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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에서 언문(諺文)의 자체(字體)를 이상적으로 개선코자 천하에 구하오니 만대에 필적을 서물(書物)마다에 인(印)코자 하는 인사는 천재일우의 차기(此機)를 일(逸)치 마시고 일필을 휘(揮)하소서.” 1929년 1∼8월 다섯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 사고(社告)로 실린 활자체 모집 공고다. 류현국 일본 쓰쿠바기술대 종합디자인과 교수는 광복 70주년 한글날을 맞아 근대 한글의 활자화 과정을 집대성해 펴낸 ‘한글 활자의 탄생(1820∼1945)’에서 “동아일보의 이 공모는 이후 한국의 민간 서체 공모를 이끈 효시”라고 말했다. 공모 결과 구약성경 개역에도 참여했던 이원모(1875∼?)의 서체가 당선됐고, 동아일보는 이를 4년 동안 4만여 종의 활자로 개발해 1933년 4월 1일자 신문부터 6·25전쟁 전까지 사용했다. 류 교수는 “이는 한국 신문사 최초로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진 명조체 활자 세트이고, 동아일보는 이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고딕체 활자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서체는 1958년까지 국내 출판물뿐 아니라 북한 노동신문, 일본 민단과 미국의 발간물에서까지 사용됐다”고 덧붙였다. 류 교수는 지난 12년 동안 40여 개국을 방문하며 한글 활자의 원형과 계보를 찾아다녔다. 그는 “1880∼1945년 일본어 활자가 약 30종류인 데 비해 한글 활자는 무려 42종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원전 108년 한(漢) 무제가 고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 임둔 진번 현도 대방 등 한 군현의 위치를 둘러싼 갈등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한 군현 위치는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이 47억 원을 쏟아 부어 2008년부터 8년째 진행 중인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의 핵심 쟁점이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와 일부 재야 사학계는 4월 재단이 제작 중인 역사지도를 공개하면서 이 지도가 낙랑군을 현 평양 지역에 그리는 등 한 군현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에 위치시켜 “재단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추종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 왔다. ○ 동북아재단, 한 군현 위치 병기 계획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재단 국정감사를 하루 앞둔 4일 역사지도 제작을 총괄하는 장석호 재단 역사연구실장은 “한 군현의 위치에 대해 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의견이 통합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는 양측 입장을 지도에 병기한다는 것이 재단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역사지도 연구 용역은 다음 달 20일 마무리된다. 당초 이 지도는 올해 말 출판될 예정이었으나 한 군현 위치 논란이 불거지면서 검수를 이유로 출판을 3년 늦췄다. 논란이 된 한 군현의 위치는 학계의 통설인 한반도 북부설을 따른 것이다. 일부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에도 낙랑군을 평양 지역에 그린 지도가 실려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평양 지역 고분들에서 한나라 계열의 유물이 출토되고, 2005년 평양에서 낙랑군 속현들의 인구가 적힌 ‘낙랑 목간’이 발견되는 등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반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 일부 학자들은 한 군현의 위치를 중국 동북부 허베이(河北) 성 또는 요하 일대로 보고 있다. 이 소장은 올 8월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를 출간하며 “동북아역사지도는 중국이 동북공정 차원에서 그린 ‘중국 역사지도집’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며 “한반도가 외부의 식민 지배를 받아 왔다는 인식을 심기 위해 만들어진 일제 식민사학을 주류 사학계가 그대로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고조선 세력 범위에 대한 지적은 수용할 만” 이와 별개로 한과 위(魏)나라의 국경을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연장해 그린 것은 편찬위의 잘못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낙랑군이 중국 왕조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최근 학계의 연구와도 어긋난다. 지도 편찬위원장인 윤병남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문제의 지도는 작업 중인 자료였을 뿐 최종 결론이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 “후기 낙랑군은 토착적 성격이 강했다는 연구 결과 등을 반영할지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역사지도가 고조선의 강역을 축소했다는 비판에 대해 주류 사학계에서도 수용할 만한 부분이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소장은 “역사지도가 고조선 관련 유물이 쏟아져 나온 요하 서쪽을 고조선의 강역으로 명시하지 않고 ‘고조선 관련 문화’라고 모호하게 설명한 것은 잘못됐다”고 썼다. 고조선사를 전공한 한 대학 교수도 “랴오닝 성 서부 대릉하를 너머 현 랴오닝 성과 허베이 성의 경계지점까지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재단이 당초 동북공정과 관련돼 있어 예민한 사안임에도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지 못한 데다 뒤늦게 학계 통설과 일부의 주장을 병기하겠다는 것 역시 일시적인 봉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편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위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은 지도 편찬위와 재야 사학계에 국회에서 공개 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편찬위가 이를 수용해 11월 중순 양측의 ‘맞짱 토론’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영화 ‘엑스맨’은 유전자 변이로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뮤턴트(돌연변이)들과 평범한 인간들(호모 사피엔스)의 다툼에 관한 이야기다. 손등에서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칼날이 나오는 울버린(휴 잭맨) 같은 이들이 뮤턴트다. 여기서 상상 하나. 뮤턴트들이 승리하고 인간들은 멸종했다고 치자. 3만 년 뒤 뮤턴트의 후손들은 조상에 대해 이런 논쟁을 벌일 것이다. “인간과 뮤턴트들이 같은 시기 공존했던 것은 틀림없는데, 인간들은 왜 사라졌을까? 뮤턴트와의 경쟁에서 도태했을까? 아니면 뮤턴트가 인간을 모두 잡아먹었을까?” “인간과 뮤턴트는 섹스를 하고 아기를 낳을 수 있었을까?” “인간 화석에서 DNA를 추출해보니 우리와 일부가 같군. 우리는 뮤턴트의 후손이면서 인간의 후손이기도 한 것 같아.” 