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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 한 도시 ‘노갈레스’는 담장을 경계로 갈라진다. 담장의 북쪽은 미국 애리조나 주 노갈레스 시며, 남쪽은 멕시코 소노라 주 노갈레스 시다. 몇 발짝 떨어지지도 않은 이 두 지역 사람들은 조상도 같고 즐겨 먹는 음식도 같으며 즐겨 듣는 음악마저 비슷하다. 하지만 남북의 삶은 사뭇 다르다. 북쪽 주민들은 연평균 가계수입이 3만 달러 이상, 성인 대부분이 고등학교 졸업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노인 상당수가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메디케어’(공공건강보험) 수혜자다. 반면 남쪽은 멕시코 안에서는 비교적 잘사는 편이라지만 평균 가계수입은 북쪽의 3분의 1에 불과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이 수두룩하며 영아 사망률도 높다. 한쪽에서는 국가로부터 제공되는 공공서비스가 당연한 국민의 권리인데 담장 너머 다른 곳에서는 뒷돈과 부패로 얼룩진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치안 수준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무엇이 노갈레스의 운명을 둘로 나눴을까. 멀리 갈 것 없다. 휴전선으로 두 동강 난 한반도의 상황은 노갈레스 사례를 능가한다. 1인당 국민소득, 건강상태, 평균수명까지 두 곳이 빚어낸 다른 삶의 모습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경제 제도와 정치 체제를 받아들였는가, 즉 선택의 문제다. 책에 따르면 한 국가가 실패하는 이유는 지도자를 잘못 택한 탓도 아니요, 지리적 위치 때문도 아니다. 저자는 ‘정치 경제 제도가 포용적인가, 착취적인가’를 두고 실패 원인을 설명한다.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적인 정치 경제 제도가 발전과 번영을 불러오는 반면 지배계층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낳는다. 포용적인 제도의 핵심은 유인(인센티브)이며 이것을 말살하는 수탈적인 제도가 곧 국가 실패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이 책이 말하는 인센티브는 국가가 발전하기 위한 초석임과 동시에 실패의 굴레를 벗는 열쇠이기도 하다. 저자는 총 15장에 걸쳐 국가 간 빈부가 생기는 원인을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꼼꼼하게 살펴본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눈에 띄는 장은 한반도의 경제상황을 비교한 3장 ‘번영과 빈곤의 기원’이다. 저자는 “한반도에서 발생한 제도적 차이에는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뉘게 된 것을 설명하는 일반 이론의 모든 요소가 포함돼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북한 경제의 패인은 한마디로 주민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유인, 즉 인센티브가 체제 내에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는 포용, 인센티브, 수탈과 같은 단어들이 전 세계 빈부격차를 설명하는 혁신적인 도구는 아니다. 700여 쪽에 달하는 두께도 만만찮다. 그럼에도 15장을 내내 힘 있게 이끌어가는 비결은 흥미로우면서 읽기 쉬운 사례들, 그리고 ‘포용적인 제도만이 국가를 풍요롭게 만든다’는 저자의 확신에 있다. 이 책을 두고 프랜시스 후쿠야마, 니얼 퍼거슨, 재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1776년 애덤 스미스 ‘국부론’ 이후 ‘신국부론’의 탄생이라며 찬사를 보낸 것도 이런 요소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공한 국가와 선순환 논리의 사례가 영국과 미국 위주라는 점, 실패의 전형으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지목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서구 중심주의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왕정 붕괴와 다원적 정치 제도로의 발전 덕분이고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것은 착취적인 정치 제도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착취적 제도는 영국과 같은 식민열강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저자 역시 이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런 외부적 요소보다 내부적 요소를 더 부각시킨다. 이미 성공한 서구 국가들의 정치 제도 변혁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었고, 실패 국가로 분류되는 빈국의 경제 악화는 과연 외부(특히 영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와는 상관없는 내부의 이권다툼 때문인 걸까.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성공 국가의 씨앗’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 인문·경제 문명의 대가(제프리 삭스 지음·21세기북스)=미국 경제위기가 일어난 근본 원인은 정치 경제의 엘리트층 내부에서 시민적 미덕이 쇠퇴한 데 있다며 개인과 사회의 책임을 요구한다. 2만8000원. 누가 중국경제를 죽이는가(랑셴핑 지음·다산북스)=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을 향하는 중국의 치명적 약점을 중화문화의 특성, 중국인의 숨겨진 심리와 콤플렉스 등을 통해 살펴본다. 1만8000원. ○ 학술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2(하영선 손열 엮음·창비)=사대, 자유, 국가, 외교, 독립, 민권, 기술, 국제협조, 동아시아질서 등 전통적 천하질서로부터 21세기 복합질서로 이어지는 과정의 주요 개념을 고찰한다. 3만 원. 민의와 의론(장현근 외 지음·이학사)=현대 민주주의의 틀에서만 바라보던 ‘정치와 민의(民意) 소통’이라는 주제를 한국 중국 일본의 정치사상사로 확장해 살펴본다. 2만8000원. ○ 문학 영원의 숲(스가 히로에 지음·포레)=미래의 박물관은 어떤 모습일까. 작가는 소행성 하나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학예사들은 미술품 등에 담긴 진정한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1만3000원. 당분간 인간(서유미 지음·창비)=가사와 직장 일에 지쳐 ‘로봇 도우미’를 고용했다가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싱글맘 등 서민들의 지친 삶과 이채로운 상상력이 결합한 단편 8편을 묶었다. 1만2000원.○ 실용·기타 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하는가(존 맥스웰 지음·비즈니스북스)=리더십 전문가인 저자가 15가지 성장법칙을 제시해 실패와 고통을 극복하고 성공을 이뤄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1만4500원. 유령과의 역사투쟁(황성준 지음·미래한국미디어)=좌익운동권 활동에 매료돼 소련까지 건너갔던 저자가 바라본 선거정국의 책략과 한때 동료였던 특정 정치세력을 바라보며 내놓는 이야기. 1만2000원.}

