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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지는 그게 아니었는데…. 대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조현오 경찰청장은 민주당 이윤석 의원의 질의에 쩔쩔매며 제대로 답변을 못했다. 이 의원은 이날 경찰청이 지구대나 파출소 근무자 중 부적격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동료 간에 평가를 하도록 한 것에 큰 문제가 있다며 조 청장을 추궁했다. 이 의원은 “동료 간에 의심하고 점수를 매겨서 낙인찍는 제도 아니냐”고 목청을 높였다. 경찰청은 지난달 15일 업무 태도나 개인 신상에 문제가 있는 ‘관심직원’의 73%가 지구대나 파출소에 집중 배치돼 경찰 이미지 추락 등 부작용이 우려되니 부적격자를 가려내도록 지시했다. 파출소는 시민과 밀착돼 있는 ‘모세혈관’ 같은 경찰 조직이기 때문에 청렴성 유지를 위해 ‘문제 경찰관’을 솎아내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부적격자 색출 방법이다. 다음 달부터 분기별로 실시하는 동료평가에서 최하 점수를 받은 직원을 인사위원회에 회부해 다른 경찰서로 내보낸다는 것. 3개월마다 한 번씩 동료들끼리 퇴출 대상을 정하는 셈이다. 근무 인원이 2, 3명에 불과한 소규모 파출소에서는 서로를 물어뜯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경찰관들은 “동료 살생부를 만들어야 하느냐”며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 청장은 잘못을 시인했지만 한 달도 못 돼 폐기할 제도를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고 시행하려 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조 청장은 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관련 보고를 받으면서 담당자에게 ‘내가 보고서를 읽어볼 필요가 있겠느냐’고 묻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 세부 내용까지 챙겨 보진 않았다”고 말했다. 결재할 서류가 하루에만 수십 건인데 참모들이 귀띔을 하지 않는 한 일일이 챙겨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해명이었다. 공무원의 동료평가는 노무현 정부 때 상급자의 인사 전횡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됐다가 인기투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 폐지됐다. 동료 평가를 부활할 경우 이런 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꼴찌 경찰관’을 전출시키는 민감한 인사 제도인데도 조 청장은 참모들 말만 듣고 추진한 것이다. 이 제도가 예정대로 시행된다면 동료평가에서 꼴찌를 했다는 이유로 이 부서 저 부서로 쫓겨 다니는 경찰관도 적잖이 생길 것이다. 조 청장은 조직의 장이 결재하는 서류가 수만 명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열악한 조건에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 땀 흘리는 일선 경찰관의 사기를 꺾는 게 경찰총수가 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신광영 사회부 neo@donga.com}

경찰이 최근 ‘도가니 사건’을 계기로 여성 경찰관들로만 구성된 성폭력 전담팀을 만들기로 했다. 또 피해자를 신속히 보호하기 위해 어린이 위주로 시행해온 위급 상황 시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19세 미만 장애인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경찰청은 7일 이런 내용을 담은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보호 대책’을 발표했다. 경찰은 우선 전국 경찰서 2∼4곳을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 여경 4명으로 구성된 성폭력 전담조사팀을 만들 계획이다. 이 전담팀은 24시간 운영돼 성폭력 피해 신고가 들어오면 언제든 조사한다. 경찰청 관계자는 “전담팀 소속 여경들을 대상으로 아동·장애인 전문 조사기법을 교육해 장애인들이 제대로 의사소통을 못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다음 달부터 지방청별로 1개 권역씩 이 제도를 시범운영한 뒤 내년에 전체 경찰서로 확대할 계획이다. 경찰은 현재 초등학생만 제공받고 있는 피해자 위치추적 시스템 ‘원터치 SOS’ 서비스를 19세 미만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서비스는 어린이나 장애인이 경찰에 서비스 신청을 하면 신청인의 신상정보를 위치추적 시스템에 등록했다가 신고가 들어오는 즉시 해당 위치를 파악해 출동하는 것이다. 경찰은 전국 장애인 교육기관 155곳에 종사하는 8600여 명의 성범죄 경력을 조회해 관련 전과자가 나올 경우 이달 안에 퇴출시키기로 했다. 또 24일부터 3주간을 실종 장애인 수색기간으로 정해 성폭력 등 각종 범죄에 취약한 지적장애인들을 찾아낼 방침이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고시원방 문손잡이에서 ‘털컥’ 소리가 난 것은 오전 4시쯤이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문을 안 잠갔나?” 침대에 걸터앉아 TV를 보던 임유경(가명·17) 양은 귀를 곤두세웠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낯선 남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갈색 머리칼을 짧고 각이 지게 자른 서양인이었다. 얼굴이 불그스름한 게 술을 마신 듯했다. 그는 임 양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숙이며 방문을 닫았다. 술 취한 이웃 입주자들이 자기 방을 못 찾고 헤매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문 잠그는 걸 잠시 미루고 임 양은 평소 즐겨 보던 그 토크쇼에 다시 빠져들었다. 그리고 1분 뒤 문이 다시 열렸다. 청바지에 파란 셔츠를 입은 방금 전 그 남자였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 새벽에 들이닥친 갈색머리 남자사건이 일어난 지난달 24일 새벽, 임 양이 사는 경기 동두천시 J고시원 입주자들은 “별다른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고시원 총무는 “원룸형 고시텔이라 방음이 잘된다”고 했다. 그날 일로 임 양은 동두천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정신과 치료와 심리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5일 본인 동의를 받고 병실에서 만난 임 양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날 일을 얘기할 땐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갈색머리의 남자는 동두천에 있는 미2사단 소속 K 이병(21)이었다. 그는 고시원과 같은 건물에 있는 모텔에서 동료 병사 3명과 음란 비디오를 보다 혼자 방을 나섰다. 그는 건물을 배회하다 4층에 있는 고시원을 발견했다. 입구 신발장에는 여성용 뾰족구두가 몇 켤레 있었다. 그는 고시원방을 하나하나 열어봤다. 모두 문이 잠겨 있었지만 맨 안쪽에 있던 임 양의 방은 문이 열렸다.K 이병은 눈을 동그랗게 뜬 임 양의 뺨을 후려쳤다. 임 양이 베개와 리모컨을 던지자 K 이병은 책상에 있던 가위를 집어 들었다. 그는 “Don't move(움직이지 마)”라고 말하며 가위를 벌려 임 양의 얼굴에 갖다댔다. 가위에 손가락을 베여 피범벅이 된 손으로 임 양은 그를 계속 밀쳤다. K 이병은 냉장고 옆에 있던 과도를 잡아 그녀의 목에 들이댔다. “처음엔 술에 취해 그러는 줄 알았는데 술 냄새가 안 났어요. 저를 노려보는 눈의 초점도 뚜렷했어요.” K 이병은 끝내 임 양을 성폭행했다.K 이병은 임 양의 방에서 4시간 동안 머물며 변태적 행위까지 했다. 혐오감에 치를 떨고 있는 임 양에게 K 이병이 말을 걸어왔다. “영어로 혼자 중얼거리더니 ‘I'm sorry(미안하다)’라고 했어요.” K 이병은 임 양의 손에 난 상처에도 밴드를 찾아 붙여줬다. 그러곤 가위를 자기 목에 대고 나를 죽여 달라”며 횡설수설했다. 임 양이 “My father, my father(우리 아빠)”라고 말하면서 “여기로 온다”는 손짓을 하자 그제야 K 이병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그는 방을 나가기 전 임 양의 지갑에서 1000원권 지폐 5장을 빼갔다.○ 한국 검찰, 이례적 신속 구속임 양은 대학 진학을 꿈꾸는 검정고시생이었다. 어렸을 적 부모가 이혼한 뒤 친척집에서 살다 지난해 혼자 동두천에 방을 얻어 시험 준비를 해왔다. 임 양의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외동딸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있다. 사건이 나던 날, 임 양은 오후 10시 학원 수업을 마치고 고시원방에서 몇 시간 더 책을 봤다. 공부를 끝내고 기분 전환을 위해 잠시 TV를 보다 변을 당한 것이었다. 임 양은 “안 그래도 ‘문을 잠가야지’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놈이 들이닥쳤다”며 “검정고시 붙으면 등록금 내야 한다고 무리해서 일 나가시던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말했다.K 이병은 범행 후 부대로 무사히 돌아갔다. 현행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미군은 강력범죄를 저지르더라도 현장에서 붙잡지 못할 경우 우리 경찰이 구속할 수 없다. K 이병은 불구속 상태로 받은 경찰 조사에서 현장에 남긴 정액 등 물증을 앞에 두고도 “성관계를 맺은 거 같은데 만취 상태여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K 이병은 미군 측이 우리 정부의 범죄인 인도요청에 응해 6일 한국 검찰에 구속됐다. 