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황인찬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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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특파원 황인찬입니다. 한일 관계가 더욱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본에 왔습니다. 일본의 오늘을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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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6-05-31~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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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춘문예 2012]중편소설 ‘숲의 정적’

    눈 내리는 날 숲에 오른 기정은 나무십자가가 있는, 애인의 묘지를 찾는다. 동박새와 황조롱이와 바다사자를 함께 보러간 애인은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눈 덮인 숲은 깨끗하고, 간결하고, 단조롭다. 눈 벽에 갇힌 듯 안온함을 느끼며 청설모와 꿩을 본다. 청설모가 모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론 가짜라도 필요하잖아, 라는 게 모형을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꿩이 앉았던 낙엽더미 위에는 돌멩이 두 개가 있다. 돌멩이를 새끼라고 여기는 듯했다. 무섭도록 조용한 숲속에서 기정은 신께 다가가는 세 가지를 떠올리며 정말 신께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숲에서 내려오자 팀장은 점심시간이 너무 긴 거 아니냐고 타박하며 완이 때문에 학원에 가봐야 한다고 한다. 완이가 빨간 가방 때문에 친구를 패 묵사발로 만들어버렸다며 몹시 우울해한다. 숲으로 가기 전에 떠 놓았던 밀랍몰드의 원형은 다음 날 뽑을 수 있어서 지오라는 구체관절인형 심재를 만든다. 주문 제작이 아니라 기정의 작품이다. ‘성재범 제작소’는 팀장의 이름 때문에 끊이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는 편이었으나 주문은 극히 제한적이라 팀장과 기정은 자신의 작품을 하면서 제작소를 꾸려나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15층에 사는 아주머니를 만난다. 아주머니는 몽롱하고 폐쇄적이고 쿠마리처럼 초경도 하지 않은 채 늙어버린 것 같다. 거실이 따뜻해질 때를 기다리며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던 기정은 보석무늬가 일정하게 박혀 있는 벽지를 보며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일 년 전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관광차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떴다. 텔레비전 위에는 구겐하임미술관 앞에서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이 모마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이다. 15층 아주머니가 인터폰으로 기정에게 줄 게 있다며 올라오라고 한다. 똑 같은 31평이지만 아주머니의 집이 훨씬 넓게 보이는 것은 벽지나 소파나 커튼이 흰색이고, 별다른 장식장이 없기 때문이다. 기정은 흰색과 너무 넓다는 게 무섭다는 걸 처음으로 느낀다. 아주머니는 오늘이 미국지사로 떠나버린 아들 결혼식인데 가지 않았다고 하면서 공군장교였던 남편이 죽은 이야기와 북해도의 눈 이야기를 한다. 북해도의 눈 속에서 세상과 단절했고, 또 세상과 화해했다고 한다. 기정은 아주머니의 지적인 말투에 속으로 놀란다. 아주머니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이 그냥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했다. 베란다 밖의 움직이지 않는 강이 무섭듯이. 말차와 화과자를 먹던 중 아주머니는 안방으로 가서 선물을 가지고 나온다. 오타루의 공방에서 사온 오르골이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뱅글뱅글 돌자 여자 속에 남자가 숨어 있는 것처럼 여자남자 혼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고맙다는 말에 아주머니는 자신이 이담에 무얼 부탁하면 들어주라고 한다. 기정은 두려움을 느낀다. 택시에서 내린 기정은 성당건물과 공무원연수원 건물 앞과 석유저장소 앞을 지나 샛길로 접어든다. 샛길에서 외국남자와 통역사를 보게 된다. 외국남자는 사제복이나 군복이 어울릴 것 같다. 숲으로 올라가면서 숲 앞면 역할을 하는 커다란 바위를 대리석 묘지 쓰다듬듯 쓰다듬는다. 믿음직스러운 기운과 성스러운 감정을 느낀다. 눈 내리는 숲속은 한 가지 색뿐이라서 더 넓어 보인다. 그래도 넓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서 있는 고독감 같은 걸 느낄 필요도 없었다. 눈 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만 보면 되었다. 묘지 주위에는 멧토끼나 멧돼지 발자국이라고 할 수 없는 투박한 발자국이 거칠게 찍혀 있다. 불안해하던 기정은 하늘에 떠 있는 새를 보며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를 떠올린다. 아홉 살이나 많은 여자와는 절대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하던 그의 어머니가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가 땅으로 처박혀 왼쪽 어깨를 크게 다치자 다시 기정을 찾아와 네가 누굴 구원하겠다는 거야? 라고 했다. 왜 구원이라는 말을 할까 하고 기정은 의아해했다.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가 단순히 나이뿐인 줄 아냐고 하자 기정은 그동안 돌쩌귀가 어긋나 닫히지 않던 문이 닫히는 기분을 느꼈다. 닫힌 문 앞에서 버티고 서 있을 만큼 순수하지도, 어리지도 않은 기정은 그에게서 돌아섰다. 숲을 내려오기 전에 깨끗한 눈으로 발자국을 덮어버린다. 제작소로 온 기정은 밀랍인형인 대기업 창업주 손을 채색한다. 손이 얼굴보다 밀랍인형인 게 탄로 날 확률이 높아 푸른 힘줄과 주름을 강조한다. 퇴근 후에 팀장과 술을 한 잔 하러 간다. 술집에는 중년남자가 혼자서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 칵테일로 입술을 축인 뒤 기정은 완이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다. 팀장은 친구와 싸워도 빨간색 가방(도망간 엄마의 숄더백)은 여전히 들고 다닌다고 하며 일요일에 완이가 얻어다 키우는 토끼를 보러 오라고 한다. 완이 엄마는 보험회사에 다니다가 바람이 나서 떠났다. 빨간색 가방만 들고 다니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는 완이와 달리 팀장은 완이 엄마와 남자가 탄 에쿠스가 유조차와 정면충돌해 둘 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생각했다. 토끼를 보러간 날, 토끼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는 완이에게서 기정은 고집과 외로움을 엿본다. 팀장은 기정에게 꽃게탕을 끓여주고, 기정의 발이 예쁘다고 한다. 발을 바라보는 팀장의 눈이 불온하게 반짝였다. 밀랍인형인 박경준을 대기업 기념관 안에 설치해주고 나오자 비가 내린다. 팀장은 후배를 만나러 가고 혼자서 미술관으로 갔지만 당분간 휴관을 한다고 한다. 갈 데가 없는 기정은 집으로 간다. 유리탁자 위에 놓인 오르골을 보자 아주머니 생각이 나 1503호로 간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따뜻한 것에 파묻히고 싶어서이다. 아주머니는 죽을상이고, 베란다의 유리문은 활짝 열려 있다. 와인을 마시던 아주머니가 말한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 그냥 손을 뻗어 나를 밀어버리라고. 놀란 기정이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자 아주머니는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기정은 비밀이 들킨 것만 같다. 아주머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고 쓴 유서를 보여준다. 안방에는 장롱도 없다. 일을 간단하게 하고 싶어서 없애버렸다는 말에 기정은 얼어버린다. 기정은 쫓기듯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제작소에서는 당분간 일거리가 없어 본격적으로 지오를 만들어나간다. 점심시간에 함께 꽁지공원으로 간 미스 오는 조각가인 애인이 섹스는 하지 않고 상체만 애무해서 분하다고 한다. 헤어지고 싶지만 자신이 그 유희감각을 버리지 못한다고 하자 기정은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붙잡아두라고 한다. 일요일에 아주머니는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여 달라며 기정을 부른다. 햇빛이 내리쬐는 강을 내려다보던 아주머니는 자신은 늘 강과 바다를 항해 중인 것 같으며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흰 햇빛과 흰 물빛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건 자유뿐인 것 같고, 벽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게 너무 넓게 느껴진다고도 말한다. 그건 기정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강과 넓은 공터를 오랫동안 보고 있자 갑자기 무한대로 커지는 것 같고, 전혀 공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정을 조롱하는 것 같다. 해봐, 해봐, 못할 것도 없지 않아. 너 역시 이대로 나가면 저 아주머니처럼 될 거야. 네게 누가 있어. 아무도 없잖아. 너의 이십 년 후의 모습이 바로 아주머니야. 너도 누군가에게 부탁할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할 때 죽여 달라고. 혼자서는 죽지도 못한다고. 그냥 이십 년 후의 너를 미리 없애버린다고 생각하고 밀어버려. 한순간이야, 한순간. 찰나만 지나면 아주머니는 곧 편안해질 거야. 그러면 고독에 떨 필요도 없는 거야. 고독에 떨고 있는 것만큼 추해보이는 것도 없잖아. 아주머니, 추하잖아. 그리고 말이야,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혼자인 거야. 혼자인 것에서 벗어나게 해줘. 밀어, 밀어버리라니까. 기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주머니를 밀어버린다. 퍼뜩 정신을 차린 기정은 얼이 반쯤 빠진 아주머니를 소파에 앉혀놓은 뒤 아래층으로 도망쳐온다. 내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다가 팀장을 만나 위로를 받는다. 미스 오는 애인이 작업실에서 다른 여자와 엉켜 있는 것을 봤다며 괴로워한다. 뒤따라 나온 애인이 화난 여자가 뭐냐고 따지자 오필녀 씨, 저번의 그 작품 좋았어요, 라고 했다며 정말 오필리아처럼 웃어젖힌다. 오필리아로 불러주지 않아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스물다섯 살의 미남형 지오가 완성되자 기정은 저번의 일을 사죄도 하고 아주머니를 혼자 있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1503호로 가져간다. 아주머니에게 지오가 태어난 배경이라든지 성장과정이라든지 지오의 내면기록을 써보라고 한다. 박경준 뒤로는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일감이 없으면 팀장보다 기정이 더 초조해졌다. 미스 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실에 다시 간다고 한다. 그날 본 것은 싹 까먹은 모양이다. 아니면 외로움이라는 물건이 1g이라도 더 얹힌 쪽이 관계에서 지는 거니까 미스 오의 시소가 땅 쪽으로 기울었는지도 몰랐다. 며칠 뒤 아주머니가 기정을 부른다. 지오의 내면기록을 쓴 노트를 보여준다. 지오가 되기 전까지, 아주머니의 아들이 되기 전까지의 내면기록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것을 읽어본 기정이 끼어들어 윤색하고, 아주머니와 타협해서 이상훈이라는 한 인물을 창작해낸다. 이상훈의 내면에는 앵무조개의 나선형무늬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작업이 끝났을 때 팀장에게서 전화가 온다. 완이의 토끼가 죽어버렸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나자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베란다의 블라인드가 딱딱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다. 어디 계세요? 하고 기정은 묻는다. 삼월인데도 눈이 내리자 기정은 숲으로 간다. 범죄스릴러물에 쓰일 전신더미 한 구는 팀장이 세밀화 작업 중이라 출근을 하지 않았다. 숲을 오르면서 기정은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낀다. 싫고 나쁜 예감일수록 적중률 100%였다. 숲에서 기정은 멧토끼 한 마리를 본다. 그걸 잡아다 완이에게 주고 싶어진다. 완이는 야산에 토끼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두 번쯤 토끼무덤에 갔으나 산에 가면 춥고 외롭다며 발길을 끊었다. 팀장이 미국너구리를 사다줄 거라고 했으나 생명 있는 것은 다 자기를 떠나버린다면서 다시 빨간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나무십자가가 있는 묘지로 간 기정은 대리석 묘지를 힘껏 끌어안으며 이제 눈은 안 와. 진달래꽃이 피면 다시 올게, 라고 말한다. 거칠고 둔탁한 발소리에 기정은 상체를 들고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본다. 언젠가 샛길에서 본 외국남자와 통역사인 청년과 석공이 올라온다. 위쪽이나 옆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나무십자가가 있는 묘지로 온다. 그래도 기정은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통역사가 왜 이 묘지에 있냐고 묻자 기정은 여기는 제 애인 묘지라고 한다. 외국남자가 지도를 들여다보며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한다. 묘지를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묻자 기정은 아니라고 소리친다. 통역사가 이 묘지는 선교사인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가 잠든 곳이고, 네덜란드에서 온 선교사의 유해도 이쪽으로 옮기고 다시 단장할 거라고 한다. 석공처럼 보이는 중년사내가 불쾌하게 바라보자 기정은 돌아선다. 숲을 내려오면서 기정은 돌멩이를 새끼라고 품고 있는 꿩이 자신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일 년 전을 떠올린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겨진 기정은 눈 쌓인 숲속을 올랐다. 발을 헛디뎌 추락사해도 괜찮을 것 같다며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기정의 눈에 나무십자가가 이정표처럼, 표식처럼 시선을 끌었다. 나무십자가 아래 아직 완성이 덜 된 묘지 옆에 앉은 기정은 편안함을 느끼며 즐거운 묘지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 뒤로 숲에 올랐고, 나무십자가를 찾았고, 묘지 옆에 앉았다. 숲을 오른 지 한 달 뒤쯤 너무 조용하고 편안한 것이 두려워진 기정은 그 묘지에 그를 묻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까. 다음 날 아주머니는 15층에서 뛰어내렸다. 아주머니를 실은 앰뷸런스가 떠나고 나자 기정은 15층으로 올라간다. 지오를 안고 내려온다. 상류층 할머니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는 뉴스를 들은 기정은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나는 아주머니와 말을 한 적도 없다고. 기정은 지오에게로 가 텐션 줄을 끌며 묻는다. 이제 묘지에 누워 있지 말고, 나랑 살래?김영옥}

