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

정미경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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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미경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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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202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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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계정 2년 정지 결정으로 주목받은 ‘페이스북 대법원’은 무엇? [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최근 세계 최대 소셜 미디어 페이스북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계정을 2년간 정지하기로 했습니다. 트럼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페이스북 대법원’의 판결에 근거해 2년 정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페이스북 대법원’이 뭐하는 곳일까요. 저커버그 CEO를 가상법정의 증인으로 출석시켜 질의응답(Q&A)을 통해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언론 보도와 법률 블로그 등을 참조했습니다. Q(페이스북에 대해 궁금한 일반인들): ‘페이스북 대법원(Facebook Supreme Court)’이라고 하면 회사 내부에 법원이 있다는 것인가.A(저커버그): 아니다. 일종의 별명이다. 정식 명칭은 ‘감독위원회(Oversight Board)’다.Q: 위원회는 뭐하는 곳인가.A: 페이스북에는 가짜 뉴스나 공중에게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뉴스가 종종 올라온다. 그런 콘텐츠는 빨리 찾아 내릴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자동 알고리즘을 작동시켜 찾아내고 페이스북 경영진이 가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중대하거나 법리적으로 까다로운 결정은 독립적인 위원회에서 다시 한번 심사할 필요가 있다. 위원회는 콘텐츠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는 곳이다. 하급 법원에서 올라온 사안들이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Q: 누가 위원회에 심사를 요청하나.A: 나를 포함한 페이스북 경영진이 요청하기도 하고,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위원들이 내부적으로 안건을 내기도 한다. ‘트럼프 건’은 내가 요청했다.Q: ‘트럼프 건’이 뭔지 설명해 달라.A: 페이스북은 1월 워싱턴 의사당 난입 사태 직후 트럼프 계정 정지 결정을 내렸다. 워낙 중요한 결정이므로 나는 위원회에게 다시 심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요청했다. 첫째, 결정의 타당성과 둘째, 정지 기간에 대한 것이다. 난입 사태 후 나는 ‘무기한 정지(indefinite suspension)’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에게 구체적으로 기간을 설정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지난달 위원회는 판결을 내렸다. 첫째 안건에 대해서는 “정지 결정은 타당하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기간 문제는 “페이스북 경영진이 결정해야 한다”며 다시 안건을 우리에게 돌려보냈다. 이에 따라 나는 2년 정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Q: 당신은 페이스북의 1인자다. 그런 당신이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면 위원회의 권한이 상당히 큰 것 같다. A: 위원회는 페이스북의 콘텐츠 관련 최종 결정 기구다. 위원회 판단은 나의 결정을 인정할 수도, 뒤집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는 위원회 결정에 따른다. 그만큼 내가 공들여 만든 조직이라는 뜻이다.Q: 만들게 된 계기를 말해 달라.A: 과거 나는 “페이스북은 진실의 중재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거짓 정보와 공중 안전에 해가 되는 정보가 많아지면서 감독 필요성이 커졌다.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2년 전쯤 어느 날 노아 펠트먼 하버드대 법대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셰릴 샌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담당자(COO)의 친구인 그는 샌버그 집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비슷한 독립적 감독기구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이 퍼뜩 들었다고 한다. 위원회는 2년간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해 10월 활동을 개시했다. Q: “공들여 만들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A: 내가 설립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인맥 소개를 통해 위원들을 선정할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다들 자기 주변 지인들만 추천해서 비슷한 분야 사람들로만 채워질 듯 했다. 그래서 공개모집 포털 사이트를 마련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추천을 하기도 했다. 88개국에서 접수된 1200여명 후보 중 250차례의 대면 면접과 22차례의 라운드테이블 미팅, 8차례의 심층 워크숍을 통해 정치 법조 인권 언론 학계 등에서 20명을 선정했다(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대만, 인도, 파키스탄 출신 4명). 앞으로 4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위원 급여, 운영 비용 등은 페이스북이 자체 마련한 1억3000만 달러(1450억원) 규모의 펀드에서 충당한다.Q: 그렇게 공들여 선정했다는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인이 별로 없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인가.A: 대중적인 지명도로 보자면 덴마크 전 총리, 2011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도가 가장 유명하다. 첫째 이유는 이름을 걸어놓는 명예직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며 진짜로 일을 하는 위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위원들의 팀플레이 정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명인은 아무래도 ‘에고(자아 의식)’가 클 수밖에 없다.Q: 위원회에 대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관심이 지대하다고 하던데….A: 위원 선정 때 장녀 이방카를 추천했다. 위원회가 꾸려진 후에는 전화를 걸어와 “불만족스럽다(unhappy)”고 했다. 첫 번째 탄핵 심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스탠퍼드대 법대 교수가 포함된 것에 기분이 상한 듯 했다. 반면 우리 회사 내부와 진보 운동계에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인종차별적 판결을 내린 보수 성향의 전 연방 순회법원 판사가 포함된 것에 반발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지만 진보와 보수 간의 균형을 맞추는 데 중점을 뒀다.Q: 독립적 성격의 위원회라고 하지만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페이스북 대법원’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A: “위원회가 결국 이사회와 비슷한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아니다. 성격이 다르다. 이사회는 주주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결국 회사의 경영 방침과 대체적으로 부합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반면 세계 각국에서 멤버들을 선정한 위원회는 미국 내에 존재하는 정치적, 경제적 압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표현의 자유와 규제의 필요성은 소셜 미디어 이용자와 운영자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다. 페이스북이 위원회를 꾸려 조금 먼저 고민을 시작했을 뿐이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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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정부 ‘UFO보고서’ 이달 첫 공개… 외계인 신비 풀릴까[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최근 한미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있었습니다. 폭스뉴스의 피터 두시 백악관 담당 기자는 조 바이든 행정부를 괴롭히는 질문을 잘 던지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가 양국 정상 기자회견 때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두시 기자: “미스터 프레지던트, 마지막 질문을 해도 될까요?”조 바이든 대통령: “음, 평소처럼 못된 질문 하면 안 받아주겠어.”두시 기자: “아닙니다. 매우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최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하늘을 떠다니는 UFO(미확인비행물체)에 대한 동영상과 자료들을 정부 당국이 수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물체들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대통령은 이 물체들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바이든 대통령: “(웃으며) 오바마한테 다시 물어볼게.”기자의 황당 질문과 이를 교묘히 빠져나가는 대통령의 재치에 회견장에는 폭소가 터집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바삐 퇴장 준비를 합니다. 한국 대통령을 나 홀로 단상에 세워놓으면 안 되니까 “빨리 갑시다. 대장(Come on, boss. Let‘s go)”이라는 말과 함께 ’어서 여기를 떠나자‘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을 “보스”라고 부른 것이 미국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친한 사이의 호칭이죠. 양국 대통령은 정말 사이가 좋은 듯 보였습니다. 이보다 더 큰 화제가 된 것은 심각한 대통령 기자회견장에서 UFO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UFO에 대한 미국의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 그동안 UFO 하면 연상돼온 ’사이비‘스럽고 황당무계한 이미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질문을 받은 바이든 대통령은 즉답을 피했지만, UFO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죠. 이 질문이 나오게 된 배경 설명을 하자면 기자회견이 있기 나흘 전 오바마 전 대통령은 심야 토크쇼에 출연해 UFO를 화제에 올렸습니다. 그는 “심각하게 하는 말이다. 정부는 미확인물체에 대한 동영상과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이 뭔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 물체들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비행 궤도를 설명하기 힘들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패턴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현상을 진지하게 조사해서 밝혀내려는 (정부)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UFO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낙인찍힌 주제였습니다. ’유에프올로지스트(Ufologist)‘라고 불리는 UFO 연구자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일반 사람들의 대화에서 지나치게 UFO에 관심을 보이면 “제 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당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아닙니다. 공정과 신뢰를 중시하는 주류 언론이 UFO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달 CBS 유명 시사프로그램 ’60분‘은 “자주 출몰하는 UFO”라는 제목으로 학자, 정부 당국자, UFO를 직접 목격한 군 조종사들의 인터뷰를 엮어 내보냈습니다. 지식인들이 많이 읽는 잡지 ’뉴요커‘는 “펜타곤(국방부)은 언제부터 UFO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나”라는 긴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뉴욕타임스(NYT)는 “우리가 UFO에 대해 믿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미 정계의 ’UFO 전도사‘격인 해리 리드 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의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이렇게 언론이 일제히 주목한다는 것은 조만간 UFO 관련 대형 ’이벤트‘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정보국(DNI)과 국방부가 공동 작성해 이달 중 의회에 제출 예정인 UFO 보고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UFO 관련 첫 정부 보고서입니다. 정치인들끼리 돌려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일반에게도 공개되는 보고서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정확한 공개 날짜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8월 데이비드 노퀴스트 당시 국방 부장관은 “펜타곤 내에 UFO 현상을 연구하는 극비 태스크포스가 있다”는 중대 발표를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펜타곤은 의회를 상대로 태스크포스의 연구 결과를 모은 비공개 브리핑을 열었습니다. 당시 마르코 루비오 상원 정보위원장은 “브리핑 내용이 부족하다”며 추가 정보를 수집해 종합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번에 나올 보고서가 바로 그 보고서입니다. 오랫동안 UFO 존재를 부인해온 정부가 갑자기 브리핑을 열고, 보고서도 내기로 한 데는 2017년 말 NYT 보도가 계기가 됐습니다. UFO 학계에서는 2017년 12월 16일이 역사적인 날입니다. NYT가 1면에 대문짝만하게 “반짝이는 아우라와 ’검은 돈‘: 펜타곤의 비밀스러운 UFO 프로그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날입니다. NYT는 이 기사에서 ’외계인의 지구인 납치‘ 같은 허황된 주장은 하지 않았습니다. 국방부 내의 UFO 극비 부서 운영과 자금 조달에 초점을 맞춘 ’소박한‘ 기사였습니다. 그래도 위력은 엄청났습니다. UFO를 열성 팬덤의 영역에서 일반인의 대화 주제로 끌어낸 것이죠. NYT는 이 기사와 함께 UFO 동영상도 공개했습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04년 USS 니미츠 항공모함 전투기 조종사들이 샌디에이고 상공에서 촬영한 미확인물체 동영상입니다. UFO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것입니다. 지난달 방송된 ’60분‘ 프로그램에는 당시 UFO를 동시에 목격했던 4명의 조종사 중 2명이 출연해 UFO의 형태와 비행 속도 등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NYT 보도 후 미 정부 방침은 크게 바뀝니다. 더 이상 감춰봤자 득이 될 게 없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 2018년 8월 통과된 2019년도 국방수권법은 국방부가 UFO 부서를 계속 유지하고 연구하도록 명시했습니다. 국방수권법에 UFO 관련 내용이 들어간 것은 처음입니다. 2019년 국방부는 군 조종사들에게 UFO 관련 첫 가이드라인을 배포합니다. “미확인물체를 발견할 경우 검열이나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주고 상부에 적극 보고토록 한 것입니다. 이달 중 모습을 드러낼 정부 보고서에 대해 기대가 큰 만큼 회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수십 년 동안 UFO에 대해 많은 정보를 축적한 정부가 단번에 보따리를 크게 풀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들립니다. 사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UFO가 공론의 영역으로 나와 무엇이 진실인지 토론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미국의 UFO 연구에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요즘 미국은 “UFO”라고 하지 않고 “UAP”라고 부릅니다. ’미확인비행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라는 단어가 주는 비과학적 이미지 때문에 미 정부와 언론 등은 ’미확인대기현상(Unidentified Aerial Phenomena)‘이라고 부르는 추세입니다. 우선 “UAP”라는 단어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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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길은 韓-캐나다 130여 년 우정이 녹아있는 길”