사실 이는 상상이 아니라 현대 과학이 다루고 있는 주제다. 2010년 놀라운 논문이 ‘사이언스’에 발표된다.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에서 핵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현대인의 유전자 안에 2만4000년 전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2% 안팎으로 섞여 있다는 것. 기존 학설과 달리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와 이종교배를 했고, 우리가 그 후손이라는 얘기다. 논문의 저자인 스반테 페보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유전학분과장은 이 유전자를 ‘내적(內的) 화석’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이집트 고대사에 매료됐던 어린이가 우여곡절을 거쳐 네안데르탈인 게놈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1955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저자는 웁살라대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면서도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한다. 급기야 지도교수 몰래 이집트 미라에서 DNA를 추출하고 염기서열을 분석해 이를 1985년 ‘네이처’에 발표한다. 저자가 이 같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까지는 수많은 도전과 실패가 있었다. 저자는 죽은 조직에도 DNA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송아지 간을 오븐에 구워 미라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집트의 실제 미라에서 DNA를 추출하는 데는 여러 차례 실패하기도 했다. 자신의 기존 연구와 정반대의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저자는 1997년에는 모계로 유전되는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 분석한 뒤 현생인류와 그들이 독자적인 종으로 이종교배를 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논문을 ‘셀’에 실었다. 책은 논문을 실을 학술지 선정이나 연구기금 확보, 과학자들의 협업과 경쟁 등 과학 연구가 어떻게 진척되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2006년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의 뼛조각을 얻기 위해 크로아티아로 가다가 방문 며칠 전 시료 채취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는다. 채취에 반대하는 누군가의 압력이 들어온 것. 그는 수많은 현지 관계자들을 이 프로젝트에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뼛조각 8점을 얻는 데 성공한다. 저자는 고대의 시료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하는 작업을 “진화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이종교배는 불가능했다는 반론도 나오는 등 고인류학은 논쟁이 활발한 분야다. 그러나 공상과학 같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지난해 아마존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프란치스코 교황의 국적은 아르헨티나. 그렇다면 개신교 최대 교단의 하나로 꼽히는 루터교세계연맹(LWF) 의장 국적은? 정답은 ‘어느 나라도 아니다’. 세계 98개 국가에 7200만여 명의 신도가 있는 루터교세계연맹의 무닙 유난 의장(65)은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이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예루살렘 동쪽의 한 동방정교회 수도원으로 피신한 부모 아래서 1950년 태어났다. 수도원 근처의 루터교 교회와 학교를 다니며 자라 핀란드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팔레스타인에서 목사로 일해 왔고, 2010년 7년 임기의 루터교세계연맹 의장에 선출됐다. 5일 열리는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에 초청받아 1일 방한한 그를 서울 중구 남대문로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나는 여전히 유엔이 발급한 난민 카드를 갖고 있는 난민입니다. 난민들은 종교, 성별, 민족, 국적,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LWF는 1947년 설립될 때부터 난민 보호에 중점을 뒀다. 현재 이라크 요르단 케냐 등에서 난민 캠프를 운영하며 31개 국가에서 스태프 2000명 이상이 난민 구호 등을 위해 일한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주요 협력 파트너이기도 하다. 유난 의장 역시 교회를 만나지 않았다면 많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처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등에 들어가 총을 들지 않았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 때 어떻게 행동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오늘날 시리아나 아프리카 등에서 유럽 등지로 가는 난민들에게 머물 장소와 따뜻한 사랑을 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인간답고 정의롭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그는 2일 판문점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한 기도를 할 예정이다. “저는 전쟁은 평화를 가져오지 않고, 무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언젠가 TV에서 남북한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한반도에서 통일과 인권이 존중되는 평화, 종교와 표현의 자유, 성 평등이 실현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 루터교단은 현재 교회 50개에 신도 6000여 명이 있다. 1958년 미국의 루터 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할 때 교회를 많이 세우지 않기로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배달 음식 주문 애플리케이션 ‘요기요’ ‘배달의 민족’ 등은 음식을 만들지 않고, 심지어 직접 배달도 하지 않고 돈을 번다. 속이 출출한 소비자와 그 주변의 요식업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승객과 택시 기사를 연결하는 ‘카카오 택시’, 빈방 소유자와 여행객을 연결하는 ‘에어비앤비’를 비롯해 매개를 통해 돈을 버는 사업 모델이 쏟아진다. 구글 플레이스토어나 애플 앱스토어도 앱·콘텐츠 생산자와 사용자를 매개하는 ‘수수료 장사’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전 세계의 사람과 사물이 연결되는 ‘초연결사회’가 진화하면서 ‘플랫폼 경제’ ‘네트워크 효과’ 같은 말이 주요 경제학 용어로 등장하고 있다. 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서적들도 우후죽순으로 나온다. ‘매개하라’는 비교적 대중적으로 쓰인 책이다.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쪽과 저쪽을 잘 이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저자는 매개자의 모델을 ‘코디네이터’ ‘어댑터’ ‘에이전트’ ‘매치 메이커’ ‘컴바이너’를 비롯한 8가지로 유형화한다. 