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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비추거나 드러내기 위한 빛이 아닌, ‘빛 그 자체’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1일 한국을 찾은 미국 미술가 제임스터렐은 이렇게 말했다.“내가 관심 있는 ‘빛’을 재료로 작품을 만들고 싶었지만, 딜레마가 있었다. 빛은 분명 물리적 실체가 있지만 나무나 금속처럼 조각할 수 없다. 음악가가 원하는 소리를, 악기를 통해 만들어 내듯, 빛을 생산하는 기술이 필요했다.”이런 고민 끝에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텅 빈 공간에 가득 찬 빛 속에 푹 잠기거나, 눈부신 빛의 파장이 먼 곳이 보이지 않도록 뿌연 장막을 만들고, 때로는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설치 작품으로 ‘빛의 존재감’을 드러내 온 터렐의 신작이 한국을 찾았다. 14일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개막하는 터렐의 개인전 ‘리턴’은 ‘글라스워크’ 연작 4점과 신작 ‘웨지워크’ 등 총 25점을 선보인다.터렐은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 상설전시관이 있다. 이 공간에서 ‘스카이스페이스’, ‘스페이스 디비전’등 대형 설치 작품을 2013년부터 전시해 왔기 때문에 한국 관객에게도 인지도가 있다. 서울에서 개인전이 열리는 것은 2008년 이후 처음으로, 갤러리 공간에서 전시하는 만큼 작은 규모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럼에도 빛에 온전히 빠져들어 몰입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설치 작품 위주로 전시가 구성됐다.터렐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빛은 물리적인 실체이고 이 자체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광자 안에는 질량이 존재하고 빛의 파동은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에 빛은 사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만 빛을 인식하는 우리의 감각은 상대적인 것이고, 이런 인식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그런 그의 말처럼 신작 ‘웨지워크’를 감상하면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면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입구를 지나게 된다. 그다음 붉은빛이 테두리처럼 설치된 공간이 보이는데, 그 속에서 또 다른 빛이 하나씩 켜지면서 이 빈 공간의 형태를 관객은 서서히 인식하게 된다. 20분 간이 공간에 비치는 빛은 서서히 변하는데, 이 변화에 따라 빛이 마치 뿌연 연기처럼 보이기도, 얇은 장벽처럼 보이기도 한다. ‘빛이 물리적인 실체’라는 터렐의 말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터렐은 “빨간색이 뜨겁고, 푸른색이 차갑다고 생각하지만, 행성을 볼 때는 푸른 별이 더 뜨겁고 붉은 별이 더 차갑다. 빛의 주파수 간격이 짧을수록 온도가 더 뜨겁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평소에 익숙하지 않았던 빛을 경험하며 어지러움을 느끼다가 그 낯섦을 견디면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고 무언가 얻게 되는 것이 있다”고 덧붙였다.전시장에서는 터렐이 애리조나 플래그스태프 인근에서 만들고 있는 대형 전시관 ‘로든크레이터’에 관한 판화와 드로잉도 함께 전시된다. 또 2014년 미국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선보인 설치 작업 ‘아텐레인’을 판화로 재현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책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신작. 이번엔 유전자가 ‘살아있는 역사책’임을 강조하는 책을 출간했다. 유전자가 단순히 생물의 형질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조상들이 겪어 온 환경과 생존 전략, 적응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현대 생명체의 유전자를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고 설명한다. 팔림프세스트란 여러 차례 글씨가 적힌 양피지를 말하는데, 고대와 중세에는 양피지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이미 글이 쓰인 양피지에 글씨를 지우고 새로 덧써서 재활용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오래된 양피지를 자외선이나 X선으로 촬영해 지워진 글씨들을 읽어내면서 과거의 흔적을 파헤친다. 이런 다층적 기록이 남은 양피지, 팔림프세스트와도 같은 유전체를 분석하면 그 종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남고 적응하며 진화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다른 새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몰래 낳는 ‘탁란’ 행위를 하는 뻐꾸기의 비밀도 유전자로 읽을 수 있다. 암컷 뻐꾸기들은 자신이 자란 둥지의 새를 정확히 기억해 같은 종의 새 둥지에 비슷한 알을 낳는다. 이는 알의 색과 무늬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암컷의 염색체에 있기 때문이며, 뻐꾸기의 유전체를 분석하면 그 종이 대대로 어떤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북미의 터키대머리독수리와 유라시아 독수리는 유전적으로 매우 거리가 먼 동물들이지만, 비슷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비슷한 외형과 행동을 갖게 됐다. 이는 유전체가 생물의 모양이나 행태를 결정하고 지시하는 정해진 ‘설계도’가 아니라 외부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유전체에 기록된 여러 흔적을 분석하는 것은 과거의 생태와 진화사를 해독하는 일이 된다. 도킨스는 유전체 해독 기술이 발전하면 화석이나 유물보다 더 정밀하게 과거를 복원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는 유전자가 개체와 종이 사라져도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불멸의 정보’임을 강조한다. 유전자 해독을 통한 ‘유전적 고고학’의 미래를 특유의 명확한 문체와 풍부한 사례, 일러스트로 제시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가정폭력을 피해 자식도 두고 집을 떠난 배명순. 남편의 추적을 피하려 가명 정순임으로 사는 그를 고용한 박 사장은, 그의 불안한 신분을 악용해 월급을 마음대로 깎으려고 한다. ‘내 속을 알면서 왜 그러시냐?’는 배명순의 호소에 박 사장은 능글맞게 쏘아붙인다.“내가 당신 속을 어떻게 알아? 누가 들으면 내가 건드린 줄 알겠네….” 배명순 앞에 펼쳐진 비정한 세상에 관객의 마음이 무거워지려는 찰나, 무대 위에 있던 분장사가 어이없는 대사를 외친다.“더러운 새끼. 역할을 맡아도 꼭 더러운 거만….” 그러자 갑자기 박 사장을 연기하던 배우도 역할에서 빠져나온다. “나도 이 대사 빼자고 연출한테 몇 번을 말했다. 이래서 우리집 애들이 연극을 보러 오겠냐”며. 객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지난달 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한 ‘유령’은 어디까지가 연극인지 헷갈리는 작품이다. 무대 안과 밖의 ‘이중 서사’가 동시에 전개되기 때문이다.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인 고선웅 연출이 14년 만에 발표한 창작극이다. 고 연출은 ‘무연고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문 기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무연고자는 법적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너무 아픈 이야기라서 무거운 서사만 떠올랐다”는 고 연출은 떠돌이로 살다 숨진 뒤 시신 안치실에서 ‘유령’이 된 배명순의 서사와 무대 위에서 배역 없이 떠돌아다니는 배우 ‘유령’들의 서사를 겹쳐 보기로 했다. 이러다 보니 독특한 상황은 무대에서 계속해서 이어진다. 배명순이 남편에게 맞는 장면을 보면, 분장사가 무대에 함께 등장해 멍 분장을 해준다. 분장사를 맡았던 배우는 경찰 역할이 돼 남편 오 씨를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이중 서사는 당연히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 터. 그런데 이런 산만함이 역설적으로 슬픔은 덜고 유쾌함은 더한다. 독특한 방식으로 연극을 편하게 감상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셈이다. 다만 그만큼 배명순이란 무연고자 유령의 서사는 다소 압축적으로 다뤄진다. 인간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한 이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위로하고 싶다는 메시지는 연출의 다른 대사로 직접 전달된다. 이러한 메시지가 분장사나 경찰처럼 극 중 ‘난입하는’ 인물을 통해 서사로 표현됐다면 어떨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 대신 마지막에 배우들의 몸을 본뜬 시신이 등장하고, 각 배우들이 죽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은 무척 강렬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쾌한 장송곡’이란 마무리는 매우 인상적이다. 