    “정동길은 우정의 길입니다.” 걷기 좋은 길, 덕수궁 돌담길, 향긋한 5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는 길(노래 ‘광화문연가’ 중에서)…. 서울 중구 정동길을 부르는 별칭은 많다. 주한 캐나다대사관에서 정치 경제 문화 분야를 총괄하는 패트릭 헤베르 참사관(50)에게 정동사거리에서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811m 정동길은 양국 우정의 길이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다소 부담스럽다면 ‘한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길’이라는 게 그의 추천사다. 1년 중 가장 아름답다는 5월의 정동길을 헤베르 참사관과 함께 한 바퀴 돌았다. 출발은 정동길 중간 지점 이화여고 건너편에 있는 캐나다대사관 앞. 아는 사람은 아는 웨딩사진의 명소다. 이곳은 역설적으로 6·25전쟁의 상흔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당시 가장 치열했던 가평전투를 기리는 대형 그림이 대사관 외벽에 걸려 있다. 캐나다가 6·25전쟁 참전국 중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2만7000여 명의 군인을 보낸 나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기 연천 고왕산 355고지를 사수하는 전투에서는 200여 명의 캐나다군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잊었지만 캐나다는 매년 이들 전사자를 기억해 왔다. 올해는 가평전투 70주년을 맞아 기념사진집을 발간하고 당시 참전했던 캐나다 전쟁화가 테드 주버의 작품 ‘가평에서 버티며(Holding at Kapyong)’를 전시하는 등 행사 규모가 커졌다. 헤베르 참사관은 다음 코스로 교회당(정동제일교회) 부근에 있는 ‘보구여관터’라는 작은 표지판 앞으로 안내했다.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는 장소’라는 의미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이 있던 자리다. 캐나다 ‘슈퍼우먼’ 로제타 셔우드 홀이 활약한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과 캐나다는 1963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하지만 처음 캐나다인들이 우리나라를 찾은 때는 훨씬 전이다. 1888년부터 1945년까지 200여 명의 캐나다인이 선교사 학자 의사 기자 등의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1890년 도착한 의사 로제타 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미국 출신이었지만 캐나다 선교사와 결혼하면서 캐나다인이 됐다. 여성이 제대로 병원에조차 갈 수 없던 시절에 그녀는 보구여관의 안주인으로 하루 수십 명씩 밀려드는 한국 여성들을 진료했다. 홀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박에스더)을 길러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녀가 성공적으로 구순구개열(일명 언청이) 수술을 하는 것에 감명받은 김점동이 그녀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최초의 여의사가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장애인 치료에 관심이 많던 홀은 한국어를 독학해 한국어 점자책을 처음 만들고, 평양에 최초의 시각 및 청각 장애인학교를 설립했다. 자식도 잘 길러내 그녀의 아들인 선교사 제임스 셔우드 홀은 1930년대 우리나라에 처음 ‘크리스마스 실’을 소개했다. 우정의 정점을 찍는 인물이라면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정동사거리에 있는 돈의문박물관마을 안에는 스코필드 기념관이 마련돼 있다. 헤베르 참사관과 함께 기념관에 들어서니 호랑이 한 마리가 맞아준다. 한국 애칭인 ‘석호필’(호랑이처럼 굳건하게)로 불렸던 스코필드 박사를 기리는 실물 크기 호랑이상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생전에 “강자 앞에서는 호랑이처럼, 약자 앞에서는 비둘기처럼 행동하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서슬 퍼런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3·1운동 현장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써 세계 각국에 타전했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조선 발전을 위한 제언’이라는 기고를 남기기도 했다. 1867년 건국한 신생 독립국 캐나다는 먼 타국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힘쓰는 스코필드 박사에게 깊은 존경심을 나타냈다. 지금도 토론토 동물원에 ‘한국의 34번째 민족대표’라는 표지판과 함께 그의 동상이 서있다. 정동길 역사 순례는 다시 대사관으로 돌아와 530년 된 회화나무 앞에서 마무리됐다. 헤베르 참사관은 “정면이 아닌 측면 방향으로 설계된 대사관의 독특한 디자인은 서울시 지정 보호수인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대사관 건물 밑으로 조선시대부터 서있는 나무의 뿌리가 자라고 있습니다. 양국 간 우정의 깊이를 말해 주는 게 아닐까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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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늬만 아시아계?”…‘흑인 행보’ 뚜렷 해리스 부통령에 아시아계 불만[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증오범죄방지법에 서명했습니다. 주요 아시아 동맹국인 한국과의 정상회담 직전에 열린 서명식이라 의미가 깊었습니다. 서명식과 이후 열린 리셉션에서는 아시아계 정치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법안 통과 과정을 되돌아보며 감회를 밝혔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정부 지침 이후 열린 백악관의 첫 대형 행사여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인도 출신의 어머니를 둔 아시아계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57)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해리스 부통령을 말할 때 아시아계라는 점은 별로 부각되지 않습니다. ‘해리스=흑인’이라는 공식이 통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아시아계라는 것을 모르는 미국인들도 많습니다. 서명식에는 법안 통과를 위해 노력한 공로가 아닌, 부통령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미국 내 2000만 명에 달하는 급성장 커뮤니티인 아시아계는 그런 해리스 부통령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아시아계로서 행정부 최고위직까지 오른 그녀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한 일이 없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애틀랜타 총격사건 현장을 방문했을 때 “나도 아시아계다. 당장 아시아계를 향한 폭력을 멈춰라”는 식의 공감 가는 발언을 기대했지만 없었습니다. 미지근한 연설을 했죠. 아프리카계 자메이카인 아버지와 인도 이민자 어머니를 둔 해리스 부통령은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는 미국의 현 주소를 보여줍니다. 흑인과 아시아계라는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가진 해리스 부통령의 정치 행보를 보면 흑인 정체성은 뚜렷한 반면 아시아계로서의 모습은 희미했습니다. “그 흑인 소녀가 바로 나다.” 해리스 부통령의 흑인 정체성을 이만큼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도 없습니다. 지난해 7월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토론회에서 그녀는 조 바이든 후보를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이든 후보가 1960년대 흑백 인종 학생들을 버스에 같이 태워 등교시키는 이른바 ‘버싱 정책’에 반대했던 전력을 몰아붙이며 자신을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 밝히는 장면이었습니다. 부통령이 된 뒤에도 흑인 커뮤니티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4월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 런치카운터를 예고 없이 방문했습니다. 1960년 흑인 4명이 백인 전용 식당 공간에 앉아 침묵 시위를 벌였던 역사적 장소입니다. 또 알 샤프턴 등 흑인 운동가들과 TV 인터뷰에 자주 나서고, 백신 접종률이 낮은 흑인 커뮤니티에 접종을 독려하는 동영상에 출연했습니다.반면 아시아계를 위해서는 애틀랜타 사건 현장을 방문한 것 외에는 두드러진 활동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나라인 인도의 코로나19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을 때도 별다른 언급이 없어 인도인들로부터 “차라리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리를 더 잘 챙겨줬다”는 볼멘소리가 나왔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인도를 수차례 방문하고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미국에 모셔와 초대형 스타디움에서 연설 이벤트를 마련해주는 등 각별한 친(親)인도 정책을 벌였습니다.해리스 부통령은 19세 때 미국에 유학 와서 결혼해 자신을 낳은 인도 어머니를 “나의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7세 때 부모가 이혼한 뒤 계속 어머니와 살았고 아버지와는 매우 드물게 만났습니다. 이런 성장 환경으로 볼 때 어머니 쪽인 아시아계에 친밀감을 느낄 듯하지만 오히려 흑인 정체성을 더 부각시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어머니는 “그 시절에는 흑인으로 키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고 말합니다. 1960년대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주도했고 주민 4명 중 1명꼴로 흑인 비율이 높은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서 자녀를 키우려면 흑인다움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해리스 부통령은 흑인 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흑인 교회에 다녔으며, 흑인 대학인 하워드대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시절 클럽 활동조차 흑인 여학생 전용인 ‘알파 카파 알파’에서 마쳤습니다. 미국에는 아직 ‘한방울 원칙(one-drop rule)’이 뿌리 깊게 남아있습니다. ‘흑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으면 흑인’이라는 사회적 통념입니다. 주로 흑백 혼혈인들에게 적용되는 인종차별 시대의 잔재이지만 해리스 부통령 같은 흑인-아시아계 혼혈에게도 해당됩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겠죠.그렇다고 해리스 부통령이 아시아적 특성을 모두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카멀라’라는 독특한 이름은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연(蓮)’을 뜻하고, ‘데비’라는 가운데 이름은 힌두교 여신에서 유래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인도 쌀 요리인 ‘비리야니’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식석상이나 정치 행사에 등장하면 예외 없이 ‘흑인 해리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의 친한 친구인 유명 코미디언 하산 미나즈는 “해리스는 대다수 인도계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다. 흑인으로 비쳐지기를 원한다”는 뼈있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다른 소수 인종들도 사회적 성공을 이뤘을 때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이뤄낸 것이고,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차별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이라는 흑인사회 특유의 인종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죠. 미 언론은 해리스 부통령에 대해 70대 30 규칙이 적용된다고 비꼽니다. 대부분 시간은 흑인으로서의 자신에 투자하고 필요할 때는 아시아계에 “나도 당신들 중 한 명”이라고 구애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정치적 야망이 큰 그녀는 조만간 인종적 정체성을 확실히 ‘교통 정리’ 해야 합니다. 2024년 재선 도전이 불투명한 바이든 대통령은 벌써부터 해리스 부통령을 열심히 데리고 다니며 후계자 수업을 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인종은 매우 복잡하고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옮겨 다닌다던지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 “기회주의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됩니다. 해리스 부통령에게도 결정의 시간이 멀지 않았을 것입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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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無라벨에 페트병 경량화, 내두천 청정 용천수 백산수

    농심 백산수가 친환경으로 새 단장을 했다. 백산수는 5월부터 온라인 채널과 가정 배송에서 무라벨 판매를 시작했다. 페트병 겉면에 부착되는 라벨용 필름을 제거한 것이다. 라벨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제품명과 수원지(水源池)를 페트병에 음각으로 새겨 넣어 간결한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제품 상세정보는 묶음용 포장에 인쇄했으며 박스 단위로만 판다. 라벨을 떼어내는 번거로움을 없애 분리배출 때 편리하고 페트병 재활용률을 높였다. 농심은 무라벨 백산수로 연간 60t 이상의 라벨용 필름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형마트 등 오프라인 판매 제품으로도 확대해 올해 연말까지 백산수 전체 판매 물량의 50%를 무라벨로 전환한다. 2L 페트병 경량화도 추진하고 있다. 연내에 2L 제품에 경량화를 적용해 플라스틱 사용량을 기존보다 4% 절감할 계획이다. 이미 2019년 0.5L 제품을 경량화해 플라스틱 사용량을 13.5% 줄인 바 있다. 농심은 페트병 경량화로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을 기존 대비 440t 이상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백산수는 백두산 해발 고도 670m에 위치한 내두천이 수원지다. 내두천 일대는 너비만 2100km²에 달하는 청정 원시림 보호구역이다. 설악산 천연 보호구역보다 13배나 큰 광활한 지역이다. 백산수는 내두천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를 담는다. 지하에 있는 물을 기계의 힘으로 뽑아내 담는 일반 생수와는 다른 취수 방식이다. 또한 내두천에서 3.7km 떨어진 생산라인까지 별도의 수로로 연결함으로써 백두산 청정 원시림을 훼손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백산수는 물맛과 품질에서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 전문가’로 알려진 신호상 공주대 교수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그네슘과 칼슘의 비율이 1에 가까운 생수가 건강수로 분류된다. 백산수는 이 수치가 0.9 이상의 비율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신 교수팀이 백산수를 1년간 연구 관찰한 결과 1월부터 12월까지 연중 미네랄 수치가 일정하다고 발표했다. 마그네슘 칼슘 칼륨 등 미네랄 함량과 비율이 계절적으로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수원지 원수와 생산된 백산수의 미네랄 함량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 측은 “백산수는 ‘백두산의 자연을 그대로’라는 철학으로 만드는 믿고 마실 수 있는 물”이라며 “깨끗한 물을 오랫동안 마실 수 있도록 친환경 행보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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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스크, SNL ‘발연기’ 수모…“연기력 C학점” 혹평 시달려[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지루했다(Boring).” “그저 그랬다(Forgettable).” 이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더 심한 평도 있습니다. “오글거렸다(Cringey).”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오글거림을 유발했다면 최악의 평입니다. 쉽게 말해 ‘발연기’라는 거죠. 그래서 점수는? “C학점.” 미국의 권위 있는 엔터테인먼트업계 전문지 ‘할리우드 리포터스’가 준 평점입니다. 역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나 봅니다. 요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화제죠. 그가 8일 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이하 SNL)’에 진행자로 출연한 것을 두고 혹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가 가상화폐 도지코인에 대해 언급한 것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미국에서는 ‘퍼포먼스’에 더 관심을 두는 분위기입니다. “경제계의 슈퍼스타지만 연기력은 평균 이하”라는 것이 SNL 방송 후 나오는 평가입니다. 토요일 밤에 방송되는 SNL은 매주 새로운 진행자를 초대해 100여분 동안 7~8개의 코미디 코너를 진행합니다.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최근 시청률 침체를 겪는 SNL이 한달 전쯤 비장의 카드로 머스크 출연을 예고하자 여론은 후끈 달아올랐습니다.