책 초반은 다소 구문(舊聞)이다. 매개자의 모델 중 ‘필터’ ‘커뮤니케이터’를 설명하면서 네트워크 속 길목이 되는 허브(Hub)의 중요성이나 네이버가 사용자를 내부에 가둔다는 지적, 사용자 간 적당한 개방성과 폐쇄성을 유지하는 페이스북의 성공 비결 등을 소개한다. 책에 따르면 매개자 모델 중 ‘모빌라이저’는 ‘판을 벌이는 사람’이다. 음식 주문 앱 직원들은 서비스 출시를 준비하면서 음식 배달 식당들이 뿌리는 전단을 모으고 다녔다고 한다. 소비자들이 해당 앱으로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다수의 음식점(공급자)이 가입돼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판을 벌인’ 것. 가입된 음식점이 늘어나면 소비자도 늘어난다. 앱 입장에서는 음식점과 소비자 모두 자신이 매개하는 고객이다.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장 티롤 프랑스 툴루즈 1대학 교수의 ‘양면시장’ 이론이다.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 교수인 저자는 정보통신기술과 디지털 경제가 삶과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20여 년간 연구했다고 한다. 저자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주역(周易)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다시 여기서 ‘관계’의 중요성을 이끌어내는 등 웬만한 철학 연구자도 섣불리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서술하는 데 거침이 없다. 새로운 개념들을 지나치게 쉽게 풀어 쓰려 했던 탓인 듯 때로 요지를 벗어나는 비유나 설명하려는 대상과 거리가 먼 예시들이 등장해 책에 집중하기 어렵게 한다. 또 플랫폼에서 왜 중용(中庸)이 중요한지, 플랫폼 기업들이 실제 시장의 룰을 어떻게 만들고 지배하는지 등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부분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의 구조에 관심이 있는데도 ‘플랫폼’ ‘네트워크’ ‘양면시장’ 같은 말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읽어볼 만하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작고한 뒤에도 왕성하게 글이 쏟아져 나오니 진정 부지런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2013년 9월 영면한 최인호 작가가 생전에 기획한 문학적 자서전 ‘나는 나를 기억한다 1, 2’가 2주기인 25일을 맞아 출간된다. 2013년 작고 석 달 뒤 유고집 ‘눈물’이 나왔고, 지난해와 올해 역시 작가가 생전에 기획한 ‘나의 딸의 딸’ ‘꽃잎은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가 잇달아 출간되기도 했다. 고인은 ‘나는 나를 기억한다’를 2008년 구상했다. 그해 5월 침샘암이 발병해 집필을 중단하기까지 쓴 글이 1권으로 묶였고, 2권에는 미발표 습작이 담겼다. 고인은 ‘별들의 고향’ ‘겨울 나그네’ 등으로 1970, 80년대를 풍미한 거인이었다. 책에는 가난과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유년 시절,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등 어린 거인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가가 문학을 업(業)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다소 어이없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또래 여자아이들이 무용대회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본다. “예쁘고 아름다웠다. 나는 순간 질투를 느꼈다.” 자신을 ‘노트르담의 꼽추’, 여학생들을 아름다운 무희 ‘에스메랄다’처럼 느낀 그는 유명한 작가가 돼 예쁜 아이들에게 인정받겠다고 마음먹는다. “오손도손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우락부락 험상궂은 우리 형님 손/….” 작가가 초등학교 졸업 전이던 1958년 동아일보에 실은 동시 ‘화롯가’다. 그는 “이 동시는 내가 태어나서 활자로 발표된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에 실린 내 이름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나는 그 문예란을 잘라 두고두고 보곤 했다”며 “아마도 동아일보 축쇄판을 뒤지면 있을 것”이라고 썼다. 작가의 기억은 손에 쥘 듯 생생하다. 그는 세상을 뜬 뒤 자신의 글이 어떻게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지 알지 못할 것을 안타까워했던 듯하다. “빛나는 젊은 날의 아름다움은 앞산의 우물 속에 숨어 있나니, 내가 부르는 노래는 또 언제 그 누구의 가슴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책 중에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은 염석진(이정재)과 함께 김구를 만나러 가다 일본군 기관총병을 잇달아 저격한다. 제작진에 따르면 안옥윤의 손에 들린 것은 러시아제 소총 M1891 ‘모신 나강(Mosin-Nagant)’. 실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독립군들이 자신의 생명처럼 다뤘을 무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 무기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박환 수원대 교수의 최근 논문 ‘3·1운동 직후 만주지역 독립군과 무기’에 따르면 소총으로는 안옥윤이 썼던 ‘모신 나강’이 가장 많았다. 다만 영화에 등장한 것과 달리 대부분은 저격용 스코프(조준경)가 없는 모델로 추정된다. 박 교수는 “이 총은 총신을 짧게 만든 ‘카빈’으로도 만들어져 독립군 기병들에게 적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제 마우저 소총이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일본제 30식, 38식 소총도 사용됐다. 주목되는 것은 독립군의 무기에 권총이 많다는 것. 일본 측 정보 기록에는 독일제 ‘루거 P08’ 권총이 많이 사용됐다고 나온다. 이 총은 참호전이 잦았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했는데, 적과 근접한 상태에서 속사하기 좋다. 박 교수는 “일부 기록에는 루거 P08보다 독일제 마우저(모제르) 권총이 많다고 나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우저 권총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이 썼던 권총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1920년 북간도 지역 독립군들의 무기 보유 현황은 놀라운 수준이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그해 8월 중순 대한군정서(사령관 김좌진)가 대원 약 1200명에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문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소총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320∼1800정에 이른다. 같은 해 7월 일본 측 정보보고에는 “근래 포 2문(제식 미상)이 대한군정서에 도착하게 돼 있다”는 내용도 있다. 이들 무기는 주로 내전을 벌였던 러시아혁명군과 제정 러시아 측의 백군 등에서 도입됐다. “2, 3일 내로 갈 줄 알았더니 무기 매수에 실패했다는 통지가 왔다. 화폐가 개혁돼 돈이 못 쓰게 된 까닭이다. 