”며 “영석이는 산에서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아난 것이다”라고 말했다.가족들은 대원들을 가슴에 묻었다. 누군가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한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떠난 이들을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몸은 떠났지만 그들을 마음속에서 살려낼 것이다. 그들을 왜 일찍 데려갔는지, 차가운 여신은 말이 없었다.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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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山 사나이들 안나푸르나에 잠들다]산악인-지인들 “포기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박영석 대장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지인들은 하나같이 “이번에도 틀림없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장은 소식이 끊긴 18일 이후 12일째인 30일까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무사귀환을 기도했던 산악인과 지인들의 회고를 정리했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영석이는 1980년 마나슬루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한 뒤 귀국해 카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보고 산악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 마나슬루 원정대장은 나였다. 영석이는 유명해지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게 아니었다. 산이 좋아 오르다 보니 숱한 기록을 세우게 됐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유명해졌다. 영석이는 산에서 죽음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수색은 종결하지만 날이 풀리면 영석이를 찾으러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을 것이다. ○ 산악인 엄홍길 씨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후배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영석이는 산 하나를 등정하면 내려오는 도중에 다음 목표를 얘기할 정도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탐험하던 산악인이었다. 나는 한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동생을 잃었고 대한민국은 산악계의 큰별 하나를 잃었다.○ 여성 산악인 오은선 씨영석이 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집념의 사나이’다.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등반할 때는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최소한 세 가지는 벌어진다는 각오를 하고 시작하라던 영석이 형의 가르침을 지금도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다.○ 만화가 허영만 씨2001년 7월 히말라야 K2봉 등정에 따라 나선 것이 계기가 돼 10년 넘게 박 대장과 인연을 이어왔다. 겁이 없었고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한참 어린 후배지만 박 대장한테서 배우려고 애썼던 게 있다. 한번 약속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것이다.○ 익스트림스포츠 칼럼니스트 송철웅 씨동국대 산악부였던 영석이가 83학번, 국민대 산악부였던 내가 82학번으로 산악부 교류를 하다 처음 알게 돼 1990년대 중반부터 가까워졌다. 영석이는 산에 가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이었다. “산에 있지 않으면 불편하다. 도시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카트만두=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이종석기자 wing@donga.com  }

    • 201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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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山 사나이들 안나푸르나에 잠들다]박영석, 그에게 山은 무엇이었기에…

