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협-재야 ‘불통의 벽’에 갇힌 한국축구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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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 야권 대표 조광래 감독 선임 ‘화합’실험

양쪽 소통 실패… 야권 결집 더 큰 분열 우려

“조광래 감독이 무서웠습니다. 대화하기가 겁이 났습니다.”

기술위원장 시절인 5월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과 정면으로 충돌했던 이회택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9일 감독 경질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인간적인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는 선수 선발을 놓고 조 감독과 이견을 보였으나 결국 소통에는 실패했다고 했다. 당시 조 감독은 “감독의 고유 권한인 선수 선발에 관여하지 말라”며 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이 부회장은 “내가 조 감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면서도 “내 나이 예순을 넘어 이런 일을 당했다”며 당시 심리적 충격을 받았음을 밝혔다. 감정의 골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다. 이 부회장은 “조 감독이 협회의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 부회장은 조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에 추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조 감독과의 갈등으로 기술위원장에서 물러났다.

조 감독도 이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협회로부터 제대로 된 기술 분석을 받아 본 적이 없다”며 서운한 감정을 표시했다. 그는 “일본의 지인들을 통해서 받아온 일본 기술위원회의 분석 내용과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의 분석 내용을 비교할 때마다 편차가 심했다”고 말했다. 협회의 행정 전반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시했다.

한국 축구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될 수도 있는 위기를 맞았다. 프로축구 승부조작에 이어 대표팀마저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할 경우 축구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현재의 위기는 대표팀 감독 경질을 둘러싼 잡음 때문만은 아니라는 시각이 많다. 이번 사태의 밑바탕에는 소위 축구계의 ‘야권’과 현 축구협회 수뇌부로 대표되는 ‘여권’의 해묵은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조 감독은 대표적인 ‘야권’ 인사 중 한 명이었다. 협회가 조 감독을 대표팀 감독에 선임한 것은 야권을 품에 안기 위한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다. 서로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이 문제였다. 이용수 KBS 해설위원은 “시작부터 소통이 잘 안 된 것이 문제였다. 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을 시켜서 그런 것이다”고 말했다. 소통의 실패에 대해서는 협회와 조 감독 모두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한국 축구계는 더 큰 분열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축구계는 2013년 회장 선거를 치른다. 야권의 핵심인물로는 허승표 전 한국축구연구소 이사장이 있다. 허 전 이사장은 2004년 이용수 위원과 신문선 현 명지대 교수 등과 함께 한국축구연구소를 만들며 축구 야당의 대표주자가 됐다. 그는 2009년 정몽준 회장의 퇴임 후 12년 만에 치러진 회장 선거에서 조중연 회장에게 졌다. 조 회장은 총 유효표 28표 중 18표를 얻어 10표에 그친 허 전 이사장을 물리쳤다. 그러나 허 전 이사장의 득표를 무시할 수 없었다. 조 회장은 이 같은 점을 의식하고 취임 공약으로 ‘축구계의 화합’을 내세웠다. 허승표 측 인물로 분류됐던 조 감독의 선임은 이런 뜻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 감독의 경질로 인해 축구계의 갈등이 더욱 본격화될 조짐이 보인다. 조 감독은 이날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며 “뜻이 맞는 축구인들과 함께 축구협회가 바로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톤을 낮췄지만 여운은 남았다. 조 감독의 경질이 축구 야권 세력의 결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 감독은 허 전 이사장에 대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형님으로 모셨던 분이다. 내가 대표팀 감독이 됐다고 해서 멀리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허 전 이사장은 최근 언론을 통해 축구협회를 비판하는 등 다시 전면에 나서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협회가 허 전 이사장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그와 가까운 조 감독을 경질했다는 음모론도 거론했다.

조 감독의 고향인 경남 진주시축구협회의 임원과 회원 등 30여 명은 이날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해임 결정 철회와 축구협회 수뇌부의 사퇴를 요구했다.

조 회장은 취임 직후 “인적인 통합은 물론 정신적인 통합이 중요하다”고 내세웠지만 이번 과정에서 드러난 갈등 양상은 축구계가 정신적 통합과 갈등 조정에 크게 실패했음을 드러냈다. 위기는 계속될 수 있다.

협회는 12일 10여 명의 기술위원을 선임하고 후임 감독 인선에 착수한다. 협회 기술위원회는 13일 파주 대표팀트레이닝센터(NFC)에서 황보관 위원장이 주재하는 첫 회의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는 후임 감독 인선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기술위, 외부 입김에 흔들리지 말라” ▼
조 前감독 기자회견

“대표팀 운영에 대한 기술위원회의 따끔한 질타를 받은 뒤 경질됐다면 후회가 없었을 것이다.”

조광래 전 축구대표팀 감독은 9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일방적으로 경질한 대한축구협회에 큰 아쉬움을 표했다.

박태하 수석코치, 서정원 코치, 김현태 골키퍼 코치, 브라질 출신 가마 코치 등과 함께 참석한 조 감독은 “지금처럼 대표팀이 운영된다면 차기 감독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한국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 기술뿐만 아니라 행정도 함께 향상돼야 한다”고 말했다.

경질 과정에서 기술위원회가 열리지 않고 윗선의 입김에 따라 결정됐다는 절차적 문제점을 지적한 조 감독은 황보관 기술위원장에게 “한국 축구의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기술위원회는 매우 중요하다. 외부의 입김에 흔들리지 말고 독자적으로 기술위원회를 운영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대표팀 내에서 코칭스태프 간의 불화와 선수들 사이에 내분이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 조 감독은 “모든 팀은 어려움과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축구대표팀도 그 과정이 진행 중이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박 수석코치도 “조직 내에서 소통을 위해 있는 언쟁이 축구인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 다툼으로 보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 감독은 “감독직에서는 물러나지만 용기를 내서 ‘단디’(단단히, 제대로의 경상도 방언) 하겠다”고 말해 향후 행보에 여운을 남겼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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