운반대 200여 명의 식량도 문제고 같이 온 농민들의 농사와 집안일도 낭패다. … 일본군병 참소(站所)가 30여 리 전방에 있고 마적들이 후방 20여 리 산중에 있는데 … 어느 때 습격당할지 모른다.” 1920년 6월 러시아 백군으로부터 구입한 대한군정서의 무기를 가지러 왕칭 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해안까지 다녀온 경비대 분대장 이우석의 기록이다. 무기 반입도 전투만큼이나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독립군의 무기 반입 경로는 ①우수리스크→왕칭 현 오지 ②추풍(수이푼)→왕칭 현 오지 ③남부 연해주→훈춘 현 등 3가지로 추정된다. 일본 측 정보 기록에는 “근래 아무르 만 해안으로 향하는 대형 선박의 4할은 반드시 총기를 운반” “마차로 얼음판 위를 통과” “주정을 밀수입한 대금으로 아무르 만을 따라 수송” “썰매 8대에 실어서 홍범도 처에 반출” 등 독립군의 무기 반입 방법이 묘사돼 있다. 박 교수는 “일본 정보 기록에 북로군정서가 체코군으로부터 총기 5만 정과 기관총, 수류탄 5000개 등 대규모로 무기를 밀반입하고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며 “무기 보유 실태가 파악돼야 독립군 전력과 전투의 면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은 염석진(이정재)과 함께 김구를 만나러 가다 일본군 기관총 병을 잇달아 저격한다. 제작진에 따르면 안옥윤의 손에 들린 것은 러시아제 소총 M1891 ‘모신-나강(Mosin-Nagant)’. 실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독립군들이 자신의 생명처럼 다뤘을 무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 강점기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 무기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박환 수원대 교수의 최근 논문 ‘3·1운동 직후 만주지역 독립군과 무기’에서 에 따르면 소총으로는 안옥윤이 썼던 ‘모신 나강’이 가장 많았다. 다만 영화에 등장한 것과 달리 대부분은 저격용 스코프가 없는 모델로 추정된다. 박 교수는 “이 총은 총신을 짧게 만든 ‘카빈’도 만들어져 독립군 기병들에게 적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제 마우저 소총이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일본제 30식, 38식 소총도 사용됐다. 주목되는 것은 독립군의 무기에 권총이 많다는 것. 일본 측 정보 기록에는 독일제 ‘루거 P08’ 권총이 많이 사용됐다고 나온다. 이 총은 참호전이 잦았던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했는데, 적과 근접한 상태에서 속사하기 좋다. 박 교수는 “일부 기록에는 루거 P08보다 독일제 마우저(모젤) 권총이 많다고 나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우저 권총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이 썼던 권총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1920년 북간도 지역 독립군들의 무기 보유 현황은 놀라운 수준이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그해 8월 중순 대한군정서(사령관 김좌진)가 대원 약 1200명에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문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소총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320~1800정에 이른다. 같은 해 7월 일본 측 정보보고에는 “근래 포 2문(제식 미상)이 대한군정서에 도착하게 돼 있다”는 내용도 있다. 이들 무기는 주로 내전을 벌였던 러시아혁명군과 제정 러시아 측의 백군 등에서 도입됐다. “2, 3일 내로 갈 줄 알았더니 무기 매수에 실패했다는 통지가 왔다. 화폐가 개혁돼 돈이 못쓰게 된 까닭이다. 운반대 200여 명의 식량도 문제고 같이 온 농민들의 농사와 집안일도 낭패다. (…) 일본군병 참소(站所)가 30여리 전방에 있고 마적들이 후방 20여리 산중에 있는데 (…) 어느 때 습격당할지 모른다.” 1920년 6월 러시아 백군 백계 러시아군으로부터 구입한 대한군정서의 무기를 가지러 왕청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해안까지 다녀온 경비대 분대장 이우석의 기록이다. 무기 반입도 전투만큼이나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독립군의 무기 반입 경로는 ①우수리스크→왕청현 오지 ②추풍→왕청현 오지 ③남부 연해주→훈춘현 등 3가지로 추정된다. 일본 측 정보 기록에는 “근래 아무르만 해안으로 향하는 대형선박의 4할은 반드시 총기를 운반” “마차로 얼음판 위를 통과” “주정을 밀수입한 대금으로 아무르만을 따라 수송” “썰매 8대에 실어서 홍범도 처에 반출” 등 독립군의 무기 반입 방법이 묘사돼 있다. 박 교수는 “일본 정보 기록에 북로군정서가 체코군으로부터 총기 5만 정과 기관총, 수류탄 5000개 등 대규모로 무기를 밀반입하고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며 “무기 보유 실태가 파악돼야 독립군 전력과 전투의 구체적인 면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 특별법과 피해구제 특별법이 만들어지는데 각각 7, 9개월이 걸렸습니다. 대형 해양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무엇보다 빠른 특별조사가 필요합니다.” 홍콩의 법 학술지 ‘홍콩 로 저널’ 최근호에 ‘세월호 사고와 법적 쟁점’이라는 논문을 실은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해상법연구센터장(사진)의 말이다. 해상법 전문가인 그는 한국해양대를 나온 뒤 3만톤급 화물선 선장으로 일하다 1999년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법률사무소 김앤장에서 해사자문역으로 근무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홍콩의 해양사고에 대한 대응 시스템을 모범적 사례로 꼽았다. 2012년 홍콩 페리선과 유람선이 충돌해 어린이 8명을 포함해 39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발생 3주 뒤 독립적인 판사가 특별조사위원장으로 임명됐고, 6개월 만에 최종 조사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배가 불과 2분 만에 가라앉은 이유가 핵심이었습니다. 조사위원회는 배의 격벽이 설계대로 건조되지 않았고, 정부도 이를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신속한 조사가 가능했던 것은 홍콩 조사위가 관련자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조사위 증언은 민형사상 증거로 사용되지 않아 사고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도 비교적 솔직하게 증언합니다. 조사위 출석이나 진술을 거부하면 벌금이나 징역형을 내립니다.” 사고의 법적 책임은 조사위와는 별개로 법정에서 다룬다. 그는 신속한 피해자 배상과 보상의 제도화도 강조했다. “대형 해상 사고 때마다 배상과 보상이 늦어져 피해자들이 큰 고통을 받습니다. 해사안전법을 개정해 정부와 관련단체에서 기금을 마련하고, 일정액까지는 치료비와 생활비 등을 사고 직후 지급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에 입은 솜옷이나 무명옷의 원재료는 고려 말 문익점이 씨앗을 붓두껍에 숨겨 온 재래면이 아니라 미국산 개량종 육지면으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먹는 천일염도 전통 방식으로 만든 소금이 아니다. 1900년대 초까지 우리는 바닷물을 끓여 만든 자염(煮鹽)을 먹었다. 개량종 목화와 천일염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것은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郞·1869∼1953)라는 일본인 외교관이다. 