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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리려면 얼마나 드려야 하죠?” “더 주셔야 되는데….” 1980년대 말의 어느 늦은 저녁, 서울 잠실 장미아파트의 복도에 아주 낡은 종이와 책 더미가 일주일째 쌓여 있었다. 한 여성과 청소원이 이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비용을 두고 옥신각신했다. 30대 후반으로 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 조교이던 안승준 씨(56)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제가 가져갈게요!”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안 씨는 미국 이민을 앞둔 60대 종손의 고민을 전해 들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문서가 있는데, 평소에도 ‘냄새나고 자리만 차지한다’고 눈치를 주던 자식들이 ‘버리고 가자’고 했다는 것. 안 씨는 쓰레기로 버려질 뻔했던 문서를 종손으로부터 기탁받은 뒤 분석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과거 합격자를 많이 냈던 한 집안이 보관해 온 교지(敎旨·임금이 내린 문서), 간찰(편지), 시문집 등 1500여 점이었다. “종손의 부친이 6·25전쟁 당시 불타는 집에서 재물을 팽개쳐둔 채 지고 나온 고문서였다고 하더군요. 만약 요즘 시장에서 거래된다면 1억 원은 넘을 겁니다.” 》안 씨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최고참으로 고문서연구실 책임연구원이다. 깨끗하지만 퀴퀴한 책 냄새가 살짝 풍겨오는 장서각 3층 특별정리실이 그가 일하는 곳이다. “○월 ○○일, 재작년 분양했던 송아지가 커서 새끼를 낳았다. 새끼는 주고, 어미 소는 돌려받았다.” 안 씨가 재채기만 세게 해도 바스러질 듯한, 누렇게 바랜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가 살피는 문서는 왕실이나 고관대작의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이들이 금전·재물 거래를 적은 치부(置簿), 사사로운 소식을 주고받은 간찰, 관청에 원하는 바를 적은 민원 등이다. “하찮은 게 아닙니다. 평범한 양반 서민 노비들이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가 나와 있어요. 우리 정신문화유산의 7, 8할은 고문서에 담겨 있습니다.” 올 4월 입수한 진주의 재령 이씨 종가 문서에서는 노비가 한글로 쓴 계(契) 문서가 최초로 나왔다. 재령 이씨 문서 2만 점을 분석하려면 한 해가 훌쩍 갈 것이다. 지난 서른한 해도 오래된 종이 먼지와 냄새 속에서 그렇게 지냈다. 안 씨는 영남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5년부터 고문서 조사를 했다. 1년에 두 달은 지방 어느 곳 종가나 지손가(支孫家)에서 고문서가 쌓인 광을 뒤졌다. 당시는 고문서를 조사한 뒤 소장자에게 돌려주었다. 고문서의 전문적 보존과 연구가 이뤄지도록 지금처럼 아예 기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다. 고문서 조사단장 등을 지낸 그는 어느덧 고문서 수집 조사의 현역 최고봉이 됐다.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손을 부여잡으며 ‘이 문서가 저에게는 곧 조상입니다. 부디 잘 살펴주세요’라 말하던 종부(宗婦)들의 눈물을 잊지 못합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식 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전통적 생각을 지닌 종손과 종부들이 상당수 종가를 지켰다. 선대에서 후대로,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수백 년 물려받아 온 문서를 연구원으로 넘긴다는 데 종가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꼈다. 종손의 아쉬움에 고문서를 실은 차가 떠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제가 그 기분을 왜 모르겠습니까.” 사실 안 연구원도 부친이 순흥 안씨 상주파 13대 종손이고 형이 14대 종손이다. 고문서는 스스로 ‘여기 있다’고 소리치지 않았다. 안 씨는 기탁을 기다리는 대신 전국 주요 가문을 ‘저인망식’으로 훑었다. 족보학을 부전공해 양반들의 학파와 정파, 혼맥을 머릿속에 꿰었다. 조사할 집안의 목록을 만들고 600차례 전국의 고택을 다녔다. 그렇게 원나라 최후의 법전으로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은 ‘지정조격(至正條格)’을 경주 손씨 집안에서 확인했고, 평민과 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문서인 경남 거제도 어촌 구조라 마을 고문서 1000여 점을 찾아냈다. 