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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나나는 늘 오빠 몫이었다남아 선호가 확실한 친할머니와 살았다. 아빠, 엄마는 맞벌이를 해서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는 나보다 오빠를 더 챙겼다. 귀한 바나나는 오빠 입에만 있었다. 따끔하게 야단 맞는 게 무서워 몰래 밖에 나가 놀이터 구석에 숨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엄마는 시어머니와 딸이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딸을 온갖 학원으로 돌렸다. 넉넉한 형편이 아닌데 딸을 온갖 학원으로 돌렸다. 서예, 십자수, 수영, 웅변까지 안 배운 게 없다. 잔뜩 움츠려 기를 못 펴던 딸은 유독 피아노를 치며 노래할 때 편안했다. 엄마는 그런 딸을 예술중학교로 보냈다. 선화예중 3학년 때, 딸은 자신에게 ‘노래 DNA’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시험에서 국창(國唱) 임방울 선생(1904~1961)에 대한 주관식 문제가 나왔는데 틀렸다. 엄마는 백과사전을 들고 오라고 했다. 알고보니 명창은 엄마의 아버지, 즉 딸의 외할아버지였다.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엄마는 재능이 있었음에도 외할머니(한애순 광주 판소리 무형문화재 1호)의 반대로 국악을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남편의 힘든 삶이 자식에게 물려지지 않길 바랐다. 음악을 포기한 엄마는 딸에게 꿈을 넘겼다.딸, 소프라노 박성희에게 노래는 운명이다. 노래는 말 수 적고 수줍음 많던 그에게 숨이 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대학(이화여대 성악과)에 가서도 ‘프리마돈나’의 꿈은 없었어요. 노래는 그저 도피처였어요. 늘 기가 죽어 있는 저를 유일하게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게 노래였어요. 노래만 하면 가슴이 뚫렸어요. 그렇게 ‘지금’을 살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죠.”노래를 부르면 치유가 되는 나에게만 집중했다. 거창하게 뭘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졸업 직전까지는.# 두 번 마주한 한계 … 소리를 버리고 다시 배우다“메조소프라노 김신자 선생님(전 이화여대 성악과 교수)과 등산을 하는데 대뜸 ‘하늘이 너에게 주신 기막힌 목소리로 인생 한 번 걸어보는 건 어때?’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계속 뇌리에서 맴돌았어요.”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갈고 닦아 나눠주고 싶고, 노래로 얘기하고 싶었다. 졸업 후 무작정 짐싸서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자신있게 이탈리아 밀라노 국립음악원 시험을 봤다. 현실은 냉정했다. 첫 해 떨어졌다. “말과 역사가 다른 곳이잖아요. 단 번에 인정을 받겠다고 자신한 것 자체가 욕심이었죠. 그 때 알았어요. 노래도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을요.”이탈리아 언어와 역사, 문화 공부를 했다. 두 번째 도전. 인터뷰에서 ‘이 나라에 정말 잘 스며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 정서에 관통했다. 합격이었다. 노래를 제대로 잘 할 일만 남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전국으로 성악의 대가(大家)들을 찾아다녔다. 자존심이 또 한 번 무너질 수 있었지만 버틸 각오를 했다. “그러다 렌초 카셀라토라는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분이 절 보더니 다짜고짜 밥을 차려주더라고요. 보통 선생님들은 칭찬을 먼저 하는데 달랐어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유명 테너가 자기를 찾아온 낮선 동양인 여학생에게 대접한 식사의 의미는 따로 있었다. ‘너는 여기서 성공할 수 없다’는 ‘돌려까기’였다.“이미 제 목소리가 한국적으로 굳어졌다는 거예요. 편한 발성의 출발점인 벨칸토 창법으로 바꾸기 어렵다고요. 냉정하게 한국으로 돌아가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해요. 제가 희망이 없는지 계속 물으니까…쐐기를 박더라고요.”‘정 그렇다면 2년 동안 노래하지 말라’고 했다. 그 어렵다는 국립음악원에 들어갔는데, 이해하기 힘들었다. 받아달라고 몇 번이고 다시 렌초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 할아버지 선생님이 자기 친구가 하는 시골 농장에 데려갔어요. 농장서 기르는 소를 가르키더니 ‘음메’ 울음 소리부터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그는 노래를 멈추고 ‘소리’를 다시 배웠다. 밀라노에서 렌초 선생님이 사는 아드리아로 이사갔다. 그곳 카페 아주머니 부부가 작은 동양인 소프라노 지망생을 딸처럼 예뻐했다. 아주머니가 만들어주는 카푸치노 한 잔이 좋아 늘 출근 도장을 찍고 음악과 조금 멀어져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그러니 굳어 있던 발성이 하나씩 허물어졌다. 렌초 선생님은 그래도 칭찬을 해주지 않고 ‘너의 꿈을 응원한다’고만 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간 첫 콩쿠르에서 생애 첫 1등. 정통 이탈리아 발성이 스며든 그의 노래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본격적으로 그는 유럽 주요 무대에 섰다. 동양인 최초로 이탈리아 최고 음악 학위 과정인 ‘코르소 비엔니오’를 취득했다. 수많은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오페라 ‘마술피리’, ‘라보엠’, ‘리골레토’, ‘라트비아타’ 등에선 주역을 맡았다. 흘러흘러 한국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었다. “좌절하고 조롱받았던 시간이 오히려 기회가 됐어요. 그 과정이 없었다면 금방 매너리즘에 빠졌을 거예요.”# 내 상처를 이해하니 다른 사람 결핍이 보였다비로소 어린 시절의 외로움, 결핍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품는 여유가 생겼다. 버거웠던 할머니가 착한 소녀로 보였다. 할머니의 딱한 인생도 보였다. 6 ּ 25 전쟁 때 남편 잃고 아들을 어렵게 키웠으니 애착이 얼마나 컸을까. 장남을 너무 사랑해 며느리와 손녀에겐 본심이 차갑게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제야 알았다. 할머니도 그만큼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조금 거친 방식으로 손녀의 울타리가 되어주려 했던 것을. 할머니가 매일 기도해준 것도 생각이 났다. 받아들이니 숨지 않고 할머니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투병하신 할머니가 집에서 요양을 했는데 돌아가시기 전날 제가 거품 목욕을 시켜 드렸어요. 욕조에서 제 손을 꼭 잡고 좋다고 웃으셨는데 그런 예쁜 미소를 처음 봤어요. 냄새 나는 내복도 버리고, 예쁜 옷으로 갈아 입혀 드렸죠. 편하게 침대에서 잠을 재워드리고 ‘내일 올게요’라며 집을 나섰는데, 다음 날 새벽 4시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할머니, 고마웠어요’라는 생각 밖엔 안 들더라고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부모없는 아이들을 위해 깨우침을 얻고 활동하던 중, 부모없이 보육원에서 자란 여학생들을 품을 기회가 생겼다. 9년 전 한 천주교 신부가 부탁을 했다. 어려운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아이들의 결핍을 채우는 일이었지만 처음엔 선뜻 응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 모습이 아이들에게 화려하게 보여질까 걱정되더라고요. 자기 처지와 비교가 될테고, 마음의 상처가 될까봐 망설여졌어요.”2020년 신부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의 노력으로 경기도 가평에 ‘노비따스음악중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를 개교했다는 소식이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전국 각지 보육원에서 모인 10대 소녀들 12명 중 노래에 관심이 있다고 한 4명을 품으로 들였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잖아요. 처음엔 저도 믿지 않더라고요. 선물을 사줘도 챙기지 못하고 잃어버렸어요. 자기 것을 챙겨본 경험이 없으니까요.”소녀들은 기본적인 일상조차 낯설어 했다. 계절에 맞게 옷 입는 것부터 알려줬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된장찌개와 비빔밥을 만들어 먹였다. 집밥을 처음 먹는 모습이 안 쓰러웠다. 그러다 무심코 봤다. 아이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다른 아파트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을. “세상과 벽을 치고 있더라고요. 사람과 눈을 마주친 경험도 없었고요. 그걸 하나씩 허물어주고 싶었어요.”그들에겐 성악보다 삶을 가르친 것 같다. 이탈리아에도 데려가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표정이 환해졌다. 올해, 4명 중 두 명이 이화여대와 삼육대 성악과에 합격했다. 출신 보육원에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누가 내 존재를 알아주고 ‘엄지 척’해주는 게 아이들에겐 처음이었다. 후원과 장학금을 전부 학교에 연결하고 있는 그는 말한다. “저도 아이들의 삶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면서 배운 게 많아요. 성인 나이로 세상에 나갈 때 결핍이 느껴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아이들이 세상에 어떤 사랑을 가져다줄지 기대돼요.”# 삶을 노래하는 미래는 ‘기적’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결핍을 메우는 계획을 줄지어 잡고 있다. 올해 6월 6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주연으로 나서고 7, 8월에는 유럽 공연 투어를 진행한다.‘국창’ 임방울 선생의 울림은 세대를 건너 외손녀에게 이어져 또 어디론가 널리 스며들고 있다. 판소리에서 오페라로, 그리고 다시 자신의 DNA를 모르고 살아온 아이들의 목소리로. “이렇게 삶의 울림을 노래로 전하면 세계의 소리로 가는 연결 고리가 되지 않을까요. 외국인들이 한국 특유의 한(恨)과 정(情)이 담긴 소리를 배워 부른다면 그게 진짜 케이 팝(K-POP)일 것 같아요.”자신이 이탈리아 시골에서 원조 서양의 소리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국악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있다면, 한 번쯤 한국 시골에 가서 소들의 울음 소리를 들어보라고 얘기할 자격이 그에겐 있다. “치열하게 부딪히고, 혹독하게 무너진 경험 덕분에 세상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노래가 풍성해졌어요. 우리 여성들은 여러 일을 할 수 있는 ‘멀티 태스킹’ 능력이 좋고 인내심도 강해요. 버티면 뭐든지 기적을 이뤄낼 수 있어요.”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바나나는 늘 오빠 몫이었다남아 선호가 확실한 친할머니와 살았다. 아빠, 엄마는 맞벌이를 해서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는 나보다 오빠를 더 챙겼다. 귀한 바나나는 오빠 입에만 있었다. 따끔하게 야단 맞는 게 무서워 몰래 밖에 나가 놀이터 구석에 숨었다.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엄마는 시어머니와 딸이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딸을 온갖 학원으로 돌렸다. 서예, 십자수, 수영, 웅변까지 안 배운 게 없다. 잔뜩 움츠려 기를 못 펴던 딸은 유독 피아노를 치며 노래할 때 편안했다. 엄마는 그런 딸을 예술중학교로 보냈다. 선화예중 3학년 때, 딸은 자신에게 ‘노래 DNA’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시험에서 국창(國唱) 임방울 선생(1904∼1961)에 대한 주관식 문제가 나왔는데 틀렸다. 엄마는 백과사전을 들고 오라고 했다. 알고보니 명창은 엄마의 아버지, 즉 딸의 외할아버지였다.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엄마는 재능이 있었음에도 외할머니(한애순 광주 판소리 무형문화재 1호)의 반대로 국악을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남편의 힘든 삶이 자식에게 물려지지 않길 바랐다. 음악을 포기한 엄마는 딸에게 꿈을 넘겼다.딸, 소프라노 박성희에게 노래는 운명이다. 노래는 말수 적고 수줍음 많던 그에게 숨이 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대학(이화여대 성악과)에 가서도 ‘프리마돈나’의 꿈은 없었어요. 저를 유일하게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게 노래였어요. 노래만 하면 가슴이 뚫렸어요. 그렇게 ‘지금’을 살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죠.”노래를 부르면 치유가 되는 나에게만 집중했다. 거창하게 뭘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졸업 직전까지는. >> 두 번 마주한 한계 … 소리를 버리고 다시 배우다“메조소프라노 김신자 선생님(전 이화여대 성악과 교수)과 등산을 하는데 대뜸 ‘하늘이 너에게 주신 기막힌 목소리로 인생 한 번 걸어보는 건 어때?’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계속 뇌리에서 맴돌았어요.”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갈고 닦아 나눠주고 싶고, 노래로 얘기하고 싶었다. 졸업 후 무작정 짐싸서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자신있게 이탈리아 밀라노 국립음악원 시험을 봤다. 현실은 냉정했다. 첫 해 떨어졌다.“말과 역사가 다른 곳이잖아요. 단 번에 인정을 받겠다고 자신한 것 자체가 욕심이었죠. 그 때 알았어요. 노래도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을요.”이탈리아 언어와 역사, 문화 공부를 했다. 두 번째 도전. 인터뷰에서 ‘이 나라에 정말 잘 스며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 정서에 관통했다. 합격이었다. 노래를 제대로 잘 할 일만 남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전국으로 성악의 대가(大家)들을 찾아다녔다. 자존심이 또 한 번 무너질 수 있었지만 버틸 각오를 했다.“그러다 렌초 카셀라토라는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분이 절 보더니 다짜고짜 밥을 차려주더라고요. 보통 선생님들은 칭찬을 먼저하는데 달랐어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유명 테너가 자기를 찾아온 낮선 동양인 여학생에게 대접한 식사의 의미는 따로 있었다. ‘너는 여기서 성공할 수 없다’는 ‘돌려까기’였다.“이미 제 목소리가 한국적으로 굳어졌다는 거예요. 편한 발성의 출발점인 벨칸토 창법으로 바꾸기 어렵다고요. 냉정하게 한국으로 돌아가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해요. 제가 희망이 없는지 계속 물으니까…쐐기를 박더라고요.”‘정 그렇다면 2년 동안 노래하지 말라’고 했다. 그 어렵다는 국립음악원에 들어갔는데, 이해하기 힘들었다. 받아달라고 몇 번이고 다시 렌초를 찾아갔다. “그 할아버지 선생님이 자기 친구가 하는 시골 농장에 데려갔어요. 농장서 기르는 소를 가르키더니 ‘음메’ 울음 소리부터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그는 노래를 멈추고 ‘소리’를 다시 배웠다. 밀라노에서 렌초 선생님이 사는 아드리아로 이사갔다. 그곳 카페 아주머니 부부가 작은 동양인 소프라노 지망생을 딸처럼 예뻐했다. 아주머니가 만들어주는 카푸치노 한 잔이 좋아 늘 출근 도장을 찍고 음악과 조금 멀어져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그러니 굳어 있던 발성이 하나씩 허물어졌다. 렌초 선생님은 그래도 칭찬을 해주지 않고 ‘너의 꿈을 응원한다’고만 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간 첫 콩쿠르에서 생애 첫 1등. 정통 이탈리아 발성이 스며든 그의 노래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본격적으로 그는 유럽 주요 무대에 섰다. 동양인 최초로 이탈리아 최고 음악 학위 과정인 ‘코르소 비엔니오’를 취득했다. 수많은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오페라 ‘마술피리’, ‘라보엠’, ‘리골레토’, ‘라트비아타’ 등에선 주역을 맡았다. 흘러흘러 한국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었다.“좌절하고 조롱 받았던 시간이 오히려 기회가 됐어요. 그 과정이 없었다면 금방 매너리즘에 빠졌을 거예요.”>> 내 상처를 이해하니 다른 사람 결핍이 보였다비로소 어린 시절의 외로움, 결핍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품는 여유가 생겼다. 버거웠던 할머니가 착한 소녀로 보였다. 할머니의 딱한 인생도 보였다. 6·25 전쟁 때 남편 잃고 아들을 어렵게 키웠으니 애착이 얼마나 컸을까. 장남을 너무 사랑해 며느리와 손녀에겐 본심이 차갑게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제야 알았다. 할머니도 그만큼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조금 거친 방식으로 손녀의 울타리가 되어주려 했던 것을.할머니가 매일 기도해준 것도 생각이 났다. 받아들이니 숨지 않고 할머니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투병하신 할머니가 집에서 요양을 했는데 돌아가시기 전날 제가 거품 목욕을 시켜 드렸어요. 욕조에서 제 손을 꼭 잡고 좋다고 웃으셨는데 그런 예쁜 미소를 처음 봤어요. 냄새 나는 내복도 버리고, 예쁜 옷으로 갈아 입혀 드렸죠. 편하게 침대에서 잠을 재워드리고 ‘내일 올게요’라며 집을 나섰는데, 다음 날 새벽 4시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할머니, 고마웠어요’라는 생각 밖엔 안 들더라고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부모없는 아이들을 위해깨우침을 얻고 활동하던 중, 부모없이 보육원에서 자란 여학생들을 품을 기회가 생겼다. 9년 전 한 천주교 신부가 부탁을 했다. 어려운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아이들의 결핍을 채우는 일이었지만 처음엔 선뜻 응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 모습이 아이들에게 화려하게 보여질까 걱정되더라고요. 자기 처지와 비교가 될테고, 마음의 상처가 될까봐 망설여졌어요.”2020년 신부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의 노력으로 경기도 가평에 ‘노비따스음악중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를 개교했다는 소식이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전국 각지 보육원에서 모인 10대 소녀들 12명 중 노래에 관심이 있다고 한 4명을 품으로 들였다.