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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이 포함된 특별전 ‘일본 미술, 네 가지 시선’이 17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으로 유명한 센노 리큐(1522~1591)의 찻물 항아리 ‘시바노이오리’부터 에도 시대 유명 화가인 오가타 고린(1658~1716)이 직접 무늬를 그린 옷 ‘가을풀무늬 고소데’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관 306호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의 소장품 62점을 한 자리에 모았다. 도쿄국립박물관은 ‘가을풀무늬 고소데’, ‘시바노이오리’와 ‘마키에 다듬이질 무늬 벼루 상자’, 전통 공연예술인 노(能)에 사용된 ‘샤쿠미 가면’ 등 일본 중요문화재 7점을 포함해 40점을 출품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22점은 대부분 2000년대 이후 수집한 미술품이다.전시는 이들 미술품을 4가지 주제로 나눠 일본 미술의 특징을 조명한다. ▲장식 ▲절제 ▲아와레(あはれ∙자연의 섬세한 변화에 대한 감동) ▲아소비(遊び∙유쾌하고 재치 있는 미적 감각) 등이다. 첫 두 주제는 미술품의 외형에 집중해 화려한 장식이 특징인 조몬 토기, 채색 자기, 금박 병풍부터 이와 대조되는 투박한 다도 도구와 센노 리큐로 대표되는 소박한 다도 문화, 간결한 멋의 칠기나 옷을 소개한다. 센노가 갖고 있었던 물 항아리와 ‘와비’(소박함) 미의식을 상징하는 라쿠 찻잔 ‘아마데라’ 등을 볼 수 있다.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일본 미술 특유의 정서를 다룬 ‘아와레’와 ‘아소비’ 전시장이다. 아와레는 피고 지는 벚꽃, 습기가 가득한 밤공기, 붉게 물든 나뭇잎과 기울어진 그림자 등 자연의 변화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며 오는 애잔함과 감동 등 복합적 감정을 뜻한다. 우리나라의 ‘한’처럼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미술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풀무늬’로 이를 표현했다. 이 ‘가을풀무늬’가 부드럽게 찰랑이는 모습을 담은 금박 병풍과 두루마리 옷 ‘고소데’, 가을풀이 무성한 마당을 앞에 두고 다듬이질하는 사람들을 마키에로 새긴 벼루 등을 ‘아와레’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또 ‘아와레’ 정서를 담은 문학 작품 ‘겐지모노가타리’와 전통 공연 ‘노’에 사용된 옷과 가면도 전시됐다. 마지막 ‘아소비’ 주제는 각종 풍속과 명소 풍경을 담은 다색 목판화 ‘우키요에’, 먹의 번짐과 즉흥성을 활용해 자유로운 회화 세계를 펼친 이토 자쿠추의 ‘수묵유도권’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 기간 중인 7월 16일에는 박물관 소강당에서 ‘아와레’ 정서와 ‘겐지모노가타리’에 담긴 일본의 미의식을 주제로 한 전문가 강연이 열린다. 전시는 8월 10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취향을 형용사가 아닌 누구나 알 만한 브랜드로 말하는 데 익숙하다. 간편하게 자극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초대해 왁자지껄 떠드는 걸 즐기며, 진지함보다는 장난스러운 재미를 간직하고 싶은 사람을 설명한다면? 프링글스, 발베니, 할리갈리, 스팸 통조림, 그리고 카우스 피규어. 화가 정수영이 음식이나 생활용품을 수납하는 팬트리로 그린 주변 사람들의 초상인 ‘팬트리 연작’을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에서 공개했다. 지난달 28일 개막한 전시는 신작인 ‘팬트리’ 연작을 포함한 회화 30여 점을 전시한다. 전시장에서는 과자, 와인과 치즈 올리브, 샴페인과 위스키부터 곤충까지 온갖 물건들이 놓인 팬트리를 구경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작가가 주변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수납공간을 보여 달라고 한 다음, 이것을 토대로 회화적 언어로 재구성한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는 여행 가방이 놓인 가운데 발끝이 살짝 보이는 작품 ‘내향인’(Introvert)이 걸려 있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가운데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보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물건’으로 취향과 정체성을 파악하는 소비 사회의 단면이 읽힌다. 전시 제목은 ‘초대받고 싶지만, 참석하고 싶지 않아’(I want to be invited, but I don’t want to attend). 2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의료 사고는 절대 가볍지 않은 문제다. 의료진의 순간적 실수는 환자 한 사람의 생명을 넘어 가족의 인생까지 뒤흔들 수 있다. 30년 차 현역 내과 의사가 쓴 이 책은 의료 사고가 초래하는 고통을 묘사하는 동시에, 사고의 원인을 단지 의료진 개개인에게서 찾지 말고 의료 시스템과 문화가 얽힌 복합적 문제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도입부부터 충격적이다.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뒤 “미국 전체 사망 원인 중 세 번째가 의료 사고”라는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특히 여기에 저자의 인간적 시선을 더한 것이 매력적이다. 의료 사고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나 조치를 소개하면서 의사인 본인의 경험을 담아 공감의 여지를 더한다. 의대 3학년 때 밤늦은 시간 수술을 돕다가 외과 의사의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는데, 권위적인 학교 문화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고 몇 달 동안 끙끙 앓았다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이다. 의료 현장의 혼란스러운 하루하루도 생생하게 소개한다. 책이 묘사하는 병원에는 의료진 1명이 40명이 넘는 환자를 혼자 챙기거나, 전자 기록 시스템이 다운되고, 간호사는 부족한데 피곤한 인턴들이 가득하다. “환자 한 명에게 주어지는 몇 분 안에 진단 가능성이 희박한 모든 잠재적인 병명까지 고려해 환자에게 소견을 이야기해야 하는” 식이다. 이러한 병원의 이면을 보지 못했던 독자는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하는 의아함과 놀라움으로 책을 읽게 된다. 미국에서 제때 올바른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백혈병 환자 제이와 화상 환자 글렌의 이야기는 적지 않은 울림이 있다. 환자와 가족이 겪는 고통과 무력감, 의료진의 죄책감과 혼란을 함께 느끼며 공감할 수 있다. 저자는 의료 사고의 복합적인 원인을 분석하는 한편 실질적인 대책도 제안한다. 의료진이 지켜야 할 ‘체크 리스트’ 도입, 의료기록의 전자화와 접근성 개선 등이다. 책 마지막엔 환자와 가족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언도 정리했다.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의료 문화의 변화와 환자와 의료진 간의 신뢰 회복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새빨간 산딸기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제철을 맞아 물이 오른 산딸기가 그득한 바구니 아래 종이처럼 하얀 카네이션 두 송이가 놓여 있네요.흰 카네이션이 조명처럼 밝혀주는 ‘산딸기 산’은 촉촉한 윤기로 반지르르 빛이 납니다.하나 꺼내어 입에 넣으면 새콤한 맛이 팡팡 터질 것 같은 광경.작가는 이 그림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일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유리잔에 물을 담아 그려 놓았습니다.보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69~1779)의 ‘산딸기 바구니’입니다.