문화 류씨, 해남 윤씨 집안 등에서는 한 번에 1만여 점이 나왔다. 안 씨는 조선 전기 사노비의 경제적 성격을 밝힌 논문, 조선시대 평민들의 생활사를 담은 책을 비롯해 논문과 저서 60여 편을 냈다. 조사 사업이 수십 년째 계속돼 왔지만 조사 의뢰와 기탁 물량이 근래 폭주해 일은 더 쌓이고 있다. 종가를 지키며 고문서를 손수 관리하던 이들이 세상을 떠난 뒤 관리에 부담을 느낀 후손들의 의뢰가 이어지고 있다. “30년 전에는 종손이 고문서 내용을 줄줄이 설명해 주셨어요. 지금은 저희가 설명을 해드리지요.” 안 씨는 “10년 전부터 대구의 고서점에 중국 상인들이 찾아와 유학 관련 고문서와 전적을 싹쓸이했다”며 “우리가 홀대하는 고문서를 가지고 그들은 박물관 콘텐츠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정년을 4년 앞둔 안 씨는 큰 고민이 있다. ‘후임자’ 문제다. 고문서 조사는 공은 많이 들고 빛은 안 나는 일이다. 안 씨는 “연구자는 있지만 흘려 쓴 초서가 대부분인 고문서를 능란하게 읽을 수 있는 이도 적고, 고문서의 수집 자체에 의미를 두는 후학이 없다”며 “전국 종·지손가와 30여 년 쌓아온 네트워크가 없어질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수년 전 알 만한 기업이 부도가 나서 소장 미술품도 경매에 들어갔거든. 감정하러 회장님 방에 들어갔는데 정면에 딱 걸려 있는 작품이 위작인 거야.”(수도권 미술대 A 교수) 또 위작 논란이다. 동아일보는 이우환 화백의 작품을 둘러싼 논란을 계기로 위작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미술관, 화랑, 감정, 경매 관계자와 작가, 미술평론가 등을 광범위하게 인터뷰했다. 그중 31명은 설문조사에도 응답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전문 위조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번듯하게 간판을 걸어놓은 일부 화랑과 개인 딜러가 위법과 합법의 경계를 오가고 있고, 감정은 객관성이 의심되고, 거래는 투기와 탈세 목적으로 이뤄지는 가운데 위작이 생산된다고 지적했다.○ “드러난 위작은 빙산의 일각” 현재 미술계 위작 거래는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그 시장 규모나 인력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서울의 한 갤러리 대표는 “미술계 유통 실세들이 범법 행위에 무감각하고 위법과 탈법을 덮는 데 능숙하다”며 “위작임이 드러나도 화랑은 수집가에게 받은 돈만 돌려주고 조용히 무마되는 경우가 많다. 숨은 위작 거래는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했다. A 교수는 “제자가 스승의 작품을 모작(模作)한 그림이 돌고 돌다 뮤지엄급 전시에 떡 하니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설문 응답자 중 10명은 위작이 근절되지 않는 원인으로 ‘미술계 전반의 윤리의식 부재’를 꼽았다. 돈에 눈먼 일부 딜러의 ‘반짝할 때 한몫 잡자’는 행태도 드러났다. “한국의 한 갤러리가 ‘우리가 조수를 붙여 줄 테니, 그림을 더 많이 그려줄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는 거예요.” 미술관 관계자 B 씨는 설문에 답하지 않는 대신 중국의 한 톱클래스 화가의 작품을 다루는 중국 화랑 관계자를 만났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당 작가는 중요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였다. “그 화가가 ‘나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웃으면서 전하는데, 저 빼고는 외국인들만 있었거든요. 민망했죠.” 또 다른 미술관 관계자는 일부 화상(畵商)이 작가 본인에게 ‘팔리는’ 그림과 유사한 작품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물론 갤러리가 피해를 보는 일도 있다. 서울 강남구의 한 갤러리는 최근 ‘뜨고 있는’ 동남아 작가의 작품을 현지 갤러리로부터 보증서를 받고 공수해 고객에게 팔았다가 위작으로 드러나 돈을 물어줘야 했다.○ 신뢰 잃은 감정 작품당 적어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A급 위작’뿐 아니라 키치와 사실상 구별이 어려운 ‘B급’ 위조 시장도 만성화돼 있었다. “정체불명의 작품을 보따리에 꽁꽁 싸매 들고 와 ‘이중섭의 귀한 판화를 하나 얻었는데 여기서 살펴보고 전시한 뒤 돌려 달라’고 하는 사람이 꽤 있다. 모두 모조품 가게에서 만든 것을 오래 묵은 작품처럼 2차 가공한 위조품이다. 거절하고 감정 전문기관 연락처를 알려준다.”(한 사설 미술관 대표) 현장 취재 결과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중섭의 경우 대놓고 ‘미술품 복원 전문가’라 광고하며 모조품 판화를 대량 생산하는 가게가 서울 인사동길 복판에서 발견됐다.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났기 때문. 