“시내 명치뎡(서울 중구 명동)에 잇는 경성부립도서관(남산도서관의 전신)은 작일(어제)에도 초대를 받은 관람객들이 뒤를 이어 들어오며… 아래층에는 아해(아이)들의 열람실을 설비하야 자미스러운(재미있는) 동화의 서적을 갓추어 노아 처음으로 설비한 것으로는 매우 정돈이 되야잇다.… 아래층 우편에 잇는 인사상담소에서도 매일 직업을 구하는 사람과 여러 가지의 사정을 문의하러 오는 사람이 만타더라.” 남산도서관의 개관을 다룬 1922년 10월 3일자 본보 기사 일부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의 ‘꿈자람터’이자 시민들의 독서 및 휴식공간으로 자리잡아온 남산도서관이 5일로 개관 90주년을 맞는다. 올해 8월 말 기준으로 하루 평균 4500여 명이 찾는 남산도서관은 50만여 권의 자료를 소장한 시립공공도서관이다. 1922년 서울 중구 명동2가에 개관한 남산도서관은 1964년 12월 31일 현재의 위치(용산구 후암동)로 신축 이전했다. 90주년을 기념해 도서관은 8월부터 한 달간 이용객들로부터 도서관에 얽힌 사연과 추억담을 모집해 총 185건 중 7건을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김석원 씨(54)는 1977년 겨울을 잊을 수가 없다. 대학입시에 낙방한 그는 남산도서관에서 멸치맛과 간장맛이 나는 10원짜리 국 한 그릇에 도시락 찬밥을 말아먹고 일간지를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가 우연히 지방지에 난 강원도 소방공무원 채용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했던 순간은 아련하기만 하다. 34년간 소방관으로 몸담았던 그는 2년 전 문득 아내와 함께 도서관 식당을 찾았다. 더이상 10원짜리 눈물의 간장국물은 판매하지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꿈을 키워가며 하루하루를 버텼던 때가 떠올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암동으로 옮겨 온 도서관에 첫발을 내디뎠던 열다섯 살의 용산중 학생 이창성 씨(62)는 도서관에 들어가기 위해 이용객들이 차도까지 길게 줄을 선 광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입장 인원이 꽉 차면 중지했다가 시간이 흐르고 독서객이 빠졌을 때 입장하던 뿌듯함. 도서관에서는 한니발과 시저도 될 수 있었고 이순신도, 니체도, 헤르만 헤세도 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돼 아름다운 여인과 연애도 할 수 있었고 위험한 모험도 마다않고 상상할 수 있었다. 60을 넘긴 지금 직장도 그만두고 다시 찾은 도서관이지만 자유롭게 읽을 책이 잔뜩 있어 행복하다. 뒤늦게 시작한 임용 준비가 여러 해 동안 결과가 좋지 못했던 고시생 이모 씨. 참고도서가 한 권 두 권 옆에 쌓여갈 때마다 상실감과 무력함도 겹겹이 쌓였다.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기 위해 참여했던 독서치료 프로그램으로 다시 열정을 불태우게 됐다고 전했다. 이 밖에도 몸이 불편한 관계로 이동문고를 이용해 쌍둥이 아들에게 책을 읽히는 지체장애인, 라면자판기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자주 고장 났던 기계가 나까지는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주부, 언니 손을 잡고 수선을 피웠던 여고생이 어느덧 애인과 함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러 다니며 복도와 열람실이 키와 마음의 깊이로 서서히 작게 느껴졌다는 사연까지, 남산도서관과 함께 숨쉬며 자라온 이야기들은 추후 도서관 소식지에 선보일 예정이다. 남산도서관은 구조 보강 및 시설 보수를 위해 이달 10일부터 내년 3월 초까지 임시휴관에 들어간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창문 하나 낸 외딴집, 앙상한 가지의 소나무와 구부러진 나무. 고고하나 쓸쓸해 보이는 선비의 삶을 담아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만화가의 손에 유쾌하게 비틀려 환생했다. ‘식물탐정완두’ ‘꼬마애벌레말캉이’ 등 생태만화를 그리는 황경택 작가(40)는 이 고전을 소방수가 허망하게 쳐다보는 불에 다 타버린 소나무, 고사해서 영양주사를 맞고 있는 소나무로 과감하게 패러디했다. “처음엔 세한도를 좋아하고 김정희를 존경하는 분들이 보시고 왜 그림으로 장난을 하느냐며 호통 칠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좋아요. 북촌한옥마을을 둘러본 뒤 갤러리를 찾은 외국인들도 즐거워하더군요.” ‘대중이 범접하기 어려운 세한도를 만만한 만화로 표현해 웃음의 소재로 만들어 보겠다’는 작가의 의도가 먹혀든 셈이다. 8일까지 서울 종로구 가회동 갤러리 ‘가회동 60’에서 열리는 ‘환생도(環生圖)’는 생태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재해석한 옛 그림들을 선보이는 기획전이다. 전시 제목엔 ‘다시 살아난다(還生)’는 뜻과 ‘환경(環境)’과 ‘생물’의 줄임말이라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생태세밀화를 그리는 작가들의 모임인 ‘코드(CODE·colour of drawing for ecology)’의 첫 번째 기획전으로, ‘오래된 민화에 나오는 생물들은 과연 실재했을까’ ‘그 종은 무엇이었으며 지금도 현존하는 생물인가’ 등의 물음에 답하는 전시다. 원작과 화가들의 작품을 비교해가며 생태학 지식을 쌓는 재미가 쏠쏠하다. 장승업의 ‘호응도(豪鷹圖)’에 등장하는 중국산 매를 정용훈 작가는 한국의 ‘참매’로 대체해 그려 넣었다. 김홍도의 ‘화조도(花鳥圖)’ 속 출신불명의 새는 천지현 작가의 그림에선 한국의 쇠박새로 바뀌었다. 황 작가의 ‘짝짓기’는 연못가 앞에서 서로 얽혀 노는 남녀를 그린 신윤복의 ‘청금상련(聽琴賞蓮·가야금을 들으며 연꽃을 감상한다)’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연못을 길게 늘여 연꽃 위에서 잠자리가 짝짓기를 하는 모습을 확대해 그렸다. 정해진 작가는 ‘신모란도(新牡丹圖)’에서 부귀영화를 불러들이기 위해 집 안에 모셔두던 모란도를 벽지의 무늬처럼 사용해 부와 명예의 덧없음을 표현했다. 남계우의 ‘석화접도대련(石花蝶圖對聯)’에서 봄을 상징하는 나비들을 윤영아 작가는 나방으로 대체해 ‘석화아도대련(石花蛾圖對聯)’을 그렸다. 김광식 작가는 김홍도의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 속 미니멀리즘에 반기라도 들 듯 참게를 펜으로 세밀하게 표현했다. CODE의 회원 6명은 ‘복제’라는 세밀화의 한계를 벗어나 수묵 아크릴 만화 등 다양한 기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황 작가는 “생물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한계가 있고 의미가 부여돼야 진정한 작품”이라며 “CODE는 앞으로도 유쾌한 웃음과 생태학적인 의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CODE는 다음 전시로 △화투 그림 속 생물들과 환경을 월별로 재조명하는 기획전과 △지조와 절개의 사군자(四君子)가 아니라 지혜, 희생, 배려 등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가치를 표현하는 ‘도심 속의 사군자’ 등 다양한 전시들을 계획하고 있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이튼스쿨 학생들은 1년 365일 점심 저녁을 감자만 먹어야 했다. 그나마 일요일 하루 나오는 자두 푸딩으로 ‘감자 지옥’을 면할 수 있었다. 불운의 씨앗은 열렬한 감자애호가 파이 헨리 채바스가 쓴 책이었다. 1844년 베스트셀러 ‘자녀 양육에 관해 어머니에게 들려주는 조언’ 속 “푸슬푸슬하도록 푹 삶긴 묵은 감자야말로 어린이가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채소다”라는 문장 하나 때문에 학생들은 싫으나 좋으나 감자를 섭취해야 했다.같은 감자지만 지역에 따라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역사도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성경 속에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자가 금단의 열매 취급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인들이 감자를 전해준 뒤 19세기 말 천황이 시식하기 전까지 2세기가량을 소 사료용으로 썼다고 한다. 책은 감자를 포함해 매일 식탁에 오르는 스무 가지 채소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격식 있는 고매한 역사서라기보다는 ‘채소를 매개로 한 잡학상식교양서’에 가깝다. 미처 몰랐던 채소와 관련된 세계사적 사건들의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콩이 출현하면서 전쟁과 전염병으로 얼룩졌던 중세 유럽의 암흑기가 사라졌다는 내용, 아가멤논의 병사들이 트로이 목마 안에서 설사를 멈추게 하려고 당근을 먹었다는 일화 등이 펼쳐진다. 채소와 관련된 격언이나 고대부터 현재까지 아우르는 레시피의 변천사는 덤이다.