일상의 감칠맛을 담은 화가샤르댕은 18세기 프랑스 화가로 동물과 과일을 소재로 한 정물화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솜씨가 좋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샤르댕은 소박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평생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습니다.그런 그가 그림에 담은 것은 일상에서 누구나 발견하는 과일이나 컵, 물병 같은 물건들 혹은 부르주아나 노동 계층의 삶 속 순간을 담은 풍속화였습니다.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정물화는 실력이 낮은 화가들이 그리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살롱전’을 통해 화가들에게 상을 주고 일할 기회를 줬던 권력 기관인 아카데미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화가에게 역사화나 초상화를 맡겼습니다.그 다음이 정물화나 풍경화였죠. 그럼에도 샤르댕은 이례적으로 아카데미 정식 회원으로 인정받고 왕실과 귀족 컬렉터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그 비결, 산딸기 그림처럼 샤르댕의 정물은 무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정물화가 인기를 끌었던 네덜란드의 그림 속 화려한 위세를 뽐내는 총천연색 화병이나 테이블 위에 가득한 온갖 음식들의 탐스러운 모습에 비교하면 샤르댕이 그린 물건들은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투명한 유리잔과 마늘 몇 알, 갈색 도자기 물병이 전부인 그림도 있고요.그림 한가운데 삭힌 홍어가 축 늘어져 있고, 이 흐름이 테이블에 툭 하고 걸친 리넨 천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다시 말해 샤르댕의 정물은 탐스럽고 화려한 무언가를 자랑하기보다는, 그림 속에서 각기 다른 질감을 부딪치게 만들며 리듬을 만들고 한 편의 음악처럼 생기를 불어넣습니다.가벼운 유리잔과 무거운 도자기, 냄새 나는 홍어와 깨끗한 리넨, 그 옆에 꼬리를 바짝 세운 새끼 고양이처럼 말이죠.이런 샤르댕의 표현 방식을 저는 ‘일상의 감칠맛’이라고 느낍니다. 샤르댕을 좋아하며 자주 언급했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샤르댕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 집의 반쯤 치워진 식탁, 흐트러진 식탁보 한 귀퉁이, 빈 굴 껍데기 옆에 놓인 칼 같은 곳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마음을 뒤흔드는 산딸기샤르댕의 정물화는 현대로 와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특히 산딸기 그림은 2022년 프랑스 파리의 한 경매에서 예상가를 훌쩍 뛰어넘은 2400만 유로(약 376억 원)에 낙찰됐는데요.낙찰자가 미국 미술관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정부가 그림 반출을 막아 뉴스가 되기도 했습니다.이후 루브르박물관이 대중 모금을 받아 2년 만에 그림 대금을 마련했고, 지난해 초 산딸기 그림을 매입하면서 이 그림은 프랑스에 남았습니다.18세기 사람들이 보면 “‘루이 14세 초상’도 아니고, ‘예수의 탄생’도 아닌 고작 산딸기 그림에 376억 원이라니!” 하고 놀랐을까요?물론 루이 14세 초상이나 유명 화가가 그린 종교화가 지닌 역사적 가치가 훨씬 높지만, 산딸기 정물이 그에 버금가는 대중적 명성을 갖고 대접받게 된 현상은 흥미롭습니다.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그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과 ‘연결’돼 있느냐고, 이 ‘연결’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역사화나 왕실 초상화가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여겼던 과거의 사람들은 전쟁이나 영웅 서사 같은 커다란 사건과 인물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또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이 ‘살롱전’이 열릴 때 심사해서 좋다고 선정한 작품이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받아들였고요. 그런데 사회가 바뀌고 개인마다 각자의 가치관을 지니게 되면서, 그 기준은 달라집니다.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을 차에 적셔 먹다 어린 시절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되살아나는 경험을 중요하게 묘사하죠.샤르댕과 프루스트 같은 예술가들은 개인의 삶에선 전쟁이나 영웅보다 내 눈앞에 놓여 있는 새콤한 산딸기 하나가 더 크게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흔히 화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마음을 흔드는’ 예술가가 수백 년 전부터 성공하고 귀한 대접을 받아왔습니다.산딸기를 카메라가 기록한 듯 꼼꼼하고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림을 통해 생생한 ‘마음’을 느끼게 만드느냐가 중요하죠.흰 카네이션과 유리잔이 산딸기의 촉촉한 질감을 극대화하는 샤르댕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 “아 저건 산딸기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저 산딸기 정말 먹음직스럽다”고 군침을 흘립니다.샤르댕의 ‘산딸기 바구니’를 프랑스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만든 건 이렇게 딸기 하나로 뒤흔들린 여러 사람의 ‘마음’입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85년 어느 날. 사진 속 좁은 분장실엔 ‘스물여덟 살’ 청년이 앉아 있다. 꽉 찬 스케줄로 쉴 새 없이 달리던 시절. 공연이 끝나고 녹초가 된 몸을 의자에 구겨 넣고 쉬는 모습. 배우 송승환(68)은 40년 전 자신의 사진을 크게 프린트해 서울 종로구 후지시로 세이지 북촌스페이스에 걸었다. 당대 최고의 MC이자 라디오 DJ였고, 이후 공연 제작자로도 승승장구한 그가 예인(藝人)으로 산 60년을 돌아보는 전시 ‘나는 배우다, 송승환’(22일까지)을 위해서였다. 개막 하루 전인 10일 전시장에서 만난 송 배우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듯했다. 1965년 아역 성우로 데뷔해 1969년 동아연극상에서 역대 최연소로 특별상을 받으며 줄곧 스타였던 인생. 길고 긴 세월이 담긴 3000여 장의 사진 중에 150장을 추려 내며 그는 “20대 때가 가장 많이 생각났다”고 한다. “연극, 영화, 드라마, 쇼프로그램 MC까지 혼자 도저히 못 할 일들이 밀려들었어요. 그땐 제대로 된 매니저 시스템도 없었거든요. 고민 끝에 하루를 오전, 오후, 밤으로 3등분했습니다. 30일이 아니라 90일 동안 일하는 거라 여기니 조금 여유가 생겼어요.”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송 배우의 인생은 주어진 조건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현실로 만드는 시간이 줄곧 이어졌다. 2003년 ‘난타’의 한국 최초 브로드웨이 진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등 굵직한 사건이 적지 않다. 이런 기록을 전시와 동명의 책 ‘나는 배우다, 송승환’(뜨인돌)에 담아냈다. 책에서는 그가 눈물을 흘렸던 순간들도 털어놨다. 하나는 ‘난타’의 첫 해외 공연 날, 또 하나는 시력 악화(황반변성·망막색소변성증)를 알게 됐을 때다. “난타가 마침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무대에 오르고 기립박수를 받을 때 눈물이 나더군요. 그다음은 눈이 나빠졌을 때예요. 여러 병원에 다녔는데 방법이 없다니 실망스러워 울음이 났습니다.” 송 배우는 모두가 난타의 해외 진출에 고개를 저었을 때도 배우, 스태프들과 끊임없이 의욕을 다지며 ‘공통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바로 앞 사람조차 알아보기 힘들어졌을 때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 “그래도 하늘은 보이니 감사한 일”이라며 다음 할 일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 자기 인생을 송 배우는 “미리 대본을 읽었다면 (출연을) 거절했을 드라마”라고 했다. “제 인생은 우여곡절이 너무 많아 개연성과 리얼리티가 없어요. 나이 먹으면 힘들었던 일이 조금은 밝게 채색되잖아요. 