    “그대 더 높은 눈으로, 더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기 위해 함께 왔던 악우(岳友), 남원우 안진섭 여기 히말라야의 하늘에 영혼으로 남다.”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로 가는 길 언덕엔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새긴 비석이 서 있다. 그가 1993년 5월 16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다 후배 두 명을 잃고 세운 비석이다. 그는 2007년 같은 장소에 도전했다가 오희준 이현조 대원 두 명을 더 잃었다. 공교롭게도 똑같은 5월 16일 사고를 당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2009년 마침내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올라 4명의 사진을 꺼낸 뒤 “고맙다”며 울었다. 2005년 최초로 지구상의 3극점인 에베레스트, 남극, 북극과 히말라야 8000m급 14좌,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그였지만 대기록을 세운 뒤에도 마음의 빚이 있었다. 후배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베레스트 남서벽이었다. 다리 근육이 파열된 채로 올랐다. 새 길을 뚫었다. ‘코리안 루트’라 이름을 붙였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모두 코리안 루트를 내려 했다. 그의 남은 인생 최대 프로젝트였다. 극한지역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한국인의 도전정신을 영원히 기록하는 것이 목표였다.○ 기록과 업적네 살 때 아버지와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 생애 첫 ‘완등’이었다. 재수 끝에 산악부로 유명한 동국대에 입학했다. 1993년 아시아 최초 무산소 에베레스트 등정을 했다. 8년 2개월에 걸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정의 서곡이었다. 1997∼1998년 1년 동안 8000m급 6좌에 올랐다. 1년간 최다 8000m급 등정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2001년 악명 높은 K2(8611m)를 끝으로 8000m급 14좌에 모두 올랐다. 2002년 남극의 빈슨 매시프(5140m)에 올라 7대륙 최고봉에도 모두 올랐다. 2004년 남극, 2005년 북극에 갔다. 산악 그랜드슬램이었다.○ 부상과 오뚝이박영석은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100m를 굴러 얼굴뼈가 보일 정도로 다쳤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꿰맸다. 1996년 에베레스트 북동릉에서는 눈사태에 휩쓸렸다. 700m를 추락했다.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함께 간 셰르파는 목숨을 잃었다. 부러진 뼈를 스스로 맞추고 돌아온 적도 있다. ○ 동료들의 희생과 방황그의 길에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늘 후배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고집도 셌지만 맏형 같았다. 2007년 두 명의 대원을 잃었을 때 은퇴를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전셋집에서 몇 년간 같이 살던 사이였다. 삭발한 뒤 매일 술을 마셨고 방황했다. 환청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나는 쉴 수가 없다”고 말했다. “걔네들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했다.○ 산으로 간 이유대답은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였다. 한편으로는 한민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산에 가서 가장 지독한 근성을 보이는 것은 언제나 한국 산악대였다며 “대단한 민족, 악바리 민족”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한민족의 근성을 떨쳐 보이고 싶어했다. 전 세계에 코리안 루트를 내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의 슬로건은 “땅덩어리가 좁으면 생각의 크기로 맞서라”였다.○ 성공에 대한 부담과 식객(食客) 박영석그는 “가장 두려운 건 나 자신”이라고 했다. 등반대장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각종 후원을 받은 원정대는 성공에 대한 부담도 컸다. 아웃도어 활동가로 그와 가깝게 지내온 송철웅 씨는 “칼을 뽑기보다 칼집에 칼을 넣기 어려웠다는 말을 자주했다”며 박 대장의 고민을 떠올렸다. 욕심 부리면 모두 위험해진다. 박 대장은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산에서의 생활을 위해 요리의 달인이 됐다. 특히 회를 잘 떴다. 산악인 치고는 수영과 낚시, 작살 등 물질이 수준급이었다.○ 경제문제와 가족생활등반 때문에 신혼예물을 팔기도 했다. 결혼 8년 만에 첫 월급을 가져다줬다고 했다. 부인이 한때 닭칼국수 식당을 운영했다. 전세금을 빼서 나선 적도 많다. 원정대의 짐이 규정 무게를 초과해 별도의 요금을 내야 했을 때 “나는 학생이다. 돈이 없다”며 몇 시간을 버텨 통과하기도 했다. 애창곡은 ‘바보처럼 살았군요’였다. 이제 그 노래를 더 들을 수 없다. 2남 중 큰아들은 세미 프로골퍼다.한편 대한산악연맹은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에 대한 국내 위령제가 11월 1일부터 사흘간 서울대병원에서 산악인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라고 밝혔다.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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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山 사나이들 안나푸르나에 잠들다]박영석 이을 ‘괴력맨’과 ‘테크니션’도 끝내…