오랜 기간 오해를 받아온 채소의 사연들은 기구하기까지 하다. 가지의 별명인 ‘발광 사과’ ‘미친 사과’는 먹으면 바로 발광하게 된다는 오해에서 유래했다. 가지를 처음 맛본 서양인이 날로 먹어 치우고는 곧바로 발작을 일으킨 게 화근이었다. 훗날 실제 병명이 급성 위염으로 밝혀졌지만 한번 ‘불길한 채소’라는 프레임에 박힌 가지는 오랫동안 억울한 누명을 써야 했다. 존 밀턴의 ‘실락원’에서는 사탄 루시퍼가 타락 천사들에게 먹이는 채소로 등장하기도 했다.지식과 음담(淫談)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점도 책의 묘미다. 거의 모든 장에 걸쳐 채소가 강장제와 정력제로서 어떤 효능을 발휘하는지를 상세히 소개한다. 아스파라거스를 설명한 대목이 특히 압권이다. “아스파라거스는 역사적으로 순전히 성적인 음식이었으며 최음제로서의 명성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도입부부터 솔깃해진다. 남성의 성기를 닮은 줄기가 외설스러워 감수성 예민한 10대들의 상상력을 자극할까봐 19세기 프랑스 여학교에서는 배식을 금지했다는 웃지 못할 역사도 있다. 인도의 전설적 성애 교본 ‘카마수트라’에서 시들해진 연인들의 원기를 북돋는 ‘아스파라거스 페이스트’ 레시피도 소개된다.책 속 내용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들거나 채소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과 관련된 역사를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악마의 정원에서’(생각의 나무)를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특정 사회에서 악덕과 관련 있다는 이유로 금기시하는 음식들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7대 죄악과 상응하는 항목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당근…’에 맛보기로 등장하는 채소 혐오론자들의 비상식적인 주장과 연결해가며 읽어도 좋겠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명절만 떠올리면 짜증이 확 솟구치는 주부라도 시곗바늘을 중세시대로 돌린다면 오늘날에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18세기 이전 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던 때의 설거지는 고역이었다. 기름기 있는 음식을 담았던 그릇들은 아궁이에서 꺼낸 식은 재를 축축한 헝겊에 묻혀 닦아 헹궜고, 냄비 바닥에 음식이 눌어붙었을 때는 고운 모래나 벽돌 가루를 묻힌 헝겊으로 문지르기도 했다. 시커먼 아궁이, 그을음이 눌어붙은 벽에 줄줄이 걸린 구리 냄비들, 하수구 냄새가 빠져나가도록 환기용 굴뚝이 중앙에 자리 잡은 부엌은 지옥 같은 열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산업시대 산물인 요리용 화덕이 19세기 말 조리용 레인지로 변모하면서 부엌은 ‘하찮고 후미진 곳’에서 실험실처럼 깔끔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책은 잘 알려진 명화들 속 여성과 물건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중세부터 20세기까지 부엌 뿐 아니라 침실 욕실 거실 등 다양한 실내 공간과 인테리어를 통시적으로 훑는다. 샤워가 신경증에 걸린 여성을 위해 의사들이 내린 처방이었고, 가장의 침대는 본래 거실에 두어 권위를 살렸다는 내용 등도 흥미롭다. 명절날 한데 모여 머리 맞대어 명화도 보고, 옛 그림 속에서 리모델링 아이디어도 얻어 보는 것은 어떨까.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블루칼라 화이트칼라 노칼라 시리즈 1, 2(조이스 캐럴 오츠 외 지음·홍시)=존 치버, 조이스 캐럴 오츠, 리처드 예이츠 등 영미권 스타작가 32명의 대표 단편을 묶었다. 1만3800원. 행자(틱낫한 지음·소담출판사)=‘화’ ‘화해’ 등의 명상집으로 알려진 베트남 틱낫한 스님의 소설. 베트남에 전해 내려오는 관음보살의 현신(現身) 꽌암 티낀의 이야기를 담았다. 1만1000원. 시민의 역습(팀 지 지음·초록물고기)=인도의 독립운동, 베트남전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철폐, 이집트 독재정권 종식…. 오랜 기간 피고 진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을 살펴보고 운동을 혁명으로 성공시키는 방법을 제시한다. 1만4800원. 손정의(사노 신이치 지음·럭스미디어)=기업가 손정의의 화려한 성공에만 초점을 맞춘 책이 아니다. 성공의 이면에 감춰진 그의 성장 배경과 파란만장한 삼대 이야기가 펼쳐진다. 1만5000원. 신음악의 철학(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세창출판사)=작곡가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세계를 역사철학적 인식론적 사회이론적 예술이론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해석한 현대음악 이론서의 고전. 2만9000원. 현대시의 사유 구조(박주택 지음·민음사)=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가 생태환경시와 여성시를 중심으로 1990년대 이후 한국 시에 나타난 사유 구조를 탐구했다. 2만2000원. 치수, 물은 사람의 마음이다(한철협 지음·화옥)=물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만화 형식을 빌려 물과 같은 사람의 마음을 파악함으로써 지혜의 세계에 입문하게 만드는 책. 1만6000원.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차동엽 지음·위즈앤비즈)=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기 전 병상에서 육성이 담긴 메시지를 엮었다. 김 추기경이 들려주는 참 행복의 길,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묘책이 생생한 목소리에 담겼다. 1만4000원. 박해전의 생각(박해전 지음·사람일보)=박해전 사람일보 회장이 쓴 ‘안철수의 생각’에 대한 공개질의서. 6·15선언, 10·4공동선언 등 남북관계 정책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을 촉구한다. 1만 원. 일인자(김종찬 지음·참글세상)=각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장인 50명에 대한 인물 탐구서. 서예, 요리, 제빵, 건축, 표구, 그림, 음악, 자동차, 문화기획 등의 일인자가 된 비법을 들려준다. 1만7000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책 축제 ‘파주북소리 2012’가 15∼23일 경기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린다. ‘책으로 소통하는 아시아’를 기치로 내건 이번 축제는 책 자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전시, 강연, 퍼포먼스 등 130여 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아시아와 유럽의 출판계 인사들과 국내외 200여 개 출판사, 300여 개 문화예술 단체가 참가한다. 전시행사로는 축제 기간 내내 열리는 ‘한글 나들이 569’가 눈길을 끈다. 한글 탄생 569주년을 맞아 한글이 새겨진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잡지 ‘소년’(1908년 창간) 등 희귀 잡지를 선보이는 ‘추억의 그 잡지’ 특별전도 볼거리다. 올해 첫선을 보이는 아시아 출판문화상인 ‘파주 북어워드’와 전 세계 주요 책마을 13곳이 참여하는 ‘세계책마을심포지엄’도 주목할 만하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프랑스의 저술가 기 소르망, 일본의 역사소설가 사토 겐이치 등 세계적인 저자들과 신영복, 도정일 교수 등 국내 유명 저자들의 강연도 독자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공연과 문화행사도 열린다. 