굳이 과거의 힘든 순간을 전부 되살리고 싶진 않은 마음이죠.” 60년을 돌아보는 전시지만 송 배우는 따로 개막식도 개막 인사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오후 전시장에 머물며 그간 출연·제작한 약 200편의 작품을 함께한 이들을 맞이하려 한다. ‘그래도 정리하는 한마디가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겨울에 공연할 거니까 보러 와,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했다. “이제 복잡한 건 제쳐 두고, 자신에게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배우를 하다 죽고 싶다”는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역은 뭘까. 주저 없이 ‘유리동물원’의 톰과 ‘더 드레서’의 극단 대표 겸 노배우 선생님(Sir)을 꼽았다. “꿈이 많은데 가장 노릇을 하느라 집을 벗어나지 못했던 소년 톰. 마지막 공연은 윤여정 선배와 했는데 왠지 톰이 저를 닮아 세 번이나 맡았어요. 지금은 ‘더 드레서’의 노배우가 나와 비슷하다 느껴요.” 배우로서 자신의 인생이란 대본은 거절하고 싶다던 송 배우. 그럼 제작자라면 그의 삶은 어떤 공연으로 만들었을까. 그의 답은 단단하고 묵직했다.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극적인 순간도 있긴 한데, 재미가 있을까요. (현실을 긍정하는 이야기?) 아마 그렇겠죠. (토니상을 받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아니라 ‘확실한 해피엔딩’이 된다면 좋겠네요.”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빛이 바래고 벗겨진 사진처럼 그림 속 한복이 둥둥 떠 있다. 사진 속 여성은 빨간 치마를 펼쳐 보이며 포즈를 취했지만 그림 속에서 그는 희미한 흔적만 남았다. 배경엔 삼베 같은 질감만 도드라져 얼핏 동양화처럼 느껴지는 작품.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헬레나 파라다 김 작가의 신작 ‘베로니카’다. 한국인 어머니의 가족사진 앨범에서 발견한 사진들에서 얼굴을 지운 ‘한복’ 연작 중 하나다.김 작가의 개인전 ‘빛이 머무는 시간’이 서울 종로구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지난달 개막했다. 김 작가는 한국인 파독 간호사 어머니와 스페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랐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유럽 전통 회화 기법을 배웠는데, 이를 한복이나 불화 등 한국적인 소재나 기법과 결합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머니가 동료 간호사들과 학 병풍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나 함께 독일로 온 이모들의 모습에서 출발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가장 큰 작품인 ‘스텔라 마리스’는 조선시대 신부의 혼례복인 활옷에 르네상스 시대 그림 속 ‘성모자’를 결합했다. 부부의 금실, 다산, 장수를 상징하는 봉황, 연꽃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활옷 한가운데 그려진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따뜻한 축복의 기운을 극대화한다. 2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85년 어느 날. 사진 속 좁은 분장실엔 ‘스물여덟 살’ 청년이 앉아 있다. 꽉 찬 스케줄로 쉴 새 없이 달리던 시절. 공연이 끝나고 녹초가 된 몸을 의자에 구겨 넣고 쉬는 모습. 배우 송승환(68)은 40년 전 자신의 사진을 크게 프린트해 서울 종로구 후지시로세이지 북촌스페이스에 걸었다. 당대 최고의 MC이자 라디오 DJ였고, 이후 공연 제작자로도 승승장구한 그가 예인(藝人)으로 산 60년을 돌아보는 전시 ‘나는 배우다, 송승환’(22일까지)를 위해서였다.개막 하루 전인 10일 전시장에서 만난 송 배우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듯했다. 1965년 아역 성우로 데뷔해 1969년 동아연극상에서 역대 최연소로 특별상을 받으며 줄곧 스타였던 인생. 길고 긴 세월이 담긴 3000여 장의 사진 중에 150장을 추려내며, 그는 “20대 때가 가장 많이 생각났다”고 한다.“연극, 영화, 드라마, 쇼프로그램 MC까지 혼자 도저히 못 할 일들이 밀려들었어요. 그땐 제대로 된 매니저 시스템도 없었거든요. 고민 끝에 하루를 오전, 오후, 밤으로 3등분 했습니다. 30일이 아니라 90일 동안 일하는 거라 여기니 조금 여유가 생겼어요.”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송 배우의 인생은 주어진 조건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현실로 만드는 시간이 줄곧 이어졌다. 2003년 ‘난타’의 한국 최초 브로드웨이 진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등 굵직한 사건이 적지 않다. 이런 기록을 전시와 동명의 책 ‘나는 배우다, 송승환’(뜨인돌)에 담아냈다. 책에는 그가 눈물을 흘렸던 순간들도 털어놨다. 하나는 ‘난타’의 첫 해외 공연 날, 또 하나는 시력 악화(황반변성·망막색소변성증)를 알게 됐을 때다. “난타가 마침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무대에 오르고 기립박수를 받을 때 눈물이 나더군요. 그다음은 눈이 나빠졌을 때예요. 여러 병원에 다녔는데 방법이 없다니 실망스러워 울음이 났습니다.”송 배우는 모두가 난타의 해외 진출에 고개를 저었을 때도 배우, 스태프들과 끊임없이 의욕을 다지며 ‘공통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바로 앞 사람조차 알아보기 힘들어졌을 때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 “그래도 하늘은 보이니 감사한 일”이라며 다음 할 일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 자기 인생을 송 배우는 “미리 대본을 읽었다면 (출연을) 거절했을 드라마”라고 했다.“제 인생은 우여곡절이 너무 많아 개연성과 리얼리티가 없어요. 나이 먹으면 힘들었던 일이 조금은 밝게 채색되잖아요. 굳이 과거의 힘든 순간을 전부 되살리고 싶진 않은 마음이죠.”60년을 돌아보는 전시지만 송 배우는 따로 개막식도 개막 인사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오후 전시장에 머물며 그간 출연·제작한 약 200편의 작품을 함께한 이들을 맞이하려 한다. ‘그래도 정리하는 한마디가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겨울에 공연할 거니까 보러와,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했다“이제 복잡한 건 제쳐 두고, 자신에게 좀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배우를 하다 죽고 싶다”는 그가 가장 애착이 가지는 역은 뭘까. 주저없이 ‘유리동물원’의 톰과 ‘더 드레서’의 극단 대표 겸 노배우 선생님(Sir)을 꼽았다.“꿈이 많은데 가장 노릇을 하느라 집을 벗어나지 못했던 소년 톰. 마지막 공연은 윤여정 선배와 했는데 왠지 톰이 저를 닮아 세 번이나 맡았어요. 지금은 ‘더 드레서’의 노배우가 나와 비슷하다 느껴요.”배우로서 자신의 인생이란 대본은 거절하고 싶다던 송 배우. 그럼 제작자라면 그의 삶은 어떤 공연으로 만들었을까. 그의 답은 단단하고 묵직했다.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극적인 순간도 있긴 한데, 재미가 있을까요. (현실을 긍정하는 이야기?) 아마 그렇겠죠. (토니상을 받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아니라 ‘확실한 해피엔딩’이 된다면 좋겠네요.”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빛이 바래고 벗겨진 사진처럼 그림 속 한복이 둥둥 떠 있다. 사진 속 여성은 빨간 치마를 펼쳐 보이며 포즈를 취했지만, 그림 속에서 그는 희미한 흔적만 남았다. 배경엔 삼베 같은 질감만 도드라져 얼핏 동양화처럼 느껴지는 작품.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헬레나 파라다 김 작가의 신작 ‘베로니카’다. 한국인 어머니의 가족사진 앨범에서 발견한 사진들에서 얼굴을 지운 ‘한복’ 연작 중 하나다.파라다 김의 개인전 ‘빛이 머무는 시간’이 서울 종로구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지난달 개막했다. 