    • 201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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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춘문예 2012]동화 ‘시인 아저씨께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저는 광명초등학교 3학년 3반 정희성이에요. 갑자기 편지를 받아서 놀라셨죠? 왜냐면 아저씨는 저를 모르실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저씨를 알아요. 아저씨의 시가 우리 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거든요. 읽기책 43쪽이에요. 담임선생님은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모두 외우라고 하세요. 그래서 저는 아저씨가 쓴 시도 다 외우고 있어요. 아저씨가 쓴 ‘봄의 계단’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예요. 아저씨도 어렸을 때 국어를 좋아했어요? 저는 국어가 제일 좋아요. 다른 과목은 딱딱한 공식이랑 외워야 할 것들밖엔 없는데 국어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제가 좋아하는 시도 있거든요. 하지만 시험 점수는 별로예요. 며칠 전에 쪽지시험을 봤는데 세 개나 틀렸어요. 이게 제가 틀린 문제인데요, 한번 보세요. 동시 ‘봄의 계단’의 분위기로 옳은 것을 고르세요.① 초라하다② 슬프다③ 애틋하다④ 불쾌하다⑤ 희망차다 저는 2번을 선택했는데요, 5번 희망차다가 답이래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2번이 답이 아닌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 시가 슬프다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이 부분이 무척 슬펐어요. 부지런한 새싹 땅 속에서 뽀얀 얼굴 내밀고 있네요 잠에서 갓 깨어난 아기 씨앗 기지개 켜다가 눈물이 찔끔 왜냐면 봄에 싹이 트는데 아기 씨앗은 혼자 늦게 잠에서 깨어났잖아요. 기지개를 켜는 척하면서 그러니까 몰래 울잖아요. 친구들은 다 싹이 트는데 자기만 느리니까요. 이 시의 분위기가 왜 희망차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다음 중 ‘봄의 계단’을 쓴 시인이 생각한 것으로 틀린 것을 고르세요.① 봄은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 천천히 오는구나!② 봄에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네.③ 추운 겨울이 지나면 곧 봄이 오니까 모두 힘내!④ 봄이 지나면 언젠가 다시 겨울이 오겠지.⑤ 개구리는 봄이 되면 신나서 폴짝 뛰나봐. 아저씨, 아저씨는 시를 쓸 때 정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썼어요? 그리고 아기씨앗은 정말로 기대에 부풀어 있는 거예요? 슬픈 게 아니고요? 선생님은 아마도 아저씨와 아주 친한 사람이거나 아저씨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마법사인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저씨가 생각한 것을 선생님이 알고 이런 문제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선생님이 아저씨와 친한 사이일 리는 없고 마법사일 리는 더더욱 없죠! 저는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가서 문제가 이상하다고 말을 했어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희성이가 시를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시를 해석하는 게 어려운 모양이구나.”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더 머리가 아파졌어요. 시를 읽는 건 나고 그걸 느끼는 것도 나잖아요. 그런데 내가 느껴야 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건 어쩐지 이상하잖아요. 집에 와서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내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저씨도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는 아시죠?) 저는 선생님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이 시가 누군가에게는 슬플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는 그날 밤 열두 시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고 책상에 앉아 아주 멋진 계획을 세웠지요. 다음 날 저는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선생님께 가서 공책을 펼치며 물었어요. “선생님, 이 문제 알려주세요.”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이건 못 보던 시인데?”하셨어요. 못 본 게 당연했죠! 그건 교과서에 나오는 시가 아니었거든요. “문제집에 나와 있었어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시를 읽었어요. 제목 : 가을 운동회 낙엽이 떨어지는 건 가을이 시작된다는 신호 준비! 땅! 단풍잎 손 주먹 쥐고 누가 누가 먼저 달려가나 누가 누가 먼저 고운 물이 드나 그리고 선생님은 턱을 괴고 문제도 가만히 읽었죠. 시인이 이 시를 쓴 이유로 옳은 것은?① 심심해서②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알리려고③ 낙엽을 보고 갑자기 생각나서④ 가을 운동회가 시작되어서⑤ 여름이 지나간 것이 아쉬워서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빨간 펜으로 답을 고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자, 이 시는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했구나. 시인은 가을 낙엽을 운동장의 아이들에 빗대어 표현했어. 정확히는 가을 운동회 날 달리기 시합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거야. 아이들이 단풍잎 같은 손으로 주먹을 쥐고 달리면 마음에는 어느덧 푸른 물이 드는 거란다. 그렇게 가을은 무르익어 가고 아이들은 성장하는 거겠지? 그래서 답은 2번이 되는 거고. 이해가 되니?” 운동장? 학생? 저는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저는 선생님을 똑바로 보며 말했어요. “선생님, 틀렸어요!” 선생님이 무슨 뜻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어요. “시인은 그런 생각은 안했어요. 그냥 낙엽이 빨리 땅에 닿는 게 달리기 경주하는 것 같다고 느낀 것뿐이에요. 그리고 시인은 가을이 오는 걸 알리려고 이런 시를 쓴 게 아니에요. 낙엽 보다가 생각이 나서 그냥 쓴 거죠!”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더니 웃으며 제게 말했어요. “희성아. 그게 아니야. 여기 ‘단풍잎 손 주먹 쥐고’라는 부분을 보렴. 아이들이 작은 손을 움켜쥐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니? 제목도 ‘가을 운동회’고 말이야. 시인이 아무런 의도도 없이 시를 썼겠니? 희성이는 아무래도 시를 해석하는 방법을 조금 더 공부해야겠구나.” 저는 허리에 손을 얹었어요. 그리고 선생님께 물었죠. “선생님, 이 시인이 누군지 아세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정희성이에요!” 선생님은 한참 저를 쳐다보시더니 곧 얼굴이 새빨개졌어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요. “이걸 네가 썼단 말이니?”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죠. 선생님은 잠시 당황한 듯 했지만 곧 무서운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았어요. “너, 지금 선생님을 놀린 거니?” 저는 너무 놀라서 울 뻔했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정말 처음 봤거든요. 저는 주먹을 꽉 쥐고 이렇게 외쳤어요. “선생님이 낸 문제는 엉터리예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지요. 왜 울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서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저는 한참이나 서서 울었고 선생님은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어요. 얼마나 울었을까요?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요. 나는 어쩐지 민망해서 억지로 울음소리를 내면서 콧물만 훌쩍거렸지요. 저는 선생님이 차라리 나를 때리거나 벌을 세워주었으면 했어요. 가만히 앞에 세워만 두지 말고요. 울음소리 흉내 내기도 지칠 즈음, 선생님은 제게 사탕을 하나 건네며 이제 그만 집에 가라고 했어요. 복도에 나가서 창문으로 살짝 들여다봤더니 선생님은 어두운 표정으로 계속 책상에 앉아 있었어요. 집으로 돌아와서도 저는 자꾸만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내가 너무 심한 장난을 쳐서 선생님이 단단히 화가 난 것이 분명했지요. 선생님이 이제 나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나는 침대에 누워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빌었어요. 선생님을 다시 보는 게 두려웠거든요. 주말이 지나 학교에 갔을 때, 그러니까, 오늘 말이에요. 선생님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검사하고 있었어요. 저는 선생님 눈치를 보면서 우물쭈물했어요. 선생님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지요. 마치 그날 일은 아주 없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아저씨, 바뀐 것이 하나 있었어요. 오늘 본 쪽지시험 말인데요, 거기엔 글쎄 이런 문제가 있지 뭐예요! 이 시의 분위기로 옳은 것을 고르세요.① 초라하다② 슬프다③ 애틋하다④ 불쾌하다⑤ 희망차다⑥ 빈 칸에 자신의 생각을 쓰세요 ( ) 1번부터 5번까지만 있던 보기가 6번까지로 늘어났던 거예요. 제가 어떤 답을 선택했냐고요? 당연히 나만의 답을 선택했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그 문제에 파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주었어요. 선생님은 이제 저를 용서한 걸까요? 그러니까 동그라미를 그려주었겠지요? 저는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래서 또 시를 쓰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아저씨, 제가 쓴 시는 어때요? 이만하면 저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참, 시인은 돈을 많이 버나요? 엄마가 시인은 가난하다고 했는데. 그리고 시인이 되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요? 답장 기다릴게요!이진하}