지난달 말 케이블TV 홈쇼핑 채널은 이런 상품을 ‘이중섭 판화’라며 판매하기도 했다. 문제는 위작을 걸러내야 할 감정단체들마저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다. 윤범모 미술평론가는 “화상들이 감정단체를 주도하고 있어 신뢰의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한 감정 전문가는 “지인이 한 감정단체가 진품 감정서를 발급한 작품을 살 뻔했는데 위작이었다”고 했다. 작가에게 진위 판정을 맡길 수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한 미술관 관계자는 “다작(多作)하는 작가라면 작품을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다”고 말했고,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외국은 생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의 진위에 대해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시장 성장 가로막는 위작 컬렉터들이 미술품을 은밀히 소장하는 풍토도 위작이 발붙일 여지를 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범모 미술평론가는 “일부에서 미술품을 투기 수단이나 탈세에 악용하고 있다”며 “익명으로 소장하는 문화가 타개되지 않는 한 논란은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서울 인사동길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C 씨는 “미술품 구매자 중에 도둑놈들이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중견 기업 임원이라며 ‘2억, 3억 원짜리 작품을 찾는데, 영수증은 10억 원으로 끊어 달라. 세금은 우리가 낸다’고 해 쫓아낸 일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갤러리 대표는 “그런 거래가 이뤄진다 해도 비자금 조성이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데 화상이 제대로 된 물건을 넘겨주겠느냐”고 말했다. 한 감정가는 콕 집어 “위조범들의 다음 타깃은 최근 경매 기록을 세운 김환기 작가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는 최근 미술품 유통업 인허가제, 거래이력 신고제, 공인감정제 등을 골자로 한 ‘미술품 유통 투명화 정책’을 내놓았다. 설문 응답자들 중에는 정부 대책에 ‘매우 큰 효과’(2명)나 ‘약간의 개선을 기대한다’(15명)는 긍정적 의견이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11명)이라거나 ‘상황이 악화될 것’(3명)이라는 의견보다 많았다. 최은주 경기도미술관장은 “유럽 선진국 미술관의 도록을 보면 작품 소장 이력을 수백 년 전 소장자부터 하나하나 밝혀 놨다”며 “이처럼 거래 이력이 투명해지면 위작 시비는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신고제는 시장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의견도 일부 있었다. 전문가들은 위작 논란이 빈발하는 한 한국의 미술시장은 영원히 ‘B급’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관장은 “위작 논란을 일찌감치 잠재웠다면 한국의 미술시장은 홍콩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전문가 설문 응답자 명단(31명·가나다순)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1실장, 기혜경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 김기라 작가, 김영석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이사장, 김주삼 아트C&R 미술품보존복원연구소장, 류병학 독립큐레이터, 문경원 작가,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 박여숙 박여숙화랑 대표, 박우홍 한국화랑협회장, 서성록 한국미술품감정협회장, 서용선 작가,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미술시장연구자),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안병광 서울미술관 회장, 안소현 독립큐레이터,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우정아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우찬규 학고재 회장, 윤범모 미술평론가, 이동기 작가, 이수균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전준호 작가, 정준모 미술평론가, 조덕현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 최명윤 국제미술과학연구소장, 최병식 경희대 미대 교수, 최윤석 서울옥션 상무, 최은주 경기도미술관장, 하종현 작가(전 서울시립미술관장) 조종엽 기자 jjj@donga.com·김배중 기자 }