반응은 좋지 않았습니다. “억만장자 머스크는 SNL의 정체성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뉴욕에서 제작되는 SNL은 기득권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살아있는 프로그램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SNL에 고정 출연하는 코미디언 2명은 “왜 경영진이 머스크를 출연시키기로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정말 어색했습니다. 코미디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하고 자막 모니터를 열심히 읽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머스크가 출연하지 않은 코너들이 재미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진행자인 머스크보다 초대 가수 마일리 사이러스의 연기가 더 낫다”는 굴욕적인 평까지 나왔습니다.직업배우나 코미디언이 아닌 머스크가 SNL 진행자로 나서 호평을 얻기는 힘듭니다. 본인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도전한 것일까요. 머스크뿐만이 아닙니다. SNL에는 연예인이 아닌 다른 분야 거물들이 종종 진행자로 나섭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회,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3번 출연 경력이 있습니다. 경제잡지 포브스 발행인 스티브 포브스도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비(非)연예계 인사들이 SNL에 출연하는 것은 이미지 개선 차원입니다. 비록 능숙한 진행 솜씨를 보여주지는 못해도 자신을 코미디 소재 삼아 부정적이거나 모호한 이미지에서 탈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5년 대선을 앞두고 출연했고, 줄리아니 전 시장은 뉴욕의 흑백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시장 자격으로 나왔습니다. ‘사이클의 황제’로 불렸던 랜스 암스트롱은 2005년 프랑스 언론이 약물 복용을 폭로한 직후 출연해 “나는 억울하다”고 항변했습니다.머스크 역시 ‘이슈 메이커’로서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SNL에 출연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상화폐, 코로나19 규제, 소수그룹 역차별, 마리화나 합법화 등 많은 이슈에서 자기 의견을 분명히 밝혀왔습니다. 논란을 피하고 회사 경영에 전념하는 대다수 젊은 첨단 경영인들과는 다른 행보입니다. 그에게는 자기 목소리를 들어줄 5400만 명에 달하는 소셜 미디어 광팬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팔로워 숫자입니다. 머스크가 자주 논란이 될만한 발언을 하는 이유는 사업적 필요성 때문입니다. 전기차, 우주 개발, 가상화폐 등 새로운 사업영역들로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대중의 사고를 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 팔로워들은 머스크를 “선지자(visionary)”라고 부르고, 미 언론은 그런 추종자들을 ‘머스크 사교집단(Musk Cult)’이라고 부릅니다. 딱히 사업적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도 그는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것을 즐깁니다. 유명 팟캐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해 마리화나를 피우며 2시간 동안 횡설수설하는가 하면 성적 소수자 호칭 문제로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를 화나게 한 적도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서는 보수와 진보, 기업의 자유시장 논리와 사회적 책임 의식 사이에서 모순이 종종 발생합니다. 그래도 미국에서는 ‘갑부의 기행’ 정도로 관대하게 이해됩니다.머스크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SNL 출연을 열심히 홍보했습니다. 이번 시즌 방송된 SNL 중에서 세 번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유튜브 조회수도 방송 이틀 만에 300만회를 돌파하면서 관심도 측면에서 나름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SNL 도입부에서 진행자가 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모노로그’에서 머스크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자신이 신경발달 장애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고백하고, 모델 출신인 자신의 어머니를 무대 위로 불러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많은 논란을 의식한 듯 “사람들은 내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궁금했습니다. “그건 내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전기로 가는 차를 만들고 사람을 우주에 보내는 내가 평범할 줄 알았나?”라고 간단하게 넘어가더군요. 결국 ‘나는 비범한 사고의 소유자’라는 자기 과시인 듯 했습니다. SNL 출연만으로 머스크의 진면목을 파악하기는 힘들겠지만 열성 지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래 창조자” “원대한 계획가”의 모습은 확실히 아니었습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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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받은 사랑을 세계와 나누다”

    한낮 기온이 섭씨 45도까지 오르는 에티오피아 베할레 난민캠프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한국에서 공수된 쌀을 배급받는 날. 태극무늬가 선명하게 찍힌 쌀 포대를 당나귀 등에 옮겨 싣느라 바쁜 난민 케디야 씨(여)는 “25kg을 배급받았다”며 “우리 가족 2주 치 식량”이라고 말했다. 쌀 전달에 관여했던 세계식량계획(WFP) 현지 사무소 관계자는 “케디야 씨가 ‘하루에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하기도 힘들었는데, 쌀을 받게 돼 눈물이 날 것처럼 기쁘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국은 2018년 식량원조협약(FAC)에 가입해 유엔 산하 WFP를 통해 쌀을 원조하기 시작했다. FAC의 16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한 한국은 2018년부터 매년 460억 원 상당의 쌀 5만 t씩을 에티오피아, 케냐, 예멘, 우간다 등 아프리카 4개국에 무상 지원해 왔다. 쌀 5만 t은 현지에서 연 300만 명에게 3개월분 주식으로 공급된다. 원조 수행 기관으로 운송 배분 모니터링 업무를 담당하는 WFP의 데이비드 비즐리 사무총장은 지난해 11월 한국 농업인의 날에 화상 메시지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의 아낌없는 지원 없이는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었다”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혼란 속에서도 예정대로 6월에 쌀을 공급했다. 국제원조 전문가들은 한국 쌀이 수혜국의 영양 균형에 기여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기존에 WFP가 공급하던 주식은 밀가루, 수수, 옥수수 등 서구형 곡물이 대부분이었다. 2018년 WFP가 실시한 에티오피아 327개 수혜 가구 설문조사에서 94%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품질이 좋은 것으로 이름 난 한국 쌀(자포니카)은 돌이나 이물질이 섞여 있지 않아 조리가 간편하고 현지인 입맛에도 맞는다는 평을 듣는다. 한국의 쌀 원조 사업이 좋은 평판을 얻으면서 지난해 20개 WFP 국가사무소에서 30만 t의 추가 지원 요청이 접수됐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부터는 수혜국을 기존 아프리카 4개국에서 라오스와 시리아를 추가해 6개국으로 늘린다. 지원 물량은 내년까지 5만 t을 유지하고 성과 평가 후 2023년부터 6만 t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 2018년 쌀 원조 이전부터도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통해 저개발국의 식량 위기 타개에 기여해왔다. ODA는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 가입을 계기로 농업기술 전수, 수자원 인프라 구축, 가축 질병 대응 등 근본적인 방식으로 농업 생산성 향상과 농가 소득 증대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에티오피아의 건조하고 메마른 땅에서 수십 년간 어렵게 옥수수를 재배하며 살아온 테스파네 말리 씨(30대)는 “한국이 관개 시설을 구축하고 기자재를 지원해준 덕분에 연간 3000m²의 밭에서 생산한 옥수수가 1000kg에서 2000kg으로 늘었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말리 씨 같은 농민들이 도움을 받은 1차 수자원 ODA 사업(2011∼2014년)에 대해 에티오피아 정부가 지속적인 지원 요청을 해옴에 따라 관개 시설을 유지, 관리하고 저수지를 신규 구축하는 2차 사업이 2016년 시작돼 올해까지 완료될 예정이다. 이 밖에 농림축산식품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가 연계해 우즈베키스탄에 저장유통 시설 유리온실 등을 지어주는 K시설농업 지원, 베트남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가축질병 진단 기술 전수 등도 ODA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상만 농식품부 국제협력국장은 “우리나라는 한 세대 만에 식량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발전한 유일한 모범 국가”라며 “앞으로도 유엔의 기아종식(zero hunger) 목표 달성을 위해 개도국에 대한 식량원조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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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을 깨우자 ‘우오크’ 운동…공정에 대한 편협한 집착? 다양성 장려?[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Woke.’ 미국인들이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발음도 쉬워서 여기저기서 “우오크”라는 소리가 자주 들립니다. ‘Wake(깨우다)’의 과거형으로 ‘깨어있는’ ‘정신을 차린’ 정도의 뜻이 되겠죠. 미국은 ‘정치적 올바름(PC)’ 정신이 크게 발달한 나라입니다. 소수 약자에 대한 편견을 삼가자는 것이지요. 우오크는 PC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생긴지 1,2년 밖에 안 된 신조어지만 벌써 미국인의 일상 대화 속에 많이 침투했습니다. “저 사람 참 우오크해” “그 드라마 우오크하지”라고 하죠. 우오크 열풍이 가장 뜨겁게 부는 곳은 문화와 교육 현장입니다. 문화 쪽에서는 월트 디즈니 영화사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디즈니라고 하면 오랫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Happiest Place on Earth)’이라고 불려왔던 기업입니다. 그런데 요즘 별명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어있는 곳(Wokest Place on Earth).’지난해 말부터 디즈니는 자사가 제작했던 ‘알라딘’ ‘피터팬’ ‘인어공주’ ‘덤보’ ‘판타지아’ 등의 명작 만화영화 도입부에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다”는 경고문을 부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수 그룹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등장 인물 이름이나 내용도 전체 스토리라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손을 봤습니다. 최근에는 사내 의식 개혁 운동에 돌입했습니다. ‘미래를 다시 그리자’라는 제목의 캠페인은 다양한 세미나, 집단 토의, 가이드북 배포 등을 통해 직장 내 차별 관행, 특히 인종적 차별을 뿌리 뽑자는 것입니다. 최근 일부 언론에 보도된 22쪽짜리 캠페인 교재 자료에는 “당신의 서재를 탈식민지화하라” “지역 흑인운동 단체에 기부하라” “경찰 해체 운동을 포용하라” 등 미키마우스 왕국에서는 보기 힘든 운동권 용어들로 장식돼 있습니다. 인종차별주의는 일상 생활에 고착화된 만큼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전투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재에 따르면 직원 간의 대화에서 “평등(equality)” 대신 “공정(equity)”이라는 단어를 쓰라고 합니다. 과정을 중시하는 평등보다 결과로서의 공정에 더 무게를 둬야 한다는 뜻입니다. 흑인 동료 직원과의 공감대 형성 대화법도 나와 있습니다. 인종 차별 경험 얘기를 들었을 때 “섣불리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 네 기분 알겠어” 보다 “잘 들었어. 더 말해줘”라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기득권 체감 정도를 알아보는 자가 체크리스트도 있습니다. “나는 백인이다” “이성애자다” “남성이다” 등 기본 인적 사항에서부터 “나는 대중 교통을 이용해본 적이 없다” “성폭행을 당해본 적이 없다” “테러리스트라고 불려본 적이 없다” 등 상세한 개인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 문항도 있습니다. 체크된 문항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반성이 필요한 기득권 그룹으로 분류됩니다. 디즈니 직원들에 따르면 의식 개혁 캠페인은 “최근 몇 개월간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거의 매일 주의 사항 메모, 추천도서 목록, 패널, 세미나 등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기본 강의 코스는 전 직원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고강도 토론과 독후감 발표 등은 선택적 참여가 가능합니다. 외부 시선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왜 지금 대규모 인종 다양성 운동을 전개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 직원들의 이해를 구하지 않아 자발적 참여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죠. 오랫동안 디즈니 왕국을 이끌다가 지난해 말 물러난 밥 아이거 전 CEO의 “퇴임 작품”이라는 얘기도 나옵니다.논란에도 불구하고 우오크 열풍에 동참한 곳은 디즈니뿐만이 아닙니다. 교육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오크 운동은 초등학교에서 가장 활발하게 벌어집니다. 인종 차별 정신은 어린시절에 굳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워싱턴 주의 체리크레스트 초등학교는 인종 문제를 토론하는 학생회의를 매월 개최합니다. 또한 ‘인종 차별에 대항하는 학생연합(SOAR)’라는 조직을 만들어 9~11세 학생들이 학교 차원의 인종 차별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합니다. 캘리포니아 주의 메이어홀츠 초등학교 3학년생들은 자신의 인종 경제 수준 종교 성별 가족 관계 등에 기초해 ‘신분 지도’를 만듭니다. 교사는 “우리는 백인 기독교 남성 위주의 지배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신분 지도’와 지배 문화의 특성을 서로 매칭시키면서 토론하는 훈련을 진행합니다. 일리노이 주 록우드의 초등학교 5학년생들은 최근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 운동’의 설립자의 연설문을 읽어오라는 숙제를 받았습니다. 연설문에는 “시위가 세상의 새로운 규칙이다. 권력이 없는 자들은 시위를 통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의 한 초등학교는 4학년생들에게 “성적 취향” 같은 단어들을 가르치고 타인을 부를 때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립적 호칭을 붙이도록 교육합니다.최근 뉴욕 사립학교 ‘브리얼리’의 한 학부모는 딸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겠다고 학교 측에 통보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학교는 캐럴라인 케네디 등 유명 동문을 배출한 연 학비 5만6000달러(약 6300만원)의 뉴욕 명문 학교입니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학부모의 편지에 따르면 이 학교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매달 인종 관련 강의를 의무적으로 듣게 하고,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BLM 운동과 마르크스 사상을 옹호하는 커리큘럼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또한 선생님들이 “공정” “다양성” “포용” 같은 단어들을 마치 직업 운동가들처럼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면 “(개인의 자유가 말살된) 중국 문화혁명 시대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합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미국이 많이 변했습니다. 사회적 약자 보호, 공정, 다양성 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에 독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한때 매우 ‘힙’하게 들렸지만 지금 ‘우오크’는 ‘취소 문화(cancel culture)’처럼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 단어가 돼가고 있습니다. 