사건 후 K 이병이 구속 기소되기까지 걸린 기간은 12일. 이에 앞서 서울 마포 등에서 일어난 다른 미군 성폭행 사건 때 모두 16일이 걸린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치였다. 검찰 관계자는 “사안이 중대하고 미군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지체 없이 진행했다”고 밝혔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 정권 실세들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했다고 폭로한 이국철 SLS그룹 회장(사진)이 신 전 차관에게 제공한 법인카드가 모두 3장이라고 밝혔다. 이 회장은 3장 중 1장은 신 전 차관이 다른 정부 기관에 넘겨줘 이 기관의 직원들이 서로 돌려가며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신 전 차관에게는 2005년경부터 국내 계열사 명의의 법인카드를 줬고 1, 2년 간격으로 해외 지사 명의의 법인카드를 2장 제공했다”며 “신 전 차관이 이 법인카드를 ‘다른 정부 기관에 빌려줘 돌려쓰게 했다’고 말해 그렇게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해당 기관이 어디인지 알고 있지만 지금은 밝힐 단계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은 신 전 차관이 3장의 법인카드로 결제한 액수에 대해선 “가장 최근인 2008년 6월에 제공한 법인카드는 1억 원가량 썼지만 그전에 준 카드 2장은 얼마나 썼는지 내용을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3일 검찰에 출석해 신 전 차관에게 제공한 마지막 법인카드의 전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해외 법인카드 사용 명세는 아직 검찰에 제출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해당 카드 사용 명세를 보면 상당히 민감한 내용을 알 수 있어 검찰의 수사의지를 보고 나서 자료 제출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3일 “일본 출장 때 SLS 일본 법인장과 술자리를 가진 것은 맞지만 계산은 대한항공 관계자가 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당시 박 전 차관에게 향응을 제공했던 우리 측 법인장이 해당 영수증과 관련 기록을 갖고 있지만 최근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고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이국철 SLS그룹 회장(사진)이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 정권 실세들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했다는 의혹의 진위가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는 3일 이 회장을 소환해 정권 실세들의 금품수수 의혹과 검찰의 SLS그룹 기획수사 논란 등 이 회장이 제기한 주장을 집중 검증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검찰 출석에 앞서 2일 신 전 차관이 사용했다는 법인카드 명세를 일부 공개했다. 그러나 신 전 차관의 자필 사인이 담겨 있는 영수증은 공개하지 않아 명세의 진위는 판가름하기 어렵다. 이 회장은 이날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SLS그룹 서울지사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2008년 6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매달 최대 1000만 원까지 모두 1억 원가량을 자신이 준 법인카드로 결제했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이 공개한 엑셀 파일 형식의 A4용지 5장짜리 문서에는 ‘롯데쇼핑 본점 1100달러’, ‘신세계백화점 1284달러’ 등의 형식으로 카드 사용 장소와 금액이 날짜별로 정리돼 있었다. 결제 금액은 건당 몇만 원부터 최대 수백만 원까지 다양했다. 총 사용 금액은 1억 원가량이었다. 하지만 이날 이 회장이 공개한 카드 사용 명세에는 카드 사용자를 알 수 있는 서명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회장은 “신 전 차관이 직접 서명한 카드 전표는 검찰이 수사를 통해 찾아야 한다”며 “여권을 제시해야 하는 면세점 명세만 확인해도 누가 사용했는지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날 제시된 명세표는 해당 카드사의 직인이 찍힌 공식문서가 아니어서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문서에 나오는 업소 중 일부를 찾아가 확인한 결과 신 전 차관이 결제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이 회장은 또 “지난해 4월경 SLS그룹 워크아웃 사건을 탄원하기 위해 대구지역 언론사 출신 사업가 이모 씨를 회사 직원으로 고용했다”며 “이 씨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권재진 법무부 장관을 만나 상황 설명을 했고 권 장관도 ‘충분히 알았다’고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권 장관 측은 “이 씨라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전혀 알지도 못한다”고 일축했다. 한편 이 회장이 지난달 22일 기자회견에서 “일본 출장 중이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게 현지 법인장을 통해 500만 원 상당의 향응을 제공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박 전 차관은 지난달 3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SLS그룹 간부와 만난 건 사실이지만 계산은 다른 지인이 했다”고 밝혔다. 박 전 차관은 22일에는 “일정이 바빠 술자리 자체가 없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2일 오전 1시 영화가 시작된 서울 용산의 한 ‘도가니’ 상영관은 객석이 3분의 2쯤 차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으∼ 안돼”, “제발 그만” 같은 탄식이 객석에서 들려왔다. 교장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했던 아이들을 대신해 그렇게라도 말해주고 싶은 듯했다. 가해자 전원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돼 청각장애인들이 울부짖는 장면에선 객석에서 욕설까지 나왔다. 이 영화의 원작인 소설 ‘도가니’를 쓴 작가 공지영 씨는 “판결 장면을 묘사한 한 인턴기자의 기사가 소설의 모티브가 됐다”고 말했다. 2009년 책이 나와 40만 부가 팔렸고 영화까지 돌풍을 일으키면서 경찰은 재수사를, 정부는 진상 규명을 다짐했다. 분노로 가득 찬 여론을 의식한 조치였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정부는 뭘 하다 뒷북을 치느냐”는 여론의 질책은 피할 수 없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그 질책은 사회부 기자인 내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못 해도 가슴으로, 몸으로 울부짖었던 그들의 절규를 나는 왜 듣지 못했던 것일까.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기자의 초심(初心)’을 잊은 건 아니었을까. ‘도가니 사건’을 다룬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찾아봤다. 고작 3건뿐이었다. 그마저도 공지영 씨를 인터뷰한 내용 등이 전부였다. 사건의 전말을 다루거나 피해자들의 호소를 다룬 기사는 없었다. 다른 언론도 비슷했다. 한 신문사 광주 주재기자가 몇 차례 적극적으로 다뤘을 뿐이었다. 언론은 피해자와 그 주변의 애타는 호소를 외면했다. 진실 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장애인단체의 오랜 투쟁은 딱하지만 별 도리가 없는 일로 치부됐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임은정 검사는 2007년 3월 공판 당일 작성한 일기에서 “법정을 가득 채운 농아들은 수화로 이 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그 분노에 그 절망에 터럭 하나하나가 올올이 곤두선 느낌이다”라고 적었다. 공지영 씨는 피해자들을 만난 뒤 “잘 읽히는 소설을 써서 그들의 한을 풀어주겠다”고 다짐했다. 기자를 포함한 언론은 직무유기라는 죄를 지었다. 소설가와 영화감독이 교육계와 법조계가 한통속이 돼 숨기려 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오랜 시간 열정을 쏟는 동안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런 언론이라면 피해자들을 가뒀던 ‘도가니’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당시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이한주 판사는 최근 “내 판결로 약자가 큰 고통을 받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했다. 약자의 아픔이 우리 사회의 아픔이라는 것을 왜 잊고 있었는지, 이젠 기자와 언론이 반성문을 쓸 차례다.