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범신 씨 “굿바이, 서울… 고향서 날 위해 글 쓰겠소”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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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범신 씨 50년 만의 귀향길을 동행하다

《 “유배 가는 느낌이야. 아침에 이불 보따리 싸면서 용인 갈 때 생각이 많이 났지. 그때도 누가 시켰나? 내가 한 거지. 세상에 떠밀려가는 느낌도 드네. 날씨가 궂고 비가 내리니까 더 그런 것 같아.” 그는 거실 창문 밖으로 잔뜩 찌푸린 회색 하늘을 말없이 바라봤다. 담배 연기가 하얀 실타래를 풀다 맥없이 사라졌다. 소설가 박범신(65). 1980년대 ‘불의 나라’ ‘물의 나라’ 등 세태를 고발하는 신문 연재소설로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지만 문단에선 혹평이 나왔다. 1993년 돌연 절필 선언 후 3년간 경기 용인의 외딴집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기도 했다.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아내와 함께 귀향 이삿짐을 꾸리고 있었다. 9월 명지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그는 서울문화재단 이사장과 연희문학창작촌장에서도 물러났다. 2남 1녀를 둔 그는 올여름 서른 살 막둥이 아들을 마지막으로 결혼시키며 부모로서의 짐도 덜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문학뿐이다. “문학이 결국 자신의 번뇌와 갈등, 그리고 구원에서 나온 것 아니냐. 예순이 넘으니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위로받는 소설을 쓰고 싶다.” 1963년 전북 익산 남성고에 입학하며 고향(충남 논산)을 떠났다. 까까머리 학생에서 반백의 소설가가 된 그의 거의 50년 만의 귀향길을 동행했다. 》
○ “소주 왕창 마시고 미루고 싶었다”

“어제만 해도 괜찮았는데 막상 아침이 되니 지랄 같은 거야. 가기 싫고, 마누라 따뜻한 밥 먹고 싶고,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아침에 소주나 왕창 먹고 자고, 내일쯤에나 가고 싶었는데 기자가 온다고 했으니 뭐 그럴 수도 없고. 한편으로는 혼자 가면 못 갈 것 같았는데 같이 가니 한결 나은 것 같네. 하하.”

그는 결혼을 반대하던 처가에 “언젠가 이층집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1988년 평창동에 이 집을 지으며 약속을 지켰다. 세 아이가 중고교를 다닌 곳도, 아내가 정원을 꾸미며 살뜰하게 살림 재미를 붙인 곳도 여기다.

“아내에게 ‘집을 팔고 같이 내려가자’고 했지만 싫다더군. 정이 듬뿍 들어서일 테지. 아내는 내가 또 떠나는 이유가 욕심이 아직 남아서래. 그런가…. 책이 더 팔렸으면 한다든가 이런 욕심은 전혀 없어. 남이 좋아하는 것보단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고 싶은 거야.”

오후 2시. 책 서너 박스와 이불 보따리, 옷가지 등을 승용차에 가득 실은 작가는 대문 앞까지 나와 손을 흔드는 아내를 두고 평창동 비탈길을 힘차게 내려왔다.○ “내 문학의 마지막 시기가 시작됐다”

박범신은 내년 등단 40년째를 맞는다. 그는 이렇게 뒤를 돌아봤다. 1973년 등단해 1979년까지는 계급갈등 중심의 글을 쓰던 ‘청년 작가 시기’, 1979년부터 1993년 절필 선언까지는 세태소설을 쓰던 ‘인기 작가 시기’, 복귀한 2000년대부터 최근까지는 근원에 대한 욕망을 그린 ‘갈망의 시기’라고. 이날 그는 ‘문학의 4기’를 열었다.

“8개월 동안 소설 한 줄을 쓰지 못했고 극심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지. 뭔가 내 안에 있고 그 신호를 강경하게 받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어. 내 마지막 시기가 시작되는 느낌이야. 내려가 겨울을 보내면 무언가 여명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경부고속도로 망향휴게소에 들렀다. 간이 의자에 앉아 호두과자를 먹다가 그는 아버지 얘기를 했다.