시인 김소월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김소월 문학의 날’ 행사에는 수많은 후배 문인과 문학도의 시 낭송과 가곡 공연, 강연회가 포함된다. www.pajubooksori.org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나 역시 마오쩌둥 시대가 길러낸 지식인입니다. ‘반과일격(反戈一擊·창끝을 돌려 스스로를 공격한다)’해도 유토피아주의, 영웅주의 등을 지향하는 내 사고방식이나 서술방식이 마오쩌둥의 사상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어요. 이 때문에 ‘마오의 언어로 마오를 비판하고 있다’는 지적을 들을 땐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습니다.” 1980년대 이래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로 꼽혀온 첸리췬(錢理群·73) 전 베이징대 중문과 교수가 ‘파주 북어워드’의 저작상(Writing)을 수상했다. ‘파주 북어워드’는 15일 개막해 23일까지 열리는 파주북소리 2012 축제에서 올해 첫선을 보이는 아시아권 대상의 출판문화상이다. 첸 교수는 한때 문화대혁명의 선봉에 섰던 일을 참회하면서 “문혁이 기존 체제의 근본 문제는 건드리지 못하고 새로운 관료기구와 독재를 낳았다”고 비판해 왔다. 2006년 문화대혁명 4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그는 “문혁이 끝난 뒤 오류를 깨달았음에도 혁명을 전면 부정하지 못했다”며 “1980년대에야 그 반인도적이고 반문화적인 본질을 알게 된 후 문혁 중 수많은 폭력을 용인했던 데 심한 가책을 느꼈다”고 토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축제 개막을 사흘 앞둔 12일, 첸 교수는 본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신간 소개와 더불어 저술 활동에서 겪는 어려움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한국에서 이달 내 출간 예정인 ‘마오쩌둥 시대와 포스트 마오쩌둥 시대’(한울)는 그의 수상을 결정지은 대표작. 이 책은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에도 여전히 마오이즘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며 현재 중국 사회를 비판한다. 1978년 이후 중국의 사상해방운동이 범한 가장 큰 오류는 마오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명확히 제기하지 못했던 점이며, 비판이 완성되지 못하면 중국 사상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는 요원하다는 주장이다. 첸 교수는 중국에서 저술 활동을 하는 데 대해 “처벌이 두렵다기보다 출판사나 다른 이를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고 고백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지식인들의 공허함을 다룬 ‘나의 정신자서전’으로 최근 베이징도서관으로부터 상을 받았지만 “검열로 6만 자나 삭제된 채 출판된 것이라 기쁘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과거 루쉰 연구의 1인자로 알려졌던 그는 마오에 대한 비판적 연구자가 된 데 대해 “마오를 다루는 것은 대학의 ‘금지선’을 넘는 행위라 퇴직 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오쩌둥…’은 대만(1월), 홍콩(6월)에 이어 한국과 일본에서 차례로 출간을 앞두고 있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 현실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큰 처벌이다. 원래 이 책을 그 시절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중국 대륙의 젊은이들을 위해 썼기 때문이다.” 그는 1981∼2002년 베이징대 재직 당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10명의 교수’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그는 “당국이 나를 축출하려 하는 등 외압에 시달릴 때마다 학생들이 편지를 보내 지지해줬다. 이는 살면서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여기는 평가”라고 말했다. 그는 1998년 공개강연에서 중국의 교육제도를 비판한 후 2002년 교수직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퇴임했다. 이 직후 발표한 저서 ‘망각을 거부하라’는 문화혁명, 톈안먼사태 등 민감한 사건의 공론화를 중국 정부가 규제하는 데 반대하는 내용으로 화제를 모았다. “우리는 전 지구적 범위의 위기 상황이자 대변혁의 시기에 와 있다. 역사는 새로운 이상과 가치, 논리, 철학, 비판이론 등의 창조를, 새로운 사상가의 등장을 요구하고 있다. 내 책이 중국에 대한 이해를 넘어 동아시아 지역 지식인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줄 수 있길 바란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푸른 개 장발(황선미 글, 김동성 그림·웅진 주니어)=개를 키워서 용돈벌이를 하는 노인과 잡종 삽살개가 삶의 끄트머리에서 인간적인 화해를 나누는 이야기. 미운 오리새끼처럼 다른 외모로 태어나 가족에게 무시당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주인공 개 장발이 주인 목청과 함께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숙연해진다. 초등학교 고학년. 9500원.옛 선비들의 국토 기행(원영주 글, 이수진 그림, 권태균 사진·주니어 김영사)=정약용, 이황, 이이, 허균 등 최고의 문인 20명이 우리 땅을 돌아보며 쓴 기행문 20편. 초등학생들이 쉽게 접하기 힘든 고전 기행문과 수필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초등학교 전 학년∼중학생. 1만 원.지갑이 떨어져 있었어요(리지 핀레이 지음, 김호정 옮김·책속 물고기)=길 위에서 지갑을 주운 운 좋은 악어는 친구들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 주인을 찾아 돌려줄까? 묵직한 지갑을 들고 주인을 찾아 걷고 또 걷는 꼬마 악어의 여정. 5∼7세. 1만1000원.재주 많은 일곱 쌍둥이(홍영우 글, 그림·보리)=굶주리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원님네 곳간을 털다 위기를 맞게 된 일곱 쌍둥이가 신기한 재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평안북도 철산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림책. 1만1000원.}

괴이한 이름, 복잡한 족보, 뜬금없는 저주들…. 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본다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낯선 구성요소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의 뜻을 최대한 살려 옮긴 탓에 한국어를 읽는 건지, 외국어를 읽는 건지 머리가 아파온다. 신을 포함한 등장인물 이름만도 2000개가 훌쩍 넘는다. 그러나 현재 출간된 5권까지는 고작 4분의 1에 불과하다. 20권까지 번역이 완결되려면 15권이나 남았다. 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읽다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와 이름들에 고개를 갸웃하게 될지 모른다. ‘세계 대홍수’ 이야기는 세계가 대재앙을 맞이해 인류가 멸망한다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 ‘2012’가 현대적으로 번안한 원형이고, 등장인물인 유디스트라 삼형제가 삼국지 속 유비 관우 장비를 빼닮았다는 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부조물도 알고 보면 이 책의 이야기를 시대별로 그린 것이라는 점에 놀라게 될 것이다. ‘바라따 족의 전쟁에 관한 대설화’라는 뜻의 이 책은 기원전 14∼10세기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사촌 간인 ‘빤다와’ 형제들과 ‘까우라와’ 형제들 사이의 전쟁과 그들이 겪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았다. 