개량종 면은 질과 양이 재래면보다 뛰어났고, 천일염은 자염보다 싼값에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한국인의 의·식문화에 많은 영향을 준 이 외교관은 규슈 지방의 시골 오이타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1896년 3월부터 서울 주재 공사관보로 약 1년간 일하다가 미국 등을 거쳐 1902년 7월 목포 영사로 조선 땅을 다시 밟은 뒤 25년간 한국에서 살았다. 1904년 기후와 풍토가 중국의 목화 산지 사스 지방과 유사한 목포 앞바다의 고하도에 육지면의 씨를 뿌렸다. 조선총독부 소속 부산 부윤(시장), 인천 쌀·콩 거래소 사장 등으로 일하다 1927년 일본 교토로 돌아간 그는 1940년대부터 재일 조선인들을 도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도항 허가를 받지 못하거나 교회당이 폐쇄돼 고통받는 조선인들을 위해 애썼다. 어쨌든 그는 조선 침탈에 나선 일본의 관료에 불과한 것이 아닐지. 이에 대해 일간지 도쿄특파원 겸 지사장으로 일했던 저자는 “와카마쓰는 일본 제국의 이익을 위해 일했지만 한반도의 산업과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며 “그의 생애를 발굴한 이번 기록이 호혜(互惠)의 한일 관계를 열어가는 밀알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세계수도문화연구재단(이사장 김일윤)과 경주대 실크로드연구원(원장 임영애)은 18, 19일 경북 경주시 보문로 현대호텔에서 국제 학술대회 ‘실크로드 고대 수도’를 연다. 이 대회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팔미라, 장안 등 실크로드에 걸쳐 번성했던 도시들의 문화와 신라의 관계를 조명한다. 고시치비트 말리노프스키 폴란드 브로츠와프대 교수, 굴미라 무흐타로바 카자흐스탄 이시크 박물관장, 쉬웨이민 중국 시베이대 교수 등이 발표할 예정이다. 주최 측은 “학술대회의 주제는 아시아와 유럽을 하나의 경제권역으로 잇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궤를 같이한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시대 어전 속기록 ‘승정원일기’“장(杖·곤장)으로 입을 치라.” “네가 더욱 독기를 부리는구나, 매우 쳐라! 매우.” “어느 곳을 지져야 되는가?” ‘막장 사극’의 대사일 듯하지만 이는 조선 숙종이 실제로 했던 말이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는 데 반대 상소를 올린 전 파주 목사 박태보를 밤새 국문하면서 가혹한 고문을 하라는 명을 직접 내렸다. 숙종의 국문은 숙종실록 15년(1689년) 4월 25일 자에 등장한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당시 상황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의 기록문화 덕분이다. 실록과 함께 특히 국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이 왕명을 출납하며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가 압권이다. 불행하게도 숙종 시기의 이 기록은 화재 등으로 사라졌다. 승정원일기는 현재 인조∼순종 동안의 기록만 남아 있지만 2억4250만 자에 이른다.○ 정승 10명 중 9명은 승정원 출신 승정원 관리는 지근거리에서 왕을 보좌하는 만큼 출세의 엘리트 코스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승정원일기를 번역하고 있는 한국고전번역원이 경국대전에 근거해 관직이 운영된 조선 세조∼철종 시기를 분석한 결과 영의정 등 3정승을 지낸 298명 중 249명이 승정원 승지를 지냈고, 20명은 일종의 속기사인 주서(注書·정7품) 출신이었다. 왕과 신하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기록하는 주서는 문관 중 ‘웅문속필(雄文速筆·문장이 빼어나고 글을 빨리 씀)’한 사람을 뽑았다. 그러나 즉석에서 한문으로 번역해야 하다 보니 이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이때 주상(숙종)이 매우 노하여 말이 빨랐고 대부분 상스러운 말로 하교했다. 그래서 사관들이 그 말을 글로 빨리 옮겨 쓰지 못하고 붓놀림이 지체됐다. 공(박태보)이 이를 보고 ‘몸을 꽁꽁(必자 모양으로) 묶고 무우석(無隅石·뭉우리돌)으로 입을 쳐라’라고 쓰지 못하고 지체하느냐며 혀를 차고 꾸짖었다.”(박태보 문집 ‘정재집’ 중에서) 고문을 받던 박태보가 숙종의 ‘꽁꽁’ ‘뭉우리돌’이라는 말을 한문으로 옮기기 힘들어하는 사관에게 이를 어떻게 쓸지 알려줬다는 것이다.○ 왕명을 거부하거나 이의 제기도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사후에 각종 사료를 모아 편찬되는 실록과 달리 현장에서 작성된 뒤 매달 1책씩 편찬됐기에 사관의 당파 등에 따라 사실이 달라질 여지가 적다는 장점이 있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을 수습한 것에 대해 실록은 “신하들이 모두 김일경(소론 강경파)과 박필몽(이인좌의 난의 주모자)의 구당(舊黨)이었으나 팔도의 적이 차례로 그 목을 바쳤으니 (…) 영조의 대략에 힘입은 것으로 훌륭하다”고 적었다. 그러나 난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던 영조 4년 3월 14일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도성 경비 강화 등을 두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침착하게 대응한 것은 당시 영의정 이광좌(1674∼1740)였다.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는 “이광좌가 난의 주모자들과 같은 소론이었기 때문에 노론 정권 당시 편찬된 실록은 그가 역모와 연관돼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가 있다”며 “그러나 승정원일기는 당시 상황을 사실 그대로 기술했다”고 말했다. 고전번역원에 따르면 승정원은 부당하다고 여기는 왕명 출납을 거부하는 ‘작환((격,교)還)’과 이의를 제기하는 ‘복역(覆逆)’ 전통이 있어 왕이 이들 몰래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정조도 역모에 연관됐다고 몰린 동생 은언군을 보호하기 위해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내관들을 통해 밀명을 자주 내렸다. 1994년 번역이 시작된 승정원일기는 현재 40여 명의 인력이 투입돼 있지만 양이 방대해 번역률이 16.9%에 머무르고 있다. 고전번역원 관계자는 “이 속도라면 완역에 48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중민(中民)’은 지금도 새로운 리더십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70)가 1985년 ‘중민 이론’을 제시한 지 30년을 맞았다. 중민은 ‘중산층’의 중(中)과 ‘민중’의 민(民)을 더한 말로 ‘경제적으로는 중류층이면서 민의 정체성을 갖고 합리적 개혁을 선호하는 참여 지향적 집단’을 뜻한다. 11일 서울 관악구 관악로 중민사회이론연구재단에서 만난 한 교수는 “사회적 양극화와 함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할 윤리적 자원을 갖고 있는 중민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1985년 한 교수는 1년 동안 창원 울산 포항 구미 등 대형 산업단지의 생산직 노동자를 비롯해 전국의 자영업자 화이트칼라 직장인 언론인 공무원 등의 의식과 실태조사를 했다. 그 결과 관료적 권위주의를 통한 근대화가 성공하며 중산층이 생겨났고, 민중·서민적 정체성을 유지한 이들이 개혁을 요구하게 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1980년대 중후반은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 등 ‘기층 민중’을 ‘변혁의 주체’로 보는 반면 중산층을 보수 세력으로 규정하는 급진 이론들이 만연하던 때였다. 