“고등학생 때 두 번 수면제 먹고 자살 기도했어. 염세적 청년이었지. 밤낮 책만 읽어대니 아버지는 ‘책귀신’이 붙었다며 나를 계룡산 국사봉의 한 절에 맡겼지. 짐을 진 아버지가 앞서고 내가 뒤를 따라갔는데 그 짐이 뻔히 보이면서도 ‘제가 들게요’라고 한마디 안 했어. 그게 평생 후회돼.” 그의 눈이 붉어졌다.

“도착해서 이불 보따리를 풀고 나니 책이 한 권 나오는 거야. ‘책귀신 뗀다’며 유배 보내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막내아들이 마음 쓰여 한 권 넣어 주신 거지. 밖으로 나가 보니 아버지가 멀리 내려가시는 게 보여. 그 뒷모습이 마치 맷돌을 지고 가시는 것 같았어.”

그때 아버지가 넣어준 ‘세계전후문학전집’은 이날 작가의 차 트렁크에 실려 있었다. 논어, 맹자, 시경도 넣었다.○ 논산에서 “난 살기 위해 쓴다”

오후 5시 반.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에 있는 새 집에 도착했다. 몇 달 전부터 오고 가고 했지만 이곳에서 자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집 정면에 둘레가 30km가 넘는다는 탑정호(湖)가 보였지만 성큼 다가온 어둠에 금세 파묻혔다.

함께 이삿짐을 옮겼다. 침대 매트리스의 비닐을 벗기고, 옷을 옷걸이에 걸었다. 집필실을 겸한 침실은 단출했다. 싱글침대와 책상, 책장, 컴퓨터, 옷걸이, 전기커피포트가 전부다. ‘대학생 자취방 같다’고 하자 그는 “혼자 사는데 방이 크면 안 좋다. 열린 듯 닫힌 듯한 공간이 좋다”며 웃었다.

인근 붕어찜집으로 옮겨 반주를 겸해 저녁을 먹었다. 붕어보다 매콤하게 익은 시래기가 소주를 자꾸만 끌어당겼다. 근처에 낚시터가 있다. 하지만 그는 “낚시는 관심이 없고, 시간 나면 목공일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목공, 그림. 이게 왜 좋으냐 하면 비논리적인 일이잖아. 소설은 그물망이야. 하지만 난 감성적이고 논리는 약해. 그게 고통스러워.”

가건물로 지은 강변 카페로 옮겨 소주에 파전을 먹었다. 강변은 조용하고 캄캄했다. “치사량을 넘겼다”는 그의 얼굴이 불콰해졌다고 생각할 때 그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우울증이 있어. 고교 때 두 번, 대학 때 한 번, 그리고 애 셋 다 낳고 한 번 자살 기도를 했지. 마지막은 ‘밥이나 먹고 살려고 연재소설을 쓰냐’고 주위에서 얘기할 때야. 안양에 살 때 안양천변에서 동맥을 그었지. 그런데 수상히 여긴 아내가 아파트 경비원들을 다 풀어 수색해서 나를 찾았어.”

협소한 술자리가 더욱 조여지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런 징후가 있어. 죽고 싶은 염세적인 세계관이 내 속에 똬리를 틀고 커지는데 글을 안 쓰면 그 똬리가 더 커지는 것 같아. 지금은 신념이 컸으니까 그런 (극단적인) 염려까지는 없어. 하지만 난 살려고 (글을) 써. 내 안의 것들이 나를 잡아먹으려 하니까.”

그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제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정 즈음 광주에서 소설가 이기호가, 다음 날 오전 1시가 넘어 서울에서 백가흠이 달려왔다. “우기호, 좌가흠이 왔다”며 박범신은 환하게 웃었다. 이들의 얘기는 오전 4시까지 이어졌다.

논산=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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