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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일가가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평생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을 기증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4월 30일로 예정된 상속세 신고·납부 마감을 앞두고 기증의 뜻을 발표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재계의 관측이다. 이건희 컬렉션은 국보 30점, 보물 82점과 알베르토 자코메티,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등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 수천 점을 포함해 1만3000여 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가족들은 한국을 문화강국으로 키워야 한다며 예술을 후원해 온 고인의 뜻을 기리기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 일가가 고(故) 이건희 회장의 미술 소장품을 기증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고 관련 절차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말(4월 30일)로 다가온 상속세 신고·납부 마감을 앞두고 발표 형식으로 기증 의사를 공식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13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삼성 일가는 ‘이건희 컬렉션’으로 알려진 이건희 회장의 개인 미술품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뜻을 모으고 정부 및 국립현대미술관 등과 비공식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가족들은 한국을 문화 강국으로 키우는 데 애착을 가져 온 이 회장의 의지를 이어가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증 규모는 1조∼2조 원 수준으로 전해진다. 삼성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유족들은 고인의 미술품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향으로 합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기증 규모는 1조 원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기증은 순수하게 이건희 회장의 뜻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다. 일각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과 연결시켜 왜곡된 억측, 해석이 나올까 오히려 내부에서 기증 의사를 공식화하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보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상속인이 미술품을 기증하더라도 이에 대한 상속세를 내야 하지만 상속세 및 증여세법 12조에 따라 신고 기한까지 국가나 공공단체에 기증하면 상속세를 면할 수 있다. 대형 로펌의 상속 분야 전문 변호사는 “미술관이나 문화재단 등 공익법인에 무상 증여하면 상속세 과세가액에서 빠지게 된다. 그렇다 해도 실제 매각을 통해 상속 재원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손해”라고 말했다.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처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거론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미술품 기증과 관련해) 미술관이 노력하고 있다. 아직 삼성이 (기증을)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관련해 협의를 해오고 있고, 마무리 단계”라고 전했다. 이와 별도로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리움미술관의 운영위원장으로서 국립현대미술관 후원회에 최근 가입해 후원회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과도 비공식적으로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 구체적 협의 단계는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에선 ‘이건희 컬렉션’에는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조선시대 청화매죽문 항아리(국보 제219호) 등 문화재가 있어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공식적으로 삼성과 미술품과 관련해 협의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미술계에 따르면 ‘이건희 컬렉션’은 국보 30점, 보물 82점뿐 아니라 알베르토 자코메티,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오귀스트 로댕 등 세계적인 미술가들의 미술 작품을 포함한 총 1만3000여 점인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이건희 컬렉션’이 워낙 방대하고 협의할 문제가 많아 단시간에 일반에 공개되긴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 박물관 관계자는 “기증 이후 컬렉터 예우 문제, 전시 방법 등 풀어야 할 것이 무척 많다. 단시간에 기증 및 전시가 이뤄지기 힘든 구조”라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김상운·배석준 기자}

문화재청 산하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모자도(母子刀·사진)의 제작기술을 재현한 연구 보고서를 12일 출간했다. 모자도란 장식용 칼로, 큰 칼인 모도(母刀)에 작은 칼 자도(子刀)를 붙여서 제작한 것이다. 연구소에 따르면 자도는 모도 칼집에 1∼6개가량 부착되며, 주로 삼국시대 고분에서 많이 나온다. 고위층의 위세품으로 부장된 모자도는 금이나 은, 금동으로 만들어졌다. 이 중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모자도는 조사 결과 오각형 고리자루에서 0.05cm 두께의 은피를 철심에 씌운 후 0.1cm의 은실을 메워 땜질한 흔적이 확인됐다. 고리 형태 금띠장식은 구리로 만든 후 얇은 금판을 씌워 제작한 사실도 밝혀졌다. X선 단층조사 등을 통해 알아낸 제작기법을 토대로 한상봉 국가무형문화재 장도장(제60호)과 박강용 전북무형문화재 옻칠장(제13호)이 모자도 재현품을 만들어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올 6월경 모자도와 재현품을 나란히 전시할 예정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대학원에서 북한학 학위논문을 쓸 때 심사위원들로부터 빈번히 지적받은 사항은 ‘좁혀서’ 보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1958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북한 철수 직후 북-중 관계처럼 특정 국면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라는 주문이었다. 신문사에서 학술기자로 일하면서 접한 인문학 분야의 학술논문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다. 