    • 201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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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정효씨 한국 현대사 풍자 ‘역사소설 솔섬’ 펴내

    소설가 안정효 씨(70·사진)가 한국 현대사를 풍자한 ‘역사소설 솔섬’(나남출판)을 펴냈다. ‘하얀 전쟁’ ‘은마는 오지 않는다’ 등 묵직하고 사실적인 작품들을 써왔던 그가 이번에 선보인 작품은 판타지와 역사, 정치 그리고 풍자가 어우러진 ‘희극적 비판 소설’. 그는 2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 풍자 소설을 읽고 스스로 깨치고 웃으며 지나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안 씨는 16년 만에 펴낸 이번 장편에 대해 “군대나 회사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그냥 계급이 올라가는데 문학은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았다. ‘나 자신을 해방시키자’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쓴 소설”이라고 말했다. 세 권으로 나눠 펴낸 이 작품은 가상의 섬 ‘솔섬’이 점차 융기하면서 이 땅의 권력과 이윤을 차지하려는 정치인과 투기꾼, 조직폭력배들의 얘기를 다뤘다. 이들의 배신, 권모술수를 통해 한국사회를 비판한다. 시점은 2007년부터 시작해 1945년으로 되짚어가 마무리한다. 절대 선지자를 다룬 소설을 쓰려다 배경 설명으로 삽입한 정치 얘기가 너무 분량이 커져 아예 정치만 떼어내 따로 책을 냈다고 한다. ‘철새 정치인’은 실제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떡값 2억 원을 받은 실세들은 실제 떡 2억 원어치를 먹는 벌을 받는다는 등 정치권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가득하다.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실명은 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행동에서 누구인지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안 씨는 “요즘에는 정치인들이 국민보다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지금 정치권의 혼란도 국민이 정치권을 쥐고 흔들며 (정치인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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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류의 해 2011]한류관광에 문학한류 이어 의료한류까지…