한 교수는 소수파였다. “그 당시 ‘욕’ 많이 먹었지요(웃음). 당시 좌파 이론들이 정치적 신념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제 이론은 탄탄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자료에 근거하고 있어 덮어놓고 무시당하지는 않았어요.” 한 교수는 “사무 전문직, 중산층 진입이 확실시되는 대학생, 대형 산업단지의 기술 숙련직 노동자 등 세 집단을 중민의 핵심으로 봤는데 6월 항쟁을 앞의 두 집단이 주도하고 7, 8월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면서 중민 이론의 예측력과 설명력이 증명됐다는 평가가 나왔다”고 말했다. 최근 그는 중민 이론의 현재적 의미 등을 담은 ‘중민 이론과 한국사회’를 냈다.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중민사회이론연구재단은 14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시민청에서 중민이론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연다. 디지털 세대의 등장에 따른 중민 이론의 의미 등을 조명할 예정이다. 중산층이 약화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에서 ‘중민의 전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한 교수는 “비정규직과 근로빈곤층이 늘어나고 취업의 어려움으로 젊은 세대마저 개혁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예전처럼 특정 집단을 중민으로 가정하기는 어렵다”며 “하지만 중민 의식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2012년 대통령 선거 평가위원장으로 일한 한 교수는 민주당 대선 패배의 원인을 조명한 책 ‘정치는 감동이다’를 지난해 내는 등 야당에 쓴소리를 해 왔다. 한 교수는 이날도 “야당은 설득을 하지 못하고 편 가르기만 하는 운동권적 리더십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생명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찰스 다윈은 “햇빛이 드는 얕고 따듯한 연못”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까지도 과학자들은 메탄과 암모니아로 이뤄진 초기 지구의 대기에 물과 에너지가 추가되면 아미노산이 쉽게 합성되고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 연구에 따라 생명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유기화합물이 유지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유지돼야 한다는 게 드러났다. 1980년대 심해저 화산지대의 열수(熱水) 분출구에서 생물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계통에 속하는 호열성(好熱性)의 고세균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문제는 생명 복제와 진화의 키인 RNA가 형성되기에 열수 분출구는 너무 고온이라는 것. RNA는 고온에서 극도로 불안정해진다. 또 RNA를 안정화하는 데 필요한 붕산염 광물이 만들어지려면 액체가 고였다가 증발하는 과정이 반복돼야 하지만 생명이 발생했던 약 40억 년 전의 지구는 거의 전체가 바다로 덮여 있었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면 어디서 생명이 생겨났다는 것일까. ‘새로운 생명의 역사’의 저자 조 커슈빙크 등은 생명이 형성된 ‘다윈의 연못’이 고온이었던 초기 지구가 아니라 다른 행성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바로 화성이다. 최근의 화성 고대 지질사 연구에 따르면 화성은 행성 전체가 바다로 뒤덮인 적이 없었고, 생명이 시작되는 데 필요한 기체 원료도 풍부했다. 우주선도 없는데 초기 생명은 어떻게 지구로 왔을까? 그는 “최근 10년 사이에 이뤄진 실험들은 화성에서 나온 운석이 열에 멸균되지 않고 지표면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생명은 생명 활동을 하지 않는 상태로 스스로를 보호하다가,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면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 지구가 아닌 외계에서 왔다는 가설은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밝혀 제임스 왓슨과 함께 노벨상을 받은 프랜시스 크릭이 1970년대 이미 밝혔던 생각이다. 이를 정향 범종설(Directed Panspermia)이라고 한다. 크릭은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는 가까운 별에 사는 더 고등한 존재들로부터 은밀히 감시를 받는 처지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크릭이 너무 앞서 나갔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물음은 자연스레 생명의 종말에 대한 상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새로운 생명의 역사’의 저자들은 캄브리아기 대폭발처럼 생명체가 한꺼번에 출현하는 사건이 다시 생길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대량 멸종은 온실가스 배출 등에 따라 쉽게 되풀이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리나라가 압축 성장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그 시대를 거쳐 온 국민들의 마음은 아픕니다. 무한 경쟁에 시달리며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난 것이지요.” 1985년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작은 상가 셋방에서 개원한 능인선원이 개원 30주년을 맞아 13일 오전 10시 반 서울 강남구 양재대로 능인선원에서 기념 법회를 연다. 개원 당시 신도가 10여 명에 불과했던 능인선원은 지금은 30만 명이 넘는 국내 최대 규모의 포교 사찰로 성장했다. 능인선원은 개원 30주년을 기념해 구룡산 자락의 선원 내에 높이 38m에 이르는 ‘서울 약사대불(藥師大佛)’을 세우고 13일 ‘점안 대법회’를 함께 열 예정이다. 약사여래불은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부처님이다. 10일 만난 능인선원 원장 지광(智光·65·사진) 스님은 “경제의 폭발적인 팽창의 여파가 국민들 마음과 몸의 병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시대가 필요로 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불을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울 약사대불’은 좌상(坐像)으로 몸체가 18m에 머리 부위를 덮는 천개(天蓋)와 보주(寶珠)가 8m다. 입상(立像)인 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높이 33m)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좌대(12m)까지 합치면 약사대불이 더 크다. 능인선원 관계자는 “좌불인 약사여래불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고 말했다. 1999년 선원 신도회가 불상 건립을 제안한 뒤 재료인 구리를 마련했고, 2009년부터 불상 제작을 시작했다. 불상의 무게가 120t이 넘어 주조 뒤 100여 개의 조각으로 만들어 선원에서 다시 용접했다고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청와대와 교육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사실상 확정하고, 발표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는 본보 보도(9일 자 A1, 10면) 이후 후폭풍이 일고 있다. 