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영

유재영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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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부터 정치, 사건, 검찰, 법원 담당 취재를 해오다 2014년부터 스포츠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스포츠에서도 영웅과 야인의 시대를 취재하겠습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스포츠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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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04-07~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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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어서 정상까지 가렵니다” …평균연령 70세 K-노인단, 1회 워킹풋볼 월드컵 출격한다

    평균 나이 70세의 시니어 노인들이 이색 축구 월드컵에 도전장을 냈다.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영국에서 열리는 2023 국제워킹풋볼연맹(FIWFA) 월드 네이션스컵에 출전하는 한국 대표팀이 7일 서울 구로구 안양천 축구장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대표팀은 60세 이상 그룹 대회에 출전한다. 처음으로 열리는 이번 대회는 사실상의 시니어 월드컵이다.   워킹풋볼(Walking Football)은 몸이 불편하거나 활동에 제약을 받는 시니어들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축구 경기다. 2011년 영국에서 첫 선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경도인지장애(정상 노화와 치매의 중간 단계) 등의 증세가 있는 시니어들의 재활을 돕는 운동으로 조금씩 보급됐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국가들에서 치매 예방 등의 스포츠로 적극 장려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경기도 워킹풋볼리그에 22개팀이 참가하고 있다. 동호회들도 다수 있다.  축구와 규칙은 다르다. 달리면서 공을 차는 게 아니라 한 발을 땅에 댄 채 걸어서 움직이고 공을 다룬다. 선수간 태클과 어깨, 몸싸움은 허용되지 않는다. 부상 방지를 위해 경합 상황을 방지하는 규정이다. 선수들은 축구화가 아닌 트레이닝화를 신는다. 한 팀은 6명(골키퍼 포함)으로 구성된다. 머리 높이 아래로 패스를 해야하고 골 에어리어(6m) 안에서 슛을 할 수 없다.  접촉이 금지되기 때문에 공격하는 팀이 공격을 전개할 때 수비팀은 공을 뺏을 수 없다. 공격하는 팀도 수비하는 팀 선수를 밀치거나 넘어뜨릴 수 없다. 그러면 반칙이 선언돼 프리킥, 페널티킥 등이 주어진다. 반칙을 3회 하면 블루카드를 받아 2분간 출전 금지된다. 이후 3회 반칙을 더하면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된다. 경기 시간은 전후반 20분씩(휴식 5분)이다. 경기장 규격은 일반 축구 경기가 열리는 구장의 절반 사이즈다.  월드 네이션스컵을 주최하는 FIWFA는 2018년 영국에서 창설됐다. 등록 회원국은 50여개다. 이번 대회에는 20여개 나라가 참가 신청을 했다. 한국은 60세 A조에서 잉글랜드, 프랑스, 일본, 캐나다, 스페인과 맞붙는다. 대회는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훈련장인 세인트 조지 풋볼 파크에서 열린다. 2회 대회는 2025년 사우디아리비아에서 개최되고, 한국은 2029년 4회 대회 유치를 노리고 있다.  2021년 6월 설립된 대한워킹풋볼협회(회장 한상철)는 지난 달 각 지역 선수들 중에서 대표 선수 12명 선발을 마무리 짓고 7일부터 훈련에 들어갔다. 선수단 평균 연령은 70.9세다. 전 국가대표인 김강남 감독(69)이 지휘봉을 잡고 감독 겸 선수로 뛴다. 김 감독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축구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김정남 전 울산 감독의 친동생이다. 김 감독은 현역 시절 프로팀 유공과 대우에서 활약했으며 1975년부터 1983년까지 국가대표 A매치 39경기에 출전해 6골을 기록했다.  원흥재 선수(75)도 축구인이다. 숭실대 감독을 지냈고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U-20 월드컵)에서는 코치로 박종환 감독을 보좌하며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어냈다. 청소년 대표 출신인 양대길 대한워킹풋볼협회 사무총장(67)도 선수로 참가한다.  선수단은 22일 영국으로 출국한다. 김 감독은 “예선을 통과해 결선토너먼트에 올라가는 것이 목표”라며 “황혼기에 접어든 시니어들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의지를 보였다.     유재영기자 elegant@donga.com}

    • 20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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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대-순천시, ‘생태-스마트 특화 도시’ 협업

    지역 균형 발전의 핵심은 대학과 교육, 과학이라는 인식하에 순천대와 전남 순천시가 협업을 통해 대한민국 생태 수도로 자리매김한 순천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전남 동부권의 대표 국립대인 순천대는 지산학(地産學) 연계를 바탕으로 국내 30위권 대학 진입을 노리고 있다. 지난달 17일 취임한 이병운 총장은 2023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를 성공리에 개최하고 있는 노관규 순천시장을 23일 총장실에서 만나 지역과 대학의 동반 성장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총장에 취임한 지 보름 정도 됐다. 정부도 대학 주도의 지역 균형 발전을 추진하고 있고, 노 시장도 순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이병운 총장=학령인구 급감 등 대학을 둘러싼 격변기에 내부 혁신을 이루고, 지역의 장점을 지자체 등과 함께 부흥시키는 연계 방식이 필요하다. 글로컬 대학에 도전하는 목표 지향점이기도 하다. 순천은 순천만 국가정원, 순천만 갯벌 등이 있는 생태 관광 도시다. 또 우주발사체의 거점인 단조립장(한화에어로스페이스 투자)이 건설될 예정이다. 이차전지 산업 기반도 있는데 더 커질 것이다. 순천대는 농·생명 분야에 강점이 있다. 애니메이션학과는 국립대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이들을 묶어 성장 동력으로 육성할 것이다. 이차전지·항공우주, 생태문화 콘텐츠, 저탄소 스마트팜 등 3개 군이 중심인 특화 전략이다. 모든 학과를 ‘헤쳐 모여’ 식으로 재편해 3개 분야 35개 학과로 통폐합한다. 애니메이션 전공은 인문예술대 내의 피아노, 만화애니메이션, 영상디자인, 사진예술학과 등과 융복합해 대폭 증원할 생각이다. ▽노관규 시장=대학은 식량이 떨어져 고사하는 지경까지 왔다. 시대가 변해서 큰 파고가 있을 것에 대비해 시가 대학협력팀을 1월 1일 자로 독자적으로 만들어 준비하고 있었다. 시의 순천대에 대한 의지는 이미 약대 지원에서 확인됐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중소도시도 서울 같은 대도시를 흉내 내서는 절대 생존할 수 없다. 고유한 개성을 시와 대학의 노력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지역 주민들의 행복지수와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 ―이 총장은 취임사에서 지산학 거점이 되겠다고 밝혔다. ▽이 총장=지산학 융합 모델은 지산학의 거버넌스를 구축해 전남을 비롯한 남해안의 지역 전략 산업, 첨단 산업의 기반, 인력 등이 선순환되도록 하는 중심축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목포대, 목포해양대, 도립대, 청암대 등 주변 대학과도 연합한다. 지자체 및 산업체의 유능한 분들을 교수로 채용하고 부총장으로도 선임하려 한다. 지자체, 산업체, 대학 간 인사 교류도 한다. 순천대가 지산학 플랫폼이 돼 28만 명의 순천시 인구가 30만 명 이상으로 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학생 정주 비율도 80% 이상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글로벌 지향 측면에서 외국인 유학생도 늘릴 건가. 순천 지역 산업 현장과도 연계할 방안이 있을 것 같다. ▽이 총장=400명 수준인 외국인 유학생 비중을 1000명 이상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불법 체류 문제에 부딪힐 수 있는데 법안 통과 등을 통해 (입국, 유학) 조건이 완화되길 기대한다. 순천 지역 농촌, 중소기업 인력이 정말 많이 부족하다. 여기에 필요한 외국인 유학생 인력을 순천대에서 교육해 도움을 주겠다. 글로벌 교류 차원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등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분야 교육과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고, 필요하면 현지 캠퍼스를 만드는 것도 고려하겠다. ▽노 시장=스마트팜 사업이 농촌의 핫이슈다. 양질의 교육을 받은 사람 등 다양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동남아 유학생이 순천대에 올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팜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될 수 있기에 충분히 ‘유인’할 수 있다고 본다. ―시가 2026년까지 애니메이션 클러스터 조성 예산을 확보하는 데 역할을 했다. ▽노 시장=정부와 300억 원 규모로 조율이 됐는데 순천이 애니메이션, 웹툰 등의 기획, 설계, 제작의 ‘메카’가 되려면 국비 등이 추가 투입돼야 한다.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하려는 학생들이 수도권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순천대 관련 학과에서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이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대학의 역할이 중요하다. 순천대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주도해 줘야 한다. 이를 위해 기업들도 유치할 생각이다. ―순천 같은 중소도시는 어떤 발전 전략을 채택해야 하는가. ▽노 시장=앞에서도 말했듯 대도시를 흉내 내지 않는 것이다. 당장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를 하면서 도시 구조부터 차별화되고 있다. 국내 다른 도시들은 도로를 내려고 난리다. 인구가 줄어들면 나중에 그 도로를 누가 관리하나. 순천은 정원이 아파트 앞까지 들어와 있다. 프랑스 파리의 이달고 시장을 흉내 낼 수 없지만, 센강 변을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로 만드는 것은 벤치마킹할 수 있다. 우리 모습을 고려해 우리의 문화로 소화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이렇게 중소도시의 표준과 여건을 만들면 이 지역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산업도 들어온다. ―여기에 대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 총장=시의 전략에 대학도 발맞춰야 한다.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총장의 역할 변화다. 대학 총장도 기업 최고경영자(CEO)처럼 뛰어야 한다. 대학 정책 수립에 지역 전문가들이 참여하도록 하고, 실무형 융합 교육을 강화하는 등의 리빌딩이 필요하다. 시대의 불확실성을 대비한 역량도 키워야 한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고 특히 인문학적인 소양 교육이 특화 분야와 시너지를 내도록 대학에 있는 벽을 허물겠다. 지역 주민들의 평생 역량 재교육에도 주도적으로 나설 것이다. ▽노 시장=시장이 잘한다고 해서 도시가 안 바뀐다. 도시 변화의 요건은 시민들의 눈높이, 즉 인문학적 소양과 지식, 철학적 높이에 달려 있다. 순천만에서 14년 전에 논바닥에 있는 전봇대 282개를 뽑았다. 시민들의 동의로 가능했다. 이번에는 도로를 막아서 정원을 만들었다. 시민들의 눈높이가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익숙해진 세상에서 미래를 보는 눈높이가 필요한데 이것은 평생 교육의 문제다. 중소도시의 경쟁력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갑자기 생길 수 없고 대학과 역할 분담을 잘해야 하는 문제다. ―일본 기타큐슈는 기타큐슈시와 기타큐슈시립대의 노력으로 중화학 공업 도시이자 친환경 생태 도시가 됐다. 일본의 지역 균형 발전 모델로도 손꼽힌다. 순천시와 순천대가 힘을 모은다면 ‘생태+α’ 발전 전략도 가능해 보인다. ▽이 총장=기타큐슈시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꿈꿀 수 있는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 덕분이다. 교육으로 스펙트럼을 넓힌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도시의 살길을 찾아줬다. 순천시도 정원이 어우러진 친환경 도시를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가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의 성공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대표 생태 도시 타이틀을 얻었다. 글로컬 대학의 취지가 대학 주도의 지역 균형 발전에 있다면 결국 대학과 지자체가 연계를 통해 지역의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순천은 특히 스마트팜으로 대표되는 농업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생태 도시를 넘어 모두가 모방하고 싶은 세계 최고의 ‘생태+스마트’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노 시장=생태가 경제를 견인한다.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에 300만 명이 왔다. 이 중 50만 명이 이 지역에서 소비 활동을 했다고 보면 파급 효과를 알 수 있다. 관광은 지자체가 증명했으니 대학이 다른 지혜를 줘야 한다. 지역 융복합의 미래 방향을 정리해줄 수 있는 곳이 대학밖에 없다. 순천대가 생각하는 특화 전략까지 포함해 대학의 변화와 순천의 변화를 논의하고 싶다. 순천대와 계속 손을 잡아서 지역을 소멸시키지 않고 더 큰 가치를 만들어 내고 싶다. 총장께서 새로 취임하셨으니 빨리 밥을 뜸 들여 함께 먹고 싶다.이병운 총장 약력△ 1967년생△ 순천대 법학과 졸업, 원광대 법학과 박사△ 순천대 법학전공 교수, 순천대 입학관리본부장△ 현 순천대 제10대 총장노관규 시장 약력△ 1960년생△ 제34회 사법시험 합격,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검사△ 새천년민주당 예산결산위원장, 5·6대 순천시장△ 현 10대 순천시장 순천=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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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정인 부산대 총장이 말하는 글로컬 전략… 특화 캠퍼스 ‘메카’ 선도 모델로 ‘또 하나의 서울대’로 간다