학자들은 전문화된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지만 이를 아우르는 큰 흐름에 대해선 대체로 말을 아낀다. 학문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것이겠지만 분과학문이 대중과 유리되는 현상을 낳는 데 일조한 측면을 부인하긴 힘들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판부가 의욕적으로 기획한 이 책은 세계사 연구에서 이 같은 분과학문의 한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와 재러드 다이아몬드로 대표되는 ‘빅히스토리’의 연구 방식과도 가깝다. 총 18권(한국판)에 걸쳐 약 200편의 논문을 담고 있는 이 세계사 시리즈는 문자기록이 없는 구석기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간대를 다룬다. 이를 위해 고고학, 언어학, 지질학, 생물학, 인류학, 미술사학 등 역사학 이외의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공동 필진으로 참여했다. 예를 들어 1권에선 고인류가 10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유럽, 아시아 등지로 이동한 과정을 학제 간 연구 성과를 토대로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이때 핵심 변수는 생태환경의 급격한 변화였다. 19만 년∼13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의 기후변화는 적도 이남과 이북을 오가는 주기적인 이주를 촉발했다. 그런데 생태계와 인간 이주의 상관관계는 늘 일방통행은 아니었다. 호주의 자이언트 캥거루, 유라시아의 매머드, 아메리카 대륙의 나무늘보처럼 해당 지역으로의 집단 이주는 특정한 대형 동물의 멸종을 가져왔다. 특히나 농경과 문자, 말(馬)이 도입된 후 제국이라는 강력한 정치체가 등장하자, 강제 이주가 빈번하게 이뤄졌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드라마 ‘조선구마사’ 사태에서 보듯 한중관계를 바라보는 대중의 날 선 시선은 패권성에 가 있다. G2로 부상한 후 미국과 극한 갈등을 벌이는 중국의 ‘힘의 외교’에서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착취와 억압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사회주의 중국뿐 아니라 봉건주의 청나라도 영화 ‘남한산성’(2017년) 등에서 보듯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마에 피를 흘리며 행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청 황제 배알 시 이마가 땅에 닿을 듯 3번 절하는 것)의 굴욕으로 기억돼 있다. 이 책은 소(小)중화 사상에 따라 18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청을 백안시하던 조선이 돌연 태도를 바꿔 1780년 건륭제의 칠순 축하사절을 보낸 사건을 조명하고 있다. 특히 건륭제의 명으로 박명원 등 조선 사신들이 티베트 고승 판첸 라마를 접견한 사건에 얽힌 비화를 추적한다. 그해 특사단은 청 황제의 여름별장이 있는 열하(熱河)에서 판첸 라마를 만나 불상을 선물로 받았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숭유억불을 신봉하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오랑캐가 준 불상은 ‘더럽고 사악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렇다고 황제가 깍듯이 존경하는 고승의 선물을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위기에 빠진 특사단에게 강력한 알리바이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불상을 갖고 압록강을 넘은 특사단이 정치·사상적 탄핵을 피할 수 있도록 기록한 측면이 있다는 것. 예컨대 박지원은 특사단장 격인 박명원이 판첸 라마와 만난 직후 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절하지 않았음을 열하일기에서 강조했다. 이는 청나라 예부가 조선에 보낸 문서의 일부 내용(‘조선 사신들은 판첸 라마를 절하며 뵈더니(拜見) 성스러운 스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축복의 은혜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저자는 “열하일기에서 판첸 관련 부분은 뜻하지 않은 봉불(奉佛) 혐의로 비난의 대상이 된 박명원 일행의 변호를 위해 박지원이 고안한 주도면밀한 구성의 산물”이라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작은 새장 같은 방은 먼지 때문에 누렇게 퇴색한 벽지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보기에도 초라했다.’ 오래전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노란색 작은 방’이다. 작가의 방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만 따라가도 갑갑함이 느껴진다. 세상과 단절된 채 이곳에 틀어박힌 라스콜리니코프의 강박적 심리를 오롯이 보여준다. 심리적 압박과 범죄로의 일탈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이만한 묘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저자가 14세기 이후 유럽의 명화(名畵)들을 다양한 반전 요소들을 통해 재해석한 서양미술 입문서다. 이 중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 시리즈는 ‘죄와 벌’처럼 작가의 내면이 고스란히 투영된 방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고흐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 머문 프랑스 아를의 자기 방을 거의 같은 구도로 3장 그렸다. 방 안 가구나 물건들도 거의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런데 세 작품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벽지와 바닥, 사물의 색상이 모두 달라서다. 1889년작 오르세미술관 소장본은 벽지가 온통 보라색이라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감상자에 따라서는 광인(狂人)의 시선마저 느껴진다. 반면 직전 해에 그린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소장본은 전체적으로 옐로 톤으로 그려져 안정감을 준다. 롤러코스터처럼 급변했던 고흐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 그림을 ‘풍경에 숨은 반전’으로 꼽으면서 “고흐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그 대상에 얽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고자 마음먹었다”고 썼다. 스칼릿 조핸슨 주연의 2003년작 영화로 유명해진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도 반전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도 그렇지만 이 그림을 감상한 이들은 순수와 요염미를 동시에 가진 한 소녀를 연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그림이 초상화가 아닌 트로니(tronie·역사화 등 대작을 그리기 전 캐릭터 연구를 위한 밑그림)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 아름다운 소녀는 실제 인물과 다르다는 것. 