역사학과 역사교육학 분야 학자와 연구자 1100여 명은 9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 일동’은 이날 서울 종로구 흥사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 교과서는 정권이 원하는 대로 내용 서술이 뒤바뀔 수 있고,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국정화 시도는 중단돼야 한다”고 밝혔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는 가운데 역사 교과서의 오류와 편향성 논란은 발행 체제와 관계없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 때문에 발행 체제를 정하는 문제보다 정확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한 과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국정도 검정도 피하지 못한 오류 9일 교육부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서용교 의원(새누리당)에게 제출한 ‘2014년 역사 교과서 수정·보완 사항’에 따르면 2013년 12월∼2014년 11월 교육부는 이미 검정을 통과한 총 43권의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 역사부도 등)에 대해 1281건의 수정, 보완을 지시했다. 이 중 거란 침략 당시 고려의 관료들이 내주려 했던 영토의 범위에 대한 사실 관계가 틀렸거나 조선의 징병제로 끌려간 청년들의 수에 대한 통계 오류 등이 46.5%를 차지했다. 나머지는 표기, 띄어쓰기, 오탈자 등과 관련한 오류였다. 국가가 편찬하는 국정 교과서에서도 오류는 발견됐다. 역사교육연대회의가 국정 교과서인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고구려 비사성의 위치가 중국 진저우(錦州)에 표시돼 있는데, 전문가들은 중국 다롄(大連)에 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교과서에 ‘노비문서’라는 설명과 함께 나온 사진도 실제로는 노비 신분을 풀어준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였다. 검정 교과서는 다양한 시각의 집필자들이 교과서를 서술해 편향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회 교문위 김회선 의원(새누리당)이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현행 교과서 간 서술 편차 현황’에 따르면 출판사별 성향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강조점과 주관적 해석이 다르게 반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우편향이라는 평가를 받는 A출판사는 북한 비판과 반공에 대한 논조가 매우 강하고,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좌편향인 것으로 알려진 B출판사는 북한에 대한 비판 내용이 상대적으로 적고, 반공이 독재 수단으로 쓰였음을 다른 교과서보다 더 강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확한 기술, 공정성 담보할 시스템 필요 현재 시스템에서는 현행 검정 교과서를 국정 체제로 전환한다고 해도 바로 정확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서울대를 비롯해 대부분의 대학 교수들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가 국정화를 강행한다고 해도 오류 없이 제대로 역사를 서술할 양질의 집필진을 섭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국정이냐 검정이냐 하는 발행 체제보다 교과서가 졸속으로 만들어지는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검정 교과서는 검정 기준, 편찬상 유의점 등이 발표된 뒤 1년 6개월 안에 교과서 집필, 검정 심사, 수정·보완, 교과서 생산 등의 모든 과정을 끝내야 한다. 실제 교과서 집필 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처음 적용된 교과서에는 기존 교과서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수정·보완 건수가 발생하고 있다. 잦은 개정을 지양하고, 교과서 개발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또 편향성 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엄격한 심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편향성 논란은 특정 사실에 대한 선택 또는 배제, 주제별로 배분된 분량, 제목 선정, 사례 인용 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중립적 시각과 전문성을 갖춘 심사위원의 엄격한 판단이 필요하다. 한 사학과 교수는 “공론의 장을 확대해 합의를 바탕으로 집필 기준을 상세화하고, 편향성 논란이 적은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폭넓은 집필진을 확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유덕영 firedy@donga.com·이은택·조종엽 기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섬라(현재의 태국)의 함대를 빌려 일본을 치려 했던 이른바 ‘차병섬라(借兵暹羅)’ 전략의 전말을 조명한 논문이 나왔다. 최근 발간된 해양문화 전문 무크지 ‘해양문화’(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발간) 2집에 실린 정제시(鄭潔西) 닝보대 교수의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전체 아시아국가의 연동’에 따르면 1592년 9월 조공하러 북경에 와 있던 섬라 왕국(아유타야 왕조)의 사신 ‘악팔라’가 “섬라의 군대를 동원해 왜국의 소굴을 치자”고 명에 제안했다. 명의 경략대신 송응창이 이를 만력제에게 보고했고, 만력제가 동의해 구체적인 실행 절차를 검토했다. 그러나 양광(광동과 광서 지역) 총독 소언이 “섬라 군대가 명나라에 오히려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 실현되지는 않았다. 명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북경에 갔던 조선 사신 정곤수가 차병섬라 전략을 조선에 보고한 내용이 실록에도 간략하게 기록돼 있다. 이번 논문은 명나라 조정의 관보, 양광 총독의 상소문, 당시 저술된 서적 등을 검토해 나왔다. 정 교수는 논문에서 “차병섬라 전략은 임진왜란이 한중일뿐 아니라 주변 아시아 국가들에도 관련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류큐국(현재의 오키나와)이 명의 정보 수집에 동참하고 마카오의 흑인 노예와 동남아, 인도에서 온 병사들이 명군에 편입돼 출병했다”고 말했다. ‘해양문화’ 2집에는 ‘1928년 동아일보 ‘도서순례’를 통해 본 식민지기의 섬과 바다, 섬사람(1)’(류창호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도 실렸다. ‘도서순례’는 동아일보가 1928년 6월 22일∼9월 12일 73회에 걸쳐 연재한 기사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원 비서로 일했던 동아일보 송정욱 기자(1897∼1929) 등이 고군산군도 거제도 거문도 등의 섬을 현지 취재했다. 이번 기고를 시작으로 시리즈의 원문 전체가 3회에 걸쳐 소개될 예정이다. 류 연구원은 “‘도서순례’는 민속과 전통 문화가 구습이 아니며, 전통 연구를 민족 주체성 강화 방법으로 인식하는 전환을 이룬 기획”이라며 “민족의 실력 양성 운동의 성과와 방향을 가늠해보려던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유학자이지만 불교에 귀의했던 매월당 김시습(법명 설잠·1435∼1493)의 사리는 어디에 있을까? 