2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최근 수년간 아시아 컬렉터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탈리아 예술가 살보(1947∼2015)의 개인전이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개막했다. 그간 살보의 작품은 주로 홍콩 경매장이나 아트페어에서 볼 수 있었는데, 국내에서 개인전이 열린 건 처음이다. 살보의 유족이 설립한 ‘살보재단’과 협업한 전시는 1988∼2015년 작가가 그린 풍경화를 소개한다.살보는 1970년대 초반까지는 이탈리아의 대표적 미술 사조인 ‘아르테 포베라’ 그룹과 활동하며 실험적인 작품을 했다. 아르테 포베라는 ‘가난한 예술’이란 의미로 흙, 나무, 돌, 옷 등 일상적 재료를 활용해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1973년부터 다시 회화를 그리며 조르조 데 키리코를 연상케 하는 차분하고 몽환적인 풍경화들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유적지부터 시칠리아, 노르만, 아랍 양식이 결합한 교회 건축물이 있는 풍경이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묘사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다음 달 1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빛에 바랜 검은 코트 22벌이 반원형으로 늘어서 있다. 각기 다른 무늬와 색을 품은 코트들은 디자이너 지용킴이 자연광에 옷감을 노출해 무늬를 만드는 ‘선블리치(Sun-Bleach)’ 기법으로 제작했다. 공장식 대량생산으로는 재현하기 힘든 태양과 바람의 흔적이 새겨진 옷들. 마치 세월을 머금은 시계를 연상시킨다.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지난달 30일 개막한 전시 ‘시대복장 Iconclash: Contemporary Outfits(상징 충돌: 현대의 옷차림)’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패션을 주인공으로 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패션 스튜디오 ‘지용킴’과 ‘포스트아카이브팩션(파프)’, ‘HYEIN SEO(혜인서)’가 각각의 전시실에서 각자의 디자인과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미술관 전시의 문법을 빌려 선보였다. 1전시실에선 지용킴의 검은 코트 22벌과 ‘선블리치’ 기법을 활용한 대형 패브릭, 또 이 기법을 사용하면서 함께 녹이 슬거나 빛이 바랜 작업실의 도구들을 전시했다.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몇 주에서 수개월간 시간을 들여 원단에 무늬를 넣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일민미술관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도 지용킴 스튜디오가 선블리치 기법으로 만들었다. 2전시실의 파프는 ‘기록’에 집중했다. 파프는 옷을 일부러 잘랐다 다시 붙인 것 같은 절개선, 비대칭 디자인, 지퍼나 벨크로 같은 실용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바닥 전체에 ‘의복 패턴’이 깔려 있다. 왼편에는 파프의 옷들이 낚싯줄에 걸린 듯한 형태로 전시돼 있다. 작업 기록 영상을 아치형으로 설치한 12개의 모니터로 선보이는 것도 눈길을 끈다. 혜인서는 3전시실에서 10년 동안 컬렉션을 준비하며 만들었던 디자이너 스케치, 드로잉과 함께 참고 자료와 사진, 책을 캐비닛 여러 대에 나열했다.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시대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찾아낸 다양한 이미지는 물론이고 소설 같은 텍스트까지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캐비닛에 부착된 자료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벽면에 적힌 설명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패션 디자인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 일어나면서 장식·기능적 목적을 넘어서 사회·철학적인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선 1930, 40년대에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엘사 스키아파렐리(1890∼1973)가 살바도르 달리 등과 협업해 대표작 ‘랍스터 드레스’ 등을 만들며 인간의 무의식을 패션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990년대 ‘패션계의 악동’으로 불렸던 영국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1969∼2010)은 ‘한니발’ 같은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주제를 다룬 디자인과 쇼를 통해 젠더나 계급 문제를 소환해 찬사받았다. 매퀸은 사후에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뮤지엄에서 회고전이 열렸을 정도로 미술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일민미술관의 ‘시대복장’전은 요즘 한국에서 활동하는 패션 스튜디오들이 어떠한 창작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에 관한 고민과 맥락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세 스튜디오는 모두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태어난 디자이너들이 이끌고 있다. 이번 전시는 최근 패션 브랜드들이 미술 전시의 문법을 차용해 쇼룸을 꾸미는 현상에서 착안해 반대로 미술관에 패션을 가져와 ‘쇼룸’처럼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윤율리 일민미술관 학예팀장은 전시 서문에서 “패션과 미술이 공유하는 문화 지형을 그려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7월 20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빛에 바랜 검은 코트 22벌이 반원형으로 늘어서 있다. 각기 다른 무늬와 색을 품은 코트들은 디자이너 지용킴이 자연광에 옷감을 노출해 무늬를 만드는 ‘선블리치(Sun-Bleach)’ 기법으로 제작했다. 공장식 대량생산으로는 재현하기 힘든 태양과 바람의 흔적이 새겨진 옷들. 마치 세월을 머금은 시계를 연상시킨다.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지난 달 30일 개막한 전시 ‘시대복장 Iconclash: Contemporary Outfits(상징 충돌: 현대의 옷차림)’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패션을 주인공으로 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패션스튜디오 ‘지용킴’과 ‘포스트아카이브팩션(파프)’, ‘HYEIN SEO(혜인서)’가 각각의 전시실에서 각자의 디자인과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미술관 전시의 문법을 빌려 선보였다.1전시실에선 지용킴의 검은 코트 22벌과 ‘선블리치’ 기법을 활용한 대형 패브릭, 또 이 기법을 사용하면서 함께 녹이 슬거나 빛이 바랜 작업실의 도구들을 전시했다.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몇 주에서 수개월간 시간을 들여 원단에 무늬를 넣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일민미술관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도 지용킴 스튜디오가 선블리치 기법으로 만들었다.2전시실의 파프는 ‘기록’에 집중했다. 파프는 옷을 일부러 잘랐다 다시 붙인 것 같은 절개선, 비대칭 디자인, 지퍼나 벨크로 같은 실용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바닥 전체에 ‘의복 패턴’이 깔려 있다. 왼편에는 파프의 옷들이 낚싯줄에 걸린 듯한 형태로 전시돼 있다. 작업 기록 영상을 아치형으로 설치한 12개의 모니터로 선보인 것도 눈길을 끈다.혜인서는 3전시실에서 10년 동안 컬렉션을 준비하며 만들었던 디자이너 스케치와 드로잉은 물론 참고 자료와 사진, 책을 캐비닛 여러 대에 나열했다.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시대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찾아낸 다양한 이미지는 물론, 소설 같은 텍스트까지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캐비닛에 부착된 자료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벽면에 적힌 설명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패션 디자인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 일어나면서 장식·기능적 목적을 넘어서 사회∙철학적인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선 1930~1940년대에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패션디자이너 중 하나인 엘사 스키아파렐리(1890~1973)가 살바도르 달리 등과 협업해 대표작 ‘랍스터 드레스’ 등을 만들며 인간의 무의식을 패션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990년대 ‘패션계의 악동’으로 불렸던 영국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1969~2010)은 ‘한니발’ 같은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주제를 다룬 디자인과 쇼를 통해 젠더나 계급 문제를 소환해 찬사 받았다. 