힌두사상의 핵심을 담은 ‘바그바드 기타’(성스러운 신에 대한 찬가)도 그 일부다. 1만 년간 인도인의 지혜와 상상력의 보고로 자리매김해온 이 책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합한 것의 약 8배 길이에 달한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 연극연출가 피터 브룩은 1905년 프랑스 아비뇽 연극제에서 이 장대한 고전을 9시간 분량의 연극으로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타이타닉’ ‘아바타’의 감독 제임스 캐머런도 “마하바라따를 영화화하는 것이 필생의 꿈”이라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마하바라따에 비하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순진한 편”이라는 말을 남겼다. 한때 ‘인도를 준다 해도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인들이 새삼 부끄러워질 수도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마하바라따에 있나니, 마하바라따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도다’라고 믿는 인도인들의 자부심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 옛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남긴 말이다. 잇따라 발생하는 아동 성폭력 사건이 신문지면을 뒤덮고 있지만 같은 경험을 한 어린이 수백만 명은 오늘도 치유하기 힘든 아픔 속에서 살아간다. 특별법 제정, 가해자 화학적 거세 같은 대책이 활발히 논의된다 해도 이미 성적 트라우마를 안게 된 아이들에게 치료법이 되진 못한다. 이 책은 통계에 그칠 뻔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의 경험을 개인의 비극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40년간 성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상담하고 연구해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다. 여러 쪽에 걸친 각종 수치와 통계들은 그 자체로 성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이뤄지는지를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의 3분의 1이 직간접으로 성폭력에 연관돼 있으며 전 세계 여성의 25%, 남성의 10%가량이 성인이 되기 전에 성적 학대를 경험한 것으로 집계됐다. “만약 어떤 질병이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 정도 수치에 달했다면 국가적 비상사태가 선포됐을 것이며 치료책을 위한 연구비도 즉시 마련됐을 것이다.” 미국 ‘성 학대 추방을 위한 어머니 모임’ 창설자 클레어 리브스의 발언을 곱씹다 보면 세상이 성폭력에 얼마나 둔감한지 돌아보게 된다. 저자가 치료했던 일반인들의 생생한 사례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아동 성학대로 트라우마를 겪었던 유명인사들 이야기다. 유치원생 시절부터 옷 벗기 게임을 했다는 앤젤리나 졸리, 여덟 살 때 침실로 들어온 하숙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메릴린 먼로, 열네 살 때부터 수년간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여왕까지 스크린에서 TV에서, 혹은 역사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 차례로 소개된다. 본인이 확인해주지 않았으나 정황상, 혹은 저자의 추정만으로 성폭력 피해자로 소개된 인물도 적지 않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빈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럴 등이 그렇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타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책에 소개된 유명인사들이 대부분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책 말미에 실린 ‘부모들을 위한 조언’이나 ‘치료사들을 위한 조언’은 유용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하게, 오랫동안 갖게 된다고 한다. 주변의 누군가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면 당신이 평생 그의 편이라는 점을, 시련을 이기고 나면 더욱 아름답고 심오한 내면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알려주면 어떨까.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이것 좀 꽉 매 주라요. 돈 못 건진다 누가 그러오? 서로를 마주보며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텔레비전도 안 보오? 남편들이 아내를 죽일 때 이유를 대기 좋은 거지….”(백가흠의 미발간 소설 ‘나프탈렌’ 중) 평일 오후 8시 라디오 주파수를 EBS에 맞추면 주부 권아영 씨(32)가 등장인물에 따라 낭랑한 목소리를 달리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채널의 간판 책 프로그램인 ‘라디오 연재소설’이다.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의 소설 전편을 읽어주는데 지루해질 만하면 소설과 어울리는 음악이나 작가 인터뷰가 나온다. 낭독자는 일반인들의 신청을 받아 선정한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다 지친 주부, 일용직 노동자, 실직 상태의 젊은이들이 낭독을 맡아왔다. 독서의 계절에 책 읽어주는 라디오 프로들이 청취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KBS1 라디오 ‘책 읽는 밤’, SBS ‘라디오 북카페’ 같은 지상파 방송사들의 프로뿐 아니라 인기 팟캐스트 ‘책 읽는 라디오’ 등도 현대인들의 피곤한 일상을 위로하고 있다. EBS는 ‘책 읽는 라디오’를 모토로 내걸고 올가을 개편에서 책 관련 프로를 10개로 늘렸다. 매달 공개방송 형태로 ‘낭독의 힘’이라는 북콘서트를 열어 청취자들과 일반인 낭독자, 작가, 인디 싱어송라이터들이 소통하는 장도 마련한다. 아무 기교도 없이 책을 읽기만 하는데 청취자 카페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회사원 장모 씨(30)는 “밤늦게 야근한 뒤 퇴근길 차 안에서 라디오북을 크게 틀어놓고 들으면 꼭 좋은 영화를 한 편 감상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유통업에 종사하느라 일요일마다 출근하는 안영주 씨(27·여)는 “평일 방송분을 일요일엔 하루 종일 재방송해주는데 일요일에도 일해야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덜 수 있어 위안이 된다”고 전했다. 소설가들은 낭독 프로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책으로 펴내기 전 EBS ‘라디오 연재소설’에서 소개됐던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편혜영의 ‘서쪽 숲에 갔다’, 백영옥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김연수의 신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출간 후 호평을 받았다. 소설가 백가흠은 “예전에는 소설을 쓴 뒤 눈으로만 퇴고를 했는데 내 작품이 낭독되는 것을 들으면서 문장의 리듬감까지 살필 수 있었다”며 “소설이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설가 김연수도 낭독되는 작품을 들은 뒤 소설 제목을 ‘희재’에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으로 바꿔 달았다. ‘책은 집에서 혼자 조용히 읽는 것’이라는 편견을 지닌 사람들에게 소설가 편혜영은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의 원형은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좋은 작품은 읽었을 때 운율감이 살아나는 글이죠.”