“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잖아요. 처음엔 저도 믿지 않더라고요. 선물을 사줘도 챙기지 못하고 잃어버렸어요. 자기 것을 챙겨본 경험이 없으니까요.”소녀들은 기본적인 일상조차 낯설어 했다. 계절에 맞게 옷 입는 것부터 알려줬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된장찌개와 비빔밥을 만들어 먹였다. 집밥을 처음 먹는 모습이 안 쓰러웠다. 그러다 무심코 봤다. 아이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다른 아파트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을. “세상과 벽을 치고 있더라고요. 사람과 눈을 마주친 경험도 없었고요. 그걸 하나씩 허물어주고 싶었어요.”그들에겐 성악보다 삶을 가르친 것 같다. 이탈리아에도 데려가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표정이 환해졌다. 올해, 4명 중 두 명이 이화여대와 삼육대 성악과에 합격했다. 출신 보육원에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누가 내 존재를 알아주고 ‘엄지 척’해주는 게 아이들에겐 처음이었다.후원과 장학금을 모두 학교에 연결하고 있는 그는 말한다. “저도 아이들의 삶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면서 배운 게 많아요. 성인 나이로 세상에 나갈 때 결핍이 느껴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아이들이 세상에 어떤 사랑을 가져다줄지 기대돼요.”>> 삶을 노래하는 미래는 ‘기적’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결핍을 메우는 계획을 줄지어 잡고 있다. 올해 6월 6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주연으로 나서고 7, 8월에는 유럽 공연 투어를 진행한다.‘국창’ 임방울 선생의 울림은 세대를 건너 외손녀에게 이어져 또 어디론가 널리 스며들고 있다. 판소리에서 오페라로, 그리고 다시 자신의 DNA를 모르고 살아온 아이들의 목소리로.“이렇게 삶의 울림을 노래로 전하면 세계의 소리로 가는 연결 고리가 되지 않을까요. 외국인들이 한국 특유의 한(恨)과 정(情)이 담긴 소리를 배워 부른다면 그게 진짜 케이 팝(K-POP)일 것 같아요.”자신이 이탈리아 시골에서 원조 서양의 소리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국악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있다면, 한 번쯤 한국 시골에 가서 소들의 울음 소리를 들어보라고 얘기할 자격이 그에겐 있다.“치열하게 부딪히고, 혹독하게 무너진 경험 덕분에 세상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노래가 풍성해졌어요. 우리 여성들은 여러 일을 할 수 있는 ‘멀티 태스킹’ 능력이 좋고 인내심도 강해요. 버티면 뭐든지 기적을 이뤄낼 수 있어요.”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6월 세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클래식 공연이 찾아온다. 클래식 공연 기획자이자 음악 해설사인 김숙진 단장의 킴스 오케스트라와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 리틀엔젤스 콰이어가 한 무대에서 세대 공감을 전한다.6월 14일 경기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열리는 킴스 오케스트라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김숙진의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가 그것이다. 청소년과 학부모, 그리고 고양 시민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된 해설형 클래식 콘서트다.공연은 김 단장이 직접 지휘하는 오프닝 무대로 문을 연다. 이어 소프라노 조수미의 전속 지휘를 맡고 있는 국내 정상급 지휘자 최영선이 킴스 오케스트라 연주를 이끈다. 반선경, 윤여훈, 한아름, 지준혁, 최진형 등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이 익숙한 아리아를 들려 주고 리틀엔젤스 콰이어의 맑은 합창이 하모니를 이룬다. 세계적인 탱고 듀오 펠린 에르칸과 미겔 칼보의 화려한 춤과 팝페라 그룹 카르디오 팀의 공연까지 더해진다. 클래식에 춤과 퍼포먼스를 결합한 확장형 공연이 될 전망이다. 안성균 총감독이 전체적인 공연 완성도를 높인다.김 단장은 “음악은 세대를 잇는 가장 따뜻한 언어”라며 “아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티켓은 17일부터 판매한다. 문의 고양문화재단(1577-7766).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의 은어(속어)죠. 제아무리 모두 갖춘 인생이라도 건전하게 교감하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함께 숨 막히고 함께 버틴 날1995년 2월 13일.수많은 연세대 농구 동문 가운데 떼려야 뗄 수 없는 선후배인 둘은 자신들의 농구 인생에서 기억이 가장 선명한 순간으로 같은 날을 꼽는다. 이날이다.그날 둘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제1체육관에 있었다. 1994~1995 농구대잔치 8강 플레이오프 3차전이었다. 그 직전 시즌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우승을 거머쥔 연세대는 이 시즌에도 잘나갔다. 정규리그 13전 전승 1위. 라이벌 고려대도 꺾었다. 8강 상대는 실업의 자존심 삼성전자였다.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야전사령관’ 이상민이 다쳐 공백이 생겼지만 ‘국보급 센터’ 서장훈이 있었기에 쉽게 고지를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전문가들은 2연패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다. 삼성의 강한 압박에 2차전을 넘겨 줬다. 삼성은 3차전에서도 육탄 수비로 연세대를 괴롭혔다. 서장훈에게는 센터 3명이 돌아가며 거칠게 달라붙었다.전반전 막판 대형사고가 터졌다. 서장훈이 리바운드 경합 과정에서 상대 선수가 휘두른 팔꿈치에 목을 강하게 맞아 코트 바닥에 쓰러졌다.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온몸에 마비가 왔다. 더는 뛸 수 없었다. 팀 대들보가 실려 나가자 벤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당시 연세대 감독은 최희암 현 고려용접봉 부회장, 코치는 박건연 현 KOREA 3X3(KXO·한국3대3농구연맹) 회장이었다. 둘은 하프타임 때 어떻게든 분위기를 되살려야 했다. 최 부회장은 서장훈 대신 센터 구본근을 투입하며 스피드를 더 살리는 맞불 작전을 택했다. 박 회장은 응급처지를 받던 서장훈 상태를 살피면서 동시에 선수들이 과열된 경기 흐름에 휘말리지 않도록 계속 다독였다.깜짝 활약을 펼친 구본근의 분전에도 연세대는 졌다. 4강 진출 좌절. 그런데 더 급박한 일이 벌어졌다. 에너지를 다 쏟아낸 구본근이 경기 후 구토를 하더니 탈진해 버렸다. 호흡 곤란 증세가 왔다.“본근아, 정신 똑바려 차려. 정신 차려.”박 부회장은 소리치며 구본근의 몸 여기저기를 멍이 들 정도로 꼬집고 때렸다. 경기장 밖에선 소녀팬들이 울고불고 난리였다. 간이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구본근은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다. 최 부회장은 박 회장에게 상황 정리를 맡기고 인터뷰를 했다.“승패를 떠나 잘 싸워 준 선수들에게 고맙다. 스코어에선 졌지만 경기에선 이겼다고 본다. 패배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다.”마음 같아선 동업자 정신의 문제를 강하게 지적하고 싶었다. 하지만 눌렀다. 선수 부상도 결국 감독 책임이라고 여겼다. 당시만 해도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던 최 부회장은 그날 술을 마셨다고 한다. 다친 선수들에 대한 걱정과 패배의 충격이 컸다. 병원 밖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퍼졌다.당시 혼자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넘겼을까 싶다. 그래서 2월 13일은 최 부회장과 박 회장이 함께 숨막히고 함께 버티며 서로 통했던 날이다.“그날 내가 앞에서 방향을 잡고 건연이 네가 뒤에서 팀을 붙잡았어.”● 지금도 둘 사이엔 농구가 먼저다둘이 만나면 인사는 짧고 안부는 생략된다. 매일 전화하고 자주 보는 사이다. 무조건 농구 얘기가 먼저다.“요즘 프로농구에서 센터들이 왜 3점슛을 아끼는지 모르겠어. 못 던지게 하는 건가?”(최희암)‘영원한 연세대 감독’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최 부회장은 박건연 회장 앞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센터가 상대 센터를 끌어내려면 3점슛을 더 잘 쏴야 하지 않아?”(최희암)편하게 최 감독, 박 코치라고 하자.“요즘 픽앤드롤(공격자 2명이 스크린을 활용해 득점 기회를 만드는 전술) 수비도 그래. 다 스위치(수비 상대를 서로 바꾸는 것)를 하더라고. 예전에는 ‘파이트스루’라고 해서 상대 스크린이 오면 수비가 그대로 뚫고 나가 공 가진 상대를 따라갔는데 말이야. 지금은 (스크린에) 걸리면 바로 스위치해 버리니까 계속 미스매치(신장 차이 등 공격자에 비해 수비자가 잘못 짝 지어진 상황)가 나잖아. 골밑도 뚫리고 코너도 열리고…. 절대 안 되지. 어떻게든 밀착 수비를 해 줘야 돼.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깨를 비벼서라도 끝까지 따라가 줘야 해.”(최희암)설명이 깊어진다.박 코치가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그래서 형님이 헷지 디펜스(동료 수비를 도와 울타리를 쌓듯 공격 움직임을 저지하는 전술) 연습을 엄청나게 많이 시키셨잖아요.”숨 돌릴 틈 없이 다시 주문이 날아든다.“더블팀(수비 두 명이 순간적으로 공격자를 에워 싸는 것)도 약해. 더블팀에 들어갔으면 공이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말이야. 파울이 나더라도 공을 못 나오게 해야 해.”(최희암)주문도 하기 전에 식탁 위에 농구 용어가 한가득 차려졌다. 박 코치는 정리에 능하다.“그러니까 형님이 감독을 다시 하셔야죠. 일본에는 80대 감독도 있어요.”작전타임 같다. 두 사람의 농구는 끝날 기미가 없다.● 벤치 설움을 아는 선배, 그에게 붙잡힌 후배인연의 시작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일고에서 농구를 잘했던 박 코치가 연세대에 입학하던 해다.“원래 고려대를 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원서 쓰기 전날까지 (신일고 출신 고려대 농구선수) 임정명 선배 집에 잡혀 있었거든요. 접수 전날 밤이 돼서야 집에 가라고 보내 준 거예요. 그런데 접수 당일 원서 써서 고려대로 가다가 연세대 선배들한테 ‘납치’를 당한 거지. 저는 죽어도 고려대였거든요.”(박건연)그렇게 연세대 사람이 됐다. 최 감독은 연세대 74학번. 박 코치보다 7년 선배다. 1977년 현대 농구팀 창단 멤버로 입단한 최 감독은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박 코치가 연세대에 입학한 해에 제대했다.“형님이 81학번 중에서도 저를 특별히 예뻐해 주셨죠.”박 코치는 대학 시절 마음고생이 컸다. 실력을 펼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최 감독 역시 비슷한 설움을 겪은 사람이었다. 휘문고 농구부 주장이었지만 체육특기자 진학이 어려워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치르고 연세대 체육교육과에 들어갔다. 휘문고 교장 등의 도움으로 농구부에 입부했다. 1학년 때는 주전이었지만 쟁쟁한 후배들이 들어오면서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중도 포기한 친구들과 비교하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위기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봤어요. 당장 성과가 안 나도 포기하지 않고 버틴 덕에 배운 것도 많았죠.”벤치 신세였던 3학년 때는 잠시 연세대 농구팀을 지도한 미국 농구 전문가 도널드 휴스턴에게 전술적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이때 전수받은 것들이 나중에 지도자 할 때 탄탄한 밑거름이 됐다. 새롭게 농구를 알면서 버티는 의지가 더 생겼다. 그렇기에 비슷한 고민을 하던 후배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농구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형님이 ‘힘들게 연세대 왔는데 왜 그만두냐? 조금 쉬면서 마음 추스르고 다시 체육관에 나와라’라고 해 주셨어요. 형님 때문에 버텼습니다.”(박건연)그런 박 코치에게 또 위기가 왔다. 실업팀 입단이 무산된 것.“졸업식 이틀 전에 연락이 왔어요. 못 받아 줄 것 같다고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죠.”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 제대 후를 생각하니 아득했다. 그때 박 코치의 손을 최희암이 잡아줬다. 최 감독은 1982년 은퇴하고 현대 직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연세대 농구부 지도를 도왔다. 1986년 연세대 감독이 됐다. 이듬해 1월, 최 감독은 휴가 나온 박 코치에게 대뜸 물었다.“휴가가 며칠이냐?”“보름이죠.”“나 혼자 하기 힘드니까 같이하자.”그렇게 둘은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얼마나 좋았겠어요. 6월 제대한 날에 바로 체육관으로 올라갔죠.”● 세 번의 동행… 끊기지 않은 ‘인생의 패스’둘은 대학 선후배로 시작해 세 번이나 감독과 코치로 호흡을 맞췄다. 한 번은 흔하다. 두 번은 신뢰다. 세 번이면 다르다. 최 감독은 박 코치가 여자 농구팀에서 코치나 감독 제안을 받을 때마다 보내 줬다. 연세대 코치 자리가 비면 다시 박 코치를 호출했다.1994년 박 코치가 여자 실업팀 현대산업개발 코치를 할 때였다. 당시 연세대 코치이던 유재학 현 KBL(한국농구연맹) 경기운영본부장이 신생팀 감독으로 부임해 코치 자리가 비었다.“건연아, 내가 널 데려오려고 그 팀에 찾아갔지.”“형님이 부르셔서 팀에 사표를 냈죠. 그런데 수리를 안 해 줘서 한동안 두 군데서 월급을 받았죠. 형님이 같이 가서 정리해 주셨잖아요. 다른 여자 팀으로 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연세대로 다시 왔죠.”박 코치는 이후 다시 여자 팀 감독을 맡았다가 한 번 더 연세대 코치로 유턴했다. 2005년에는 연세대 감독까지 맡았다.“형님 때문에 저는 연세대에 5번이나 ‘입학’한 겁니다. 형 아니었으면 제 인생 길은 여기저기 끊겨 있었을 거예요.”(박건연)“나 만난 걸 다행인 줄 알아야 돼. 건연이 너는 내가 놓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박 코치는 2023년 최 감독을 KXO 조직위원장으로 모셨다. 그때는 박 코치가 3대3 농구 발전을 위해 힘 써달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최 감독은 기꺼이 응했다. 최 감독은 특수 용접재를 생산하는 국내 굴지의 중견기업을 이끄는 산업 리더다. 중국 다렌 지사장을 비롯해 부사장, 사장을 거쳐 부회장에 올랐다. 박 코치 역시 농구 전문지를 창간해 운영도 하고 다른 분야 사업도 해 봤다. 코트에서 함께한 시간을 넘어 인생 후반전을 살아 가는 방식마저 비슷하다.“지금도 형님이 옆에 있으면 방향이 흔들리지 않아요.”(박건연)농구판에서 이런 관계는 흔치 않다.● 슛이 빗나가도 리바운드를 잡을 줄 안다박 코치는 최 감독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최희암이라는 길잡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잘 살았다 싶죠.”제2의 인생도 농구에서처럼 성과를 낸 최 감독이 박 코치는 놀랍다.“농구와 제조업이 통하는 게 있다는 형님의 접근법이 탁월했던 거죠.”최 감독은 고려용접봉에 들어왔을 때 농구처럼 노력하고 인내하면 당장은 성과가 안 나더라도 배우는 게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일을 반복하다 보면 안정적인 실력이 쌓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일을 배웠다. 그래서 빨리 적응했다. 연세대 감독 시절 선수를 키운 노하우를 살려 직원 관리에도 스스로 눈을 떴다. 최 감독은 분업 농구의 대명사다. 선수마다 확실한 역할을 주고 그 포지션을 책임지도록 했다. 훈련 때는 다른 포지션에서도 뛰어 보게 했다. 자기 역할만 아는 것을 넘어 다른 포지션 사정까지 이해하는 선수가 더 좋은 팀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 그렇게 됐다. 선수들은 자기 장점을 120% 끌어냈다. 팀에서 뛰어야 할 이유를 알게 됐다. 기본, 노력, 반복, 경청의 힘으로 최 감독은 임기 내내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김훈 조상현 조동현 등을 철저하게 포지션별 비교우위에 올려 놓았다.이를 고려용접봉에서도 잘 이용했다. 사장 때는 권역별 영업 조직을 산업별 담당을 두는 조직으로 개편해 업무 효율을 개선했다.“경영도 농구와 참 비슷하단 말이에요. 역할 분배가 중요하죠. 업무 분야마다 누가 적임자인지 잘 판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박 코치는 평생 모신 ‘나의 감독’으로서 최 감독이 존경스럽다.“형님을 보면서 진정한 프로가 뭔지를 알게 된 것 같아요.”“한 우물을 미련하게 끝까지 파는 과정에서 얻은 거라고 할까요. 팀을 이끌 때 박 코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예전부터 감독과 코치의 시선은 달라야 한다고 했던 저예요. 내가 위를 보고 있을 때 박 코치가 밑을 잘 봐 줬죠. 그러니 선수들을 설득했고 서로 뭉치게 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박 코치 때문에 한 우물 팔 수 있었죠.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호기심은 여전히 식지 않는 최 감독이다. 어떤 이슈든 연구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애매하거나 잊어버린 정보가 있으면 즉시 휴대전화로 검색해서 확인한다. 박 코치는 60대 중반이지만 이런 최 감독 앞에선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객관적 근거나 수치가 뒷받침 안 되는 얘기는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 괜히 두루뭉술 넘어가려고 했다간 분위기가 묘해진다.“잠깐만. 건연이 네가 방금 한 얘기 팩트체크 좀 해야겠어. 정확한 거야?”“10만 원 내기 할까요, 형님?” 박 감독도 ‘한 지식’ 하는 사람이다. 세상 현안에 밝다. 그런데도 최 감독 지식과 논리를 따라가려고 많이 공부한다. 같이하면 좋을 일도 보인다. 최 감독은 신사업 개발과 용접 재료 추가 국산화에 신경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농구 발전과 엘리트 체육 선수들의 학업 및 진학 여건 개선 등에도 나서고 싶다.“나나 박 코치나 운동하면서 혜택을 많이 받은 세대잖아요. 지금 세대도 혜택을 누려야 하는데, 현재 운동선수 지원 시스템으로는 쉽지 않아요. 어떻게 목소리를 내야 할지 고민입니다.”박 코치는 완전히 ‘붙들린’ 몸이다. 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사이다.