    그들은 눈 쌓인 험난한 산 위에서 함께 울었던 사이였다. 2009년 5월 20일 오후 6시 15분. 14시간이 넘게 목숨을 걸고 올라간 산 위에서 그들은 기쁘고도 서러워 울었다. 히말라야에서 최고로 험난하다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함께 올라 코리안 루트를 개척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 및 진재창 부대장. 이 벽에서 이미 4명의 선후배를 잃었던 서러움의, 그럼에도 기어코 올랐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박 대장은 여러 차례 이 벽에 도전했다가 후배 4명을 잃은 뒤에 정상에 섰다.그들의 운명은 그 뒤에 바뀌었다. 4명 중 박 대장과 신, 강 대원은 이번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도중 실종됐다. 산악구조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진 부대장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국에서 급파됐으나 그들을 찾지 못했다.신 대원은 박 대장의 뒤를 이을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주자였다. 185cm의 키에 74kg의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는 별명이 ‘괴력의 사나이’였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를 때 모두가 지친 상태에서 마지막 고비가 되었던 최후의 절벽에 먼저 올라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준 것도 그였다. 조리사 출신인 그는 음식 담당이기도 했다. 50가지 이상의 반찬과 음식을 준비해 산상의 호화로운 음식으로 대원들의 건강을 챙겨주었다. 2001년 네팔 푸모리 등반 때 산 위에 자신을 응원하러 찾아온 열 살 연상의 여성 산악인 조순희 씨(47)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산악인의 마음을 아는 부인은 산에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당부를 하곤 했다. 신 대원은 부인과 아들 호준 군(8)을 남기고 산의 품에 안겼다.미혼인 강 대원은 등반기술이 좋은 테크니션으로 알려졌다. 신 대원과 함께 2007년부터 박 대장을 따랐다. 33세인 그는 박 대장을 따라 에베레스트 남서벽 공격조로 나서는 등 자신의 등반기술과 경험을 익혀가는 중이었다. 박 대장이 계획했던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모두 새로운 루트를 내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등반가로 성장할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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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민 강기석은 누구인가, 엇갈린 운명

    그들은 눈 쌓인 험난한 산 위에서 함께 울었던 사이였다. 2009년 5월 20일 오후 6시 15분. 14시간이 넘게 목숨을 걸고 올라간 산 위에서 그들은 기쁘고도 서러워 울었다. 히말라야에서 최고로 험난하다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함께 올라 코리안 루트를 개척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 및 진재창 부대장. 이 벽에서 이미 4명의 선후배들을 잃었던 서러움이, 그럼에도 기어코 올랐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박 대장은 여러 차례 이 벽에 도전했다가 후배 4명을 잃은 뒤에 정상에 섰다.그들의 운명은 그 뒤에 바뀌었다. 4명 중 박 대장과 신, 강 대원은 이번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도중 실종됐다. 산악구조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진 부대장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국에서 급파됐으나 그들을 찾지 못했다.신 대원은 박 대장의 뒤를 이을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주자였다. 185cm의 키에 74kg의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는 별명이 '괴력의 사나이'였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를 때에도 모두가 지친 상태에서 마지막 고비가 되었던 최후의 절벽에 먼저 올라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준 것도 그였다. 