어쩌면 그래서 이 그림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가 일간지에 한 신간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칼럼을 썼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에 오른 고종을 비판한 ‘매국노 고종’(박종인 지음·와이즈맵)이 타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종은 조선왕조의 병색을 걷고 회복될 수 있었던 기회를 차버렸다”며 고종을 자주독립의 개혁군주로 보는 시각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이 명예교수는 “고종 황제 무능설은 일제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반박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역사학계 거두가 지면으로 공개 논쟁을 벌인 건 이례적이다. 여기서 고종이 망국(亡國)의 원흉이냐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뜨거운 감자인 근현대사 이슈를 이제는 논리적으로 따져 볼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거다. 이 같은 논의에서 다양한 시각과 주장,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간섭 없이도 조선이 자주 근대화에 성공했을 수 있었겠느냐는 주제는 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고종을 옹호하면 반일(反日), 그를 비판하면 친일(親日)이라는 이분법 시각으로는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없다. 올해로 광복을 맞은 지 76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우리 사회와 학계는 친일, 반일 프레임에 갇혀 있다. 정부와 여당은 6·25전쟁 이후 안정적으로 구축된 한미일 3각 안보의 틀보다 반일 프레임을 앞세우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친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실증(實證)을 추구해야 할 학계마저 자칫 친일로 읽힐 수 있는 견해에 대해 자기검열을 하는 실정이다. 근현대사뿐 아니라 민족 개념 자체가 모호한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그렇다. 최근 전남 해남군에서 6세기 대형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봉분을 가진 무덤)이 발견됐는데 고대 일본 정치세력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고 한다. 무덤 안팎의 조성 양식이 고대 일본 규슈의 것을 빼닮아서다. 사실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계 전방후원분은 여럿 발견됐다. 이 중 광주 월계동 장고분은 한반도로 망명한 고대 규슈 지배층이 묻힌 걸로 추정된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교류 흔적이 발견됐음을 감안할 때 전방후원분의 존재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 고대사학자들은 호형호제를 못하는 홍길동처럼 고대 왜인(倭人)이 묻힌 고분에 대해선 무덤 주인이 누군지 밝히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5년 전 기자는 강단·재야 사학자들과 함께 고조선 한군현(漢郡縣) 위치 논란이 벌어진 중국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일대로 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고조선의 역사 강역을 넓게 해석하려는 재야 사학자들에 맞서 강단 사학자들은 문헌과 고고자료를 들이댔다. 이에 논리적으로 수세에 몰린 한 재야 사학자가 현직 대학교수의 ‘출신 성분’을 운운하며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가 일본 도쿄대에서 고고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식민사학’에 물들어 있으며, 이 때문에 고조선의 강역을 좁게 해석한다는 궤변이었다. 이제 이런 식의 유치한 친일, 반일 프레임은 폐기할 때가 되었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소규모 건축물 공사에 한해 건축 목적과 상관없이 국가가 문화재 발굴 조사 비용을 전면 지원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취임 3개월을 앞두고 18일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소규모 (건설공사) 사업자에 대해선 정부가 발굴 비용을 부담하는 게 맞다”며 “소규모 사업에서 졸속 발굴이 많이 나오기에 정부가 직접 나서 빠르게 정리해주는 게 좋다. 이 부분에 대해선 ‘발굴 공영화’가 확립돼야 한다”고 밝혔다. 현행 매장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공사에 앞서 실시하는 지표조사에서 문화재가 땅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 시굴 혹은 정밀 발굴에 들어가야 한다. 이 중 일정 면적 이하의 개인주택이나 농어업 시설물, 공장 건설공사에 한해서만 발굴조사 비용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다. 김 청장의 방침은 소규모 공사의 경우 이 같은 정부 지원 조건을 아예 풀어 개인이나 영세 사업자의 비용 부담을 줄임으로써 매장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취지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의 발굴사업단 인력을 확대할 방침이다. 김 청장은 “재단 발굴사업단을 확대해 소규모 발굴부터 지표조사까지 맡겨 국민 부담을 줄이고 공공성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단, 민간 발굴기관의 업무와 중복되지 않도록 수익성이 낮은 소규모 발굴에 집중할 계획이다. 김 청장은 “20여 년 만에 문화재청에 다시 돌아와 보니 조직은 커졌지만 시대 변화에 맞는 패러다임이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국민들은 문화재가 생활에 불편을 준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왜 보존이 필요한지 국민들을 설득하고, 절박한 게 아니라면 과감히 (규제를) 풀어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정고시 34회 출신인 김 청장은 1994∼1997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 사무관을 거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문화정책과장, 정책기획관 등을 지냈다. 문화재청으로는 2018년 차장으로 돌아와 지난해 12월 청장(차관급)으로 승진했다. 앞서 김종진 전 청장을 제외하고는 교수, 언론인 등 외부 전문가들이 문화재청장에 주로 발탁됐다. 