김 작가는 한국인 파독 간호사 어머니와 스페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랐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유럽 전통 회화 기법을 배웠는데, 이를 한복이나 불화 등 한국적인 소재나 기법과 결합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머니가 동료 간호사들과 학 병풍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나 함께 독일로 온 이모들의 모습에서 출발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가장 큰 작품인 ‘스텔라 마리스’는 조선시대 신부의 혼례복인 활옷에 르네상스 시대 그림 속 ‘성모자’를 결합했다. 부부의 금실, 다산, 장수를 상징하는 봉황, 연꽃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활옷 한가운데 그려진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따뜻한 축복의 기운을 극대화한다. 2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무언가를 비추거나 드러내기 위한 빛이 아닌, ‘빛 그 자체’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1일 한국을 찾은 미국 미술가 제임스 터렐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관심 있는 ‘빛’을 재료로 작품을 만들고 싶었지만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빛은 분명 물리적 실체가 있지만 나무나 금속처럼 조각할 수 없잖아요. 음악가가 원하는 소리를 악기를 통해 만들어 내듯, 빛을 생산하는 악기가 필요했어요.” 터렐은 이런 고민 끝에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텅 빈 곳에 가득 찬 빛 속에 푹 잠기거나, 눈부신 빛의 파장이 먼 곳이 보이지 않도록 뿌연 장막을 만들고, 때로는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설치 작품으로 ‘빛의 존재감’을 드러내 왔다. 14일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개막한 터렐의 개인전 ‘리턴’은 ‘글라스워크’ 연작 4점과 신작 ‘웨지워크’ 등 25점을 선보인다. 터렐은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 상설 전시관이 있다. 여기서 ‘스카이스페이스’ ‘스페이스 디비전’ 등 대형 설치 작품을 2013년부터 전시해 한국 관객에게도 인지도가 높다. 서울에서 개인전이 열리는 것은 2008년 이후 처음. 갤러리 공간에서 전시하는 만큼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럼에도 빛에 온전히 빠져들어 몰입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설치 작품 위주로 전시가 구성됐다.터렐은 11일 간담회에서 “빛의 물리적인 실체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광자는 (상대론적) 질량이 있고, 빛의 파동은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에 빛은 사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며 “다만 빛을 인식하는 우리의 감각은 상대적이고, 이런 인식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신작 ‘웨지워크’를 감상하면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입구를 지난다. 그다음 붉은빛이 테두리처럼 설치된 공간이 보이는데, 그 속에서 또 다른 조명이 하나씩 켜지면서 공간의 형태를 관객은 서서히 인식하게 된다. 20분간 빛은 서서히 변하는데, 이 변화에 따라 빛은 마치 뿌연 연기나 얇은 장벽처럼 보여 ‘빛이 물리적 실체’임을 실감하게 만든다. 터렐은 이에 대해 “빨간색이 뜨겁고 푸른색이 차갑다고 생각하지만, 행성을 볼 때는 푸른 별이 더 뜨겁고 붉은 별이 더 차갑다. 뜨거운 별일수록 파장이 짧은 빛을 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평소에 익숙하지 않았던 빛을 경험하며 어지러움을 느끼다가 그 낯섦을 견디면 긍정적인 느낌을 받으면서 새로운 것을 얻게 된다”고 덧붙였다. 전시장에는 터렐이 미 애리조나 플래그스태프 인근에서 만들고 있는 대형 전시관 ‘로든 크레이터’에 관한 판화도 전시된다. 2014년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선보인 설치 작업 ‘아텐 레인’을 판화로 재현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터렐은 간담회 막바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의 가장 강력한 문화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K팝, 클래식 음악은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들이 한계에 도전하고 있죠. 저는 그런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빛과 예술을 사랑하는, 그저 빛 한 조각을 전하고 싶었던 평범한 예술가로 저를 봐주기를 바랍니다.” 9월 2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새빨간 산딸기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제철을 맞아 물이 오른 산딸기가 그득한 바구니 아래 종이처럼 하얀 카네이션 두 송이가 놓여 있네요. 흰 카네이션이 조명처럼 밝혀주는 ‘산딸기 산’은 촉촉한 윤기로 반지르르 빛이 납니다. 하나 꺼내어 입에 넣으면 새콤한 맛이 팡팡 터질 것 같은 광경. 작가는 이 그림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일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유리잔에 물을 담아 그려 놓았습니다. 보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69∼1779)의 ‘산딸기 바구니’입니다.일상의 감칠맛을 담은 화가 샤르댕은 18세기 프랑스 화가로 동물과 과일을 소재로 한 정물화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솜씨가 좋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샤르댕은 소박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평생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습니다. 그런 그가 그림에 담은 것은 일상에서 누구나 발견하는 과일이나 컵, 물병 같은 물건들 혹은 부르주아나 노동 계층의 삶 속 순간을 담은 풍속화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정물화는 실력이 낮은 화가들이 그리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살롱전’을 통해 화가들에게 상을 주고 일할 기회를 줬던 권력 기관인 아카데미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화가에게 역사화나 초상화를 맡겼습니다. 그 다음이 정물화나 풍경화였죠. 그럼에도 샤르댕은 이례적으로 아카데미 정식 회원으로 인정받고 왕실과 귀족 컬렉터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 산딸기 그림처럼 샤르댕의 정물은 무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정물화가 인기를 끌었던 네덜란드의 그림 속 화려한 위세를 뽐내는 총천연색 화병이나 테이블 위에 가득한 온갖 음식들의 탐스러운 모습과 비교하면 샤르댕이 그린 물건들은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투명한 유리잔과 마늘 몇 알, 갈색 도자기 물병이 전부인 그림도 있고요. 그림 한가운데 삭힌 홍어가 축 늘어져 있고, 이 흐름이 테이블에 툭 하고 걸친 리넨 천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샤르댕의 정물은 탐스럽고 화려한 무언가를 자랑하기보다는, 그림 속에서 각기 다른 질감을 부딪치게 만들며 리듬을 만들고 한 편의 음악처럼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가벼운 유리잔과 무거운 도자기, 냄새 나는 홍어와 깨끗한 리넨, 그 옆에 꼬리를 바짝 세운 새끼 고양이처럼 말이죠. 이런 샤르댕의 표현 방식을 저는 ‘일상의 감칠맛’이라고 느낍니다. 