조리사 출신인 그는 음식 담당이기도 했다. 50가지 이상의 반찬과 음식을 준비해 산상의 호화로운 음식으로 대원들의 건강을 챙겨주었다. 조기구이 김치국 어묵우동 족발 간장게장 닭곰탕 등 다채로운 음식솜씨를 발휘했다. 2001년 네팔 푸모리 등반 때 산위에 자신을 응원하러 찾아온 10살 연상의 여성 산악인 조순희 씨(47)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산악인의 마음을 아는 부인은 산에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당부를 하고는 했다. 신 대원은 부인과 아들 호준 군(8)을 남기고 산의 품에 안겼다.미혼인 강 대원은 등반기술이 좋은 테크니션으로 알려졌다. 신 대원과 함께 2007년부터 박 대장을 따랐다. 33세인 그는 박 대장을 따라 에베레스트 남서벽 공격조로 나서는 등 자신의 등반기술과 경험을 익혀가고 있는 중이었다. 박 대장이 계획했던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모두 새로운 루트를 내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등반가로 성장할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한국산악계는 신, 강 대원의 실종으로 현 세대를 이끌고 있는 박 대장과 그의 뒤를 이을 차세대 유망주를 한꺼번에 잃었다.카트만두=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신동민, 강기석 대원 약력▼◇신동민 대원 (1974년 제주 생, 대구대산악부OB)1995년 알프스 3대 북벽, 드류 등정2000년 에베레스트 북릉-북동릉 등반2007년 로체샤르 남벽 등반2008년 에베레스트 남석벽 등반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 등정2010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강기석 대원 (1978년 안동 생, 안동대산악부OB)2003년 로체 서벽 등정2006년 로체 남벽 등반2008년 가셔브룸Ⅱ 등반2008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 등정2010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2011년 가셔브룸Ⅱ 등정※등정은 정상에 오른 것, 등반은 다녀온 것}

    • 20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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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석 원정대 실종 11일째… “또 하루가…” 山 아래 가족들도 악전고투

    축제의 그늘 속에서 가족들은 떠돌고 있었다. 28일 네팔 카트만두. ‘개의 날’ ‘소의 날’에 이어 이날은 ‘오누이의 날’이다. 1년 중 두 번째로 큰 명절이라는 티하르 축제의 마지막 날이다. 힌두교 축제인 티하르는 까마귀와 개, 소, 오누이를 기념하는 축제다. 오누이의 날은 가족들이 재회하는 날이다. 시집간 여동생과 누이가 모처럼 친정으로 돌아와 오빠와 가족들에게 꽃을 걸어주며 행운을 빈다. 나흘간 계속되는 축제 기간에 관공서와 식당은 문을 닫았다. 사람에게 봉사하느라 고생한 개와, 논을 갈고 노동력을 제공한 소를 기념하는 등의 행사다. 10월 초에 염소를 잡아 신에게 올리는 다사인 축제 다음가는 명절이다. 축제 기간 동안 거리엔 음악이 넘친다. 골목골목엔 행운을 빌어주는 소년들이 작은 북을 들고 집집마다 방문한다. 그러나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지 11일째인 박영석 대장(48) 신동민(37) 강기석 대원(33)의 가족들은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질문과 대답은 좀처럼 오가지 않았다. 한국 구조대는 이날도 총력을 기울여 수색에 나섰지만 별다른 흔적을 찾지 못했다. 북을 들고 왔던 소년들은 경비원의 제지로 입구에서 되돌아갔다. 이국의 거리는 가족들의 재회로 들떠 있지만 한국 대원들의 가족들은 그러지 못했다.카트만두까지 날아온 가족들은 숙소를 자주 옮겨야 할 처지다. 10월 말부터 네팔 관광의 성수기가 시작돼 거리엔 외국인 천지다. 모든 숙소가 가득 찼다. 이들은 급히 오느라 장기 예약을 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숙소를 옮겨야 한다. 현재 묵고 있는 호텔 예약은 29일까지다. 다른 호텔을 알아보고 있다.가족들은 아직 구조 현장에 가보지 못했다. 카트만두에서 구조 현장까지는 헬리콥터로 서너 시간이 걸린다. 시간당 2000달러(약 220만 원)에 육박하는 헬리콥터 비용도 비용이지만 예약이 동났다. 에베레스트와 히말라야 곳곳에서 조난사고가 잇따라 동시 다발적으로 구조작업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원들의 실종사건 외에도 고산증 및 조난 사고가 여러 군데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카트만두는 축제와 고통이 뒤섞여 있다.한국 구조대는 그동안 10차례 가까이 헬리콥터를 띄웠다. 구조대가 현지 회사에 다급한 사정을 알리며 총력을 기울여 가까스로 헬리콥터를 임차했다. 