전국을 방랑하던 김시습은 충남 부여 무량사에 머물다 죽음을 앞두고 “죽으면 3년 동안 화장하지 말라”고 유언했고, 3년 뒤 무덤을 열었더니 시신 모습이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무량사 승려들은 그를 화장한 뒤 부도(浮屠·스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돌탑)를 세워 그의 사리를 봉안했다. 일제 당시 폭풍으로 부도가 쓰러졌을 때 발견된 사리를 국립부여박물관이 보관했지만 오래도록 주목하는 이가 없었다. 문헌을 뒤져 이 사리의 소장처를 알게 된 혜문 스님은 4일 “지난해 부여박물관에서 특별열람을 해보니 사리가 플라스틱 바구니에 휴지 같은 종이로 싸여 보관되고 있었다”며 “설잠대사의 사리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수장고에 방치되는 것보다 부도가 있는 원래 소장처인 무량사에 다시 봉안해 예우를 갖추는 게 옳다”고 말했다. 도난 등을 거쳐 국내외로 유출된 불교 문화재를 사찰로 되돌려주자는 ‘불교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이 4일 발족했다. 최근 한국 반환 계획이 확인된 문정왕후 어보 환수를 비롯해 우리 문화재 지키기 활동을 펼쳐 온 혜문 스님 등이 운영위원을 맡았다. 상임대표는 석왕사 주지 영담 스님이다. ‘불교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은 경기 남양주시 수종사의 팔각오층석탑에서 1957년과 1970년 발견된 불상 31구 중 분실됐다가 최근 동아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2구도 수종사 반환을 추진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분실된 불상은 모두 12구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도 6구가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한다. 영담 스님은 “국내에 소재가 파악된 불교 문화재부터 제자리로 돌리겠다는 취지”라며 “약탈돼 해외에 있는 불교문화재의 목록을 작성하고 환수하는 운동에도 바로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은 먼저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과 함께 추진 중인 일본 오쿠라 집고관 소재 평양 율리사지 석탑의 반환 운동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영담 스님은 다음 주 일본에서 조불련 관계자를 만나는 방안을 타진 중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륙의 벌판에서는 주변의 적과 친구가 선명히 보입니다. 그러나 바닷가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적선이 몰려오거나 하멜 같은 이방인이 출현합니다. 예측불허지요.” ‘적도의 침묵’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돌살-신이 내린 황금그물’을 비롯해 바다에 대한 ‘두꺼운’ 책을 써온 해양문명사학자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60)가 또다시 역작을 펴냈다. 민속학 인류학 역사학 고고학 해양학 국제정치학을 넘나들며 동해를 둘러싼 ‘환(環)동해’ 지역의 문명사를 그려냈다. 3일 만난 주 교수는 “수평선을 보는 방법과 지평선을 보는 방법은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1019년 일본 쓰시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선 50여 척이 침입해 각지를 약탈한 뒤 이키 섬과 규슈 하카타 지역까지 공격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뒤늦게 파악된 이들의 정체는 오늘날 연해주 일대에 살았던 동북 여진족이었다. 이들은 울릉도를 들이친 뒤 일본까지 공격한 것이다. 주 교수는 “그들은 발해와 일본이 교류했던 항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동해는 오래전부터 고요한 변방이 아니라 역동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책을 쓰기 위해 최근 2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러시아 자바이칼 사할린 연해주, 오호츠크와 베링 해, 일본 홋카이도 호쿠리쿠 사카이미나토 지방, 몽골 초이발산 등을 답사하며 자료를 모았다. 책은 과거 담비 해삼 다시마 등을 사고팔며 동해를 둘러싸고 형성됐던 교역의 그물망을 복원해낸다. 그는 “바다를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영토와 유사한 차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국가를 이루지 않았던 환동해 지역의 작은 소수민족 사회와 역사를 살피면 바닷길을 통한 문명 교류의 역사가 보인다”고 말했다. ‘격 낮은’ 질문일 수 있지만 환동해 문명 연구의 쓸모를 물었다. “최근 열리고 있는 북극항로의 예를 들어볼게요. 북극항로가 경유하는 러시아 캄차카 반도의 소수민족들은 자원 개발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자결권을 요구하고 있어요. 우리가 북극항로를 개척하면서 부닥칠 문제를 풀려면 소수민족과 해양 교류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주 교수는 앞으로 한국부터 아프리카를 거쳐 유럽까지 바닷길로 이어진 해상 실크로드에 관한 책을 펴낼 계획이라고 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도 육로와 바닷길 양쪽에서 고려할 수 있습니다. 남북 철도 연결도 중요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한국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양에 대한 전망을 갖고 시야를 베링 해 너머까지 확장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군에 의해 아시아 각 지역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군 위안부들의 면모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한국사학회는 4일 경기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아시아 태평양 전쟁 시기 지역 피해 사례를 통해 본 일본군 위안부의 개념과 범주’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이선이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일본 제국의 성폭력에 대한 일고찰―중국 산시 성 피해자의 구술을 중심으로’ 발제에서 중일전쟁 시기 산시 성에서 일본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구술 증언을 모은 자료집들을 분석해 발표할 예정이다. 한혜인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박사는 ‘일본의 남양군도 지배와 전쟁기 일본군 위안소 설치’를 주제로 발제한다. 일본군 위안소를 제도화하는 과정과 위안부가 미크로네시아(남양군도) 지역으로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다룬다. 이 밖에 ‘일본의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일본군 위안소와 위안부’(윤명숙 충남대 국가전략연구소 전임연구원),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강정숙 이화여대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 ‘일본군의 병사에 대한 성적 위안 정책하 위안부는 누구인가’(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등의 발제와 토론이 진행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