맥퀸은 사후에 빅토리아앤앨버트 뮤지엄에서 회고전이 열렸을 정도로 미술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이런 맥락에서 일민미술관의 ‘시대복장’전은 요즘 한국에서 활동하는 패션 스튜디오들이 어떠한 창작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에 관한 고민과 맥락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세 스튜디오는 모두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태어난 디자이너들이 이끌고 있다. 이번 전시는 최근 패션 브랜드들이 미술 전시의 문법을 차용해 쇼룸을 꾸미는 현상에서 착안해, 반대로 미술관에서 패션을 가져와 ‘쇼룸’처럼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윤율리 일민미술관 학예팀장은 전시 서문에서 “패션과 미술이 공유하는 문화 지형을 그려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7월 20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 전시를 관람할 때 관객은 한 번쯤 작품을 만져보고 싶은 유혹에 휩싸인다. 두껍게 쌓아 올린 물감층이나 나무를 깎아 거친 질감을 살린 조각은 손끝에서 어떤 느낌을 만들어 낼까? 부산현대미술관에서 5월 3일 개막한 기획전 ‘열 개의 눈’에서는 일부 작품을 만져도 된다. 손가락을 눈에 비유한 전시 제목처럼 관객은 눈 대신 손으로 작품을 만지며 감상할 수 있다. 또 헤드셋으로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수어로 진행되는 전시 투어도 마련됐다. 장애인을 포함해 고령자와 아동, 신체기능 약자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미술관을 경험하도록 한 전시다. 전시에 나오는 김덕희 작가의 설치작품 ‘밤의 노래’는 공중에 뜬 푸른색 원형 물체다. 그 아래 손 조각들이 놓여 있다. 마치 ‘어서 잡아 달라’는 듯한 모양의 이 조각(‘하얀 목소리’)을 만지면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데, 조각 속에 열선을 설치해서 만들어진 효과다. 김채린 작가의 ‘하나인 27가지 목소리’는 물컹한 실리콘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조각이다. 작품을 만지면, 실리콘 마찰음이 변형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SEOM:(섬)’ 작가의 ‘감각을 따라 걷기’는 아예 관객이 작품 위에 놓인 실들을 만지며 걸어 다니게 한다. 평소 미술 전시를 볼 때 ‘작품을 만지면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제한했던 ‘촉감’을 마음껏 발휘하는 즐거움이 있다. 기존 미술관이 시각, 청각 등 특정한 감각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전시에선 이 밖에 시각을 잃은 후 변화된 감각 체계로 인간과 동물의 위계를 허무는 상상을 작품으로 만드는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미국)의 설치 조각 작품, 뇌출혈 이후 왼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그룹 라움콘(한국)의 ‘한 손 프로젝트’ 등이 소개된다. 만질 수 없는 다른 작품도 ‘감각 스테이션’에선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촉감을 느끼도록 했다. 이번 전시는 국내외 예술가 20명뿐만 아니라 부산맹학교 저시력 학생들, 돌봄 단체의 발달장애인과 복지사가 함께 사전 프로그램을 통해 완성했다. 미술관 지하 1층 ‘극장을숙’에서는 다큐멘터리 ‘실명에 관한 기록’과 시각장애인 미술 애호가의 문화생활을 담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 등이 상영된다. 9월 7일까지.부산=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 전시를 관람할 때 관객은 한 번쯤 작품을 만져보고 싶은 유혹에 휩싸인다. 두껍게 쌓아 올린 물감층이나 나무를 깎아 거친 질감을 살린 조각은 손끝에서 어떤 느낌을 만들어낼까? 부산현대미술관에서 5월 3일 개막한 기획전 ‘열 개의 눈’에서는 일부 작품을 만져볼 수 있다. 또 작품 설명은 헤드셋을 끼고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수어로 진행되는 전시 투어도 마련됐다.이 전시는 장애인을 포함해 고령자, 아동, 신체기능 약자 등 더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미술관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 전시 제목에서 ‘열 개의 눈’은 손가락을 눈에 비유한 것으로, 제목처럼 관객은 눈 대신 손가락으로 만지며 작품을 볼 수가 있다.이를테면 김덕희 작가의 설치작품 ‘밤의 노래’는 공중에 뜬 푸른색 원형 형체 아래 손 조각들이 놓여 있다. 마치 손을 잡아 달라는 듯한 모양의 조각을 만지면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조각 속에 열선을 설치해서 만들어진 효과다.김채린 작가의 ‘하나인 27가지 목소리’ 작품에서는 물컹한 실리콘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조각을 만지면, 실리콘 마찰음이 변형된 소리를 스피커에서 들을 수 있다. SEOM:(섬)의 ‘감각을 따라 걷기’는 아예 관객이 작품 위에 놓인 실들을 만지며 걸어 다니게 한다. 평소 미술 전시를 볼 때 ‘작품을 만지면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제한했던 ‘촉감’을 마음껏 발휘하며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이 과정에서 미술관이 의외로 시각, 청각 등 특정한 감각만 중심이 된다는 걸 깨닫는다.이밖에 시각을 잃은 후 변화된 감각 체계로 인간과 동물의 위계를 허무는 상상을 작품으로 만드는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미국)의 조각 설치 작품, 뇌출혈 이후 왼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그룹 라움콘(한국)의 ‘한 손 프로젝트’ 등이 소개된다. 전시장 속 ‘감각 스테이션’에서는 만질 수 없었던 다른 작품도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촉감을 느껴볼 수 있다.이번 전시는 참가한 국내외 예술가 20명뿐 아니라 부산맹학교 저시력 학생들, 돌봄 단체의 발달 장애인과 복지사가 함께 ‘다른 감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전 프로그램’을 거쳐 완성됐다. 미술관 지하 1층 ‘극장을숙’에서는 장애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큐멘터리 ‘실명에 관한 기록’과 시각 장애인 미술 애호가의 문화생활을 담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 등이 상영된다. 9월 7일까지.부산=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만두 노총’, ‘화난 고양이 집사 연맹’, ‘일정이 밀린 사람 연합’…. 지난해 비상계엄 선포 이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린 광장에서는 각종 인터넷 ‘밈’과 상상 속 단체 상징이 담긴 기발한 깃발들이 등장했다. ‘깃발 애호가’인 저자는 이 장면을 고국인 우크라이나에서 뉴스로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며 이렇게 쓴다. “한국의 집회 현장 속 깃발은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일장기 위로 태극기를 덧칠했던 스님부터 인터넷 밈 깃발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얼마나 크게 변화, 발전했는지 선명히 보여준다.” 저자가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 이렇게 쓴 이유, 이 책이 세계 각국의 국기와 그 안에 담긴 숨은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대표적인 국기들이 어떻게 다른 나라의 국기와 연결되고 이어지며 변형되는지를 담았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삼색기는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상징한다. 당시 혁명군은 파리의 상징으로 파랑과 빨강으로 된 표식을 모자에 달고 다녔는데, 가운데에 있는 흰색은 부르봉 왕가를 상징한다. 이렇게 흰색(왕정)을 파랑, 빨강(시민)이 둘러싼 형태는 헌법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은 국민이 군주를 통제한다는 뜻을 담아 탄생했다. 이 밖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며 국가에 초록색을 추가했다는 사실, 키프로스 국기의 오렌지색은 이 나라의 풍부한 구리 매장량을 상징한다는 등 국기 속에 숨겨진 각 나라의 자연과 역사, 정치적 신념을 200여 개의 국기 그림과 함께 소개한다. 저자의 이력도 독특하다. 그는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태어나 기자와 은행가로 일하다 정보기술(IT) 회사를 창립하고, 2019년부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부의 내각 장관을 지낸 경험이 있다. 어릴 때 월드컵 축구 경기 중계를 보다 국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소셜미디어로 국기 이야기를 나누며 팔로어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내용을 모은 책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기 6개월 전 우크라이나어로 처음 출간됐다. 2023년에 영어판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됐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어도어와 전속계약 분쟁을 벌이고 있는 걸그룹 ‘뉴진스’(새 활동명 NJZ)가 독자적으로 활동할 경우 멤버별 1회당 10억 원을 어도어에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2부(부장판사 허경무)는 전날 “전속계약 유효확인 소송의 1심 판결 선고 전까지 어도어의 사전 승인이나 동의 없이 연예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이에 따라 뉴진스는 방송 및 광고 출연 등이 모두 어렵게 됐다. 