그동안 헬리콥터 임차 비용만 6만 달러(약 7200만 원) 가까이 들었다. 그보다 더 다급한 건 시간이다. 가족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사고대책반의 정상욱 골드윈코리아 상무이사는 “27일 오후에만 베이스캠프에 80차례 위성전화를 걸었다. 그중 성공한 것은 두 차례뿐이었다”고 했다. 날씨와 험난한 지형 못지않게 소통의 답답함이 초조함을 더한다. 가족들은 기다림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희망이 그들을 지켜 주고 있다.가족들은 음식도 제 맛을 느낄 리 없다. 산에서 내려온 구조대원이 실종대원의 가족 앞에서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박 대장의 부인은 쓰러져 링거 주사를 맞고 있다.박 대장의 아들 성우 씨는 아버지와 함께 네팔에 몇 년간 머문 적이 있다. 네팔에서 30년간 지낸 삼부토건 이경섭 법인장은 “아버지가 산에 올라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가며 자신도 꼭 커서 아버지처럼 되겠다고 했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 아들은 카트만두에서 국제전화로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다.해외 원정은 산악인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기도 한다. 해외 원정비용은 한 번에 3억∼5억 원이 든다. 부족한 자금은 등반대장들이 집을 팔아 마련하기도 한다. 해외 원정을 떠나는 산악인의 가족은 울면서 만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어이 산으로 떠난다. 남은 가족들은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새벽기도를 하기도 하고 애를 태운다. 그러면서도 매번 보낸다.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왜 산으로 가느냐는 질문에 20년 전 안나푸르나에서 사촌형을 잃고 시신을 수습했던 변월주 씨는 “산에 안 가보셨지요”라는 한마디로 답을 대신했다. 산은 속세의 논리로 따질 수 없는 영혼을 울리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대자연의 힘이다. 마약과도 같다고 했다.몸은 속세에 있지만 마음은 산으로 향하는 산악인들. 가족들은 현실의 논리와 산의 논리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그들은 남편과 사랑하는 이들을 산으로 보냈다. 산이 전해주는 깊은 메시지에 그들이 호응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안타까우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산으로 보냈다.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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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반가 박영석, 거벽-속도-무산소 등반… “더 험한 코스를, 더 고난도로”

    박영석 대장의 등반은 한국 슈퍼알피니즘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는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새 루트를 개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이어 안나푸르나 남벽에 오른 뒤 로체 남벽을 다음 목적지로 정해 놓고 있었다. 이들 지역은 히말라야에서도 최고로 험난한 지역이다. 이곳에 고난도 방식으로 새 루트를 개척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등반 행위는 슈퍼알피니즘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를 정리한 남선우 씨는 저서 ‘역동의 히말라야’에서 한국 산악계를 1977년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원정을 전후한 1세대, 1982년 허영호 씨의 마칼루 원정을 전후한 2세대와 더불어 1990년대 급부상한 스타들을 중심으로 한 3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3세대는 박영석 엄홍길 한왕룡 박정헌 씨 등이 대표적하 인물이다. 박영석 엄홍길 한왕룡 씨는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했다. 알피니즘이란 유럽에서 시작된 등반사조로 험난한 자연 속에서 자기 극복을 통해 자아를 발견 또는 심화하려는 추세를 말한다. 이런 철학적 의미 때문에 일부에서는 등산이 경쟁을 추구하는 여느 스포츠와는 다르다고 말하기도 한다. 등로주의로도 불리는 이런 방식은 단순히 정상 정복만을 목표로 하는 등정주의와 구분된다. 이를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와 밀도를 높이기 위해 산으로 향했다. 이것이 그들이 산으로 간 가장 큰 이유다. 이들은 험난한 등정 방식(알파인 스타일)을 택했다. 히말라야에서의 알피니즘은 1950, 60년대 초등정기를 지나며 절정에 달했다. 초등할 봉우리가 적어지자 산악인들은 좀 더 험난한 코스와 어려운 방식으로 등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런 추세가 슈퍼알피니즘이다. 