    올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1000만 명에 육박한 가운데 한류 열풍으로 인한 관광객 유입 효과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한류 관광 활성화 대책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진단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실시한 외래관광객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 온 이유 중 10위가 ‘한류스타 팬미팅 및 촬영지 방문’(10.1%·복수 응답)인 것으로 조사됐다. 1000만 명이 한국을 찾는 점을 감안하면 100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한류 열풍과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는 셈이다. 서울로 범위를 좁히면 한류 관광의 위력은 더욱 크다. 올 9월 서울시가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서울을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를 묻자 40.6%(복수 응답)가 ‘한류문화 체험’을 꼽았다. ‘일반 휴가차 왔다’(83.9%)는 응답에 이은 2위였다. 국내 한류 관광은 그동안 적지 않은 부침을 겪었다. 1999년 영화 ‘쉬리’ 이후 시작된 한류 관광은 2003년과 2004년 드라마 ‘겨울연가’와 ‘대장금’이 각각 일본과 중화권에서 방영되며 폭발적인 관광객 증가세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열풍이 불 때까지 새로운 ‘히트상품’을 발견하지 못해 2009년까지 침체기를 겪었다. 김남조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올해 관광객 1000만 명 시대를 연 데는 드라마와 가요로 이어지는 한류 열풍을 신속하게 관광으로 연계했던 요인이 컸다”며 “앞으론 한류를 통해 한국의 이미지를 상승시키고, 이를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 신경숙 소설 美 돌풍-한강 日호평… 공지영-김애란도 각국과 출판계약 ▼2011년은 한국 문학이 세계 출판계에서도 당당히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한 해였다. 특히 정부 주도가 아니라 작가가 직접 에이전시를 통해 해외 출판사들과 계약해 책을 선보이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 수출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Please Look After Mom)’는 4월 미국에서 출간 당시 초판 10만 부를 찍으며 화제를 모았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양장본 소설 부문 14위까지 오르며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함께 받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31개국과 판권 계약도 맺었다. 세계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닷컴이 선정한 ‘문학·픽션 부문 올해의 책 베스트 10’, 올해 출간된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하는 ‘올해의 책 베스트 100’에 각각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10월 영국 출판사 쇼트북스에 판권을 판매한 것을 비롯해 중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등 11개국과 출판 계약을 맺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일본 베트남에서 이미 출간돼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올해 국내 베스트셀러인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이미 프랑스 일본 중국 대만과 판권 계약을 마쳤다. 신경숙 공지영 등의 해외 진출을 이끈 이구용 케이엘매니지먼트 대표는 “올해는 한국 문학이 해외에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준 한 해였다”며 “해외 출판사들도 한국 문학을 단순히 ‘소개’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중동 만성질환-암환자들 몰려와… 올 입국 외국인 11만명으로 급증 ▼한국관광공사가 27일 내놓은 ‘한국의료관광총람 2012’에 따르면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내한한 외국인은 2009년 6만201명에서 지난해 8만1789명으로 늘어난 데 이어 올해 11만 명으로 다시 늘었다. ‘의료한류’ 붐이 불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 외국인들은 한국의 피부미용과 성형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 추세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전체의 14.0%가 피부과나 성형외과를 찾은 것. 여기에 다른 질환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13.5%가 소화기내과와 순환기내과를, 13.1%가 건강검진센터를, 9.8%가 가정의학과를 찾은 것. 대표적 사례가 최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보건청이 서울대병원에 보낸 28세 성대결절 환자다. 그는 자국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내년 3월 두 번째 치료를 예약한 뒤 귀국했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연골 이식으로 완치가 가능하다는 답변에 환자가 매우 만족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환자 에사 무함마드 알리 씨(68)는 서울아산병원에서 식도종양수술을 받았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의 병원을 찾았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해 한국을 찾은 것. 이처럼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오만 등 중동 국가들의 ‘의료한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중동 국가에서는 만성질환자와 암 환자가 크게 늘고 있지만 의료수준이 낮아 보건당국이 전액 의료비를 부담하면서까지 선진국에 환자를 보내고 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 201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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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잊을 수 없는 ‘그날’]스릴러 소설 ‘7년의 밤’ 쓴 정유정 작가의 7월 16일

    아침부터 비가 퍼부었다. 낮게 드리운 검은 구름은 지표면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시야를 가리는 희뿌연 안개는 댐으로 가는 길을 좀처럼 내주지 않았다. 자주 드나들던 길을 이날만은 돌고 돌아 가야 했다. 기괴하고 음침했다. 댐에 다다랐을 때, 5개의 모든 수문은 입을 열고 거대한 폭포처럼 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댐의 모습은 장엄하고 충격적이었다. 짧은 탄식이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 ‘아! 내가 소설에 쓴 댐하고 똑같구나.’ 올해 한국 문단은 40대 새 스타 작가를 배출했다. 장편소설 ‘7년의 밤’(은행나무)을 펴낸 소설가 정유정(45). 3월 출간된 ‘7년의 밤’은 21만 부가 판매되며 그의 이름 석 자를 문단만이 아니라 대중의 뇌리에도 확실히 새겼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장르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문단의 평가를 받았고, 출판인들의 모임인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 대상 수상작으로도 선정됐다. 작품은 심야에 한 소녀를 승용차로 치고 우발적으로 호수에 유기한 뒤 점차 미쳐가는 사내, 그리고 딸을 죽인 범인의 아들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피해자 아버지의 숨 막히는 대결을 그렸다. 사고 당시와 7년이 흐른 뒤의 현재를 넘나들며 밀도 있게 전개되는 이 스릴러 소설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작가가 건설한 거대한 ‘세령호’ 댐이다. 사건의 시발점인 교통사고가 댐의 우회도로에서 벌어졌고, 범인을 둘러싼 팽팽한 조사가 펼쳐지거나 수문이 열려 마을이 수몰되는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곳도 세령호다. 세령호 댐의 실제 모델은 전남 순천시 주암면에 있는 주암댐. 작가는 2년여의 구상과 집필 기간 동안 한 달에 한두 번 이곳을 찾았지만 소설 속 세령호처럼 ‘음침하고 기괴한’ 댐의 모습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출간 넉 달여가 지나 한 방송사 인터뷰를 위해 주암댐을 찾았을 때 그는 ‘세령호의 환영’을 봤다. 7월 16일이었다. “잔뜩 낀 먹구름 탓에 한낮인데도 밤처럼 컴컴하고, 폭우에 수문이 모두 개방돼 물이 콸콸 쏟아졌지요. 그렇게 살벌한 모습의 댐을 본 것은 처음이었어요. 제가 상상속으로 만들어낸 세령호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했습니다.” 작가가 한 해를 보내며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베스트셀러가 된 날도, 1억 원의 영화 판권 계약을 맺은 날도 아니었다. 자신이 만든 가상의 세계가 현실로 구체화된 장면을 본 순간 작가는 큰 충격과 감흥에 빠져들었다. “음산하고 살벌한 세령호와 너무 똑같아서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 기뻤어요. 제가 그만큼 작품 속에서 호수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 같아서요.” 중환자실 간호사 출신인 작가는 2007년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세계청소년문학상을, 2009년 ‘내 심장을 쏴라’로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7년의 밤’은 수상 타이틀 없이 출간해서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 작품은 어떻게 봐줄까, 내심 걱정이 많았죠. 호평이 많아서 기뻤지만 당장 차기작이 걱정이군요. 다음번에는 ‘작살나지’ 않을까, 우려가 들었어요.” 2년에 한 번꼴로 장편을 내온 작가는 10월 차기작 집필에 들어갔다. 전남 신안군 증도에 한 달 넘게 칩거해 ‘이마를 쥐어짜며’ 이미 초고의 3분의 2를 마친 상태. 인수(人獸)공통전염병이 돌아 폐쇄한 한 도시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팽팽하게 그렸다. “아직 보충취재도 더 해야 하고, 제 스타일이 쓰고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하기 때문에 내년은 작품 보강에만 매달려야 할 것 같아요. 2013년 3월쯤에는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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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문학]‘잔혹극의 창시자’ 삶의 궤적을 추적하다가…