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 현 정권 실세에 대한 이국철 SLS그룹 회장의 금품 제공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 심재돈)는 10월 3일 오전 10시 이 회장을 다시 불러 조사할 것으로 30일 알려졌다. 이 회장도 이날 서울 강남구 신사동 SLS그룹 서울사무소에서 기자들과 만나 10월 3일 검찰에 다시 출두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23일 이 회장을 처음 불러 조사했지만 당시 그는 “신 전 차관이 사용하고 서명했다”고 주장한 SLS그룹 법인카드 전표 등을 검찰에 제출하지 않아 전표가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 바 있다. 당시 이 회장은 참고인 신분이었지만 3일 다시 검찰에 나오면 피고소인 신분 조사도 받게 된다. 검찰이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등 3명이 “이 회장이 금품을 건넸다고 악의적으로 공격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고소한 사건을 특수3부에 배당해 수사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 회장이 다시 검찰에 나와 자신의 주장대로 카드 전표 등 폭로 관련 자료들을 제출하면 이 회장의 진술과 관련 자료들이 부합하는지 등을 검토해 이 회장 폭로 내용의 진위를 가리게 된다. 또 검찰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국무차장 재직 당시 일본 출장을 갔을 때 SLS그룹 현지 법인장으로부터 500만 원 상당의 식사와 술 접대를 받았다는 이 회장의 주장도 따져볼 계획이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이들이 없었다면 여리고 말 못하는 아이들은 여전히 눈물로 학교를 다녀야 했을 것이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여전히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음침하고 추악한 사건을 용감하게 세상에 드러낸 사람들. 조규남(48·당시 인화학교 학생 어머니), 전응섭 씨(49·인화원 교사), 김용목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 대표(49·목사). 그들의 용기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장 소외받고 약한 이들의 아픔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2005년 6월 중순 조 씨는 광주 인화학교에 다니는 딸(당시 13세)에게서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을 들었다. 학교 안에 ‘또래 친구인 A 양이 행정실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 조 씨는 처음에는 학생들 장난으로 치부했지만 너무 진지하고 간곡한 딸의 말에 사실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확인 결과 학생들의 말은 모두 같았다.조 씨는 직접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화학교 기숙사인 인화원에서 A 양을 빼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A 양의 할머니와 기숙사 보육교사이자 청각장애인인 전응섭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직원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A 양은 모든 사람을 두려워했고 처음에는 신고는 물론이고 상담 자체를 기피했다. 하지만 조 씨는 A 양의 손을 굳게 잡고 “죄를 지은 자들이 반드시 처벌받게 하겠다”고 약속해 승낙을 얻었다. 조 씨와 A 양은 같은 달 22일 학교 밖에서 전 교사를 만나 광주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를 찾아 신고했다. 추악한 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이다.신고 이후 충격적인 교직원들의 장애아동 성폭행 사건에 광주지역 전체가 들끓었다. ▼ “가해교사-재단 뉘우침 없어… 피해학생 보면 가슴 미어져” ▼같은 해 7월에는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 26곳이 참여한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원회’가 결성돼 공동 대응에 나섰다. 김용목 대표는 “조 씨와 전 교사의 용기 있는 행동이 없었다면 진실이 영원히 묻혔을 것”이라고 말했다.결국 조 씨 등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화학교 김모 교장(2009년 9월 사망), 행정실장 김모 씨(63), 교사 전모 씨 등 6명은 청각·지체장애 학생 9명을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최종 형량은 실형 2명, 집행유예 2명, 공소시효 소멸에 따른 공소기각과 불기소 2명 등이었다. 판결이 나오자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사건에 연루된 교사 1명은 학교로 복직까지 했다.김 대표는 “가해자들의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양심의 시효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며 “가해 교사나 재단 측은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뒤늦게 왜 이러느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조 씨를 도운 전 교사의 고통도 컸다. 한솥밥을 먹던 가해 교직원들과 재판정에서 얼굴을 맞대야 하는 힘겨운 상황이 지속된 것. 인화학교는 결국 전 교사를 2006년 해직했고 전 교사는 성폭행 사건 외에 자신의 복직 소송도 진행해야 했다. 복직 소송에서 이긴 그는 현재 인화근로시설 지도교사로 일하고 있다. 전 교사는 동아일보의 인터뷰 요청을 끝내 고사했다.1960년 설립된 인화학교는 성폭력 사건 발생 직전 장애우 78명이 생활했지만 현재는 22명만 있다. A 양 등 당시 인화학교 재학생 18명은 사건 신고 후 가해 교직원 처벌을 요구하다 학교에서 쫓겨나 다른 시설로 흩어졌다. 또 당시 양심선언을 한 인화학교 교사 15명 가운데 11명도 교직을 떠났다.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조 씨는 지난달 광주 모 방송국에서 열린 청각장애인 후원행사에서 오랜만에 A 양을 만났다. 조 씨는 “A 양에게 약속한 가해교사 처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A 양이 해맑게 웃어 가슴이 더욱 미어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한편 영화 ‘도가니’의 소재가 된 광주 인화학교 원생 성폭력 사건에 대해 경찰이 전격 재수사에 착수했다.경찰청은 28일 “본청 지능범죄수사팀 요원 5명 등 15명으로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관련 의혹을 모두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우선 인화학교 행정실장 김 씨 등 사법 처리를 받은 4명과 가해자로 지목됐지만 처벌을 받지 않은 교직원 6명의 혐의를 다시 수사해 여죄를 캐기로 했다. 또 경찰은 인화학교 원생들 사이에서도 성폭행이 있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피해 사례를 추가로 찾고 있다.경찰은 교내 성폭행이 5년 넘게 드러나지 않았고 사건이 불거진 후에도 학교 측이 피해자들에게 합의를 종용하는 등 사건을 축소한 의혹이 있어 당시 조사 경찰관과 학교 측의 유착 여부, 교육청 등 관계 당국의 감독 소홀 문제도 파헤칠 계획이다. 교육과학기술부도 기숙사가 설치된 전국 41개 특수학교를 대상으로 다음 달 장애 학생 생활실태를 점검할 방침이다.한편 이 사건의 항소심 재판을 맡았던 이한주 서울고법 부장판사(55·사법시험 25회)는 28일 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위로의 뜻을 밝혔다. 이 부장판사는 “법률적 판단의 정당성을 떠나 이 판결로 소수 약자가 큰 고통을 받은 점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가슴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고법과 광주지검은 보도자료를 내고 “영화에서 가해자를 감싼 것으로 그려진 것 등 실제와 다른 내용이 많다”고 밝혔다.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인화학교 ::사회복지법인 ‘우석’이 1960년 광주 광산구에 세운 청각장애 특수학교. 한때 학생 수가 100명을 넘었을 정도로 광주 최대의 장애인 교육시설로 손꼽혔다. 2000년부터 5년간 이 학교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도가니’가 최근 흥행하면서 가해자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동영상=아동 성폭력 고발...영화 ‘도가니’}