고삐 풀린 ‘깨어 있음’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미국의 우오크가 보여줍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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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는 이뤄졌다” 빈라덴 사살 그날, 백악관에선 무슨 일이…[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정의는 이뤄졌다.” 10년 전 이맘때쯤입니다. 2011년 5월 1일은 미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9·11테러를 일으킨 장본인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된 날입니다. 이날 한밤중 백악관 단상에 오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정의라는 말로 대(對)국민 성명을 끝맺습니다. 빈라덴 제거 작전에 대한 언론 보도는 많이 나왔습니다. 책도 여러 권 출간됐고, ‘제로 다크 서티’ 같은 영화도 있죠. 대부분 작전에 투입된 특수부대원이나 현장 요원들의 무용담에 관한 것입니다. 반면 ‘컨트롤타워’에 해당하는 백악관 깊은 곳에서 언제, 어떻게, 어떤 결정이 이뤄졌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최근 빈라덴 사살 10주년을 맞아 정부 당국자 증언, 관련 블로그 등을 통해 당시 비화들이 상당 부분 공개되고 있습니다. 빈라덴 작전 개시 1개월 전쯤인 2011년 3월 29일 백악관 회의가 분수령이었습니다. 이날 정보 기밀을 다루는 500평방미터의 시츄에이션룸에 국가안보 각료들이 모였습니다. 시츄에이션룸에서 24시간 돌아가는 카메라까지 끄고 열릴 정도의 극비 회의였죠. 각자 책상 위에는 두툼한 브리핑 북이 놓여있었습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A), CIA(중앙정보국), NGIA(지리정보국) 요원들이 1년 넘게 발로 뛰고 위성 사진을 판독해 모은 빈라덴 은신처 자료였습니다. 조 바이든 부통령,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등은 이날 처음으로 빈라덴 추적 브리핑을 받았습니다. 회의명은 ‘미키마우스 미팅.’ 회의명을 알리지 않으면 다른 백악관 직원들이 이상하게 여길까봐 존 브레넌 백악관 국가안보·대테러 보좌관이 급조해낸 이름이었습니다. 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목표 장소를 “AC원”이라고 지칭합니다. 파키스탄 외곽에 있는 ‘아보타바드 목표물(Abbottabad Compound One)’의 약자죠. 그는 장관들에게 “다음 회의 때까지 제거 작전에 대한 찬반 의견을 내달라”고 합니다. 급습할 경우 수반되는 여러 외교적 문제를 고려해 ‘예스’ 또는 ‘노’ 의견을 제시해 달라는 것입니다. 장관들이 ‘숙제’를 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리허설’이 펼쳐집니다. 특수부대원들이 오바마 대통령의 지시로 비밀 장소에 모여 3주간에 걸쳐 작전 실행 모의 연습을 합니다. 이들은 막 아프가니스탄 임무를 끝내고 귀국해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죠. 처음에는 왜 소집 명령이 떨어졌는지 모르다가 “이건 훈련이 아니다. 우리 목표는 빈라덴이다”라는 지휘관의 한마디로 분위기는 싹 바뀝니다. 파키스탄 레이더망을 피해 언제 헬기를 띄울 것인지, 착륙 때 소음은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에서부터 목표물 16km 내에 위치한 파키스탄 핵시설에 충격을 줄이는 방법, 요원들의 건물 진입 때 가려줄 나무 위치까지 세밀한 시나리오가 완성됩니다. 작전에 동원되는 무기가 파키스탄 정부나 중국의 손에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재빨리 수거하는 훈련도 이뤄집니다.4월 27일 2차 회의가 열립니다. 첫 발언권을 가진 게이츠 국방장관은 “노” 의견을 냅니다.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구출 실패가 지미 카터 행정부의 종말을 고(告)했다는 점을 주지시키죠. 다음에 나선 힐러리 국무장관은 파키스탄과의 외교 마찰에 대한 긴 설명을 시작해 “노”인가 싶었는데, “이번만큼 확실한 정보는 없다”면서 “예스”로 마무리합니다. 바이든 부통령은 실패할 경우 오바마 재선에 미칠 영향과 파키스탄과의 관계를 들어 “노”쪽으로 기웁니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은 선의의 비판자인 ‘데블스 애드버킷’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실질적으로 찬성 내지 중립 태도를 보입니다. 실패 가능성이 적지 않은 공격이었던 만큼 찬성률은 40~80%였습니다. 반대론자들은 빈라덴이 은신처를 계속 옮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지도 모르는데 ‘AC원’을 공격해 망신을 자초하지 말자는 것이었죠. 장관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지자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는 어차피 50대 50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시간만 흐를 뿐이다”며 상황 정리에 나섭니다. 모든 의견을 수렴해 닷새 후인 5월 2일까지 최종 판단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합시다(It‘s a go).” 예상을 깨고 오바마 대통령은 이틀 후인 29일 아침 7시 30분 공격 재가를 내립니다. 옷은 점퍼 차림. 이날 예정된 앨라배마 주 태풍 피해지 방문, 플로리다 주 우주왕복선 엔데버호 발사 참관을 위해 백악관을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미국 최대의 적을 제거하는 작전을 벌이는 것인데 마치 자잘한 지시를 내리는 것처럼 국가안보보좌관 등 몇 명에게 서서 얘기하고 외출합니다. 결정은 신중하게 내리고,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 오바마 스타일입니다.공격 예정일은 5월 1일로 정해집니다. 바로 전날은 백악관기자단 연례만찬(WHCD)이 열리는 날이었죠. 만찬은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서 유머 보따리를 풀어놓는 날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유머 주제를 선정하는 작업과 빈라덴 사살 계획을 동시에 진행합니다. 유머 주제는 ’버서 운동‘(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국적이 아닌 아프리카 케냐 출신이라 피선거권이 없다는 주장)을 TV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에 빗대 조롱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만찬에 버서 운동의 주모자이자 ’어프렌티스‘ 진행자인 도널드 트럼프 부부가 참석하기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죠. 오바마 대통령은 여유롭게 유머를 소화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듭니다. 한방 먹은 트럼프는 분노한 얼굴이 됩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바탕 청중을 웃긴 뒤 “신이시여, 우리 군을 보호 하소서”라는 진지한 대사로 마무리합니다. 당초 연설문에는 없는 문구였지만 만찬 시작 1시간 전에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추가됐습니다. 다음날 예정된 군 작전을 염두에 둔 것이겠죠. 공격일 백악관 앞에 이색 풍경이 펼쳐집니다. 일요일인데도 장관들을 태운 세단들이 백악관에 줄지어 들어옵니다. 시츄에이션룸에 아침 일찍 집결한 이들을 위해 요기 거리를 사오려 하지만 건강을 생각해 인근 코스트코에서 샐러드가 공수됩니다. “왜 샐러드냐”라는 장관들의 불만이 이어지자 피자도 주문합니다. 각료 모임이라기보다 대학 동아리 파티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지휘센터는 3곳. 시츄에이션룸, 버지니아 근교 랭글리의 CIA 본부, 아프가니스탄의 미군기지입니다. 오후까지 오바마 대통령은 골프도 치러 가고 카드 게임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지나치게 작전에 생각을 골몰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죠. 미 동부 시간 오후 3시 30분 작전이 개시됩니다. 목표물 앞마당에 특수부대원들을 태운 헬기가 착륙합니다. 1대는 빈라덴 호위대의 총격으로 부서집니다. 건물에 진입한 대원들은 빈라덴이 은거한 3층에 진입합니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신과 나라를 위해, 제로니모 제로니모 제로니모” 무전이 들려옵니다. ’제로니모‘는 빈라덴 제거 완료 암호명입니다. 아프간 기지에 작전을 진두지휘한 윌리엄 크레이븐 합동특수작전사령부(JSOC) 총사령관은 “제로니모 에키아(EKIA)?”라고 물으며 재차 확인합니다. “적은 사살됐나?(Enemy Killed in Action?)”라는 뜻이죠. “예스. 제로니모 에키아”라는 대답에 백악관, 랭글리, 아프간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당초 공격 과정을 시츄에이션룸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지켜볼 예정이던 오바마 대통령은 바로 옆에 마련된 작은 방으로 옮깁니다. 장관들도 대통령을 따라갑니다. JSOC의 브래드 웹 장군이 공격 현지에서 위성을 받아 시츄에이션룸 모니터로 송출하는 방이었죠. 그의 이름을 따서 ’웹룸‘으로 불렸습니다. 시츄에이션룸 모니터가 갑자기 고장 나 모두 웹룸에 몰려와 어깨를 맞대고 작은 모니터를 들여다봅니다. 유명한 사진이죠. 웹 장군은 대통령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려 하지만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은 당신”이라는 대통령은 고개를 흔듭니다. 공격에서 철수까지 48분이 걸립니다. 공격은 전광석화처럼 이뤄졌지만, 시신을 비닐로 말아 포장한 뒤 착륙할 때 파손된 헬기 잔해를 수습해 나오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착륙 당시 소음으로 인근 주민들이 눈치를 챘기 때문에 아프간기지의 크레이븐 총사령관은 몸이 달아오릅니다. 작전 개시 후 45분쯤 지나자 대원들에게 “하던 일 모두 스톱. 빨리 짐 싸들고 철수”를 지시합니다. 아프간기지에서 포장을 풀자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나옵니다. 얼굴 정면에 총격을 받아 식별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우선 키를 통해 가늠해 봅니다. 빈라덴의 키가 6.4피트(195cm)인 것을 알고 있는 크레이븐 총사령관은 6.2피트(189cm) 키의 한 대원에게 “시신 옆에 한번 누워보라”고 즉석에서 지시를 내립니다. 좀 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빈라덴의 귀를 통한 ’95% 본인 확인‘ 판정을 받습니다. 파키스탄 군부는 현장에 즉시 조사 인력을 파견해 사살된 인물이 빈라덴임을 확인합니다. 작전이 성공해 미국이 시신을 가지고 사라진 만큼 외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축하한다”는 의사를 전해옵니다. 파키스탄의 암묵적 지지를 받았으니 미국은 공식 발표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죠. 오바마 대통령은 조지 W 부시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 등 6명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빈라덴 사살을 알립니다. 발표문 준비를 거쳐 오후 11시35분 오바마 대통령의 대국민 성명으로 긴 하루가 마무리됩니다.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부하들의 충고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여러 의견을 종합해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하고, 이를 근거로 신속하게 최종 판단을 내려야 한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아랫사람에게라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리더의 조건‘입니다. 빈라덴을 잡기 위해 2년여에 걸친 치밀한 작전 수립과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준 오바마 전 대통령이야말로 리더십의 표본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읍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 202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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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킴 카다시안 트랜스젠더 父의 주지사 도전…당선 가능성은?[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미국은 연예인의 정계 진출이 매우 드문데요, 우리 나라는 선거 때마다 연예인들이 정계 러브 콜을 받고 ‘금배지’를 다는 성공 사례가 꽤 있는 것과는 달리 미국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워싱턴행이 가뭄에 콩 나듯 이뤄집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에서 연예인은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럼없이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 있고, 대중도 그런 소신파 연예인을 좋아하니까 굳이 정치에 뛰어들 필요를 못 느끼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민이 많이 사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마를 선언한 케이틀린 제너(72)가 눈길을 끕니다. 그녀는 최근 트위터에 주지사 출마신청서 사본과 함께 “출마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적극 후원해주세요”라고 올렸습니다. 제너는 올림픽 육상 금메달 리스트 출신으로 4년 전 성전환 수술을 해 남성에서 여성이 된 인물입니다. 미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셀러브리티 킴 카다시안의 어머니 크리스 제너와 결혼했다가 2015년 여성 선언과 함께 이혼했죠. 원래 이름은 브루스 제너입니다. 화제성으로 본다면 제너의 출마는 2003년 정치인으로 변신했던 영화 ‘터미네이터’의 주인공 아놀드 슈왈제네거 이후 가장 주목을 받습니다. 슈왈제네거가 출마했던 곳 역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습니다. 슈왈제네거는 유럽 이민자, 제너는 성적 소수자( LGBT)라는 ‘소수그룹’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민주당 주지사가 무능 논란으로 탄핵 대상이 되면서 그 후임 자리에 도전하는 공화당 출마자라는 것도 겹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접점은 여기까지. 슈왈제네거 출마 때부터 ‘거버네이터’<거버너(주지사)와 터미네이터의 합성어>로 불리며 높은 당선 가능성이 점쳐졌던 것과는 달리 제너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흥행 요소는 될 수 있어도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왜 슈왈제네거는 되고, 제너는 안 되는 것일까요. 가장 큰 차이점은 슈왈제네거는 준비된 후보였고, 제너는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슈왈제네거는 촌스러운 영어 사투리를 구사하는 ‘무식한 근육남’ 이미지가 강했지만 정계 진출을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고, 그런 포부를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습니다. 케네디 가문 출신의 방송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결혼하며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데 성공했죠. 보디 빌딩 ‘미스터 올림피아’ 7회 우승이라는 유명세를 적극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함도 가졌습니다. ‘터미네이터’ 이후 인기가 절정이던 시절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조직했던 스포츠건강영양위원회(PCSPF)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PCSPF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처음 만들어진 유서 깊은 대통령 직속 생활체육 장려 기관입니다. 이후 부시 대통령과 미국 전역을 돌며 건강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장모이자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여동생인 유니스 슈라이버가 조직위원장으로 있던 장애인 스페셜올림픽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캘리포니아 주민투표에서 통과된 방과후 체육활동 기금 조성을 위한 ‘제안49호’의 발의자로 나서기도 했죠. 물론 케네디가의 후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지만 발로 뛰면서 캘리포니아 지역 정치에 터를 닦은 것이죠.반면 제너는 너무 조용합니다. 처음 자신을 “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이라고 공개했던 2015년 무렵 LGBT 운동의 지도자, 또는 얼굴 마담 정도는 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이후 뚜렷한 공개 활동이 없습니다. 자신을 공화당 지지자라고 밝히고 있지만 정치자금 후원 실적도 없고 모금 활동을 벌인 적도 없습니다. 캘리포니아 정치에 얼굴을 알릴 수 있도록 어젠다를 제시한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 자질뿐 아니라 정치 환경도 다릅니다. 슈왈제네거가 대단했던 것은 민주당 출신 주지사만을 줄줄이 배출해온 캘리포니아에서 공화당으로 출마해 당선됐기 때문이었습니다. 2003년 그가 출마를 선언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훌륭한 주지사감”이라며 치켜세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부시 대통령의 인기가 9·11 테러 이후 정점을 찍었던 때였죠. 