에노시마 섬에서 100년 넘게 영업해 온 니시우라 사진관은 마지막 주인 후지코가 죽자 문을 닫는다. 후지코의 외손녀인 마유는 유품을 정리하며 손님이 찾아가지 않은 사진을 살펴본다. 마유는 같은 사람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가 100년 전과 수십 년 전, 최근 찍은 사진에 모두 등장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마침 사진 속 인물 마도리가 사진을 찾으러 오고 두 사람은 사진에 얽힌 여러 미스터리를 풀어 나간다. 사진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전개가 흥미롭다. 일본에서 660만 부가 팔린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작가의 신작이다. 1만40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저금리 시대다. 복리로 연리 2%인 예금이 두 배로 늘어나려면 몇 년이 걸릴까. ‘1.02를 몇 제곱하면 2가 되는가’ 하는 문제인데 머릿속으로 잘 계산이 안 된다. 간단한 계산 방법이 있다. ‘70’을 이율로 나누면 된다. 문제의 답은 35년. 마찬가지로 연리 7%라면 70을 7로 나눠 나오는 10년이 걸린다. 이는 100분의 70, 즉 0.7이 2의 자연로그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빈 공대 교수인 저자의 이 책은 역사와 현실 속 소재를 활용해 수학에 얽힌 문화사를 소개했다. 고대 사회에서 수는 권력이었다. 파라오의 고문관들은 나일 강의 범람 시기를 계산했고, 바빌로니아의 신관들은 일식과 월식을 계산한 뒤 예언을 통해 권위를 유지했다. 이후에도 큰 숫자는 부유한 사람이나 필요했고, 계산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로마 숫자로 57은 ‘LⅤⅡ’, 75는 ‘LⅩⅩⅤ’로 썼고 두 숫자를 곱하는 것은 중세 최고 수준의 대학에서나 가르치는 분야였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에 십진법이 보급되면서 엄청난 혁명이 일어났다. 아담 리스가 1550년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는, 오늘날 초등학생들이 배우는 것과 같은 계산법 책을 낸 뒤 누구나 숫자를 읽고 셈할 수 있게 됐다. 수학은 계몽주의 최초의 성공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에라토스테네스부터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원칙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있다’는 ‘불완전성 정리’를 내놓은 현대 수학자 괴델까지 수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플라톤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원한 한 공동체의 시민 수는 5040명이지만 정확히 왜 그래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저자는 1부터 7까지 곱하면 5040이고, 7에서 10까지 곱해도 같은 수가 나와서가 아닐까 추측한다. 오늘날 은행 거래에 사용하는 ‘OTP’(일회용 암호·One Time Password)의 기원이나 거대한 소수를 활용해 숫자가 노출돼도 푸는 데 오래 걸리는 암호체계 등을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다. 저자는 “문명의 진보와 수 개념의 발달은 비례하는 관계”라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리처드 로티 교수(미국 프래그머티즘 철학자)의 사상은 해체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노장(老莊) 사상하고도 맥이 닿는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로티는 서양 주류 철학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고, 동양적 사유와 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00년 어느 토요일 서울 중구 대우재단빌딩 회의실. 중국 철학 중 양명학을 전공한 정인재 서강대 철학과 교수(현 명예교수)가 묻고, 미국 버지니아대 로티 교수 아래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유선 박사(현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가 답했다. 옆에서 동서양의 다양한 시대 철학을 전공한 학자 10여 명이 모여 대화를 경청했다. 모임의 명칭은 ‘현대철학사상연구회’로 주재자는 고 신일철 고려대 철학과 명예교수다. 1931년 신언준 동아일보 중국 상하이특파원의 아들로 현지에서 태어난 그는 김일성종합대를 다니다 1·4후퇴 때 월남했다. 