28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서울복지병원 장례식장.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하며 70만 원 남짓한 월급을 쪼개 다섯 어린이를 도와 온 ‘철가방 천사’ 김우수 씨는 영정에서도 헬멧을 쓴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영정 앞에 단발머리의 한 여고생이 고개를 숙인 채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고 있었다. 김 씨에게서 2006년부터 최근까지 매달 2만∼3만 원씩 후원을 받아온 신윤희(가명·16) 양이었다.어렸을 적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살아온 신 양은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김 씨의 관심 덕에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신 양은 어렵게 세 자매를 키우는 할머니를 위해 은행원이 돼 돈을 벌고 싶었다. 그 꿈을 위해 올해 상고에 진학했다.이날 아침 김 씨의 소식을 접한 신 양은 그동안 미뤄왔던 편지를 한 통 썼다. “저를 돕기 위해서 아저씨는 이렇게 애쓰셨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매일 투정만 부리며 살았네요. 저도 이젠 아저씨를 본받아 남을 열심히 도우며 살게요.” 신 양은 “제대로 보답도 못해 보고 허망하게 떠나시는데 마지막까지 웃고 계셔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며 멍하니 영정을 바라봤다. ○ 천사의 사랑을 받았던 아이들김 씨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어린이재단을 통해 후원해 왔던 이정욱(가명·16) 군. 이 군의 어머니 김모 씨(45)도 이날 김 씨의 소식을 듣고 말을 잇지 못한 채 흐느꼈다. “저와 남편도 고아로 자라서 그게 얼마나 아프고 외로운지 잘 알아요. 그런 분이 우리 아이를 도와주셨다니….”이 군의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몸을 다쳐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 어머니 김 씨가 식당 주방일을 하며 받는 돈에 정부 보조금을 합쳐 한 달 80여만 원이 생활비의 전부였다. 여기에 김 씨가 보내주는 돈은 이들에게 큰 액수였다. 김 씨는 “4년 넘게 이름도 없이 꼬박꼬박 후원해 주던 사람이 자신도 형편이 어려운 고아 출신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그분이 보내 준 후원금으로 정욱이가 평소 못 보던 참고서를 살 수 있게 돼 성적도 많이 올랐다”고 했다.충북 제천시의 중학생 김민지(가명·14) 양에게도 김 씨는 ‘키다리 아저씨’였다. 김 양도 지난해 6월까지 월드비전을 통해 김 씨로부터 매달 2만∼3만 원을 후원받았다. 김 씨는 2009년 6월 김 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원자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응원해 주시는 투명인간 같아요”라고 쓰기도 했다.당시 김 양의 집은 어머니 홀로 식당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늦둥이 남동생이 생기면서 어머니마저 일을 그만둔 상황이었다. 김 씨의 후원금은 김 양 가족에게 작지만 따뜻한 희망이었다. 김 씨는 매달 보내는 후원금 외에 추석이나 크리스마스, 설날은 물론이고 김 양의 생일에도 매번 2만∼3만 원을 보냈다. 김 양은 2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아저씨 바람대로 나중에 커서 꼭 남을 도울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김 양의 어머니는 “지방에 사는 탓에 빈소에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럽다”며 “김 씨의 격려 덕분에 딸이 성격도 밝아지고 적극적으로 변했다. 고마운 마음이 꼭 전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후원 아동과 찍은 사진이 유일한 재산김 씨가 살던 서울 강남구 논현동 4.95m²(약 1.5평)짜리 고시원 방은 28일 기자가 찾았을 때 한낮인데도 전등 스위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방에 남아 있는 김 씨의 구형 휴대전화에는 일하던 중국집 직원과 사장, 고시원 총무 전화번호 외에는 아무것도 저장돼 있지 않았다. 김 씨가 세상과 교류한 흔적은 김 씨가 후원했던 아동들의 증명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뿐이었다. 액자에는 아이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함께 적혀 있었다. 방에 남아 있는 김 씨의 통장에는 20일 어린이재단 앞으로 후원금 3만 원을 송금한 기록이 있었다. 김 씨의 마지막 기부였다.김 씨가 일하던 강남구 일원동 중국집 이금단 사장(45)은 “김 씨가 생전에 결혼할 만한 여성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고아로 컸던 기억 때문인지 쉽사리 결혼을 결심하지 못했다”며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대신에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도우며 자신의 상처를 씻어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사고가 나던 날 김 씨가 오토바이 시동을 걸며 여러 아파트 단지를 들러 그릇을 한꺼번에 수거해 오겠다고 했는데 그걸 말리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김 씨는 3년 전 폐 수술을 받은 뒤 형편이 더 어려워져 2010년 6월 어린이재단을 통해 후원하던 신 양 외에 다른 아동들에 대한 후원은 중단해야 했다. 신 양이 부모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점 때문에 김 씨가 끝까지 후원을 이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빈소를 찾은 어린이재단 후원회장 최불암 씨(71)는 “남몰래 아이들을 도와 온 김 씨의 선행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줬다. 진실은 아무리 숨겨도 언젠가는 알려지기 마련인데 그게 죽음을 통해 밝혀졌다는 게 씁쓸하다”고 말했다.한 중년 남성은 조문 뒤 빈소 구석에 앉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그는 “돈을 허튼 데 쓰고 살았다. 고인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행원에서 시작해 19년 만에 은행장까지 오른 한 남자의 인생이 결국 투신자살로 끝을 맺었다. 최근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돼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검찰의 비리 수사 대상에 오른 제일2상호저축은행 정구행 은행장(50)이 23일 정오경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제일2상호저축은행 본점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 이 저축은행은 이날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신입행원에서 은행장까지 대전상고와 한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정 행장은 25년 전인 1986년 제일저축은행 장충동 본점 영업부 행원으로 입사했다. 2002년에는 자회사인 제이원저축은행(현 제일2저축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남대문, 테헤란로 지점장을 지낸 뒤 2005년 12월 대표에 올랐다. 제이원저축은행은 제일상호신용금고(현 제일저축은행)가 1999년 인수한 일은상호신용금고가 모태로, 정 행장 취임 후인 2006년 제일2저축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 주변에서는 정 행장이 특유의 넉살과 유머로 영업 관련부서를 두루 거치며 영업통으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입사 동기 중 승진이 가장 빨랐다고 전했다. 특히 대주주인 유동천 회장의 신임이 두터워 정 행장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지 19년 만인 2005년 은행장까지 올랐다. ○ “죗값은 제가 받겠다”며 투신 정 행장은 이날 검찰 압수수색이 진행되는 도중 건물 6층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 행장은 투신 직전 건물 3층의 박모 이사 방에 들러 “지갑 속에 뭔가 적어뒀으니 보라”고 말한 뒤 옥상에 올라간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검찰은 2층을 압수수색 중이었다. 3층 행장실에 있던 정 행장 양복 상의에서는 “현재 매각 관련 실사를 3곳에서 하는 상태다. 실사가 정상으로 이뤄져도 영업정지 후 자력 회생한 전례가 없다 보니 기관별 협의가 제시간 안에 끝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저희도 후순위채 5000만 원 초과 예금 고객이 있다. 관계 기관의 협조와 관심을 부탁드린다. 죗값은 제가 받겠다”고 자필로 쓴 편지가 발견됐다. 정 행장은 투신 직전 박 이사와의 통화에서 “매각 절차를 잘 부탁한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날 검찰이 압수수색을 벌인 제일2저축은행은 18일 금융위원회로부터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돼 6개월간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7개 저축은행 가운데 하나다. 