이는 거벽 등반, 속도 등반, 무산소 등반 등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박 대장은 이번 원정에서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그는 여러 차례 기업의 후원을 받아 원정대를 꾸렸지만 그의 등반 방식은 알피니즘을, 아니 그보다 더 험난한 방식의 슈퍼알피니즘을 향하고 있었다.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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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깊이 50m 검푸른 얼음굴… 박영석 원정대 발견 못해”

    두텁고 푸른 얼음 굴이었다. 검푸른 빛이 감도는 어둠이었다. 알려진 것보다 깊고 무서웠다. 조금만 내려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서 계속 눈과 돌이 흘러내렸다. 굴 안에는 크고 작은 얼음 작대기 혹은 얼음 기둥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언제 무너지거나 떨어져 내릴지 모르는 상황. 에베레스트를 4∼6차례나 올라갔다 온 베테랑 셰르파들이었지만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했다.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48)과 신동민(37) 강기석 대원(33)이 쓸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균열지역을 수색하고 온 셰르파들이 처음 입을 열었다.걜젠 셰르파(30), 니만 걜젠 셰르파(26)는 한국구조대와 함께 균열지역을 살피고 왔다. 체력 저하로 다른 셰르파들과 교대했다. 23일과 24일 두 차례 들어갔다 왔다.니만 걜젠 셰르파는 “균열 속은 푸른 얼음(blue ice)이 뒤덮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푸른 얼음은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얼음결정체와 빛의 산란작용이 결합해 생긴다. 푸른빛이 돈다는 건 그만큼 오래된 빙하지역임을 뜻한다. 또 그는 당초 알려진 것보다 이 균열이 더 깊다고 전했다. 이 균열은 당초 30∼40m 깊이로 알려졌다. 그러나 약 40m까지 들어갔다고 추정한 그는 “균열의 깊이가 45∼50m는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굴은 60도 경사로 이리저리 휘어져 있었다. 걜젠 셰르파는 “아주 깊고 위험했고 눈과 돌이 계속 떨어졌다”고 말했다. 걜젠 셰르파는 에베레스트에 4회, 마나슬루에 2회 올랐던 베테랑이다. 마나슬루는 1972년 한국 원정대와 셰르파 등 한번에 15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니만 걜젠 셰르파는 에베레스트에 6차례 올랐다고 했다. 2006년부터 해마다 한국 원정대와 함께 등반했다고 전했다. 박영석 대장과도 가까운 사이다. 니만 걜젠 셰르파는 “이번 안나푸르나 원정을 마친 뒤 함께 로체 남벽에 오르기로 계획을 잡아놨었다”고 말했다. 로체 남벽은 에베레스트 남서벽, 안나푸르나 남벽과 히말라야 3대 남벽으로 꼽히는 곳으로 박 대장은 세계적으로 어려운 루트에 모두 새 길을 낼 계획이었다. 니만 걜젠 셰르파는 “실종된 신동민 대원과도 가까웠다. 지난해 한국에 가서 그와 함께 재밌게 보내다 왔다. 그들이 사고를 당해 너무 슬프다”고 했다.그러나 한국구조대는 27일 오전 5시부터 7시간 동안 총력을 기울여 수색에 나섰다. 오후부터는 짙은 안개가 발생해 주로 오전 시간에 작업하고 있다. 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동영상=박영석 대장, 추락장소 추정 크레바스 수색 현장}

    • 201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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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석 대장 안나푸르나 실종 9일째, 神이여…

    대한산악연맹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48)과 신동민(37) 강기석 대원(33)을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맹이 파견한 한국 구조대는 26일 현지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박 대장 일행을 찾기 위한 수색작업의 강도를 높이고 범위도 넓히기로 했다. 구조대는 11명의 셰르파를 추가로 투입했다. 새로 투입된 셰르파들은 현지에서도 고산등반과 수색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국 구조대원 1명당 셰르파 4명을 1조로 3개 팀을 구성했다. 3개 팀은 가장 유력한 실종 장소로 꼽히는 절벽 밑의 균열 지역을 집중 수색할 방침이다. 구조대는 이와 함께 절벽 인근의 비탈진 경사면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했다. 