    “아직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대학이 위기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만 야구의 속설처럼 ‘위기를 넘기면 반드시 기회가 찾아 온다’는 것을 철썩같이 믿고 싶다. 차정인 부산대 총장의 요즘 결기이자 의지다. 다른 지방 국립대가 겪는 것처럼 부산대도 어렵다. 제2의 수도로 불리는 부산의 대표 국립대지만 ‘수도권 대학 쏠림’ 유탄을 직격으로 맞고 휘청인지 꽤 됐다. 부산을 비롯해 경남권 인재들이 서울, 수도권으로 가면서 존재감이 흔들렸다. 1990년대 학번까지만 해도 전국 최상위권 성적에 있던 이 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서울 타이틀을 버리고 기꺼이 부산대를 모교로 삼았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정부는 ‘글로컬(Global+Local) 대학’ 사업을 통해 지방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하겠다는 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올해부터 4년에 걸쳐 30개 대학을 선정한다. 가능성과 우려가 엇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지방대에게 혁신과 통합의 과제가 주어졌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다. 부산대는 어떤 포지셔닝을 할까. ‘부산대’라는 제품을 어떻게 혁신하고 경쟁력을 끌어올릴까. 어떤 커뮤니케이션 전략으로 교육 당사자들의 마음을 잡을까. 10일 부산대 총장실에서 차 총장을 만나 이와 관련한 부산대의 핵심 비전을 들었다. 그는 현재 부산대의 학생 수준과 교육 역량 모두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부산대가 지방대의 선도 모델이 돼야 한다고 했다. “부산대를 ‘또 하나의 서울대’로”“부산대는 인구 800만이 있는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의 대표 대학 아닙니까?” 차 총장은 비전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차별화된 ‘아젠다’ 설정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나 교육 당사자들의 부산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인가. “사회부총리와 미팅할 때 ‘지방대에 대한 정책 비전이 더 커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800만 인구를 대표하는 부산대는 ‘또 하나의 서울대’로 만들겠다는 비전 정도가 나와야 된다. 그래야 ‘지방 대학 시대’, ‘국가 균형 발전 시대’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겠나.” -비전을 따라갈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다고 보는 건가. “과거보다는 못하지만 부산대 공과대만 봐도 여전히 전국 상위 10% 내에 드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교육 역량도 탄탄하다. 석·박사급 연구 인력을 양성하는 ‘4단계 BK(두뇌 한국) 21 사업’ 선정에서 부산대는 서울대에 이어 전국 2위를 기록했다. 서울대는 46개, 우리는 36개 사업단이 선정됐다. BK 사업 선정은 주로 교육 역량을 평가하는데 그만큼 부산대 상황이 좋다는 것이다. 또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선호한다는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최근 5년 합계 정규직 입사자 수를 보더라도 부산대가 연세대와 공동 1위다. 블라인드 평가에서 부산대 학생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다. 장래성 높은 학자들이 부산대에서 교수 경력을 시작하면서 연구의 전성기를 보낸다는 것도 장점이다. 지역 대학들에게 정책적 뒷받침을 해주면 국가 균형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부산대는 자신이 있다. ‘또 하나의 서울대’ 프로젝트를 담대한 구상으로 만들어 글로컬 사업 계획(공모 신청은 이달 31일까지)에 담았다.” 차 총장이 구상한 ‘또 하나의 서울대’ 프로젝트의 핵심은 투 트랙으로 특화 캠퍼스 ‘메카’를 만들어 서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것이다. -메카에 대해 소개해 달라. “하나는 양산캠퍼스를 중심으로 의생명 융합 특화 캠퍼스를 만드는 것이다. 이 분야의 ‘메카(성지)’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양산캠퍼스에는 의대, 치대, 한의대, 간호대학이 있다. 수의대까지 유치하게 되면 의·생명과학 학문 분야를 다 갖추게 된다. 의·생명 융합 기술을 기반으로 맞춤형 헬스케어, 바이오 헬스, 빅데이터 등을 연구하는 의·생명융합공학부도 있다. 재정 확보를 위해 정부가 약간의 규제 해결만 도와주면 된다. 그러면 기초과학 분야에 대대적 투자도 가능하다. 지금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부산대 IBS 기후물리연구단과 같은 것을 양산캠퍼스에 몇 개를 더 만들면 의·생명 융합 특화 캠퍼스를 최고 수준으로 만들 수 있다.”부산교대와 통합… 종합 교원 양성의 ‘성지’ 자신또 하나의 트랙은 교원 양성 특화 캠퍼스를 만들겠다는 방향이다. 지방 국립대 통합 과제 논의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부산교대와 통합이 관건이다. 15일 부산교대 학내 의견 수렴기구인 평의원회에서 통합안을 찬성하고 의결했다. 17일 부산교대 교수회의에서도 평의원회 의결 결과를 최종 승인했다. 차 총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양교 통합의 비전과 청사진을 내보일 것”이라고 했다. -두 학교의 특성을 십분 활용할 것인가. “부산교대 거제동 캠퍼스에 부산대 사범대 일부 학과가 이전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부산교대에는 초등교육 과정이 있고, 부산대에는 유아교육, 특수교육, 중등교육 과정이 있다. 명실공히 전국 최대 규모의 종합 교원 양성 특화 캠퍼스가 될 것이다.” -통합 논의에서 부산교대 학생들을 상당히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교대 학생들이 종합대학에서 역량을 최고조로 키우도록 도울 것이다. 초등교사가 중등교사보다 더 글로벌화돼야 하고 다양한 학문 분야의 소양도 갖추어야 한다. 교대 학생들의 부전공, 복수전공을 허용하고 권장할 예정이다. 사범대 학생들이 모두 교사가 되는 게 아니듯이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교육대학 학생들의 임용률도 점점 낮아지고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4년 동안 대학을 다니면서 다른 진로에 관심이 생길 수도 있다. 초등교사가 희망 1순위지만 학문연구를 하고 싶어 교수가 될 수도 있고 기업으로 갈 수도 있다. 청년 시절에는 진로 선택의 폭이 다양하게 열려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기존 부산대 타 전공 학생의 초등교육 부전공, 복수전공 이수는 필요하지 않아 금지하기로 이미 정했다.” -당장 교육 현장의 지형도를 바꿀 자신감이 엿보인다. “‘교원 양성은 부산이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해 나갈 것이다. 교원 양성 국책연구센터를 만들어 이 분야 국제적인 학술대회가 현 교대캠퍼스를 중심으로 이뤄지도록 할 계획이다. 교대에도 박사과정을 둬서 교수님들의 전문 연구를 지원할 것이다. 종합대학 교수로 전환하는 것에 맞춰 특별 연구비 지원도 필요하다. 통합으로 인한 가장 희망적 변화는 부산의 초등학교에서 나타날 것이다. ‘부산의 초등교육이 전국에서 가장 앞서 간다’는 평가를 받도록 하겠다.”“결정 장애에 빠져 있지 않겠다”차 총장의 고민은 부산대만 살자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수 창의적 인재들의 입학과 더불어 그들의 지역 정착은 모든 지방 국립대들의 숙제다. 앞장서 난제 해결을 위해 움직이고 선도 모델을 낸다면 다른 대학에게 자극제, 동기 부여가 충분히 될 것으로 본다. - 돈 준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보는 건가. “지역인재 유출을 막지 못하면 정부가 지역대학에 예산 지원을 해도 근본적 대책이 되지 않는다. 인재 유출의 확실한 방어책은 수도권 대학 정원 총량 규제다. 최후의 보루다. 부산대는 최근 정부가 첨단분야 정원 증원 신청을 받을 때, 먼저 기존 학과의 정원을 자체조정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필수 인원 20명만 신청해서 20명을 받았다. 부산대가 정원을 지나치게 늘리면 바로 인근의 지역대학들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거점대학 총장으로서 지역대학들을 고려하면서 대승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차 총장은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의무채용 확대가 지역대학의 경쟁력을 강하게 끌어올릴 것으로 확신한다. 차 총장이 직접 혁신도시법 개정안을 준비해 지역대학 총장들과 함께 정치권 등에 건의를 했고, 국회 국토위에서 법안 심사 중이다. 현재는 혁신도시법에 따라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은 직원의 30%를 해당 소재지 대학 출신 학생 가운데 의무적으로 뽑아야 한다. 차 총장의 안은 30%를 현재처럼 그대로 뽑고 추가 20%를 공공기관 소재지 대학 외의 비수도권 전체 대학에서 선발하자는 것이다. -이 법을 어떻게 평가하나. “지역인재 유출을 획기적으로 해결하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공공기관으로선 인재 선발의 풀이 넓어진다. 부산의 공기업에도 전남, 경북, 충남 지역 학생들이 오게 되는 것이다. 수도권 학생들의 불이익이 없도록 법령 적용은 6년 뒤부터다.” 국가 거점 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차 총장은 국립대의 역할과 재정·운영에 대한 법적 근거인 국립대학법 제정과 국립대학회계법 개정도 주도했다. 주변 UNIST(울산과학기술원), 포스텍(포항공대)과의 융합, 교류도 검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차 총장은 “전국에 5대 밖에 없다는 300KV 초저온 투과 전자현미경을 부산캠퍼스가 아닌 양산캠퍼스에 뒀다. UNIST, 경북대, 경상대, 부경대 등이 다 편리하게 활용하도록 했다. UNIST는 당장 이 장비를 활용해 연구할 게 많다고 한다. 협력 구조를 함께 만드는 건 즐거운 일이고 대환영”이라고 말했다. -옳은 방향의 가닥이 잡히면 바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대학들이 종종 결정 장애에 빠지는 폐단이 있다. 상황이 어려운데도 중요한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산대는 교무회의가 활발하다. 필요한 결정은 제때 내리고 있다. 학내 공론이 살아있게 하고 결정을 미루지 않으려고 한다. 한편으로는 지역대학 총장님들과 협력해 교육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부산대의 반전 상승의 그래프를 그린 총장으로 기억되고 싶다. 온전히 부산 경남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부산대가 균형발전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할 시기다.”“서울대 건드리지 않는 게 서울대 10개 만들기 핵심” 지역 균형 발전과 지방 거점 국립대의 경쟁력을 동시에 살리자는 취지에서 나온 대학 개혁 모델 제안 중 하나가 ‘서울대 10개 만들기’다. 김종영 경희대 교수(교육사회학)가 2021년 제안해 화제를 끌었다. 핵심은 지방 9개 거점 국립대에 서울대 수준의 재정을 투입해 세계적 수준의 연구 중심 대학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과열된 대학 입시 경쟁을 막고 대학 서열화를 완화시켜 궁극적으로 국토 균형 발전 시대의 모멘텀으로 작용하게 한다는 취지다. 지난해 2월 전국 9개(서울대 제외) 국가 거점국립대총장협의회는 이 같은 방안을 여야 대통령 후보에 제안했다. 현재도 국회, 학계 등에서 활발하게 관련 제안이 나오고 있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C) 체제를 벤치마킹한 발상이다. 캘리포니아의 타이틀 안에서 10개의 연구 중심 대학이 있다. 버클리,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산타바바라, 어바인, 데이비스, 산타크루즈, 리버사이드, 머세드에 캠퍼스가 있다. 차 총장은 “현장에 가서 보니 이 모델로 인해 모든 캠퍼스가 좋아졌다. 전체 연구 중심 대학을 선도하는 UC 버클리는 글로벌 탑 대학이 됐다. UC 버클리 모델은 서울대가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러나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반대론도 만만치 않다. 차 총장은 발상의 전환을 언급했다. 차 총장은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장점은 서울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지역 거점 대학들의 수준을 먼저 끌어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차 총장은 “프랑스 파리대학을 따라가면 파리1, 파리2대학이 될 수 있고, UC 모델이면 서울대 경북, 서울대 충남 이런 식이 될 것”이라며 “부산대 구성원들이 ‘서울대 부산’의 명칭에 만족할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대표적인 거점 국립대인 부산대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국가적인 공론에는 대승적으로 임할 생각이다”고 밝혔다. 이어 차 총장은 “학원가에 초등학생 의대반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라며 “대학으로 가는 고속도로 병목현상이 심각하다. 고속도로를 10개쯤 만드는 게 올바른 대책이다”고 더 구체적인 화두로 다뤄지길 기대했다.부산=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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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즈 대모’ 윤희정에게 영감을 일깨워 준 친구 셋[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깐부. 국어사전에는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보충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국 하버드 의대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동아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행복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부도, 명예도, 학벌도 아닌 사람들과 따뜻하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고 했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인데 저는 사람들을 대할 때 보자기를 잘 안 싸요. 어떻게든 보자기를 풀어서 뭔가 해줘야 직성이 풀려요.”국내 최정상 재즈 아티스트 윤희정(70)은 보기만 해도 즐거움을 준다. 어색함을 무너뜨리는 ‘사이다 멘트’와 폭풍 칭찬으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간다. 그러면서도 잡히는 대로 뭔가를 준다. 자발적 ‘흥부자’인데 퍼줘야 본인 속이 후련하고 안심이 되는 스타일이다. ‘재즈 대모’로 불리는 거장이지만 거리감이 없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즉석 노래 요청에 무반주 생라이브로 재즈 한 소절을 기가 막히게 뽑아주는 뮤지션이다. 그야말로 남을 위한 ‘정리의 달인’이다. 몸에 뱄다. 사람 정리, 관리는 도가 텄다. 많이 도와줘야 할 사람, 더 많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아예 24시간 챙겨야 할 사람이 딱 구분돼 있다. 밥상, 식탁 정리도 예술이다. 음식을 즐기는 그는 남들이 준비해준 음식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박수를 치며 온 감각을 동원해 맛있게 먹고 표현한다. 남은 음식도 끝까지 관찰해 포장하든, 어떻게든 정리한다. ● 늘 보자기 푸는 여장부… ‘우리들의 빅마마’음식도 그가 보자기에서 푸는 정이다. 최근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도 손수 집에서 깎아온 참외를 기자의 입에 무작정 밀어넣는다.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참외 반쪽이 씨와 함께 훅 들어온다. 5분 후 하나가 더 들어오고 또 곧바로 2~3개 참외가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음식의 주고받음으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채고 그에 맞게 도우려 한다. 영락없는 우리들의 ‘빅마마’다.재즈 정리도 듣는 입장 위주로 자신을 낮춘다. 화자정리가 아니라 청자정리다. 배려 차원에서 재주 가수인데 도대체 재즈 안에 갇히려 하지 않는다. 누가 옆에서 트로트를 불러도 박수를 치고, 발라드를 불러도 환호를 지른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재즈와 연결지으려 하고 본인이 변화무쌍한 퓨전 재즈를 구사한다. “이미 20년 전에 트로트를 재즈로 부른 사람이에요, 내가.”그런 재즈를 사람들에게 늘 선물하려 한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했다. 25년 넘게. 박자, 리듬을 아주 쉽게(?) 무시하는 ‘음치’, ‘박치’들이 윤희정 재즈 무대에 올라 능력자가 됐다. 그들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노래를 시키면 숨을 곳부터 찾았던 사람들이 윤희정의 재즈 선물을 받고 어디서도 마이크를 놓지 않는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재즈관과 비슷하다. ‘사람=재즈’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람의 다양성이 그의 재즈 세계로 들어가면 예상치 못한 스펙트럼을 낸다. 재즈를 부르는 실력은 어설퍼도 눈물나게 감동적인 게 나온다. 윤희정이 사람과 사람을 엮는 재즈를 시작한 건 1997년 무렵이다. 당시 정동극장으로부터 1년 공연을 제안받았는데 두려움을 오기로 바꿔 새로운 트렌드의 재즈 공연을 시작했다.“200곡 정도 재즈를 연습하고 있는데 제안을 받고 무서워서 도망을 갔어요. 그때 스승이신 이판근 선생님(한국 재즈 연구의 선구자로 불림)이 ‘너 호랑이를 그려야 되는데 고양이부터 그렸니’라고 야단을 치셨는데 뭐에 머리를 크게 맞은 것 같더라고요.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그래서 한 달 만에 돌아가서 공연을 하겠다고 말하고 이 선생님 앞에서 재즈 연습을 한 뒤 숙제 검사를 받았죠. 다달이. 그때가 저의 전성기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관객석 500석을 어떻게 채울지가 또 고민이었죠.”-어떻게 하셨어요?“촉이 살아있었는지 ‘I’m a Jazz singer’라는 말이 떠오르는 거야. 재즈를 모르는 유명인, 연예인과 각계 각층 일반인들을 가르쳐서 무대에 함께 올라가기로 한 거죠. 그게 ‘윤희정 & 프랜즈’의 시작입니다. 1회가 남경주였고 박상원, 이은미, 신애라, 송일국, 이하늬, 옥주현 등 스타들이 법조인, 정치인, 일반인들과 함께 연이어 재즈 무대에 나섰죠. 두고두고 제가 제일 잘한 일이죠. 여기에 나온 분들, 그리고 그때의 히스토리가 저의 재산이 됐어요. 천하의 김건모도 부들부들 떨면서 공연을 했다니깐요. 하하.”재즈 불모지에서 그 어렵다던 재즈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윤희정 & 프랜즈’는 회당 2차례 매진 공연을 하면서 2011년 100회째 공연을 끝으로 마무리했다. 윤희정은 100회 공연을 통해 250명과 인연을 맺었다. 이 중 50명을 추려 에세이집을 냈다. 책 제목은 ‘이 노래 아세요?’ 였다. 제목까지 보는 사람을 배려했다. ● ‘온리 원’ 재즈 불러준 내 친구 안미려1년을 쉬고 2013년부터 재즈 힐링을 테마로 ‘윤희정의 재즈 프렌즈 파티’를 시작했다. 1기를 시작으로 현재 14기가 맹연습 중이다. ‘윤희정 & 프렌즈’는 교육적 차원의 퍼포먼스가 강했다면 프렌즈 파티는 재즈를 가르치면서 윤희정 본인도 사람들과 얘기를 하며 그들의 인생 모토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서 작용-반작용 교감이 오가는 장으로 시작했다. 윤희정과 14기 6명이 함께 만들어내는 공연은 내달 9일 용산아트홀에서 열린다. 프렌즈 파티를 통해 윤희정은 ‘평생 윤희정을 떠나지 않으려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는 3명을 주저 없이 평생 깐부로 꼽는다. 윤희정은 “내 재즈를 더 풍부하게, 풍성하게 해 준 은인”이라고 말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안미려 (사)한국메이크업전문가직업교류협회 회장(예술학 박사)은 윤희정의 평생 ‘눈물받이’다. 우람한 풍체의 당당한 여장부 윤희정이 남들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속 깊은 감정을 털어내고 마음을 정화하고 싶을 때 늘 옆에 있는 사람이다. 동갑내기다. 20여년 전 패션계 셀럽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조금씩 안면을 트다 서로 ‘원 픽(One Pick)’ 이 됐다.“그냥 워너비(갖고 싶은 것)에요, 안 회장은. 힘들 때마다 만나고, 둘이 교회를 가면 그렇게 똑같이 울어요. 말이 필요 없지.” (윤희정) “저는 수줍음도 많고, 규격화된 사람이에요. 게다가 윤 선생님은 제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갖고 계신데 왠지 삶의 궤적이 비슷할 것 같은 느낌을 처음부터 받았어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 것도 그렇고….”(안미려)설명이 부족했는지 윤희정은 “밤 12시에 매일 전화하는 사이다. 좋은 얘기하고 울고, 또 자연요리를 하는 김호순 선생을 찾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서로가 최고의 낙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피곤이 쌓일 정도로 만날 수 있나 싶다(웃음). 항상 겸손해지고 내려놓고 살자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이”라고 했다.당연히 안 회장도 윤희정의 재즈 세계로 들어왔다. ‘윤희정의 재즈 프렌즈 파티’ 2기 멤버로 무대에 섰다. “재즈 연습을 할 때는 ‘내가 야단을 이렇게 맞으면서까지 해야 되나’는 생각도 했어요. 덜덜 떨고 노래 부른 기억밖에 안 나요. 가사를 안 잊어버린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재즈를 불렀다는 게 너무 신기하죠. 그 후로 인생이 달라졌어요.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하고 싶어요.”윤희정은 안미려 친구를 재즈 무대에 올리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무릎을 쳤다고. “1935년에 나온 ‘ I’m in the mood for love’라는 노래를 딱 정해주고 하라고 시켰어요. 지금 이 순간 사랑하고 싶다, 이런 노래거든. 어려워해서 그냥 패티김 노래라 생각하라고 했죠. 무대에서 발라드 풍으로 부르는데 안 회장 본인의 인생이 녹아 나오더라고. 내가 선물한 드레스도 너무 잘 어울리고. 내가 아는 안 회장은 머리끈 딱 묶고 죽자살자 살아온 사람이거든요. 무대에서 그 모습이 겹치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인생 그림이 나와서 정말 기뻤어요. 잘 부르고 못 부르고를 떠나 그 사람의 캐릭터를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윤희정은 과거 재즈의 지향점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대중성을 추구하느냐, 재즈 본연을 유지하느냐 사이의 기로에 많이 섰었다. “재즈 원곡을 살리다보니 대중이 나를 싫어하고, 대중적인 재즈를 하니 재즈가 울더라고요. 음악은 두 가지라고 봐요. 듣기 좋거나 싫은 것. 나는 듣기 좋은 음악을 지향하겠다고 결심했죠. 물론 바탕은 재즈지만. 어렵게 불러서 청중들의 약을 올리는 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리고 2010년 정도 되니까 스승님이 ‘동백아가씨든 뭐든 아무렇게나 해라. 다 재즈다’라고 하시는거에요. 재즈는 ‘넘버 원’이 아니라 ‘온리 원(only one)’이었던 거죠. 이것을 다시 안 회장이 일깨워줬어요. 안 회장이 내 인생 안에 미리 존재하고 있었던 플랜이 아니었을까요?”윤희정의 재즈를 재즈 입문자인 안 회장이 풍성하게 만들어준 셈이다. “재즈는 사랑과 연민(불쌍하게 가련하게 여김), 분노 등의 감정에서 깨닫는 건데 ‘나도 조금밖에 몰랐구나’는 생각이 들게 한 안 회장의 무대가 잊혀지지 않아요.”● 와인을 재즈에 섞게 한 CEO 친구“와인이 까다롭잖아. 선생님이 재즈를 가르칠 때처럼요. 그래서 와인하고 윤 선생님하고 어울리는 거에요.”오랜 친구는 아닌데 특별한 친구를 만났다. 변연배 딜리버리 N 대표다. 변 대표는 국내 HR(인적 자원 관리) 분야의 최고 전문가다. IBM, 나이키, 모토로라, DHL 등 굴지의 글로벌 기업에서 HR 임원을 지냈고, 쿠팡과 우아한 형제들(배달의 민족) 부사장을 지냈다. 최근 글로벌 다국적 기업과 일류 기업의 HR 성공 사례를 분석한 ‘The HR’을 펴내 업계에서 화제가 됐다.변 대표는 자타공인 와인 전문가이기도 하다. 미국 체류 때 와인을 자주 접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뉴스통신사에서 와인 컬럼니스트로 ‘이야기가 있는 와인’ 칼럼을 4년째 연재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확신되기 직전인 2018년 초까지 13년간 와인바도 운영했다. 마라톤 42.195km를 38회 뛰고(최고 기록 3시간 18분 14초), 헬스 잡지에 표지 모델로 나온 운동 마니아이기도 하다. 2년 전 두 사람은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 재즈와 와인을 서로의 인생에 집어 넣었다. 술을 못하는 윤희정은 변 대표의 제안으로 와인을 조금씩 즐기게 됐다. “나는 술이 안 맞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변 대표의 와인 스토리를 들으며 와인을 마시니 맞더라고요. 변 대표 때문에 내 버킷리스트에 ‘와인 앤 재즈 콘서트’가 추가 됐어요.”변 대표도 바로 재즈 제자가 됐다. ‘윤희정의 재즈 프렌즈 파티’ 13기로 지난해 6월 스승과 함께 재즈 공연 무대에 섰다. 변 대표는 “선생님께 재즈를 배우면서 사람과 일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배우게 됐다. 프로페셔널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저의 감성과 가치관에 맞게 노력이 드러나도록 해주셨다. 재즈를 배우면서 ‘재즈는 골프처럼 안 되는구나’하고 좌절감을 느꼈지만 저만의 히스토리를 새로 쓴 것에 무척 만족한다”고 말했다. 변 대표는 무대에서 나훈아의 ‘영영’을 재즈풍으로 편곡해 불렀다. “선생님께 애창곡이 ‘영영’이라고 했는데 ‘그거 해요’라며 바로 오케이를 하셨어요. 프렌즈 무대에 선 분들은 예외 없이 자기 전문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더라고요. 도전하는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서도 성취도가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습니다. 물리학의 결정론에서 만날 사람은 만나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하잖아요. 윤희정 선생님과 재즈와의 만남이 바로 그겁니다.”● 재즈는 공공재, 이것의 의미를 알려준 사라 김 선생님 “여운이 남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분이에요. 생각도 같고요.”윤희정이 꼽는 마지막 인생 깐부는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인 사라 김(김정숙) 카포레 대표다. 26년 전 처음 인연을 맺은 김 디자이너는 존경의 대상과 동시에 든든한 자신의 후원자다. 김 디자이너는 경기도 양평에 복합문화공간 ‘카포레’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패션 갤러리이면서 대중들과 문화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미 양평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김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로 40여년 일한 시간을 하나의 아카이브에 담는다는 의미로 갤러리, 콘서트장, 가페, 게스트하우스 등을 건축가와 함께 설계해 구현했다”고 말했다. 이달 26일 윤희정은 ‘카포레, 재즈 데이트’ 공연을 한다. 이날 공연에는 윤희정의 딸인 가수, 보컬트레이너 쏘머즈(김수연)도 무대에 선다. 2003년 버블시스터즈로 데뷔한 쏘머즈는 발라드, 재즈, 힙합, 랩 등에서부터 작곡까지 두루 재능있는 전천 후 크로스오버 뮤지션이다. 어려서부터 엄마로부터 물려 받은 음악적 재능이 엿보였는데, 윤희정은 처음부터 노래 부를 기회를 주지 않고 코러스만 2년을 시키면서 롱런의 기반을 만들어줬다.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니크한 음악 세계를 꿈꾸고 있어 다양한 재즈 대중화 실험을 하고 있는 엄마와도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윤희정은 김 디자이너의 추진력에서 동기 부여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윤희정은 “한다면 한다는 분이다. 사적으로 실수가 없고 언행일치를 하는 분”이라고 했다. ‘카포레’를 사적인 용도의 공간으로 만들지 않은 의도와 실천을 특히 존경스러워한다. 김 디자이너는 “ ‘유사 퍼플릭’의 공간이다. 새로운 공간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건 옷을 업으로 살아온 사람으로 멋진 마침표를 찍는 일”이라고 했다.윤희정에게 재즈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김 디자이너를 통해 재즈의 광범위한 확장에 대한 신념이 더 강해진다. “사람들에게 재즈를 가르칠 때 그 사람의 ‘탑 보이스’에 맞춰 노래를 재구성해줘요. 자기 톤에 맞춰 부르면 그게 기가 막힌 재즈예요. 고로 ‘너의 것을 찾는 거야’가 재즈입니다.”그러다 보니 새로운 윤희정도 찾았다. 사람들의 재즈를 찾아주다가 본인의 재즈를 계속 발견 중이다. “내가 일반 재즈 가수였다면 매력이 있었을까요. 모든 장르의 음악을 ‘어게인 앤 어게인(다시 또다시)’ 하면서 사람들에게 ‘듣고 또 들어봐라’ 라고 하며 다가섰기 때문에 저를 좋아해 주시지 않나 싶어요.”깐부들의 존재로 가르치면서 배우는 삶이 즐거워졌다. “재즈는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는 말이 예전보다 더 잘 나온다고 했다. 삶의 허무가 느껴져 가장 좋아하게 됐다는 재즈곡 ‘I’m a fool to want you(당신을 원하는 나는 바보입니다)’ 대신 ‘Over the rainbow’가 요즘 윤희정에게 최애곡으로 비집고 들어왔다고 한다. “언젠가 감히 꿈꾸었던 일들이 정말로 이뤄질 거라는 의미에서요. 친구들을 통해 확신하게 됐어요.”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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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류 통합 앱 달리, 와이즈넛 손잡고 인공지능 날개 단다