정 행장이 투신자살한 23일 오전 검찰은 제일2저축은행 외에도 토마토저축은행과 프라임저축은행 등 최근 영업정지된 저축은행 7곳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불법대출과 대주주의 비리 등 저축은행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잇단 악재에 심리적 압박 느낀 듯 업계에서는 정 행장이 불법대출 등 비리에 깊숙이 관여했을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계열사 여·수신은 보통 모회사 결정을 따르는 데다 정 행장은 아직 전무급이라 중요 의사결정에 발언권이 그다지 세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제일저축은행 관계자는 “정 행장은 검찰 소환 대상에서도 제외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5월부터 제일저축은행의 뱅크런(대량 예금인출)이 제일2저축은행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예금이 계속 빠져나가고 제일저축은행이 제일2저축은행의 매각을 추진한 데 따른 스트레스는 심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제일2저축은행의 한 임원은 “정 행장은 육군 학사장교 출신으로 강직한 성품이었다”며 “최근 영업정지와 이날 압수수색 등 악재가 겹쳤고 25년간 관리해온 단골 고객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에 견딜 수 없는 심리적 압박을 받은 것 같다”고 전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53)에게 수년간 10여억 원을 줬다고 폭로한 이국철 SLS그룹 회장(49)은 자신의 회사 홍보기사를 당시 한국일보에 재직하던 신 전 차관이 실어준 데 대한 감사 표시로 돈을 준 것이 시작이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사검색 시스템 ‘카인즈(www.kinds.or.kr)’ 검색과 이 회장에게 확인한 결과 이 기사는 2004년 1월 게재됐다. 철도청에서 근무하던 이 회장은 1994년 퇴직한 뒤 철도부품 납품업체인 ㈜디자인리미트를 설립했다. 1998년에는 해태중공업을 인수하면서 철도차량 제작에도 나섰고, 2004년 10월 SLS중공업으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2004년 1월 10일자 한국일보 13면에는 ‘전동차 시장 경쟁체제로 ㈜디자인리미트, 로템 독점에 도전장’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200자 원고지 3, 4장 분량으로 게재됐다. 디자인리미트가 일본 히타치와 전동차 제작 기술 제휴를 맺고 시장에 진출한다는 내용. 기사는 “로템이 독점해온 국내 전동차 시장이 마침내 경쟁 체제로 바뀔 전망”이라며 “시장가격이 크게 낮아져 지하철 적자에 따른 국고 낭비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품질과 안전도, 내부 인테리어 등에서 한국 전동차의 시장 경쟁력이 크게 높아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기사는 신 전 차관이 아닌 다른 기자의 명의로 작성됐다. 그는 한국일보 정치부장이었다. 당시 서울지하철공사는 낡은 2호선 전동차를 교체하기 위해 신형 전동차 54량과 개조 전동차 15량을 구입하기로 하고 경쟁 입찰을 실시했다. 로템과 디자인리미트 두 회사가 참가했고 결국 로템이 469억여 원에 낙찰받았다. 그러자 한 달여 뒤인 2월 17일 한국일보 10면에는 ‘지하철 2호선 전동차 입찰 뒷말, 로템 최종 선정…탈락업체 반발’이라는 200자 원고지 5, 6장 분량의 기사가 게재됐다. 이 기사는 관련업계에서 부실심사 의혹이 일고 있다는 내용으로 디자인리미트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됐다. 기사는 “서울시와 지하철공사는 불공정하고 부실한 입찰심사 의혹에 대해 공식 해명해야 한다”는 디자인리미트의 주장도 실었다. 이 기사는 한국일보에만 실렸다. 이에 대해 한국일보는 “신 전 차관은 정치담당 부국장으로 승진한 지 2주 만인 2월 9일 퇴직해 조선일보로 옮겼다”며 “자체 조사 결과 홍보성 기사가 게재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22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2004년 2월 기사에 대한 감사 표시로 3000만 원을 건넸다”며 “그가 언론사 재직시절에는 300만∼500만 원을 줬고 정권 핵심부로 진출할수록 돈을 더 많이 줬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이어 “2004년 조선일보로 회사를 옮긴 뒤에도 매달 500만∼1000만 원씩 줬고,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캠프였던 안국포럼으로 옮긴 뒤에는 ‘급여가 없으니 1장을 달라’고 해 1억 원과 법인카드를 쓰라고 줬다”고 폭로했다. 신 전 차관이 비서실 정무·기획1팀장일 때는 매달 1500만∼5000만 원을, 문화부 차관으로 재직할 때는 매달 1500만∼2000만 원과 함께 상품권 5000만 원을, 문화부 장관 후보자에서 낙마한 뒤에도 해외여행비 1000만 원과 법인차 대여비 700만 원을 줬다고 주장했다.유성열 기자 ryu@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에게 10여억 원의 금품을 건넸다고 폭로한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신 전 차관뿐 아니라 청와대 고위 간부 등 현 정권 실세 3명에게도 향응과 금품이 건네졌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22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 SLS그룹 서울사무실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신 전 차관이 ‘K 씨와 I 씨 등 정권 실세들에게도 인사를 해둘 필요가 있다’며 2008년 추석 때 3000만 원, 2009년 설날에 2000만 원 등 모두 5000만 원어치의 상품권을 가져갔다”고 말했다. 그는 “신 전 차관에게 준 상품권이 K 씨 등에게 실제로 전달됐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K 씨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국철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상품권을 받은 적도 없다”며 “내 재산이 150억 원 가까이 되는데 그런 걸 왜 받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그는 “신 전 차관도 오늘 전화해서 그런 소리가 나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라고 덧붙였다. I 씨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금품을 받은 적도 없다”라고 밝혔다. 이 회장은 또 “2009년 국무총리실로부터 P 씨가 일본 출장을 가니 알아서 잘 접대를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며 “일본 현지 법인장을 통해 P 씨에게 500만 원 상당의 식사와 술 접대를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부부처의 차관급 간부로 재직하던 P 씨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이다. 이 회장은 “P 씨와는 전혀 안면이 없었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국무총리실 연락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며 “당시 접대를 했던 법인장이 (접대)지급 명세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P 씨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국철이란 사람은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는 생면부지”라며 “재임기간에 일본에 두 번 갔지만 일정이 빠듯해 접대를 받을 시간조차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신 전 차관이 금품을 받은 건 앞으로 폭로할 내용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라며 “내가 입을 더 열면 파장이 엄청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해당 인사가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신 전 차관과 P 씨 등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근거 자료에 대해서도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 그때 제출하겠다”며 공개하지 않았다. 이 회장의 폭로 내용에 대해 검찰은 공식적으로는 “한쪽 진술만 가지고 당장 수사에 착수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신 전 차관에 대한 내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체 감찰을 대폭 강화하기로 한 것으로 22일 전해졌다. 민정수석실은 24일 이 대통령이 귀국하는 대로 강도 높은 공직 기강 점검대책을 보고할 예정이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

3월 서울 상계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량털이범 황모 씨(38)가 일명 ‘맥가이버칼’로 차문을 열고 안에 있던 물건을 훔치다 주민 염모 씨(40)에게 발각됐다. 황 씨는 “여기서 뭐 하느냐”는 염 씨의 물음에 “잠복근무 중인 경찰”이라며 태연한 표정으로 경찰 신분증을 꺼내 보여줬다. 염 씨가 경찰 신분증 사진과 다른 황 씨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황 씨는 염 씨에게 전자충격기를 쏜 뒤 훔친 물건을 챙겨 달아났다. ○ 경찰 신분증, 한 달 132개꼴 분실경찰청이 20일 한나라당 박대해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7월 경찰공무원증 분실신고는 무려 922건. 경찰관들이 한 달에 132개꼴로 신분증을 잃어버리고 있는 셈이다.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분실된 신분증은 3793개에 달했다. 습득한 신분증을 이용해 경찰 등 공무원을 사칭한 범죄도 올해 8월까지 17건이 발생해 지난해 12건을 넘었다.경찰장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무전기 773대, 신원조회기 530대, 교통경찰관용 개인휴대정보기기(PDA) 68대 등 정보화 장비 1371대가 분실된 것으로 나타났다. 수갑은 2007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69개, 시위대가 경찰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때 쓰이는 이격용 분사기는 23정 분실했지만 한 개도 회수되지 않았다.