영미철학을 전공하고 1960년부터 ‘사상계’의 편집위원과 편집국장을 맡은 한국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다. 독자적 한국 철학을 세우는 데 힘썼고 공산주의와 북한의 주체사상을 비판했다. 최근까지 이어지는 이 모임의 시작은 단순했다. 신 교수가 환갑을 맞은 1991년 제자 몇몇에게 가끔 모여 함께 공부하자고 얘기를 꺼낸 것. 그해 가을부터 매달 첫 번째 토요일에 모였다. 이선관 신중섭 최희봉(강원대) 김창래 오상무 임홍빈 하종호(고려대) 여영서(동덕여대) 박병철(부산외국어대) 김병환(서울대) 양성만(우석대) 김학권 김정현(원광대) 최용철(전북대) 이재영(조선대) 박성수(한국해양대) 김성진(한림대) 윤평중 교수(한신대)와 홍은영 고려대 강사 등 10여 명이 참석했고 30여 명이 모임을 거쳐 갔다. 고려대 철학과 61학번인 정인재 교수부터 88학번으로 신 교수에게 마지막 석사학위를 받은 한곽희 부산외국어대 교수까지 30년 가까운 차이가 나는 철학자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연구회 모임은 2006년 1월 신 교수가 별세한 뒤에도 석 달에 한 번씩 이어졌다. 16명의 제자들은 최근 신 교수 작고 10주기를 맞아 ‘신일철, 그의 철학과 삶’(고려대 출판문화원)을 냈고 고려대 철학과와 고려대 철학연구소는 11일 이 책의 출판기념회와 추모 학술대회를 가졌다. 유족의 도움을 받아 1년 반에 걸쳐 신 교수의 저술 목록을 정리한 이재영 교수는 “선생은 좁은 전공 영역의 경학(經學)에만 몰두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소크라테스처럼 끊임없이 제자들 및 사회와 대화하는 철학을 했다”며 “현실에 대해 철학적 견해를 제시하고 사회가 나아갈 바를 제시한 기고문 등을 포함해 신 선생이 쓴 글이 1000편에 가까워서 놀랐다”고 말했다. 신 교수가 은퇴한 뒤 종종 만났던 이유선 교수는 “신 교수를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자’로 새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선생님이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보수적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닫힌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을 뿐”이라며 “선생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에 바탕을 두고 맹목적인 자유방임의 자유주의를 극복하려는 철학적 대안에 골몰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8년간 45억여 원의 세금을 들인 동북아역사지도가 ‘출판 불가’ 판정을 받았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서강대-연세대 산학협력단이 제출한 지도를 심사한 결과 최하위 등급인 ‘D’등급을 받았다”고 28일 밝혔다. 재단 관계자는 “지도학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출판할 수 없다고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북아역사지도는 우리 민족의 강역을 시대별로 표기한 지도로 재단이 2008년부터 산학협력단에 위탁해 제작해 왔다. 산학협력단은 지난해 11월 지도 완성본을 재단에 제출했으나 부실 판정을 받고 두 달간 수정을 거쳐 올 4월 말 다시 제출했다. 동북아재단은 독도 표시 미비, 범례와 지도상 기호의 불일치, 지도상 한반도의 위치, 고대 강역 표시 방법 등에 대해 보완을 요구했지만 4월 제출한 지도 일부에서 여전히 수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재단 관계자는 “당초 한자로 된 지명을 한글로 수정했지만 여전히 글자가 겹쳐 가독성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지도 제작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산학협력단이 재단의 수정 요구를 대폭 수용했던 것으로 안다”며 “디자인 문제는 추후라도 수정하면 된다”고 말했다. 동북아재단 관계자는 “조사 결과 산학협력단이 규정에 맞지 않게 쓴 초과 지출 등이 발견돼 산학협력단에 지급한 사업비 중 10억여 원을 환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재단은 환수 방침을 24일 산학협력단에 구두로 통보했다. 동북아재단은 산학협력단이 만든 지도 데이터베이스를 향후 새 역사지도를 만드는 데 활용할 방침이다. 새 지도는 재단이 지리학자 등 전문가를 위촉해 자체 제작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재제작 과정에서도 당초 논란의 계기가 됐던 한군현 위치 등 고대사 강역 문제가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황강아지, 김뭉치, 김바회, 손삭담이, 김슈벅이, 강돌상, 노막산….’ 정겨운 어감의 이 순우리말 이름들은 18세기 경남 진주의 대곡면 마진마을 재령 이씨 집안 노비와 마을 백성들의 이름이다. 