    주류 통합 플랫폼으로 국내 ‘버티컬 커머스’(특정 상품 또는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 판매하는 형태) 애플리케이션(앱)의 대표 주자로 성장 중인 달리(Dali)가 커뮤니티 기능 구현에 이어 인공지능(AI) 기반 서비스도 강화한다. 달리의 개발, 운영사인 ㈜달리는사람들(대표 배선경)과 AI 전문 기업 ㈜와이즈넛(대표 강용성)이 16일 ‘달리 내 AI 기술 기반 서비스 제공을 위한 개발 및 운영’에 관한 상호 협력을 약속하는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이번 협력으로 달리는 AI 챗봇을 활용한 ‘기업 간 거래’(B2B),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 서비스를 선보이고, AI를 통해 개인별 취향에 맞는 주류를 추천하고 배송하며 고객 만족도를 높일 계획이다. 고객과의 소통도 늘리면서 공동 비즈니스를 확장할 예정이다. 달리는 온라인으로 주류를 간편하게 주문한 뒤 가까운 음식점에서 받거나 픽업지에서 코르키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주류 스마트오더 앱이다. 2020년 10월 출시된 후 5월 현재 가입자 수 12만 명을 돌파했다. 최근 MZ세대의 위스키 열풍 및 하이볼 인기와도 맞물려 주류 애호가들의 선호도가 높아졌다. 여성 인권변호사이기도 한 배선경 ㈜달리는사람들 대표는 “버티컬 커머스에 이어 AI 기술 기반 서비스까지 구현한다면 단순 온라인 주류 앱을 뛰어넘어 B2C와 B2B를 혁신적으로 통합하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며 “달리가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강력한 동력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강용성 와이즈넛 대표는 “이번 달리와의 협력은 주류 유통의 새 플랫폼과 와이즈넛의 AI 전문 기술력이 융합한다는 점에서 즐거운 도전이자 기회가 될 것”이라며 “와이즈넛은 양 사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AI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신규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와이즈넛은 23년간 자체 개발한 AI 원천기술을 보유하면서 국내 최다 챗봇 구축 레퍼런스(개발성공경험)도 갖고 있다. 특히 AI 기반 하이브리드 챗봇 솔루션 ‘와이즈 아이챗(WISE iChat)’의 기술력은 해외 시장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기업공개(IPO) 및 상장 추진을 위해 최근 삼성증권을 대표 주관사로 선정했다. 와이즈넛은 정부 부처 및 산하기관을 비롯해 전 산업 분야 기업을 대상으로 4400여 개에 달하는 국내 최대 AI 및 빅데이터 구축 레퍼런스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 아세안(ASEAN)과 중동 지역 국가들에도 진출했으며,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해외 시장 확대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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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동행축제서 소상공인 제품 만나 보세요”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사장 박성효·이하 소진공)이 1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되는 중소벤처기업부의 ‘함께하면 대박 나는 2023 동행축제’에 소상공인, 소공인, 백년가게, 소상공인협동조합, 전통시장 등과 함께 참여한다. 소진공은 자체 O2O(Online to Offline) 플랫폼 진출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8개 플랫폼(배달의민족, 카카오, 요기요, OK캐쉬백, K-deal, 지그재그, 숨고, 토마토:우리 동네 장보기)과 함께 축제에 참여하는 소상공인 4720개사 제품의 온라인 상품 판매를 지원한다. 기획전, 할인쿠폰 지급, 홍보·마케팅, 이벤트 등을 활용한다. 또 소공인 판로 개척 지원 사업에 참여한 253개사 제품에 대해서는 우체국쇼핑, 네이버, 롯데온, 티몬, 위메프 등의 유통 플랫폼이 축제 기간 동안 특별기획전과 다양한 판촉 행사를 개최한다. 백년가게(30년 이상 고유의 사업을 유지해온 소상공인, 중소기업) 및 백년소공인(15년 이상 한 분야에서 장인 정신으로 숙련 기술을 보유한 소공인)과 연계한 행사도 진행한다. 구매 인증 이벤트를 통해 300여 명에게 에어팟, 치킨·커피 교환권을 제공한다. 신한카드와 연계한 소비지원금 행사에서는 백년가게 이용 고객에게 10% 할인쿠폰 3만 장을 지급한다. 추첨을 통해 뽑힌 50명에게는 2만 포인트의 지원금을 준다. 소상공인협동조합 53개사 제품은 위메프, 11번가, 쿠팡, G마켓, 옥션, 우체국쇼핑에서 30% 할인가(5월 15일까지)로 판매한다. 15일 이후에는 15% 할인된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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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 스스로 지식과 희망을 키우는 대학… 한국에너지공대 창의적 자기 주도 학습 현장을 가다

    “저희 대학에선 ‘양성’ ‘육성’이라는 표현을 경계합니다. 20세기 방식이기 때문이죠.” 4월 26일 전남 나주시 빛가람동에 위치한 한국에너지공대(KENTECH·켄텍). 장광재 입학센터장이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한마디로 정리해 준다. ‘양성’ ‘육성’은 학생이 수동적으로 교육을 받고 길러진다는 뉘앙스를 준다고 했다. “학생들 스스로 날아다닐 수 있게 날개를 지원하는 곳이 대학입니다. 마치 ‘아이언맨 슈트’를 공급하는 것과 같죠. 그 슈트가 역대급으로 진화한 것처럼 대학도 학생들에게 갈수록 양질의 날개를 제공해 줘야 합니다. 그들이 멀리 날아갈 수 있느냐는 것은 학생의 역량입니다. 따라서 대학은 날개와 역량이 시너지를 내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해 3월 개교한 켄텍은 학생들의 ‘자발적 학습’ 혁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첨단 하드웨어 강의실에 인공지능(AI)을 접목한 능동 학습 플랫폼, 학습자의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피드백을 제공하는 다중 학습 분석 시스템 등 창의성 교육을 정착시키려 한다. 장 센터장의 설명을 듣고 2층으로 올라가 강의실을 확인하니 칠판이 없다. 책도 없다. 당연히 분필도 없다. 수성 매직펜도, 복사기도 안 보인다. 대신 강의실 사방에 설치된 모니터와 카메라만 기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 입학 면접이 수업의 시작2학년 장현규 씨는 입학 면접에서부터 낯선 경험을 했다. 면접관 2명이 바짝 다가와 앉더니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면접을 준비해 왔는지 그 과정을 듣고 싶다고 했다. 뜻밖의 요청에 장 씨는 적잖이 당황했다. “나중에 입학센터장님한테 ‘왜 이런 면접을 하셨냐’고 물어봤죠. 그냥 문제를 풀라고 하면 채점하기 편하잖아요. 그랬더니 성적에 맞춘 학생을 원하는 게 아니라 수업 과정을 잘 따라갈 수 있는 학생을 찾는다는 답을 들었죠.” 장 센터장은 “면접은 학생들이 학교를 평가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면접관들에게 ‘학생의 말을 충분히 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학생들을 성적으로 줄 세우는 면접이 아니다. 그들이 질문하는 것을 돕고, 답을 찾아가는 것을 같이 고민해 주면서 학업 성취 과정을 보는 것”이라며 “면접관과 학생이 접점을 찾는 역발상 면접을 통해 학생들은 이 대학의 창의성 교육을 가장 먼저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학교 안팎으로 면접에 대한 반응이 긍정적이다. 장 센터장은 “여러 고교에서 켄텍 면접 방식에 관심을 보여 노하우를 전부 보내줬다”며 “합격한 학생이 나를 찾아와 ‘면접을 보고 나서 초중고교를 다닌 12년을 보상받는 심정으로 대학을 다니면 안 될 것 같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 학생이 수업 중에 교수한테 이모티콘을 보낸다?켄텍 에너지공학부장인 김경 교육혁신센터장이 수업 중에 강의실 사방의 모니터로 학생들의 표정과 대화 내용을 세밀하게 살핀다. 학생들은 AI 분석 기술이 구현된 액티브 러닝 클래스룸(Active Learning Classroom·ALC)’에서 수업을 듣는다. 학생들은 소그룹을 짜서 특별한 책상에 앉아 있다. 토론 주제가 주어지자 학생들은 라이브 세미나, 토론을 하고 나중에 교수의 코칭(피드백)이 이뤄진다. 학생들이 원형으로 앉을 수 있는 책상의 스위치를 누르면 모니터가 올라온다. ALC 천장에 설치된 카메라가 학생들을 포커싱한다. 태블릿과 PC로 자료 검색, 협업 문서 작성, 웹사이트 업로드, 비디오 재생 등이 가능하다. 켄텍은 국내 최초로 미국 미네르바 프로젝트 온라인 학습 플랫폼을 도입했다. 융합형 커리큘럼과 능동형 학습을 극대화한 플랫폼에서 학생 주도 토론 등의 학습이 이뤄진다. 수업 전 과정은 녹화돼 학생 참여도를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켄텍이 자체 개발한 30여 가지 AI 모니터링 시스템은 학생들이 수업 중에 나누는 대화 내용을 추적해서 학생의 지식 구조를 추출해 교수 태블릿으로 보내준다. 주로 누가 토론을 주도하면서 어떤 키워드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 학생 개인의 관심 분야와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 기존 팀 프로젝트 수업은 학생을 놓치면서 팀 퍼포먼스만 주목받는다. 하지만 ALC에서는 개별 학생의 의식적인 시그널을 전부 감지하면서 학습 데이터를 모으기 때문에 선택적, 맞춤형 피드백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팀 플레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정까지 AI가 체크한다. 팀 수업을 하다 보면 기분의 변화가 있게 마련. 수업 내용이 이해가 잘 안 되거나 막히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 그때 학생들이 짓는 불편한 표정과 동작을 카메라와 AI가 감지하면 김 교수가 바로 ‘핀 포인트 소통’을 한다. 수업 진행은 쌍방향이다. 학생도 ALC에서 실시간으로 교수와 수업 평가를 한다. 학생이 바로 자리에서 ‘질문이 있어요’, ‘어려워요’ 캐릭터 이모티콘을 누르니 김 교수의 설명 피드백이 바로 온다. 이해가 잘 되면 학생들은 ‘좋아요’ 반응을 보낸다. 이런 식으로 수업 전 시간에 걸쳐 축적된 학생의 실시간 감정 표현과 피드팩은 자동으로 강의 평가가 된다. 이 데이터가 학생의 스토리로 저장되고 학교는 ‘창업 또는 연구’ 진로 선택의 지표로 활용한다. 김 교수도 학생들의 수업 시간 전체 이모티콘 패턴을 분석해 수업 난이도 등을 재조정하며 학생들이 더 만족할 수 있는 수업 방식을 찾는다. 김 교수는 ALC 학습 분석 시스템 개발로 지난해 미국교육학회(AERA) 최우수 젊은 연구자상, 미국교육공학회(AECT) 최우수연구상, 최우수개발상을 수상했으며 관련 특허 등록도 마쳤다. ● 너도 나도 1등! 에너지 분야 특화 융합 ‘마스터’의 진로를 찾다 학부, 대학원생들은 모두 에너지공학부 소속이다. 켄텍은 세계 최초로 단일 학부 무(無)학과 체제를 운영한다. 세부 전공격인 5개 트랙(에너지 AI, 에너지신소재, 차세대 그리드, 수소에너지, 환경·기후 기술)을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다. 전공에 묶여 특정 루틴의 학습만 하게 되는 벽을 허물었다. 학생들은 자기 주도로 5개 트랙 과목을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다. 학생은 자신만의 연구 스토리 카테고리를 확장해 나간다. 1학년 김예은 씨도 입학 전에는 유전자 공학 연구를 통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식물 품종을 개발하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에서 환경·기후 기술과 신소재 관련 융합 연구를 해서 친환경 섬유를 개발하겠다는 목표가 새롭게 생겼다. 학생들이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겨 외부 공모전 수상을 하거나 학회에서 초청을 받는 경우도 있다. 김 교수는 “수소에 관심 있는 신입생이 데이터 수업을 듣고 지방자치단체별 수소자동차와 충전기 수 등을 조사해 보급 확산의 적절 유무를 따져내더라. 이 프로젝트로 수소 관련 학회에서 발표 초청까지 받았다. 학생들이 여러 분야 정보를 갖고 노는 재미를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각자 다른 트랙을 공부한 학생들이 상호보완 관계로 뭉쳐 또 다른 융합 연구에 나서기도 한다. 학생들은 특화된 에너지 분야 예비 전문가로 수업과 프로젝트 등에서 자기만의 영향력을 갖는다. 당연히 시험 등수는 의미가 없다. 트랙 스토리가 다른 학생들은 ‘나도 너도’ 1등이다. 장현규 씨는 “똑같은 화학을 한다 해도 나는 배터리, 너는 촉매, 다른 친구는 소재를 공부할 수 있다. 시험을 보면 등수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내가 아는 것을 친구에게 전부 알려줄 수 있다. 다른 대학에서는 선배들로부터 귀중하게 전해 내려온다는 시험 족보가 있다는데 여기서는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학기마다 받는 성적표도 다른 대학과 다르다. 학점뿐만 아니라 연구 행보를 알 수 있다. 성적표 앞면에는 교과목 학점이, 뒷면에는 지금까지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했는지 풀 리스트가 기재돼 있다. 김 교수는 “학생이 다양한 연구 과정을 거쳐 4학년쯤 되면 특정 분야에서 독보적인 인재가 된다. 소위 ‘이 분야에서는 우리나라에 이 친구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을 것이다. 졸업을 할 때 1등부터 100등까지 학생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는 1등”이라며 “이것이 융복합, 자기 주도 학습의 성공 모델 실체”라고 설명했다. 에너지에 대한 국가 경쟁력 개념이 에너지 보유에서 에너지 기술로 점차 이동해가는 시대에 발맞춰 데이터 기반 맞춤형 교육이 학생들의 에너지 분야 학습과 연구 동기를 잘 끌어내냈다는 평가다. 켄텍의 학생 데이터는 시험 결과 정보만 아닌 입학 면접과 강의, 교수와의 소통, 학생 커뮤니티 사교 활동 등을 망라해 얻어진 소스다. 김 교수는 “학교의 목표는 교육 데이터의 ‘성지’가 되는 것”이라며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데이터에 기반한 맞춤형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 센터장도 “학생들이 창의적 교육을 경험하면서 학교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느끼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 대학 입시는 학생 선발 경쟁에서 교육 경쟁으로 가야 한다. 켄텍이 변화를 주도하겠다”고 강조했다.나주=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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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IST, AI시대 휘저을 ‘스페셜리스트’ 양성 총력전