“첫 번째 연세대 코치 직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이민 가려고 했을 때 형님이 못 가게 하셨잖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같이 저녁식사를 하네요. 감사합니다.”“건연이 너, 미국 갔으면 총 맞을 수도 있었어. 내가 생명의 은인이야. 너한테 감사한 게 많다. 나 대신 술도 자주 마셔 주고. 고생했다.”세월이 흘렀지만 앞에서 길을 보는 사람과 그 길이 흔들리지 않게 뒤에서 받쳐 주는 사람의 역할은 바뀐 게 없다.“건연야, 농구에서 슛이라는 게 100% 들어가는 법 있더냐. 3점슛 성공률 40%만 되도 끝내주는 선수잖아. 들어갈 수도 있고 안 들어갈 수도 있는 게 슛인데 그보다 우리는 리바운드 잡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했잖아. 계속 너하고 ‘인생 리바운드’ 좀 노려 보려고.”“형님은 하겠다면 하시는 분이잖아요. 뭐든지 도울 수 밖에 없죠.”박 코치는 ‘최희암 리바운드’를 위해 늘 ‘박스아웃’ 할 준비가 돼 있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인공지능(AI) 시대 병원의 변화와 미래를 조망하는 대한병원협회 주최 ‘코리아 헬스케어 콩그레스(KHC) 2026’이 9일부터 이틀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다.‘AI 시대, 병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제로 열리는 KHC 2026에는 각급 병원장을 비롯해 주요 의료 관계자들이 참석해 병원 운영과 의료 서비스 전반의 전환 방향을 논의한다. 의료 정책과 산업 및 기술 흐름을 점검하고 변화하는 의료 환경 속에서 병원의 역할을 재정립할 예정이다. 병원산업전시회도 열려 최신 의료 관련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KHC 2026의 핵심 의제는 AI 기반 진료와 데이터 중심 병원 운영이다. 의료 현장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활용해 진단과 치료 정확도를 높이고 효율적인 병원 운영 기술과 사례를 공유한다. 특히 의료 데이터를 토대로 한 △의사결정 지원 방법 △환자 맞춤형 서비스 △병원 경영 최적화 등을 토론한다. 치료 공간을 넘어 데이터와 기술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병원을 집중 전망한다.헬스 케어 관련 기업들도 참석해 회복 및 예방 기술을 소개한다. 웰니스 솔루션을 제공하는브리덴은 빛, 열, 소리를 결합해 신체 자율신경 안정과 컨디션 회복을 유도하는 프리미엄 수면의자를 선보일 예정이다. AI와 빅데이터 시대의 병원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진료와 운영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 혁신과 동시에 환자 삶의 질을 고려한 회복 서비스도 강조되고 있다.의료계 안팎에서는 향후 병원 경쟁력은 데이터 활용 능력과 회복 및 예방 서비스 역량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고속도로는 지역과 산업을 연결하고 국민 교통 복지를 책임지는 국가 핵심 인프라다. 그러나 전체 고속도로의 약 11%(총연장 491km)가 노후했다. 2040년, 이 노후화 비율은 62%(3002km)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인력에 의존한 점검과 사후 대응만으로는 안전과 효율을 동시에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도로공사는 ‘사람 중심의 안전 가치’를 내세우며 고속도로 인프라를 인공지능(AI)에 기반해 재설계하는 AI 전환(AX)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사고 예측과 위험 감소에 더해 축적한 데이터를 활용하는 새로운 산업 토대까지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AI CCTV 도입해 안전사고 예방AX를 통해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고속도로 현장 작업자의 안전사고 예방이다. 차량이 빠르게 이동하는 고속도로에서의 유지 및 보수 작업은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 AI 위험성 평가 시스템은 과거 사고 데이터와 당일 작업 정보를 분석해 잠재 위험 요인을 사전에 도출한다. 숨어 있는 위험을 찾아내 맞춤형 대응 방안까지 제시한다. 관리자 경험에만 의존하다가 데이터를 활용한 사전 진단으로 바뀐 것. 위험 요인은 작업 전 근로자에게 공유된다. 작업이 시작되면 AI 폐쇄회로(CC)TV가 실시간 안전을 관리한다. 기존 CCTV가 사고 이후 원인을 확인하는 도구에 그쳤다면 AI CCTV는 위험 상황을 감지해 그에 따른 대응을 유도한다. 안전모 미착용, 위험 구역 접근, 신호수 미배치를 비롯한 10개 위험 유형을 자동 인식해 관리자에게 즉시 알려 현장 통제와 안전 조치가 신속하게 이뤄지도록 한다. 조치까지 걸리는 시간이 기존의 87.5%로 단축됐다. 현재 함양∼합천 고속도로 건설 사업단 등 6개 현장에서 시범 운영하고 있다. ● 쓰레기 무단 투기 NO… AI 클린아이교량 유지 관리 방식도 달라졌다. 작업자의 육안 점검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생성형 AI 기반 분석 체계를 적용한다. 버티컬 AI(특정 산업이나 작업에 맞춰 고도로 전문화된 AI)는 현장 영상 실시간 자동 판독과 텍스트 검색 기반 판단 기술을 결합해 교량의 손상 원인을 분석하고 대응책을 제시한다. 두 달 이상 걸리던 판단 기간을 이틀로 줄였다. 로봇 점검원 워치독이 사람은 접근하기 어려운 구간까지 정밀하게 점검한다. 점검부터 분석, 보고까지 AI가 실행한다. AI 클린아이 시스템은 고속도로 나들목과 휴게소 주변의 쓰레기 무단 투기를 자동으로 감지한다. 차량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행동 패턴을 인식해 포착한다. 관리자가 영상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던 일을 AI가 ‘얌체 투기족’을 실시간으로 찾아낸다.● 데이터 전면 개방… 산업 생태계 확장 지원 혁신은 서비스 개선을 넘어 산업 생태계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국도로공사는 AI 레디(Ready) 데이터 16종을 민간 기업에 개방했다. 교통, 시설, 안전 데이터를 공유하는 국가 교통데이터 오픈마켓을 구축해 민간에서도 데이터 결합과 분석이 가능한 환경을 마련했다. 민감한 정보도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안심 체계도 갖췄다. 고속도로 유휴 부지를 활용한 지역 거점 AI 데이터센터 건설도 추진 중이다. 광통신망과 전력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센터는 수도권에 집중된 정보기술(IT) 인프라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도로공사 AX는 단순한 기술 도입에 그치지 않고 도로 안전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데이터 기반 산업 생태계를 확장하는 새로운 인프라 모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는 “기술을 과시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AI로 국민 생명을 지키겠다는 의미”라며 “국민이 정말로 체감하는 ‘스마트 고속도로’를 완성해 나가겠다”고 밝혔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의 은어(속어)죠. 제아무리 모두 갖춘 인생이라도 건전하게 교감하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혼자인 게 좋아~.”그런데 요즘은 혼자가 아니다. 노래 가사였지만 김종서는 정말 혼자가 편한 사람이다. 미성으로 열정을 토해 내는 록가수이지만, 스스로를 ‘극(極)내향인’이라고 부를 정도다. 무대 밖에선 혼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그의 노래처럼 ‘아름다운 구속’을 좋아한다.김장훈은 정반대다. 사람 좋아하고, 사람 사이를 누비며 에너지를 만든다. 그렇다고 아무나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겪어 본 다음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혼자가 낫다고 여긴다. 대신 한두 명이라도 맞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축복이라 믿는다. 그 사람에게는 자신을 아낌없이 쏟는다.성향만 보면 쉽게 가까워질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있다. 전화하고, 공연 얘기를 나누고, 무대를 함께 구상한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같이 가 보려 한다.김종서는 무대 밖으로 나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는 타입이다. 반면 김장훈은 세상 바쁘다. 남 잘 챙기고, 세상 돌아가는 이슈에도 밝다. ‘척하면 삼천리’다. 얘기를 즐긴다. 방송에서 자기 노래를 안 틀어도 괜찮지만 토크가 없으면 서운하다. 이런 두 사람이 묘하게 맞물린다.12일 만난 두 사람은 몇 시간이고 웃음과 진지함을 넘나들었다. 한 사람이 길게 이야기를 풀면, 다른 한 사람이 짧게 끼어들어 맞장구와 농담을 얹는다. 한 사람은 밥상을 잘 차리고, 다른 한 사람은 숟가락을 기막히게 얹는다.단순히 친한 형, 동생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관계다. 김종서에게 김장훈은 무대와 세상으로 자신을 다시 끌어낸 사람이다. 김장훈에게 김종서는 가수로서의 재미를 다시 알게 해 준 사람이다. 상상의 설계를 가능하게 해 준 사람이다. ● 같은 시대, 다른 궤적둘 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김종서는 1987년 록그룹 시나위로 데뷔해, 1992년부터 솔로로 ‘대답 없는 너’ ‘아름다운 구속’ 등을 부르며 록 보컬의 상징이 됐다. 김장훈은 긴 무명 생활을 거쳐 1991년 데뷔했다. 이후 다시 긴 공백기를 거치며 공연형 가수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둘 다 록커 계보다. 그런데 의외로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종서 씨, 우리 오래 안 친했어.”“맞아요. 동선이 안 맞았어.”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궤적이 달랐다. 김종서가 록의 중심에서 확고한 보컬리스트로 자리 잡을 때, 김장훈은 방향을 찾고 있었다.“종서 씨가 한창 록을 할 때, 난 노래할 거라는 생각도 못 했어. DJ 하면서 소리만 지르던 시절이었지. 고등학교에서 짤리고 12년을 연습만 했어. 그리고 스물아홉 살 때 데뷔했지. 비교하면 김종서는 록의 신이고, 나는 어중간한 신이에요.”농담처럼 들리지만, 긴 시간 버텨낸 사람의 자조가 묻어난다.둘이 오래 전 스쳐가긴 했다. 조금 보다가 말았다. “1993, 94년쯤이었지? 종서 씨 사무실에 갔어. 그날 차로 데려다 주기까지 했잖아. 그때 속으로 엄청 부러웠어.”(김장훈)“그땐 내가 나이도 속였잖아. 1968년생으로. 가까이하기엔 서로 애매했지.”(김종서)“장훈 씨 나이를 알고 있었어요. 이승환이가 장훈 씨를 형이라고 부르더라고”진짜 관계는 훨씬 뒤늦게 시작됐다.● “노래해 줄게” 한마디로 시작됐다뜻밖의 장면이 있다. 5~6년 전이다. 김종서가 LP바(bar)를 운영하던 시기. 방송에서 오랜만에 김종서를 만난 김장훈이 작정하고 그곳을 찾았다. 인사치레인 줄 알았던 “놀러 갈게요”라는 약속을 바로 지켰다. 둘 사이의 ‘온도’가 확 올라갔다.“손님이 없으니까 장훈씨가 밖에서 호객 행위를 하더라고요. ‘내가 노래해 줄게!’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더니 진짜 모시고 들어오는 거예요.”(김종서)“손님 데리고 와서 ‘종서 씨, 반주 틀어’라고 했잖아. 나도 자숙한다고 사람들 안 만나던 시기였어. 종서 씨도 ‘이 사람이 왜 나한테 잘해 주지?’라고 생각했을 걸.”(김장훈)“감동이었죠. 장훈 씨가 자기 밴드까지 데려와서 노래해 주고…. 낭만적이었어.” ● “전설을 그냥 둘 순 없었다”김장훈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레전드인데 나보다 더 힘들게 지내면 안 되겠더라고.”(김장훈)그의 과거 경험이 발동한 것이다. 바로 움직였다.“전인권 형이 어려웠을 때 내가 수발을 들었거든. 그 마음이 뭔지는 몰라. 인권이 형을 잘 알지도 못했을 때였어.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한 우상이었잖아. 그런 형님이 힘들어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더라고. ‘내가 여유가 되니 도울 수 있겠다’고 했어. 종서 씨한테도 같았어.”설명이 더 필요 없었다. 감정이 먼저였다. 계산은 없었다. 김종서는 그때 생각을 바꿨다.“그런 장훈 씨를 보고 사람은 사귀어 봐야 안다는 걸 확신했어요. 김장훈은 오해로 진면목이 많이 가려진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더라고요.”둘은 ‘형’ ‘동생’ 대신 ‘~씨’로 부른다. 나이보다 존중을 택했다.“종서 씨가 형이라고 부르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내가 이정재와 정우성처럼 서로 존대하면서 지내자고 했지. 존칭을 쓰면 서로 적당한 긴장과 예의를 유지할 수 있잖아. 난 이 결정이 너무 좋았어.”(김장훈)둘은 오래가는 관계의 선을 영리하게 잡았다.● 자멸한 그를 무대로 끌어내다김종서는 한동안 무대를 떠나 있었다.“완전히 폭망한 적이 있었어요.”10여 년 전이었다. 몇 번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충격이 컸다. 무대가 두려워졌다.“내가 명색이 김종서인데…. 기고만장했는데 바로 트라우마가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나는 ‘공연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크지 않은 무대에서 간혹 노래했지만 “열과 성을 다할 수 없었다”고 했다. 슬럼프가 달아나지 않았다. 그런데 4년 전 언젠가 김장훈이 대뜸 물었다.“왜 공연 안 해? 공연 만들어 줄게.”그리고 진짜 만들어 줬다. 2022년 김종서의 윤당아트홀 공연. 기획만 한 것이 아니라 사진전까지 더했다. 윤당아트홀 옆 갤러리에 김종서의 사진 실력까지 활용했다.“사진 사 줄 사람까지 종서 씨 한테 데려왔잖아. 꽤 팔았어.”(김장훈)단순한 도움이 아니었다. 김종서 재건 작업이었다. ‘공연의 신’답게 공연과 전시와 팬을 한꺼번에 엮어 냈다.“200석 공연 세 번. 그다음 600석 해 보고, 1000석으로 가는 거지. 이렇게 공연해 보고 방송하면 가수의 기가 살아.”김종서를 살리는 일에서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무대, 관객, 박수, 매진. 그 감각을 다시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자존심을 복구해 주면서 김종서를 세상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김종서는 처음에는 ‘이 사람 뭐지?’ 싶었다. 그러다 김장훈에게 온전히 ‘나’를 맡겼다.“장훈 씨가 큰 숲을 잘 보더라고요.”자기 영역을 쉽게 내주지 않는 예술가가 자신을 포장하는 일에 상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인정했다.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김장훈을. ● 확장 관계…“우리끼린 초라해하지 말자”김장훈도 김종서를 만나 변했다.“나이 환갑에 종서 씨한테 성악 발성을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고집 강하던 독학파가 소리 내는 루틴까지 바꿨다. 원래는 무대 올라가기 전에 고음을 몇 시간씩 질렀다. 목이 쉬어 무대에 올라가기 일쑤. 그래도 버텼다. 그러다 김종서에게 힘을 빼는 법, 말하듯 노래하는 법, 고음을 쥐어짜지 않고 내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몸이 바로 반응한다.“지금은 공연 전에 힘을 빼요. 소리를 안 지르고 무대에서 놀 수 있게 됐어요. 호흡도 길어지고. 종서 씨에게 제일 감사한 건… 노래가 다시 재밌어졌다는 거예요.”“제가 김장훈을 가르쳤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아는 선에서 어드바이스만 했어요. 진짜 장훈 씨처럼 노래를 파고드는 사람을 못 봤어요. 음색도 독보적인데다, 날 것의 느낌이 확 나요. 가수로서 전성기가 아닌가 싶어요.”“별말씀을. 종서 씨는 정말 방부제 성대를 갖고 있어.”김종서에게 자신의 목소리는 ‘꽤나 아픈 손가락’이었다.“인후염 때문에 방송에서 노래를 몇 번 망쳤어요. ‘김종서 목소리 완전히 갔다’는 소문이 퍼지더라고요. 유명 가수들이 서로 경쟁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저를 안 불렀어요.”이렇다 저렇다 해명할 수도 없고 “저, 목소리 멀쩡해요. 아직 잘해요”라고 말하는 순간 정말 자신이 초라해질 것 같았다.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노력하고 버텨 보자 마음을 먹으니까 진짜 제 목소리가 불안해졌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스스로 개선하거나 조절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발성을 바꾸기로 하고 성악 전공 정상영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처음엔 성악을 배우는 게 와닿지 않았죠. 터널 초입에 있는 것 같아 끝이 안 보였어요. ‘나 죽었습니다’ 하고 6개월, 1년을 버티니 소리의 길이 보이더라고요.”새 발성을 배우고 거기에 다시 자기 색을 입히는 것. 김장훈은 “정말 존경스럽다”고 했다.“다시 새로운 고음을 낼 수 있게 된 건 가수 중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요.”김종서는 최근 리메이크 싱글을 발표했다.“누군지는 말 못하지만 대부분 가수들이 나이가 들면 원곡을 할 때 키를 내려서 부르잖아요. 그런데 종서 씨는 28년 전 노래 ‘에필로그’를 다시 원키(원래 키)로 불렀어요.”(김장훈)1998년 곡이다.“그때 제가 방송국에 갔는데 주변에서 저를 누구랑 비교하더라고요. ‘김종서 큰일 났네. 대항마가 나왔네’ 하면서요.”김경호였다. 그의 노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공전의 히트를 치던 때였다. 곁에서 김장훈이 “언젠가 그가 너를 맘 아프게~”라고 흥얼거린다.“경호 인기가 올라가니까 소속사에서 김종서도 신곡을 만들어 보자고 한 거죠. 이거 뭐, 차력 대결도 아니고. 그래서 냈어요. ‘김경호 때려잡기 프로젝트’ 곡이죠.”(김종서)“에필로그가 정말 부르기 어려운 노래거든요. 음이 얼마나 높은지 노래가 유언장 같았다니까. 성악 발성으로 목소리를 다시 찾은 종서 씨한테 제가 아이디어를 던진 거죠. 신곡 내는 것보다 에필로그를 다시 끄집어 내자. 28년 전 팔팔하던 김종서와 지금의 김종서가 대결하는 이슈를 만들자고 했죠.”(김장훈)둘의 관계는 확장하고 있다.● ‘발칙한 미래’를 그리는 우리우정에는 보통 추억이 많이 쌓여 있다. 그런데 둘의 우정엔 과거보다 같이 할 미래가 더 많다. 와이어 공연, 듀엣, 페스티벌, 새로운 무대….“장훈 씨 목표가 뭔지 아세요? 저를 와이어에 매달리게 하는 거랍니다.”(김종서)“김종서랑 이소라를 크레인에 한 번 태우는 게 죽기 전 소원이에요. 조명이 꺼지고 김종서가 크레인에서 ‘마이 러브, 부디 나를 잊어줘’라고 부르면…. 상상만 해도 행복해요.”(김장훈)김종서가 크게 웃는다.“될 거예요.”김장훈이 말한다.“규모보다 중요한 건 과정 같아.”잠실주경기장 공연도 매진시켜 봤다. 그렇지만 대학로에서 어렵게 공연을 시작해 잠실주경기장까지 가게 된 과정이 더 보람 있고 기뻤다.“그 10년이 더 재밌었어요.”멋진 수사보다 반복되는 동행에 의미를 둔다. 같이가 주는 가치를 요즘 실감한다. 김종서는 “장훈 씨를 알고 시너지라는 걸 처음 느꼈다. 뭘 하더라도 긍정적인 기대감이 생기고 동반 상승하는 기운을 느낀다”고 했다. 웬만하면 김장훈의 위성으로 주변부에 있으려 한다. 