이 노비들이 한글로 적은 계(契) 문서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올 4월 경남 진주시 마진마을 재령 이씨 종가 문서를 조사하다가 18, 19세기 이 마을 백성과 노비들이 한글로 쓴 ‘상계(喪契) 문서’를 다량 찾아냈다고 27일 밝혔다. 상계는 상(喪)을 치르고 제사 지내는 일을 서로 돕기 위해 만든 계다. 양반들이 한자로 적은 계 문서는 있지만 노비 등이 한글로 적은 계 문서는 처음이다. 안 책임연구원은 “노비가 주인의 명령을 받아 쓴 한글 매매계약서 등은 수십 장 남아 있지만 자신들의 일에 관해 주체적으로 쓴 문서를 확인한 것 역시 처음”이라며 “‘어린 백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의 이상이 실현된 증거”라고 말했다. 이 문서는 계원 명단을 적은 계안(契案)과 돈의 출납 등을 적은 치부(置簿)로 구성됐다. 18세기 중후반 계안 2책, 19세기 초중반 치부 3책, 19세기 초반 전답 추수기록 3책 등 8책과 낱장 문서 23장 등이다. 상을 당한 사람의 이름과 부조 물품, 시기를 적었고 임원들이 확인 서명을 했는데 거의 모두 한글로 돼 있다. ‘을유 시월 초 칠일 막산의 처상 때에 부조 조 한 섬 곡자 네 개 아울러 전수를 전급한다.’ 치부에 쓰인 이 문장에서 ‘조(租)’는 도정하지 않은 벼, ‘곡자(曲子)’는 누룩을 의미한다. 이를 모두 돈으로 환산해 준다는 뜻이다. 안 책임연구원은 “지금까지 전해진 한글 문서는 왕실 여성이나 양반의 편지 등 지배계층의 것이 많아 조선시대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천민이 적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며 “하지만 이번 발견으로 천민이 쓴 한글 문서들이 근대를 지나며 적지 않게 유실됐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고 말했다. 계원들이 문서에 성과 이름을 모두 적은 것도 특징이다. 함께 발견된 이씨 가문 분재기(分財記)에 이 집안 소유 노비들은 성 없이 이름만 적혔다. 안 책임연구원은 “분재기에는 양반의 예속민으로 이름만 적혔지만 계원으로 기록할 때는 성을 함께 적어 국가의 공민(公民)이라는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이씨 집안이 소장한 고문서 2만여 점을 계속 분석 중이어서 문서가 추가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 문서는 7월 1일부터 열리는 한국학중앙연구원(경기 성남시 분당구) 장서각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에 전시될 예정이다. 전시에서는 ‘월인석보’와 ‘한산 이씨 고행록’을 비롯한 한글 고문서와 책자 100여 종을 볼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50년 인류는 지구와 충돌 예정인 소행성 ‘파이’에 로켓을 쏴 맞히지만 11개로 쪼개진 조각 중 하나가 지구와 충돌한다. 달에 혼자 있던 ‘나’는 인류 전체가 멸망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좌절한다. 만화가 조석이 네이버 웹툰에 최근 연재하기 시작한 ‘문유’의 도입부다. 이 같은 설정은 꽤 합리적이다. 독일의 소행성 전문가인 이 책의 저자도 “충돌 위기의 소행성을 폭파하는 것은 최악”이라며 “소행성이 큼직한 덩어리 여러 개로 나뉘어 지구에 마찬가지 피해를 주게 된다”고 썼다. 연구 결과 6500만 년 전 공룡을 절멸시킨, 직경 10km 이상의 소행성과 지구가 충돌하는 일은 평균 5000만 년에 한 번 일어난다. 직경 1km 이상인 소행성의 충돌은 60만 년에 한 번 정도다. 직경 0.5∼1km 소행성과의 충돌은 이보다 자주 일어나는데, 그래도 전 지구적 피해를 불러온다. 엄청난 열과 충격파로 충돌 지점 반경 1000km 안쪽의 모든 생물은 죽음을 맞는다. 파편들이 공중으로 날아갔다가 며칠에 걸쳐 다시 지구로 떨어진다. 기온은 마찰열로 단시간에 급격히 치솟았다가 곧 먼지가 하늘을 어두운 장막처럼 뒤덮어 길고 추운 겨울이 온다. 생태계는 무너지고, 크레이터가 형성될 때 암석 속 유황이 기화해 산성비가 내린다. 지옥도와 다름없다. 인간이 이를 막으려면 소행성의 궤도를 약간 바꾸는 게 효율적이다. 우주선을 보내 ‘살짝’ 미는 방법이다. 그러나 미는 데 필요한 막대한 연료까지 싣고 소행성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책은 새로운 방법을 소개한다. 바람의 힘을 받아 항해하는 범선처럼 태양빛을 받아 우주로 나아가는 ‘태양 범선’을 활용하는 방법, 고출력의 레이저를 소행성 표면에 쏴 물질을 기화시켜 이때 생기는 반작용을 이용하는 방법, 전기장으로 이온을 내뿜어 가속하는 ‘이온 엔진’을 사용하는 방법 등이 모색되고 있다. 저자는 이 같은 기술들이 동시에 인간을 먼 우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주 엘리베이터’처럼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기술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니던 30대 여성 매기는 갑자기 해고된 뒤 헌책방에 틀어박혀 종일 로맨스 소설을 읽는다. 