샤르댕을 좋아하며 자주 언급했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샤르댕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 집의 반쯤 치워진 식탁, 흐트러진 식탁보 한 귀퉁이, 빈 굴 껍데기 옆에 놓인 칼 같은 곳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마음을 뒤흔드는 산딸기 샤르댕의 정물화는 현대로 와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산딸기 그림은 2022년 프랑스 파리의 한 경매에서 예상가를 훌쩍 뛰어넘은 2400만 유로(약 376억 원)에 낙찰됐는데요. 낙찰자가 미국 미술관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정부가 그림 반출을 막아 뉴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루브르박물관이 대중 모금을 받아 2년 만에 그림 대금을 마련했고, 지난해 초 산딸기 그림을 매입하면서 이 그림은 프랑스에 남았습니다. 18세기 사람들이 보면 “‘루이 14세 초상’도 아니고, ‘예수의 탄생’도 아닌 고작 산딸기 그림에 376억 원이라니!” 하고 놀랐을까요? 물론 루이 14세 초상이나 유명 화가가 그린 종교화가 지닌 역사적 가치가 훨씬 높지만, 산딸기 정물이 그에 버금가는 대중적 명성을 갖고 대접받게 된 현상은 흥미롭습니다.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그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과 ‘연결’돼 있느냐고, 이 ‘연결’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역사화나 왕실 초상화가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여겼던 과거의 사람들은 전쟁이나 영웅 서사 같은 커다란 사건과 인물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이 ‘살롱전’이 열릴 때 심사해서 좋다고 선정한 작품이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받아들였고요. 그런데 사회가 바뀌고 개인마다 각자의 가치관을 지니게 되면서, 그 기준은 달라집니다.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을 차에 적셔 먹다 어린 시절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되살아나는 경험을 중요하게 묘사하죠. 샤르댕과 프루스트 같은 예술가들은 개인의 삶에선 전쟁이나 영웅보다 내 눈앞에 놓여 있는 새콤한 산딸기 하나가 더 크게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 화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마음을 흔드는’ 예술가가 수백 년 전부터 성공하고 귀한 대접을 받아왔습니다. 산딸기를 카메라가 기록한 듯 꼼꼼하고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림을 통해 생생한 ‘마음’을 느끼게 만드느냐가 중요하죠. 흰 카네이션과 유리잔이 산딸기의 촉촉한 질감을 극대화하는 샤르댕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 “아 저건 산딸기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저 산딸기 정말 먹음직스럽다”고 군침을 흘립니다. 샤르댕의 ‘산딸기 바구니’를 프랑스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만든 건 이렇게 딸기 하나로 뒤흔들린 여러 사람의 ‘마음’입니다.※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무언가를 비추거나 드러내기 위한 빛이 아닌, ‘빛 그 자체’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1일 한국을 찾은 미국 미술가 제임스터렐은 이렇게 말했다.“내가 관심 있는 ‘빛’을 재료로 작품을 만들고 싶었지만, 딜레마가 있었다. 빛은 분명 물리적 실체가 있지만 나무나 금속처럼 조각할 수 없다. 음악가가 원하는 소리를, 악기를 통해 만들어 내듯, 빛을 생산하는 기술이 필요했다.”이런 고민 끝에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텅 빈 공간에 가득 찬 빛 속에 푹 잠기거나, 눈부신 빛의 파장이 먼 곳이 보이지 않도록 뿌연 장막을 만들고, 때로는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설치 작품으로 ‘빛의 존재감’을 드러내 온 터렐의 신작이 한국을 찾았다. 14일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개막하는 터렐의 개인전 ‘리턴’은 ‘글라스워크’ 연작 4점과 신작 ‘웨지워크’ 등 총 25점을 선보인다.터렐은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 상설전시관이 있다. 이 공간에서 ‘스카이스페이스’, ‘스페이스 디비전’등 대형 설치 작품을 2013년부터 전시해 왔기 때문에 한국 관객에게도 인지도가 있다. 서울에서 개인전이 열리는 것은 2008년 이후 처음으로, 갤러리 공간에서 전시하는 만큼 작은 규모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럼에도 빛에 온전히 빠져들어 몰입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설치 작품 위주로 전시가 구성됐다.터렐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빛은 물리적인 실체이고 이 자체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광자 안에는 질량이 존재하고 빛의 파동은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에 빛은 사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만 빛을 인식하는 우리의 감각은 상대적인 것이고, 이런 인식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그런 그의 말처럼 신작 ‘웨지워크’를 감상하면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면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입구를 지나게 된다. 그다음 붉은빛이 테두리처럼 설치된 공간이 보이는데, 그 속에서 또 다른 빛이 하나씩 켜지면서 이 빈 공간의 형태를 관객은 서서히 인식하게 된다. 20분 간이 공간에 비치는 빛은 서서히 변하는데, 이 변화에 따라 빛이 마치 뿌연 연기처럼 보이기도, 얇은 장벽처럼 보이기도 한다. ‘빛이 물리적인 실체’라는 터렐의 말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터렐은 “빨간색이 뜨겁고, 푸른색이 차갑다고 생각하지만, 행성을 볼 때는 푸른 별이 더 뜨겁고 붉은 별이 더 차갑다. 빛의 주파수 간격이 짧을수록 온도가 더 뜨겁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평소에 익숙하지 않았던 빛을 경험하며 어지러움을 느끼다가 그 낯섦을 견디면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고 무언가 얻게 되는 것이 있다”고 덧붙였다.전시장에서는 터렐이 애리조나 플래그스태프 인근에서 만들고 있는 대형 전시관 ‘로든크레이터’에 관한 판화와 드로잉도 함께 전시된다. 또 2014년 미국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선보인 설치 작업 ‘아텐레인’을 판화로 재현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책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신작. 이번엔 유전자가 ‘살아있는 역사책’임을 강조하는 책을 출간했다. 유전자가 단순히 생물의 형질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조상들이 겪어 온 환경과 생존 전략, 적응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현대 생명체의 유전자를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고 설명한다. 팔림프세스트란 여러 차례 글씨가 적힌 양피지를 말하는데, 고대와 중세에는 양피지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이미 글이 쓰인 양피지에 글씨를 지우고 새로 덧써서 재활용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오래된 양피지를 자외선이나 X선으로 촬영해 지워진 글씨들을 읽어내면서 과거의 흔적을 파헤친다. 이런 다층적 기록이 남은 양피지, 팔림프세스트와도 같은 유전체를 분석하면 그 종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남고 적응하며 진화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다른 새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몰래 낳는 ‘탁란’ 행위를 하는 뻐꾸기의 비밀도 유전자로 읽을 수 있다. 