김장훈 행사면 무조건 간다. 행사 현장에서 밥을 먹다가도 김장훈이 부르면 음식이 입에 들어 있어도 노래를 부른다. 본래의 김종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기상천외하면서도 발칙한 상상이 둘의 동행에 재미를 더한다.“종서 씨가 노래 잘 하고 히트곡도 많은데 잔잔하게 웃길 줄도 알아요. 이런 면이 유기적으로 잘 묶여 있어요. 김종서만 생각하면 별 아이디어가 다 나와요.”진짜 계속 나온다.“종서 씨하고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수와 진’ 선배들처럼 듀엣하는 거예요. ‘락 앤 락’, 좋잖아요. 록큰롤 할 때 락(rock)이랑 즐거울 락(樂)으로. 밀폐용기 브랜드 ‘락O락’ 회사에 아는 사람 있어요? 협찬 받으려고. 하하.”혼자였다면 허황되게 들렸을 법하다.둘의 우정은 미담보다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실천으로 채워져 있다. 현실적인 배려가 많다. 김종서는 올해 20회 정도 공연을 하고 싶다. 김장훈이 김종서의 부산, 광주 공연을 성사시켰다. 둘은 “크게 바라는 건 없다”고 한다. 다만 알고 있다. 힘들 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옆에 서 있을 것이라고.“종서 씨, 성시경이가 주변 사람들한테 이런 얘기를 했대. 장훈이 형을 만나려면 내가 어려워져야 된다고. 자기가 잘 나갈 때는 연락이 안 되고, 힘들어지면 ‘어떻게 지내냐’고 연락이 온다는 거야.”(김장훈)“그래서 난 장훈 씨가 잘 안 되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하하.”김장훈은 김종서가 다시 혼자 ‘아름다운 재구속’에 빠질 일 없다고 자신한다. 그렇게 둘은 오늘도 서로를 살린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서울 성북구(구청장 이승로)가 지역과 대학의 연계를 기반으로 하는 ‘대학도시’로 발돋움한다. 성북구는 13일 지역과 대학을 연결해 미래를 여는 대학도시를 비전으로 하는 ‘함께 성장하는 대학도시 성북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구에 있는 7개 대학이 지역 성장의 엔진이 되고, 지역은 이 대학 인재들을 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대학도시 종합계획은 협력 거버넌스 구축, 미래 역량 증진과 산업 구조 강화, 동반성장 오픈캠퍼스, 다함께 누리는 복지·문화 생활 등 4개 전략과 16개 추진 과제 그리고 40여 개 사업으로 구성됐다.● “대학이 지역을 바꾼다” 이번 종합계획이 눈길을 끄는 것은 대학생과 청년이 많이 모여 있는 성북구가 교육, 산업, 정주(定住)를 결합한 도시 모델 실험에 나섰다는 점이다. 프로그램 중심 성과 내기에 머물렀던 여타 기초단체의 교육 사업과는 결이 다르다. 성북구에는 고려대 국민대 동덕여대 서경대 성신여대 한성대 한국예술종합학교(가나다 순)가 있다. 재학생만 약 7만 명이다. 안암동과 동선동 일대 거주자 가운데 청년 비율이 50%에 이른다. 성북구는 이 7개 대학과 7만 대학생이야말로 도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차별화한 자산으로 보고 있다. 핵심은 대학과 지역의 관계를 단순 협력 이상의 상생 구조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성북구는 각 대학과의 협력 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전담하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대학들과의 상시 소통 채널을 마련할 계획이다. 대학과 지자체가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제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오픈캠퍼스로 인재 선순환 구조 창출 특히 오픈캠퍼스 전략은 종합계획의 상징 축이다. 대학이 보유한 교육 콘텐츠와 인적 자원을 지역에 개방해 세대 간 학습과 평생교육을 확장하는 구조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캠퍼스를 닫힌 공간이 아니라 지역 공통 공간으로 넓히겠다는 뜻이다. 대학이 주민을 위한 공공 학습 플랫폼으로 기능하면서 전 세대가 모이는 공공자산이 된다. 이 과정에서 대학 간 협력 체계도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다고 본다. 대학별 특성과 강점을 살리면서도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 성북구는 열린 대학 교육 체계가 지역 산업 수요와 맞물려 지역 내 취업 및 정주로 이어지게 할 계획이다. 지역을 학습 생태계로 재구성하려는 정부의 지역 혁신 정책과도 궤를 같이 한다. 종합계획은 새로운 교육 정책의 시도를 넘어 도시 전략의 전환을 꾀한다. 그동안 복지나 지원 수단 같은 보조적 기능으로 여겨진 교육 자원을 지역 성장과 산업 구조 설계의 핵심 수단으로 끌어들였다.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도시 성장 핵심 전략으로 기업 유치와 물리적 인프라 확장에 열을 올리는 것과는 180도 다른 관점이다. 이승로 구청장은 “대학도시로서 성북구만의 차별화된 도시 경쟁력을 꾸준히 키워 나가겠다”고 밝혔다. 대학을 도시 미래의 공동 설계를 위한 핵심 파트너로 삼겠다는 얘기다. 대학도시 종합계획을 통해 대학 교육이 학교 안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에서 일정 성과를 낸다면 다른 지자체에 파급하는 효과도 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올해 취임 제 13대 민재홍 총장의 ‘큰 그림’민재홍 덕성여대 총장은 이달 15일 열린 서울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을 뛰었다. 가족과 함께 10km를 1시간 이내로 완주했다. 풀코스 42.195km의 4분의 1 거리. 민 총장은 “기록에 만족한다”고 했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페이스를 잘 조절하며 뛰었다. 지난달 4년 임기 총장 업무를 시작했다. 42.195km 레이스에 빗대면 이제 막 1km를 지난 셈이다. 첫 단추를 잘 꿰고 싶은 첫 1년. 마라톤으로 예행연습을 해 본 셈이다. 인구 감소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대학에 빠른 변화와 혁신이 요구된다. 하지만 민 총장은 마라톤을 하면서, 쫓기듯 속도만 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빠른 변화’가 시급하지만 ‘옳은 변화’가 더 중요하다는 초심을 지켜 나가기로 했다. 민 총장은 취임을 맞아 외부 인사들에게 전한 감사장에도 “단계별 성장을 진행하면서 나날이 새로워지겠다”라고 썼다. 속도 조절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뜻일 터다. 16일 서울 도봉구 캠퍼스에서 동아일보와 만난 민 총장은 “대학의 구조 변화 압박이 커지는 상황에서 덕성여대는 무조건 방어하듯 버티는 것도 어렵고, 무조건 빠르게 이것 저것 바꿀 수도 없다. 시간을 갖고 미래지향적으로 우리만의 정체성을 재해석해 새로운 경쟁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균형의 ‘X+AI’로 대학 체질 전환덕성여대 정문에 서면 앞으로는 북한산이, 오른쪽으로는 도봉산이 보인다. 캠퍼스는 안정감 있는 평지에 조성돼 있다. 민 총장은 이 지형을 대학의 방향성과 연결지었다. 총장실은 다른 대학 총장실에 비해 작은 편이다. 책상과 회의용 작은 탁자가 전부다. 실용과 집중의 균형이 느껴진다. 민 총장은 “일도 마찬가지다. 총장 혼자 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본부 보직자들과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003년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부임해 24년째 몸담고 있는 그는 교무처장, 미래교육위원회 위원장, 신문사 주간 등 주요 행정 보직을 거쳤다. 대학 내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내부형 총장’이다. 그는 “함께 고민하고 조율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대학 운영은 결국 협력과 균형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민 총장이 구상하는 덕성여대 성장 계획은 이렇다. 먼저 AI 기반 대학으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덕성 AI 이니셔티브’를 목표로 내세웠다. AI를 ‘사람 중심’ 교육과 연구, 행정에 도입하는 것이다. 특히 교육과 연구 분야에서 민 총장은 ‘X+AI’를 핵심으로 내세운다. 단 AI가 중심이 아니라 각 전공(X)을 중심에 두고 AI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는 “AI가 전공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전공을 더 강하게 만드는 도구가 돼야 한다”며 “학생의 전공, 질문, 해석과 판단이 중심이 되고 AI는 도구로서 날개처럼 작동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문학자로서 AI에 과도하게 치중하는 현실에 대한 우려가 문제의식에 반영돼 있다. “예를 들어 중문학의 경우 AI가 수업도 하고 번역과 통역을 다 해 버린다면 전공이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렇지만 언어의 맥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인간 영역이다. 전공이 중심에 있고 AI가 도구로 결합할 때 전공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질 수 있다.” 문헌정보학 역시 AI와 결합해 단순 정보 관리에서 벗어나 디지털 아카이빙, 데이터 기반 지식 관리로 확장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덕성여대는 ‘AI 브릿지’ 교과목을 도입해 기존 전공 수업에 AI를 접목하고 있다. 향후 AI 리터러시 교육을 확대하고 X+AI 교과목을 최다 100개로 늘릴 계획이다.윤리와 공공성 갖춘 ‘德性 AI 리더’ 양성AI 기반 교육 인프라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상반기에 학업, 수강 신청, 진로 설계, 취업 상담까지 아우르는 AI 기반 원스톱 플랫폼을 구축할 계획이다. 기존 학습관리시스템(LMS) ‘e-class’도 AI 기반으로 전환해 수업 내용 요약, 과제 지원, 리포트 생성 보조 기능을 포함하게 된다. 100여 개 외국어로도 지원할 예정이어서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민 총장은 “학생이 체감하는 변화”를 강조했다.―학생들이 이 같은 변화를 어떻게 느낄 것으로 보는가. “모든 학생이 전공 기반 위에서 AI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과정을 통해 ‘대학이 나에게 맞춰지는 경험’을 많이 해 보게 될 것이다. 현장실습학기제, 덕성인턴십, 맞춤형 취업 지원, X+AI 연계 장학 및 경력 개발 지원을 강화해 학생들이 배움과 진로를 따로 느끼게 하지 않을 것이다.”―학생들이 특별하게 체감했으면 하는 것은. “여기서 ‘HI(Human Intelligence·인간 지능)’를 강조하고 싶다. AI 시대에도 인간 지능, 전공 지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AI와 HI가 함께 가야 한다. 결국 다시 조화다. 윤리, 인권, 공공성 같은 여대의 전통적 가치를 결합하는 문제다. AI를 아는 인재가 아니라 AI를 책임 있게 다루고 활용할 줄 아는 인재가 필요하다. ‘덕성(德性) AI 리더’이다. 덕성형 AI 전략이 다른 대학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행정 시스템도 이런 변화에 부응한다. AI 챗봇을 도입해 행정 절차를 자동화하고 교직원 업무 부담을 줄인다. 민 총장은 “AI는 학생과 교직원 모두의 시간을 절약해 주는 도구가 될 것”이라며 “그 시간을 더 중요한 교육과 연구에 쓰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K콘텐츠 비롯한 융복합 분야 특성화”학생들이 변화를 더 강하게 체감할 수 있도록 학사 구조 개편도 점진적이고 정밀하게 추진한다. 고민은 전공 쏠림 현상이다. 인기 전공과 비인기 전공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덕성여대는 수도권 대학 최초로 자유전공제를 도입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지난해부터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했다. 학생 선택에 따라 다전공 이수가 가능하다. 제1 전공 선택 후 다양한 전공 조합이 가능하다. 제2 전공은 물론 제3 전공까지 할 수 있다. 제1 전공을 심화 학습하고 모듈형 과정(나노-마이크로 디그리)으로 이수할 수도 있다. “자유전공학부로 정원의 30% 정도가 들어온다. 지난해 258명이 입학했다. 이들은 전부 경영학과로 갈 수도 있고, 전부 컴퓨터 계열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중문과 지원은 ‘제로(0)’일 수 있다. 전공 간 불균형 현상이 갈수록 심화될 수 있다.” 민 총장은 이 현상을 위기가 아닌 새로운 전환의 계기로 본다. 그는 “전공을 줄이는 작업이 아니라 전공 간 다양한 연결을 강화하고 새로운 융합 구조를 만드는 재설계 시발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며 “수도권 최초 도입한 자유전공제 ‘시즌2’를 만들어 앞서가는 화두를 던져 볼까 한다”고 했다. 자신이 있다. 덕성여대는 약학대학만 지명도가 높은 게 아니다. 언어와 유아교육 같은 인문사회 분야에 강점이 있다. 이들을 융복합해 덕성여대만의 추가 특정 분야를 찾아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우리 대학은 언어를 비롯한 인문학 전공이 다양하다. 스페인어도 있고 아동가족학, 문화인류학, 첨단분야 학과도 있다. 이를 묶어 K콘텐츠나 글로벌 문화 산업 등으로 확장할 수 있다.” 덕성여대는 이달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추진하는 ‘인문사회융합인재 양성사업(HUSS)’ 2단계 참여 대학으로 선정됐다. 기후 및 환경과 문화 전공이 지원을 받게 됐다. 특별한 ‘덕성 경쟁력’ 확보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기후와 환경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차원에서 전공 간, 나아가 대학 간 경계를 허물고 인문사회 중심 융합 교육 체제를 구축해 인재를 양성할 수 있게 됐다. 학생들이 기후와 환경 이슈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종로캠퍼스 교양 교육 활용 추진민 총장의 핵심 비전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브라이트(Bright) 덕성’이다. 브라이트는 균형(Balance) 존중(Respect) 혁신(Innovation) 글로벌(Global) 조화(Harmony) 인재(Talent) 라는 6가지 가치를 상징한다. 대학 운영 원칙이기도 하다. 그는 브라이트 가운데 균형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균형을 토대로 지역 사회와의 연결도 해 볼 계획이다. 서울 도봉구의 유일한 대학으로서 전통시장 활성화, 취약계층 교육 지원, 돌봄 프로그램 같은 지역 연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민 총장은 “대학은 지역에 그저 머무는 기관이 아니라 함께 움직이는 플랫폼이 돼야 한다”며 “여대생이 참여할 수 있는 돌봄, 교육, 공공 서비스 영역에서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활동은 단순 봉사를 넘어 지역 일자리와 연결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종로캠퍼스를 학생 교육에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 계획 중 하나다. 1984년 현재 위치로 이전한 덕성여대는 종로에도 교육 공간을 보유하고 있다. 민 총장은 “2029년부터 1학년 교양 과목 일부를 종로캠퍼스에서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도심 교육은 대학 경쟁력을 높이고 학생 경험을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30년 1월 28일로 임기를 마치는 민 총장의 마지막 목표는 ‘2030년’이다. 2030년은 덕성여대가 조선여자교육회로 개교한지 110주년이 되는 해다. “그때 ‘변화를 말한 대학’이 아니라 ‘변화의 구조를 만든 대학’으로 평가받고 싶다.” 마라톤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완주다. 42.195km 긴 여정처럼 민 총장의 대학 개혁은 이제 막 첫 구간을 지나고 있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리더는 비담박 무이명지(非澹泊 無以明志) 비영정 무이치원(非寧靜 無以致遠)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다. 담박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영정은 평온한 상태다. 평온하지 않으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올바른 판단이 어려워진다. 지속 가능한 리더십 교육 및 교류 플랫폼 인사이트넥서스연구원(INI)의 하버드 경영대 최고경영자(CEO) 프로그램 제5기가 출범했다. 윤태근 INI 이사장은 11일 서울 JW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5기 개막식 개회사에서 ‘리더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이같이 답했다. 윤 이사장이 인용한 문구는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 재상 제갈량이 아들 첨에게 보낸 편지 ‘계자서(誡子書)’에 실린 것이다. 윤 이사장은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많은 시기에 불확실성 높은 환경이 주어졌을 때는 무작정 달리기만 해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다”면서 “깨끗한 마음 상태에서 욕심이 과하지 않아야 자신의 뜻을 분명히 세울 수 있고, 흔들림 없는 마음과 시선으로 시대를 바라볼 때 표면이 아닌 진실을 보고 멀리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숨을 고르고 스스로를 재정비하는 기회를 5기 프로그램의 핵심으로 꼽았다. 윤 이사장은 앞서 네 번의 개막식에서도 별도의 메시지를 던졌다. 1기 때는 “작은 경쟁에 집착하기보다 더 큰 포부를 가지고 더 멀리 도약해야 한다”고 했고, 2기 때는 “각자 분야에 안주하지 않고 오래 달려온 인생 평행선이 꺾어지는 지점을 반드시 찾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3기에는 “인생의 방아쇠를 당기는 시점으로 배움의 시간을 삼아야 한다”고 했고 4기에는 “천하에 근심이 닥치기 전에 미리 어려움을 예방해야 한다”고 했다. INI는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CEO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 및 공공 부문 리더들이 지속 가능한 경영 전략을 공유해 한국과 세계를 변화시킬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식을 창출하는 장을 마련하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정운찬 전 총리 “과거 성공 방식은 지워라” INI 고문위원회 위원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는 이날 축사에서 “인공지능(AI)이 일의 본질을 바꾸고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가 기업의 생존을 결정하며 지정학이 거대한 공급망을 흔드는 전방위적 변혁의 시대에 리더에게 요구되는 건 과거 성공 방식이 아니다”라며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세우고 올바른 결단을 내리는 담대한 훈련을 통해 더 넓은 시야, 더 깊은 통찰, 더 무거운 책임감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INI 4기 대표로 축사를 한 권민희 연성대 총장은 “리더가 감당해야 할 짐의 무게가 날로 무거워지는 시대에서 하버드 최고경영자 과정은 단순한 배움을 넘어 시대를 꿰뚫는 나침반이 될 것”이라며 “이런 혁신의 기회를 강력한 자산으로 삼자”고 말했다. 