인기 있는 공화당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며 출마한 덕분에 슈왈제네거의 당선 가능성은 높았습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라면 이를 가는 캘리포니아에서 제너는 “트럼프 지지자이며 지난 대선 때 그를 찍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선 캠페인에서 몇몇 유명 선거 전략가를 모셔오기까지 했으니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그를 차갑게 바라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화당에서 제너만 출마하는 것은 아닙니다. 10월 내지 11월로 예정된 선거에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후보가 출마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너를 비롯한 많은 후보들이 난립하면서 이번 선거는 주민소환 제도의 유용성에 대한 논란을 낳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주 헌법에 따라 무능하고 부패한 선출직 공무원을 소환(탄핵) 대상으로 삼는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30~35개 주가 소환 제도를 도입하고 있죠. 가장 활발한 곳은 캘리포니아로 1970년대 이후 모든 주지사가 소환투표 시험대에 오르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기업가 출신으로 최연소 샌프란시스코 시장, 부지사 등을 거쳐 2019년 초 주지사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임기 4년의 자리를 절반도 채우지 못했지만 지난해 여름부터 그에 대한 소환 운동이 불붙었습니다. 원인은 주지사가 내건 강력한 방역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마스크 착용 의무화는 물론 음식점 및 상점 실내 운영 금지, 밤 10시 이후 통행금지령 등에 지친 일부 주민들을 중심으로 주지사 축출을 위한 소환 운동에 돌입했습니다. 엄격 방역에도 불구하고 올 1월 인구 4000만 명에 육박하는 캘리포니아의 코로나19 누적 환자 수가 50개 주중 처음으로 300만 명을 돌파하면서 민심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주민 불만에 직접 불을 댕긴 것은 뉴섬 주지사가 지난해 11월 방역 수칙을 어기고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열린 로비스트 생일 파티에 참석한 것이 들통 났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야외 파티여서 괜찮다”고 해명했다가 “뉴섬 일행이 너무 시끄럽게 놀아서 야외 출입문을 닫아 사실상 실내 파티가 됐다”는 종업원 증언이 나오면서 두 배로 욕을 먹었습니다. 캘리포니아주 헌법상 주지사 소환을 위한 주민 투표를 벌이려면 150만 명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이 정도의 서명은 당원들을 동원하면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죠. 서명 제출 시한은 지난달 17일로 마감됐고, 현재 서명 확인 과정을 거쳐 29일 소환 투표를 벌일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입니다. 공화당 측은 200여만 명의 서명을 모았다고 주장하고 있어 투표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환 투표에서 유권자는 2개의 질문에 답하게 됩니다. 우선 주지사 재신임 여부를 묻고, 다음으로 주지사를 대체할 후보를 선택하게 됩니다. 불신임 쪽 표가 과반수를 넘으면 출마자 중 최다 득표자가 당선됩니다. 최근 캘리포니아 여론 조사에 따르면 소환 반대가 우세합니다. ‘내로남불’ 사건이 리더십에 큰 타격이 되기는 했지만 강력 방역 자체를 부실 행정으로 볼 수는 없다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부패한 정치인을 탄핵하려는 목적으로 도입된 소환투표가 지나치게 남발되고 있다는 비판이 더 들끓고 있습니다. 소환투표 덕분에 당선된 슈왈제네거 역시 재임 기간동안 소환 대상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번 주지사 선거는 제너의 당선 여부보다는 소환 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 듯 합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 202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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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찌 장갑의 철주먹’ 펠로시가 트럼프 연설 원고 찢은 까닭[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메모를 하려는데 펜이 없더군요. 그래서 메모를 하려던 부분을 조금씩 찢어내기 시작했죠. 나중에는 아예 원고를 찢어버리기로 했습니다.”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 연설이 끝나자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81)이 뒤쪽에서 연설 원고를 찢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연설 시작 때 트럼프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의 악수를 청하는 손을 거절한데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유력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의 문서를 찢은 것은 위법 행위”라며 노발대발(怒發大發)했습니다. 공화당은 “의회 차원에서 꾸짖어야 한다”며 징계결의안을 상정하기 위해 표를 모으는 등 부산을 떨었습니다. 펠로시 의장은 논란이 분분한 상황에서 아무 해명도 하지 않았죠.최근 출간된 펠로시 의장의 전기 ‘마담 스피커: 낸시 펠로시와 권력의 교훈’에 따르면 원고를 찢은 것은 “단지 펜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트럼프 리더십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졌지만 사실 자신의 행위는 “악의가 없었다”는 것이죠. 원고를 읽다가 체크해 둘 부분이 있어 펜을 찾았으나 마침 의장석 책상에는 펜이 없었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그 부분을 찢어내기로 했다죠. 미국 사람들이 곧잘 하는 방법입니다. 나중에는 하도 찢어낸 부분이 많아 원고가 너덜너덜해지자 “아예 찢어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펠로시 의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모든 소동은 ‘펜이 어디 있지?’라는 의문에서 시작됐다”며 웃었다고 합니다. 대통령 면전에서 연설 원고를 찢은 이유가 ‘펜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비판가들의 주장대로 ‘대통령과의 갈등 때문’인지는 펠로시 의장 본인만이 알겠죠. 어쨌든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전기에는 앙숙 사이라는 펠로시-트럼프 관계에 대한 숨겨진 일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USA투데이 워싱턴지국장인 수전 페이지 기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팬데믹 와중에 펠로시 의장을 10회 이상 만났고, 주변 인물 100여명을 인터뷰했으며, 또한 과거 서류도 샅샅이 뒤졌다고 합니다. 책에는 펠로시 의장이 40대 후반에 정계에 뛰어든 사연, 여러 대통령들과의 관계, 미국 정치를 호령하는 여성 리더가 될 수 있었던 비결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구찌 장갑을 낀 철주먹.” 미국 정가에서 펠로시 의장을 이렇게 부릅니다. 그녀는 의회 재산 조사에서 언제나 ‘톱10’에 드는 부호(富豪) 정치인입니다. 2015년 기준으로 3000만 달러(335억 원)를 넘나들죠. 옷과 장신구 모두 명품으로 도배합니다. ‘낮은 곳을 향하는’ 민주당 정치인으로 거대한 부를 갖췄으면 뒷소리가 나오기 쉽지만, 그녀는 좀처럼 욕을 먹지 않습니다.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공의 덫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투지에 불타는 ‘전투력 갑(甲)’ 정치인이죠. 뿐만 아니라 미국은 정치인의 개인적인 재산 축적과 능력은 별개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아버지는 필라델피아 하원의원과 3선의 볼티모어 시장을 거친 유명한 정치가였습니다. 전업 주부였던 어머니는 ‘얼굴 스팀 가습기’ 등의 특허를 출원했을 정도로 아이디어가 넘치는 여성이었죠. 펠로시 의장은 아들 5명 뒤에 낳은 막내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활동적인 부모님과 많은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소극적 성격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거대한 와인 사업과 투자 전문가로 일하는 남편을 뒀습니다. 4녀 1남을 키운 그녀는 막내딸이 17살이 되는 198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전국적인 정치 무대에 등장합니다. 개인적 야망과 탄탄한 가문 출신, ‘리버럴의 성지’로 불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운 정치 감각으로 그녀는 차근차근 성공 계단을 밟아갔습니다. 2001년 여성 최초의 민주당 원내총무가 됐고, 이듬해 원내대표에 당선됐습니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하원의장에 당선됐습니다. 2007년 신년 국정연설 때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으로 자신의 뒷자리에 앉은 그녀를 소개하며 “이 단어로 연설을 시작하는 대통령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마담 스피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정치 속어에 “소시지를 잘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펠로시 의장이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죠. 그녀의 지론에 따르면 “잘 싸우기만 하는 정치인은 많다. 하지만 유권자의 표를 얻어 당선됐다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치권이나 여론의 회의적인 시선을 이겨내고 힘든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명수로 통합니다. 당적은 달랐지만 부시 전 대통령을 도와 대기업 구제금융 법안을 밀어붙였습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는 그녀의 지원이 있었기에 ‘오바마 케어’로 불리는 의료보험개혁안 통과가 가능했죠.하지만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민주당 내부에서 “펠로시는 이제 내려와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2016년 정계 은퇴를 고려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오히려 전투력을 불사르는 계기가 됐습니다. 펠로시 의장은 트럼프 당선 후 먼저 축하 전화를 걸어 “곧 있을 의회 여성코커스(CCWI)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잠깐 기다려봐, 딸 바꿔줄게”하더니 이방카에게 전화를 넘겼다고 합니다. 펠로시 의장은 “대통령은 여성 비하적이고, 경력이라고는 트럼프 기업에서 일했던 것이 전부였던 대통령의 35세 딸이 한바탕 늘어놓는 보육정책의 방향에 대해 들어야 했다. 아직은 그만둬야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미국인들의 뇌리에 뚜렷하게 남은 정치 명장면이 있습니다. 2018년 12월 백악관 집무실을 걸어 내려오는 펠로시 의장의 모습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 지도부에게 미국-멕시코 국경장벽 설치 법안 통과를 종용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지만 1시간도 안 돼 이를 박차고 나오는 길이었죠. 당당한 발걸음, 얼굴의 미소, 멋진 패션 등과 어우러져 “펠로시표 정치의 정수를 보여줬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초기였다면 대통령 면전에서 퇴장하는 배짱을 보이는 것이 힘들었겠지만, 직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 다수당 확보에 성공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진정한 대적 상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미친 낸시”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갑옷을 입어라. 격투용 너클을 손마디에 끼워라. 아침식사로 손톱을 먹어라(‘정신을 집중하라’는 의미의 속담). 이제 출정하라. 부모의 품에서 아이들을 뺏고, 아이들의 입에서 음식을 뺏는 적들을 물리쳐라.” 펠로시 의장은 전기 출간을 위한 인터뷰를 중세 전쟁 영웅들의 무용담 구절로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80대 할머니의 승부사 기질이 여실히 드러나죠. 물론 정치 서열상 더 높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탄생했지만 온전히 자기의 결단성과 추진력으로 현재의 위치를 얻은 펠로시 의장과는 비교하기 힘들죠. 아무래도 펠로시를 능가하는 여성 리더가 나오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듯 합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 202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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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NC+’로 미래 4차산업 전문가 키운다

    “링크플러스(LINC+·전문대 사회맞춤형학과 중점형 사업)를 통해 학교에서 경험하기 힘든 반도체 공정 실습 기회를 기업 현장에서 익힌 것이 저의 ‘무기’였습니다.” 경기 대림대 반도체장비전공학과 출신의 정대환 씨는 졸업과 함께 반도체장비 생산 회사 SENS에 입사했다. 많은 친구들이 그를 부러워했다. 정 씨는 자신의 취업 성공 비결을 “LINC+ 반도체장비반을 수료한 덕분”이라고 소개했다. 팬데믹 여파로 청년층 취업문이 더욱 좁아진 반면에 반도체 같은 유망 산업은 구인난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인력이 급해도 대학 졸업생을 데려와 곧바로 현장에 투입하지는 않는다. 신입사원을 채용해 적지 않은 실습 기간을 거쳐야 한다. 실습 기회를 대학 재학 동안 제공하는 것이 전문대 LINC+ 사업이다. 2017년 시작된 이 사업은 대학과 기업이 공동 운영한다. 교육부의 대표적인 산학협력 프로그램으로 실적도 좋다. 2017∼2018년 교육부의 176개 일자리 관련 사업 평가에서 3개 사업만이 선정된 최우수 ‘S’ 등급에 포함됐다. 2017년부터 올해까지 3500여 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기업은 교재 개발부터 강사 파견까지 자신들의 맞춤형 수요에 맞춰 진행한다.올해 전국에서 40개 전문대가 ‘협약반’으로 불리는 사회맞춤형 학과를 개설하고 있다. 전국 5개 권역별로 진행된다. 협약반 수강을 위한 별도 수업료는 없다. 반도체를 비롯해 자동차, 정보통신, 의료 보건 등 15개 분야에서 2017년부터 지금까지 394개 협약반이 개설됐다. 반도체 및 정보통신 분야가 남학생의 관심사라면 여학생은 치위생사, 유아교육 등에 몰린다. 기업명을 내걸고 협약 회사에 대해 자세히 가르치는 과정도 있다. 지난해 오산대(수도권)의 아모레퍼시픽반, 경민대(수도권)의 할리스에프앤비 직무협약반, 신성대(충청강원권)의 신세계 베이커리특별반 등이 운영됐다. 학생 입장에서 매력은 채용 연계성에 있다. 물론 수료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취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은 자신이 공을 들여 키운 인재를 채용할 확률이 높다. 사업에 참여한 대학과 기업은 매년 협의를 거쳐 협약반을 운영할 때 수료 인원을 대상으로 ‘채용 약정’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수료생은 “채용 약정이 돼 있는 과목은 수강 지원자들의 경쟁이 치열하다”고 귀띔했다. 경기 오산대의 반도체장비반은 LB세미콘을 포함한 18개 기업과 공동으로 15주간 집중학기제를 운영하고 있다. 협약 회사의 실무자가 주 4일 하루 6시간씩 집중 실습을 하는 ‘하드 트레이닝’이다. 주 1일 멘토링과 현장 견학도 이뤄진다. 이후 협약 회사로 4주간 현장 파견 실습을 나간다. 집중학기제 등의 산학협력 교육과정 덕분에 오산대 협약반의 취업률은 96%에 이른다. 해외 경력을 쌓을 수도 있다. 동남권 연암공대는 LG화학 폴란드 전지생산법인과 협약을 맺고 지난해 전자전기 계열 등의 학과에서 15명을 선발했다. 상반기에 직무 기초 교육을 받고, 9월부터 3개월 동안 폴란드에서 생활하면서 현지 전문가의 지도를 받았다. 현지 파견에 앞서 1개월간 어학 교육도 받았다. 이 대학 관계자는 “수료 후 폴란드 현지법인 취업률 100%, 협약기업 만족도 100점을 달성했다”고 밝혔다. 호남제주권 조선이공대 컴퓨터보안과 출신인 장누가 씨는 재학 중 정보보안반 과정을 이수하며 각종 경진 대회에서 우수한 입상 성적을 보였다. 협약 기업인 가민정보시스템에 입사한 그는 지난해 자신이 배웠던 모교 정보보안반의 산업체 강사 자격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장 씨는 “열의에 찬 학생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나를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이상석 전문대 LINC+ 사회맞춤형학과 중점형 사업단 협의회장(부산과학기술대 부총장)은 “기업 수요맞춤형 인재를 키워 미래가 유망한 4차 산업혁명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힘쓰겠다”고 밝혔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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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여름 뜨겁게 달군 ‘BLM 운동’ 리더, 백인 부촌 입성 ‘시끌’[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미국의 부동산 시장은 한국과 많이 다릅니다. 신문을 펼쳐들면 ‘하우스 리스팅’ 섹션에 주요 매물 광고가 눈길을 잡죠. “창문을 열면 눈앞에 펼쳐진 청정 자연림. 운치 있는 대나무 바닥을 밟으며 하루를 시작하세요. 높은 천장은 확 트인 공간감을 보장합니다. 자동 창문 밖 야외 패티오에서 한 잔의 여유를 즐기셔도 좋습니다. 손님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도 마련돼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LA) 서쪽 토팡가캐년이라는 지역에서 매물로 나온 140만 달러(15억 7000만원)짜리 집의 광고입니다. 최근 이 집 잔디밭에 ‘팔렸다(Sold)’는 팻말이 나붙었습니다. 구매자가 눈길을 끕니다.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설립자인 흑인 여성 패트리스 쿨로스입니다. 