    생성형 AI(인공지능), 챗GPT 등은 등장과 동시에 과학기술의 혁신적 발전 이슈를 점령했다. 이 분야는 이제 국가 경쟁력을 넘어 인류의 삶 전반을 좌우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당연히 관련 전문 인재 양성이 중요해졌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은 이 흐름을 발 빠르게 따라가고 있다. 2021년부터 ‘과학기술 교육혁신 2.0’ 프로젝트를 가동해 인재 발굴에 총력을 기울였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실전형 체험교육을 통한 자기주도적 혁신 인재 양성이다. 이용훈 UNIST 총장은 “한국 과학기술 교육이 지닌 문제와 한계를 넘기 위해 절체절명의 마음으로 시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UNIST는 ‘과학기술 교육혁신 2.0’을 다각적으로 진행했다. 기초 교과목 재편을 통해 실전문제를 해결하는 POL(Prototype-Oriented Learning) 교과목, AI 연계 교과목 개발과 전문가, 학생이 함께 산업현장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실전문제 연구팀 운영 등이 그것이다. 수학, 물리, 화학 등 기초 과목 강의는 이론강의-문제풀이-실습의 고리타분한 틀을 바꿨다. 14개 필수과목을 7개로 줄여 집중도를 높였다. 선택 과목은 3개에서 10개로 늘렸다. 선택 과목에는 디지털과 AI 분야 교과목을 추가했다. 김지현 교무처장은 “신입생들이 중복 학습 등으로 인해 학습 의욕과 수업 집중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개선해 학생의 학습주도권과 선택권을 강화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POL 교과목 개발은 그룹 프로젝트 방식으로 실전 과제를 해결하도록 설계됐다. ‘자율자동차 만들기’, ‘가막못(UNIST 학술정보관 앞 저수지)에서 유전자 가위찾기’ 등 15개 과목을 새로 개발했다. 그룹 과제를 해결하면서 소통과 협업을 통해 자율성을 키우도록 했다. 손경아 교육성과관리센터장은 “기존 교육과정은 학기 단위 연관 교과목을 차례로 이수하고 현장 상황 해결에 도전하는 것이었는데 새 과학기술의 등장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공 분야와 AI를 접목한 AI연계 과목과 관련해선 지난 2년간 ‘AI를 활용한 재난재해 모니터링과 예측’, ‘AI기반 디지털 제조공학’ 등 14개 과목을 신설했다. 학생들은 첨단 연구와 산업 현장의 기술을 실시간으로 학습하고 경험할 수 있다. 실전문제 연구팀 결성 프로젝트는 학생들의 참여와 인기도가 가장 높다. 팀으로 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한다. 이 프로그램에는 학부 1, 2학년생의 약 30%가 참여했다. AI 스마트팩토리, 미래형 모빌리티, 친환경 에너지 등 3개 분야에서 77개 팀이 만들어졌다. 팀은 학부생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대학원생과 지도교수, 현장 전문가가 돕는다. 김성엽 공과대학장은 “학생들이 전공 분야 현장 이슈가 무엇이지,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고 말했다. UNIST는 올해부터 ‘과학기술 교육혁신 2.0’ 프로그램을 학부 전체와 대학원 교과목으로 확대 시행할 계획이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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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 잘하는 체육 선생님보다 운동 좋아하는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오늘은 케이팝(K-pop) 중에 이 노래를 틀고 운동할게요.” “선생님! 저희 팀은 배구 작전을 짜서 왔어요.” 18일 오전 경기도 안양시 평촌고 체육관. 1, 2교시 체육 수업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학생들이 굉장히 적극적이다. 공부 스트레스를 받아 만사가 귀찮을 고교 3년생들인데 본인들이 1주일 100분(50분씩 2번 수업)의 체육 수업을 꾸미고 채우려고 한다. 체육 선생님의 알찬 수업 준비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이다. 몸 컨디션이 안 좋거나 다친 아이들은 실내용 자전거나 체육관 걷기로 유산소 운동을 하고 기분을 풀면서 수업에 집중한다. 매트를 깔고 눕거나 엎드려 스트레칭, 필라테스를 하는 수업의 시작. 학교 체육 정상화를 위해 전면에 많이 나선데다 자신이 개발한 수업 방법을 적극적으로 타학교 선생님과 공유해서 ‘전국 체육 선생님들의 체육 선생님’으로 불리는 조종현 체육교사(교육연구부장)가 함께 스트레칭을 하며 이런저런, 도란도란 말을 나누면서 학생들의 긴장을 풀어준다. “수업 시작 10분이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어요. 학생들과 몸을 풀면서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 소통을 해요. 몸의 ‘웜업(가벼운 운동)’과 대화를 통해 마음의 ‘웜업’도 되는 거죠. 이런 단계없이 그냥 ‘뛰어. 줄서’라고 하면 학생들은 한숨을 내쉬어요. 여기서 ‘너 한숨 쉰거야’라고 감정섞인 말을 하면 그때부터 학생들과 체육 교사의 관계는 최악이 돼요. 그러면 제 SNS도 완전히 털립니다. 하하.” 학생들의 몰입을 잘 유도한 평촌고 체육 수업에서는 화장실 다녀온다고 나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는 학생, 체육관 벽에 기대서 핸드폰만 보려는 학생을 볼 수 없다. 50분이 지나 울리는 수업 종료 벨소리. 순간 “아, 선생님 벌써 종쳤어요”라고 아쉬워하는 학생들의 탄식이 들려온다. 체육 수업에서 ‘4德’을 익힌다조 교사의 체육 수업은 복장에서부터 특별한 가르침이 있다. 학생들은 체육복 상의 위에 조끼를 입는다. 조끼는 4색 4종이다. 색깔별로 다른 말이 써 있다. ‘어진 마음’, ‘멋진 행동’, ‘밝은 표정’, ‘고운 말씨’이다. 학생들은 그날 기분에 따라 손이 가는 조끼를 입는다. 기분은 매일 편차가 클 수 있다. 기분에 따라 욕을 하고 싶거나, 표정 관리가 안 될 때가 있고, 짜증이 날 수도 있다. 그런데 친구들이 입은 조끼를 보며 긍정적으로 마음을 바꾼다. 참을 인(忍)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천하고 덕(德)을 찾는 것. 조 교사가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바다. “저도 선생이기 이전에 사람인지라 힘들고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저도 수업 전에 조끼를 입어요. 그러면서 격한 마음을 누르죠. 학생들이 ‘조인성(조종현 교사의 성을 따서) 조끼’라며 흔쾌히 옷을 입어요. 저는 쓰여진 그대로 실천하자고 화이팅을 해줍니다. 효과가 있어요. 수업 중에 무심코 욕을 한 학생이 나오면 옆 친구들이 ‘고운 말씨’ 옷을 가져가서 입힐 정도라고 해요.” 스포츠 룰을 지키고 그에 따른 패배를 인정하며 승패에 관계없이 상대를 배려하는 미덕까지 학생들이 느끼고 배워간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손흥민도 맨날 이기고 매 경기 골을 기록하는 건 아니다. 질 때 오히려 멋있게 패배, 실수를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반복해서 해줘요.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친구에게 탁구도 지고, 배드민턴도 지면 누구라도 열 받을 거예요. 그런데 오히려 먼저 악수를 내밀면서 ‘한 판 더해보자’고 하는 것, 그런 게 인성이라고 말해줍니다.” 체육관 벽에는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 자존감을 높이고 용기를 북돋을 수 있는 현수막이 사방으로 붙어 있다. ‘처음 하는 플레이를 바로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어떤 일이든 시도에서 시작되는 거야’, ‘좋은 일, 좋은 사람, 좋은 삶을 만나려면 간단한 준비물이 있다. 좋은 나!’ , ‘재능은 꽃피우는 것, 센스는 갈고 닦는 것’ 등등. 요즘 학생들에게 취향 저격인 라임 트렌드에 맞춰 조 교사가 직접 말을 짓고 꾸몄다. 보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말들을 학생들은 수업 시간 내내 눈에 넣고 머리에 채운다.체육은 ‘어울림’… 스포츠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포츠로 가르친다조 교사는 학생 모두가 지겨움을 느끼지 않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너지 효과를 계속 내려 한다. 남녀 성별, 실력 차이 구분없이 모든 학생들이 팀으로 묶여 같은 조건으로 경쟁이 가능하도록 스포츠 종목의 룰을 바꿔 내놓았다. 조 교사만의 ‘어울림 프로젝트’다. 한동안 학교 체육 수업에서 많이 채택했던 티볼은 학생 취향을 반영해 ‘베이스볼 6’로 바꿔 수업을 하고 있다. “요즘 학생들이 티에 올려진, 정지된 공을 치기 싫어해요. 그래서 실전 야구로 타자와 투수를 같은 편으로 묶어 새 야구를 만들었죠. 투수가 공을 6개 던져 그 안에 못치면 아웃이에요. 여학생이 타자면 언더핸드스로로 치기 쉽게 던져주고, 테니스 라켓으로도 칠 수 있게 했죠. 여학생들이 1루타를 치면 2루타로, 2루타를 치면 3루타로 평가해줘요. 투수는 타자와 같은 편이니 아웃 당하지 않게 잘 던져줄거고, 여학생도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으니 재밌잖아요. 모두가 즐기는 설계죠.”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인 양궁도 수업을 해봤다. 양궁은 올림픽 때마다 금메달을 휩쓰는 효자 종목. 그런데 교육 여건상 평생 활을 쏴보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조 교사는 “경기도양궁협회에 전화해 도움을 청했더니 좋아하면서 협조해줬다. 활을 지원받고 화살은 구입했다. 빈 교실을 정리하고 과녁을 만들어 수업을 했다. 학생들이 세계 최고 양궁 선수가 된 것 같다며 프라이드를 느끼더라. 점수가 바로 나오기 때문에 수행 평가에도 최적이었다”고 했다. 걷기와 캠핑에도 특색을 반영해 개발한 이색 수업이 많다. 이날 1, 2교시에 학생들은 배구, 농구, 바스켓볼 강강술래, 발목줄넘기를 하다 ‘특별한’ 야구를 했다. 한 사람이 투수로 공을 던지면 다른 학생이 포수가 돼서 받아주고, 또 다른 학생은 스피드건으로 속도를 잰다. 속도를 측정하던 학생은 투수 학생의 뒤에서 공의 방향과 움직임까지 살펴 다음 공을 더 잘 던지도록 얘기해준다. 단순 캐치볼의 지루함을 없앤 아이디어다. 체육 시간 확대 요구보다 수업의 질 관리가 먼저2025년부터 고교 3년(6학기) 동안 총 192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는 고교학점제가 시행된다. 필수 이수 10학점을 제외하고 선택 과목으로 분류된 체육 수업 시간이 더 줄어들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전국 체육 교사들은 체육 수업 시간의 실질적인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조 교사는 체육 수업의 질 향상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조 교사는 “수업 시간 확대에 앞서 체육 수업의 질 관리를 잘해야 한다. 준비가 안 돼 있고, 재미도 없고, 관리도 못하면 학생들이 외면한다. 학생들을 만족시켜야 체육 수업 시간을 늘려달라고 요구할 명분이 생긴다”고 말했다. 실제 수준 이하의 체육 수업 사례를 현장에서 많이 접하고 듣는다고 했다. “누워서 침뱉는다고 내부(체육 교사)에 적들이 많아요. 얼마 전 제보가 들어왔는데 젊은 체육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한 달 동안 제식훈련인 좌향좌, 우향우만 시키고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아직도 선생님이 출석만 부르고 평가를 위한 평가만 하는 체육 수업도 있어요. 학생들은 ‘투명 인간 수업’으로 불러요. 그런 선생님들을 ‘아나공(여기 공 있다고 주기만 하는 달인)’, ‘아나영(영상만 올려놓는 원격수업의 달인)’ , ‘아나키(체육관 열쇠만 주는 달인)’라고도 하죠. 교사들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질 낮은 체육 수업은 학생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가져야 해요.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에게 선택과 책임의 두 가지 카드를 준 겁니다. 학생들이 선택부터 안하면 체육 교사들은 고사되는 거죠.”운동 좋아하지 않는 학생위한 ‘밥상’ 차려야결국 수업의 질은 체육 교사의 역량에 비례한다. 조 교사는 역량의 기준을 체육 교사 개인의 운동 실력에 맞춰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배드민턴 수업이라고 가정하면, 운동을 잘하는 교사는 코트 한 면을 잡고 잘 하는 학생과 배드민턴을 치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운동을 좋아하는 교사는 모든 학생들이 배드민턴을 배울 때 무엇을 해야할지부터 고민한다는 거예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는 있으나 현장에서 교사들이 말하는 학생들의 체육 성취도를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조 교사는 “한 반에 25∼30명의 학생이 있는데 이 중 20%가 운동을 잘하고 나머지 80%는 운동에 관심이 없거나 운동 능력이 떨어진다. 실제 야구 수업을 하면 학생 대부분이 글러브를 한 번도 끼어보지 않았다”며 “체육 교육은 체육을 못해 상처가 있고,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다수를 위한 ‘시그니처 수업 밥상’을 잘 차리고 학생들이 잘 먹도록 지켜보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야구의 투구를 가르칠 때 무조건 기술을 따라하라고 하면 어려워하죠. 그런데 야구 시구 영상을 보여주고 ‘너희들이 연예인이 돼서 나중에 시구를 할 수도 있어. 미리 준비해보자. 수업 때 하는 투구를 시구라고 생각해보자’라고 하면 학생들이 관심을 갖습니다. ‘이 반찬을 안 먹으면 왜 안 먹을까, 다른 반찬을 뭘로 해줄까’라고 연구하는 것, 의미있는 밥상을 차리는 마인드가 체육 교사들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봐요.”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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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불의 미학이 교차하는 ‘불불불불’ 展, 성황리에 개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23년 시각예술창작산실 공모 우수 전시로 선정한 ‘불불불불’ 전(展)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 광주광역시 양림동 호랑가시나무창작소에서 5일부터 열리고 있는 이 전시회에서 퍼포먼스 크리에이터로도 알려진 구혜영(통쫘) 미술작가를 비롯해 10명의 작가들이 불타는 집을 기본 컨셉트로 삼고 ‘인간 마음 속의 불’, ‘숨어 있는 에너지로의 불’ 등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풀어냈다. 전시된 작품은 20점. 관객들은 불의 미학이 교차하고 횡단하는 전시에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불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2층 전시장은 불 화(火)가 아래 위로 두 개씩 타오르는 ‘燚’(불모양 일) 자를 건물 구조에 배열시켜 공간 자체를 설치 미술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여기에 은박으로 뜨겁게 달궈진 불판을 연출한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관객들은 10명의 작가가 주도하는 커뮤니티 워크숍에도 참여할 수 있다. 격주로 토요일에 드로잉 수업과 메타버스 체험, 작가와의 대화 등이 열린다. 관람 리뷰를 남기는 관객에게는 친환경 프리미엄 해양심층수와 ‘불불불불’ 라이터를 제공한다. 행사는 6월 30일까지 열린다. 자세한 사항은 호랑가시나무창작소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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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은 ‘그를 평생 덕질하는’ 친구가 둘 있다[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깐부. 국어사전에는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보충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국 하버드 의대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동아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행복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부도, 명예도, 학벌도 아닌 사람들과 따뜻하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고 했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전화를 했는데 없는 번호라는 거야. 친구 딸한테 전화를 하니 ‘엄마 핸드폰 번호 안 바뀌었다’더라고. 알고 보니 급한 마음에 옛날 번호를 누른 거야. 하하.”‘국민 패션 리더’로 마당발 인맥을 자랑하는 이상봉 디자이너(68 ּּ 홍익대 패션대학원 초빙교수)에게는 특별한 ‘여사친(여자사람친구)’이 있다. 사람 사귀고 관리하는데 프로인 이 디자이너로 하여금 옛 번호를 누르는 실수를 하게 만든 깐부는 소설가 신중선 작가다. 이 디자이너와 동갑인 그는 월간지 기자를 하다 1987년 부장 데스크의 권유 한 마디에 소설가로 등단했다. 1993년 ‘어느 보일러공의 하루’로 자유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하드록카페’, ‘돈워리 마미’, ‘환영 혹은 몬스터’ 등이 대표작. 2006년에는 ‘비밀의 화원’으로 한국문인협회 제정 대한민국 소설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의 일대기를 조명한 ‘강철왕 박태준(2013)’도 화제가 됐다. 신 작가는 좋고 싫은 게 확실한 사람이다. 소설가인데 문단 활동도 거의 안 한다. ‘독고다이’다. 자기 작품도 설명이나 홍보를 안 한다. 독자들이 각자의 몫을 읽고 묘미를 알면 그만이다. 누가 봐도 쿨한, 이런 신 작가가 평생 ‘덕질(어떤 분야나 인물에 심취해 파고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 디자이너다. 오죽했으면 신 작가는 자신만이 아는 이 디자이너에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 ‘문학으로 덕질하다(2020년 발간)’ 소설에 담았다. 이병헌(배우), 박진영(가수), 샤를 보들레르(프랑스 시인) 등도 ‘덕질’을 한다며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긴 했는데 내용의 깊이는 이 디자이너가 으뜸이다. 최근 서울 청담동 이상봉 디자이너 전시장 타워를 찾은 신 작가는 “요즘 글도 잘 안 써지고 정치 혐오증도 생기고, 늙은 내 얼굴이 보이고…. 여러모로 침체돼 있는데 또 밝은 세상으로 저를 꺼내려 불러주시려나”하고 깐부의 부름을 반겼다. 신 작가 옆에는 이 디자이너의 또 다른 깐부가 와 있었다. 유희성 전 서울예술단 이사장(64)이다. 유 전 이사장은 뮤지컬계에서는 드물게 배우와 연출가, 국가 예술단체장으로 커리어를 넓힌 인물이다. 국내 창작 뮤지컬 1호인 ‘명성황후’에서 고종 역을 맡아 이름을 알렸다. 연출가로도 ‘피맛골 연가’, ‘투란도트’, ‘소나기’, ‘모차르트’ 등 굵직한 작품을 다뤘다. 여수 엑스포 등 여러 국제 이벤트에도 연출, 예술 감독 등으로 참여했다. 2018년부터 3년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지냈다. 지난해 복귀작으로 트로트 창작뮤지컬 ‘고향역’을 연출했다. 가수 나훈아의 명곡을 모티브 삼아 만든 ‘고향역’은 트로트 붐이 일기 전에 기획했던 작품이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늦게 선을 보였다.신 작가가 톡톡 튄다면 유 전 이사장은 잔잔한 파도 같다. 이 디자이너의 말을 빌리면 유 전 이사장은 자신의 든든한 뒷배다. 34년 전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 부근에서 디자이너와 배우로 처음 만났다. 그 인연으로 이 디자이너의 첫 번째 파격적인 패션쇼를 도왔고, 지금까지 곁을 지키고 있다. ●앙드레 김 만나려다 이상봉과 친구 되다“여기 올 때 계산했어요 . 2023년-1997년=26년.”신 작가는 1997년 소설을 쓰던 중에 한 문학잡지 프리랜서로 이 디자이너를 인터뷰하다가 그날로 평생 만나는 사이가 됐다.“선생님이 뭄에 붙는 가죽 스키니 바지를 입고 나왔다”는 신 작가가 기억하는 첫 만남 스토리 자체가 드라마다. 오전 9시에 인터뷰를 하고 헤어진 뒤 다시 밤 9시에 만나 새벽까지 같이 홍대 인근을 누볐다는데…. -1일 2만남이었네요?“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런던 쇼를 포기하면서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가서 옷을 팔겠다고 준비하던 직전이었어요. 처음으로 일이 꼬였지만 아직 패션쇼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죽을 때까지 사랑을 해 보겠다’는 순수함과 패기도 있었어요. 그 무렵에 신 작가하고 인터뷰를 하겠다고 만났죠. 정말 사랑 얘기만 두 시간을 한 거야. 재밌어서 꽂힌 거죠. 그러다 신 작가가 클럽도 안 가보고 클럽 소설을 썼다는 얘기를 하는거야. 2차로 또 꽂혔어요. 내가 대놓고 ‘글은 가짜’라고 했죠. 그러면서 홍대 클럽들을 경험해보라고 데려간 거예요. 하하.”(이상봉)-상상이 안 되는데요. “가보지도 않은 클럽을 상상해서 소설을 썼으니 선생님이 얼마나 웃겼겠어요. 밤에 홍대 ‘발전소’부터 ‘명월관’ 클럽까지 싹 데리고 다니더라고요. 나중에 또 벤치에 앉아서 사랑 얘기를 하고, 아무튼 희한한 경험이었죠.”(신중선)신 작가가 26년 전 그날에 애착을 갖는 이유가 있다. 하마터면 ‘이상봉’을 못 만날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 유 전 이사장도 연결이 안 됐다.“원래 고 앙드레김 선생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어요. 그런데 거절을 해서 못 만났거든요. ‘누구를 할까’ 찾아보다 패션 전공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로 ‘이상봉’을 꼽은 걸 봤어요. 그래서 섭외를 했죠. 만약 앙드레김 선생님을 인터뷰했다면 ‘이상봉’은 제 인생에서 절대 존재하지 않았겠죠(웃음).” ● ‘덕질’로 ‘이상봉 자아’ 찾아준 친구들이 디자이너의 소개로 신 작가와 유 전 이사장이 만나게 되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셋은 서로의 버팀목이 됐다. 신 작가나 이 디자이너를 ‘덕질’ 하다가 자신의 딸과 이 디자이너의 아들(이청청)을 결혼으로 맺어볼까 생각도 했다. 이 디자이너 역시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두 자녀 모두 유학 중이라 ‘연결’되지는 않았다. 셋은 만남 초창기 홍대 부근에서 주로 만났다. 나중에는 신 작가의 집이 있던 평창동, 구기동에서 자주 뭉쳤다. 신 작가는 동네 단골 술집을 뚫었다. 그곳은 화려한 패션 무대에서 막 내려온 이 디자이너가 외롭고 지친 ‘이상봉’을 온전히 내려놓는 공간이었다. “1년 중 3분의 1은 해외에 나가 있고, 3분의 1은 패션쇼 때문에 시간이 안나요. 그러니 정작 내가 시간이 나면 주변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연락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때 외로움을 느꼈죠. 그런데 둘은 새벽에라도 내가 힘들어서 연락을 하면 다 받아줬어요.”친구들 덕에 이 디자이너는 주변 세상을 더 긍정적으로 보는 여유를 얻었다고 했다. 과거에는 화려한 패션 무대와 정반대의 현실을 마주할 때 충격이 컸고 모두 속으로 삭였다. 이들을 알고부터 자신의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즐기게 됐다.- 큰 변화였네요. “정말 긍정적으로 변했죠. 코로나19때 매장을 미국에서 철수하고 수출도 못 했는데 정작 ‘국내에서 사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 ‘내 자아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쇼를 할 때도 ‘나는 이상봉이다’를 과감하게 외쳤죠. 3월 쇼(2023 F/W 서울패션위크 이상봉 컬렉션)에선 제 이름 ‘상봉’을 옷 패턴에 넣었는데 이것도 나를 찾는 작업이었어요. 코로나19가 되레 고마웠죠. 친구들이 계속 옆에 있어 준 덕에 자아를 잃고 정신없이 살아온 저를 되돌아볼 수 있었죠.”(이상봉) 신 작가, 유 전 이사장은 이 디자이너의 특별한 존재감을 찾으려고 다양하게 노력을 했다. 신 작가는 ‘문학으로 덕질하다’에서 이 디자이너의 매력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입체적으로 그려 썼다. 신 작가는 평소 가족을 ‘세상이 버린다 해도 끝까지 나를 지켜줄 보루’라고 본다. 이 디자이너가 나를 지켜주는 가족이라는 심정으로 그의 존재감을 찾았다고 했다.신 작가의 깨알 같은 파고듦에 이 디자이너는 “신 작가가 보이지 않는 나를 찾아주려 한 것에 감사한다. 보이는 나와 보이지 않는 나의 아름다운 동행을 기대해 본다”는 추천사를 적으며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유 전 이사장도 다양한 뮤지컬 실험으로 자신에게 정답 없는 예술의 확장성을 알려준 이 디자이너의 가치를 조명했다.“원래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고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셨던 선생님은 패션쇼에 기본적으로 퍼포먼스를 다양하게 접목하세요. 옆에서 보면서 뮤지컬도 ‘파고들면 새로운 게 보인다. 무한대의 영역’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게다가 가장 한국적인 것, 한글의 아름다움과 기능적인 면을 누구보다 잘 활용하시잖아요. 세부 퍼포먼스에도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 차별화하려는 집요함이 숨어 있어요. 하나의 콘텐츠를 다양한 루트로 소통하려는 예술가의 진지한 감성을 배웠습니다.”이 디자이너와의 ‘화학적 모방’을 밑천삼아 유 전 이사장은 국내 최초 대학 뮤지컬학과(백제예술대) 설립 주도, 국공립단체 뮤지컬 공연 영상화, 숏폼 웹 뮤지컬 사업 등 이전 업계에서 전무했던 일들을 거침없이 진행해왔다. 코로나19라는 대형 악재에도 서울예술단을 이끌며 다양한 연령대가 공감할 수 있는 현실 문제를 다룬 ‘나빌레라’, ‘윤동주 달을 쏘다’, ‘이른 봄 늦은 겨울’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뮤지컬학과를 만든 건 배우가 한글 기능을 알고 명확하게 구사하면 더 좋은 콘텐츠가 나올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 디자이너의 한글 사랑에 동화되면서 나온 아이디어다. -유 전 이사장께서 ‘이상봉 예술’의 맥을 제대로 짚고 있네요. “옷이라는 게 나만의 테마가 있다고 해서 보는 사람에게 완벽하게 전달이 되진 않죠. 음악이든, 연극이든 퍼포먼스를 붙여 옷에 대한 내 생각을 전달해야 하죠. 내가 다양한 아티스트와 교분을 나눌 수 있었던 이유인데 그 물꼬를 트고 중간 고리 역할을 해준 게 희성 씨에요. 배우에서 연출가로, 또 이사장으로…. 이렇게 단계적 경험을 한 분은 뮤지컬계에서 유일하지 않을까요. 성실하죠. 나에게도 인생의 교과서적인 바탕입니다. 이상봉의 패션 그림을 완성해준 붓 같은 친구죠.”(이상봉)● “서로의 정신과 의사가 돼주자. 그리고 비우고 새 것을 채우자”얘기를 나누니 의지할 일이 많다. 근래에 각자 힘든 일들이 있었다.이 디자이너는 최근 친동생 가족 중 유일하게 남은 핏줄인 조카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3월 쇼 개막 바로 몇 주 전의 일이었다. 충격이 커서 쇼를 취소할까도 했다. “먼저 떠난 동생에 대한 미안함, 지켜주지 못한 조카에 대한 미안함에 힘들었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되는지 계속 걱정이 되더라고요.” 신 작가도 세월의 빠른 흐름에 보통 사람들이 겪는 맘고생을 하고 있다. “인간 관계도 끊어지고 기억력도 흐려지고…. 젊었을 때 자주 입은 청바지가 안 어울릴 것 같고…. 우울증 같은 게 오더라고요.”유 전 이사장 역시 2021년 서울예술단 이사장 임기가 끝나 야인이 된 상황에서 뮤지컬 열정을 재차 살릴 동기 부여가 절실하다. “서로 힘든 게 있으면 같이 울어주고 안아주고 위로해주자. 응원하고 서로가 정신과 의사가 되어주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것들을 채우려면 비워야 해. 비웁시다.”이 디자이너가 셋의 앞날 목표를 얘기한다. 신 작가는 “내가 우울증에 걸린 줄 알았는데 노인 심리 상담 공부를 해보니 우울증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증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상’이라고 나에게 요즘 말해준다. 그러니 위안이 되더라”며 스스로에게 정신과 의사가 됐다고 선수를 친다. 그는 노인의 심리 공부를 하면서 타로까지 배웠다. “오늘 만나기 전에 셋의 타로 점을 봤는데 ‘운명의 수레바퀴’가 나왔어요. 우리 전생에 인연이었답니다.”듣던 유 전 이사장이 “축복의 타로”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신 작가님이 쓰신 ‘비밀의 화원’을 예전에 뮤지컬로 만들까 했다. 다시 추진”이라고 분위기를 돋운다. ‘비밀의 화원’은 비밀을 감추고 살아가는 4명의 젊은이들의 심리를 다룬 소설. 작품에서 다양한 음악, 호러 영화 등이 등장해 뮤지컬 각색으로도 딱이다.이어 신 작가가 승부욕을 발동시킨다.“‘문학은 덕질이다’ 속편을 내볼까 하는데…. 희성 씨도 넣고, 오늘 취재기자님도 넣고.” 잠시의 침묵을 참지 못한 이 디자이너도 작은 희망을 얘기한다. 3월 쇼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작품을 접목했던 그는 한·오스트리아 수교 120주년을 맞아 9월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에서 쇼를 재차 하기로 했는데 이보다 더 챙기고 싶은 일이 있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 문화를 알리는 패션 디자이너와 교육자로 살았어요. 마지막 삶은 2016년부터 해온 고교 패션 콘테스트에 맞춰 있어요. 미래 패션 영재들의 꿈을 계속 키워줄 겁니다. 신 작가의 속편 책에서 이 내용하고, 과거 배우와 작가를 꿈꿨으나 포기했던 내 자신에 대한 미안함을 전편 내용에 이어 붙여줬으면 좋겠어요.” 이 디자이너의 혼이 담긴 주문에 두 사람이 다시 ‘덕질’을 시작하며 술잔을 든다.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셔요.”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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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 살리는 도약의 원년” 첨단기술 손잡고 미래 연다