개막식에서는 4기 프로그램 수석을 차지한 김경준 ㈜아이피시 대표를 비롯한 성적 우수 원우들에 대한 시상식도 열렸다. ● 빠른 결정이 아니라 바른 결정 5기 프로그램 주제는 ‘비즈니스 리더를 위한 혁신 전략’이다. 변화 설계를 통해 변화를 읽고 구조화하는 전략적 리더십, 가치 전환을 통해 사회적, 환경적으로 창출한 임팩트를 경쟁력으로 바꾸는 경영 전략, 책임 실행을 통해 AI 시대에 도덕성과 리스크를 통합하는 실행 체계를 배우고 고민한다. 데보라 스파, 조지 세라핌, 줄리 바틸라나, 로버트 카플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인간을 위한 AI 기술 방향 설정, 자본주의 시대에 필요한 전략과 영향력 있는 성과 데이터의 효과적 활용법, ‘모두를 위한 권한’과 ‘더욱 효과적인 변화 주체’, 성공적인 전략 실행과 리스크 측정, 관리 및 완화 역량 등을 강의할 예정이다. 5기 과정은 매주 목요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다. 1교시에는 국내외 리더들의 스피드 특강이 있고, 2교시에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들이 원격 강의한다. 원우들은 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캠퍼스에서 최종 강의를 들은 뒤 수료식 및 파티를 한다. 수료증을 받게 되는 원우들은 INI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공동 주최 국제회의나 포럼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이달 중순, 충남 한서대 태안캠퍼스.교육부의 글로컬대학 사업에 선정된 한서대 항공특화캠퍼스의 활주로, 관제탑을 둘러보는 몽골방문단의 눈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격납고 안을 둘러보던 이들의 시선은 실제 교육에 활용되고 있는 보잉 항공기와 각종 실습 장비, 그리고 교육 과정 설명에 오래 머물렀다. 단순한 견학이 아니었다. ‘이 시스템을 어떻게 한서대와 함께 확장할 것인가’를 확인해보는 자리였다. 몽골 민간항공청(MCAA) 투르바야르 청장을 비롯한 대표단이 이달 13일부터 15일까지 한서대를 찾았다. 항공 교육 협력을 점검하고, 향후 확대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이날 현장에서 오간 대화의 핵심은 분명했다. “교육을 함께 만들자”였다. 한서대와 몽골 민간항공청의 인연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서대는 1차 항공 교육 기관 인증을 획득하고 2022년 다시 2차 인증을 받았다. 양 기관은 이론 교육과 실무 훈련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한서대의 항공운항학과, 항공기계공학과, 항공교통물류학과(항공교통학전공), 항공관광학과 및 부설기관인 비행교육원, 항공기술교육원, 항공교통관제교육원 등이 나섰다. 1차 지정 이후 몽골 유학생도 늘었다. 몽골 항공 인력은 한서대에서 최신 항공 교육을 받고, 한서대 학생들은 실무 중심의 교육을 통해 현장 적응력을 높이는 구조다. 이를 통해 한서대 출신 몽골 졸업생 64명이 자국 항공 산업 분야에 진출해 파일럿과 항공교통관제사, 운항관리사, 객실승무원 등 핵심 직군으로 일하고 있다. 함기선 한서대 총장은 현장에서 “이 협력은 단순한 교류가 아니라 교육 모델을 함께 만드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투르바야르 청장 역시 “한서대의 교육 시스템은 이미 검증됐다”며 “협력을 더 확대해 나가겠다”고 화답했다. 이날 현장에서 확인된 것은 단순한 방문 이상의 흐름이었다. 항공이라는 특화 분야에서 시작된 협력이 이제 ‘교육 수출’이라는 구조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흐름은 중국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한서대가 중국 안휘공업대와 공동으로 추진한 디자인·공학 융합 석사 과정이 최근 중국 교육부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2026학년도부터 매년 50명을 선발하는 이 과정은 단순 교류 프로그램을 넘어 양국 정부가 인정한 정규 학위 과정이다. 학생들은 2+1 방식으로 교육을 받는다. 최소 1년은 한국에서 수업을 듣고, 졸업시에는 중국 안휘공업대 석사 학위와 함께 한서대 디자인공학 석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한다. 교육 콘텐츠와 학위 체계를 함께 설계하고 운영하는 단계로 들어서면서 한·중 양국 산업 수요에 부합하는 실무·연구형 인재가 배출되는 것이다. 기존 대학 국제화 전략과는 결이 다르다. 대부분 대학이 유학생 유치에 집중해 왔다. 반면 한서대는 교육 자체를 해외로 확장하고 있다. ‘학생이 한국으로 오는 구조’에서 ‘교육이 해외로 가는 구조’에 더 집중하고 있다. 글로벌 협력의 폭도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지난달 한서대 서산캠퍼스에서는 인도 KIIT·KISS 대학과의 협약식이 열렸다. 협약 내용에는 로봇 공학 공동학과 설립, 항공 MRO(유지- 보수-운영)의 교육 협력, 공동 연구, 학생 교류 프로그램 개편 등이 포함됐다. 단순 교류를 넘어 교육과 산업, 연구를 연결하는 구조다. KISS는 부족민에게 무상으로 교육과 주거를 제공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원주민 교육기관이다. 기술 교육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까지 함께 다루는 협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도네시아와의 협력 현장도 분주하다. 한서대는 지난해 12월 국립인도네시아대와 교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현지 교육 플랫폼과 연계한 유학생 모집과 한국어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다. 글로벌키타와 Makara UI Academy를 통해 현지에서 학생을 선발하고 교육하는 ‘해외 거점형 모델’도 가동 중이다. 이처럼 한서대의 글로벌 전략은 ▲교육 프로그램 수출 ▲학위 공동 운영 ▲해외 인재 선발 시스템 구축으로 이어지는 입체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지역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끌어가는 글로벌대학으로의 도약한다는 혁신 목표의 핵심 동력으로 밀고 있다. 현장에서 느껴지는 변화는 분명하다. 대학이 학생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교육을 들고 현장으로 나가는 플랫폼으로 바뀌고 있다. 함 총장은 “글로컬 대학으로서 글로벌 과제를 수행하려면 국제 파트너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며 “교육과 산업, 연구를 연결하는 협력을 통해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학령 인구 감소와 대학 경쟁 심화 속에서 대학의 역할은 빠르게 재정의되고 있다. 이 흐름의 중심에서 한서대는 의미있는 길을 실험하고 있다. 몽골의 하늘에서 시작된 교육 협력은 이제 중국의 캠퍼스와 인도의 교실, 인도네시아의 온라인 플랫폼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학생을 받는 대학에서, 교육을 수출하는 대학으로. 한서대가 만들어가는 ‘글로컬 교육 모델’의 현장이 움직이고 있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골프 매너가 나쁜 사람은 생활이나 사업에서도 믿을 수 없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남긴 이 말은 리더들에게 골프가 단순한 스포츠 이상임을 시사한다. 국내외 수많은 CEO와 유명 인사들이 골프에 깊은 애정을 쏟는 이유는 정글 같은 치열한 경제 활동을 벗어나 넓은 잔디 위에서 교감하는 인연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라운딩 중 오가는 조언에서 정신적 영감과 비즈니스적 모티브도 얻을 수 있다. 연세대는 그간 축적된 프리미엄 최고위과정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최상의 교육과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연세 골프 최고위과정’ 을 운영하고 있다.현장 중심의 실전 평가와 프로암 라운드를 비롯해 세미 필드(파3)에서 이루어지는 숏게임 실습 등과 골프학개론, 스윙 및 클럽 이론, 골프 룰 이론 수업 등으로 커리큘럼이 구성돼 있다. 골프이론가 정헌철 운영위원장과 KPGA(한국프로골프협회) 시니어 투어에서 활약 중인 고준영 프로가 전담 프로진을 이끈다. 또한 문정욱, 문지욱, 권영석, 김선미, 성시우 프로 등 KPGA와 KLPGA(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멤버로 구성된 국내 정상급 강사진이 레슨을 전수한다.원우들에게는 연세대 총장 명의 수료증이 수여되며 세브란스병원 건강검진센터(서울역 빌딩) 이용 시 20%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4월 23일 입학식을 시작으로 11월 24일 수료식까지 매주 목요일 교육을 진행한다. 모집 인원은 기업 임원 및 사회 지도층 인사 30명 내외다. 문의 : 연세 골프 최고위 과정 사무국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산학 공동 기술 개발… 학생까지 참여하는 ‘현장형 연구 프로젝트’ 가동지난달, 한서대(총장 함기선)의 혁신을 주도하는 글로컬대학사업단(단장 김현성)에 공지가 떴다. 산업체의 기술 수요를 반영한 산학 공동 기술 개발 과제를 발굴, 지원하기에 앞서 수요 조사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첨단 밀집형 K-항공 글로벌 ‘클러스터(산업 집적지)’ 를 강화하려는 취지였다. 한서대 구성원과 지원 사업 참여를 희망하는 기업이나 기관이 2주간 자유롭게 제안을 하도록 했다. 분야는 K-항공 융합·모빌리티 핵심 기술 및 서비스 개발 분야, 친환경·스마트 공항·도시·물류 혁신 솔루션 분야, K-항공 융합 연계 글로벌 서비스·콘텐츠·디자인/브랜딩 기술 분야 등이었다. 희망 분야에서 방식, 성과의 활용 방안까지 심도있는 조사가 이뤄졌다. 이달 3일 산학 공동 기술 개발 과제 지원 계획이 공고됐다. K-항공 융합 수요에 맞는 현장 밀착형 인재를 양성하고 대학이 보유한 원천 기술의 사업화와 기술 이전 촉진, 고부가가치 신기술, 신제품 창출의 시작이 마련된 셈이다. 한서대 전임 교원과 재학생, 그리고 기술 개발 역량을 가진 기업이 공동으로 참여한 연구진의 신청을 받았다. 과제는 15개 내외로 선정해 4월 1일부터 지원한다. 재학생 참여가 필수다. 4개월의 과제 수행 기간을 거쳐 8월 중 시장성 및 적합성, 기술사업화 가능성, 가치 창출 등에 대한 최종 평가를 실시한다. 지난해 9월 항공 분야 특화 혁신 계획으로 정부의 ‘글로컬대학 30 사업’에 선정된 한서대의 구조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서대는 핵심 4가지 혁신 계획을 세웠다. ▲ 충남 혁신 K-항공 초밀착 지산학연 협력 허브화 ▲ 지역 산업 맞춤 학생 중심 초타파 6무(無) 교육 체제 고도화 ▲ 지속가능한 시너지 창출형 초협력 글로컬 협업 모델 저변화 ▲ 개방형 책임제 성과관리 및 투명한 초개발 성과 공개 체계 표준화 등을 추진 과제로 내세웠다. 항공 분야 보유 역량과 지역 강점을 발판으로 이 과제를 추진하는 데 속도가 붙은 모양새다. 일단 산학 공동 기술 개발을 통한 충남형 K-항공 상생 플랫폼 구축 및 선순환 생태계 구축부터 성과가 나오고 있다. ● K-항공 클러스터, 지역 기반에서 전국으로 확장생태계를 지역 밖으로 확산하는 사전 포석도 잘 깔리고 있다. 이달 들어 경상국립대 가좌캠퍼스에서 열린 ‘항공우주 인간공학 산학연관 융합 워크숍’에 경상국립대, 포항공대, 숭실대학, 울산대, 공군항공안전단, 캐나다 University of Windsor 등과 공동 주최 기관으로 참여했다. 사천 항공 우주 클러스터에 집적된 항공 우주 산업의 역량을 항공기 시스템의 핵심 요소인 ‘인간공학’ 분야와 연계하고, 산업과 학문적으로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한서대로서는 향후 ‘사천 우주 항공 클러스터’에서 추진되는 다양한 항공 산업 연구 과제에 참여할 길을 열어둔 것이다.● 시니어 일자리부터 환경까지… 현장에 들어간 대학 이달 13일 한서대 학생들은 충남 태안군 거리에서 지역 어르신들과 폐지와 재활용이 될만한 것들을 주워 담았다. 곽희정(보건학부 사회복지학과) 학생은 폐지 수거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느꼈다. 깨닫는 게 많았다. 이처럼 한서대 글로컬대학사업단은 자원 재활용 분야 사회적 기업과 함께 ‘태안군 시니어 안전 일자리 환경 개선 사업’도 벌이고 있다. 한서대는 지난 달 자체 디자인을 통해 제작한 경량 손수레를 평소 폐지 등을 줍는 시니어 단체에 지원했다. 태안군도 지역 소멸 위기가 심각하다. 시니어 친화형 일자리 환경 개선과 지속가능한 지역 일자리 생태계 조성이 절실하다. 지역 정주를 위한 조건을 강화하는데 ‘지-산-학-연’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서대는 이미 지난해 하반기에 태안군 3곳의 노인복지관과도 상생 협력 업무 협약(MOU)을 맺었다. 지역 기관, 시니어들이 모여 일자리와 지역 문제 해결 방안을 자주 논의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대학이 지역을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지역 문제 해결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태안군과도 ‘태안군-한서대 협약 기반 자율형 지역 현안 해결 과제 성과 공유·확산 워크숍’을 통해 지자체와 대학이 협력해 추진한 지역 밀착형 사업의 성과를 점검했다. 확장 전략도 모색했다. 지역 노인의 사회 참여 활성화, 지역 특화 ‘태안형 드론’ 협업 사업 추진, 지역기업의 글로벌 진출 지원 및 마케팅 전문 인력 양성, 전통시장 경쟁력 강화 등에서 의미있는 진전이 있었다. 대학은 교육·연구 역량을 지역과 연결해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고, 학생들은 현장에서 문제 해결 역량을 키우며, 지역은 대학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모델이 점점 구체화되고 있다.● 항공 MRO센터, 교육을 넘어 산업 인프라로 지난해 4월 출범한 태안(항공)캠퍼스 항공 MRO 센터도 확장 단계에 진입했다. MRO센터는 K-항공 글로벌 클러스터로 가는 혁신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다. 사실상의 항공기 정비 종합 병원이라 할 수 있다. 전국 대학에서 유일하게 있는 시설이다. 한서대는 엔진 분야 정비를 특화한다. 국내 항공사 상당 수가 엔진 정비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엔진 정비를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데는 대한항공 뿐이다. 센터 내에 마련된 엔진 MRO 실습장 내 분위기도 분주해졌다. 저속, 저고도 항공기 피스톤 엔진을 완전 분해해 처리하는 능력을 쌓고 투자를 집중해 최대한 빨리 대형 항공기 제트 엔진 정비가 가능한 수준까지 올리려 한다. 그래야 교육 시설 차원을 넘어 산업 인프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6년도 1학기 항공 정비 기초와 가스터빈-왕복 엔진 실습 교육의 커리큘럼을 강화했다. 실제 항공 정비 현장의 흐름과 동일하도록 설계했다. 한 학생은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일을 배우는 느낌”이라고 했다. 대한항공 계열 저비용 항공사인 진에어와의 교류도 늘릴 계획이다. 진에어에서 원하는 정비 교과목을 주고, 한서대가 편성을 해서 학생들이 수강을 했다. 진에어는 지난해 한서대 정비 전공 학생들을 선 선발했다. 대학이 산업을 따라가고, 또 산업도 대학을 따라오는 쌍방향 교육 시스템 설계가 더욱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거점 국립대 9곳을 서울대 수준으로 육성한다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은 교육계 최대 화두다. 수도권 집중과 학벌 중심 사회, 지역 소멸 위기가 동시에 심화되는 상황에서 이 정책은 국가 균형발전과 교육 공공성 회복을 겨냥한 구조 개혁 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기대만큼 우려도 크고 보완 요구도 적지 않다. 거점 국립대의 지속 가능한 재정, 대학 특성화 전략, 채용시장 구조 개편, 입시와 사교육 구조 개편까지 과제는 복합적이다. 이 정책 성패는 고등교육 체제를 싹 바꾸는 수준의 밑그림 설계와 실행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정책을 둘러싼 기대와 우려는 지난달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 성공 비결은?’ 토론회에서도 분출됐다. 이날 국회의원과 대통령직속 지방시대위원회 및 교육 단체 관계자, 대학교수, 정책 연구자 등 참석자들은 이 정책이 단기 재정 지원 사업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구조 개혁이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은 거점 국립대에 대한 전략적 투자와 체계적 육성을 통해 지역 교육력을 높이고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국가적 과제”라면서도 “정책 하나로 우리 사회 모든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장기적,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대가 독점한 상징자본의 양적완화… 수평적 특성화 필요” 김영춘 지방시대위원회 위원(국립공주대 명예교수)은 “우리 교육은 ‘인서울’이라는 ‘공간의 병목’과, 수능 한 번의 결과가 개인의 지위와 소득, 인생 경로를 좌우하는 ‘시간의 병목’에 가로막혀 있다”고 진단했다. 김 위원은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서울대가 독점해 온 상징자본을 지역 거점으로 확산시키는 일종의 경제학적 양적완화 정책”이라며 “핵심 전략은 하향 평준화가 아니라 수평적 특성화”라고 지적했다. 이어 “각 거점 대학이 지역 산업과 연계된 특유의 경쟁력을 갖춘 연구 중심 대학으로 성장해야 한다”면서 “대학 간 차이는 서열이 아니라 ‘창조적 전문성’의 차이로 재편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고등교육 마스터플랜을 예로 들며 연구 중심 대학, 교육 중심 대학, 개방형 대학이 층위별로 연결되는 3층 구조 모델을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편입 사다리를 대폭 확대해 시간의 병목을 해소하고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를 약속해야 한다”면서 대학 간 이동 경로의 제도화를 핵심 과제로 꼽았다.● “속도보다 구조, 구호보다 제도”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의 구체성과 안전장치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컸다. 