암컷 뻐꾸기들은 자신이 자란 둥지의 새를 정확히 기억해 같은 종의 새 둥지에 비슷한 알을 낳는다. 이는 알의 색과 무늬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암컷의 염색체에 있기 때문이며, 뻐꾸기의 유전체를 분석하면 그 종이 대대로 어떤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북미의 터키대머리독수리와 유라시아 독수리는 유전적으로 매우 거리가 먼 동물들이지만, 비슷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비슷한 외형과 행동을 갖게 됐다. 이는 유전체가 생물의 모양이나 행태를 결정하고 지시하는 정해진 ‘설계도’가 아니라 외부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유전체에 기록된 여러 흔적을 분석하는 것은 과거의 생태와 진화사를 해독하는 일이 된다. 도킨스는 유전체 해독 기술이 발전하면 화석이나 유물보다 더 정밀하게 과거를 복원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는 유전자가 개체와 종이 사라져도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불멸의 정보’임을 강조한다. 유전자 해독을 통한 ‘유전적 고고학’의 미래를 특유의 명확한 문체와 풍부한 사례, 일러스트로 제시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가정폭력을 피해 자식도 두고 집을 떠난 배명순. 남편의 추적을 피하려 가명 정순임으로 사는 그를 고용한 박 사장은, 그의 불안한 신분을 악용해 월급을 마음대로 깎으려고 한다. ‘내 속을 알면서 왜 그러시냐?’는 배명순의 호소에 박 사장은 능글맞게 쏘아붙인다.“내가 당신 속을 어떻게 알아? 누가 들으면 내가 건드린 줄 알겠네….” 배명순 앞에 펼쳐진 비정한 세상에 관객의 마음이 무거워지려는 찰나, 무대 위에 있던 분장사가 어이없는 대사를 외친다.“더러운 새끼. 역할을 맡아도 꼭 더러운 거만….” 그러자 갑자기 박 사장을 연기하던 배우도 역할에서 빠져나온다. “나도 이 대사 빼자고 연출한테 몇 번을 말했다. 이래서 우리집 애들이 연극을 보러 오겠냐”며. 객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지난달 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한 ‘유령’은 어디까지가 연극인지 헷갈리는 작품이다. 무대 안과 밖의 ‘이중 서사’가 동시에 전개되기 때문이다.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인 고선웅 연출이 14년 만에 발표한 창작극이다. 고 연출은 ‘무연고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문 기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무연고자는 법적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너무 아픈 이야기라서 무거운 서사만 떠올랐다”는 고 연출은 떠돌이로 살다 숨진 뒤 시신 안치실에서 ‘유령’이 된 배명순의 서사와 무대 위에서 배역 없이 떠돌아다니는 배우 ‘유령’들의 서사를 겹쳐 보기로 했다. 이러다 보니 독특한 상황은 무대에서 계속해서 이어진다. 배명순이 남편에게 맞는 장면을 보면, 분장사가 무대에 함께 등장해 멍 분장을 해준다. 분장사를 맡았던 배우는 경찰 역할이 돼 남편 오 씨를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이중 서사는 당연히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 터. 그런데 이런 산만함이 역설적으로 슬픔은 덜고 유쾌함은 더한다. 독특한 방식으로 연극을 편하게 감상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셈이다. 다만 그만큼 배명순이란 무연고자 유령의 서사는 다소 압축적으로 다뤄진다. 인간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한 이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위로하고 싶다는 메시지는 연출의 다른 대사로 직접 전달된다. 이러한 메시지가 분장사나 경찰처럼 극 중 ‘난입하는’ 인물을 통해 서사로 표현됐다면 어떨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 대신 마지막에 배우들의 몸을 본뜬 시신이 등장하고, 각 배우들이 죽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은 무척 강렬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쾌한 장송곡’이란 마무리는 매우 인상적이다. 2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최근 수년간 아시아 컬렉터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탈리아 예술가 살보(1947∼2015)의 개인전이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개막했다. 그간 살보의 작품은 주로 홍콩 경매장이나 아트페어에서 볼 수 있었는데, 국내에서 개인전이 열린 건 처음이다. 살보의 유족이 설립한 ‘살보재단’과 협업한 전시는 1988∼2015년 작가가 그린 풍경화를 소개한다.살보는 1970년대 초반까지는 이탈리아의 대표적 미술 사조인 ‘아르테 포베라’ 그룹과 활동하며 실험적인 작품을 했다. 아르테 포베라는 ‘가난한 예술’이란 의미로 흙, 나무, 돌, 옷 등 일상적 재료를 활용해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1973년부터 다시 회화를 그리며 조르조 데 키리코를 연상케 하는 차분하고 몽환적인 풍경화들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유적지부터 시칠리아, 노르만, 아랍 양식이 결합한 교회 건축물이 있는 풍경이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묘사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다음 달 1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빛에 바랜 검은 코트 22벌이 반원형으로 늘어서 있다. 각기 다른 무늬와 색을 품은 코트들은 디자이너 지용킴이 자연광에 옷감을 노출해 무늬를 만드는 ‘선블리치(Sun-Bleach)’ 기법으로 제작했다. 공장식 대량생산으로는 재현하기 힘든 태양과 바람의 흔적이 새겨진 옷들. 마치 세월을 머금은 시계를 연상시킨다.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지난달 30일 개막한 전시 ‘시대복장 Iconclash: Contemporary Outfits(상징 충돌: 현대의 옷차림)’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패션을 주인공으로 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패션 스튜디오 ‘지용킴’과 ‘포스트아카이브팩션(파프)’, ‘HYEIN SEO(혜인서)’가 각각의 전시실에서 각자의 디자인과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미술관 전시의 문법을 빌려 선보였다. 1전시실에선 지용킴의 검은 코트 22벌과 ‘선블리치’ 기법을 활용한 대형 패브릭, 또 이 기법을 사용하면서 함께 녹이 슬거나 빛이 바랜 작업실의 도구들을 전시했다.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몇 주에서 수개월간 시간을 들여 원단에 무늬를 넣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일민미술관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도 지용킴 스튜디오가 선블리치 기법으로 만들었다. 2전시실의 파프는 ‘기록’에 집중했다. 파프는 옷을 일부러 잘랐다 다시 붙인 것 같은 절개선, 비대칭 디자인, 지퍼나 벨크로 같은 실용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바닥 전체에 ‘의복 패턴’이 깔려 있다. 왼편에는 파프의 옷들이 낚싯줄에 걸린 듯한 형태로 전시돼 있다. 작업 기록 영상을 아치형으로 설치한 12개의 모니터로 선보이는 것도 눈길을 끈다. 혜인서는 3전시실에서 10년 동안 컬렉션을 준비하며 만들었던 디자이너 스케치, 드로잉과 함께 참고 자료와 사진, 책을 캐비닛 여러 대에 나열했다.