    앙토냉 아르토(1896∼1948).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배우, 그리고 초현실주의 시인인 그의 희곡은 대사나 연기뿐 아니라 조명과 음향 등의 총체적 결합으로 관객을 집단적 흥분 상태로 끌고 간다. ‘잔혹극의 창시자’라고 불리며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평생 정신병에 시달리다 요양원에서 숨을 거둔다. 작품은 불행한 삶을 살았던 천재 극작가 아르토의 행적을 쫓는 경제일간지 문화부 여기자 임현준과 아르토 연구자 박동주의 궤적을 그렸다. 임현준은 특집 기사 ‘현대인의 내면 풍경-광기의 역사’를 위해 아일랜드와 프랑스를 찾아 아르토가 남긴 흔적을 찾고, 박동주의 해설을 듣는 동안 아르토의 광기 어린, 하지만 지극히 순수한 예술혼에 끌린다. 연락이 끊긴 아버지와 먼저 세상을 떠난 옛 남자친구 등으로 깊게 파인 임현준의 내재적 상처가 다른 상처 입은 영혼인 아르토의 삶과 맞닿으며 점차 치유되는 과정을 잔잔히 그려낸다. 아르토가 반 고흐의 죽음에 대해 “그가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 사회가 그를 궁지에 몰아가 결국 자살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임현준 또한 아르토에 대한 세상의 편견에 대해 이렇게 항변한다. “아르토에 대한 이해는 바로 잔혹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한다. 아르토의 잔혹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처참한 장면 등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부서지는 에메랄드빛 순수의 파도 앞에서까지 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 그게 잔혹이다.” 연극뿐만 아니라 미술, 문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그에 얽힌 뒷얘기들을 양념처럼 집어넣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프랑스 극작가 장 주네, 한국 연출가 이윤택 등의 작품이 공연되는 서울 대학로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점도 눈에 띈다. “우리는 거짓으로 이루어진 환경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다”를 비롯해 아르토가 남긴 명문들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임현준의 현재와 과거, 박동주의 번역서, 아르토의 이야기 등이 매끄럽게 전환되지는 않는다. 종종 눈에 띄는 에세이 같은 느슨한 서술들은 소설적 긴장감을 떨어뜨린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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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과학]‘지적 설계론’에 대한 반박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지지하는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지적 설계론’을 주장한다. ‘생명은 조상 없이 완전한 형태로 출현한다’ ‘종 사이의 진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게 그들의 생각. 이는 이름만 바꾼 창조론이다. 미국의 과학자 16명이 지적 설계론을 반박하며 진화론의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했다. 수많은 화석, 자연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킨 동식물, 그리고 생물의 지리적 분포 등을 통해 진화론의 타당성을 역설한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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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착한 일은커녕 사고만 쳤으니… 그래도 산타가 선물 주시겠지?

    생일과 어린이날,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 갖고 싶었던 것들을 선물 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럼 차이점은 무얼까. 생일과 어린이날은 엄마 아빠로부터 선물을 받지만,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 아이들은 머리맡에 몰래 선물을 두고 가는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잠을 안 자려고 졸린 눈을 비비다 깜박 잠이 들고, 대개 눈을 뜨면 성탄절 아침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는다면 어떨까. 책의 시작은 꼬마 요정 우체국이 보낸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된다. 산타 할아버지는 착한 일을 많이 한 친구들에게 선물을 주겠다며 올 한 해 동안 해온 착한 행동을 알려달라고 꼬마 마이클에게 편지를 보낸다. 마이클은 선물을 받기 위해 급히 엄마 아빠 돕기에 나서지만 도움은커녕 사고만 치게 된다. 마이클은 점점 조바심이 난다. 익히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 얘기를 산타클로스와 마이클이 주고받은 편지 형식으로 풀어내 색다르다. 산타클로스가 엄마 아빠와 주기적으로 통화를 한다거나 꼬마 요정들이 북쪽 나라에 살고 있는 산타클로스에게 편지를 전해준다는 발상도 아기자기하다. 무엇보다 마이클이 사고를 치면서 반성하고 스스로 받고 싶은 선물을 마지못해 줄이는 설정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대화하기에 좋은 책. 산타 할아버지가 보낸 ‘착한 일 테스트’를 함께 풀며 아이들과 함께 올 한 해를 돌아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 얘기로 자연스레 이어가면 좋을 듯하다. 그런데 마이클은 선물을 받았을까.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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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예술]국권상실기 한국詩의 발자취

    “시편들의 높낮이가 심한 편이고 동일한 시편에서도 자갈과 구슬이 마구 섞여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몇 편의 시는 우리 시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고 있으며, 언뜻 서투르고 미숙해 보이는 시편도 범접하기 어려운 특유의 위엄과 깊이를 갖고 있다.” 책 속 만해의 시를 평가한 부분이다. 50년 넘게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1920∼1945년 한국 근대시의 궤적을 정리했다. “국권 상실기에 모국어의 놀라운 세련 능력이 이뤄진 것은 한국 시의 긍지요 위엄”이라고 당시 시단을 꿰뚫어본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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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예술]내가 겨울 속에 있을때, 아내는 봄 속에 있었다

    익숙했던, 그리고 확신했던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 오래도록 내가 살던 이 땅을 불현듯 떠나고 싶고, 한 번도 가지 않은 이국의 어디쯤에 나의 진정한 삶이 있을 것만 같을 때. 이럴 때는 말없이 길을 떠나야 한다. 작품은 존재와 시간, 그리고 공간의 혼돈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두 남자의 여정을 그렸다. 교통사고로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한순간에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40대 중년 남자 이연은 대학 선배가 있는 독일로 떠난다. 선배로부터 20세기 고고학자 이무가 쓴 ‘이무(李無) 혹은 칸 홀슈타인의 기록-1902년 봄에서 1903년 겨울까지’의 번역서를 건네받은 이연은 한 세기 전에 살았던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한국을 떠나 독일로 온 이연처럼 이무도 독일을 떠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고대 도시인 하남을 찾아 떠나기 때문이다. 작품은 시공간을 뛰어넘은 두 남성의 여정을 교차시키며 탄탄히 나아간다. 또한 이무가 하남으로 가는 길에 만난, 도시와 이름이 같은 여성인 하남은 두 남자의 닫혔던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든다. 하남에 왔을 때 하남은 말한다. “사람들은 신대륙을 발견하는 공간 여행은 사실이라 여기면서 시간 여행은 믿지 않는다”고. 이무는 깨닫는다.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실은 전혀 다른 시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이 기록을 읽은 이연도 깨닫는다. 아내와 나는 같은 시간을 보냈어도, 내가 겨울 속에 있을 때 아내는 봄 속에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였다. 갑자기 나는 이 사원 터가 폐허가 아닌,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원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저 여자가 걷는 곳에 있는 긴 사각형의 주춧돌 사이로 돌담이 올라오고, 그 돌담 사이에 창문이 만들어지고….’ 작가는 고대 도시의 환영을 통해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확고했던 현실 인식을 느슨하게 만든다. 상상력은 윤회까지 확장된다. 아내를 잃은 이무는 여운이 있는 글을 남긴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 너에게로 가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 이 기록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태어난 나일 것이다.’ 이연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그리고 작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말이기도 하다. 작가 또한 한국을 떠나 20년째 독일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뮌스터대 고고학 박사과정을 마친 작가가 들려주는 고고학 얘기도 흥미롭다. 미지의 도시나 낯선 유럽의 거리에서 실존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작가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늦가을. 비 오는 서울 밤거리를 오래 걷다가 얼마나 이곳은 나에게 낯선가, 생각했지. 그런데도 얼마나 익숙한가, 라고도 생각했어. 이 두 극 속에 우리가 있는 곳과 우리가 동경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싶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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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예술]쿤데라의 모든 것, 15권에 묶어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82)의 전집.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한 쿤데라의 신작은 주로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를 통해 단행본 행태로 나왔을 뿐 전집으로 묶인 적은 드물다. 쿤데라의 장편소설, 단편집, 에세이, 희곡 등을 15권의 책으로 구성했다. 이번에 ‘농담’ ‘삶은 다른 곳에’ ‘웃음과 망각의 책’ ‘불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5권이 먼저 나왔고, 내년 1월부터 홀수 달에 한 권씩 출간해 2013년 7월 전집을 완성할 계획이다. 전집에 포함된 에세이 ‘어느 만남’(2012년 3월 출간 예정)과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2013년 출간 예정)은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작품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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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예술]“사랑하고 보니 여인이었소”… 세종 며느리의 금지된 욕망