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일본에서 활동하는 만화가 정인경(39)의 풍자만화전 ‘어떤 할머니의 이야기-내가 느낀 후쿠시마, 그리고 일본’은 천재지변을 남의 일로만 여기는 이들의 안일함에 대한 경고다. 14일까지 서울 은평구 동명여고 운연당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지난해 3·11 동일본 대지진 당시 큰 피해를 본 후쿠시마를 배경으로 그린 풍자만화 10점이 주를 이룬다. 방사능 위험지역으로 분류돼 대피 명령이 내려졌지만 집에서 수십 년을 숨어 살아온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던, 안전하다고 굳게 믿었던 원전이 하루아침에 나를 집에서 쫓아낼 수도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됐어요. 많은 일본인이 편리한 생활보다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듯해요.” 숙명여대 사학과 졸업 후 1996년 일본 유학을 떠난 정 작가는 2006년 3월 일본 교토 세이카대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만화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에서 16년째 살고 있는 그는 달라진 일본 사회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가 경색됐고, 일본이 화난 것처럼 보이지만 일부 정치인만의 일인 것 같아요. 평범한 일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현안은 원전 사고 대책입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지진 발생 550여 일이 지난 현재 현 밖에서 피난 중인 주민은 6만2000명을 훌쩍 넘었고, 임시 주택에서 생활을 하는 주민은 27만 명에 이른다. 7월 답사차 후쿠시마 현립 미술관에 다녀왔다는 그는 미국 화가 벤 샨이 그린 ‘러키 드래건’(1961년)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러키 드래건’은 1954년 미국이 비키니 섬에서 벌인 수소폭탄 실험으로 낙진 피해를 본 일본 어선 러키 드래건(福龍)호의 어부가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데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개관 때부터 소장해 온 작품이라는데 우연치곤 기막히죠. 이곳에서 30년쯤 뒤에 비슷한 사고가 발생했으니까요.” 정 작가는 아사히신문 오사카지사가 발행하는 회보 ‘아사히21관서스퀘어’에 연재했던 작품들도 소개했다. 고독사, 자녀 학대, 무연고사 등 병든 일본 사회를 보여주는 한 컷 만화들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일본에 가서 느낀 첫인상이 ‘지독히도 개인주의적인 사회구나’였다. “묻지 마 살인이나 성폭행 같은 사건들이 일본에선 이미 10년 전부터 일어났지요.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상태에서 혼자 화를 키우다 발산을 할 데가 없으니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그는 일본의 현재가 한국의 미래가 될까 걱정된다고 했다. “스마트폰처럼 편리한 기구가 생겨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소통하면서 우리 세계가 넓어졌다고 착각하는 것 같아요. 알고 보면 고립된 사회로 가고 있는 데도 말이죠.”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 문학 길 위에 시간을 묻다(최금녀 지음·문학세계사)=길 위에 삶이 있고 시가 있었다. 인도, 네팔, 몽골 등 낯선 곳들을 돌며 건져낸 삶의 편린들이 눈부시다, 찬란하다. 이국적 향기가 가득한 시와 산문을 모은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1만3000원. 오정희의 이야기 성서(오정희 지음·여백)=국내 대표적 여류작가인 저자는 10년 동안 성서를 풀어쓰며 신실한 신앙을 키웠다. 리듬감 있게 넘어가는 ‘이야기’로 재탄생한 성서가 한결 친근하게 다가온다. 1만3800원. ○ 학술 냉철한 머리, 뜨거운 가슴을 앓다(변형윤 윤진호 지음·지식산업사)=원로 경제학자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의 삶과 사상, 사회 참여 활동을 되돌아본 대화록. 2만 원. 어느 낙관론자의 일기(기 소르망 지음·문학세계사)=발전에 대한 확고한 믿음, 낙관론자로 잘 알려진 저자가 2009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여행 일정을 따라 날짜순으로 작성한 일기를 모았다. 1만5000원. ○ 인문 마지막 마음(나형수 지음·경천)=전직 언론인인 저자가 암 수술을 받은 지 10년째 되는 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뒤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엮은 책. 1만4000원. 동물해방(피터 싱어 지음·연암서가)=1975년 처음 출간된 이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 실험실과 공장식 농장 등 동물이 처한 환경을 알려 동물에 대한 태도의 전환을 촉구하고 잔혹 행위를 금하도록 이끈다. 2만 원. 일상에서 철학하기(로제 폴 드르와 지음·시공사)=딱 20분만 존재하는 세상 살아보기, 카페테라스에서 투명인간 되기, 까맣게 잊었던 장난감과 재회하기. 책이 시키는 엉뚱한 짓들을 하면 철학자가 될 수 있을까? 저자가 외친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철학하세요!” 1만3000원. ○ 실용·기타 해독 주스(서재걸 지음·맥스미디어)=스트레스와 소화불량, 변비로 우리 몸에 매일매일 쌓여가는 독소를 빼주는 자연 치료법을 소개한다. 1만4500원.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로 키우는 마법의 말 30(요시모토 쇼코 지음·맥스미디어)=‘엄마 공부교실’의 창설자인 저자가 소개하는, 부모와 아이를 위한 대화 사전. 1만1500원. 현장리포팅과 방송스피치(강성곤 지음·형설출판사)=방송 현장에서의 리포팅 기법, 인터뷰 기술, 스피치와 화법 등 방송 실무 이론을 담았다. 1만8000원.}

윌리 프란시스는 몹시도 운이 없는 사형수였다. 동네 약국 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1946년 5월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 전기의자형에 처해졌지만 수차례 고압 전류가 흘렀음에도 끝내 죽지 않았다. 급기야 전류가 흐르도록 머리에 덮은 띠와 덮개가 답답하다며 풀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비 고장으로 전류가 사형수에게 전달되지 않은 때문이었다.교도소 측이 다시 장비를 설치하는 동안 젊은 변호사가 일사부재리 원칙을 들어 “사형수에게 두 번 사형집행을 하는 것은 헌법이 규정한 적법 절차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며 연방대법원에 심의를 요청했다. 대법관 9명이 내린 결과는 5 대 4, ‘죄수의 불운까지 헌법이 책임질 순 없다’는 판결이었다. 프란시스는 결국 판결이 나온 지 5개월 만에 다시 의자에 앉았고 ‘실수 없이’ 몸으로 흐른 2500V의 전류에 숨을 거뒀다.저자는 프란시스를 여러모로 ‘두 번 죽인’ 사례 외에도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내린 역사적인 31가지 판결을 소개한다. 연방대법원에 올라오는 청원은 연간 1만 건이지만 이 중 심의를 위해 선택되는 사건은 100건도 채 되지 않는다. 추리고 추린 31가지의 목차만 훑어봐도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를 쥔 느낌이다.미국 사법부 최고 기관인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은 한번 임명되면 스스로 퇴임하거나 의회의 탄핵을 받지 않는 이상 해임되지 않는 종신직이다. 지성, 법률적 성취, 평판 등 여러 면에서 당대 최고의 법관들이 벌이는 치열한 논리전쟁이 볼만하다. “흑인은 인류 질서상 열등한 족속으로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권리와 특전을 부여할 수 없다”며 남북전쟁의 씨앗을 탄생시킨 일도 있었지만 공룡 기업 스탠더드 오일을 전격 해체해 자본주의의 독과점을 경고하는 명판결을 이뤄내기도 했다. 