쿨로스는 자신을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운동가”라고 소개합니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흑인에게 불리한 구조”라고 공공연히 말해왔죠.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 BLM 운동의 지향점은 “단순한 인권 운동이 아닌 사상 이데올로기 운동”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밀리언달러’ 저택 구매를 두고 뒷말이 무성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극우 보수층에서는 “BLM 사기극” “백인에게 영혼을 판 BLM 리더” 등의 조롱이 쏟아집니다. 쿨로스가 새로 집을 산 곳은 백인 지역입니다.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백인이 88%인 반면 흑인 가구는 1.8%에 불과합니다. 2018년 발간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된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는 새 집에서 자동자로 20분 거리인 LA 밴너이스의 빈곤 가정 출신입니다. 자서전에는 싱글 맘이었던 어머니가 자신을 포함한 자식 3명을 힘들게 키워낸 이야기가 실려 있죠. 그녀는 강연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문은 어긋나 제대로 닫히지 않고 인터콤은 달려 있지만 한번도 작동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회상했습니다. 물론 쿨로스의 백인 부촌(富村) 입성을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닙니다. 미국인들도 우리나라만큼 자수성가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특히 빈곤가 출신 흑인의 백인 사회 성공 스토리는 언론이 좋아하는 단골 소재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층 뿐 아니라 일반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쿨로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최근 BLM 운동이 권력 내분에 휩싸이며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BLM은 쿨로스, 알리샤 가자, 오팔 토메티 등 3명의 흑인 여성이 공동 설립한 사회운동 단체입니다.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 질식 사망 사건 이후 유명해졌지만 원래 2012년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이 히스패닉계 자경단원 조지 짐머만에게 사살되는 사건 이후 소셜 미디어에서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해시태그를 처음 선보였습니다. BLM은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10여개 군소 운동단체들을 ‘합병’하며 사회운동의 리더로 부각됐습니다. 이 사건의 정신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문구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가 각광을 받으면서 BLM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죠. 지난해 6월 퓨리서치 조사에서 미국인의 67%가 BLM 운동을 “지지한다” 또는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마이클 조던 등 스타들의 지지 메시지가 잇따르면서 BLM은 지난해 9000만 달러의 기부금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인종 차별 반대 시위 이후 BLM은 방향성을 잃었습니다. 강경 노선의 쿨로스와 달리 지역사회 운동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다른 공동 설립자 2명은 지난해 9월 BLM을 탈퇴하고 다른 단체를 차렸습니다. 단일 리더가 된 쿨로스는 BLM을 정치활동위원회(PAC) 단체로 등록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흑인 후보들을 밀겠다는 좋은 뜻도 있지만, 선거모금 단체인 PAC으로 등록되면 자금 운영 문제를 둘러싼 잡음이 나오기 십상이죠. 쿨로스는 강연 활동 비중이 커지더니 지난해 10월 워너브라더스 영화사와 지상파, 케이블, 스트리밍 등 다채널을 이용한 콘텐츠 개발을 위한 수백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기업과의 제휴 관계를 물색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1월 대선 후 쿨로스가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면담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때 BLM은 동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죠. 지난해 12월 BLM 지부들은 쿨로스를 포함한 본부 운영진에게 공개 서한을 발송했습니다. 이 서한에서 오클라호마 등 10개 지부는 “본부와 결별해 ‘BLM10’을 조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지부들은 동등한 발언권을 주겠다는 당초 본부 방침과는 달리 “자금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지역 활동가들은 자기 돈으로 교통비와 식비를 해결할 정도”라고 밝혔습니다. 쿨로스는 “내부적으로 대화를 통해 해결했다”고 밝힌 후 별다른 공개 활동을 보이지 않더니 이번에 LA 저택 구입으로 다시 화제가 된 것이죠.전문가들은 BLM 내분 사태에 대해 “외부 요인에 의해 집결된 대다수 사회 운동이 분열과 난립으로 막을 내리는 익숙한 과정을 밟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오마르 와소 프린스턴대 정치학 교수는 “특히 BLM 운동처럼 인종, 성별, 계급적으로 상이한 조직들이 협력할 경우 장기적인 결속력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지금 한쪽에서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목이 눌린 플로이드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에 대한 전문의와 경찰관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죠. 다른 한편에서는 플로이드 사건이 촉발시킨 BLM 운동권 리더의 ‘내로남불’ 스토리가 들려옵니다. 미국인들의 냉소주의와 정치 혐오증은 깊어만 갈 뿐입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 2021-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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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FDR도 LBJ도 아니지만…” 역사학도 바이든의 말, 무슨 뜻?[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역사 열공 모드.’ 요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대해 이런 평가가 나옵니다. 요즘 워싱턴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마련한 역사 스터디모임이 화제입니다. 지난달 초 비공개로 열렸던 역사학자들과의 회동이 바로 그것이죠. 임기 초 바쁜 대통령이 대면 모임을 거의 갖지 않는 백악관에서 2시간 동안 마스크를 쓰고 만난 것을 보면 대단한 행사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모임에서 ‘학생’ 바이든은 역사학자들이 풀어주는 역대 대통령 강의를 노트에 받아 적어가며 열심히 경청했다고 합니다. 백악관 스태프들이 일일이 음료를 서빙하는 것도 방해가 될까봐 아예 다과 테이블을 한쪽에 마련해 놓고 참석자들이 가져다 먹으면서 공부 삼매경 분위기였다고 하죠. 이 자리에는 우리나라에도 번역서들이 다수 출간된 저명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 마이클 베슐로스를 비롯해 아넷 고든 리드 하버드대 교수, 에디 글라우드 주니어 프린스턴대 교수, 조앤 프리먼 예일대 교수, ‘스티브 잡스’ 전기로 유명한 월터 아이작슨 아스펜연구소 회장 등이 참석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보인 바이든 대통령의 질문은 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린든 존슨 등 2명의 전임 대통령에게 집중됐습니다. 민주당 출신으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통령에 올랐다는 점이 바이든 대통령과 비슷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단발성 정책이 아닌 긴 안목의 시대정신을 제시한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루즈벨트 전 대통령은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 의회의 대통령 권한 최대 보장을 골자로 하는 ‘뉴딜’로 대공황을 이겨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롤모델로 유명하죠. 존슨 전 대통령 역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사망 후 혼란기에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라는 과감한 복지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대통령입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이들의 정책 추진 속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개혁적 아이디어가 부딪히기 쉬운 사회적 저항을 덜 받으려면 어느 정도의 속도를 내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2명의 전임 대통령에게서 찾으려는 것이지요. “나는 FDR(루즈벨트 대통령의 약칭)도, LBJ(존슨 대통령의 약칭)도 아니야. 하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역사학자들은 나중에 언론 인터뷰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꼽아달라고 질문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 한마디를 꼽았습니다. “나는 FDR, LBJ와는 다른 나만의 아이디어와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바이든 대통령의 고민은 대략 이런 것이겠죠. 이 말 속에는 단임 대통령으로서의 실적 부담감이 담겨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4년 재선 도전 여부에 대해 아직 확실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벌써부터 최고령 대통령으로서 그의 나이에 대한 다양한 조롱이 나도는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4년 후 80대 나이의 대통령을 뽑아줄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반면 극도의 혼란기였던 도널드 트럼프 시대와의 결별, 코로나19 등 바이든 대통령이 부딪힌 문제는 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난제들을 해결하려면 역사의 교훈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처럼 ‘꿈’을 외치는 이상주의 리더십이 아닌 정치의 생리를 아는 노련한 협상가 출신 대통령인 만큼 전임자들의 실적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바이든식 생존 비결이라고 할 수 있죠.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열린 첫 기자회견에서도 역사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긴 호흡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이슈를 바라봐야 한다”는 식으로 답했죠. 첫 질문자로 나선 AP통신 기자가 최근 미국-멕시코 국경을 물밀 듯 넘어오는 어린이 난민 문제에 대해 묻자 바이든 대통령은 “장기적인 문제다. 이민 문제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답했습니다. PBS 기자가 현재 의회에서 밀고 당기기 중인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규칙 개정에 대해 묻자 “내가 처음 상원의원이 됐던 120년 전부터 정치권의 논란거리였다”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많은 나이(79세)를 농담으로 삼은 것이지요. 그러면서 “1917년부터 1971년까지 58차례의 필리버스터 제한 시도가 있었다. 의원들은 기절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다른 의원들의 마라톤 발언을 들어야 하는 고충을 호소했다. 문제가 심각하다….” 이런 식의 답변이었습니다. 해당 이슈에 대한 역사적 배경 설명은 길게 이어진 반면 정작 기자들이 원하는 현재 정책 대응방향이나 당내 추진상황에 대한 답변은 거의 생략됐습니다. 재선 도전에 관한 질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스(Yes)냐 노(No)냐’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역사로 화제를 돌립니다. “당신 자식이나 손자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논문을 쓸 것이다. 단지 중국과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 기술 환경의 변화에 우리는 잘 적응할 수 있는가. 21세기는 민주주의와 독재주의가 대결하는 시대다. 우리는 과연 조상이 물려준 민주주의의 전통을 잘 이어가고 있는가….” 바이든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독재와 자신의 민주주의 시대를 비교하고 싶었던 듯하지만 재선 도전 여부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죠. 그래서 바이든의 첫 기자회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립니다. “보기 드문, 철학적인 대통령 회견이었다”는 의견과 “도통 무슨 얘기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주장이 맞섭니다. 역사학자 모임, 기자회견 등에서 보여준 역사학도로서의 바이든 대통령의 면모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나옵니다. 미국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트럼프 전 대통령에 비해 바이든 대통령이 보여준 해박한 역사 지식에 국민들은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너무 한가해 보인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역사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면 “위대한 리더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 위한 재창조 작업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나는 역사를 다시 쓰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배우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역사에 매진하는 이유야 어찌됐던 간에 우리나라는 바이든 대통령의 역사탐구 정신을 십분 활용해야 합니다. 북한 핵미사일,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주둔 등의 이슈를 두고 협상 테이블에 앉을 때 미국 역사를 거론하며 이해력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전략이겠죠. 바이든 대통령은 얼마나 역사공부에 푹 빠졌는지 역사학자들과의 2시간 회동이 끝난 뒤의 아쉬움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2시간은 내쳐 더 할 수 있었는데(I could have gone another two hours)….”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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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물놀이에 끌리고 한양도성에 푹… 푸른 눈의 한국문화 전도사