    “요사이 듣건대,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이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한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436년 10월 26일자)‘역사적 인물이 내게 다가올 때 글을 쓴다’는 ‘미실’의 작가 김별아는 이 한 줄의 기록을 통해 봉빈을 만났다. 봉빈은 문종의 세자빈으로 궁궐에 들어갔다 폐빈 당한 인물. 그 이유도 기이했다. 궁궐 안의 여종 소쌍과 정분을 나눴기 때문이다. 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동성애 사건의 당사자인 봉빈은 이후 행실이 단정치 못한 여자로 평가받아 왔다. 그것만이 전부일까. 수많은 사람이 ‘갇힌 채’ 생활하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공식적으로 사랑이 허락된 사람들은 왕족밖에 없다. 하지만 사랑은, 성욕은 없앨 수 없는 인간의 본성. 작품은 사랑이 금지된 공간에서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을 그린다. 아름다운 외모의 봉빈은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첫날밤을 맞지만 남편 문종은 그녀를 소 닭 보듯 한다. 세자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머릿속에 가득한 문종에게 여자와의 사랑은 뒷전이었다. 문종의 무심함에 봉빈은 낙담하고 절망하며, 지독한 외로움에 휩싸인다. 그때 우연히 소쌍을 만난다. 소년 같은 소녀인 소쌍의 살 냄새, 인간적인 온기에 봉빈은 사랑에 눈뜬다. 궁녀나 내시 등 궁궐 사람들의 금지된 욕망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궁녀 사이에는 동성애 관계를 맺는 대식(對食) 행위가 만연했는데 그 연유 가운데 하나가 상궁이 되기 전 나인들은 두 명씩 짝지어 10∼20년 동안 한 방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내시 중에 완전히 거세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나인들과 몰래 정분을 맺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이 때문에 진짜로 거세가 됐는지 때때로 검사를 하기도 했다. 봉빈의 동성애도 특별한 케이스가 아닌 수많은 ‘몰래한 사랑’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봉빈은 동성애가 탄로 나자 이렇게 절규한다. “그저 사랑하고 나서 보니 사내가 아니었을 뿐이다. 사랑한 사람이 여인이었을 뿐이다.” 작가는 동성애 소재가 자칫 선정적으로 보일까 염려했다. 작품에는 대식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등 자극적인 부분이 자주 나온다.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부분들로 여겨지며, 그 수위도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단지 봉빈과 소쌍의 동성애가 중심 소재인데도 이들의 만남은 중반 이후 시작되며 봉빈의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워 애틋한 느낌은 덜하다. 둘의 사이가 진정한 사랑이 아닌 욕구 해소의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종의 아버지인 세종이 엄격하고 고지식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도 이채롭다. “역사는 강자, 승자 위주의 기록이다. 봉빈에 대한 기록 또한 세종이 말하고 실록을 통해 전해지는 게 전부다. 봉빈과 같은 여성, 그리고 패자의 역사를 말하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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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희문학창작촌 ‘동네 창작소’로 변하나

    도심 속 창작 공간으로 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서울 서대문구 연희문학창작촌이 개관 2년여 만에 큰 변화를 맞고 있다. 문인들이 직접 관리하고 이용했던 이 공간의 운영에 주민들을 참여시키는 방안을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것. 그러나 문인들의 우려도 적잖다.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작가들의 집필 활동에 방해를 줄 수 있어 시민만 있고 작가는 없는 공간이 될지 모른다”는 염려다. 2009년 11월 개관한 연희문학창작촌은 서울시가 만들어 서울문화재단이 위탁 운영하고 있으며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 강원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과 함께 국내 대표적 문인 창작촌으로 꼽혀왔다. 지난달 서울시는 연희문학창작촌의 운영위원회를 폐지하고, 주민과 지역문화인 등이 참여하는 ‘주민공동협의회’를 신설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기존 운영위원회는 문인 7명으로 구성돼 창작촌 운영 및 향후 계획을 문인 스스로 결정하는 형태였지만 새로 출범하는 주민공동협의회는 입주 작가를 포함한 문인 3명 외에 주민, 지역문화단체장, 서대문구 문화담당자, 문학단체 간부를 참여시켜 총 7명 이상이 참여한다. 문인 외의 인사가 절반을 넘는 셈이다. 연희문학창작촌의 주민 참여 확대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펼치고 있는 ‘참여 시정(市政)’의 일환이다. 서울시 문화사업팀 관계자는 “예술가들만 소통하는 것은 의미가 적다. 행정적으로는 공간 활용도를 높이고 주민들의 참여를 제도화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연희문학창작촌은 대지 6915m², 총면적 1480m²의 공간에 건물 4채, 집필실 20개, 공동휴게실, 산책로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동안 입주 경쟁률이 3 대 1을 웃돌며 작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운영위원들이 심사소위원회를 열어 문단 활동과 향후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입주 작가를 선정했다. 신달자 은희경 성석제 김인숙 김사인 백가흠 백영옥 등 문인 100여 명이 이곳을 거쳐 갔다. 시는 갓 등단한 작가나 등단 전인 작가지망생에게 집필실을 내주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유명 작가들에게 치중됐던 집필실의 문호를 일반인들에게 넓히자는 취지다. 하지만 연희문학창작촌을 거쳐 간 문인들은 “지금도 시낭송회나 문학치료 등 주민 참여 행사가 많다. 시민들이 상주할 경우 작가들의 집필 활동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신달자 시인은 “창작촌은 ‘순전히 분위기’다. 훌륭한 작가가 많이 들어와서 서로 자극하고 분발해 큰 작품을 써내자는 게 창작촌의 기본 취지인데 그게 훼손될 수 있다”며 “연희문학창작촌은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공간’이어서 문인들이 찾았는데 (일반)사람이 많이 오면 그 매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손택수 시인은 “습작생 정도는 입주를 고려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효율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문청(文靑)이라는 것은 가난해야 하는데 좋은 방 잡아주면 좋은 작품이 나올까. 주민 참여는 좋지만 어떻게 참여시킬까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연희문학창작촌이 ‘동네예술창작소’로 변할 것이라는 걱정도 문단에선 나온다. 동네예술창작소는 박 시장의 주요 문화 공약 가운데 하나로 서울 25개구에 주민이 이용하는 예술 창작공간을 만드는 사업이다. 서울시 문화사업팀 관계자는 “연희문학창작촌이 동네예술창작소로 변하는 것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 둘은 별개의 사업”이라며 “연희문학창작촌의 최종 운영 방안은 의견 수렴을 통해 내년 초 확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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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사회]낡은 모텔 침대에 몸을 누인 느낌…