앞서 법원은 3월 21일 어도어가 뉴진스를 상대로 낸 ‘기획사 지위보전 및 광고계약 체결 등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뉴진스가 새로운 그룹명으로 활동하자 강제 조치를 결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가처분 결정 전후로 새로운 그룹명으로 공연하고 신곡까지 발표했다”며 “향후에도 위 의무를 위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고 이유를 밝혔다.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바이올리니스트 박수예 씨(25·사진)가 핀란드 헬싱키에서 29일(현지 시간) 폐막한 ‘제13회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2022년 한국인 최초로 1위에 올랐던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씨에 이어 2회 연속으로 한국인 연주자들이 우승을 차지했다. 금호문화재단은 30일 “박 씨가 27일부터 열린 대회 결선 무대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박 씨는 우승 직후 한국 소속사인 목프로덕션을 통해 “제 음악을 전달할 수 있어기쁘고, 우승하게 돼 행복하다”는 소감을 전했다.박 씨는 결선 무대에서 올리버 크누센의 바이올린 협주곡 30번, 장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47번을 연주했다. 우승 상금은 상금 3만 유로(약 4700만 원)이며, 협연 기회와 멘토링, 악기 대여 등 다양한 특전을 제공 받는다.박 씨는 16살 때 세계 최연소로 나이로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 음반을 발매하며 국제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현재 독일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의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삼성문화재단 악기 후원 프로그램을 통해 밀라노에서 1735년 제작된 바이올린 ‘산 지오반니 바티스타 과다니니’를 사용하고 있다.시벨리우스 국제 콩쿠르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1865~1957)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65년 시작돼 5년마다 열린다. 제12회 대회는 팬데믹 영향으로 2022년에 개최됐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팀 버튼 감독이 만든 영화 ‘배트맨’(1989)에는 조커가 고담시의 미술관에 난입해 각종 명화를 파괴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잭 니콜슨이 연기한 조커는 부하들과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렘브란트, 드가, 르누아르의 명화에 새빨간 페인트를 뿌리거나 손바닥 자국을 찍고 마구 낙서를 하며 파티를 즐기죠.그러다 조커는 한 작품 앞에서 갑자기 부하를 제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이건 꽤 마음에 드니까 망가뜨리지 말고 둬.”조커가 반한 그림 속에는 보라색으로 변한 교황이 고통스러운 듯 고함을 지르고 있고, 그의 양 옆으로 도축돼 반으로 갈라진 소의 고깃덩이가 걸려 있습니다.공포스러운 장면을 담은 이 작품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1954년 그린 ‘고기와 함께 있는 인물’. 조커는 베이컨의 작품에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요?“충격적이고 불쾌한” 교황의 초상아일랜드에서 태어난 20세기 영국 화가인 베이컨은 인간의 내면적 고통과 불안, 고독, 공포를 강렬하게, 심지어는 폭력적인 시각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바로 이 ‘비명 지르는 교황’ 연작인데요. 위 작품은 스페인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화를 차용한 것입니다. 벨라스케스가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캐릭터를 현실적 표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아주 미묘하게 캐치했지만, 베이컨은 이를 극적으로 변형해 투명한 상자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모습으로 그립니다.교황의 초상을 이렇게 그리다니. ‘신성 모독’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연작을 발표했을 때 영국 평단의 반응도 극명히 엇갈렸습니다.일부 평론가들은 베이컨의 그림이 지나치게 충격적이고 불쾌하다고 비판했고, 다른 사람들은 “공포스럽지만 기술적으로 뛰어나다”며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도 했습니다.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연작은 “전후 시대의 불안과 절망을 가장 강렬하게 시각화한 작품”이라거나 “인간 조건의 어두운 본질을 새로운 시각 언어로 그렸다”는 호평을 받게 됩니다.이런 ‘선을 넘는’ 듯한 표현이 공감을 얻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 1950년대의 ‘맥락’이 있습니다.두 번의 전쟁, 신이 죽은 세상1950년대 유럽은 두 차례의 전쟁,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그동안 믿어왔던 모든 가치관이 혼돈에 빠진 상태였습니다.최고의 지성과 문화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럽 사회가 야만적인 폭력과 파시즘으로 얼룩졌고 수많은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죠.뿐만 아니라 19세기 말부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이 지성 사회에 큰 공명을 일으키던 상황이었습니다.이런 가운데 베이컨의 그림 속에서 교황은 더 이상 신을 대리하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비명을 지르며 온갖 감정을 느끼는 한낱 ‘고기 덩어리’로 표현되고 만 것입니다.이런 맥락을 생각하지 않은 상황에서 베이컨의 작품을 보면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비틀어진 살 덩어리 같은 사람들의 몸이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커는 왜 이 작품을 좋아한 걸까?‘배트맨’에서 주인공들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나뉘어지는데, 여기서 결벽증적일 정도로 ‘선’에 집착하는 것이 배트맨이라면, ‘조커’는 그로 인해 생겨나는 그림자 같은, 묘하게 배트맨을 닮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사실 인간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존재이고, 때로는 세상을 향한 애정과 공감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지만, 또 다른 때에는 동물적인 욕망에 휩싸이기도 하는 존재입니다.그런데 한 면을 제거하고 완전무결한 ‘신’처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광기가 아닌가?’ 조커는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죠.이런 배트맨과 조커의 구도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저서 ‘광기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이 책은 ‘광기’라는 것이 타고나는 정신질환이 아니라 사회가 규정하고 배제하는 방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사회적 구성물’임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보여줍니다.즉 어떤 시대에는 미친 사람으로 격리되는 사람이 다른 시대에는 뛰어난 감각을 지닌 선지자로 인정받기도 했는데, 근대 이후 유럽 사회가 정신병원처럼 특정 집단을 감시, 격리, 감금하는 제도를 만들었고 그 산물이 ‘광기’라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조커는 영화 속에서 내내 이렇게 묻죠.‘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미친 것인가?’이렇게 무엇이 선이었는지 억지로 정해 놓다가, 그 추악한 면을 드러낸 사회(1,2차대전 이후 유럽)의 민낯을 보여준 것이 베이컨의 예술이었으니, 이런 구도를 대중 문화적으로 풀어낸 영화 속 인물인 ‘조커’는 베이컨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금기’를 건드리는 예술의 조건이렇게 금기를 건드리는 예술은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그 경계를 열어젖혔고, 그 결과 아주 다양한 표현 방식을 지닌 예술 작품이 - 캔버스뿐 아니라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식으로 - 등장하게 되었습니다.동물의 사체를 가져와 전시하거나, 피를 뽑아 굳혀서 두상을 만드는 등 ‘불쾌함’을 건드려서 눈길을 끄는 일종의 ‘전략’으로 사용하는 작가들도 종종 볼 수 있는데요. 저는 이런 작품들을 볼 때 ‘이게 어떤 맥락에서 이뤄진 걸까?’를 고민하게 됩니다.예를 들어 동물의 사체를 미술관에 가져와 전시할 때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예전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했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공감 능력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생명 존중’의 차원에서도 그 작품을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이런 ‘생명 존중’의 가치를 뛰어 넘는 시급함, 시대적인 요구, 혹은 작가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과연 동물의 사체를 전시해도 되는 것인가? 