    말과 의지를 이제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움을 겪던 대전·충청권 대학들이 본격적으로 경쟁력 강화에 나선다. 지난해에는 대학마다 혁신 비전을 제시하고 준비했다면 올해는 세부 목표를 실현하는 데 온 역량을 집중한다. 대학의 경쟁력은 수업의 질과 직결된다. 대전·충청권 대학들은 우수 교수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융합 실무형 인재 발굴에 초점을 맞춰 수업의 현장성을 강화했다. 학생 맞춤형, 밀착형 교육 모델을 개발해 적용한다. 학교별로 강점인 전공 분야를 세분화해 심층 교육을 강화했다. 원격 수업도 더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다듬었다. 학생 스스로 주도적으로 진로 설계를 할 수 있도록 관련 지원도 늘렸다. 취업률을 높이고 일자리를 폭넓게 제공하기 위해 총장이 발 벗고 나선다. 지역 기업과 기관 등을 찾아간다. 세종시 특화 산업 등에 발맞춰 지역과 긴밀한 상호 협조 체계를 이루며 미래 인재를 양성할 첨단 학과도 신설했다. 대전·충청권 대학들은 대학과 학생이 지역을 살린다는 것을 입증하는 원년으로 삼으려 한다. 입학 자원은 감소 추세이지만 교육의 내실과 특성화 경쟁력을 끌어올린다면 수도권 대학에 버금가는 입지 회복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대전·충청권 대학들이 어떠한 전략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지 살펴봤다. (대학명은 가나다순.)건양대 김용하 총장“학생의, 학생에 의한, 학생을 위한 대학”ּ고려대 세종캠퍼스 김영 부총장“창의교육-실용연구 비전 실현으로 미래 핵심 인재 양성의 전진 기지로 도약”ּ극동대 류기일 총장“현장 지향형-학생 맞춤형 교육으로 미래형 융합 인재 양성”ּ나사렛대 김경수 총장“장애인 학습권 보장 확대 통한 창의융합형 나눔 인재 양성”ּ남서울대 윤승용 총장“융합 실무형 인재를 양성하는 혁신 대학”ּ단국대 김수복 총장“보건의료-바이오 특성화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 견인할 학문 분야 육성”ּ대전대 남상호 총장 “튼튼한 기본, 특별한 경험. 미래 대학의 새로운 표준”ּ목원대 이희학 총장“복합 문제 해결 역량 강화 위한 모듈형 교육 혁신 단행”ּ배재대 김욱 총장“기업-기관 방문 투자 유치, 일자리 확충, 산학 협력 고리 형성”ּ선문대 황선조 총장“지역과 함께 혁신을 선도하는 글로컬 플랫폼 대학”ּ순천향대 김승우 총장““하이플렉스 활용 가상과 현실을 융합하는 새 교육 혁신”ּ우송대 오덕성 총장“특성화, 글로벌 네트워크 활용한 하이브리드 디지털 캠퍼스 구축”ּ청운대 정윤 총장“지역사회 상생-산학 협력, 혁신 스타트업 발굴-육성… 글로벌 강소 대학 발돋움”ּ충남대 이진숙 총장“캠퍼스 연구 기능 강화해 첨단 인재 양성 ”ּ한국기술교육대 남병욱 총장 직무대행“디지털 신기술 분야 인재 양성 통한 국가 발전 허브 기관으로 거듭나”ּ한남대 이광섭 총장“창업 특성화-융합 인재 육성 프로젝트로 글로벌 경쟁력 강화”ּ한밭대 오용준 총장“미래 가치를 창출하는 글로컬 산학 일체 혁신 대학”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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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이징커브’라 해서 ‘반(半) 플래시 썬’ 됐더니 MVP탄 김선형[유재영 기자의 보너스원샷]