그는 특히 경주 월성(月城) 같은 대규모 국책 발굴사업에서 장기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50년 넘게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일본 나라(奈良)의 헤이조쿄(平城京) 발굴처럼 유적이 파괴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 앞서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재 당국이 월성 발굴 성과에 급급해 속도전으로 밀어붙였다는 비판이 고고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 김 청장은 “월성 발굴은 학계 비판이 아주 많다”며 “월성 발굴을 조금 더 장기적으로 추진했다면 훨씬 좋은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문화재 및 미술품 물납제(소장품으로 세금을 대신 납부하는 제도)에 대해선 조속한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청장은 “이 제도는 장롱 속에 숨겨진 문화재를 양지로 끄집어내는 것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며 “문체부와 법제화를 협의하고 있다. 단, 증여세법과 상속세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김상운 sukim@donga.com·김태언 기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에게 약속한 축복의 땅 가나안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유목민이던 히브리인들의 입장에서 젖이 풍부하다는 건 많은 가축을 거느리는 걸 뜻한다. 꿀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곳은 곡식과 화초가 만발해 벌이 꼬이는 땅이다. 다시 말해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젖과 꿀은 모든 게 갖춰진 풍요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이 책은 인류사와 생태계에서 벌이 가졌던 의미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곤충은 인류에게 줄곧 재앙이나 혐오의 대상이었다. 약속의 땅으로 가려는 히브리 노예를 가로막은 이집트 파라오에게 하나님이 내린 무서운 형벌 중 하나는 메뚜기 떼의 습격이었다. 영화 ‘에이리언’(1979년)에서 흉칙한 외계 생명체의 모티브는 곤충이었다. 하지만 벌만큼은 곤충인데도 인류에게 늘 환영을 받았다. 달콤한 벌꿀은 그 자체로 훌륭한 식품이었을 뿐 아니라 술과 그릇 등 다양한 용도로 유용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 중국인들은 쌀과 산사나무 열매를 곁들인 벌꿀 술을 즐겼고, 켈트족은 헤이즐너트를 가미한 벌꿀 술을 들이켰다.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의 신석기 유적에선 밀랍을 섞은 질그릇이 발견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벌은 형형색색의 다양한 꽃 식물종을 낳은 일등공신이다. 생물학자들은 후기 백악기 지층에서 발견되는 꽃식물의 폭발적인 증가는 벌의 진화와 관련이 있는 걸로 보고 있다. 온통 침엽수와 양치식물이 지배하던 당시 식물군이 다양한 꽃식물로 진화한 건 ‘꽃가루받이’를 하는 벌이 등장한 덕분이라는 것. 실제로 벌은 수억 년 전엔 파리나 진딧물, 나비 등을 침으로 죽인 뒤 잡아먹은 육식곤충이었다. 하지만 약 1억5000만 년 전 벌은 지천에 널려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꽃의 꿀로 먹잇감을 바꿨다. 이 과정에서 꽃식물은 효율적인 수분(受粉)을 위해 벌을 유인할 수 있는 화려한 색상과 형태로 진화를 거듭했다. 그야말로 벌의 사생활이 식물계의 거대한 진화를 가져온 셈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누구나 불합리한 차별이나 따돌림은 잘못된 거라고 배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거나, 집단을 통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될 때 혐오와 차별에 대한 도덕적, 심리적 저항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독일 영화 ‘엑스페리먼트’(2001년)에서 간수 역할을 맡은 평범한 사람들을 잔혹한 폭력배로 만든 건 인간 본연의 지배욕과 더불어 사회적 차별을 전제로 한 역할놀이였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파시즘에 대한 혐오로 주류 정치권에서 배척돼 온 극우가 21세기 들어 세계적으로 확산된 양상을 보여주며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톨레랑스(관용)를 내세워 온 프랑스에서 2002년 극우정당인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이 16.9%의 득표율을 거둬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나 불과 15년 뒤 그의 딸인 마린 르펜의 득표율은 33.9%로 치솟았다. 좌파, 우파를 나누는 기준은 뭘까. 이탈리아 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에 따르면 불평등을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이면 우파, 부정적이면 좌파다. 저자는 이 관점을 바탕으로 소수자 권리보호 등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적대적인 우파를 ‘극우’로 분류하고 있다. 저자는 극우가 21세기 들어 발흥하는 원인을 각종 사회·경제적 위기에서 찾고 있다. 2001년 9·11테러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5년 난민 위기를 겪으면서 서구에서 극우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각국에서 선거의 핵심 어젠다가 세금, 실업 등 경제문제에서 이민, 범죄 같은 사회·문화 이슈로 바뀐 것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극우를 비판하던 기존 주류 정당들이 이들을 벤치마킹해 ‘우익 포퓰리즘’ 정책을 구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비단 서구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이끄는 인도인민당은 힌두 민족주의를 앞세워 무슬림 이민자의 시민권 취득을 막으려 하고 있다. 저자는 “극우에 대한 대응은 결국 자유민주주의 강화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임오군란과 짜장면’ 혹은 ‘박정희와 짜장면’. 짜장면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1882년 조선의 구식 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수세에 몰린 명성황후 세력은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에 맞서 중국 청나라를 끌어들인다. 인천 제물포로 들어온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청군은 대원군을 체포한 뒤 조선을 속방으로 만드는 조약을 강요한다. 당시 경제 이권 침탈을 위해 청은 상인과 노동자들을 대거 조선으로 보냈는데, 이때 이들이 가져온 중국 음식이 짜장면의 원형이랄 수 있는 ‘자장몐’이다. 한반도와 가까운 산둥성 음식인 자장몐은 밀가루 면에 춘장을 비벼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값싼 음식이었다. 이 책은 한국의 대표 서민 음식인 짜장면, 김밥, 돈가스, 카레 등의 연원을 근현대사와 결부시켜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 음식의 공통점은 일제강점기에 수입돼 빠른 속도로 한국화된 ‘근대화’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여러 소설을 발표한 작가답게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기자 캐릭터를 앞세운 이야기로 각 챕터를 시작한다. 