혹시 이건 ‘눈길을 끌기 위한 선을 넘은 장난에 불과한 건 아닐까?’ 의심을 하게 됩니다.물론 미술관은 사회에서 가장 열려 있고 창의적인 표현을 허용하는 장이기에, 너무 엄격하게 작품을 검열하거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되겠지요.때로는 관객을 놀래키거나 논란이 되는 작품을 전시해 새로운 논의를 촉발하는 것도 미술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그런데 예술 작품에서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관객 역시 그 자유가 타당한 것인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술은 금기를 건드린다’는 것이 이미 지난 세기에 반복적으로 말해진 진실임을 감안하면 말이죠.70년 전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서 혼돈과 혐오를 그렸던 베이컨, 그리고 21세기에 그런 예술을 할 때 생각해야 할 조건, 독자 여러분은 뭐라고 보시나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박수근의 진실한 삶의 태도에서 감명을 받았고, 이 상이 가진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제10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오원배 작가(72)는 29일 강원 양구군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 작가는 “박수근미술상은 한 작가의 업적을 인정하는 공로상이 아니며, 이 상을 계기로 새롭게 발휘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다”면서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전시를 잘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고 박수근 화백(1914∼1965)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박수근미술상은 동아일보와 양구군, 박수근미술관, 강원일보가 공동 주최한다. 박남희 박수근미술상 심사위원장은 “오 작가는 일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 재료와 표현의 절제, 한국적 정서와 미의식 등 세 가지 점에서 박수근의 예술정신과 공통점이 있다”며 “이런 기준에 근거해 심사에서 만장일치로 오 작가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박 화백의 손자인 박진흥 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은 “박수근은 소박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그림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며 “그 정신을 이어가는 올해 수상자인 오 작가에게 축하를 전한다”고 했다. 서흥원 양구군수는 “올해로 10번째를 맞는 박수근미술상은 오 작가의 수상으로 그 정체성과 비전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밝혔다. 오 작가는 이날 박 화백의 작품 ‘아기 업은 소녀’(1963년)를 조각으로 만든 상패와 창작지원금 3000만 원을 받았다. 지난해 제9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홍이현숙 작가(67)의 개인전도 이날 개막했다. 홍이 작가는 이날 전시에서 양구에서 제작한 새 영상작품 ‘용소빙장-2025년 4월 2일 3시10분부터 19분9초까지’를 공개했다. 그는 “20m 절벽에 만든 빙벽이 있는 용소빙장에서 얼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장면을 묵시록적이라고 생각해 담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존경하는 노원희(8회 수상자)와 오원배 선생님이 앞뒤로 있어서 자랑스럽다”고 전시 개막 소감을 밝혔다. 홍이 작가의 수상 개인전은 미술관 내 현대미술관, 박수근 파빌리온에서 10월 26일까지 열린다.양구=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안토니오 만치니의 작품이 ‘공기 반, 소리 반’으로 터치하는 감성이라면, 조반니 볼디니는 똑떨어지는 맛이 있습니다. 대중적 언어로 말하면 만치니는 ‘JYP 스타일’, 볼디니는 ‘SM 스타일’이지요.”‘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 전시가 열리는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그림을 유심히 감상하던 관객들이 설명을 듣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친근하고 쉽게 예술 작품을 해설해 관객을 몰고 다니는 ‘전시장의 피리 부는 사나이’, 국내에서 ‘1호 전업 도슨트’로 불리는 김찬용 도슨트다. 그는 전시장 입구에 걸린 두 초상화를 SM과 JYP에 빗댄 뒤엔 “와인을 마실 때도 보디감과 드라이함 같은 차이를 즐기지 않느냐”며 “그림도 비교해서 감상하면 더 즐겁게 안목을 넓힐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개막 열흘째인 25일 벌써 관객 2만 명이 다녀간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은 월∼금요일 매일 3차례 무료 도슨트를 진행하고 있다. 큐레이터가 작품을 연구하고 나름의 맥락에 따라 전시장에 배치한다면, 도슨트는 그 맥락을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내는 ‘중간자’ 역할을 한다. 전시 해설을 위해 누구보다 자주 전시장을 드나들었을 김 도슨트가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의 감상 포인트 3가지를 짚어봤다. ① 고급 뷔페처럼 골라 보는 맛: 이번 전시 출품작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의 소장품이다. 남아공은 쉽게 찾아가기엔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다. 그곳 미술관을 가기란 더욱 어렵다. 따라서 이번이 아니면 남아공 미술관 컬렉션을 만날 기회는 정말 쉽지 않다. 17세기 네덜란드부터 20세기 남아공까지 다양한 시기,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고급 뷔페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맛보듯 골라서 감상할 수 있다. ② 희귀 작품을 원화로 만날 기회: 전시장 입구에 있는 만치니나 볼디니는 미술사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다. 국내에선 낯선 이름이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원화로 보기 힘들다. 이렇게 덜 알려졌지만 희귀한 작품들이 이번 전시엔 여럿이다. ‘오필리아’로 유명한 작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한 땀 한 땀’도 독특하다. 밀레이는 ‘라파엘 전파(前派)’ 화가로 전성기에는 문학이나 중세의 낭만적 소재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비해 ‘한 땀 한 땀’은 후기 작품이라 산업혁명 시대 영국 노동자들의 일상을 스냅사진을 찍는 것처럼 표현해 매력적이다. ③ 400년 변천을 비교하는 경험: 만치니의 ‘필립스 부인 초상화’(1909년)와 앤디 워홀의 ‘요제프 보이스 초상’(1980년대)을 비교해 보자. 만치니의 초상이 의뢰인을 예쁘게 담아내려 노력했다면, 워홀은 자신이 선망하던 보이스에 대한 ‘리스펙트(존중)’를 담았다. 판화에 다이아몬드 가루까지 뿌렸을 정도다. 짧게는 80년부터 길게는 400년까지 인간이 무언가를 보고 표현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초점을 두고 감상하면 애호가로서 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전시는 8월 31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입구에 디지털 숫자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카운트다운하는 설치 작품 ‘경계를 넘어서’로 익숙한 일본 현대 미술가 미야지마 다쓰오의 신작이 22일 갤러리바톤 개인전 ‘Folding Cosmos’에서 공개됐다. 미야지마 작가는 발광다이오드(LED)를 활용해 1부터 9까지 숫자들이 점멸하는 미디어 아트 작품을 통해 “계속 변화한다. 모든 것은 연결된다. 영원히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디지털 숫자들에 다양한 색채를 더하고, 그 배경에 거울을 넣어 주변이 비치도록 만들었다. 22일 한국을 찾은 작가는 “30여 년 전 첫 작품을 만들 때 LED가 빨강과 초록색밖에 낼 수가 없었는데 그 뒤로 여러 색이 발명됐다”며 “기술 발전에 따라 제 작품도 낮에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지고 색도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선 고대 마야 문명의 최소 시간 단위인 ‘킨(k’in)’에서 영감을 얻은 연작 ‘C.T.C.S. k’in(변하는 자아, 변하는 시간―하루)’과 원통형 거울 안에 LED 판을 넣은 ‘Hundred Changes in Life(인생의 백 가지 변화)’, 정사각형 거울을 격자 모양으로 배열한 ‘Changing Life with Changing Circumstance(변하는 환경과 변하는 인생)’ 등을 만날 수 있다. 다음 달 2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인공지능(AI)의 영향력이 일상에도 빠른 속도로 스며드는 지금. ‘이 사람’의 입에 세계의 눈이 쏠리고 있다. 그의 한마디는 글로벌 반도체, 정보기술(IT), 금융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주가까지도.