김한나 총신대 사범학부 교직과 교수는 “대학 자체가 아니라 학벌을 매개로 한 사회 구조적 병목에서 고등교육 문제가 비롯된다는 문제 인식에는 공감한다”면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서울대 수준’이라는 목표가 집행 단계 작동 기준으로는 충분히 구체화되지 않았다”며 “연구 경쟁력, 학부 교육 질, 국제 랭킹, 졸업생 성과 등 어떤 지표를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정책 설계와 평가 방식이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정 투입 이후 실패 가능성에 대한 안전장치가 부족하고, 거점 국립대 집중 육성이 동일 권역 사립대와 교원 양성 대학에 미칠 파급 효과 분석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속도보다 구조, 구호보다 제도가 중요하다”며 정책은 정밀해야 하고 지속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이 아닌 채용 시장이 변해야” 노동시장 구조가 이 정책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변수라는 지적도 나왔다. 송인수 재단법인 교육의봄 공동대표는 “채용시장에서 ‘출신학교 등급제’가 유지되는 한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은 의미가 없다”며 “구직자 역량을 대학 이름이 아닌 직무 능력으로 판단하는 채용 구조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공동대표는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 사례를 언급하며 “직무 역량을 중심에 두고 채용한 결과 퇴사율 감소 같은 긍정적 성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를 민간 기업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 개혁과 함께 채용 구조 개편이 이뤄지지 않으면 ‘학벌 완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사교육과 대학 입시 구조 또한 정책 성공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시각도 있었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장은 “거점 국립대 학생 1인당 교육비를 서울대의 70%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구상은 의미가 있지만, 재정 지원만으로 대학 서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을지 의문을 해소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 소장은 “지역 고교 상위권 학생들이 거점 국립대 선택을 주저하는 현실은 재정 지원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며 “대학입학보장제와 공동선발 제도, 교육 자원 공유 같은 구조적 대안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정 확대가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대학 숫자 아닌 기회의 경로 넓혀야”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을 중장기 고등교육 체제 개편의 출발점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상우 지방시대위원회 위원(국립경국대 교수)은 “이 정책은 대학 서열 완화보다는 지역 불균형 완화 정책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면서도 “대학 간 역할 분담과 특성화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은 이미 상당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재정 투입 중심의 설계에서 벗어나 질적 전환을 동반한 고등교육 체제 개편 논의로 확장할 수 있는 정책적 기반이 마련된 셈”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백선희 조국혁신당 의원은 “재정, 입시 제도, 거버넌스, 대학 공공성을 비롯한 대학 체계 전반을 함께 점검하지 않으면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고 지적했고, 김혜민 사단법인 대전환포럼 운영위원은 “편입 제도 확대와 공공 연구대학 구축, 창업 권장 대학 모델 등 다양한 실행 방안이 병행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참석자들은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은 단순히 대학 수를 늘리는 사업이 아니라 ‘기회의 경로’를 넓히는 구조 개혁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안정적인 재원 확보, 대학별 수평적 특성화, 편입 사다리 확대, 채용 시장 개편, 초중등 교육 연계, 지역 대학 생태계 재설계 등이 동시에 추진될 때 비로소 정책의 실질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계에서는 대학 체제 개선이라는 맥락 속에서 고등교육과 공교육 개혁을 토대로 지역균형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서울대 10개’라는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학생과 청년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느냐가 정책의 진짜 성패를 가를 것으로 전망된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신한대(총장 강성종)는 국제개발협력과 글로벌 교육을 대학의 핵심 전략 축으로 삼고 단순 교류를 넘어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국제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26일 개최되는 ‘DMZ TO PARIS 선언식’이다. 이번 선언식은 한불수교 140주년을 기념, DMZ에서 출발해 예술·교육·국제협력으로 한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중장기 국제 문화·교육 프로젝트의 공식 출범을 알리는 자리다. 신한대는 DMZ라는 역사적 공간을 미래지향적 협력 플랫폼으로 전환하며 “Yet to come!”이라는 슬로건처럼 다음 세대 중심의 국제교육 모델을 구체화할 계획이다.●“국제협력 교육”… DMZ를 세계와 연결하는 대학 신한대의 국제화는 단순 방문이나 이벤트가 아니다. 학생들이 국제질서와 평화, 공존의 가치를 학습하는 글로벌 시민교육 과정으로 설계돼 있다. DMZ TO PARIS 선언식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 연계해 진행된다. 대학의 첫 교육 경험부터 국제적 시야와 평화 감수성을 심어주는 방식이다. 기조 연설은 파리 제1대학(팡테옹-소르본) 국제관계사 박사인 정상천 박사가 맡는다. DMZ의 의미를 세계사적 맥락에서 조망하며 한불 협력의 새로운 교육적 지평을 제시할 예정이다.●“K-Culture 교육”… 세계 문화로 확산되는 한류 인재 양성 신한대의 또 다른 경쟁력은 K-Culture 특성화 교육이다. 공연예술학과, K-POP학과, K-뷰티학과 등 문화콘텐츠 분야를 기반으로 학생들이 예술과 산업, 글로벌 무대를 연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있다. DMZ TO PARIS 프로젝트 역시 학술 프로그램에 더해 공연·음악·전시 등 문화예술 요소를 결합했다. 학생들은 예술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며 국제문화 역량을 확장하게 된다. 신한대는 이를 통해 K-Culture 기반의 글로벌 문화인재 양성 대학으로 정체성을 강화하고 있다.●“융합형 인재 양성”… 예술·학술·현장을 결합한 교육 모델 신한대 국제교육의 핵심은 현장을 교실로 만드는 융합형 학습 구조다. 선언식 둘째 날에는 참가자들이 DMZ 접경 지역을 방문한다. 이는 단순 견학이 아니라 분단의 현실을 직접 마주하고 평화의 가능성을 성찰하는 현장 기반 평화교육(Field-based Learning)이다. 이러한 교육 모델은 이미 신한대가 추진해온 학생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확장돼 왔다. 작년 6월 진행된 ‘대마도 평화비전기행(WAY MAKERS)’에는 약 1000명의 신입생이 참여했다. 학생들은 역사 탐방, 문화 교류, 환경 봉사활동을 수행하며 평화 감수성과 글로벌 시민 역량을 함께 길렀다. WAY MAKERS는 역사문화 탐방, 문화 예술 교류 행사, 비전선언문 발표, 봉사활동 등을 포함한 비교과 국제교육 모델로 설계됐다. 올해 5월 말 두 번째 행사가 예정돼 있어 지속 가능한 교육 모델로 발전하고 있다. 신한대는 DMZ TO PARIS 프로젝트를 통해 국제 협력, K-Culture 특성화, 현장 기반 융합교육을 결합한 미래형 대학 교육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DMZ라는 역사적 공간을 평화와 창조적 협력의 플랫폼으로 전환하고, 학생들이 세계와 연결된 학습 경험 속에서 글로벌 감수성과 문화역량을 갖춘 융합형 인재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한대는 올해 10월 한·중·일 다음 세대가 함께 참여하는 국제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세계, 문화, 기후 의제를 중심으로 협력의 장을 확대할 예정이다. 또한 향후 프랑스·인도 등으로 연계 범위를 넓혀 차세대 국제 리더십 역량을 강화하고, 동북아를 넘어 글로벌 차원의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중장기 전략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번 선언식은 한불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상징을 넘어 미래 세대를 위한 국제문화교육 연대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의 은어(속어)죠. 제아무리 모두 갖춘 인생이라도 건전하게 교감하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1985년 10월 26일, 구름 가득 낀 오후 3시 무렵. 일본 도쿄 요요기국립경기장에 들어찬 6만 일본 관중이 흔드는 일장기가 시야를 지배했다. 이곳 관중석은 가파르다. 많은 관중이 부는 경적 같은 에어혼(압축 공기로 소리를 내는 응원 도구) 소리가 아래로 꽂히듯 깔리며 퍼졌다. 귀가 먼저 피로해지는 소리였다.1986년 멕시코 월드컵 진출을 향한 아시아 최종 예선 1차전. 이때 아시아에 걸린 티켓은 단 두 장. 그중 동아시아 몫은 하나. 한국과 일본은 외나무다리에 마주 섰다. 이곳에서 어느 두 사람은 평생 우정의 끈을 잡았다.● 6만 관중을 적막에 빠트린 둘의 단 한 번 시선 교환원정 경기에 나선 한국 대표팀은 조심스럽게 탐색부터 했다. 전반 30분, 일본 수비가 걷어낸 공이 공격에 가담한 수비수 정용환의 오른 발등에 정확히 걸렸다. 골망을 찢을 듯한 선제골. 경기장은 숨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12분 뒤, 훗날 평생 절친이 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선물’을 건넸다.한국 수비가 일본 공격을 끊어 내자 최순호가 일본 진영 가운데에서 오른쪽 측면으로 빠져나갔다. 순간 박창선의 패스가 왔다. 공을 잘 잡아 놓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처진 공격수 이태호가 가운데 빈 공간으로 전력 질주했다. 일본 수비수 둘 사이로 찔러 주면 골키퍼와 1대1 상황이 날 것 같았다. 보폭을 계산해 서너 걸음 앞으로 공을 밀어 줬다. 정확했다. 이태호는 왼발로 공을 접어 수비 하나를 제쳤다. 이태호를 마주한 일본 골키퍼는 골 왼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이태호는 오른쪽을 택했다. 골. 이태호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고, 그라운드엔 한국 선수들 함성만 들렸다. 2대1 승리.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사실상 확정 지은 골이다. 지금 생각해도 미친 호흡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움직임이었다.● 직설과 여백이 만든 완벽한 타이밍이름까지 ‘호’로 끝나는 둘에게 이날은 평생 술안주이자 밥반찬이다. 건빵 봉지에 든 별사탕처럼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회상할 때마다 늘 새로운 장면을 끄집어 낸다. 죽어도 지면 안 됐던 한일전.최순호는 경기 전에 ‘이태호와의 기적’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한다. 이태호는 처음 듣는 얘기다. “김정남 감독님이 나를 쓰려고 하는 느낌만 받았다”는 최순호의 말은 이태호를 더 놀라게 한다.“태호 네가 선발로 나갈 줄 알았어. 감독님이 날 부르더니 가운데에서 오른쪽 측면으로 계속 빠져서 기회를 노리라고 하셨어. 왼쪽은 (김)주성이에게 맡기고. ‘네가 이동하면 태호가 가운데로 들어올 거’라면서 ‘태호도 한가닥하는 친구니 기회를 살릴 거다’라고 한 말이 기억 나. ‘이렇게 해야 이긴다’고 거의 애원을 하셨어. 그런데 이 전술이 경기에 그대로 나온 거야.”소름 돋는다는 이태호다. “너하곤 원래 호흡이 잘 맞았잖아. 순호한테 패스가 가는 순간 무조건 날 봐 줄 것 같았어.” 사실 최순호도 스스로 놀랐다.“태호야, 정말 축구에 관해선 내가 고집이 좀 있잖냐. 그런데 이날은 나를 버렸어. 축구 인생에서 감독님 말을 100% 들은 유일한 경기였다고.” 특별한 고백이었다. 이태호는 친구를 설득한 감독이나 팀 전체를 위한 ‘필승 그림’을 받아들인 최순호가 대단하고 고맙다. 김 감독이 나, 이태호를 확실한 선발 자원으로 여기진 않았지만 최순호 이태호 콤비만이 할 수 있는 ‘한 방’이 꼭 필요해 제안한 것이라 여긴다.“순호만 만나면 무조건 옆에 붙는 일본 수비수가 있잖아. (최순호가 옆에서 ‘이시카미라고 있어’라고 한다.) 아, 맞다. 김 감독께서 그 친구를 나랑 묶어 역이용한 거라고 봐. 그래서 순호가 김 감독 작전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 준 것이었어.” ● “너 아니었으면 나 없었어”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은 이태호와 최순호의 우정을 키운 또 다른 드라마였다. 1차전에서 골을 넣고 의기양양, 2차전에도 선발로 나선 이태호는 전반이 끝나고 교체됐다. 자신과 교체해 들어간 허정무가 결승골을 넣었다. 이태호는 무척 분했다.“서울에서 월드컵 진출 주역이 되고 싶었거든. 그런데 교체가 됐으니 속이 상하더라고.”벤치에서 후반전 내내 고개를 묻고 있었다고 했다. 승리라는 결과 앞에서 분이 풀리긴 했지만 아쉬웠다. “태호야. 경기 중에 나를 봤어?”(최순호)이태호는 몰랐다. 그저 최순호가 후반 때린 절묘한 왼발 슛이 일본 골대를 맞고 나왔고, 그것을 허정무가 골로 연결한 것만 기억한다. 그런데 최순호는 전반 막판 이시카미의 거친 태클로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 “무릎이 완전히 꺾였다가 다시 튀어 나온 것 같더라고. 바로 인대가 크게 손상됐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최순호)하프타임 때 락커룸에 누워 경기를 포기할까 생각하던 순간.“누가 내 머리를 붙잡고는 ‘순호야, 너 없으면 안 된다. 꼭 뛰어야 한다’고 해. 고개를 돌려 보니까 김 감독이셔.”그런 일이 있었는 줄 몰랐다. 최순호는 다친 무릎으로 후반에도 나갔다. 1차전 김 감독의 전략에 신뢰를 보낸 최순호는 그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허정무의 골 세리머니에는 무릎 통증을 참을 수 없어 동참하지 못했다.“정무 형이 골 넣고 내 반대쪽으로 가더라고. 하하.”(최순호)“순호야, 그래서 혼자 손만 번쩍 들고 흔들었구나.”(이태호)이태호는 지금 다시 생각하니 최순호가 자신 때문에 통증을 참고 후반에도 나가 준 것 같다. 이날 경기는 어떻게 보면 이태호 축구 인생에서 별 볼 일 없던 날이다. 최순호까지 후반에 못 뛰었다면 1차전 둘의 활약이 빛 바랠 수도 있었다. “네가 나 대신 싸워 준 거네. 진짜 고마워. 순호야.”최순호가 손사래를 친다. “괜찮아유.”●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 우리이태호는 대전 출신이다. 대전상고(현 우송고)를 나왔다. 최순호는 고향이 충북 괴산이다. 청주상고를 나왔다. 충청남도와 충청북도가 각각 낳은 축구 전설이다. 같은 충청 출신인데 스타일은 다르다. 이태호는 달변이다. 말재주로 사람을 끈다. 최순호는 “대표팀이 외국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기 위해 시간이 나면 태호의 진가가 나온다”고 했다. 한번 얘기를 시작하면 여러 화제를 넘나든다. 화려한 언변으로 동료들을 5~6시간 집중시킨 건 전설처럼 전해지는 얘기다.그는 직설적이다. ‘MSG(조미료)’를 뿌리지 않는다. 이태호는 “나 다음에는 변병주가 분위기를 잡았다. 나는 있는 그대로 재밌게 얘기하는 편인 반면 변병주는 ‘구라’가 조금 심했다”고 또 웃긴다. 결정과 선택 상황에서 뜸 들이는 법이 없다. 신조가 ‘오늘 결혼하면 내일 아들 낳아야 한다’다. 최순호는 결이 조금 다르다. 감정이 막 드러나지 않는다. 담담하고 성찰적이다. 여백의 미가 있다. 이태호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에게 잘 스며든다. 속으론 심지가 강하다. 한 사람이 날이 서 있다면, 다른 사람은 부드럽다. 한 사람은 순간의 결단을 잘하고, 다른 사람은 부드럽게 전체 그림을 잘 그린다. 결이 달라서 오히려 잘 맞았다. 서로에게 잘 흡수됐다. 축구 스타일도 성격과 닮았다. 이태호는 순간 위치 선정과 타이밍 맞는 침투를 잘하고 골 결정력이 있다. 최순호는 골을 잘 넣으면서 경기 조율 능력과 흐름 설계가 탁월했다. “우리 46년째네.” 둘은 1979년에 처음 알았다. 이태호는 고려대 1학년, 최순호는 청주상고 3학년 때다. 호적 정리가 복잡한데, 어쨌든 친구다. 최순호가 “그냥 넘어가유. 알면 다쳐유”라며 원천봉쇄한다. 당시는 그랬다. 적게는 두세 살, 많게는 다섯 살 차이가 있어도 친구가 되는 일이 많았다. 이태호는 “삐쩍 마르고 키 큰 애가 잘한다는 얘기를 (정)해원이한테 들었다”고 했다.최순호는 “중학교 3학년 때 대학보다는 실업으로 가겠다고 생각했다. 월급 받고 축구하면 더 잘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간 청주상고에서 축구에 눈을 떴다. 당시 잘하는 선수는 거의 대학에 갔다. “고3 때 한국전력으로 갈 수 있었어. 그런데 팀 분위기가 무섭더라고. 그래서 포항제철로 바꿨지.”(최순호)이태호는 또 처음 듣는 얘기다. “나는 네가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연고대나 다른 대학을 안 가고 실업 팀에 간 줄 알았지.”둘은 그해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현 U-20 월드컵) 대표팀에서 처음 만났다. 이태호는 청소년 대표팀 터줏대감이었고 최순호는 그해 봄에 처음 뽑혔다. “운이 좋았어. 당시 청소년 대표팀 트레이너로 오신 김호 선생님(1994 미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 나를 뽑아야 한다고 추천하셨다는 거야.”(최순호) 둘은 일본 고베에서 열린 이 대회에 나가 조별 리그 3경기를 같이 뛰었다. 이태호는 대표팀의 유일한 골을 넣었다.“그때 우리가 붙어 다니지는 않았어. 마라도나 기억나? 우리랑 같은 호텔에 묵었잖아. 정말 작은 친구가 마라도나라고 해서 데리고 나가서 겁이라도 주고 싶었지. 하하.”(이태호) 1980년 5월 둘은 성인 대표팀에 같이 소집돼면서 각별해졌다. 그해 아시안컵 준우승 이후 대표팀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및 스페인 월드컵 예선과 1984년 LA 올림픽 아시아 예선 등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이태호는 쟁쟁한 선배들에 밀려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기대는 상처가 됐다.“초등학교 이후로 후보를 해 본 적이 없거든. 