이어 여기 등장하는 음식 등 주요 소재를 역사 자료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제 박정희와 짜장면의 상관관계를 밝힐 때가 됐다. 일제강점기 ‘청요릿집’으로 불린 중국식당은 중요 행사들이 열리는 고급 식당이었다. 중국 화교들은 여러 명이 돈을 모아 공동 투자하는 방식으로 대형 요릿집을 열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1962년 거액의 현금을 보유한 화교들을 겨냥해 화폐 개혁 조치를 실시한다. 이어 외국인의 토지 소유마저 금지시키자 경제적 타격을 입은 상당수 화교들이 미국이나 대만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에 따라 고급 청요릿집은 점차 동네의 소규모 중국집으로 쪼그라들었다. 고급 요리로 통하던 짜장면 등 중국 음식이 서민 요리로 탈바꿈한 계기다. 저자는 “짜장면은 음식의 역사가 정치권력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올해 3·1절을 맞아 국내에 보관된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사진)’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개된다. 전시 기간은 23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 2주다. 이 태극기는 고종이 대한제국 외교고문이던 미국인 오언 데니(1838∼1900)에게 1890년 하사한 것이다. 데니는 1886년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대한제국 외교고문이 된 뒤 청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비판했다. 이로 인해 청의 입김으로 1890년 파면돼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고종이 그에게 선물한 게 데니 태극기다. 데니 태극기는 가로 263cm, 세로 180cm의 대형으로 붉은색과 푸른색 천을 오려 태극무늬를 만들었다. 4괘의 형태나 배치는 현 태극기와 같지만, 검은색이 아닌 푸른색으로 돼 있다. 데니의 후손인 윌리엄 랠스턴이 1981년 우리 정부에 기증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주이 태극기’다. 미국 공사를 수행한 미국인 주이가 1884년 입수해 본국으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백제시대 때 큰 항아리를 조세로 납부한 사실을 추정케 하는 고고학 증거가 처음 발견됐다. 백제에서도 이른바 공납제(貢納制·각 지방 특산물을 국가 조세로 걷는 것)가 시행된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이병호 공주교육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부소산성 출토 명문 토기에 대한 검토’ 논문에서 지난해 12월 충남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글자를 추가로 해석했다. 당시 토기를 발굴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乙巳年三月十五日牟尸山菊作○’(○는 판독 불가)의 명문을 ‘을사년(645년) 3월 15일 모시산(牟尸山) 사람 국(菊)이 만들었다’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일본 고고 유적들에서 출토된 다양한 토기 명문을 검토한 뒤 판독 불가 글자를 ‘S’(물장군 장)의 이체자로 파악했다. 물장군이란 배가 불룩하고 목이 좁은 질그릇을 말한다. 이 교수는 이 글자가 백제에선 높이 90cm 이상의 ‘대형 항아리’를 뜻한다고 보고 있다. 일본 나라(奈良)현 아스카이케(飛鳥池) 유적에서 출토된 글씨연습 목간이나 헤이조큐(平城宮)의 술 제조관청 항아리 명문, 후쿠오카(福岡)현 우시쿠비(牛頸) 가마터의 스에키 항아리 명문 등에서 같은 글자가 확인됐는데 모두 대형의 저장용 항아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명문 토기 파편의 길이(가로 46.7cm, 세로 43.8cm)와 곡률을 감안하면 원래 토기의 높이는 90cm가 넘었을 걸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대형 항아리가 공납이 됐다고 보는 근거는 뭘까. 이 교수는 토기가 출토된 장소와 더불어 일본 고고 자료, 중국 문헌기록에 주목하고 있다. 부여 부소산성은 사비백제시대 왕궁(관북리유적)의 배후 산성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세를 거둬들인 백제 중앙과 직결된 장소인 셈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 우시쿠비 가마터에서 ‘713년에 대형 항아리를 공납으로 바쳤다’는 내용의 명문이 발견됐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조세제도가 같다고 기록돼 있다. 또 주서(周書)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세금으로 명주, 베, 곡식을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바에 따라(隨其所有)’ 빈부차등을 헤아려 받았다”고 적혀 있다. 다시 말해 백제 역시 고구려처럼 지역특산물 등 현물을 조세로 걷어 들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토기가 나온 곳이 금강과 연결된 부소산성 북문 터와 가깝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현물 조세가 수운(水運)을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금강을 통해 북문 터 일대를 거쳐 왕궁이 있는 쌍북리 일대로 공납품 등이 공급됐을 것”이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영화 ‘마션’(2015년)에서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자신의 인분으로 기른 감자를 먹으며 화성에서 생존한다. 우주복에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나면 죽음에 이르는 이 척박한 행성에서 인간 문명의 원형이랄 수 있는 농경이 가능하다는 거다. 먹을거리가 해결된다면 인간의 화성 거주는 더 이상 꿈만은 아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 항공우주국(NASA) 수석작가 출신의 저자는 여기에 어깃장을 놓는다. 화성에서 감자만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라는 것. 과염소산염 독소가 함유된 화성의 토양에서 빛만으로 감자를 키울 순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독소를 제거했다손 치더라도 감자는 충분한 영양분을 얻기 힘든 작물이다. 의학적 관점에서 감자만 섭취하면 1년도 채 되지 않아 비타민 결핍에 따른 야맹증, 구루병, 신경손상, 잦은 멍 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차라리 와트니가 고구마를 키웠다면 감자의 두 배 정도 되는 영양분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부제(‘우주여행이 자살여행이 되지 않기 위한 안내서’)에서도 알 수 있듯 우주여행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과학적, 경제적 사실에 입각해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최근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로 대표되는 우주여행의 장밋빛 전망을 깨뜨리는 내용인 것. 일례로 미소 간 우주경쟁이 한껏 달아오른 1960, 70년대 미국에선 20세기 내로 화성 탐사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화성 탐사는 아직 인간의 가시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상황이다. 