    ‘플래시 썬(Flash Sun)’.프로농구 2022~2023시즌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SK 간판스타 김선형(35)의 별명이다. 플레이가 ‘번개(플래시)’처럼 빠르다고 해서 그 의미의 영어와 이름 선형의 ‘선’을 따서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지난 시즌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한데 이어 이번 시즌 정규리그 MVP까지. 프로농구 대표 스타임을 재차 확인하는 이 흐름 사이에서 그에겐 실제 많은 고민과 변화가 있었다. 농구 선수 30세를 환갑으로 취급하던 1980년대와 비교할 건 아니지만 30대 중반인 그에게 일부 팬과 농구인들은 ‘에이징커브(일정 나이가 되면 운동능력이 저하돼 기량 하락으로 이어지는 현상)’ 물음표를 적잖이 던졌다. 이번 시즌 개막 직전 만난 김선형은 그런 우려를 이겨내려고 변화를 준비했다며 구체적인 대응책을 기자에게 말해줬다. 그러나 정작 기사는 안 썼다. 새 시즌에 실행으로 옮길지 기다렸다.● 150km에서 100km로… 스포츠카 버리고 ‘코트 디자인-조립의 맛’을 알다“예전에는 무조건 150km 속도로 코트에서 달렸다면 이번 시즌에는 수시로 100km까지 줄이기도 할 겁니다. 절반까지 줄일 수도 있어요. 저속 변속을 해보니 주위가 더 잘 보이더라고요. 늦추니까 선택지가 많아지고 상대를 더 헷갈리게 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공 잡으면 무조건 달리는 스피드 농구를 했던 김선형은 ‘에이징커브’ 논란을 완급 조절 변수로 잠재우겠다고 했다. 그러면 어시스트가 늘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번 시즌 경기당 어시스트 6.8개로 전체 1위에 올랐다. 2011~2012시즌 프로 데뷔 후 경기당 어시스트 6개를 처음 넘겼다. “대표팀에 가면 후배들이 그러더라고요. 저 혼자 ‘원맨’ 속공으로 상대 두세 명을 달고 플레이를 하면 차라리 막기가 가능한데 제가 속도를 늦추면서 양쪽에서 동료를 뛰게 하고 뒤에 오는 자밀 워니까지 보고 있는 플레이를 하면 도대체 누구를 막아야 할지 정신을 못차리겠다고요. 이제 스피드보다는 ‘조립의 맛’, ‘해결의 맛’을 제대로 느껴야겠다 생각했어요.”생각의 변화, 스타일의 전환은 적중했다. 스피드는 힘을 아끼고 있다가 쓸 때 썼다. SK가 수비 리바운드를 잡을 때 김선형이 골밑으로 와서 공을 받을 것이라는 상대의 예상을 거침없이 역이용했다. 김선형이 워니 등 동료들이 리바운드를 잡으면 측면 공간 방향으로 하프라인을 최대 속도를 내서 넘고, 긴 패스를 받아 속공 득점을 올린 경우만 보더라도 지난 시즌과 비교해 크게 늘었다. 이런 상황 외에는 동료들을 충분히 활용하며 상대와 패턴 밀당을 했다. 상대에게 고민을 더 주려고 작정한 김선형의 리딩이 통했다. “상대가 보기에는 빠르게 뛰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리딩이 이제 저에게 맞는 것 같아요. 저와 나이가 같은 NBA 스테픈 커리(골든스테이트)는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팀 득점을 생각하잖아요. 수비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노마크’ 상황에 있는 동료들을 놓치지 않아요. 인간적으로 커리 혼자 100점을 넣을 수 없듯이, 저도 그래요. 제가 15점 정도 넣고 팀이 70~80점 넣어 100점 가까이 만들면서 자꾸 상대가 우리를 오판하게 만드는, 갈등을 유발하는 그런 농구가 팀에 가장 이상적이고 보기에도 재밌지 않을까 싶어요.”김선형은 시즌 전 자신의 말대로 팀 농구를 했고, 오히려 그 결과 자신의 한 시즌 역대 최다 득점 기록(16.3점)도 새로 썼다.● 전희철 감독이 내민 맞춤 통계… 믿고 따르는 출전의 맛‘선택과 집중’. 전희철 SK 감독이 갖고 있는 이런 ‘김선형 활용법’을 김선형 스스로 철저하게 잘 소화한 면도 크다. 김선형은 시즌 전 “감독님은 제 출전 시간에 대한 기준을 확실하게 갖고 계시다. 시간별 저의 퍼포먼스 통계와 퍼포먼스에 따른 승률 통계를 다 계산해놓고 거기에 맞춘다”고 말했는데 효과적으로 지켜졌다.이번 시즌 김선형의 경기당 출전 시간은 32분. 최준용의 부상으로 출전 시간이 계획보다 늘어났지만 전 감독은 ‘팀이 집중을 해야할 때’ 김선형이 힘을 다 쓰도록 시간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전 감독은 “쿼터별로 평균 7~8분 정도 뛰게 하면서 휴식 시간은 5분 이상 넘기지 않도록 한다. 그러면서 베스트 퍼포먼스의 시점을 3쿼터에 맞췄다. 지난 시즌보다 출전 시간이 늘어났음에도 오히려 체력이 더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감독님이 들어가라면 들어가고 나오라면 나오는 게 저에게 최상”이라던 김선형은 “출전 시간 관리가 되면서 동료들이 각자 자기의 역할 할당량을 100% 채울 수 있도록 하는 그림을 내가 확실하게 그려줄 목표가 생겼다”고 시즌 전 말했는데 본인이 생각하던 이타적인 리딩을 다양하게 실천해 보였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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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벌레 독서광’ 법제처장이 ‘축구광’된 사연[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깐부. 국어사전에는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보충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국 하버드 의대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동아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행복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부도, 명예도, 학벌도 아닌 사람들과 따뜻하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고 했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이분들은 참 겉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고위 공무원을 지낸 법률가와 축구 수집가가 둘도 없이 절친한 깐부 사이라고?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은데 20년 전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 평생 같은 인생길을 걷는 사이가 됐다. 이명박 정부에서 법제처장(2008.3~2010.8)을 역임한 이석연 전 법제처장(69·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과 국내 유일 축구 수집 전문가인 이재형(62·베스트일레븐 이사)씨 얘기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처럼 다가온 축구이 전 처장은 검정고시로 법대에 진학해 행정고시, 사법고시를 패스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을 하다 변호사로 시민단체 활동을 했고, 제28대 법제처장에 이어 21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을 지냈다. 그는 헌법과 상식을 잣대로 진보-보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까기’ 한다고 해서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전 처장이 “그런 내 자신을 만든 8할”이라며 내세우는 건 독서다. ‘책이라는 법’이라는 독서 기술책까지 내고 지금도 여러 강연에서 알짜배기 책 읽는 기술을 전수한다. “대학을 가기 전에 절에서 독학을 하면서 2년간 500권의 책을 읽고 지금의 지혜를 쌓았다”는 그는 이 씨를 만나고 생판 모르던 축구를 알게 됐다. 중국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통해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이 전 처장은 축구를 보면서 스포츠맨십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우친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자세, 조언, 덕담의 영감도 축구에서 얻는다. 책, 여행에 이어 축구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견인차가 됐다. 그래서 책은 밥, 축구는 반찬이다. 변호사 업무가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 K리그나 아마추어 축구 경기를 보고, 축구인들과도 자주 만난다.“손흥민(토트넘)을 제일 좋아하시죠?”“나는 거의 무명이라 할 수 있는 선수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해요. 약자라는 표현이 그렇지만 주목을 덜 받는 선수들에게 정이 가더라고요. 원래 강자에게 반항 의식이 있어서 그런가? 외면받았던 선수가 잘 되면 좋아요. 축구에서 감독 역할의 80%는 선수 기용에 있다고 봐요. 주목을 덜 받는 선수가 더 위축이 되면 안 되는데, 이것을 해결하는 게 감독 능력이죠.” 2월 20일 서울 성북구의 한식당에서 만난 이 전 처장에게 기습 질문을 던지니 예상 못 한 답이 돌아왔다. 옆에 있던 이 씨가 뿌듯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축구로도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이 전 처장은 축구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자 젓가락질을 멈췄다.● 서로 고정관념의 뒤통수를 친 ‘당신’ 이 전 처장과 이 씨가 처음 만난 건 2004년 ‘어느 날(두 사람 기억이 희미)’이다. 축구계에서는 수집가로서 이미 ‘축덕’으로 통했던 이 씨는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이 전 처장과 마주쳤다. 둘이 만난 계기를 설명하자면 길다. 이 씨는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이탈리아의 16강전에서 사용된 공을 확보하려고 이듬해 에콰도르로 날아갔다. 당시 월드컵에 나선 주심은 경기에 쓰인 공 중 하나를 골라 가져갈 수 있었다. 한국-이탈리아전 주심을 맡은 비론 모레노 심판은 에콰도르 출신. 그는 연장전에서 안정환이 넣은 극적인 골든골 공을 가져갔다. 이 씨는 국보 같은 공을 무조건 가져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현지로 갔다. 하지만 모레노 심판은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쓴 편지만 남겨두고 왔다. 당시 신창식 에콰도르 영사의 도움과 이 씨의 마음에 모레노 심판이 반응해 공을 한국에 기증했다. 신 전 영사는 주에콰도르 한국대사관 이름으로 모레노 심판에게 인증서까지 써줬다. 이 씨는 보답 차원에서 2004년 국내로 들어온 신 전 영사와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이날 약속 장소엔 이 전 처장도 같이 왔다. 신 전 영사가 고향 선후배 사이인 이 전 처장을 부른 것이었다. 이 씨는 뉴스에서 본 사람을 만나 놀랐고, 이 전 처장은 이 씨의 직업과 인생 스토리를 듣고 놀랐다. 이 전 처장은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전 대한축구협회장)과 인연으로 2000년부터 대한축구협회 고문변호사를 맡았다. 이 씨를 보기 전에 축구와 접점이 있긴 했다. 그래도 선수가 아닌 일반인에게서 ‘축구로 죽고 축구로 살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축구가 새롭게 보였다고 한다.-이재형 씨 첫인상은 어땠나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가 저의 좌우명이에요. 소신의 일관성을 지킨다는 거죠. 이재형 이사가 딱 그런 사람이었어요. 한국 유일의 축구 수집가로 살겠다는 소신을 강하게 지키고 있었어요. 보자마자 내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 씨는 명함 교환 정도만 하고 다음 만남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세상 돌아가는 어려운 얘기만 듣겠다 싶었는데 오히려 내 축구 스토리를 계속 들으셨어요. 알고 보니 처장님도 ‘콜렉터’였어요. 책부터 도자기, 골동품을 수집한다며 저랑 통한다는 거예요.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누나들, 남동생만 있거든요. 저에게도 형이 생긴 것 같더라고요. 형처럼 잘 모시면 나도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겠구나 생각을 했죠.”이 씨는 이 전 처장과 이후 만남을 지속하면서 수집 열정을 더 신나게 불태웠다. 2006년에는 한일 월드컵 스페인과 8강전에서 기적의 4강을 이끈 홍명보(현 울산 감독)의 마지막 승부차기 공을 한국으로 가져오기 위해 이집트로 날아갔다. 당시 주심은 이집트의 가말 알 간두르 심판이었다. 카이로에서 만난 알 간두르 심판은 이 씨의 간곡한 요청에 감동해 공을 기증했다. 이 씨의 노력 덕분에 한국 축구의 국보급 유산 2개가 한국 품으로 돌아왔다. 이후 이 씨는 이 전 처장의 제안을 계속 참고했다. 희귀한 북한 축구 자료를 새로 모았다. ‘축구 황제’ 펠레(브라질·2022년 사망)를 직접 만나보라는 이 전 처장의 팁에 그전에 모은 펠레 소장품 100여 점을 잘 관리하고 홍보했다. 그 덕에 이 씨는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업체의 주선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 브라질-호주전 당시 경기장 스카이박스에서 펠레와 함께 저녁을 먹고 경기를 관전했다. 이 전 처장은 이 씨의 소개와 인도로 진짜 축구인이 됐다. 축구인 모임, 행사에 빠짐없이 나갔다. 그 인연으로 홍명보장학재단에서 비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이사가 됐다. 홍 감독은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대표팀 감독 시절부터 이 전 처장이 쓴 책을 읽고 마음을 다스렸다. 이 전 처장은 창간 52년이 되는 국내 축구잡지 베스트일레븐의 고문도 맡고 있다. ‘독서광’인 그는 이 씨가 ‘22억 원짜리 축구공’, ‘축구 수집가의 보물 창고’ 등의 책을 펴내는 과정에서도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출판기념회에서는 무조건 이 씨 옆을 지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어디 가자고 해도 거절한 적이 있는데 이 이사한테는 그런 적이 없어요. 나도 냉정하게 잘 끊는 사람인데 유독 이상하다니까. 하하.” 그는 동생 ‘깐부’와의 만남으로 새로운 나를 계속 발견한다고 했다.“주변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권위적이고 강직한 줄 알아요. 그런데 이 이사를 만나면 잔정이 많은 사람이 돼요. 축구와 연관이 되니 ‘이석연한테 저런 면도 있구나’라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이런 관계가 참 좋단 말입니다.”-두 분의 관계가 처장님 본인의 인생관, 신념을 더 확고하게 해줬을까요? “노트나 일기장에 두 가지 말을 항상 써요. ‘늘 소신의 일관성을 버리지 말고, 고정관념의 뒤통수를 후려치자’고요. 요즘 젊은 사람들 상대로 특강할 때도 그렇고, 아들 셋한테도 ‘제발 튀는 행동을 해라’고 얘기해요. 비주류의 경쟁력을 뽐내는 축구수집가 이재형을 보면서 계속 느끼고 있어요.”(이석연)● 축구로 더 튀고 싶은 ‘우리’ “축구에 계속 미치는 것도 괜찮겠죠. 처장님?”(이재형) “얼마 전에 김진명 작가를 만났는데 최근 강연에서 언행일치 인생의 가치를 강조했다 하더라고. 이 이사는 축구를 위해 살겠다고 말하면서 일관된 노력을 하고 모든 것을 바쳤잖아. ‘내가 가는 길이 옳다’는 확신을 더 가져도 돼. 나 역시 시민운동은 헌법의 테두리에서 해야된다는 말을 했다가 욕도 많이 들었지. 그렇지만 소신을 지킨 것에는 후회 안 해.”(이석연) “처장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하게 책도 내시고 하는 게 저한테 굉장한 에너지로 다가와요. 힘을 받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 끝나고 아르헨티나 우승 주역인 리오넬 메시(파리 생제르맹) 부모를 만나려고 아르헨티나까지 갔잖아요. 나이 신경 안 쓰고 앞으로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에 계속 도전해야겠어요.”(이재형) “나도 주변에서 쉬라는데 오래 사는 것보다 사는 날까지 불꽃처럼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같이 튀어 봅시다.”(이석연) 점심식사가 식었는데 여전히 둘의 대화는 ‘핑퐁’이다. 그 와중에 이 전 처장은 “지금까지 수집 자료 중에 중요한 것 50개만 골라 수집 과정과 사연, 또 이 자료를 어디에 기증할 건지까지 섞어 책으로 만들어보자고. 그러면 책 보는 사람들이 놀랄 거야. 준비해봐”라고 아이디어를 또 제안한다. 천안의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 안에 들어설 축구박물관에도 이 씨 자료들이 제대로 전시돼 가치를 인정받기를 바란다. -처장님은 제대로 인생 ‘득템’ 하신 것 같네요.“요즘 주변 사람들이 물어봐요. 같은 이 씨니까 처장님이 친형님이냐고요. 해외에 혹시라도 흩어져 있는, 우리가 몰랐던 한국 축구의 역사 유물 환수 작업을 계속할 겁니다. 이어 세계 최초로 축구 도서관을 짓고 싶어요. 5000여권 정도 축구 서적을 갖고 있는데 더 모아서 축구 팬들 모두가 자유롭게 열람했으면 좋겠어요. 처장님을 명예 도서관장으로 모실 겁니다. 책 읽는데 달인이시니 축구책 독서법 설명도 잘 해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하하”(이재형) ● ‘불가근불가원’ 지키며 오래 만날 ‘너와 나’이 전 처장은 기자와 이 씨에게 “4월 성북동 길을 걸으며 또 한 번 축구 얘기를 하자”면서 이 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 멀리 보고 만나자고. 지금처럼 서로 좋은 도움 주고, 존경하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같은 곳을 보면서 걸어가자고. 한 번 볼 때 너무 진을 빼면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어. 하하.” “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고,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제서야 수저와 젓가락을 드는 두 사람. 허리띠 풀고 제대로 밥 먹겠다 싶었는데 이 전 처장이 반찬을 집다가 또 축구로 빠진다. “그나저나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는 누가 온대? 선수 기용 잘하고 분위기를 잘 이끄는 감독이면 좋을 텐데.” 두 사람이 만나고 이틀 후 외신과 국내 언론은 독일 출신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대한축구협회와 협상 중이라는 소식을 다뤘고, 실제로 클린스만 감독이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3월 A매치 2경기를 치렀다. 어릴 적 축구 선수가 꿈이었고, 지금도 주말마다 5곳의 축구 클럽을 돌며 공을 차는 이 씨가 반격의 제안을 한다. “처장님이 공까지 제대로 차고 뛰시면 축구광을 넘어서 100% 축구인입니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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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 체육 패러다임 바꾸는 히어로 여자 체육쌤 ‘원더티처’