미국 27대 대통령이자 10대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윌리엄 태프트는 미국 사회에서 연방대법원의 막강한 영향력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대통령은 왔다가 가지만 연방대법원은 언제까지고 이어진다.”다른 법률 관련 교양 입문서들이 판례를 소개하는 데 급급했다면 이 책은 판결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잘 버무린 독특한 구성이 돋보인다. 사건의 역사적 배경과 소송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프롤로그, 판결문과 반대 의견, 판결 이후 사회에 끼친 영향을 서술한 에필로그가 미국 사회나 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는다.책의 백미는 정갈한 판결문만큼 논리 정연한 일부 대법관의 반대 의견 글이다. 문장력과 유머, 날카로운 비판력 등 어느 면에서도 판결문에 뒤지지 않는다. 200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조지 부시와 민주당 부통령 앨 고어가 맞붙은 대통령 선거 재검표 결과에 대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양측의 구두 변론을 들은 지 16시간 만에 연방대법원이 부시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나자 반대 의견을 제시한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상황을 신속히 종료하겠다는 구실로 헌법이 보장한 동등한 보호의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대선의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도는 없어졌지만 패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패자는 재판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잃도록 만든 모든 관계자”라고 일갈했다.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들이지만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표현의 자유, 낙태, 예술과 외설의 기준, 안락사에 대한 판결이 비교적 보편적이고 고전적인 편이라면 ‘무기를 드는 것만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라는 판결은 특정 종교의 병역 거부 논란을, 초과근무·최저임금제·저작권보호·주식부당거래 등에 대한 판결은 ‘경제민주화’를 떠올리게 한다.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의료보험개혁법에 대한 판결도 우리 사회에서 한때 이슈가 됐던 의료 민영화와 선거철 단골 소재인 복지에 대해 돌이켜 보게 한다.판결의 시비를 따져 보는 것보다 연방대법원이 어떤 과정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 냈는지에 더 주목하는 것이 유익할 듯싶다. 추천사에 실린 글처럼 책 속 판결들이 “권위와 관행이 아닌 토론과 논증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개미와 베짱이’ 속 베짱이가 천하의 한심한 백수가 된 것은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의 문화제국주의가 세계로 확대된 결과 죽도록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름뱅이로 낙인찍혔다는 해석이다. 인도문화연구소를 운영하는 저자는 “게으름은 인간과 삶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며 죄의식을 걷어낸다. 벌레 한 마리 더 잡아먹기 위해 새벽녘에 일어나는 새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쿠나 마타타’(근심과 걱정이 없는 세상) 속에 살 것인가. 선택은 자유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바둑의 세계는 냉정하다. ‘집중력 향상에 그만’이라는 삼촌 손에 이끌려 바둑도장에 갔고, 새벽마다 뚫어져라 기보책을 봤다. 신동 소리를 들으며 11세에 한국기원연구생이 됐지만 프로입단에서 미끄러지는 순간 바둑돌을 던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웹툰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바둑판보다 더 넓은 세상에 던져지게 된다. 미생을 그린 윤태호(44)는 성공보다 실패, 결과보다 과정에 방점을 찍는 만화가다. 전작인 ‘이끼’가 대성공을 거뒀고, 포털 다음 웹툰 평점 1위를 고수하며,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명강사인 그의 성공 스토리를 떠올리면 의외다. 미생의 단행본 출간을 앞두고 4일 그가 대우교수로 있는 세종대 연구실을 찾았다. “성공의 의미를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노동자들을 탄압하면서 매출액을 올린 기업가는 성공한 인물일까요?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학자들이 성공한 인생인가요? 저는 미생의 주인공이 성공에 집착하기보다 바둑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제가 가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보다는 잃어본 사람, 열외가 돼 본 사람에게 더 마음이 끌려요.” 미생(未生)은 ‘아직 살지 못한 자’라는 바둑용어. 만화는 프로기사 입문에 실패해 완생(完生)을 이루지 못한 주인공이 대기업 계열사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겪는 조직생활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자기가 돋보이려고 부러 ‘폭탄’ 동기와 프레젠테이션 짝을 맺는 인턴들, 잘되면 제 덕, 못 되면 부하 탓하는 부장, 항상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일에 매달리는 워커홀릭 과장…. 웹툰이 연재되는 날에는 ‘직장생활의 애환을 담은 진정한 성인만화’ ‘책 나오면 얄미운 상사와 눈치 없는 신입 책상 위에 살포시 놓고 싶다’처럼 공감을 표하는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린다.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는 작가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주는 다수의 샐러리맨 ‘딥스로트’ 덕분에 ‘리얼리티 최강 직딩 필독 웹툰’을 그려내고 있다. 웹툰과 함께 소개되는, 1988년 조훈현 9단과 중국의 최강자 녜웨이핑 9단이 맞붙은 제1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결승 최종국의 한 수 한 수도 깨알 같은 재미를 더한다. “소수의 영재가 우리를 먹여살린다면 서울이라는 도시에 이렇게나 많은 빌딩, 책상, 형광등이 필요할까요. 사람들은 모두 한 점에서 출발하지만 각자가 도달하는 지점은 다릅니다. 직장 내에서 성취속도가 다르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은 아니지요. 누구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는 법이죠.” 전작과 달리 미생의 내용은 밝고 희망적이다. 아무 쓸모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바둑이 결정적인 순간 주인공의 기사회생을 돕는 장면에서는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이끼’처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자는 제안은 많이 들어오지만 쉽게 팔리진 않을 거예요. 독자들이 인물 간의 극적인 갈등보다 ‘이건 나와 닮았어’ 하고 공감하는 지점에서 재미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독도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 등이 동북아에 미묘한 긴장을 불러온 가운데 2012 베이징 국제도서전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대표 소설가가 한자리에 앉았다. 