왜 그럴까. 저자는 현실 세계의 정치, 경제 상황이 우주여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일례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아폴로 13호의 산소탱크 파열 사고를 본 직후 1972년 대선을 앞두고 아폴로 16, 17호 발사계획을 모두 취소하려고 했다. 우주 사고가 자신의 대선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을 우려한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우주여행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한 건 아니다. 그는 “만약 중국이 2032년까지 화성 정착지를 세우겠다고 발표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2031년까지 이를 세우기 위해 자금을 동원할 것”이라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깊은 산속으로 중국 청나라 황제의 긴 행렬이 지나간다. 황후가 탄 화려한 수레 앞으로 말을 탄 병사들이 거대한 나발을 불며 사슴을 부른다. 활과 화살로 무장한 수행원들 가운데로 하얀 용이 새겨진 가죽옷을 입은 황제가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있다. 그 앞으로 활과 창을 겨눈 병사들이 호랑이 한 마리를 뒤쫓는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지난해 11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시장에서 사들여 18일 공개한 ‘호렵도(胡獵圖·오랑캐가 사냥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병풍은 인물 하나하나의 입체감이나 생동감이 그림 전체를 휘감고 있는 걸작이다. 총 8폭의 병풍은 약 1.5m 높이에 길이는 3.9m에 이른다. 병풍 속 그림에는 청 황제가 열하(熱河·지금의 청더)의 피서산장에서 여름을 보낸 뒤 가을에 무란웨이창(木蘭圍場)에서 사냥하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호렵도는 작자 미상이다. 주변의 산과 나무를 표현한 화법 때문에 한때 김홍도(1745∼1806)의 그림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옷 주름을 부드럽게 그리는 김홍도와 달리 강렬하게 표현돼 있어 정조대 도화서(그림을 주관하는 조선시대 관청)의 궁중 화원이 그린 걸로 추정된다. 임원경제지에는 김홍도가 호렵도를 그렸다고 기록돼 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실물은 없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호렵도는 여러 점이 전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에 환수된 그림이 예술적 완성도에서 압권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림을 감정한 정병모 경주대 교수(미술사)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급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정조대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려는 북학파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적지 않다. 중화사상에 젖은 조선 사대부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빗대 경멸했다. 더구나 17세기 병자호란을 거치며 이들에 대한 적대감마저 팽배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거치며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우뚝 선 청나라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주자성리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청나라 고증학 등을 배우려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북학파의 움직임도 이때 시작됐다. 북학파를 중용한 정조는 1780년 열하에서 열린 건륭제의 칠순잔치에 연암 박지원(1737∼1805) 등을 축하사절로 보내기도 한다. 비록 호렵도라는 이름에 오랑캐라는 비칭이 등장하지만, 건륭제로 추정되는 청 황제와 수행원들을 정밀하게 묘사한 화가의 시선은 오히려 존경에 가깝다. 정병모 교수는 “호렵도에는 청을 배우고자 하는 북학파의 태도가 반영돼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만주를 호령하던 고대국가 고구려의 국명이 ‘개구리’에서 나왔다? 조선후기 실학자로 ‘발해고’를 남긴 유득공(1748∼1807)은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사진)’에서 “고구려는 우리말로 개구리다. 고주몽이 금와(金蛙·금개구리)의 아들이므로 국호를 고구려라고 한 것이다”라는 이덕무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개구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고구려가 됐다는 것. 유득공은 신라 국명의 연원도 ‘새 나라’라는 우리말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삼국시대) 당시 군호와 관명은 모두 우리말을 썼는데 어찌 한자어의 의미를 따라 나라 이름으로 삼았겠는가”라고 썼다. 한자화되기 이전 한반도 문화의 원형을 찾고 자한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 고운당필기의 첫 한글 번역서를 최근 출간했다. 유득공이 약 20년 동안 집필한 이 책은 그의 일기이자 백과사전이랄 수 있다. 총 295편의 짧은 글들로 구성된 문집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를 거쳐 일본, 미국으로 분리 반출된 탓에 우리말 번역이 늦어졌다. 번역서 저자인 김윤조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는 국내에 남아 있는 고운당필기에서 유실된 일부 내용을 일본 덴리대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찾아냈다. 이에 따라 확인되지 않은 41편을 제외한 254편의 글을 모아 이번에 번역 출간했다. 유득공은 주자성리학이 강조하는 예교와 거리가 먼 당시 함경도 풍속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하양(현 경북 경산) 현감을 지낸 임희택(1744∼1799)에 따르면 산골에 살던 함경도 출신 남자가 자기 부인의 시신을 세 토막으로 자른 사건이 발생한 것. 포졸들에게 잡혀온 남자는 자신은 떠돌이로, 병사한 아내의 뼈만 거둬 고향에서 장사를 지내려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북쪽 풍속이 예로부터 이러한데 큰 죄가 되는 줄 진작 알았다면 어찌 이렇게 했겠느냐”고 읍소했다. 유득공은 이 같은 함경도 장례 풍속이 부여, 옥저에서 연유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후한서 동옥저전에 ‘장사를 지낼 때 큰 나무 관을 만들고 죽은 자를 우선 임시로 매장해 피부와 살이 다 없어진 뒤에야 유골을 수습해 관속에 넣는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복원 과정에서 광화문에 걸린 조선궁궐의 ‘문배도(門排圖)’ 실물이 처음 확인됐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 조선 후기 기록에 전하는 궁궐 문배도가 구한말 촬영사진을 통해 실체가 확인된 것이다. 