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시대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찾아낸 다양한 이미지는 물론이고 소설 같은 텍스트까지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캐비닛에 부착된 자료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벽면에 적힌 설명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패션 디자인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 일어나면서 장식·기능적 목적을 넘어서 사회·철학적인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선 1930, 40년대에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엘사 스키아파렐리(1890∼1973)가 살바도르 달리 등과 협업해 대표작 ‘랍스터 드레스’ 등을 만들며 인간의 무의식을 패션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990년대 ‘패션계의 악동’으로 불렸던 영국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1969∼2010)은 ‘한니발’ 같은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주제를 다룬 디자인과 쇼를 통해 젠더나 계급 문제를 소환해 찬사받았다. 매퀸은 사후에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뮤지엄에서 회고전이 열렸을 정도로 미술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일민미술관의 ‘시대복장’전은 요즘 한국에서 활동하는 패션 스튜디오들이 어떠한 창작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에 관한 고민과 맥락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세 스튜디오는 모두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태어난 디자이너들이 이끌고 있다. 이번 전시는 최근 패션 브랜드들이 미술 전시의 문법을 차용해 쇼룸을 꾸미는 현상에서 착안해 반대로 미술관에 패션을 가져와 ‘쇼룸’처럼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윤율리 일민미술관 학예팀장은 전시 서문에서 “패션과 미술이 공유하는 문화 지형을 그려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7월 20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빛에 바랜 검은 코트 22벌이 반원형으로 늘어서 있다. 각기 다른 무늬와 색을 품은 코트들은 디자이너 지용킴이 자연광에 옷감을 노출해 무늬를 만드는 ‘선블리치(Sun-Bleach)’ 기법으로 제작했다. 공장식 대량생산으로는 재현하기 힘든 태양과 바람의 흔적이 새겨진 옷들. 마치 세월을 머금은 시계를 연상시킨다.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지난 달 30일 개막한 전시 ‘시대복장 Iconclash: Contemporary Outfits(상징 충돌: 현대의 옷차림)’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패션을 주인공으로 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패션스튜디오 ‘지용킴’과 ‘포스트아카이브팩션(파프)’, ‘HYEIN SEO(혜인서)’가 각각의 전시실에서 각자의 디자인과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미술관 전시의 문법을 빌려 선보였다.1전시실에선 지용킴의 검은 코트 22벌과 ‘선블리치’ 기법을 활용한 대형 패브릭, 또 이 기법을 사용하면서 함께 녹이 슬거나 빛이 바랜 작업실의 도구들을 전시했다.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몇 주에서 수개월간 시간을 들여 원단에 무늬를 넣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일민미술관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도 지용킴 스튜디오가 선블리치 기법으로 만들었다.2전시실의 파프는 ‘기록’에 집중했다. 파프는 옷을 일부러 잘랐다 다시 붙인 것 같은 절개선, 비대칭 디자인, 지퍼나 벨크로 같은 실용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바닥 전체에 ‘의복 패턴’이 깔려 있다. 왼편에는 파프의 옷들이 낚싯줄에 걸린 듯한 형태로 전시돼 있다. 작업 기록 영상을 아치형으로 설치한 12개의 모니터로 선보인 것도 눈길을 끈다.혜인서는 3전시실에서 10년 동안 컬렉션을 준비하며 만들었던 디자이너 스케치와 드로잉은 물론 참고 자료와 사진, 책을 캐비닛 여러 대에 나열했다.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시대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찾아낸 다양한 이미지는 물론, 소설 같은 텍스트까지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캐비닛에 부착된 자료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벽면에 적힌 설명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패션 디자인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 일어나면서 장식·기능적 목적을 넘어서 사회∙철학적인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선 1930~1940년대에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패션디자이너 중 하나인 엘사 스키아파렐리(1890~1973)가 살바도르 달리 등과 협업해 대표작 ‘랍스터 드레스’ 등을 만들며 인간의 무의식을 패션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990년대 ‘패션계의 악동’으로 불렸던 영국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1969~2010)은 ‘한니발’ 같은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주제를 다룬 디자인과 쇼를 통해 젠더나 계급 문제를 소환해 찬사 받았다. 맥퀸은 사후에 빅토리아앤앨버트 뮤지엄에서 회고전이 열렸을 정도로 미술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이런 맥락에서 일민미술관의 ‘시대복장’전은 요즘 한국에서 활동하는 패션 스튜디오들이 어떠한 창작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에 관한 고민과 맥락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세 스튜디오는 모두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태어난 디자이너들이 이끌고 있다. 이번 전시는 최근 패션 브랜드들이 미술 전시의 문법을 차용해 쇼룸을 꾸미는 현상에서 착안해, 반대로 미술관에서 패션을 가져와 ‘쇼룸’처럼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윤율리 일민미술관 학예팀장은 전시 서문에서 “패션과 미술이 공유하는 문화 지형을 그려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7월 20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 전시를 관람할 때 관객은 한 번쯤 작품을 만져보고 싶은 유혹에 휩싸인다. 두껍게 쌓아 올린 물감층이나 나무를 깎아 거친 질감을 살린 조각은 손끝에서 어떤 느낌을 만들어 낼까? 부산현대미술관에서 5월 3일 개막한 기획전 ‘열 개의 눈’에서는 일부 작품을 만져도 된다. 손가락을 눈에 비유한 전시 제목처럼 관객은 눈 대신 손으로 작품을 만지며 감상할 수 있다. 또 헤드셋으로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수어로 진행되는 전시 투어도 마련됐다. 장애인을 포함해 고령자와 아동, 신체기능 약자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미술관을 경험하도록 한 전시다. 전시에 나오는 김덕희 작가의 설치작품 ‘밤의 노래’는 공중에 뜬 푸른색 원형 물체다. 그 아래 손 조각들이 놓여 있다. 마치 ‘어서 잡아 달라’는 듯한 모양의 이 조각(‘하얀 목소리’)을 만지면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데, 조각 속에 열선을 설치해서 만들어진 효과다. 김채린 작가의 ‘하나인 27가지 목소리’는 물컹한 실리콘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조각이다. 작품을 만지면, 실리콘 마찰음이 변형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SEOM:(섬)’ 작가의 ‘감각을 따라 걷기’는 아예 관객이 작품 위에 놓인 실들을 만지며 걸어 다니게 한다. 