무전기 1대 가격은 90만∼110만 원대로,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분실된 무전기 중 끝내 찾지 못한 510대를 새로 마련하는 데 든 예산이 5억 원에 이른다.○ 경찰 신분증, 장비 범죄 악용돼 경찰 무전기는 1대만 있어도 각종 단속정보와 경찰차 출동상황 등을 쉽게 감청할 수 있다. 2008년 충북 청주에서는 강모 씨(38)가 우연히 주운 경찰 신분증과 무전기를 가지고 경찰을 사칭하며 유흥업소 종업원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 경찰의 휴대용 신원조회기로 차적 조회를 하면 도난 및 수배 여부는 물론이고 차주의 이름 주소 사진 등 개인정보를 모두 조회할 수도 있다.이격용 분사기도 캡사이신 고추농축액이 들어 있어 시위대에 넘어가면 경찰이 진압 과정에서 도리어 경찰 장비로 공격을 받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경찰 관계자는 “무전기나 이격용 분사기는 집회 현장에서 시위대에 빼앗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신원조회기는 현장 단속을 하면서 순찰차 트렁크에 올려놨다가 깜박 잊고 철수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분증이나 장비를 분실한 직원에 대한 징계는 오히려 완화되는 추세다. 당초 경찰은 신분증 분실자에 대해 견책 징계를 했지만 일반 공무원과 비교해 처벌이 무겁다는 내부 반발 때문에 2006년 징계에 해당하지 않는 경고로 수위를 낮췄다. 신분증을 여러 번 잃어버린 경찰관에 대한 불이익 규정도 없다. 일반 국민은 여권을 두 번 이상 분실하면 관할 경찰서의 내사대상이 되고 여권 발급에 제재를 받는다.박대해 의원은 “일반 공무원과 달리 경찰 신분증은 사칭 범죄로 이어질 수 있고 경찰 장비는 그대로 범행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인터넷상 북한 찬양 게시물에 대한 경찰의 삭제 요청이 최근 2년 새 45배 가까이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이 한나라당 박대해 의원에게 제출한 ‘친북 게시물 삭제요청·권고 현황’에 따르면 경찰이 방송통신위원회에 삭제 요청을 하거나 해당 사이트에 삭제 권고를 한 건수는 2008년 1793건에서 2009년 1만4430건, 지난해에는 8만449건으로 늘었다. 경찰이 삭제를 요청한 게시물에는 천안함 사건 두 달 뒤인 지난해 5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낸 ‘북남관계 파탄시킨 남측 당국의 죄악 단죄’와 ‘무모한 대응에 정의의 전면전쟁으로 대답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북한 국방위원회 성명 등 북측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대부분이다. 경찰은 “노동신문 등 북측 매체의 주장이나 김정일 찬양 글 등을 지속적으로 유포시키는 경우에 한해 삭제 요청을 했다”고 밝혔다. 친북 게시물 삭제 요청이 급증한 것은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북한을 대변하는 게시물이 급증한 데다 현 정부 들어 친북 게시물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특히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북한이 인터넷을 활용한 대남 여론전에 집중해 친북 게시물이 급증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국내 웹사이트에 북측을 두둔하는 게시물이 집중 게재된 시기는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궁지에 몰려 남한 내 동조여론을 이끌어내려 했던 때와 겹치는 것으로 드러났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에서 그동안 자체적으로 운영해왔던 내부고발 시스템을 외부 민간업체에 위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신문고’나 ‘신고포상금제’ 등 내부적으로 자정 노력을 했지만 조직 내 온정주의와 내부 고발자에 대한 신변 보호가 취약한 풍토 탓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이 같은 내부고발 시스템의 아웃소싱을 도입한 곳은 고용노동부를 비롯해 27곳에 이른다.○ “내부 고발자 우리가 지킨다” 각 기관이 이 같은 아웃소싱을 도입한 가장 큰 이유는 제보자의 신원 보장 때문. 자체적으로 고발 시스템을 운영하다 보니 조직 내 상급자나 기관장이 제보자가 누구인지 암암리에 알아보는 경우가 많았다. 감사실 등 고발을 접수한 부서도 업무 이전에 상급자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보니 알음알음으로 제보자 신원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외부 독립적인 기관이 온라인상에서 익명 제보를 받은 뒤 그 내용을 해당 기관 감사 담당자에게 직접 전달할 경우 중간에 제보자 신원이 노출될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이런 제도를 도입한 미국은 현재 내부고발 아웃소싱 회사 2곳에 마이크로소프트사와 하버드대 등 3400여 개의 기업과 관공서가 가입해 있고 일본도 500여 개 기관이 내부비리 관리를 외주 업체에 맡기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한국기업윤리경영연구원(KBEI) 산하 ‘헬프라인’이 국내 첫 내부고발 대행 기관이다. 민간기업인 신세계가 2007년 첫 의뢰기관이 된 이후 고용노동부와 해양경찰청 등 정부기관과 서울시 경기도 부산시 경북도 등 지방자치단체, 한국수자원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공기업을 포함해 현재 27곳이 헬프라인을 통해 내부고발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신고 방법은 제보자가 헬프라인 홈페이지(www.kbei.org)에 접속해 해당 기관을 선택한 뒤 비리 내용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익명 보장을 위해 신고자는 회원 가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제보 내용이 부실할 경우 해당 기관 감사실 관계자가 문의사항을 홈페이지에 올리고 신고자는 본인 의사에 따라 추가 설명을 할 수 있다.○ 아웃소싱 후 제보 봇물 내부고발 시스템을 외부에 위탁하면서 내부 비리 고발도 늘어나는 추세다. 부산시의 경우 지난해 부산 해운대구 우동 나루공원 환경 개선 공사를 하면서 나무 수천 그루를 부실 시공한 사실이 헬프라인을 통해 접수돼 감사 결과 사실로 확인됐다. 이로 인해 업체로부터 직원들 회식비 명목으로 50만 원을 받은 담당 계장을 비롯해 직원 2명이 훈계를 받고 3명이 주의를 받았다. 부산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는 직원 박모 씨가 근무시간에 외근 처리를 하고 대학원 강의를 수강한 사실이 발각돼 훈계 조치를 받았다. 또 일선 고교 학부모들이 수천만 원의 불법찬조금을 모금한 사실도 접수돼 찬조금 전액을 반환조치한 일도 있었다. 신고 건수도 늘고 있다. 부산교육청은 매년 1, 2건에 그쳤던 신고접수가 지난해 헬프라인 도입 후 38건으로 늘었다. 부산시도 지난해 제도 시행 후 헬프라인을 통해 12건의 고발이 접수됐다. 반면 같은 기간 시 감찰과에는 단 한 건의 제보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내부 비리 접수 대행기관이 여전히 고객인 회원사 간부들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박종선 한국기업윤리경영연구원장은 “회원 기관에서 제보자를 알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적이 있지만 원천적으로 익명 제보이기 때문에 우리도 제보자 신상을 알 길이 없다”며 “익명보장이 안 되면 업무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만큼 신원보호는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내부 고발자 입을 막는 게 조직에 가장 큰 치명타입니다.” 박종선 한국기업윤리경영연구원장(58·사진)은 15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저축은행 사태를 언급하며 내부 비리 감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저축은행 간부들이 장부를 흑자로 조작해 거액의 배당금을 빼돌리는 등 조직적 비리가 있었지만 바깥에선 이를 계속 알지 못해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박 원장은 “내부 문제는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데 그걸 조기에 끄집어내지 않고 놔두면 언젠가 곪아터지기 마련”이라며 “조직의 치부가 언론을 통해 드러나고 수사기관이 칼날을 들이대면 그때 남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국뿐”이라고 말했다 박 원장은 최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회사 내 만연한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다”고 나선 것에 대해 “기업의 경쟁력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은 내부 비리가 가장 큰 적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부패와 뇌물만 차단하면 성장률이 1%포인트, 코스피가 500포인트 올라간다”는 한 연구기관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내부 비리 척결을 통해 조직구성원들의 불만을 없애는 것이 기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2008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소장을 지낸 박 원장은 당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한 관계가 경제 전반의 효율을 해친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대기업 직원들은 우월적인 지위에 젖어 노력하지 않고, 납품업체 직원들은 패배의식에 빠져 의욕을 잃게 된다는 것. 