박 대장의 실종 기간이 일주일을 넘기고 있지만 수색작업은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현지에서는 크고 작은 눈사태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 데다 짙은 안개도 자주 생겨나 작업을 방해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조대의 하루 수색작업 가능 시간은 4시간 미만이다. 구조대는 날씨 및 시간과 싸우고 있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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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개에 막혀… 박영석 수색 중단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에 나섰던 박영석 대장(48)과 신동민(37) 강기석(33) 대원이 실종된 지 일주일이 넘었지만 수색작업은 별다른 진전이 없다. 대한산악연맹은 25일 구조대의 수색작업이 짙은 안개 때문에 진행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날 연맹은 그동안 활동했던 한국 구조대원 6명과 현지 셰르파 7명을 전원 내려 보내고 구조대 5명과 셰르파 12명을 새로 투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안개가 구조대 교대를 가로막았다. 연맹은 헬기를 이용해 새 구조대와 셰르파를 해발 4800m의 베이스캠프에 내려놓으려 했다. 김재수 대한산악연맹이사와 김창호 대학산악연맹이사 등 한국 구조대 5명은 무사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러나 새로 투입될 예정이었던 셰르파 11명은 베이스캠프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 지점에 내려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구조대 교체가 원활히 진행되지 못함에 따라 구조작업에도 차질이 생겼다. 구조대는 이날도 균열지역을 계속 수색할 예정이었지만 중단했다. 이날 날씨가 좋지 않아 구조현장을 방문하려던 실종대원 가족들의 계획도 취소됐다. 가족들은 베이스캠프까지 직접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헬기가 뜨지 못했다. 연맹은 박 대장 일행이 실종된 지 일주일째를 맞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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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석 실종 일주일’ 기상 악화로 수색 중단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에 나섰던 박영석 대장(48)과 신동민(37) 강기석(33) 대원이 실종된 지 일주일을 넘겼지만 수색작업은 별다른 진전이 없다.대한산악연맹은 25일 구조대의 수색작업이 짙은 안개 때문에 진행되지 못했다고 밝혔다.연맹은 이날 그동안 활동했던 한국 구조대원 6명과 현지 셰르파 7명을 전원 내려보내고 구조대 5명과 셰르파 12명을 새로 투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안개가 구조대 교대를 가로 막았다. 연맹은 헬기를 이용해 새 구조대와 셰르파를 해발 4800m의 베이스캠프에 내려놓으려 했다. 김재수 대한산악연맹이사와 김창호 대학산악연맹이사 등 한국 구조대 5명은 무사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러나 새로 투입될 예정이었던 셰르파 11명은 베이스캠프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 지점에 내려 날씨가 개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연맹은 당초 12명의 셰르파를 새로 투입할 예정이었지만 11명만을 새로 투입하기로 했다. 이날 기상 악화로 인해 베이스캠프에서 철수하려던 기존의 한국 구조대 4명과 셰르파들의 발이 묶였다. 그동안 활동했던 1차 구조대원들은 며칠동안 쉬지 않고 활동한 탓에 피로가 누적된 상태다. 이들은 모두 베이스캠프에서 새 구조대와 함께 머물고 있다.구조대 교체가 원활히 진행되지 못함에 따라 구조작업에도 차질이 생겼다. 구조대는 이날도 균열지역을 계속 수색할 예정이었지만 중단했다.이날 날씨가 좋지 않아 구조 현장을 방문하려던 가족들의 계획도 취소됐다. 가족들은 이날 베이스캠프까지 직접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헬기가 뜨지 못했다.연맹은 박 대장 일행이 실종된 지 일주일째를 맞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연맹은 그동안 헬기를 이용한 정밀 사진 촬영을 진행했고 균열지역을 집중 수색했다. 그러나 박 대장 일행이 등반을 시작한 절벽 인근에서 박 대장 일행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로프만 발견했을 뿐 소재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연맹은 시간이 지날수록 박 대장 일행의 생존 가능성이 줄어드는 만큼 애를 태우고 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201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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