    “학부모님 대부분은 체육이 공부를 방해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이제 학생들에게라도 국-영-수도 중요하지만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건 체육이라고 믿게 해주고 싶어요.” 서울 신목중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김혜린 교사는 오랜 침묵에서 벗어나 학교 체육 활동이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고 했다. 체육 선생님 꿈을 이룬 김혜주 교사(서울 잠신중)도 체육에 대한 선입견을 바꿔보고 싶은 의지가 크다. “제가 학교 다닐 때 티볼을 연습하고 배드민턴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교무실로 불려갔어요. ‘너 공부할 시간에 뭐하냐. 대학 떨어진다. 당장 들어와라’고 꾸중을 들었죠. 운동만 하면 ‘너 선수할 거야’라는 말을 들었어요.”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한국 청소년들의 94.2%가 권고 운동량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 체육 수업의 부실이 근본적인 이유다. 뛰어 놀고 싶은 학생들의 욕구를 해소해줄 수 있는 체육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운동의 묘미와 건강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수업은 힘들다. ‘공을 줄테니 뛰어놀라’는 식의 형식적 수업에서 특히 일부 여학생들은 소외되는 경향도 있었다. 체육 교사들마저도 교과 전문 역량이 정체되는 악순환이 반복돼 왔다. 여성 체육 교사들은 종목 연수 과정에서 소외감을 많이 느꼈다. 남녀 공동 연수 체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다 배우지 못했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민폐’가 된 것 같아 외로웠고 단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한계를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학생 수준에 맞춰 발로 뛰어 찾는 체육 수업이런 문제 의식에서 여자 체육 선생님들이 단단하게 뭉쳤다. 여교사들이 모여서 각자의 고민을 ‘우리의 고민’으로 놓고 학생 수준과 특성에 맞는 체육 수업을 연구해보자는 바람으로 하나둘씩 모였다. 홍유진(서울 과학고), 전해림(서울 덕성여고) 교사를 중심으로 2022년 여자 교사들의 체육 교육 공동체인 ‘원더티처(Wonder-Teacher)’가 생겨났다. 영화 제목으로 여자 주인공 히어로인 ‘원더우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현재 110명의 교사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대부분 체육 담당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교사, 유치원 선생님들도 있다. “수비 뒤로 돌아가.” “공간을 넓혀보자.” 21일 저녁 서울 경인고 체육관 농구 코트가 쩌렁쩌렁 울렸다. 매주 화요일은 ‘원더티처’의 여교사 농구 동아리가 모이는 날이다. 농구 교육 전문성과 재미를 높이려고 연수 클래스를 만들었는데 동아리까지 생겼다. 경인고 남성 체육 선생님인 이윤희 교사의 재능 기부로 농구 동아리 ‘Wonder T’의 여교사들이 매주 경인고에서 농구 실습을 한다. 이들은 실습에서 체험해본 것들을 체육 수업에 적용해보고 있다. 이날도 30여명 가까이 참석을 했다. 5 대 5 경기에서 농구 이해도, 기술 실력은 각자 다르지만 패스가 5명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동료를 돕기 위한 스크린, 허슬플레이 등까지 나온다. 모두가 경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교사가 만든 룰대로 움직인다. 득점자뿐 아니라 패스를 많이 하고 동료의 득점을 도운 사람도 높은 평가 점수를 받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으로 잘하든 못하든 팀 플레이 위주로 흥미진진하게 공수가 오갔다. 28일에는 1990년대 농구 붐의 주역인 ‘오빠부대’를 이끈 ‘피터맨’ 김병철 전 오리온 코치로부터 쏠쏠한 팁을 전수받았다. “모두가 잘해야 이기고 높은 점수를 받는 거잖아요. 학생들이 이런 농구를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친구들을 배려할 겁니다. 모두가 참여해서 즐겁고, 이기면 더 좋고, 못하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 가져도 되잖아요.”(김혜린 교사)● 책과 휴대폰에 갇힌 한계 극복하게 해주고 싶어학교 현장에선 바로 변화가 감지된다고 한다. 김혜린 교사는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 방과 후 농구 수업을 열었는데 영화 슬램덩크의 영향이 있긴 하지만 너무 많은 학생들이 찾아왔다. 면접까지 봤을 정도”라며 놀라워했다. 교사들은 ‘원더티처’ 활동으로 얻은 힐링의 기운이 학생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으면 한다. “학과 시험 때는 포기하면 백지 내면 끝이잖아요. 그런데 체육은 팀이 있고 동료가 있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끝을 낼 수 없죠. 사회에 대해서, 또 나에 대해 진짜 ‘매너’를 배울 수 있는 의미있는 체험인 것 같아요.”(김혜린 교사) 김 교사는 운동을 두려워해온 한 여학생의 심적 변화에 울림이 컸다고 말했다.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님하고 둘이 사는 여학생이었어요.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줄넘기 수업인데 줄이 머리에 맞는대도 넘지를 못하더라고요. 얘기를 해보니 그런 자신을 쳐다볼 친구들의 시선이 무섭다는 거였어요. ‘아니다. 못해도 친구들이 너를 포옹해줄 거다’라고 힘을 줬죠. 꾸준히 지도를 하니 지금은 야구도 하러 다니고 동아리에도 가입했어요. ‘체육으로 아이가 바뀔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저도 깜짝 놀랐어요.” 김혜주 교사는 “이제 체육 시간에 ‘무섭다’, ‘지친다’라고 말하는 학생이 없다. 친구들이 옆에서 응원하고 있으니 상대와 기싸움도 할 줄 안다. 스스로 책과 휴대전화에 갇혔던 한계의 벽을 체육으로 허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학생들이 체육대회에 나간다고 하면 나도 ‘원더티처’ 활동으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물은 몇 개, 양말은 몇 개 꼭 챙겨라’까지 알려줄 수 있다. 소소하고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교과서에는 없는 얘기”라며 웃었다. 우리 사회를 오래 지배해온 지덕체(智德體) 담론에서 건강한 신체를 기르는 ‘체’가 학교 교육에서 크게 위축된 시점에 여성 체육 교사들이 학교 체육을 살리는 막강한 구원 투수로 나서고 있다. “지덕체에서 체덕지? 체덕지를 ‘체인지’(體仁智)로 바꾸면 좋지 않을까요? 체인지로 체인지(change) 해요.”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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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박상원, 국내 배우 최초 사진작가로 해외 무대 데뷔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 ‘첫 사랑’ 등 최고의 인기를 얻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열연하며 국민 배우 반열에 오른 연기자 박상원(64·사진)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이 다음달 미국 로스앤젤레스 E.K. 아트갤러리에서 해외 초청 사진 개인전을 연다. 비주얼 저널리즘 박사 학위(상명대)를 갖고 있는 박 이사장은 이번 초대전에서 “모든 감각을 절제하고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본 일상 풍경에서 일시적으로 정지된 장면을 포착해냈다”고 한다. 작가의 의도를 관객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특징인 스투디움(Studium), 보는 이마다 다르게 느끼는 감정인 푼크툼(Punctum) 등을 한꺼번에 제시하려고 했다. 박 이사장은 “사진은 입체적인 삶의 확장이라고 본다. 내가 사진을 찍는 순간에 배우인 나는 이야기를 상상하고, 이 상상들이 수많은 삶의 순간들이 된다. 결국 사진도 연기”라고 말했다. 이번 초대전에서 박 이사장의 1~3번째 사진전인 ‘A Monologue 2008’, ‘A Shadow 2012’, ‘A Scene 2020’에서 소개된 주요 작품에 신작들을 더해 60여개 작품을 전시한다. 사진전은 4월 8일(현지 시간) 개회식을 시작으로 29일까지 열린다. 유재영기자 elegant@donga.com}

    • 202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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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대표 감독이 유망주를 불러 대표팀 쇼케이스 훈련을 한다고?[유재영 기자의 보너스원샷]

    한국 야구만큼이나 농구도 국제 경쟁력 하락에 대한 고민이 큰 상황에서 2030년까지 세계 수준으로 올라서겠다는 일본 남자 농구가 유망주들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대표팀 수준의 훈련 연계 체계를 치밀하게 가동시키고 있다. 지난달 일본농구협회(JBA)는 ‘대표팀 육성 캠프’라는 이름으로 17~22세 사이 선수들을 모아 성인 대표팀이 추구하는 농구 스타일의 핵심을 전수하는 강화 훈련을 개최했다. 사실상의 대표팀 ‘쇼케이스’였다.이번 훈련의 헤드 코치는 남자 대표팀 톰 호바세 감독이다. 미국 출신인 그는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일본 여자 대표팀을 이끌고 은메달이라는 대성과를 일궈냈다. 올림픽 이후 바로 남자팀 지휘봉을 잡은 그는 닷새간 선수들을 붙잡고 대표팀의 과제인 공수 전개 과정, 관련 전술, 움직임 등을 자세히 알려줬다. 지금까지 우리 농구계의 관행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일본 농구가 벌이고 있다.●17~22세 유망주 불러 대표팀 농구 스타일 이식 캠프에서는 U-22, U-18 대표팀 코칭 스태프도 합류해 호바세 감독을 거들었다. 연령별 대표팀 지도자도 자연스럽게 성인 대표팀의 농구를 공유한 셈이다. 선수 19명은 모두 22세 이하였는데 18명이 대학생, 4명이 고교생이었다. 고교생은 와쿠가와 하야토(18 ּ 194cm), 가와시마 유토(17ּ 200cm ּ 이상 오호리고), 사카모토 고세이(18 ּ 194cm ּ 다이이치고), 호시카와 가이세이(18 ּ 193cm ּ 라쿠난고)다. 이들은 만화 ‘슬램덩크’에 등장할 법한, 일본 고교 농구를 대표하는 ‘F4’ 4인방이다. 지난해 8월 열린 U-18 아시아청소년농구선수권 한국과의 결승전에서 비록 팀이 지기는 했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멤버다.JBA는 아예 캠프 훈련에 참가한 선수 중 4명을 지난달 13일부터 진행된 대표팀 훈련에 전격 합류시켰다. 가장 어린 가와시마 유토가 고교생으로 유일하게 포함됐다. 파격이었다. 일본 대표팀은 2월 23일과 26일 이란, 바레인과 2023 FIBA(국제농구연맹) 농구 월드컵 예선 경기가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육성 캠프 유망주들을 과감하게 대표팀 엔트리에 올렸다. 그리고 이란을 93-61, 바레인을 95-72로 대파했다. 캠프 훈련 후 대표팀에 합류한 카네치카 렌(도카이대)은 이란 전에서 20점을 넣었다. 가와시마 유토는 최종 엔트리 12명에는 빠졌지만 롤모델 선배들과 의미 있는 경험을 했다. 유망주들에게 수준 높은 대표급 농구 경험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면서 분명한 목표 의식을 갖게 한 것이다. JBA가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유망주 경기력 향상의 핵심 포인트다. 대표팀 육성 캠프 훈련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호바세 감독은 “일본 대표팀이 추구하는 농구를 유망주들에게 전하고 반응을 보는 것이 메인 테마다. 선수들이 대표팀의 스타일을 처음으로 접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며 흡족함을 나타냈다. 히가시노 토모야 JBA 기술위원장(테크니컬 디렉터) 역시 “190cm가 넘는 선수들이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하게 코트에서 움직이는 것을 일본 대표팀의 핵심 표준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번 캠프는 그 노력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세대들이 지금은 부족하더라도 계속 위로 밀고 올라와서 기존 대표 선수들과 경쟁했으면 한다”며 연령대별 선수들을 위한 대표팀 육성 캠프가 계속 추진될 것임을 시사했다. ●대표팀 기술보고서가 60장이나?… 교본으로 공유 이번 육성 캠프 훈련에서 호바세 감독이 선수들에게 강조한 부분은 JBA 기술위원회의 테크니컬 하우스 파트에서 펴낸 일본 대표팀 기술보고서 내용과 상당 부분 맥이 닿는다. JBA는 지난해 6월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 예선 3경기를 치른 일본 남자 농구 대표팀의 경기를 분석해 6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냈다. 공수 세부 항목별 수치가 팀 승패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에 따른 전술 변화까지 자세하게 분석했다. 일본 남자 대표팀은 45년 만에 나간 도쿄 올림픽에서 8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세계 정상급 팀인 스페인(77-88패), 슬로베니아(81-116), 아르헨티나(77-97)와 경기 중반까지 접전을 펼치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올림픽 직전 평가전에서는 세계 5위 프랑스를 꺾기도 했다.여자 대표팀에서 분석 농구로 재미를 본 호바세 감독은 선수들이 포지션과 관계없이 공수에서 속도를 올려 폭넓게 움직이는 농구를 주문하는 스타일이다. 기술보고서에서도 특히 도움 수비, 공격 리바운드 가담 상황에서 속도감 향상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도움 수비에서는 상대가 슛을 어렵게 쏘도록 순식간에 두세 명이 상대를 에워싸는 상황을 만드는 위치 선정 방법을 제시했다. 상대 속공을 막고 팀 득점 기회를 늘리기 위해서는 팀 전체 슛의 70% 이상 상황에서 포지션 관계없이 무조건 3명이 좌우 측면과 페인트 존에서 공격 리바운드에 가담하는 전술 팁도 제안했다. 속공 전개 때 빠르게 전방으로 패스를 주거나 순간 메인 볼 핸들러로 공격 조율을 하는 2m 이상 빅맨들의 경기력 향상 또한 필요하다고 봤다. 육성 캠프 훈련에서도 기술보고서에서 제안된 스타일의 집중력을 높이는 세부 훈련이 진행됐다. 일본은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함께 공동 개최하는 농구 월드컵에서 아시아 지역 1위를 노리고 있다. 아시아 1위는 2024년 파리 올림픽 본선으로 직행한다. 쉽지 않겠지만 다음 목표는 올림픽 8강이다. 이어 2030년까지 세계 10위권에 진입한다는 계획이 서 있다. 이 목표를 위한 과제 중심에는 유망주들의 반복적인 대표팀 연계 훈련과 트라이아웃(대표팀 승격을 위한 테스트)이 있다.우리는 어떤가. 프로농구는 시즌 막판 상, 하위권 승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초반 반짝했던 인기가 사그라지고 있다. 만화 ‘슬램덩크’가 영화로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국내 농구 쪽으로 관심이 연결되지 않고 있다. 미국프로농구(NBA) 하부리그인 G리그 소속 이현중과 NCAA(전미대학체육협회) 1부 곤자가대에 진학한 여준석은 아직 NBA로 가기에는 경기력과 현지 적응 면에서 넘어야 산이 많다. 지난해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했던 U-18 대표팀의 주력 선수들도 국내 각 대학으로 진학해 동계 훈련을 소화했지만 아직은 모자라다. 성인 농구와의 실력 격차를 줄여갈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비시즌 프로팀과 연습 경기하는 정도가 전부다. 계속적으로 고교-대학 유망주들이 프로에 진출할 때까지 3~4년 가까이 기량 정체를 겪고 있다는 건 뼈아프다. 농구 현장에서 20대 초반 연령대 대표팀 신설과 정기 소집 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나 외침뿐이다. 조상현 LG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 시절 U-23 대표팀 활성화 그림을 꽤 구체적으로 그렸으나 여러 벽에 부딪혔다. 대한농구협회는 대표팀 경쟁력 향상에 관해서는 개점 휴업이나 다름없다. 협회 홈페이지에서 간혹 업그레이드되는 건 농구인들의 경조사를 알리는 소식밖에 없다.최근에 발표된 FIBA 랭킹에서 일본은 36위로 한국(38위)을 추월했다. 예전처럼 “늘 일본은 교과서 농구만 한다”며 아래로 깔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과 일본 남자 대표팀은 7월 두 차례 잠실학생체육관에서 평가전을 갖는다. 농구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는 한국은 현역 NBA 리거인 하치무라 루이(LA레이커스), 와타나베 유타(브루클린) 등 주력이 대거 가세해 월드컵에 나서는 일본 대표팀이 부담스럽다. 자칫 두 번의 평가전에서 한국 남자 농구의 불편한 민낯이 완전히 드러날 수도 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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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국제안경전 내달 5일 개막