지난달 30일 오후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저자와의 만남’이 끝난 후 이문열 작가(64)는 베이징 한국문화원에서 옌롄커(閻連科) 인민대 교양학부 교수(54)와 만나 한중일 3국의 영토 분쟁과 문학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에서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평가받는 옌 교수는 소설 ‘딩씨 마을의 꿈’과 수필집 ‘나와 아버지’로 국내에 알려졌다. 특히 소설 ‘사서(四書)’(자음과모음)가 중국 공산당 정권을 은유적으로 비판했다는 이유로 중국 본토에서 판매 금지되고 지난해 한국과 홍콩 대만에서 먼저 출간돼 화제가 됐다. ―서로의 작품을 읽어 보았나. ▽옌롄커=이 작가의 장편 ‘시인’을 감명 깊게 읽었다. 시인 김삿갓이라는 전설적 인물과 당대 한국의 현실이 잘 접목됐다고 생각했다. 작품 배경이 중국 현실과 닮아 친숙했다. ‘황제를 위하여’도 읽고 싶다. ▽이문열=옌 교수의 ‘나와 아버지’를 흥미롭게 읽었다. 엄숙해야 하는 장면에서 능청스러운 반어법 표현들이 재미있었다. ―두 분 모두 소설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곤 한다. ▽이=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몇몇 사건이 지식인으로서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사회적 관점을 표출하는 작품을) 썼을 뿐이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집단에게 혹독하고 잔인한 비판을 받았고, 한 10년간 많은 손해를 봤다. 이제 글 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문학 이외의 것에 정열과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옌=개인의 운명이나 삶 자체가 사회 현실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다. 지난해 ‘사서’가 본토에서 출판되지 못했지만 중국은 한걸음씩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언젠가 판금 조치가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 ―한중일 3국이 영토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옌=각 정부가 썩 지혜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세 나라의 지도자가 충분한 지혜를 모았다면 이렇게까지 얽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애초에 결론이 날 수 없는 문제다. 영토를 포기한 지도자는 용서받지 못한다. 한번 자기 영토라고 주장했던 것을 어떻게 번복하겠는가. 일본이 ‘중국에 센카쿠 열도 돌려주자’고 할 것 같나. 제3자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세상에 가장 애매한 법이 국제법이다. ▽옌=이 선생이 독도에 가신 걸 지지한다. 한국과 중국은 그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다. ▽이=제주도 가까운 곳에 이어도가 있다. 한국이 해양관측소를 설치했는데 중국에서 신경 쓰고 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한국도 영토라고 주장한 적이 없지만 중국이 내놓으라는 말을 한다면 그때는 일이 커질 수 있다. ▽옌=중국 지도자들이 견해의 일치를 본다면 대범하게 선물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간 냉전 기류를 완화하기 위해 문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을까. ▽이=가까울수록 원수지면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가 될 수 있다. 동북아 3국은 침략과 원한으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지역을 묶으려는 움직임들이 있지만 결국 국가 이기주의에서 발원한 것이다. 문화적 이상만 갖고는 화해하기 어렵다. ▽옌=문학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문학 교류는 상호이해를 촉진하고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이끌 수 있다. 예전 같으면 벌써 일어났을 전쟁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베이징=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29일 중국 베이징 ‘중국국제전람중심’ 신관에서 5일 일정으로 개막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2012 베이징 국제도서전’은 실용서가 주도하는 ‘출판 한류’의 열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재테크 건강 육아 미용을 다룬 실용서를 전시한 한국 출판사 부스들에 유독 발길이 잦았다. 30일 열리는 한중출판세미나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중국에서는 실용서를 포함한 한국 도서들이 해마다 1400종 넘게 번역 출간된다. 미국 영국 대만 일본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중국 청년들의 상황과 맞아떨어져 중국 출판 시장에서 5주간 베스트셀러 종합 선두를 지키기도 했다. 중국의 실용서 붐에 대해 출판계 인사들은 집값이 뛰고 가계 빚이 늘면서 노후가 불안해진 중국 독자들이 사정이 비슷한 한국의 재테크와 육아 관련 도서를 찾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일본 책보다 저작권료가 싸면서도 트렌드에 맞고 디자인과 콘텐츠가 좋은 것도 한국 책의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트렌디 드라마가 처세술이나 심리 위주의 중국 실용서적 시장의 판도를 건강과 미용 쪽으로 바꿔놓았다는 분석도 있다. 저작권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 이가희 중국저작권 담당자는 “몇 년 전만 해도 책 제목에 ‘심리’란 단어만 들어가면 무조건 비싸고 통 크게 계약하는 중국 출판업자가 많았는데, 요즘은 피부, 화장, 건강 관련 도서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젊은 여성 독자들을 겨냥해 미용서적을 출간하는 중국 양광수미 출판사의 장웨이 편집자(30)는 “‘시티헌터’(SBS) 같은 한국 인기 드라마를 본 중국 여성들이 한국에서 출간된 패션이나 미용 도서를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이날 도서전을 찾은 차이리리 씨(26·여)도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많은 중국인이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며 “중국 책보다 시각 자료가 풍성한 한국 책이 이해하기 쉽다”고 말했다. 올해로 19회째를 맞은 이번 도서전에는 75개국 2010여 곳의 출판사가 참가했다.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아 올해의 주빈국으로 초청된 한국은 ‘한글과 IT, 그리고 기록문화와의 만남’을 주제로 다양한 특별전을 마련했다. 황동규 황석영 이문열 은희경 성석제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13명이 도서전을 맞아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하는 한중 작가 교류 행사에 참가해 중국 작가 8명과 문학적 교감을 나눈다. 중국이 한국 도서 저작권의 최대 수출국인 만큼 이번 도서전에 거는 한국 출판인들의 기대도 크다. 지난해 한국출판연구소와 주요 에이전시가 집계한 결과 2009∼2010년 출판저작권 수출 2904건 가운데 중국으로 수출한 건수가 1204건으로 41.4%를 차지했다. 출판사 관계자는 “다른 도서전의 경우 저작권 계약 10건 중 6∼7건이 수출이고, 나머지가 수입 계약인 데 비해 베이징 도서전에선 9건이 수출 계약”이라며 “올해 주빈국으로 참여해 규모가 커진 만큼 중국 시장을 잡기 위해 애쓸 것”이라고 말했다.베이징=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