    “배 불리 얻어먹은 기억이 가장 많이 납니다.” 40여 년 전 미국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한국 땅을 밟은 오수잔나 대성그룹 고문(63)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그는 1980년 경남 사천보건소에 파견돼 결핵관리 요원으로 일했다. 한국이 막 근대화 작업을 마치고 ‘웬만큼 사는 나라’ 대열에 들어설 때였다. “집집마다 방문해 결핵약을 나눠주는 일을 했습니다. 손님이 오면 한 상 뚝딱 차려주시는 것이 시골 인심이죠. 보건소로 돌아갈 때가 되면 언제나 배가 빵빵해져 있었습니다.” 한국의 정에 푹 빠져 2년 임기 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줄곧 한국에서 살고 있는 오 고문을 최근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서 만났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재임 당시 프런티어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시작된 평화봉사단은 한국에서 1980년 그의 기수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중단됐다. 조지타운대에서 미국학을 전공한 뒤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경력을 쌓기 위해 평화봉사단에 자원했다. “한국 생활에 다 적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재래식 화장실은 ‘도전’이더군요. 그래서 언어 습득의 기회로 삼았죠. 한국말 메모장을 들고 쪼그리고 앉아 외웠더니 실력이 쑥쑥 늘었습니다. 다리는 저렸지만요. 하하.” “제가 한국에서 많이 받는 질문은 ‘왜 잘사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미국은 한국보다 앞서지만 문화는 국가 간 순위를 매길 수 없습니다. 저는 한국 문화가 좋았습니다.” 임기 후 우연히 관람하게 된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에 감동을 받고 놀이패 사무실에 무작정 출근하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졸랐다. 제자는 되지 못했지만 10여 년 동안 무대 뒤에서 해외담당 매니저로 활동했다. 오 고문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1980년대 초중반은 한국 사회에 민주화 열기가 가득한 때였다. 그 역시 최루탄을 뚫고 서울 신촌 대학가에 있는 놀이패 사무실에 오갔다. ‘굴레방 다리’로 불렸던 아현 고가도로가 자동차가 아닌 민주화 시위대로 인산인해가 된 모습도 목격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이뤄진다는 귀중한 ‘역사 공부’를 한국에서 하게 된 셈이죠.” 한국인 남성과 결혼했지만 이혼하는 아픔도 겪었다. 본명이 수잔나 샘스탁인 그는 당시 남편 성을 그대로 쓰고 있다. 자녀 2명을 혼자 힘으로 길러낸 싱글 맘인 그는 아이들을 외국인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일반 한국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글로벌 시민교육은 수준급입니다. 굳이 외국인 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지요.” 이후 남이섬 문화원장, 한국판 뉴스위크 편집위원 등을 거친 그는 외국인 모임에서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을 알게 되면서 그룹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세계에너지협회(WEC) 명예회장을 맡은 김 회장이 국제 무대에서 신재생 에너지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WEC 영국본부 등과 소통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오 고문은 아직도 평화봉사단을 매개로 한국과 미국을 이어주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코로나19 생존 박스’ 스토리의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한국 외교부 산하 국제교류재단은 역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마스크, 특산품 등을 넣은 ‘생존 박스’를 발송했다. 미국 쪽 평화봉사단 동문 모임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에서도 활동하는 그는 자문 자격으로 단원 주소를 수소문하는 일에서부터 박스에 넣은 물품 선정에까지 관여했다. “과거 미국이 한국을 도왔다면 이제는 한국이 미국을 도울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 일이라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끝없는 한국문화 탐험가인 그는 요즘 한양도성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2019년부터 주말에 짬을 내 한국청년연합(KYC)이 운영하는 한양도성 투어 프로그램의 유일한 외국인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어로 진행하는 해설가다. “조선 태조때 국민 20만명이 힘을 합쳐 무거운 돌을 나르고 쌓아 100여일 만에 1차 완성된 것이 한양도성입니다. 기획력과 협력심이 한국인의 DNA에 숨쉬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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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어줘도 OK” 플로리다 방역…주지사 인기도 ‘훨훨’[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누가 나보고 마스크도 안 썼다고 뭐라고 하던데 말이야. 아니 어떻게 마스크를 쓰고 승리의 건배주를 마시라는 거지. 우리 ‘벅스’(플로리다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약칭)가 이겼잖아. 하하.”이렇게 호탕하게 웃는 사람. 론 드산티스 미국 플로리다 주지사(공화당)입니다. 올해 전미프로미식축구(NFL) 결승전 슈퍼볼 경기가 지난달 플로리다 탬파 스타디움에서 열렸습니다. 드산티스 주지사가 마스크도 안 쓰고 로열석에서 관람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이 사진을 보고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슈퍼볼 같은 밀집 행사에서 마스크도 안 쓰고, 거기다 마스크 안 쓴 걸 자랑까지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즘 미국에서 그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100일 2억 명 완료’로 목표를 상향 조정할 만큼 빠르게 백신 접종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코로나19 퇴치에서 갈 길이 먼 미국입니다. 엄중한 팬데믹 상황에서 방역수칙이 느슨하기로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플로리다 주가 각종 코로나19 통계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다른 주들이 ‘죄고 또 죈다’ 노선을 표방할 때 “최대한 풀어라”고 외쳤던 드산티스 주지사가 요즘 큰소리 뻥뻥 치는 것도 당연합니다. 최근 언론 보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드산티스의 자유방임 도박, 성공을 거두다(CNN)” “죄었던 캘리포니아, 풀었던 플로리다. 왜 결과는 비슷한가?(AP통신)” “드산티스, 어떻게 코로나 전쟁에서 승리했나(폴리티코)” 등 그를 치켜세우는 제목의 기사가 홍수를 이룹니다. 드산티스 주지사는 코로나19 초기 때부터 “경제, 경제”를 외쳤습니다. 인구 2100만 명으로 캘리포니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플로리다는 관광수입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지요. 마스크 의무화 정책은 지난해 9월 일찌감치 폐지했습니다. 다른 주들이 마스크를 안 쓴 주민에게 벌금을 부과하지만 플로리다 정부는 “왜 오는 손님 내쫓느냐”며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는 상점에게 과태료를 매길 정도입니다. 학교도 정상등교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술집, 레스토랑 등 각종 유흥 시설과 관광 명소도 정상 운영됩니다. “(캘리포니아의) 디즈니랜드는 문이 닫혀있지만,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는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 주로 놀러오세요.” 플로리다의 관광 홍보 문구입니다. 플로리다는 캘리포니아와 자주 비교됩니다. 인구 많은 대형 주, 온화한 기후 조건, 중남미 이민자 고비율 등의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죠. 이 두개 주는 방역 스타일이 완전히 상반됩니다. 캘리포니아는 마스크 착용 의무화는 물론 상점의 실내 운영이 엄격히 제한되고 관광시설도 문을 닫는 등 초강력 방역주의입니다. 지난달 음식점 이용 제한이 부분적으로나마 풀리자 참고 참았던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외식하러 쏟아져 나오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죠. 반면 플로리다는 최대한 방역 규칙을 적게 만들며 자유방임을 내걸고 있습니다. ‘건강 문제는 다들 자신이 알아서 지킨다’는 것이 기본 철학이죠. 극과 극의 방역 원칙을 내걸었지만 결과는 비슷합니다. 주당 평균 수치를 내는 존스홉킨스대 보건안전센터 자료에 따르면 3월말 현재 감염자 수에서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는 10만 명당 9000명대로 비슷합니다. 전체 50개 주중에서 20~30위권을 오르내리고 있죠. ‘톱’은 노스다코타와 사우스다코타가 1만3000명 수준으로 각각 1,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당 사망자 수도 마찬가지입니다. 27일 현재 플로리다는 10만 명당 152명, 캘리포니아는 149명으로 각각 27위, 28위입니다. 사망자가 가장 많은 주는 뉴저지로 270명이 넘습니다. 물론 플로리다가 1등을 차지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유방임 정책으로 이 정도의 성적을 일궈냈다는 것은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플로리다 경제는 착실한 성장세를 보이며 4~5%대 실업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 미국 전체 실업률이 15%까지 치솟았다가 최근에야 8%대로 하락한 것과 비교되죠. 그 여세를 몰아 드산티스 주지사는 아직 ‘엄격 방역’을 밀고 나가는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 하루가 멀다 하고 규제 완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하늘 길만큼 뱃길도 열려야 한다”며 지난해 3월 내려졌던 유람선 운영 금지 규칙을 해제시켜달라는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주정부 통계에 따르면 매년 플로리다 항구들을 출발해 중남미를 여행하는 로열캐러비안, 카니발, 디즈니 등의 호화 유람선은 플로리다에서 15만 명의 고용과 80억 달러의 임금을 창출한다고 합니다. 드산티스 주지사가 이렇게 유람선 재개까지 챙기고 있을 때 “방역 리더십” 칭송을 받았던 다른 주지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초기에 거의 ‘영웅’ 대접을 받았던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잇단 성추문과 요양원의 코로나19 사망자 통계를 은폐했다는 의혹 때문에 정치 생명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아예 개빈 뉴섬 주지사의 초강력 방역 대책들이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며 축출을 위한 주민소환 투표를 벌이고 있습니다. 소환 투표 정족수인 150만 명 서명은 이미 도달했죠. 전문가들은 플로리다가 느슨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과학계에서도 “미스터리”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죠. 존스홉킨스대 연구에 따르면 규제 정도와 확진자 사망자 수를 단순 인과 관계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합니다. 수많은 중간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구역당 인구 밀집도, 다른 주로부터의 일시적 방문자, 미신고 불법 이민자, 습도와 풍속 같은 기후환경도 모두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코네티컷은 ‘강한 규제,’ 사우스다코타는 ‘약한 규제’라는 상반된 방역원칙에 불구하고 모두 ‘감염률 톱10’ 주에 꼽히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아직 확실히 규명되지는 않은 어떤 중간 변수가 플로리다의 우수한 실적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플로리다 시와 카운티 정부, 상점주 등은 주정부의 느슨한 방역 대책에 반발해 자율적으로 마스크 의무 착용, 거리두기 원칙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도 계산에 넣어야 하겠죠. 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대응에서도 보듯이 금지 위주의 정책은 일정 수준까지만 효과를 낼 뿐 시간이 지나면 ‘위반할 사람은 위반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라고 합니다. 마약 복용이나 에이즈 등 성 매개 감염병을 막기 위해 다양한 금지 캠페인을 실행해봤지만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미국은 더 잘 알고 있죠. 어쨌든 드산티스 주지사는 플로리다의 코로나 성공 스토리를 온통 자신의 공으로 돌리며 정치적 야망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초선 주지사로 내년 재선을 앞두고 있는 그의 캠페인 진영에 공화당의 거물 선거 전략가들이 총집결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하지만 주지사 재선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닙니다. 2024년 공화당 대선 구도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아성에 도전할 만큼 인기가 높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도널드 미니미(mini-me)’로 불리며 처음 정치 무대에 등장했을 때와 비교하면 코로나19가 그에게는 행운의 여신이라고 할 수 있겠죠.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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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작도 안 했는데 ‘삐걱’…美 바이든 첫 기자회견[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습니다. 최근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25일 첫 기자회견을 갖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취임 후 65일만이죠. “첫 기자회견이 너무 늦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 끝에 그나마 지금이라도 한다니 다행이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다수의 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기자회견 방식을 두고 백악관과 기자단 사이에 갈등이 쌓이고 있다고 합니다.미국 대통령 기자회견은 기자들의 질문을 사전에 제출받지 않는 것이 전통입니다. 대통령은 관례적으로 현장에서 즉석 질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악관 공보국이 사전에 질문을 받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기자들 사이에 퍼져있다고 합니다. 기자단 대표인 ABC방송 기자는 백악관 측과 이 문제를 두고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하죠. 언론과 사이가 나빴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조차 언론의 독립성을 위해 사전 질문을 받지 않았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바이든 행정부는 “우리는 전임 트럼프 대통령 시절과는 다르게 언론과 상호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매일 부지런히 언론 브리핑을 하며 기자들과 만납니다. 트럼프 행정부 때는 볼 수 없었던 일이죠. 하지만 백악관 언론 관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현재 백악관 브리핑에는 10명 정도의 기자가 참석합니다. 백악관이 “사회적 거리두기 수칙을 엄수해야 한다”며 평소 50명씩 달하던 기자 수를 확 줄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죠. 게다가 지난달부터는 그 적은 기자들로부터 받는 질문조차 “내용을 먼저 제출해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요즘 백악관 브리핑의 상당 부분이 과학적인 데이터 조사가 필요한 코로나19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브리핑용 질문을 사전에 받기 시작했으니 기자회견용 질문도 받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죠. 언론과의 가장 극적인 갈등 사례는 코로나19 검사비용 부담 문제입니다. 백악관에는 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오가며 취재를 합니다. 브리핑에 참석할 수 있는 기자 수는 제한되지만 백악관 내부, 특히 업무동에 해당하는 웨스트 윙을 돌아다니며 취재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백악관 경내에 입장하는 언론사 관계자들은 매일 코로나19 신속 항원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 비용이 1인당 170달러(19만 원 정도)로 매우 비싸다는 것입니다. 출범 후 1개월은 이 비용을 대주던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달부터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언론사에게 ‘자체 해결’을 통보했습니다. 물론 언론사가 자발적으로 백악관에 들어가 취재하는 것이니 자체 부담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한번 촬영에 10명 이상의 보조 인력이 투입되는 방송사의 경우 매일 2000달러(226만원)를 넘나드는 검사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휜다고 합니다. 언론사들이 “백악관의 비싼 검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검사를 받고 증명만 제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백악관은 “공신력 있는 검사 기관이어야 한다”며 제동을 걸었습니다. 언론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백악관에 입장하는 기자들을 최대한 줄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이용한 교묘한 언론통제”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현재까지 진행된 협상에 따르면 기자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사전 질문 제출 요구를 수용해 기자회견을 예정대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워낙 관심이 집중되는 ‘이벤트’이기 때문에 언론이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합니다. 기자회견이 이렇게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부터입니다. 이때부터 대통령 기자회견은 TV로 생중계됐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기자회견을 해도 국민은 하는 줄도 모르거나 알아도 나중에 알게 됐죠. 외모와 언변이 모두 뛰어났던 케네디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TV 생중계를 밀고 나갔습니다. 1960년대 초반 미국 TV 보급률이 87%에 달할 정도로 전 국민의 사랑받는 매체가 됐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죠. 취임 후 닷새 만인 1961년 1월 25일 시작된 케네디의 대국민 기자회견은 월 2회 꼴로 정례화 됐습니다. 기자회견 뿐 아니라 대중 앞에 서는 것 자체를 즐겼던 케네디 전 대통령은 크고 작은 행사에서 공식 연설을 한 횟수가 700회에 이릅니다. 전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비슷한 수치죠. 하지만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이 8년이었고, 케네디 전 대통령은 3년 미만이라는 점을 비교하면 ‘연설광’으로서의 면모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전까지 기자회견이 주로 열렸던 백악관 인디안티룸이 너무 협소하다며 200명 정도가 수용 가능한 국무부 대강당으로 옮겨 갈 정도였습니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극도로 싫어한 대통령으로 꼽힙니다. 말년에 코로나19 대응 기자회견을 몇 차례 열기도 했지만 그 이외의 일반적인 국정 내용에 대한 기자회견은 4년을 모두 합쳐봤자 10회 정도입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백악관 잔디밭에 모여 있다가 헬기를 타고 떠나기 직전의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질문을 외쳐대는 광경을 자주 연출했습니다. 워낙 유명해 ‘헬리콥터 기자회견’이라고 불립니다.바이든 대통령의 정치 역정을 보면 역시 기자회견을 꺼리는 쪽입니다. 30년 넘는 상원의원 경력에 부통령까지 지냈지만 “기자회견에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언론 대응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잦은 말실수 때문입니다. 본인도 “나는 말실수 기계(gaffe machine)”라고 인정할 정도입니다. 정국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기자회견도 정치화됩니다. 최근 한국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보듯이 질문을 던진 기자의 평소 보도 성향을 들춰내고, ‘기자의 손가락 모양이 무엇을 암시하느냐’까지 화제가 되는 시대입니다. 아직 바이든 행정부와 트럼프 지지 세력의 충돌이 끊이지 않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죠. 기자들은 자유롭게 질문하고, 대통령은 조리 있고 당당하게 답변하는 미국식 기자회견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됐습니다. 우리나라 정부 당국자들도 자세히 모니터링하고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웁니다. 그런 기자회견이 사전 각본에 따라 움직인다면 바이든 행정부가 내건 ‘존경 받는 미국의 귀환’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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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네온 선율은 애절하고 정열적… 한국인 심성에 딱 맞아요”