박 원장은 “조직 내부에서 잘못된 관행과 비리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않으면 양쪽 다 도태될 수밖에 없다”며 “내부 신고제는 최악의 결과에 이르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자는 조기경보 시스템”이라고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화재 진압의 관건은 소방차의 신속한 출동이다. 소방당국이 ‘5분 내 도착’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방방재청이 집계한 전국의 소방차 ‘5분 내 현장 도착 비율’은 56∼97%. 통계가 사실이라면 매우 양호한 셈이다.하지만 보통 17km 정도인 화재 현장에 도착하는 데 5분밖에 안 걸렸다면 이는 사실이기 어렵다. 시속 200km 이상으로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상당 부분의 소방차 도착시간이 실제보다 앞당겨져 허위 보고된 것으로 드러났다. 전남지역은 평균 시속 205km 속도로 달렸다고 하는 등 대부분의 농촌 지역에서는 시속 100km 이상의 속도로 달려 현장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소방차는 물과 사다리 등 중장비를 실은 대형차이기 때문에 탁 트인 직선 도로에서도 시속 80km 이상을 내기 어렵다. 신호등과 사거리, 교통정체가 심한 도시라면 속도를 내기란 더욱 어렵다. 현장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서 화재 현장의 연기만 보이면 화재 현장 도착으로 보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허위보고는 소방방재청이 ‘출동 5분 내 도착’을 소방서 평가에 반영하면서 더 심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 농촌 소방차 시속 100km 이상 밟아 도착한 셈 ▼○ 소방차 시속이 200km? 소방방재청이 14일 한나라당 유정현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남지역 소방서에서 5분 내에 현장에 도착했다고 보고한 것은 모두 1146건. 평균 출동거리는 17km였다. 이 거리를 5분 만에 도착했다면 단순 계산으로도 소방차가 경주용 자동차처럼 평균 시속 205km로 달렸다는 얘기다.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평균 출동거리가 12.9km와 12km인 강원과 충북은 5분 내에 도착하기 위해 각각 시속 156km, 시속 144km로 달린 셈이다. 16개 광역시도 중 100km 이상으로 달린 곳은 이외에도 경북(141km), 충남(119km), 전북(107km), 경남(107km), 제주(105km) 등 8곳에 이른다. 도착시간은 최초 신고에서 현장 도착까지 걸린 시간. 통상 신고 받고 소방차가 출동하기까지는 1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소방방재청 기록대로라면 이보다 훨씬 빨리 달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시속 60km로 달릴 경우 5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5km 안팎에 불과하다. 하지만 8개 지역의 출동거리는 8.7∼17km로 사실상 5분 내 도착이 불가능한 거리. 이들 소방서는 전체 출동의 56∼82%를 5분 안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이처럼 허위보고가 잦은 것은 ‘5분 내 도착’이 소방서 평가에 주요 항목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소방방재청은 지난해 초 ‘화재와의 전쟁’을 천명하며 이 규정을 도입했다. 지방의 한 소방서장은 “5분 내 도착 여부는 외부에서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직원들이 멀리서 연기만 보여도 일단 도착했다고 보고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편 평균 출동거리가 3.3km인 서울은 소방차 평균 시속이 40km였다. 대전이 시속 47km, 광주 51km, 대구 53km 등 출동거리가 짧은 대도시는 소방차가 시속 40∼50km로 달린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출동을 준비하는 데 통상 1분이 걸리고 또 도심 교통상황이 시골보다 혼잡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역시 상당히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인프라 그대론데….”5분 내 도착을 평가에 반영하다 보니 출동거리가 멀 경우 일부 소방관은 출동 때마다 목숨을 걸고 운전하게 된다고 토로하고 있다. 올 1월 경기 연천군에서는 출동 소방차가 앞 차를 추월하다 옆 차와 부딪쳐 여러 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기 과천시에서도 지난해 10월 교차로에서 소방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우회전을 하다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 소방차 교통사고는 2008년 224건, 2009년 334건, 지난해 370건으로 매년 늘고 있다.소방당국의 ‘5분 내 도착’을 점수화한 이유는 화재 발생 5분쯤 뒤 불길이 순식간에 확산되는 ‘플래시 오버(flash over)’가 일어나 빠른 출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 의원은 “화재 조기 진압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제도 개선 없이 실적만 압박하는 것은 탁상행정”이라고 지적했다.미국 뉴욕과 일본 도쿄의 경우 현장 도착시간을 7분으로 권고하고 있지만 이를 업무평가에 반영하지는 않고 있다. 그 대신 소방파출소가 서울보다 2, 3배 많고 소화전도 2배 이상 촘촘히 배치돼 있는 등 소방 인프라 확충에 주력하고 있다. 뉴욕과 도쿄의 소방당국이 출동 도착시간을 명시하지 않고도 화재 관리를 잘할 수 있는 것은 소방인력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세 도시의 인구는 비슷하지만 서울 소방인력은 5700명 수준으로 뉴욕의 1만7000명, 도쿄의 1만8000명과 비교해 3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윤명오 서울시립대 방재연구센터 교수는 “우리는 소방서가 적고 소화장비도 부족하다 보니 소방관들에게만 무조건 빨리 도착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라며 “스프링클러 등 자동소화설비를 충분히 갖춰 소방차에만 의존하지 않는 화재 대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얼마 전 임산부 4명이 원인 미상의 폐렴으로 숨진 이유가 가습기 살균제 때문이라는 보건당국의 조사 결과가 발표돼 충격을 줬다.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사용한 살균제가 역설적으로 산모와 태아의 숨통을 죈 ‘위생의 역습’이었던 셈이다. 살균제로 청소한 가습기를 틀면 일부 살균성분이 함께 방출돼 인체에 흡수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인체에 해를 끼칠 법도 한데 살균제는 정부 관리 품목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습기 살균제의 치명적인 영향에 대해 들여다보는 정부 기관이 없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일이 터지고 나서야 “가습기 살균제가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다. 앞으로 잘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산모와 태아의 목숨을 대가로 치른 때늦은 반성이었다. 청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신종 위생용품이 늘고 있지만 정부 관리 능력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례는 그뿐만이 아니다. 공기청정기나 야채·과일세척기는 일부 제품이 오존을 공기 중에 방출해 인체에 해롭지만 아직 이렇다할 오존 배출 허용 기준이 없다. 성균관대 의대 사회의학교실 정해관 교수는 “오존은 몸속의 나쁜 균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균을 죽인다”며 “오존을 마시면 폐 안에 있는 세포가 죽어 천식 환자나 노약자들에게 치명적”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제품들이 몇 년간 아무 제재 없이 팔리다 일부 소비자가 불안을 호소하자 정부가 뒤늦게 나섰다. 지식경제부는 6월에야 오존 배출농도가 높은 야채세척기와 공기청정기에 개선 권고를 내렸다. 요즘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과일용 세정제는 아직도 아무 대책이 없다. 과일세정제는 물에 씻더라도 덜 씻긴 일부 성분이 몸에 흡수되기 때문에 인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도 과일세정제 용기엔 ‘야자나무 추출물’ 등 두루뭉술한 표현이 많다. 식약청은 중금속과 산성도(pH) 등 5가지 항목만 검사할 뿐 식품 추출물의 성분은 따져보지 않는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최경호 교수는 “식품 추출물이라도 독성이 있는 경우가 많아 어떤 물질이 혼합돼 있는지 철저히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식약청 관계자는 “사람이 먹어도 되는 식품에서 추출한 것인데 무슨 검사가 더 필요하냐”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러 생명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 파문을 겪고도 보건당국의 안일한 태도는 별로 바뀐 게 없어 보인다.신광영 사회부 neo@donga.com}