    한한(韓寒·29·사진)은 중국 ‘바링허우(八零後·1980년대 출생자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다. 1999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이듬해 낸 첫 장편 ‘삼중문(三重門)’이 중국에서 200만 부 넘게 팔리며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주인공을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와 그런 부모에게 뇌물을 요구하는 부패한 사회를 그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 중국에서 출간된 이 신작도 전작과 사회비판적 궤를 같이한다. 중국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청년층의 고독과 절망을 들춰내고, 부패한 사회를 꼬집는다. 화자인 ‘나’는 교도소에 수감된 뒤 출소를 앞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고물 스테이션왜건을 몰고 먼 길을 떠난다. 이 고물차는 폐차 직전의 것을 친구가 고쳐서 ‘나’에게 준 것. 1988년식이라 그냥 ‘1988’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길을 가다 언제 고장 나 멈춰버릴지 모르는 ‘1988’은 ‘나’를 비롯한 바링허우 세대의 불안한 현재를 상징하는 듯하다. ‘나’는 여행의 첫날 허름한 숙소에서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여성 ‘나나’와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다. 임신 3개월인 ‘나나’는 아이의 친아버지를 찾아야 하고, ‘나’는 친구를 만나야 한다. 이 두 사람이 보낸 닷새간의 여정이 주된 이야기다. 하루 종일 달리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 일정은 단순하지만 인물들의 세밀한 심리 묘사와 솔직한 대화들은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어느새 ‘나’는 연민의 정을 느끼며 ‘나나’를 돕지만 선을 긋는다. ‘언제나 그녀 곁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우리가 함께 있게 되면 누구의 목적지에도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단순할 수도 있는 평면적인 여정은 ‘나’의 과거 회상 장면이 엇갈려 펼쳐지며 한층 입체감 있게 변한다. 특히 ‘나’가 만났던, 그러나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친구와 선배들의 비극적 결말은 ‘나’를 상실감과 허무함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졸업 후 신문기자가 된 ‘나’가 직면하게 되는 부조리한 사회 현실은 개인의 의지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다. ‘나’는 심지어 옛 여자친구와 청개구리 두 마리를 냄비에 넣은 뒤 서서히 가열하며 점차 고통스러워하는 청개구리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보는 듯하다. 작품을 읽는 동안 내내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듯하고, 허름한 여관의 눅진한 침대에 피곤한 몸을 누인 느낌이다. 간헐적으로 터지는 유쾌한 대사와 상황들도 막상 웃고 난 뒤에는 왠지 짠한 기분을 가져온다. 최근 ‘중국의 하루키’로 불리는 이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간결하고 잔잔하게 청춘들의 방황을 그려낸다. 여정은 닷새 만에 끝난다. 그리고 2년 뒤의 모습이 잔잔히 그려진다. 책장을 덮으면 가슴이 아련해지고, 여운이 깊게 남는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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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해송문학상 정설아 씨

    동화작가 정설아 씨(사진)가 문학과지성사가 주관하는 제8회 마해송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동화 ‘황금 깃털’. 상금은 1000만 원.}

    • 201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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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생 100명 “저작권 골든벨을 울려라”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글과컴퓨터가 후원하는 ‘정품이 흐르는 교실, 2011 저작권 골든벨’ 행사가 30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국콘텐츠진흥원 2층 콘텐츠홀에서 열렸다. ‘저작권 골든벨’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저작권에 대한 이해를 돕고 정품 소프트웨어 사용을 권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로 올해 2회째를 맞았다. 전국 10개 초등학교에서 100명의 학생이 참여해 저작권과 관련한 각종 문제를 풀었다. 마지막 문제는 저작권법상 보호받는 9개 저작물 가운데 어문, 음악, 연극, 미술, 건축, 사진, 영상, 도형 등 8개를 열거한 뒤 남은 하나를 맞히는 것. ‘최후의 1인’으로 남은 채승우 군(12·석곶초 5년)은 망설임 없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적어냈고, 정답을 축하하는 축포가 터졌다. 골든벨을 울리며 문화부 장관상과 장학금 100만 원을 받은 채 군은 “상금으로 스키캠프를 가고 싶다”며 웃음 지었다. 단체전에서는 석곶초등학교와 서울 명신초등학교가 공동 우승해 50인치 PDP TV를 각각 받았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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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달에 만나는 詩]낯선 것을 꼭꼭 숨긴 낯익은 것들의 침묵

    《햇살이 쏟아지는 나른한 오후. 고양이가 방 안 구석에서 배를 깔고 누워 꾸벅꾸벅 존다. 주인이 들어와도 잠시 눈을 뜰 뿐 이내 감는다. 새침한 고양이, 무심한 고양이. 어느 시간을 거슬러와 너는 내 앞에 나타난 것일까. 너는 고양이지만 고양이가 아니다. 호랑이다. 작고 앙증맞은 빨간 혀와 노란 눈동자. 나는 그 속에 네가 숨기고 있는 다른 너를 본다. 억겁을 이어온 고양이족(族)의 명멸과 오욕의 역사, 신화적 시간을 가만히 읽는다.》 ‘이달에 만나는 시’는 12월 추천작으로 최정례 시인(56)의 ‘호랑이는 고양이과다’를 선정했다. 이 시는 지난달 나온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됐다. 시인 이건청, 장석주, 김요일, 이원, 손택수 씨가 추천에 참여했다. 최 시인은 9년째 수컷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품종과 이름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냥 뭐 한국 잡종이에요. 이름은 ‘양이’, 그냥 ‘고양이’라고 불러요. 호호.” 3년 전쯤이었나. 시인은 하루 대부분을 낮잠에 빠져있는 고양이에게서 ‘거대한 침묵’을 읽었다. “고양이가 호랑이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가 고양이과에 속한다는 생물학적 분류법이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죠. 모든 사물은 자기 속에 그 존재의 부피보다 더 큰 의미를 품고 있고, 고양이가 침묵과 함께 발톱을 품고 있는 것처럼 장미꽃도 침묵과 가시를 함께 갖고 있죠.” 최 시인은 “모든 사물이 이질적인 것을 함께 품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이 세계의 본질이며 나 또한 온전히 나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건청 시인은 “격절된 사물과 사물을 연결해주는 특이한 상상력이 있고, 그런 상상력이 이루어내는 말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자명한 것들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낯익은 것들은 실은 낯선 것을 감춘 것들이다. 여기서의 삶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최정례는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평이한 목소리로 노래한다”고 장석주 시인은 평했다. 이원 시인은 “상처나 기억의 시간을 유머러스한 언어로 풀어 보이는 힘. 그러한 최정례 특유의 언어는 사슴이 튀어나오는 꽃핀 미래를 나타나게 한다”고 말한다. 손택수 시인의 추천평은 이렇다. “가파르게 휘몰아치던 더운 피도 잠시 순해질 법한 한 해의 끝에서 ‘자기 본래의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우리는 누가 앉았다 떠난 한 그루인가.” 김요일 시인은 이준규 시인의 시집 ‘삼척’(문예중앙)을 추천했다. 그는 “이준규의 시는 다르다. 낯설다. 새롭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재재거리는 이준규의 언어는 음악의 대위선율처럼 시집을 덮고 난 후에도 묘한 울림으로 또 다른 선율을 만들어낸다”고 평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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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박범신 씨 “굿바이, 서울… 고향서 날 위해 글 쓰겠소”