문배도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벽사((벽,피)邪)의 의미를 담아 문에 붙이는 그림으로, 우리 전통 세시풍속 중 하나다. 8일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미국 잡지 ‘데머레스츠 패밀리 매거진(Demorest’s Family Magazine)’ 1893년 7월호에서 구한말 광화문을 촬영한 흑백사진이 발견됐다. 이 잡지는 그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를 찍었는데, 이때 북쪽 벽면에 태극기와 함께 걸린 광화문 사진이 촬영된 것. 재단은 이 ‘사진 속 사진’을 미국 디지털 아카이브 자료와 1년간 비교 조사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원본 사진을 찾아냈다. 고종 재위 기간으로 조미수교가 체결된 1882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본 사진은 광화문 앞에 군중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중 광화문만 확대해보면 약 3m 길이의 흰색 종이에 부리부리한 눈에 험상궂은 얼굴의 장군상을 그린 그림이 문에 붙어 있다. 마치 불교 신장(神將)상과 비슷한 모습의 ‘금갑장군(金甲將軍·금빛 갑옷을 입은 장군)’이다. 19세기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 “도화서(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관청)는 (연초에) 황금빛 갑옷을 입은 두 장군상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는데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다른 장군은 절(節)을 들었다. 이 그림을 모두 대궐문 양쪽에 붙인다”고 기록했다. 원본 사진에서 광화문에 붙은 금갑장군 그림은 위쪽 3분의 1만 온전하고 나머지 아랫부분은 찢겨진 상태다. 김윤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문배도는 풀에 발라 문 위에 붙이는 게 보통”이라며 “비바람이 들이쳐 그림이 찢겨나가도 중간에 떼지 않았음을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광화문 촬영사진을 태극기와 함께 북쪽 벽에 걸어놓은 것도 인상적인 대목이다. 재단 관계자는 “북쪽은 왕을 상징한다. 워싱턴에 파견된 대한제국 관료들이 고종이 머무는 광화문 사진과 국가 상징인 태극기를 향해 예를 갖췄을 것”이라고 말했다. 궁궐에서 그리던 문배도는 조선후기 들어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사가(私家)에서 그린 금갑장군 문배도 1점이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풍산 류씨 본가(화경당)에 소장돼 있다. 현존하는 문배도 가운데 유일한 완본이다. 문화재청은 미 의회도서관 소장 사진과 화경당 문배도를 바탕으로 고증 재현한 궁궐 문배도를 설 연휴(11∼14일) 광화문에 붙여놓기로 했다. 조선시대 척사의 의미를 살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의 염원을 담겠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문배도는 제거 시 훼손 가능성을 감안해 종이가 아닌 현수막 형태로 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복원 과정에서 광화문에 걸린 조선궁궐의 ‘문배도(門排圖)’ 실물이 처음 확인됐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 조선 후기 기록에 전하는 궁궐 문배도가 구한말 촬영사진을 통해 실체가 확인된 것이다. 문배도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아 문에 붙이는 그림으로, 우리 전통 세시풍속 중 하나다. 8일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미국 잡지 ‘데모레스트 패밀리 매거진’(Demorest‘s Family Magazine) 1893년 7월호에서 구한말 광화문을 촬영한 흑백사진이 발견됐다. 이 잡지는 그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를 찍었는데, 이때 북쪽 벽면에 태극기와 함께 걸린 광화문 사진이 촬영된 것. 재단은 이 ’사진 속 사진‘을 미국 디지털 아카이브 자료와 1년간 비교 조사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원본 사진을 찾아냈다. 고종 재위 기간으로 조미수교가 체결된 1882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본 사진은 광화문 앞에 군중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중 광화문만 확대해보면 약 3m 길이의 흰색 종이에 부리부리한 눈에 험상궂은 얼굴의 장군상을 그린 그림이 문에 붙어있다. 마치 불교 신장(神將)상과 비슷한 모습의 ’금갑장군(金甲將軍·금빛 갑옷을 입은 장군)‘이다. 19세기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 “도화서(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관청)는 (연초에) 황금빛 갑옷을 입은 두 장군상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는데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다른 장군은 절(節)을 들었다. 이 그림을 모두 대궐문 양쪽에 붙인다”고 기록했다. 원본 사진에서 광화문에 붙은 금갑장군 그림은 위쪽 3분의 1만 온전하고 나머지 아랫부분은 찢겨진 상태다. 김윤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문배도는 풀에 발라 문 위에 붙이는 게 보통”이라며 “비바람이 들이쳐 그림이 찢겨나가도 중간에 떼지 않았음을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광화문 촬영사진을 태극기와 함께 북쪽 벽에 걸어놓은 것도 인상적인 대목이다. 재단 관계자는 “북쪽은 왕을 상징한다. 워싱턴에 파견된 대한제국 관료들이 고종이 머무는 광화문 사진과 국가 상징인 태극기를 향해 예를 갖췄을 것”이라고 말했다. 궁궐에서 그리던 문배도는 조선후기 들어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사가(私家)에서 그린 금갑장군 문배도 1점이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풍산 류씨 본가(화경당)에 소장돼 있다. 현존하는 문배도 가운데 유일한 완본이다. 문화재청은 미 의회도서관 소장 사진과 화경당 문배도를 바탕으로 고증 재현한 궁궐 문배도를 설 연휴(11~14일) 광화문에 붙여놓기로 했다. 조선시대 척사의 의미를 살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의 염원을 담겠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문배도는 제거 시 훼손 가능성을 감안해 종이가 아닌 현수막 형태로 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김상운기자 sukim@donga.com}