경찰이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사태를 계기로 집회 시위 시 대응 수위를 종전보다 더 강화하기로 했다. 경찰은 또 선도적이고 포괄적인 범죄예방을 위해 경찰관의 업무행동을 제약하는 현행 경찰관직무집행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경찰청은 5일 그동안의 시위 관리 원칙을 더 강화해 도로 점거나 폴리스라인 침범 등 사실상 거의 단속하지 않았던 불법행위를 앞으로는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폴리스라인 침범 등 경미한 불법행위의 경우 종전에는 물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증거만 확보한 뒤 사후에 처벌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 기준을 규정대로 적용해 불법시위 발생을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것이다. 경찰청 고위관계자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의 경우 지난 정부 때부터 민주적 절차를 거쳐 공사가 결정됐는데 시위대가 이제 와서 불법적으로 건설을 막고 있다”며 “공권력이 제 역할을 해달라는 국민의 요구를 고려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경찰은 폭력시위나 불법 도로점거가 발생할 경우 시위를 주최한 단체에 1년 또는 6개월가량 유사한 내용의 집회 신고를 금지하기로 했다. 또 서울 종로구 세종로와 중구 태평로 등 주요 도로에서 시위대가 행진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부득이하게 허용할 경우 행진 시작과 종료 시간을 엄격히 지키도록 할 방침이다. 경찰은 또 일부 시위대가 행진을 핑계로 도로를 점거하는 관행을 없애기 위해 행진 속도도 ‘시속 3km 이상’ 등의 기준을 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아울러 행진 중 신고된 차선을 넘어 도로를 불법 점거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도 개선하지 않을 경우 물포 등을 동원해 즉각 해산시키기로 했다. 이와 함께 시위 중 폴리스라인을 침범하거나 훼손하는 경우 현장에서 바로 검거하고, 불법 시위대가 물리적으로 폴리스라인을 침범하면 공무집행방해죄를 적용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경찰청은 이와는 별도로 사전에 선제적으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도록 경찰관의 업무행동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의 경찰관직무집행법(경직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현행 경직법은 경찰관의 업무범위를 정해놓은 규정이지만 이 때문에 자기 소관이 아니거나 명확히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을 경우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문제점이 있었다”며 “사전에 우려되는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의 경직법 개정은 일반 시민을 잠재적 범죄군으로 예단해 인권을 침해할 소지도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올 3월 50대 남성에게 4년 8개월간 성폭행을 당한 20대 여성의 사연을 동아일보가 보도하자 많은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토익 점수는 만점에 가까운 데다 유명 공기업에 취업할 정도로 야무진 여성이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신고를 안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뒤늦게 경찰에 붙잡혀 법정에 선 윤모 씨(당시 가명 이경수·55)는 “우린 사실상 주말부부였고 합의하에 가진 성관계였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김모 씨(당시 가명 박은경·27)는 몸서리쳐지는 악몽으로, 가해자 윤 씨는 사랑의 추억으로 여기는 이 사건에 대해 지난달 24일 시민 배심원 9명과 법원이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는 두 얼굴의 여인이다”피고 윤 씨의 요청에 따라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이번 재판의 핵심은 김 씨와 윤 씨 관계가 연인이었는지 여부. 윤 씨는 폭행과 협박, 성관계는 인정하면서도 “강간이 아닌 화간”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참여재판은 통상 하루에 끝나는데 이 재판은 3일간 매일 오후 11시를 넘길 정도로 공방이 치열했다.윤 씨 변호인은 배심원들에게 “예쁘고 능력 있는 여대생이 당뇨에 무직인 50대 늙은이와 4년 8개월간 사랑을 나눴을 리 없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증거로만 판단해 달라”고 당부하며 변론을 시작했다.변호인 측은 △피해자가 수감 중인 피고에게 절절한 애정이 담긴 편지를 수십 통 보냈고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지구대에 신고할 만큼 용의주도한 피해자가 성폭행 사실은 4년 넘게 신고하지 않은 점은 납득이 안 되며 △피고의 재산을 노리고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관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변호인은 프로젝터 화면에 피해자가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띄우고 ‘당신이 그리워요’ ‘마음을 다해 사랑해요’ 등 문구를 하나씩 짚어가며 “피해자의 순진무구해 보이는 외모에 속아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피고는 전부인도 성폭행 후 결혼”반격에 나선 검찰 측은 변호인의 주장을 차례차례 반박했다. 윤 씨가 이혼한 전처와 처남을 흉기로 협박한 혐의로 10개월간 수감돼 있을 때 피해자 김 씨가 서너 장의 편지를 매주 두 통씩 보낸 것은 맞지만 강압에 의한 것이란 주장이었다.증인으로 나온 김 씨는 “피고가 감옥에 가기 전 편지를 성의껏 보내지 않으면 미행을 붙여 괴롭히고 출소 후 보복하겠다고 겁을 줘 할 수 없이 편지를 썼고, 그마저 너무 귀찮아 두 달 뒤부턴 컴퓨터로 작성했다”고 밝혔다.검찰은 피해자가 아버지에게 폭행당한 후 경찰에 신고할 정도로 용감했다는 피고 측 주장에 대해선 “피해자가 그 문제로 경찰서를 찾은 건 피고를 신고하고 나서 두 달 뒤 일로, 그 사건을 두고 피고가 대범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김 씨가 피고의 돈을 보고 접근했다는 주장도 허위라는 사실이 입증됐다. 윤 씨는 지난 5년간 마땅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고, 전처 명의로 된 2000만 원 상당의 집을 피해자에게 양도했지만 그보다 많은 돈을 김 씨에게서 뜯어낸 것으로 계좌 이체 결과를 통해 확인됐다. 특히 검찰은 윤 씨가 사줬다고 주장한 노트북컴퓨터와 관련해 김 씨의 카드로 결제한 영수증을 제시하며 피고의 주장이 거짓임을 부각시켰다. 그 후 검찰은 피해자의 온몸에 멍이 든 사진 등 윤 씨의 폭행과 협박을 보여주는 증거를 하나씩 나열했다. 그러나 배심원들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준 건 검사가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였다. 이혼한 피고의 전 부인이 윤 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돼 결혼했다는 것. 검사는 “당시 자녀가 둘 있는 39세의 홀아비였던 윤 씨는 초임 교사로 첫 출근을 하던 23세 이모 씨를 성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 내용을 전처의 진술을 통해 확인했다. 윤 씨 변호인이 “왜 사건과 무관한 얘기를 하느냐”며 거세게 항의하자 검사는 말을 멈췄지만 배심원단은 크게 술렁였다.○ “이런 사랑은 없다”24일 오후 11시경 배심원들과 협의를 마친 재판장 문정일 부장판사(대전지법 형사12부)가 만장일치로 유죄를 결정한 선고 결과를 읽자 윤 씨의 몸이 조금씩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재판부는 “이런 사랑은 없다”며 징역 15년에 전자발찌 부착 20년을 선고했다. 검사가 당초 구형한 형량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었다. 재판부는 “다른 인간관계를 모두 제쳐둔 채 주말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만나 1년에 219차례나 성관계를 맺는 건 어느 한쪽(피고)이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관계가 아니고선 불가능해 보인다”고 밝혔다.선고문 낭독이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윤 씨는 교정직원이 옷자락을 끌자 그때서야 몸을 움직였다. 마지막까지 “우린 부부보다 더 깊은 정을 나눴다”고 주장한 윤 씨는 재판 이틀 만인 지난달 26일 항소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강한 인턴기자 부산대 법학과 4학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