    《 “유배 가는 느낌이야. 아침에 이불 보따리 싸면서 용인 갈 때 생각이 많이 났지. 그때도 누가 시켰나? 내가 한 거지. 세상에 떠밀려가는 느낌도 드네. 날씨가 궂고 비가 내리니까 더 그런 것 같아.” 그는 거실 창문 밖으로 잔뜩 찌푸린 회색 하늘을 말없이 바라봤다. 담배 연기가 하얀 실타래를 풀다 맥없이 사라졌다. 소설가 박범신(65). 1980년대 ‘불의 나라’ ‘물의 나라’ 등 세태를 고발하는 신문 연재소설로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지만 문단에선 혹평이 나왔다. 1993년 돌연 절필 선언 후 3년간 경기 용인의 외딴집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기도 했다.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아내와 함께 귀향 이삿짐을 꾸리고 있었다. 9월 명지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그는 서울문화재단 이사장과 연희문학창작촌장에서도 물러났다. 2남 1녀를 둔 그는 올여름 서른 살 막둥이 아들을 마지막으로 결혼시키며 부모로서의 짐도 덜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문학뿐이다. “문학이 결국 자신의 번뇌와 갈등, 그리고 구원에서 나온 것 아니냐. 예순이 넘으니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위로받는 소설을 쓰고 싶다.” 1963년 전북 익산 남성고에 입학하며 고향(충남 논산)을 떠났다. 까까머리 학생에서 반백의 소설가가 된 그의 거의 50년 만의 귀향길을 동행했다. 》○ “소주 왕창 마시고 미루고 싶었다”“어제만 해도 괜찮았는데 막상 아침이 되니 지랄 같은 거야. 가기 싫고, 마누라 따뜻한 밥 먹고 싶고,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아침에 소주나 왕창 먹고 자고, 내일쯤에나 가고 싶었는데 기자가 온다고 했으니 뭐 그럴 수도 없고. 한편으로는 혼자 가면 못 갈 것 같았는데 같이 가니 한결 나은 것 같네. 하하.”그는 결혼을 반대하던 처가에 “언젠가 이층집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1988년 평창동에 이 집을 지으며 약속을 지켰다. 세 아이가 중고교를 다닌 곳도, 아내가 정원을 꾸미며 살뜰하게 살림 재미를 붙인 곳도 여기다.“아내에게 ‘집을 팔고 같이 내려가자’고 했지만 싫다더군. 정이 듬뿍 들어서일 테지. 아내는 내가 또 떠나는 이유가 욕심이 아직 남아서래. 그런가…. 책이 더 팔렸으면 한다든가 이런 욕심은 전혀 없어. 남이 좋아하는 것보단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고 싶은 거야.”오후 2시. 책 서너 박스와 이불 보따리, 옷가지 등을 승용차에 가득 실은 작가는 대문 앞까지 나와 손을 흔드는 아내를 두고 평창동 비탈길을 힘차게 내려왔다.○ “내 문학의 마지막 시기가 시작됐다”박범신은 내년 등단 40년째를 맞는다. 그는 이렇게 뒤를 돌아봤다. 1973년 등단해 1979년까지는 계급갈등 중심의 글을 쓰던 ‘청년 작가 시기’, 1979년부터 1993년 절필 선언까지는 세태소설을 쓰던 ‘인기 작가 시기’, 복귀한 2000년대부터 최근까지는 근원에 대한 욕망을 그린 ‘갈망의 시기’라고. 이날 그는 ‘문학의 4기’를 열었다. “8개월 동안 소설 한 줄을 쓰지 못했고 극심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지. 뭔가 내 안에 있고 그 신호를 강경하게 받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어. 내 마지막 시기가 시작되는 느낌이야. 내려가 겨울을 보내면 무언가 여명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경부고속도로 망향휴게소에 들렀다. 간이 의자에 앉아 호두과자를 먹다가 그는 아버지 얘기를 했다.“고등학생 때 두 번 수면제 먹고 자살 기도했어. 염세적 청년이었지. 밤낮 책만 읽어대니 아버지는 ‘책귀신’이 붙었다며 나를 계룡산 국사봉의 한 절에 맡겼지. 짐을 진 아버지가 앞서고 내가 뒤를 따라갔는데 그 짐이 뻔히 보이면서도 ‘제가 들게요’라고 한마디 안 했어. 그게 평생 후회돼.” 그의 눈이 붉어졌다. “도착해서 이불 보따리를 풀고 나니 책이 한 권 나오는 거야. ‘책귀신 뗀다’며 유배 보내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막내아들이 마음 쓰여 한 권 넣어 주신 거지. 밖으로 나가 보니 아버지가 멀리 내려가시는 게 보여. 그 뒷모습이 마치 맷돌을 지고 가시는 것 같았어.”그때 아버지가 넣어준 ‘세계전후문학전집’은 이날 작가의 차 트렁크에 실려 있었다. 논어, 맹자, 시경도 넣었다.○ 논산에서 “난 살기 위해 쓴다”오후 5시 반.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에 있는 새 집에 도착했다. 몇 달 전부터 오고 가고 했지만 이곳에서 자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집 정면에 둘레가 30km가 넘는다는 탑정호(湖)가 보였지만 성큼 다가온 어둠에 금세 파묻혔다. 함께 이삿짐을 옮겼다. 침대 매트리스의 비닐을 벗기고, 옷을 옷걸이에 걸었다. 집필실을 겸한 침실은 단출했다. 싱글침대와 책상, 책장, 컴퓨터, 옷걸이, 전기커피포트가 전부다. ‘대학생 자취방 같다’고 하자 그는 “혼자 사는데 방이 크면 안 좋다. 열린 듯 닫힌 듯한 공간이 좋다”며 웃었다. 인근 붕어찜집으로 옮겨 반주를 겸해 저녁을 먹었다. 붕어보다 매콤하게 익은 시래기가 소주를 자꾸만 끌어당겼다. 근처에 낚시터가 있다. 하지만 그는 “낚시는 관심이 없고, 시간 나면 목공일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목공, 그림. 이게 왜 좋으냐 하면 비논리적인 일이잖아. 소설은 그물망이야. 하지만 난 감성적이고 논리는 약해. 그게 고통스러워.”가건물로 지은 강변 카페로 옮겨 소주에 파전을 먹었다. 강변은 조용하고 캄캄했다. “치사량을 넘겼다”는 그의 얼굴이 불콰해졌다고 생각할 때 그가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하면 난 우울증이 있어. 고교 때 두 번, 대학 때 한 번, 그리고 애 셋 다 낳고 한 번 자살 기도를 했지. 마지막은 ‘밥이나 먹고 살려고 연재소설을 쓰냐’고 주위에서 얘기할 때야. 안양에 살 때 안양천변에서 동맥을 그었지. 그런데 수상히 여긴 아내가 아파트 경비원들을 다 풀어 수색해서 나를 찾았어.”협소한 술자리가 더욱 조여지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런 징후가 있어. 죽고 싶은 염세적인 세계관이 내 속에 똬리를 틀고 커지는데 글을 안 쓰면 그 똬리가 더 커지는 것 같아. 지금은 신념이 컸으니까 그런 (극단적인) 염려까지는 없어. 하지만 난 살려고 (글을) 써. 내 안의 것들이 나를 잡아먹으려 하니까.”그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제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정 즈음 광주에서 소설가 이기호가, 다음 날 오전 1시가 넘어 서울에서 백가흠이 달려왔다. “우기호, 좌가흠이 왔다”며 박범신은 환하게 웃었다. 이들의 얘기는 오전 4시까지 이어졌다.논산=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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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예술]전깃줄 대신 ‘꽃줄’ 어때요

    ‘전등 밝히는 전깃줄은 땅속으로 묻고/저 전봇대와 전깃줄에/나팔꽃, 메꽃, 등꽃, 박꽃…올렸으면/꽃향기, 꽃빛, 나비 날갯짓, 벌 소리/집집으로 이어지며 피어나는/꽃봇대, 꽃줄을 만들었으면’(시 ‘꽃봇대’ 전문) 집집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전깃줄 대신 꽃줄을 연결했으면 한다. 꽃줄을 따라 서로가 꽃향기를 전했으면, 집집마다 단단한 씨앗 같은 꿈을 품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함민복 시인은 전깃줄을 꽃줄로 바꿨다. 카투니스트인 황중환 동아일보 기자가 그의 시에 포근한 그림들을 입혀 사랑의 온도를 높였다. 올해 쉰 살의 나이에 결혼한 시인은 두 줄로 사랑을 표현한다. ‘사랑은 곡선이다/곡선의 씨앗은 하트♡다!’(시 ‘곡선’ 전문) 그의 행복 바이러스가 책장 가득하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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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예술]천재 작가 뒤엔 그녀가…

    ‘율리시스’ ‘더블린 사람들’을 쓴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아내인 노라 바나클이 1951년 사망했을 때 미국 타임지는 이렇게 부음을 전했다. “그녀는 유명한 작가 겸 남편의 오랜 막역한 친구요, 문학적 산파이자 실질적인 여인이다. 그녀는 그를 안주시키고 그의 작품을 완성하게 했다.” 바나클에 대한 최초의 전기(傳記)다. 스무 살 나이에 두 살 연상의 조이스를 만났고 37년간 같이 살면서 두 아이를 낳았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가정과 천재적인 남편에게 헌신적이었고, 조이스는 이런 아내를 모델로 여러 작품 속 여성 캐릭터를 창출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혼란기에 유럽을 떠돌며 생활했던 조이스 가족의 삶과 조이스 역작들의 집필 과정을 전한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201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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