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고 IT 업계의 ‘록스타’로 떠오른 인물. 엔비디아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에 대해 쓴 책이 출간됐다. 이 책은 ‘뉴요커’ 기자인 저자가 3년 동안 황을 비롯한 엔비디아 핵심 관계자 300여 명을 인터뷰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황이 10세에 미국으로 이주해 성장기를 보내고, 1993년 엔비디아를 공동 창업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소개했다. 책은 특히 엔비디아가 결정적 전환점을 맞이하며 어떻게 독보적인 시장 지위를 구축했는지의 과정에 집중한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황이 가진 독특한 리더십과 엔비디아의 기업 문화다. 엔비디아는 강도 높은 업무량과 끈끈한 조직 문화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엔비디아의 모토는 “우리 회사는 파산하기 30일 전입니다”일 정도다. 황은 항상 위기감을 조성하며 민첩하게 조직을 운영하고, 까다롭게 인재를 개발해 약 60명의 직원에게 매주 직접 보고받는 중앙집권적 경영 스타일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다소 부담스러운 사례도 소개한다. 공개적으로 심할 때는 몇 시간씩 이어지는 질책, 이른바 ‘황의 분노’다. 엔비디아의 전 수석 과학자 데이비드 커크는 회의 도중 ‘황의 분노’를 말리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지독한 질책을 받았던 상황을 떠올렸다. “전쟁 때 참호에서 기관총에 손을 흔든 꼴이었다.” 다만 책은 “젠슨은 절대 복도에서 한 사람만 붙잡고 소리 지르진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소리치는 것이 동기 부여 전략의 일부이며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또 하나의 극적인 장면은 2010년대 초반 엔비디아가 그래픽에서 AI로 무게중심을 전환하던 순간이다. 엔비디아는 어렵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받은 병렬 컴퓨팅과 신경망 연구로 고성능 그래픽카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것이 AI 연구와 응용에 최적화된 하드웨어 개발로 이어진다. 처음엔 황도 그 가능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AI의 잠재력에 대한 연구원들의 설득과 ‘강력한 도구만 제공하면 사람들이 그것의 새로운 용도를 찾아낼 것’이라는 신념으로 거액을 투자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우리가 아는 대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책 후반부에서 ‘AI가 인류 미래에 미칠 영향’에 대한 질문을 받자 황은 “나는 그런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저자에게조차 ‘황의 분노’를 퍼부은 것이다. 책에 따르면 황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나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와 비교하면 온화하고 야심이 적은, 현실적 사고방식을 중시하는 엔지니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반발은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은 황의 비전이나 AI의 미래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는 책으로 보긴 어렵다. 다만 AI 혁명이 시대적 주류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 거대한 물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가 어떤 고민과 도전을 겪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인공지능(AI)의 영향력이 일상에도 빠른 속도로 스며드는 지금. ‘이 사람’의 입에 세계의 눈이 쏠리고 있다. 그의 한마디는 글로벌 반도체, 정보통신(IT), 금융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주가까지도.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고 IT 업계의 ‘록스타’로 떠오른 인물. 엔비디아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에 대해 쓴 책이 출간됐다.이 책은 ‘뉴요커’ 기자인 저자가 3년 동안 젠슨 황을 비롯한 엔비디아 핵심 관계자 300여 명을 인터뷰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황이 10세에 미국으로 이주해 성장기를 보내고, 1993년 엔비디아를 공동 창업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소개했다.책은 특히 엔비디아가 결정적 전환점을 맞이하며 어떻게 독보적인 시장 지위를 구축했는지의 과정에 집중한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황이 가진 독특한 리더십과 엔비디아의 기업 문화다. 엔비디아는 강도 높은 업무량과 끈끈한 조직 문화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엔비디아의 모토는 “우리 회사는 파산하기 30일 전입니다”일 정도다. 황은 항상 위기감을 조성하며 민첩하게 조직을 운영하고, 까다롭게 인재를 개발해 약 60명의 직원에게 매주 직접 보고받는 중앙집권적 경영 스타일을 갖고 있다고 한다.다소 부담스러운 사례도 소개한다. 공개적으로 심할 때는 몇 시간씩 이어지는 질책, 이른바 ‘황의 분노’다. 엔비디아의 전 수석 과학자 데이비드 커크는 회의 도중 ‘황의 분노’를 말리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지독한 질책을 받았던 상황을 떠올렸다. “전쟁 때 참호에서 기관총에 손을 흔든 꼴이었다.” 다만 책은 “젠슨은 절대 복도에서 한 사람만 붙잡고 소리 지르진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소리치는 것이 동기 부여 전략의 일부이며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또 하나의 극적인 장면은 2010년대 초반 엔비디아가 그래픽에서 AI로 무게중심을 전환하던 순간이다. 엔비디아는 어렵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받은 병렬 컴퓨팅과 신경망 연구로 고성능 그래픽카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것이 AI 연구와 응용에 최적화된 하드웨어 개발로 이어진다. 처음엔 황도 그 가능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AI의 잠재력에 대한 연구원들의 설득과 ‘강력한 도구만 제공하면 사람들이 그것의 새로운 용도를 찾아낼 것’이라는 신념으로 거액을 투자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우리가 아는대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책 후반부에서 ‘AI가 인류 미래에 미칠 영향’에 대한 질문을 받자, 황은 “나는 그런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저자에게조차 ‘황의 분노’를 퍼부은 것이다. 책에 따르면 황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나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와 비교하면 온화하고 야심이 적은, 현실적 사고방식을 중시하는 엔지니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반발은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같은 맥락에서 이 책은 황의 비전이나 AI의 미래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는 책으로 보긴 어렵다. 다만 AI 혁명이 시대적 주류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 거대한 물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가 어떤 고민과 도전을 겪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스페인에 식민 지배를 당하던 16세기 남미 아마존의 열대 우림.제국주의자들이 탐내는 금이 쏟아지던 이곳에서 식민 당국은 토착 부족을 강제 노역에 동원해 금광에서 무자비하게 부려먹었습니다.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금에 집착하며 마구잡이로 약탈해가는 기이한 광경에 원주민들은 이렇게 묻습니다.“당신들은 황금을 먹기라도 하는 것인가?”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혹독한 착취를 가하는 침략자들에게 원주민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입니다.그리고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감독관들을 붙잡고 끔찍한 형벌을 가합니다. 그들의 입을 벌리고 그 안으로 펄펄 끓는 금을 부어 버린 것입니다.아즈텍 사람들은 금을 ‘신의 똥’이라 부르며 신성하게 여겼는데요.그들에게 금은 태양신이 땅에 빛과 에너지를 전해주고 남은 흔적이었고, 아름답고 귀한 금속이지만 그것은 축적의 대상이 아닌 신성한 의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그런 금을 감독관의 입으로 부어버리는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아즈텍 사람들에게 ‘신의 똥’이었던 황금이 탐욕 앞에서 피와 분노로 변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독일 출신 현대미술가 안젤름 키퍼가 에도 시대 쇼군의 궁전이자 가노파 화가들의 황금빛 병풍이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는 ‘니조성’에 ‘히로시마 원폭 참사’와 ‘신의 똥’인 황금, 곡식이 빼곡한 모래밭, 그리고 머리가 없는 강철 여신들을 가져다 놓았습니다.