    국내 유일의 안광학 전시회인 대구국제안경전(디옵스)을 앞두고 관련 단체들이 대회 성공을 위해 뭉쳤다. 한국안광학산업진흥원(원장 진광식)은 (사)대한안경사협회 지역 시도 6개 지부(부산, 대구, 대전, 울산, 경북, 경남)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데 이어 브랜드 연합 단체인 EFIS(대표 이승우) 등과도 MOU를 맺었다. 디옵스는 4월 5일 오전 11시 개막식을 시작으로 7일까지 3일간 대구 엑스코 동관 5, 6홀에서 개최된다. 이번에 21회째를 맞는 디옵스 기간에 약 4000명의 안경사가 현장 보수 교육을 받게 된다. 각 지부 소속 안경사는 교육에 참가할 경우 평점(4점)을 부여받기 때문에 적극적인 참여가 기대된다. 사전 신청자에 한해 차량 이용과 식사 등이 제공된다. 또 EFIS 중에서는 16개 업체(리스펙트아이웨어, ㈜마루아이티씨, 마이스터옵틱스, 비앤비, 비엔케이옵틱, 씨슬로우, 아주옵틱스, ㈜엠투아이티씨, 오겐디자인, ㈜오이코스아이웨어, ㈜오피스더블유, ㈜옵티코리아, ㈜제이나인스테이션, ㈜지오코퍼레이션코리아, 커버그라운드, 타르트옵티컬앤씨오)가 안경전에 참가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진광식 원장은 “대구국제안경전이 대한민국 안경업계 비즈니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도록 모든 지혜와 역량을 모으겠다. 대한안경사협회 6개 지부, EFIS와 협력해 역대 가장 성공적인 디옵스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현장 보수 교육 세부 내용은 앞서 언급한 6개 지부로 문의하면 된다. 자세한 사항은 디옵스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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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라대, AI 교육플랫폼 활용해 구글 텐서플로우 개발 자 자격증 취득 지원

    강원 원주시 한라대학교는 인공지능 모빌리티 교육플랫폼(aMAP·AI-Mobility Accelerator Platform)을 활용해 구글 텐서플로우(기계 학습 및 수치 계산을 위한 오픈 소스 라이브러리) 개발자 자격증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이 교육은 2022년도에 1회차를 시작했다. 이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2회차 교육을 실시했다. 1회차에는 전국 102개 고교에서 451명이 참가했고, 2회차에는 전국 67개 고교 443명을 대상으로 교육이 진행됐다. 3월 4~5일에 걸쳐 진행된 구글 텐서플로우 개발자 자격증 취득 시험에 응시한 이천고와 양영디지털고는 학생 전원이 합격증을 받았다. 자격증 교육을 담당한 고국원 한라대 교수(미래모빌리티공학과)는 “대학 교육 과정을 고교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개편했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더 많은 고교생 개발자를 배출출시키겠다”고 말했다. 김석범 이천고 교사는 “지난해에도 교육에 참여해 좋은 성과를 얻었다. 한라대 aMAP 온라인 프로그램 강의를 통해 구글 텐서플로우 프로그램을 기초부터 단계적으로 준비하고 전문성을 높여 학생들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고 말했다. 신용현 양영디지털고 교사는 “고교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못한 영역을 심도있게 학습할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고 말했다. 한라대는 2021년부터 초등학생과 대학생, 기업 재직자들에게도 aMAP을 활용한 인공지능 관련 온라인 교육을 하고 있다. 유재영기자 elegant@donga.com}

    • 20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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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세상에 진 고마움의 빚을 함께 갚아나갑시다” 국민 배우와 레전드 산악인의 20년 우정 블루스[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깐부. 국어 사전에는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보충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국 하버드 의대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동아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행복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부도, 명예도, 학벌도 아닌 사람들과 따뜻하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 했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 슬픈 일에도 “나였어도…같이…함께” 설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1월 20일. 국민배우라 불리는 박상원(64)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서울예대 공연학부 연기전공 교수)은 서울 경희의료원 장례식장 1호실에 앉아 있었다. 전날 산악인 엄홍길(63·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 대장의 모친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박 이사장은 심한 독감에 걸려 목소리가 완전히 잠기는 등 컨디션이 최악이었지만 급히 병원에 들러 수액 주사를 맞고 장례식장을 찾았다고 했다. 그가 앉은 건 빈소 접객실 가장 뒷줄 가운데 자리. ‘상주’ 엄 대장을 정면에서 주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엄 대장은 재단의 네팔 6차 산티푸르 휴먼스쿨 증축 착공식 등에 참석하고 1월 17일 귀국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엄 대장이 조문객들에게 임종 순간을 설명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짠한 마음이 들었는지 차려진 음식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다음날 새벽, 발인이 끝나고 엄 대장이 운구 버스로 옮겨진 모친의 관에 머리를 대고 극락왕생을 빌자 박 이사장은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엄 대장과 어머니의 마지막 교감을 영상으로 찍었다. “엄 대장한테 주려고. 나중에 보고 싶어할 것 같아서”라 말하는 박 이사장의 눈가도 붉어졌다. 그는 장지인 경남 고성으로 떠나는 운구 버스 맨 앞 자리에 타고 있던 엄 대장과 버스 창을 사이에 두고 눈을 맞추려 애썼다. 엄 대장이 손짓으로 화답하자 그는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엄 대장이 가면서 어머니와 못다한 얘기를 했으면 좋겠어. 내 얘기도.” ‘인간시장’,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첫 사랑’ 등 역대 최고 인기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열연을 펼쳤던 톱스타와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 봉우리 16좌 완등의 전설적인 산악인. 두 사람은 지난 20여년 간 어떤 상황에서라도 든든하게 서로를 지탱해왔다. ● 통하더니 닮게 된 일상… ‘필요충분조건’으로 느끼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신 19일 당일 새벽이었어. 자는데 시커먼 망토를 쓴 애들이 나한테 막 달려 드는거야. ‘하지마, 하지마, 오지마’라고 막 소리를 지르고 했나봐. 아내가 급하게 나를 깨우더라고. 생전 그런 꿈은 처음이었어.” 장례식 약 한달 뒤, 엄 대장이 모친을 잃은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점에 박 이사장이 서울 삼청동 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엄 대장. 사무실 천장 구조물을 떼어내면 어떻겠어요? 시원해 보일 것 같은데”라며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박 이사장에 말에 엄 대장이 “아유, 좋습니다. 왜 제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라고 받아친다. 둘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박 이사장의 ‘아무말 대잔치’에 엄 대장이 맞장구를 치고, 박 이사장이 다시 엄 대장의 존재감을 살려준다. 박학다식한 박 이사장이 이런 저런 의견을 내놓으면 한 살 어린 엄 대장은 그 의도를 살피며 동의하고 잘 받드는 편이다. 만담 같은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하는 와중에 칭찬이 오가고, 웃다가 심플하게 둘만의 합의에 이른다. 엄 대장은 박 이사장의 방문에 생기를 찾았다. 2002년 무렵 우연한 자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의 삶에 빨려 들어갔다. 박 이사장은 엄 대장 덕에 네팔과 히말라야 곳곳을 국내 산보다 많이 찾게 됐다. 엄 대장이 2005년 휴먼원정대를 꾸려 전년도에 에베레스트 등반 도중 정상 부근에서 생을 마감한 후배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는 위험을 무릎쓰고 엄 대장을 따라 갔다. 히말라야 등반 경험이 많은 산악인들도 고산증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은 그곳에서 박 이사장은 사흘 밤을 엄 대장과 함께 보냈다. 2016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엄 대장과 함께 찾았을 때는 극심한 체력 저하에 실신 직전까지 갔지만, 무전기로 들려오는 엄 대장의 엄포를 들으며 베이스캠프보다 높은 칼라파타르(5550m)에 올랐다. 이곳은 에베레스트 정상이 가장 잘 보인다는 ‘뷰 포인트’. 자신에게 평생 추억을 남겨주려는 엄 대장의 의도를 알고 죽을 힘을 냈다. 엄 대장도 박 이사장이 나오는 드라마는 일단 ‘본방 사수’다. 공연 연습에도 자주 발걸음을 한다. 2020년부터 전국 투어를 진행한 박 이사장의 1인 연극 ‘콘트라바쓰’는 연습을 하도 많이 봐서 본인이 까메오로 출연해도 될 만큼 주요 대사를 줄줄 외운다. 사진 전공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박 이사장이 사진전을 열 때도 엄 대장은 스태프 역할을 자처하곤 했다. 박 이사장 아들 도현 군의 군대 면회 때도 작은 아버지처럼 동행했다. 정부 각 부처와 기업 등에서 강연을 자주 하는 엄 대장은 박 이사장으로부터 평소 사람 대할 때의 화법, 연기 상황에서 감정 표현, 발성 등을 보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 이사장은 이러는 엄 대장이 고맙다. “엄 대장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대중에게 많이 드러난 사람은 아니었어요. 집요하리만큼 산에 다가가 있었죠. 그런데 20년간 나를 만나다보니 본인도 대중들과 가까워지고 친숙한 사람이 됐잖아요? 저도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가는 과정이 예술의 본질을 찾으려고 싸움을 하는 연기자의 삶과 닮았다고 생각해 산을 찾았죠. 서로 테니스 공을 넘기듯 랠리를 주고 받으면서 비슷한 부분이 더 에스컬레이팅(확대)됐다고 봐요.”(박상원) “연기를 보다보면 대사와 표정이 저와 있었을 때 보여준 모습이라 그냥 빨려 들어가요. 히말라야에 와서는 제가 산에서 했던 대로 하시죠. 그러니 어디에서든 자꾸 만나고 싶고, 그 분이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하고 어떤 배려를 보여줄까’ 기대가 돼요. 산 밑의 세상을 제가 품을 수 있도록 해 준 분입니다.” (엄홍길)● ‘존칭으로 존경’이 우정 비결 … 이제 감사한 분들에 빚갚는 동반자 한 살 터울 두 사람은 형-동생 호칭을 쓰지 않는다. 엄 대장은 평소 사석에서 형이라고 부르는 선배들이 다섯 손가락으로 셀 정도 있다. 평생 지낼 인연이라 작정을 하고 단촐한 ‘의형제’ 의식까지 치른 각별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보다 정서적으로 더 가까운 박 이사장을 엄 대장은 형님 대신 ‘박 교수님’으로 부른다. 박 이사장도 ‘대장’ 호칭을 꼭 붙여 부른다. “김종학 감독(드라마 모래시계 연출. 2013년 작고)과 예전에 술을 마시면서 ‘우리 형, 동생 해보자’고 한 적이 있어요. 내가 김 감독께 ‘형님’ 그랬더니 갑자기 그 분이 너무 매력없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감독님으로 부르겠다 했던 기억이 나요. 엄 대장은 전설적인 산악인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홍길’이라고 부르면 ‘도전하는 산사나이’ 매력이 반감될 것 같았어요. ‘대장’은 ‘엄홍길’을 존경한다는 의미죠. 엄 대장 역시 내 여러 직함 중 ‘교수’가 가장 ‘인간 박상원’의 매력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을 거에요.”(박상원) “우리 사이에서 호칭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서로가 주는 목적 의식, 자극이 워낙 커요.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박 교수님을 보고 제가 많이 배우기도 합니다. 서운한 마음이 들 겨를이 없고 관계를 깰 수 있는 감정도 절제하게 돼죠.”(엄홍길) 형식상의 ‘호형호제’ 없이도 건전한 ‘찐우정’을 이어가는 이 브로맨스 관계는 가족과도 같은 인생 파트너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주변에 널리 알려준다. 박 이사장은 히말라야로부터 받은 고마움을 돌려주는 목표를 ‘인생 17좌’로 삼고 히말라야 오지에 학교(휴먼스쿨)을 짓는 엄 대장의 행보를 만사 제치고 돕는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도 전방위 봉사를 하면서도 엄 대장의 ‘인생 17좌’를 자신의 일상으로 여기는 박 이사장을 보며 느끼는 바가 적잖다. 이들의 관계가 주는 의미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홍보대사를 동시에 위촉한 기관도 여럿 있다. 엄 대장이 평소 형이라고 부르는 이연용 (주)일신 E&C 회장(전 대한전기학회 전기설비부문 회장)은 “각자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서도 서로 아끼고 지내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 솔직히 샘도 나고 부럽다. 둘을 보면 나와 내 주변 관계를 계속 돌아보게 된다. 인생 반환점을 훌쩍 넘은 나에게 세상을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엄 대장과 나는 그냥 쉬는 것 싫어하고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걸 좋아하는 필연의 동반자에요. 닮아가고 있지만 분명한 건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겁니다. 수족관에 비슷한 고기들만 있다면 전부 시름시름 앓다가 죽죠.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가치를 빛내주면서 주변 생태계에도 좋은 영향을 주려는 ‘케미’를 갖고 있지 않나 싶어요.”(박상원) “영화 ‘라디오스타’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스스로 빛나는 별은 없다’. 누군가가 사방에서 나를 비춰주기 때문에 빛이 난다는 거죠. 박 교수님이 저에게 그런 존재죠. 이제는 저희가 주변 분들을 더 많이 비추려고 합니다.”(엄홍길) 박 이사장은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대중에게 과한 사랑을 받았다. 이제 돌려줄 때다. 엄 대장이 세상에 진 빚을 갚을 때는 내가 힘을 보태고, 내가 갚을 때는 엄 대장이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말해 뭐해, 엄 대장 역시 100% 공감이다. “ ‘나만 받고 누리고 끝내겠다’는 아니죠. 박 교수님이나 저나 지금까지 받은 것에 비하면 만 분의 일도 못 갚았어요.” ● “인생 하산길, 건강을 부탁해” 인생의 하산길도 함께 걸을 둘은 건강에도 신경을 각별히 쓴다. 엄 대장은 매일 오전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휴대 전화를 끄고 수영을 하거나 집 근처 우이동 북한산 백운대 코스를 가볍게 등산한다. 그 전에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손-발가락을 쥐었다 폈다를 30분간 반복하면서 코어 운동을 한다. 따뜻한 물을 하루 2리터 이상 마시고, 인스턴트 음식은 되도록 삼가한다. 라면을 꼭 먹어야 할 때는 먼저 면을 끓여 기름기를 빼내고 죽처럼 푹 삶아서 조금 맛을 본다. 탄수화물 섭취는 최소한만 한다. 공기밥에는 숟가락이 거의 안 간다. 술은 맥주와 감미료가 첨가된 희석식 소주(참○○, 처음○○)는 안 마신다. 증류식 소주(일품○○ 또는 화○)에 레몬을 직접 짜넣어 마시는 게 요즘 엄 대장의 술 스타일이다. 고량주나 위스키 등도 체질적으로 잘 맞는다. 술을 마실 때는 술 한 잔에 따뜻한 물 한 모금 마시기를 반복하면서 몸 속 알코올 농도를 낮춘다. 1년마다 하는 정기 검진은 아예 병원에 하루 입원해 세밀하게 점검한다. 평소 스키, 스킨스쿠버 등을 즐기고 헬스클럽도 부지런히 드나드는 박 이사장도 1년에 2~3차례 하는 금주 기간을 더 늘리려고 한다. 연기 활동에 각종 행사, 개인 스케줄을 소화해도 끄덕 없던 몸이었는데 요즘 부쩍 체력이 떨어졌다고 느껴진다. 박 이사장은 “나보다 엄 대장이 전방위로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과부하가 더 걸릴 것 같다. 관계의 범위를 크게 넓히지 않는 선에서 몸 관리를 해야한다”며 엄 대장을 더 걱정했다. 그날 저녁도 ‘한잔’의 분위기를 잡는 엄 대장에게 박 이사장이 어깃장놓듯 말한다. “엄 대장. 내가 이제 반쪽 산악인이 된 것 같은데 앞으로 건강하게 히말라야에 더 가야하지 않겠어요? ” “아. 그래도 저하고 있을 때는 한 잔 드셔야 됩니다.” 박 이사장이 “이제 본인 몸에 배려를 해야 한다”고 받아쳤지만 술에 관한한 완강한 엄 대장의 협박(?)에 꼬리를 내린다. “그럼 뭐 저는 간단하게 막걸리나 한 잔하고 일찍 집으로…”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 됩니다.” 결국 이 날도 두 사람은 일찍 헤어지지 못했다. “기.기.길!!!” 막걸리 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힌다. 히말라야와 인왕산-북악산의 기운, 또 생기-활기-정기를 불러 모은다는 엄 대장의 대표 건배사 ‘기.기.기’는 최근 ‘기.기.길’이 됐다. 모든 기운은 하나의 길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엄 대장이 바꿨다. 둘을 묶고 있는 인연의 끈이 특별한 기합으로 더 조여졌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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