그런데 벤치에 있으니까 막 분한 거야. 1980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때도 고향 대전공설운동장에서 경기가 있었는데 배려를 해주셨으면 좀 좋았겠냐고. 하하. 팬들이 내 이름 적힌 플래카드 걸어 놓고 했을 것 아냐. 그런데 1분도 못 뛰었어. 열 받아서 경기 끝나고 유성에서 대표팀 회식을 하는데 술 먹고 꼬장을 부렸지. 이강조 형이 옆에서 말리고 그랬어.”(이태호)“나는 태호처럼 이런 게 없었어. 그때만 해도 뛰라면 뛰고 말라면 마는 거였지. 운이 좋긴 했어. 고등학교 3학년 10월부터는 포철에 합류해서 훈련했는데, 김정남 감독이 포철 코치로 온 거야. 계속 둘이 같이 훈련했겠지. 김 감독께서 1980년에 대표팀 감독이 되셨잖아.”(최순호)최순호는 대표팀에서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적극적으로 뛰지 않는다는 시선과 지적 때문에 오래 혼란스러웠다.“활동량이 많은 편이긴 한데 대표팀에선 많이 안 뛰었어. 설렁설렁 한다고 욕을 자주 먹었지. 그런데 대표팀에는 (나보다) 빠르고 재능 있는 선수가 많았잖아. 난 골 넣고 도움 주는 것만 신경 쓴 거지.”뉴델리 아시안게임 조별리그에서 일본에 져서 충격의 예선 탈락을 한 뒤에는 극심한 컨디션 난조를 겪기도 했다. 최순호는 “그 뒤로 폼이 급격하게 무너졌다”고 했다.이태호도 잘 안 풀렸다. 선발로 많이 나간 대회에서는 팀 성적이 좋지 않았다. 1982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선 석연치 않는 퇴장을 당했다. 둘은 1983년 LA 올림픽 아시아 예선 때 불합리한 대표팀 운영을 지적하며 태릉선수촌을 무단 이탈하기도 했다. 이태호가 주도하고 친구가 따랐다. 아무 생각없이 선수촌을 나가면서 외출증을 끊지 않았던 게 화근이 됐다. 징계도 받고 많이 힘들었다. “젊은 혈기에 참을 수 없었어.”(최순호)“지금은 그렇게 못 하지. 그래도 선수촌 밖에 있는 동안 재밌게 놀았어. 내가 (프로축구 팀) 대우에 있었잖아. 팀 높은 관계자를 찾아가니 100만 원 주셨잖아. 갈비도 먹고 잘 돌아다녔네. 하하.”(이태호)4년 동안 대표팀 한솥밥을 먹으며 끈끈해진 둘에게 황금 같은 시절이 찾아온다. 경기장에선 눈빛만 봐도 서로가 뭘 원하는지 알았다. “1985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때 내가 힐패스한 공을 순호가 다시 힐킥으로 밀어 줘서 내가 골을 넣었잖아. 기억나? 우리가 느린 것 같아 보이는데 순간 빨랐어. 몸이 반응하잖아.”(이태호) “충청도잖유. 충청도 말이 느린 것 같으면서도 짧게 압축해서 정곡을 찌르잖냐. 몸도 그려.”(최순호)둘은 몇 달 뒤 한일전에서 평생 우정을 약속하는 역사적인 골을 합작한 것이다. ● 최순호의 월드컵 원더 골과 이태호1986년 멕시코 월드컵. 공격수와 미드필더를 오가는 포지션이던 이태호는 선발 출전 기대감을 또 접어야 했다. 당시 세계 최고 축구 리그인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차범근까지 합류했기에 몸 컨디션은 최고였지만 벤치 신세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최순호는 후보를 죽도록 싫어하는 이태호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았다. 그렇다고 티를 내고 챙길 수도 없었다. 속으로 미안했기에 책임감을 더 느꼈다. 이태호와 같이 못 뛴다면 어떻게든 친구 몫까지 하고 싶었다.아르헨티나 및 불가리아와의 대결에서 1무 1패를 하고 맞선 3차전 이탈리아. 그런데 최순호에게도 불편한 상황이 왔다.“태호야, 내가 불가리아 전에 안 나왔잖아. 이걸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대표팀에 소집되서 선발로 못 나간 게 이때가 두 번째였을 거야. 기분이 안 좋아서 이탈리아 경기엔 안 나간다고 했어. 그러니까 창선이 형, (조)영증이 형이 다독이면서 마음을 풀어 주더라고.”얼어붙은 마음을 되돌린 건 이태호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보면 최순호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이태호 덕에 최순호가 버텼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에서 최순호는 세기의 중거리슛 골을 터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역대 월드컵에서 나온 가장 아름다운 골 중 하나로 꼽힌다. “네가 슛을 할려고 볼을 오른쪽 약간 뒤로 접어 놓고는 기가 막히게 꺾어 때렸잖아. 그 경기에서 네가 볼을 접은 각도, 슛을 때리는 순간 발목의 각도를 난 분명하게 기억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각도거든. 경기도 못 나가고 열 받아 있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소름이 돋아서 소리를 질렀지.”(이태호)둘은 은혜를 주고받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국민이 기억할 만한 역사적인 골을 넣은 선수는 많지 않다. 그것을 서로가 만들어 줬다. 이태호는 “그래서인가. 순호가 나한테 고맙다며 한일전에서 또 한 번 골을 넣게 해줬다”고 했다.1989년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정기전 후반전, 최순호는 수비를 제치고 측면을 돌파해 이태호에게 시쳇말로 ‘밥상을 차려주는’ 패스를 했다. 이태호는 숟가락만 들고 맛있게 먹었다. 1-0 승리. 결승골이었다. “순호 때문에 내가 일본 킬러가 됐어. 하하.”● ‘쬐끔’ 고집 있는 충청도 축구 콤비11년간 국가대표로 A매치 90경기에서 37골을 넣고 은퇴한 최순호는 프로축구 포항에서 두 차례, 강원에서 한 차례 감독을 지냈다. 서울과 수원 FC 단장직을 맡았고 대한축구협회 부회장도 역임했다. 축구인으로 감독과 행정, 경영을 다 경험했다. 국가대표로 A매치 80경기에서 24골을 넣은 이태호는 프로축구 대전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FA컵 우승을 일궈 냈다. 이후 고교와 대학 감독을 맡았고 지금은 강동대 감독이다.둘 다 바빠 자주 보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둘의 우정은 시간의 벽을 넘어선다. 마음으로 통한다. 남이 보기에 골 넣은 얘기는 영웅담 같지만 둘에겐 일상생활 이야기다. “꽈리야. 15년 뒤에 인터뷰 또 같이 혀. 지금은 기억이 없는데 나중에라도 1985년, 1986년 때 일이 새롭게 생각날 수도 있는 거 잖유.”(최순호)꽈리는 이태호의 별명이다. 고등학교 때 선배한테 맞아 터진 입술을 몇 바늘 꿰메고 나니 크게 부풀어 꽈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나중에 대우에서 뛸 때는 당시 안종복 단장이 말을 잘 꼬아 재미있게 한다는 의미로 ‘꽈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 순호야. 1979년에 만나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것도 다행이다. 자주 보자.”맛이 있는 우정이다. 충청도 느린 말투와 직설적인 농담이 뒤섞인다. 흐름 자체가 이태호와 최순호의 관계를 설명한다. 직설과 여유, 냉정과 농담이 공존한다. 서로를 미화하지 않고 기억하며 인정해 주고 웃는다. 지금 보니 주고받은 선물은 골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 같다. 두 이름의 조합은 레전드를 넘어 ‘깐부’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왜 어느 팀은 잘 돌아갈까. 지난 시즌 남자프로농구(KBL) 챔피언이자 이번 시즌에도 선두인 창원 LG 세이커스 전력은 왜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까. 기복 없는 힘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조상현 감독에게 물었다.조 감독은 홈인 창원에서 경기가 없는 날엔 “완벽한 외톨이가 된다”고 했다. 혼자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는 피자 한 판 포장해 숙소로 들어온다. 하루이틀 일상이 아니다. 피자 전문점도 아닌 맥줏집 안주용 피자인데 입맛에 정확히 ‘꽂혔다’. 가족이나 코치들, 지인과 시간을 보낼 것 같지만 아니다. 선수들에게도 웬만하면 연락하지 않는다. 붙잡지 않고 놓아둔다.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을 회복한다.코트에서는 정반대다. 선수들에게 “훈련 1시간 30분만 집중해 달라”고 요구한다. 함께 외치는 주문이 있다. “리커버리(Recovery)!” 일종의 복구다. 일상에선 놓아두고 코트에선 붙잡는다. 놓쳤다가도 반드시 따라붙는 그의 농구 설계와 닮았다. ‘조상현표’ 농구는 한번 잡혀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태도와 구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레이에서 시작된 수비 설계“LG에 와서 아셈 마레이를 보고 수비 농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출발점은 외국인 센터 마레이(이집트)였다. 마레이는 수비의 철옹성이다. 리그 리바운드와 가로채기 1위. 골밑에서 잘 버티고, 끈적하게 막고, 집요하게 뺏는다. 상대 팀은 골치가 아프다.“경기당 30~40점씩 넣는 선수는 아니잖아요. 부임 때부터 마레이 중심으로 상대를 귀찮게 해서 최대한 점수를 안 주고 이기자는 농구 설계 방향을 잡았죠.”이 목적 설계 성과는 숫자로 드러난다. LG는 팀 리바운드 1위, 수비 리바운드 1위다. 상대 공격 리바운드와 2차 득점 확률이 낮아진다. 자연스럽게 적은 실점으로 이어진다. 수비 효율(DEFRTG·Defensive Rating)은 101.8. 100번 수비에서 101.8점만 내줬다. 역시 리그에서 가장 낮다.상대는 LG를 만나면 3점슛으로도 재미를 못 보고 있다. 조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장면이 ‘편안한 3점 허용’이다. 조 감독이 정한 기준은 한 경기 3점슛 10개 미만 허용. 실제로 상대 팀은 LG 전에서 경기당 3점슛을 평균 24.2개만 시도해 7.0개를 넣었다. 성공률 28.8%에 불과하다. 덜 쏘게 하면서도 어렵게 쏘게 만든 결과다.LG 공격은 여러 공격 지표 평균 리그 중상위권이다. 압도적이지 않다. 미국프로농구(NBA) 지난 시즌 챔피언이자 이번 시즌도 선두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와 닮았다. 수비로 지지 않는다. 오클라호마시티 DEFRTG도 105.6으로 리그 최저 수준이다. 실책에 의한 실점, 속공 실점은 리그에서 가장 적다. 공격보다 일관된 수비 태도, 집중력, 구조와 동선 복구(리커버리) 관리에 방점이 찍혀 있다.LG 가로채기 숫자는 많지 않다. 상대 턴오버를 억지로 만들기보다 공격 시간을 소모시키는 데 초점을 둔다. 탑에서의 무리한 트랩 대신 사이드라인 쪽 유도, 드리블 방향 제한, 패스 각 차단으로 상대의 첫 옵션을 없앤다. 상대는 ‘터프 샷’을 쏘게 되고, 이는 낮은 야투 성공률로 이어진다. 페인트존 진입이 어려워지면 장거리 슛이 늘고 공격 효율도 떨어진다.● 숫자에 잡히지 않는 복구의 가치―상대의 공격 선택지가 하나씩 지워지는 것 같다.“맞더라도 쉽게 맞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핵심은 리커버리예요. 스크린에 걸려도 끝까지 따라붙어 지연시키라고 합니다. 뚫려도 페인트존을 쉽게 내주지 않는 간격 유지가 필요하죠. 마지막 리바운드까지 책임지는 동선을 확보합니다. 공격이 실패했을 때 백코트도 빨라야 하고요. 한발 늦었어도 끝까지 쫓아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정렬하는 복구가 중요합니다.”이런 수비 태도와 동선, 간격과 복구 타이밍은 수치로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조 감독은 경기 후 기록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마레이와 국가대표 슈터 유기상의 기록 정도만 확인한다. 대신 코트 리커버리를 유지할 수 있는 코트 밖 리커버리에 더 신경을 쓴다.“이기든 지든, 특히 패하고 나서는 곧장 락커룸으로 안 가요. 감독실 문을 먼저 엽니다. 선수들도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어요. 감정에 지배돼 기록을 들이밀면 역효과죠.”마레이와 아시아쿼터 칼 타마요도 리커버리 차원에서 ‘리스크’를 관리한다.“박살 나는 경기를 보면 대체로 마레이와 타마요 멘탈이 먼저 흔들려요. 심판만 쳐다보고 항의만 하죠. 불평이 있으면 나한테 하라고 합니다. 팀은 건드리지 말자고요.”리커버리 기강을 무너뜨리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버스 탑승 시간 같은 사소한 규율도 칼같이 지킨다. ‘1~2분쯤 괜찮겠지’ 하는 순간, 버스는 이미 출발한다. ● 코트 밖 에너지 정렬에 방점조 감독은 최근 연승 흐름 속에서도 쉬는 날마다 자신의 코트 밖 리커버리를 반복한다. 조언을 듣고 전술을 재포장하기도 한다. 휴대전화에는 대학 시절 은사 최희암 전 감독 이름이 자주 뜬다.“가드 양준석이 수비를 더 깊게 끌어들이며 다음 플레이를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주셨어요. 큰 도움이 됐죠.”최근 양준석이 수비와 ‘밀당’을 하면서 공간을 확보하고, 공격 숫자 우위 상황을 만드는 조율이 능숙해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코트 밖 시간은 코트 안에서 흐트러진 감정과 에너지를 다시 정렬하는 데 쓴다. 현주엽에게 배운 양고기가 아직 완전히 입에 맞지는 않지만 적응 중이다. 민물매운탕도 최근 국가대표팀에서 전희철 감독과 함께 먹으며 익숙해졌다고 웃는다. 낯선 것을 받아들이며 앞으로 가는 적응과 확장의 리커버리다.영화관의 고요함과 피자 한 판의 온기 그리고 코트에서 끝까지 따라붙어 복구하는 잰걸음. 소란스럽지 않은데 참 단단하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2월 1일이다. 겨울만 되면 농구가 더 좋아진다. 그리고 이날이 오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1995년 2월 1일, 농구대잔치 고려대와 연세대 경기. 역대급 명승부다. 프로농구 시즌이 한창인데 웬 농구대잔치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초(超)역대급 승부다. 이 기억을 한번 꺼내 들면, 다시 프로농구 보는 맛이 살아날까 싶어서 그런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1분 25초’그날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제1체육관은 1만5000명에 육박한 관중과 ‘오빠 부대’ 함성으로 가득 찼다. 옆 사람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후반 종료 1분 25초 전. 연세대가 74-66으로 앞서자 TV 중계 캐스터 목소리엔 힘이 빠졌다.“연세대의 승리에요.”고려대 김병철의 파울. 연세대 공격을 끊고 빠르게 반격해야 했다. 연세대 우지원의 자유투. 캐스터는 “78개 던져 71개 성공, 성공률 91%”라고 말했다. 해설을 맡은 1970년대 레전드 유희영 선생도 “1분 13초. 연세대의 승리에요”라며 긴장을 풀었다.그런데 그때부터 묘하게 흐름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우지원이 원 앤드 원 자유투를 놓쳤다. 곧바로 김병철의 골밑 돌파. 블록슛을 시도하다 반칙을 범한 이상민이 착지하면서 오른쪽 무릎이 꺾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상민은 실려 나갔다. 김병철은 자유투 두 개를 얻었다. 1구 실패, 2구 성공. 74-67.이어 고려대 현주엽의 파울. 5반칙 퇴장이다. 다시 우지원의 자유투. 1구는 들어갔지만 2구는 빗나갔다. 75-67. 연세대 응원석에선 “이겼다”는 외침이 터졌다.그러나 고려대 전희철의 3점슛이 꽂혔다. 47초 남기고 75-70. 다시 고려대의 파울 작전. 신기성도 5반칙으로 코트를 떠났다. 이상민 대신 들어온 김성헌의 원 앤드 원. 그런데 또 1구 실패. 리바운드는 고려대. 이번엔 양희승의 3점포. 75-73. 27초.캐스터의 멘트가 바뀐다. “하… 아직 모르겠습니다.”또 우지원을 향한 파울 작전. 유희영 선생은 “자유투가 이만큼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슛감이 좋던 우지원은 다시 원 앤드 원 1구를 놓쳤다. 리바운드를 잡다 파울을 당한 양희승. 이어 자유투 두 개 성공. 75-75 동점. 16초.우지원이 엔드라인 쪽을 파고들며 슛을 던졌지만 빗나갔다. 리바운드 다툼 끝에 심판은 연세대 볼을 선언했다. 느린 화면에선 연세대 석주일 손에 맞고 나간 듯 보였다. 고려대 벤치와 선수들은 황보삼남 심판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남은 시간 4초. 마지막 작전 시간.서두가 길었다. 이 4초 동안 양쪽 벤치에선 무슨 작전이 내려졌을까.연세대의 공격. 사이드라인에서 김성헌이 공을 들고 섰다. 구본근은 가까운 쪽 로 포스트, 서장훈은 반대편 로 포스트. 구본근은 전희철, 서장훈은 박재현이 각각 맡았다. 서장훈 쪽 45도엔 우지원, 중앙 외곽엔 석주일. 각각 이지승과 양희승이 수비했다.김성헌은 잠시 머뭇거리다 외곽으로 빠져나온 서장훈에게 패스했다. 원 드리블. 이어 몸을 살짝 젖힌 페이드어웨이. 부저와 동시에 공이 림을 갈랐다. 연세대의 승리. 심장이 터질 듯한 순간이었다.● 아군도 속인 4초의 트릭그 슛은 예정된 것이었을까. 31년이 지난 지금 당사자들 기억은 흐릿해졌다. 김성헌(소노 팀장)은 “(서장훈에게) 공이 가는 작전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코치였던 박건연 KXO 회장(한국 3x3 농구연맹)도 “패스 타이밍이 늦긴 했다”고 기억했다. 김병철 전 오리온 코치는 “고려대에선 서장훈에게 공이 안 갈 거라고 봤다. 외곽을 막으라는 주문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힌트는 중계 화면에 있을 수 있다. 작전 타임이 끝난 뒤 석주일은 슛 동작을 크게 취하며 코트로 나왔다. 그때 최희암 연세대 감독(고려용접봉부회장)이 “주일아, 주일아”를 외치는 장면이 잡힌다. 이어 서장훈이 우지원 쪽으로 가며 스크린을 하는 척한다. 다시 석주일에 대한 수비를 스크린하는 듯하다가 공을 받는다. 그리고 버저비터. 31년 만에 최 감독이 답을 내놨다.“서장훈이 두 번 스크린을 하는 제스처로 우지원과 석주일, 둘을 동시에 살리고 안 되면 장훈이에게 공이 가게 한 작전이었다. 장훈이가 몸을 부딪히는 진짜 스크린을 하면 패스를 받기 어려울 수 있었다. 그래서 ‘하는 척’만 하라고 했다.”결국 두 번의 트릭이었다. 서장훈의 ‘스크린하는 척’, 그리고 석주일의 과장된 슛 제스처. 상대도 속았고, 같은 편도 속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의도는 연세대의 승리로 이어졌다.이래서 궁금했나 보다. 농구가 더 농구답던 시절, 가장 치열하고 눈부신 4초를 기억하길 잘했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의 은어(속어)죠. 제아무리 모두 갖춘 인생이라도 건전하게 교감하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전 대단한 클래식 작곡가들을 설렁탕 같은 탕류에 비교해 봐요. 설렁탕이 요즘 1만4000원 정도 합니다. 베토벤은 꼬리곰탕입니다. 비싸죠. 2만8000원 정도 합니다. 꼬리곰탕보다 조금 싼 게 도가니탕, 대개 2만2000원 받죠.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가 도가니탕입니다. 베토벤이 음악으로 성인이 된 악성(樂聖)이기 때문에 조금 더 비싸요.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쇼팽은 1만6000원 짜리 특설렁탕입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는 설렁탕이구요. 비싼 메뉴들입니다. 위대하죠. 이 메뉴판에 못 끼는 작곡자가 무수히 많습니다. 이건 순전히 저만의 메뉴판이에요.”재밌다. 듣고 보니 빠진다. 익숙하지만 그냥 들으면 어려운 클래식 ‘대가’들인데 머리에 쏙쏙 박힌다. 클래식을 이렇게 보는 사람 없다. 주관적 생각이라는데 꽤 설득력 있다. 판단 기준을 궁금하게 만든다. 관심을 갖게 한다. 재주다. 이러고 사는 개그맨이 있다. ‘오호츠크랩’과 ‘쪼쪼댄스’로, 또 버벅대는 ‘1분 논평’ 캐릭터로 큰 웃음을 준 김현철이다. 