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년~551년 한강유역 임자는 역시 고구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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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시 도기동의 삼국시대 목책성 유적. 구멍 뚫린 곳이 나무를 박았던 곳이다. 흙더미를 나지막하게 쌓은 뒤 이중으로 목책을 세워 성벽을 만들었다. 기남문화재연구원 제공
경기 안성시 도기동의 삼국시대 목책성 유적. 구멍 뚫린 곳이 나무를 박았던 곳이다. 흙더미를 나지막하게 쌓은 뒤 이중으로 목책을 세워 성벽을 만들었다. 기남문화재연구원 제공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킨 뒤 한강 하류 유역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통설은 백제가 신라와의 동맹에 힘입어 551년 이 지역을 되찾기까지 고구려 영토였다는 것이지만 최근에는 백제가 계속 이 지역을 영유했다는 주장도 활발하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9월 경기 안성시 도기동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목책성이 고구려 영토설을 뒷받침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16일 열린 고구려발해학회 학술대회에서 김진영 기남문화재연구원 연구실장은 “도기동 목책성은 구조와 출토 유물로 볼 때 백제가 만든 뒤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이 일대를 점령하면서 고쳐 사용한 것”이라며 “경기 남부 지역에서 고구려가 활용한 것으로 확인된 최초의 성곽”이라고 밝혔다.

양시은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도기동 목책성은 대전 서구 월평동 산성 등 금강 유역 고구려 유적과 한성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금강 일대까지 진출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진 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켰고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후에도 백제가 한성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해석되는 내용이 20여 회에 등장한다. 482년 백제의 영토인 한산성(한성)을 말갈이 습격했다, 이듬해 백제 동성왕이 한산성에 사냥을 나가 군사와 백성을 위문했다, 499년 여름 가뭄이 들자 이 지역 사람 2000명이 고구려로 도망갔다 등의 기록이다.

통설은 한강 일대에서 웅진 천도 이후 백제 유적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 기록을 믿을 수 없거나, 한성을 잃은 백제가 한성이라는 지명을 남쪽 어딘가로 옮겼다고 본다. 그러나 최근 일부 백제사 연구자들은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시킨 뒤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고 돌아가 백제가 계속 한강 일대를 점유했다는 설 △백제가 5세기 말∼6세기 초 동성왕 혹은 무령왕 시절에 국력을 회복해 되찾았다는 설 등을 활발하게 제기했다.

한편 학술대회에서는 도기동 목책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웅천책(熊川柵)일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삼국사기에는 마한 왕이 동북 100여 리를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에게 할애했는데 온조가 웅천책을 세우자 위협을 느꼈다는 기록이 있다. 상당수 학자들은 4세기 근초고왕 시절의 일이 시조 온조왕 대에 잘못 삽입된 것으로 본다. 김 연구실장은 “웅천은 지금의 안성천”이라며 “도기동 목책성에서 4세기 근초고왕 시절의 유물이 출토돼 웅천책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도기동 유적은 성벽만 조사한 상태여서 향후 내부 건물지와 관련 유구 발굴 결과가 주목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고구려#한강유역#목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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