키퍼의 아시아 최대 규모 개인전 ‘솔라리스’ 현장을 소개합니다.히로시마, 옥타비오 파스, 오로라제가 이 전시를 소개하며 아즈텍의 황금과 약탈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곳에서 본 신작 ‘옥타비오 파스를 위하여’ 때문입니다.폭 9.5m, 높이 3.5m 대작인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1914~1998)를 소환하고 있습니다.우선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돌과 숯덩이가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보였습니다. 자연광으로만 작품을 감상하도록 조성된 공간에서 그림 가운데 햇빛이 반사돼 번쩍이는 가죽 같은 것이 눈에 띄었는데요.가까이 가서 보니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얼굴이 거꾸로 매달린 형상이었습니다.그림 속 인간은 고통받고 있지만 그 모습이 한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오히려 금박과 각종 금속을 산화해 만든 청록색 물감으로 뒤덮인 무심한 듯 아름다운 들판이 압도했죠.불에 탄 것 같은 돌 위에는 물감이 아주 두껍게 발라져서, 요셉 보이스의 지방 덩어리가 놓인 의자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80주년을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즉 그림 속 폐허가 된 들판은 원자폭탄 폭격으로 황폐해진 지역의 모습에서 시작한 것이죠.그러나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의 비극이나 고통에서 한 단면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즉 고통스러운 폐허를 표현한 풍경이 역설적이게도 매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금 장식이 가득한 에도시대 궁전,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땅. 여기에 키퍼는 남미인 멕시코 출신 시인 ‘옥타비오 파스’를 끄집어 냅니다.이로 인해 이 전시에서 ‘금’은 빛과 어둠, 성스러움(신의 똥)과 탐욕(피의 분노), 파괴와 재생 등 복합적인 키워드를 떠오르게 하는 상징이 됩니다.이 작품 옆으로 가면 원폭으로 뼈대만 남은 초등학교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오로라’가 보입니다.공동 묘지처럼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앙상한 건물 구조가 겹겹이 건조한 선으로 그려져 있는 그림입니다.그 가운데 황금 판자가 담긴 유모차가 매달려 있고, 이 유모차를 중심으로 녹슨 청록색 물감이 마치 생명력을 전하듯 퍼져 나가는 형상입니다.작품 제목 ‘오로라’는 1905년 러일전쟁 때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국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 군함을 일컫습니다.오로라 군함 피격 사건은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는 신호탄이자, 일본의 제국주의가 팽창하는 계기가 됩니다. 한 가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동아시아의 역사적 지형을 흔드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만드는 제목입니다.자신을 ‘역사를 먹고 사는 기생충’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는 키퍼는 되풀이되는 역사 속 사건들에 인간의 복잡한 속성, 그것을 이해하며 생겨나는 희망을 신화와 문학 같은 이야기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었습니다.안젤름이 여기 있었다키퍼의 개인전은 평소 공개되지 않는 공간인 니조성의 대형 부엌과 조리실을 활용해서 열렸는데요. 쇼군이 머물던 화려한 궁전 ‘니노마루고텐’과 달리 이곳은 어둡고 무거운 목조 건축물이었습니다.전시는 가장 큰 공간에 대형 신작을 늘어 놓고 나머지 공간엔 각각 ‘모건소 플랜’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과 키퍼의 고향에 있는 ‘라인강’에서 출발한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모건소 플랜’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군수 산업과 중공업을 제거하고 농업과 목축 중심의 국가로 만들자는 계획을 말합니다. 즉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사건 그 이후 무렵 같은 패전국이자 키퍼의 출신국인 독일의 역사를 모티프로 한 작품입니다.작품은 목조 건물 내부에 모래를 깔고 곡식을 빼곡히 설치해 들판처럼 만들었고, 곡식의 머리 부분 곳곳에는 금이 칠해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모건소 플랜은 실제로 이뤄지진 않았는데, 만약 정말로 실현됐다면 독일 땅은 이런 광경을 하게 되었을까? 곡식들 사이로 자세히 살펴보면 납으로 만든 커다란 책과 뱀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개인적으로는 무언가를 억지로 제압하거나 거스르려는 인간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게 꼭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지금까지 그런 행동이 문명을 만드는 데 일조했지만, 때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덫이 될 수 있다는 이중적인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그리고 미술사의 유명한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 속에 화가가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고 남긴 글귀를 차용한 연작 ‘안젤름이 여기 있었다’도 인상 깊었습니다.키퍼는 역사에 대해 ‘승자가 쓴 것이든 누가 쓴 것이든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보면서, 자기는 역사를 자기 방식대로 소화하고 주물러서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현실에서도 한 가지 사건을 두고 100명의 사람이 100개의 다른 해석을 내놓는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역사의 많은 사건들은 100개 중 하나만 맞다고 누군가 억지로 강요하거나 주장하며 생깁니다. 이를 통해 권력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선을 넘어 뒤틀린 사건을 만들죠.이 ‘뒤틀림’이 제때 해결되지 않으면 원자폭탄 폭격, 전쟁 같은 커다란 비극이 생겨나고 모든 것이 파괴된 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인류가 살아온 세상이 아닐까 돌아보게 하는 작품입니다.그런 가운데 키퍼는 풍경과 한 몸이 된 듯 윤곽선만 간신히 딴 자신을 뒷모습으로 그려 넣으며. 세상을 보는 주인은 내 밖의 이데올로기도 권력도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고, ‘내가 그 모든 걸 보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안젤름 키퍼: 솔라리스 (Anselm Kiefer: Solaris)- 2025년 3월 31일 ~ 6월 22일- 일본 교토 니조성 (Nijo Castle, Kyoto)※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 작가 오원배 씨(72·사진)가 제10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로 20일 선정됐다. 동아일보와 강원 양구군, 강원일보가 공동 주최하고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과 박수근미술상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이 상은 박수근 화백(1914∼1965)의 예술 정신을 기리고자 2014년 제정돼 2016년 제1회 수상작가를 배출했다. 오 작가는 한국적 조형 감각과 동양 철학적 사유를 현대 회화와 설치 작품을 통해 풀어내며,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져왔다. 심사위원장인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대표 연작 ‘사유의 공간’을 통해 인간, 침묵, 시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를 형상화한 오 작가의 작품 세계는 박수근이 남긴 ‘소박한 진실성’ ‘삶에 대한 애정’과 깊이 맞닿아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29일 양구군 박수근미술관 야외공원에서 열린다.佛유학때 사회문제 회화 작업 접해… 현지도서관서 5·18 사진 보고 충격 이후 검은 배경-괴물 형상 그려… 다양한 검은색 찾아 물감 만들기도“캔버스에 다루지 못한것 무궁무진… 조형적 역량 발휘, 기대 부응할 것”“우리나라 ‘국민 화가’인 박수근의 이름을 딴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수상자에게 거는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조형적 역량을 새롭게 발휘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15일 찾은 오원배 작가의 경기 고양시 작업실에는 튜브 물감 대신 안료와 조그마한 플라스틱 통 수십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40년 전 공산품이 내지 못하는 검은색을 내려고 물감을 손수 만들어 썼던 오 작가는 이후 추상미술과 개념미술, 실험미술이 유행하는 동안에도 ‘그림’에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지금도 안료를 개어 물감을 만든다. 