평소 미술 전시를 볼 때 ‘작품을 만지면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제한했던 ‘촉감’을 마음껏 발휘하는 즐거움이 있다. 기존 미술관이 시각, 청각 등 특정한 감각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전시에선 이 밖에 시각을 잃은 후 변화된 감각 체계로 인간과 동물의 위계를 허무는 상상을 작품으로 만드는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미국)의 설치 조각 작품, 뇌출혈 이후 왼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그룹 라움콘(한국)의 ‘한 손 프로젝트’ 등이 소개된다. 만질 수 없는 다른 작품도 ‘감각 스테이션’에선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촉감을 느끼도록 했다. 이번 전시는 국내외 예술가 20명뿐만 아니라 부산맹학교 저시력 학생들, 돌봄 단체의 발달장애인과 복지사가 함께 사전 프로그램을 통해 완성했다. 미술관 지하 1층 ‘극장을숙’에서는 다큐멘터리 ‘실명에 관한 기록’과 시각장애인 미술 애호가의 문화생활을 담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 등이 상영된다. 9월 7일까지.부산=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 전시를 관람할 때 관객은 한 번쯤 작품을 만져보고 싶은 유혹에 휩싸인다. 두껍게 쌓아 올린 물감층이나 나무를 깎아 거친 질감을 살린 조각은 손끝에서 어떤 느낌을 만들어낼까? 부산현대미술관에서 5월 3일 개막한 기획전 ‘열 개의 눈’에서는 일부 작품을 만져볼 수 있다. 또 작품 설명은 헤드셋을 끼고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수어로 진행되는 전시 투어도 마련됐다.이 전시는 장애인을 포함해 고령자, 아동, 신체기능 약자 등 더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미술관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 전시 제목에서 ‘열 개의 눈’은 손가락을 눈에 비유한 것으로, 제목처럼 관객은 눈 대신 손가락으로 만지며 작품을 볼 수가 있다.이를테면 김덕희 작가의 설치작품 ‘밤의 노래’는 공중에 뜬 푸른색 원형 형체 아래 손 조각들이 놓여 있다. 마치 손을 잡아 달라는 듯한 모양의 조각을 만지면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조각 속에 열선을 설치해서 만들어진 효과다.김채린 작가의 ‘하나인 27가지 목소리’ 작품에서는 물컹한 실리콘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조각을 만지면, 실리콘 마찰음이 변형된 소리를 스피커에서 들을 수 있다. SEOM:(섬)의 ‘감각을 따라 걷기’는 아예 관객이 작품 위에 놓인 실들을 만지며 걸어 다니게 한다. 평소 미술 전시를 볼 때 ‘작품을 만지면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제한했던 ‘촉감’을 마음껏 발휘하며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이 과정에서 미술관이 의외로 시각, 청각 등 특정한 감각만 중심이 된다는 걸 깨닫는다.이밖에 시각을 잃은 후 변화된 감각 체계로 인간과 동물의 위계를 허무는 상상을 작품으로 만드는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미국)의 조각 설치 작품, 뇌출혈 이후 왼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그룹 라움콘(한국)의 ‘한 손 프로젝트’ 등이 소개된다. 전시장 속 ‘감각 스테이션’에서는 만질 수 없었던 다른 작품도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촉감을 느껴볼 수 있다.이번 전시는 참가한 국내외 예술가 20명뿐 아니라 부산맹학교 저시력 학생들, 돌봄 단체의 발달 장애인과 복지사가 함께 ‘다른 감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전 프로그램’을 거쳐 완성됐다. 미술관 지하 1층 ‘극장을숙’에서는 장애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큐멘터리 ‘실명에 관한 기록’과 시각 장애인 미술 애호가의 문화생활을 담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 등이 상영된다. 9월 7일까지.부산=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만두 노총’, ‘화난 고양이 집사 연맹’, ‘일정이 밀린 사람 연합’…. 지난해 비상계엄 선포 이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린 광장에서는 각종 인터넷 ‘밈’과 상상 속 단체 상징이 담긴 기발한 깃발들이 등장했다. ‘깃발 애호가’인 저자는 이 장면을 고국인 우크라이나에서 뉴스로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며 이렇게 쓴다. “한국의 집회 현장 속 깃발은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일장기 위로 태극기를 덧칠했던 스님부터 인터넷 밈 깃발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얼마나 크게 변화, 발전했는지 선명히 보여준다.” 저자가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 이렇게 쓴 이유, 이 책이 세계 각국의 국기와 그 안에 담긴 숨은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대표적인 국기들이 어떻게 다른 나라의 국기와 연결되고 이어지며 변형되는지를 담았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삼색기는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상징한다. 당시 혁명군은 파리의 상징으로 파랑과 빨강으로 된 표식을 모자에 달고 다녔는데, 가운데에 있는 흰색은 부르봉 왕가를 상징한다. 이렇게 흰색(왕정)을 파랑, 빨강(시민)이 둘러싼 형태는 헌법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은 국민이 군주를 통제한다는 뜻을 담아 탄생했다. 이 밖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며 국가에 초록색을 추가했다는 사실, 키프로스 국기의 오렌지색은 이 나라의 풍부한 구리 매장량을 상징한다는 등 국기 속에 숨겨진 각 나라의 자연과 역사, 정치적 신념을 200여 개의 국기 그림과 함께 소개한다. 저자의 이력도 독특하다. 그는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태어나 기자와 은행가로 일하다 정보기술(IT) 회사를 창립하고, 2019년부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부의 내각 장관을 지낸 경험이 있다. 어릴 때 월드컵 축구 경기 중계를 보다 국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소셜미디어로 국기 이야기를 나누며 팔로어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내용을 모은 책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기 6개월 전 우크라이나어로 처음 출간됐다. 2023년에 영어판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됐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어도어와 전속계약 분쟁을 벌이고 있는 걸그룹 ‘뉴진스’(새 활동명 NJZ)가 독자적으로 활동할 경우 멤버별 1회당 10억 원을 어도어에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2부(부장판사 허경무)는 전날 “전속계약 유효확인 소송의 1심 판결 선고 전까지 어도어의 사전 승인이나 동의 없이 연예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이에 따라 뉴진스는 방송 및 광고 출연 등이 모두 어렵게 됐다. 앞서 법원은 3월 21일 어도어가 뉴진스를 상대로 낸 ‘기획사 지위보전 및 광고계약 체결 등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뉴진스가 새로운 그룹명으로 활동하자 강제 조치를 결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가처분 결정 전후로 새로운 그룹명으로 공연하고 신곡까지 발표했다”며 “향후에도 위 의무를 위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고 이유를 밝혔다.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