지난해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 케어)’ 서비스를 취재하면서 재택의료의 이점을 알게 됐다. 인터뷰에 응한 김모 할머니(80·경남 김해시)는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고 있었는데, 하지관절 장애로 거동이 힘들었다. 가족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 식사부터 병원 진료까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할머니는 “물리치료 받으려고 병원에 가려면 살을 에는 통증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자체와 협약을 맺은 지역병원 간호사와 물리치료사가 매주 방문의료 서비스를 나오면서 삶이 바뀌었다. 할머니는 “내 집에서 치료받게 돼 마음이 편하다. 서로 의지하는 동네 친구들도 자주 볼 수 있다”며 만족해했다. 이 책은 의사 출신 의료 사업가인 저자가 초고령사회 도래에 따른 의료 위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일본은 전 인구에서 65세 이상 비율이 2017년 기준 30%에 육박한다. 게다가 선진국 중에서도 인구당 병상 수가 많고 평균 입원기간도 길어 의료비 부담이 큰 편이다. 의사들이 대도시로 몰리면서 지역의사 수가 절대 부족한 건 우리나라와도 닮은꼴이다. 생산인구 감소와 지역 의료체계 붕괴는 병상 부족을 초래해 장기요양이 필요한 만성질환자나 말기 환자들이 사실상 방치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의료 난민’의 양산이다. 병원 입원이 거절된 환자들은 결국 가족들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런 의료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는 ‘재택형 의료병상’ 도입을 제시하고 있다. 의료 의존도가 높은 고령 환자 등의 요양병상에 일상을 더한 집합주택이다. 유지비용이 높은 의사를 아웃소싱해 방문 진료로 돌리되 환자 상태를 24시간 체크할 수 있는 간호 인력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필요에 따라 지역 주치의나 치과의사, 약사 등이 방문해 환자를 돌본다. 환자 입장에선 생활공간에서의 안락함을 유지할 수 있고, 병원은 별도 병상을 두지 않아 비용을 아낄 수 있다. 저출산 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나라에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아 보인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VOC.’ 새와 꽃잎 문양이 그려진 청화백자 한가운데 난데없이 큼지막한 알파벳이 적혀 있다. 중국 청화백자를 모티브로 17세기 후반 일본 아리타(有田) 지역에서 만들어진 자기(瓷器)다. 400년 전 전통 일본 자기에 알파벳이 새겨진 까닭은 무얼까. VOC는 제국주의 시대 악명을 떨쳤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약칭. 16세기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후 VOC는 일본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에 지사를 세우고 일본 자기 매입에 적극 나섰다. 당시 유럽 귀족층 사이에서 중국, 일본 자기를 사들여 저택 곳곳을 장식하는 게 유행일 정도로 인기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VOC는 유럽 소비자들의 취향을 반영한 디자인을 일본 도공들에게 주문 생산하게 된다. VOC 마크가 새겨진 일본 청화백자는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됐다. 2일 둘러본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세계도자실’은 기원전 2세기 중국 한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도자기가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거쳐 멀리 유럽인들을 매혹시킨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자기 전시 코너는 유럽에서 각광받은 아리타 자기의 예술적 성취 뒤에 조선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사가현에 끌려온 도공 이삼평 등 규슈지역 조선 장인들의 계보도를 전시한 것. 이삼평은 도자기를 만드는 데 필수재료인 고령토를 수년간 찾아 헤맨 끝에 아리타 근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발견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아리타 자기가 탄생한 배경이다. 유럽인들이 숱한 시행착오 끝에 18세기 이후 세계 도자기의 표준이 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과정도 흥미롭게 펼쳐진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작은 미미했다. 전시 후반부에 이르면 중국 청자와 이를 모방한 네덜란드의 델프트 도기가 나란히 진열돼 눈길을 끈다. 이 중 17세기 후반 제작된 델프트 도기 접시는 17세기 전반 중국 명나라 경덕진요에서 생산된 청화백자 접시와 비교하면 한눈에 봐도 둔탁한 색상에 조잡한 조형미가 느껴진다. 당시 유럽인들은 양질의 고령토에 가마 온도를 1200도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자기 제작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연금술사까지 동원해 약 100년 동안 자기 생산에 도전한 유럽인들의 집요함은 끝내 빛을 발하게 된다. 18세기 들어 독일 마이센 자기 등 양질의 자기 생산에 성공한 것. 일본 가키에몬 양식의 마이센 채색 자기는 동서양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룬 경지를 보여준다. 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네덜란드 국립도자박물관과 흐로닝언박물관에서 113점의 자기를 대여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이례적으로 양측 큐레이터의 상호 방문 없이 영상회의로 유물 대여를 진행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오묘한 미소로 신라 불상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국보 제78호와 제83호 반가사유상 2점이 올 11월부터 나란히 전시된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전시실처럼 필수 관람 코스로 만들겠다는 취지다. 앞서 국립중앙박물관은 2004년, 2015년 특별전 등 두 차례를 제외하고는 줄곧 두 불상 중 하나만 교대로 전시해왔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3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모나리자가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듯 반가사유상을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만들겠다”며 “현재보다 8배 넓은 반가사유상 전용 전시공간을 올해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박물관은 2층 기증관 입구에 두 반가사유상을 함께 전시할 수 있는 별도 공간(440m²)을 마련할 계획이다. 약 40만 점에 이르는 소장품 중 유독 반가사유상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박물관은 신라 불교미술의 세계성과 독창성을 들었다. 민 관장은 “반가사유상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인도지만 예술성이나 종교적 측면에선 한국에서 완성됐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앞서 2015년에 개최된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특별전에서도 두 반가사유상의 동시 전시는 화제가 됐다. 1분 30초 간격으로 점멸하는 특수 조명을 사용해 두 불상의 신비한 미소를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