오 작가는 “처음엔 ‘검은색’을 만들려고 시작했는데, 이젠 모든 색을 만들어 쓰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1986년 프랑스 유학을 마친 오 작가가 한국에서 처음 개인전을 열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듯 기어다니는 그림 속의 형상을 낯설어했다. 이 형상은 사람의 몸과 비슷하지만 뒤틀려 꿈틀거리는 형태였다. 때문에 ‘반인반수’란 별명을 붙이거나 기괴한 모습에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미술계에선 오 작가의 작품이 뿜어내는 다채로운 검은색에 매료됐다. 당시는 학계는 물론이고 적지 않은 주류 작가들이 ‘형상이 그림에 등장해선 안 된다’며 추상을 고집하던 시기. 하지만 그때부터 오 작가는 색과 선, 구도처럼 그림에서만 쓸 수 있는 언어로 자기만의 형상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박수근미술상 심사위원단은 그런 오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박수근’을 떠올렸다. 심사위원장인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오랜 시간 진정성 있는 태도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한 점이 박수근 정신과 깊이 연결된다고 심사위원단은 봤다”고 설명했다. “어릴 때 공부하라고 사준 필기 노트에 그림을 더 많이 그려 야단을 맞기도 했다”는 오 작가는 “수천 년이 지난 그리스 철학을 두고 무용하다고 하지 않듯, 회화도 여전히 유효한 장르”라고 했다. “아직도 캔버스에 다루지 못한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한국 제도권 교육에선 거의 인상주의, 사실주의, 미니멀리즘만 가르쳐 답답했습니다. 자유롭고 다양한 형상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거든요. 그때 제 돌파구는 미국문화원에 가서 빌려 보던 화집이었죠. 그곳에서 다양한 형상을 표현한 그림들이 현대미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보게 됐고, 유학을 떠났습니다.” 프랑스 파리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한 오 작가는 사회 문제를 회화로 표현하는 ‘신구상회화’ 작가들을 교수로 만났다. 현지 작가들은 인종 차별이나 중동 전쟁, 제3세계 문제에 적극 개입하며 작업을 했다. 오 작가도 자료 조사를 위해 퐁피두센터 도서관에 갔다가 5·18민주화운동 사진을 접하며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로 신문지를 잘라 만든 괴물 같은 형상과 검은 배경의 그림이 탄생했다. 그의 작품에는 땀을 흘리는 듯 괴로워하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경직된 울타리 같은 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도 짙게 배어난다. 그는 알베르 카뮈 전집을 완역한 불문학자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와도 절친한 사이다. 다만 오 작가는 앞으로는 절망보다 희망과 생에 대한 찬미를 더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몸짓이 하찮고 별 볼 일 없을 수 있지만, 그것이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는 희망의 몸짓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 작업실에 걸린 작품에선 인물이 거친 선으로 표현되는 대신 흰 타이츠를 입고 있거나, 아예 인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석고 조각상이 놓이는 등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회화는 살아있는 생물이자 스스로 증식하는 것”이라는 작가는 “또 어떤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오 작가는 내년 5월 강원 양구군 박수근미술관에서 수상 기념전을 선보인다. 제10회 박수근미술상은 운영위원회(위원장 이인범 아이비리인스티튜트 대표)가 추천위원 10명을 위촉했고, 추천위원이 후보 7명을 선정한 뒤 심사위원회를 거쳐 수상자를 선정했다. 심사위원은 박남희 관장과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주원 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이윤희 (재)섬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위원이 맡았다.고양=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금박을 입힌 배경 위에 붉고 풍성한 머리칼의 여인이 팬지 한 송이를 들고 있다. 영국 화가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1828∼1882)는 연인 엘리자베스 시달과의 결혼을 기념해 이 초상화를 그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인은 그림을 그릴 때 이미 심각한 병에 걸린 상태였다. 그리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로세티와 시달의 아련하고 복잡한 심경이 담긴 이 작품의 이름은 ‘마음의 여왕’. 해당 작품을 포함해 클로드 모네와 파블로 피카소, 프랜시스 베이컨, 앤디 워홀 등 다양한 시기와 시대를 아우르는 거장들의 예술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국내에서 열렸다.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개막한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립미술관인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JAG)의 소장품 143점을 9개 주제로 나눠 선보였다. 개막 하루 전인 15일 미술관에서 전시 총괄 큐레이터를 맡은 이탈리아 출신 미술사학자·평론가인 시모나 바르톨레나를 만나 이번 전시에 대해 들어봤다.● 세계 순회전 최고 인기는 모네와 로세티 바르톨레나는 JAG의 유럽 미술품을 이탈리아와 독일을 거쳐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그에게 “지금까지 전시에서 관객들은 어떤 작품을 좋아했냐”고 묻자 단박에 “모네와 피카소, 로세티”를 꼽았다.“모네의 ‘봄’은 물론이고 함께 전시된 19세기 프랑스 화가 외젠 부댕의 세 작품은 모두 JAG의 핵심 소장품입니다. 부댕은 모네가 멘토로 여겼던 화가죠. 피카소의 파스텔화 ‘광대’는 화가가 90세 때 그린 작품이지만, 순수하고 창의적 본능으로 가득 찼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보입니다.”이번 전시는 인상파나 피카소 같은 유명 작가의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게다가 19세기 영국의 ‘라파엘 전파’나 인상파의 후대 화가인 ‘나비파’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카미유 피사로의 아들 뤼시앵 피사로의 ‘아침 햇살’과 빈센트 반 고흐의 목탄 드로잉(늙은 남자의 초상), 피에르 보나르의 ‘봄의 일몰’ 등도 놓치면 안 될 명작들이다. 20세기 미술 섹션에선 베이컨의 캔버스 유화 ‘남자의 초상에 관한 연구’와 케네스 놀런드의 ‘부러진 반지’가 눈에 띈다. 이 밖에 유명 작가들의 판화와 이르마 스턴, 윌리엄 켄트리지 등 남아공 유명 미술가들의 작품도 소개된다. 바르톨레나는 “유럽 전시에선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보러 왔다가, 남아공 화가 같은 새로운 작가를 발견해 좋았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했다.● 사하라 이남 최대 미술 컬렉션‘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은 JAG 소장품을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부터 19세기 영국과 프랑스를 거쳐 20세기 미국 현대미술까지 이어지는 구성으로 소개한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 미술 △인상주의 이전 △인상주의 △인상주의 이후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20세기 컨템퍼러리 △20세기부터 현대까지 남아공 미술 순이다. 여기에 JAG 설립자를 조명한 △필립스 부부까지 9개 주제로 엮었다. 이런 방대한 전시가 가능했던 건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 가장 큰 공공 미술 컬렉션으로 꼽히는 JAG의 다양한 소장품 구성 덕이었다. 바르톨레나는 “처음 미술관 수장고에 갔을 때 남아공은 물론이고 유럽 미술 작품 수천 점이 있어 깜짝 놀랐다”고 떠올렸다. JAG 미술관은 ‘필립스 여사’로 불렸던 플로렌스 필립스(1863∼1940)를 비롯한 남아공 부호들의 기부와 후원으로 소장 목록을 키워 나갔다. 특히 영국계인 필립스 여사는 아일랜드 출신 수집가 휴 레인(1875∼1915)의 조언으로 일찍부터 인상파 작품을 모았다고 한다. 여기에 다른 후원자들의 기증도 더해져 오늘날의 컬렉션이 완성됐다.바르톨레나가 특별한 애정을 갖고 ‘중요 작품’으로 꼽은 것들도 있다. 점묘파 화가 폴 시냐크의 ‘라 로셸’과 제라드 세코토의 ‘오렌지를 든 소녀’다. 바르톨레나는 “시냐크의 회화는 이번 전시작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화라서 눈여겨볼 만하다”고 했다. ‘오렌지를 든 소녀’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남아공에서 JAG가 최초로 소장한 흑인 미술가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아무래도 관객들은 색이 화려하고 다양한 유화에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피카소나 툴루즈 로트레크 같은 작가들은 판화에서도 정말 훌륭한 작품을 남겼어요. 작가들의 개인적인 기교가 잘 드러나는 판화들을 자세히 감상하면 더욱 흥미로울 겁니다.” 8월 31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