개그 말고는 그가 뭐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아주 오래 웃기러 다니는 틈틈이 클래식을 끼고 살았다. 평생 친구 같다. 친구 덕에 교향악단 지휘도 하고 평론까지 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 친구와 살 거다.클래식을 우리 삶에 녹여 접점을 찾는 데는 도가 트였다. 학창 시절과 연예계 생활을 거치면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 친구는 2순위일 것 같다. 클래식이건 사람이건 김현철과 통하는 것이 있어야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맞다. 그게 뭘까. ● ‘동심으로 웃기겠다는 건 책임, 의리 있는 웃음’동심(童心). 어린 아이 마음. 김현철은 만나자마자 “동심으로 산다”고 했다. 살면서 뭔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순간에 동심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 동심에 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다. 김현철의 동심은 ‘감정에 가장 정직한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투명한 감정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아이처럼 느낄 수 있는 어른이라고 한다.“제가 굉장히 직설적이에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바로 감정을 드러내요. 대화할 때도 뭉뚱그려 말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PD 선생님들에게 이런 면 때문에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싸우기도 했어요. 출연료 덜 준다고 항의도 자주 했죠. PD 분들은 황당해하죠. 서로 나가려는 프로그램인데 저만 까다롭게 구니…. ‘출연료가 적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죠. 맛집 방송 녹화 때는 음식이 너무 맛이 없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서 무지 혼나기도 했어요.”김현철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관계와 역할에서 동심을 알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맡은 오락부장. 친구들을 웃기고, 놀게 하고, 어울리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은 마음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 집에서 클래식을 듣고 지휘자 흉내를 내 봤다. 친구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떻게 보면 내 안의 동심이 먼저 웃는 걸 봤다. 소중한 기억이다. “초중고와 대입 재수 학원에서 서울예술대 1학년까지, 무려 12년을 오락반장으로 살았어요. 오락반장은 친구들이 뽑아 주는 유일한 선출직이잖아요. 공부보다는 어떻게 친구들을 웃길까 하루 종일 골몰했죠. 이주일 선생님을 흉내내면 누구든지 웃습니다. 안 웃기는 사람도 ‘콩나물 팍팍 무쳤냐’ 하면 웃겨요. ‘이렇게는 웃기지 말자’는 동심이 발동해 버렸어요. 그때 클래식이 안으로 들어온 거죠.” 체면을 내려놓고, 웃음의 책임을 지고, 분위기를 살리는 마음이었기에, 지금도 스스로 ‘김현철의 동심’은 미숙한 감정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친구들에게 지루함을 안 주려고 똑같은 클래식 개그는 안 했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책임감이 있다. 그 동심엔. 서울예대 다닐 때는 연기에 회의감을 많이 느꼈다. 연기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대학에서 배우는 사실주의 연극 대사는 너무 정확해서 저랑 안 맞더라고요. 오히려 어눌하고 해학적인 약장수 같은 역할을 맡으면 날아다녔어요. 정상적인 대사가 안 나오는 역할이잖아요. 나뿐만 아니라 주변 배우들 대사까지 외워서 하는 연기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절로 대사가 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랄까요. ‘탕’ 소리가 안 났는데 ‘아이고,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대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무섭더라고. 이건 아니다 싶었죠.”개그맨이 되고 김현철은 여러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대표 반고정’ ‘땜빵 게스트’로 많이 나갔다. 지금도 누군가 자리를 비우면 반드시 호출되는 이름이다. “선택에는 명분이 중요했어요. 사람들이 웃을 수 있거나 내가 재밌거나 등등… , 그런 제 동심의 명분에 맞아떨어지면 다 했어요. 단호하게 맺고 끊었던 겁니다. 그런 동심 때문에 어쩌면 신동엽이나 박명수처럼 크게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호불호도 있고, 살면서 장점이자 단점이 너무 부각되는 면도 있겠죠. 그런데 지금은 한결같은 제 성격에 너무 만족해요. 애매모호한 것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감사하게도 개그나 클래식 지휘를 계속 하고 있다고 봐요. 웃기는 것에 감탄을 잘하고 음악에 대한 호기심에 솔직하게 민감한 거죠. 클래식 무대만 해도 60~70명과 공연해야 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고 또 확실하게 제스처를 해 줘야 오히려 좋은 ‘합’과 ‘하모니’가 나오더라고요.” ● ‘박명수’, 동심이 맞는 ‘운명수’ 김현철은 그래서 어른이 돼도 가장 아이답게 살았던 순간을 고백해 주는 사람이 좋다. 그렇게 함께 웃는 자리에서 마음이 열린다. 개그맨 박명수는 이런 소통으로 맺어진 친구다. 김현철은 MBC 공채 개그맨 세 기수 선배인 박명수에 대해 “내 동심을 지키게끔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김현철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의리의 최상급 표현 같다. 인정한다.“박명수가 처음 보면 거칠잖아요. 그 눈매로 ‘이쒸’ 하면 무섭기도 하고. 저도 도망갔어요. 그러다 제가 돈을 찾으려고 은행 ATM에 갔는데 몰래 박명수가 쫓아온 거에요. 비밀번호 ‘8027’를 누르는데, 박명수가 깜짝 놀라더니 ‘너, 내 카드 훔쳐간 거 아냐?’ 그래요. 거기서 동심이 느껴지더라고. 알고 보니 박명수도 비밀번호가 8027이었던 거예요. 그 자리에서 주민등록증을 서로 깠는데 웬걸, 출생년월이 똑같은 겁니다. 1970년 8월 27일. 둘 다 비밀번호를 0827로 하고 싶은데, 노출이 되기 쉬우니까 숫자 위치를 바꿔 8027로 지정한 거예요. 잔머리도 똑같이 굴린거죠. 그 순간 얼마나 웃었는지. 하하, 여기서 우리 관계는 말이 필요없게 됐어요.”―그 뒤로 아주 친해졌을 것 같다.“정말 명수가 잘해 줬어요. 선배들한테 혼나고 있을 때는 나서서 말려 주기도 했고요. 저랑 마주치면 무조건 ‘야, 빨리 와’ 그래요. 그때는 개그맨들이 야간 업소에서 일을 많이 했잖아요. 홍록기 형이 제일 인기 있을 때였죠. 명수가 저보고 운전하라고 해서 같이 가는거죠. 명수가 무대에 나가서 일당을 받으면 얼마씩 저에게 떼어 주고 했어요.”―그때 오호츠크랩 등이 나왔나.“그렇죠. 그런데 박명수가 랩을 대충하는 거예요. 나 같은 사람은 대충하지 않는 성격이잖아요. 동심이 있기 때문에요. 그래서 제가 여기 저기 가사를 찾아 넣고 외웠던 거죠. 박명수는 하다가 저한테 안 되니까 ‘양쯔강 유역에 이모작’ 같은 가사를 넣었고요. 주워서 잘 살린 거죠. 결국 제 동심으로부터 랩 완성이 됐습니다.” ―박명수가 타던 외제 중고차를 두 번이나 사서 비싸게 팔았다.“희한하게 박명수가 뭔가를 팔면 시세가 올라갔어요. 박명수가 방송에 나가서 뭐라고 하길래 ‘집을 시세에 맞춰 판 게 잘못’이라고 했죠. 사실 박명수가 판 차를 타고 다닐 때가 전성기였어요. 일도 많이 들어왔고요. 김현철의 ‘호황’이었죠. 박명수의 운을 샀던 것이라 생각해요.”● 끝까지 같이 웃을 ‘웃케스트라’를 꿈꾼다이제 김현철을 있게 한 동심의 진면목을 전하고 싶다. 그는 동심에 호기심이 살아 있다고 본다. 아는 것도 다시 질문하게 된다고. 또 동심으로 쉽게 감동한다고 했다. 작은 친철, 오래된 노래에 울컥하고 깊은 관계에 감사해 할 수 있다는 것. 동심을 가진 사람은 계산보다 진심을 우선하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의리 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일에서 재미를 찾고, 사람 관계에서 웃음을 만든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믿음. 동심 있는 사람은 “그래도 사람은 괜찮다”는 것이다.김현철 마에스트로, 즉 ‘현마에’로 그렇게 살아 왔다고 보여 주고 싶다. 클래스가 다른 클래식으로, 세계 최초 지휘퍼포머가 되고 싶은 김현철의 시그니처 동작으로 동심이 가진 의미를 알려 주고 싶다. 지난해 펴낸 ‘김현철의 고급진 클래식당’이라는 책에서 그는 감수성의 힘을 증명하려 했다. 동심의 스펙트럼으로 클래식의 모든 것을 식당 메뉴 설명하듯 쉽게 풀어냈다. 경험담도 녹이고 클래식 대가들 인생을 자기 삶과 비교하기도 했다. 어려운 용어와 역사를 개그맨 특유의 재치로 해석했다. 틈새 재미도 잘 파고 들었다. 방장식 단국대 상임이사는 이 책을 보고 “원래 알던 김현철의 정체성에 의심이 들었다”고 했다. 2월 19일에는 같은 제목으로 롯데콘서트홀에서 특별 오케스트라 공연을 한다. “관객들이 억지로 끌려왔어도 공연 끝날 때면 저마다의 동심을 알았으면 해요. 동심은 도망친 게 아니라 잠시 접어둔 마음이라는 것을요. 클래식 곡의 기본 정보를 몰랐다고 해도 순수한 감정이 올라올 겁니다. 끝나고 꼭 한마디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박명수가 ‘야야야’ 호통치고, ‘쪼쪼’ 하면서 춤추면 10명 중 8명은 웃으실 텐데, 그보다 더 재밌고 감동적일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 질문을 한번 해주세요.”―앞으로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의리를 지킬 건가.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 와서 알을 낳고 장렬하게 죽잖아요. 저도 연어처럼 회귀할 겁니다. 개그로요. 클래식을 넣어 코미디를 할 겁니다. 그러려면 저만의 오케스트라가 있어야 하겠죠. 실력있는 연주자들이 저랑 같이 개그를 해 줘야 해요. 기존 연주자들은 악보보느라 정신없는데 여기선 같이 웃기다가 틀려서 울고 나가고. 얼마나 웃기겠어요. (최초 ‘코미디케스트라’ ‘코케스트라’ 결성 아닌가?) 그럼 ‘웃케스트라’라고 하죠.” ―마지막으로 30년 지기 친구 박명수와의 앞날은.“프레데리크 쇼팽과 로베르트 슈만이 동갑이에요. 1810년생입니다. 둘이 친구죠. 그런데 둘의 노래가 들어보면 비슷해요. 느낌이 우연하게 겹친 것이라 볼 수 있죠. 박명수와 저도 그래요. 서로 ‘쪼쪼~’ 했거든요. 그리고 사람 보면서 ‘확, 우이 C’ 하는 것도 비슷해요. 각자의 ‘동심’이 비슷하게 나온 거죠. 그죠? 둘은 같은 동심으로 마주하고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네요.”이상 웃음을 맡기면, 관계까지 책임지는 의리남 김현철이었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 운동장에 들어갔는데 공이 어떻게 오는지 모르겠더라. 튀어 오르는 공을 잡으려다 보면 훌쩍 넘어가 버리고, 이 정도면 컨트롤이 되겠지 싶었던 공도 옆으로 휙 지나갔다. 그런데다 뛰는데 이유 없이 코피가 났다.” 19세 청년 신연호(62·고려대 감독)가 43년 전 처음 밟은 곳은 한국 축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대였다. 해발 2600m에 가까운 멕시코 고지대. 백두산 높이와 맞먹는 곳이었다. 숨 쉬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 정오의 태양, 접시처럼 움푹 들어간 경기장을 가득 채운 7만 관중의 함성까지. 잊을 수 없는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U-20)축구선수권대회다. “전진해서 공격을 한 번 하고 나면 수비할 생각이 안 들 정도였다. 진짜 숨이 안 쉬어졌다.” 공기가 희박한 고지대에서는 평소처럼 뛰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산소 포화도는 떨어지고, 심장은 더 빨리 뛴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은 몸과 정신으로 버텨냈다.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 0-2로 패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멕시코를 2-1로 꺾고, 호주까지 연파하며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기세는 8강까지 이어졌다. 우루과이를 2-1로 누르며 4강 진출. 한국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대회 4강 무대를 밟는 순간이었다. 4강 상대는 브라질. 훗날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베베토와 둥가, 조르징요가 있었다. 한국은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갔지만 결국 1-2로 역전패했다. 3, 4위전에서도 폴란드에 1-2로 졌다. 최종 성적은 4위. 그러나 이 대회는 ‘순위’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신연호는 이 대회에서 멕시코전 역전 결승골, 우루과이전 선제골과 결승골을 터뜨리며 세계 언론으로부터 ‘작은 펠레’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 축구가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서 “통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4강전이 열리던 날, 길거리는 조용했다.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학교에선 수업을 멈춘 채 교사와 학생들이 TV 앞에 모이거나 라디오를 들었다. 선수단 귀국 당시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보다 19년 앞선 ‘원조 4강 신화’였다.● 왜 지금, 다시 멕시코? 43년 전 멕시코 청소년대회가 소환된 이유는 2026 북중미 월드컵(6월 11일∼7월 19일) 때문이다. 한국은 조별리그 1·2차전을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치른다. 해발 1550m 지대다. 3차전이 열리는 몬테레이는 540m지만, 이미 두 경기를 고지대에서 치른 뒤다. 해발 1500m를 넘으면 산소 흡수 능력은 약 5% 떨어진다. 회복 속도는 늦어지고, 공의 궤적도 달라진다. 공기 밀도가 낮아 공은 더 빠르고 멀리 날아간다. 혈관이 확장돼 코피가 나는 경우도 잦다. 1983년 대표팀은 톨루카(2660m), 멕시코시티(2200m)에서 훈련과 경기를 치렀고, 8강·4강·3, 4위전은 몬테레이와 과달라하라에서 소화했다. 일정 역시 6월 초부터 중순까지로 2026년 월드컵 일정과 유사했다. 그래서 신연호 감독의 경험은 지금 대표팀에도 시사점이 크다.● 마스크 훈련과 6가지 전술… ‘호랑이’의 준비 당시 사령탑은 ‘호랑이’ 박종환 감독이었다. 여건은 열악했다. 고지대 전지훈련은 꿈도 꾸지 못했다. 대신 택한 방법이 마스크 훈련이었다. 1982년 12월부터 서울 효창운동장 인근 여관에서 합숙하며 마스크를 쓰고 달리게 했다. “처음엔 10분도 못 버텼다. 점점 강도를 높여 30분까지 뛰게 했다. 지옥 훈련이었다.” 박 감독은 생전 이렇게 회상했다. 실업팀, 대학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실점하면 그 수의 10배만큼 운동장을 돌게 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고강도 훈련은 이어졌다. 신 감독은 “몰래 마스크를 살짝 내리기도 했다”며 웃었다. 전술 준비도 치밀했다. 박 감독은 경기 상황을 6가지로 나눠 약속된 패턴을 만들고 번호를 붙였다. 1번부터 6번까지. 벤치 지시가 없어도 선수들이 상황에 맞춰 번호를 선택해 움직였다. 이 ‘기계 같은 조직력’이 본선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신의 한 수, 조기 출국과 김치찌개 대표팀은 대회 보름 전 멕시코에 입국했다. 나름 대한축구협회가 신경을 썼다. 식재료는 충분히 가져가진 못했다. 신 감독 어머니가 싸준 고추장은 비행기 안에서 부풀어 터져버렸다. 운 좋게도 멕시코 교민들이 힘을 보탰다. 그런데 뜻밖의 호재가 있었다. 고기였다. 신 감독은 놀랐다. “투우의 나라라서인지 소고기가 풍족했다. 단백질을 제대로 먹었다.” 평소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박 감독은 원흥재 코치와 함께 김치찌개를 끓였다. 입맛이 떨어질 틈이 없었다. 찌개 맛이 소문나 외국 언론이 박 감독을 ‘요리사’로 알 정도였다. 경기장 밖에서의 안정감은 경기력으로 이어졌다. 평소 다혈질인 박 감독은 멕시코에서 표정을 바꿨다. 1차전 스코틀랜드에 허무하게 졌는데 선수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괜찮다, 잘했다.” 이 한마디가 분위기를 바꿨다.● 눈빛으로 통했다… 조직력과 투혼의 결정판 멕시코와의 2차전은 정오 경기였다. 해가 강렬했다. 안방팀 멕시코의 꾀였다. 해발 2200m, 아스테카 스타디움. 올해에도 월드컵 개막전이 열리는 곳이다. 7만2000명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을 이겨내고 후반 44분, 상대 수비 몸에 맞고 튀어 오른 공을 신연호가 헤딩으로 꽂았다. 역전 결승골이었다. 그는 “후반엔 오히려 멕시코 선수들이 더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8강 우루과이 전은 상징적인 장면을 남겼다. 후반 9분, 신 감독은 “그 때 노인우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신연호가 전방 공간으로 뛰었다. 순간 수비수 사이로 노인우의 침투 패스가 신연호의 발에 배달됐다. 골키퍼와 1대1. 신연호는 골망을 흔들고 특유의 만세 세리머니를 했다. 선제골. 전반 페널티킥을 실축한 노인우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실수를 만회했다. 전남 여수 한 동네에서 자라 초중고와 대학까지 함께한 두 친구의 합작품이었다. 신연호는 연장전에서 문전 센스로 결승골까지 터트렸다. 또 한 번 만세를 불렀다.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박 감독도 종료 휘슬과 함께 오완건 단장, 선수들과 엉켜 안고 울었다.● 과거는 거울이다기세가 하늘을 찔러 4강에 가긴 했는데 선수들은 당시 한국의 열광을 몰랐다. 인터넷도, 실시간 소식도 없었다. 훈련과 경기에만 집중했다. 귀국 후 김포공항에서야 실감했다. “짐을 찾지 말라고 하더라. 그냥 기자회견부터 하라고 했다. 얼떨떨하게 나갔는데 그 때 알았다.” 1983년 멕시코는 한국 축구가 세계를 향해 눈을 뜬 순간이었다. 신 감독도 “한국 축구를 세계가 알게 된 시작”이라며 동의한다. 그 경험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으로 이어졌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축구의 토대가 됐다. 아르헨티나, 이탈리아를 맞아 실제 그랬다. 43년 전 청소년 대표팀은 강한 체력, 조직력으로 기본 무장을 했다. 여기에 집중력, 끈기를 잘 섞었다. 4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승리의 공식이다. 북중미 월드컵을 앞둔 지금, 다시 멕시코를 떠올리는 이유다. 과거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일 수도 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