    “호텔 격리가 힘들지 않느냐고요? 전혀 고생이라는 생각이 안 듭니다.” 이름도 생소한 악기 반도네온의 젊은 거장 J P 호프레 씨(38)는 5월 경기 양평 집을 나서 헝가리 부다페스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예정이다. 해외여행이니 자가 격리를 거쳐야 하지만 반도네온을 사랑하는 청중을 만날 기대감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고 한다. 그는 헝가리 예술의전당 격인 벨러버르토크 콘서트홀에서 국립필하모니관현악단의 반주에 맞춰 유명 첼리스트 바르더이 이슈트반과 반도네온-첼로 이중주를 펼친다. 팬데믹 와중에도 방역수칙을 준수해가며 호프레 씨를 찾는 공연은 적지 않다. 반도네온이 큰 인기를 누리는 악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탱고 열풍이 불면서 최근 몇 년 사이 팬이 크게 늘었다. 독일의 교회 악기로 출발한 반도네온은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탱고 춤의 반주 악기로 꽃을 피웠다. 그 역시 집에서 할머니가 하루 종일 켜놓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탱고 음악을 듣고 자랐다. 음악에 소질이 많던 그는 10대 후반 국립예술상을 수상하고 20세 때 자신의 재능으로 승부하겠다는 꿈을 안고 뉴욕으로 건너가 반도네온 연주가로 명성을 쌓았다. 미국에서 코로나19가 크게 번지자 지난해 5월 짐을 싸들고 한국에 와 양평에 둥지를 틀었다. 한국인 아내와 세 살배기 딸과 함께. 그의 재능은 해외에서 먼저 주목했다. 한 번도 등장하기 힘들다는 뉴욕타임스 예술면에 수차례 소개돼 “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온은 호프레에 의해 예술적으로 승화됐다”는 평을 들었다. 호프레 씨가 지난해 미국을 떠나기 전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 입국 예정을 알리자 한국의 반도네온 애호가들로부터 교습 요청이 줄을 이었다. KAIST 출신의 대표적인 국내 여성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씨도 그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요청이 들어와 원격화상 레슨을 진행하고 있다. 클래식 작곡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는 하루 24시간이 바쁜 음악인이다. 호프레 씨는 한국에서 반도네온이 사랑 받는 이유에 대해 “정열적이면서 애절한 선율, 풍부하고 우렁찬 음색이 한국인들의 심성과 잘 맞는 듯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초보자가 취미용으로 도전하기에는 쉽지 않은 악기”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인터뷰 장소에 반도네온을 가지고 나온 그는 직접 연주 시범을 보이며 설명했다. 가운데 주름상자가 있고 왼쪽에 33개, 오른쪽에 38개의 버튼이 있다. 버튼만으로도 복잡한데 동시에 주름상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주름을 얼마나 열고 닫느냐에 따라 음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탱고의 전설’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반도네온 연주자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가 “악마의 악기”라고 불렀을 정도다. 반도네온 가격은 대당 4000∼8000달러(약 450만∼900만 원) 정도다. 호프레 씨는 요즘 많은 한국 예술가들이 공연 장소를 찾지 못해 고민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컴포트존(안전지대)에 머물지 말고 다양한 기회에 도전해볼 것”을 권했다. 그 자신도 세계 각국의 예술단체 및 연주자들과 글로벌 협업 기회를 발굴하려고 애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뉴욕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공동으로 동영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내로라하는 공연 경력으로 꽉 찬 이력서에서 강연 활동이 이례적으로 눈에 띈다. 글로벌 강연 무대인 ‘TED 토크스’와 ‘구글 토크스’에 연사로 출연했다. 연사로서는 어떤 메시지를 청중에게 선사했을까. “제가 반도네온으로 진로를 정한 것은 스무 살이 됐을 때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너무 늦었다’고 했죠.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입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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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오스크형 매장 내놓은 코레일유통 조형익 대표 “자판기 편의점 ‘스토리웨이’, 연말까지 전국 42곳 운영”

    “이제 스마트 편의점 시대입니다. 철도 이용객들이 편의점에 들어가 자동판매기에서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물건을 바로 결제해 가지고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14일로 취임 100일째를 맞은 코레일유통의 조형익 대표(59)는 편의점의 대변신을 선언했다. 코레일유통은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철도 관련 유통 판매 전문 계열사로 전국 철도 역사(驛舍) 내 ‘스토리웨이’라는 300여 개의 편의점과 600여 개의 전문 상업 시설을 운영한다. 일반 편의점에서는 고객이 구입한 상품을 계산대로 가져와 직접 바코드 기계로 찍는 무인 결제 시스템을 갖춘 곳들이 있다. 하지만 코레일유통이 추진 중인 스마트 편의점은 한발 앞선다. 매장에 들어가면 일반 진열대가 아닌 무인 키오스크형 자판기가 펼쳐지고, 구매에서 결제까지 이 기계를 통해 원스톱으로 해결 가능하다. 조 대표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 달 서울 영등포 본사 편의점에서 시범 운영에 들어가고, 올해 말까지 전국 역 42개 자판기형 편의점이 들어선다. 자판기에는 코레일유통이 자체 조사를 통해 선정한 철도 승객 선호 상품 200여 개가 들어간다. 자판기 편의점처럼 고객 편의를 우선시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조 대표가 정통 철도맨으로 현장 목소리에 귀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그는 1983년 옛 철도청 말단 직원으로 출발해 코레일 부산역장, 관광사업단장, 여객사업본부장 등을 거쳤다. 전국 관광 자원을 남도해양, 서해골드 등 권역별로 나눠 철도 여행과 융합시킨 5대 철도관광벨트 사업은 그의 히트작이다. 대표 취임 일성으로 요즘 글로벌 경영의 화두이기도 한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을 외쳤다. ESG를 코레일유통 경영에 접목시킨 것 중 하나가 상생 물류 지원 사업이다. “자체 물류망을 갖추지 못한 골목 상권의 개인 슈퍼들에 코레일유통이 즉석식품, 유제품 등을 공급해 주고 반품도 받아줍니다. 이 사업의 올 매출 목표를 지난해보다 113% 증가한 215억 원으로 잡았습니다. 소상인들의 반응이 좋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뻗어나가는 철길의 특성을 살려 지역 특산품들이 판로를 찾을 수 있도록 대형 역사 내에 ‘찬들마루’ ‘고향뜨락’ 같은 우수 농공상 융합형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취임과 함께 본사에는 ‘안전경영센터’를 대표 직속으로 설치해 국가 기간시설인 철도 역사 내 상점들의 안전 점검 활동을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했다. 코레일유통은 코레일의 5개 계열사 중 매출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일반 고객을 직접 접한다. 그는 직원들 사이에 ‘사장실에서 잘 볼 수 없는 사장님’으로 통한다. 일주일에 2, 3일은 10개 지역본부를 돌아다닌다. “코레일 지역 역장을 하면서 평범한 철도 이용객들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그들이 코레일유통 같은 공공기관에 원하는 것은 ‘신뢰’라는 것을 직접 발로 뛰며 배웠습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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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정’ 때문에 성추문에 ‘침묵’…“위선” 비판에도 입 다문 바이든[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백악관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였다면 이런 기념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넘어갔겠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여성의 날을 챙기고, 기념 연설도 한 것이지요. 문제는 연설이 끝난 후. 기자들까지 모아놓고 연설한 뒤 질문도 받지 않고 나가버렸습니다. 기자들 사이에 “쿠오모”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추문 논란으로 시끄러운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나올 것을 우려해 이런 행사에 으레 따라붙는 질의 응답 세션을 생략하고 자리를 뜬 것이지요.쿠오모 주지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는 피해자가 계속 늘어나 7번째 여성까지 등장했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고 주 의회는 탄핵 조사를 승인했지만 쿠오모 주지사는 “비난받을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며 “물러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쿠오모 주지사 때문에 함께 비난을 받는 사람이 바이든 대통령입니다. 여성 유권자들의 큰 지지를 얻고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쿠오모 성추문에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은 유세 전략으로 잘 활용해놓고 쿠오모 성추문에는 입을 다문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더블 스탠더드(이중 잣대)” “위선”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언론 브리핑에서 쿠오모 관련 질문에 대응하느라 매일 진땀을 뺍니다. “대통령은 언제 보고받았느냐” “조사위원회의 독립성은 보장되느냐” “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아무런 언급이 없느냐” 등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롭지만 사키 대변인은 비슷한 답변을 반복할 뿐입니다. “백악관은 독립적인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종종 접합니다. 대통령이나 집권 세력을 난처하게 만드는 논란거리가 발생하면 조사위원회 활동을 앞세워 상황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사위원회가 그다지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번 경우도 논란의 장본인 쿠오모 주지사가 직접 지시를 내린 조사위원회여서 조사 결과에 대한 기대는 별로 높지 않은 듯 합니다.바이든 대통령이 쿠오모 주지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우정 때문입니다. 쿠오모는 민주당 주지사 집안입니다. 아버지는 1983~1992년 뉴욕 주지사를 지낸 마리오 쿠오모입니다. 아버지 마리오 주지사는 인기가 높아 대선 출마 권유도 많이 받았죠. 1988년, 1992년 대선 때 민주당 지도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 약속을 받지만 본인이 “대통령 야망이 없다”며 고사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1988년 대선 때는 일찌감치 불출마 선언을 해 당시 민주당 경선에 나섰던 바이든 후보의 고민을 덜어주기도 했습니다.아버지 때 시작된 우정은 아들 세대로 이어져 2016년 대선 때 빛을 발했습니다. 2015년 바이든 부통령과 아들 쿠오모 주지사는 비슷한 인생의 고비를 겪습니다. 바이든 부통령은 사랑하는 맏아들 보를 뇌종양으로 잃습니다. 쿠오모 주지사는 재선에 성공해 선서하기 몇 시간 전 아버지 마리오가 세상을 떠납니다. 둘은 모두 시련에 빠졌지만 쿠오모 주지사가 먼저 털고 일어나 바이든 부통령에게 전화를 합니다. “내년(2016년) 대선에 출마해라. 그러면 가장 많은 대의원이 걸린 뉴욕은 내가 도와주겠다”는 권유였죠. 당시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는 이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바이든 부통령이 출마 의사를 정확히 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조차 힐러리 지원 유세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결과적으로 바이든 대통령은 2016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힐러리에 대적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죠. 그래도 바이든은 쿠오모 주지사에게 두고두고 고마움을 나타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주저앉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로 쿠오모”라고요.2020년 대선 때 바이든-쿠오모 관계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바이든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을 때 가장 먼저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기획한 것이 쿠오모 주지사입니다. 민주당 경선 초반에 바이든 후보가 피터 부티지지 전 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 시장 같은 신세대 후보들에 밀려 말실수를 연발하며 체면이 서지 않자 쿠오모 주지사는 특유의 입심을 발휘해 열심히 거듭니다. 뉴욕의 토크 라디오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대선 레이스에서 내 돈을 어디에 걸 거냐고? 물론 바이든이지. 그는 승리를 위한 비장의 무기를 가졌어. 바로 ‘신뢰’라는 거지” 등의 지원 발언을 합니다. 바이든 역시 쿠오모 주지사가 코로나19 리더십으로 좋은 평가를 얻자 “이게 바로 위기 관리의 ‘황금 기준(골든 스탠더드)’”이라고 치켜세웁니다. 요즘 쿠오모 주지사의 인기가 급락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빨리 ‘황금 기준’ 칭찬을 취소하라”는 원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대통령이 성추문을 일으킨 정치인에게 “물러나라”고 대놓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해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정도의 간접적인 언급만 해도 알아서 물러나는 것이 미국의 정치문화입니다.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죠. 하지만 쿠오모 주지사는 물러날 뜻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취소 문화(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유명인을 인터넷상에서 보이콧하는 운동)’에 굴복하지 않겠다”면서 자신에 대한 사임 압력을 조만간 사그라질 인터넷 열풍 정도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쿠오모 성추문을 감싸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바이든 대통령의 정치 생명을 재촉하는 것은 물론 그가 내건 여성 포용 원칙의 진실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1-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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