그는 실연의 상처와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 밀려가는 집세 등에 시달린다. 매기는 어느 날 책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펼쳤다가 여백마다 빼곡히 적힌 메모를 발견한다. 메모에는 책을 매개로 헨리와 캐서린이라는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흥미를 느낀 그는 이 연인들의 스토리를 알아내려고 하는데…. 힘든 현실을 웃음으로 바꾸는 입담이 경쾌한 장편소설이다. 1만38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6·25전쟁은 ‘냉전 시대 벌어진 최초의 열전(熱戰)’이다. 한국과 북한뿐 아니라 21개국 군대로 구성된 유엔군과 중공, 소련군이 격돌했고, 세계 각국에 끼친 직간접적 영향도 작지 않다. 6·25전쟁 66주년을 맞아 세계사적 의미를 조명한 책이 최근 잇따라 출간됐다. 독일 역사학자인 베른트 슈퇴버는 ‘한국전쟁’(여문책)에서 “6·25전쟁이 미국의 대공산주의 전략을 ‘억제’에서 ‘해방’으로 변화시켰다”고 밝혔다. 미국은 1946년부터 6·25 이전까지 전단 배포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유럽 동부·중부,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의 국민이 독재에 맞서 싸우도록 어떻게 설득할지에 관심을 가졌지만 6·25전쟁 이후에는 군사적 ‘해방’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겼다.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을 촉진했다. 군사 장비를 대량 생산하는 출발점이 됐고, 군사동맹 체결도 늘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사한 조약기구가 1951∼1955년 아시아에서 여럿 설립됐다. 적의 정보를 도청하는 데 특화된 미국 국가안보국(NSA)도 전쟁 중인 1952년 설립됐다. 소련은 1951년 1월 자국은 물론 동유럽 위성국가까지 포함해 거대한 규모의 군비 확장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압박으로 1953년 6월 민중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6·25전쟁은 중국과 소련, 두 공산주의 대국의 사이가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 양국은 전쟁 중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스탈린에게 각종 무기 설계도와 핵무기를 요구했지만 스탈린은 끝까지 방해했다. 이때 틀어진 양국 관계는 1959년 핵폭탄 설계도를 중국에 넘긴다는 약속을 소련이 파기하면서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1970년대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은 것의 기원은 6·25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서독은 6·25전쟁을 통해 경제가 도약했다. 공산품 생산 기반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약 200만 명에 이르렀던 서독 경제는 군수품을 생산하면서 엄청나게 성장했다. 물론 6·25전쟁으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국가는 일본이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가 최근 낸 ‘기지국가의 탄생-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은 일본이 6·25전쟁 내내 물자와 병력 수송의 중계기지, 수리 및 보급기지, 출격 기점으로서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다고 썼다. 1953년 1월 일본 내 미군기지는 733곳에 이르렀다. 대량의 전쟁 물자 수요의 급증은 이른바 ‘조선 특수’를 낳았다.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은 군수 물자를 생산하면서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 미국 공식 전사(戰史)도 6·25전쟁을 ‘미국이 수행한 전쟁 가운데 군수 물자의 동원이 사실상 처음으로 강조된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저자는 “일본은 2차 대전 종전 뒤 ‘평화국가’로 재기를 다짐했지만 6·25전쟁을 통해 후방 기지로 국제사회에 복귀했다”며 “일본인의 의식 속 평화국가는 실상 ‘기지국가’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요즘 세상에는 이런 책을 내도 보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1명, 10명이라도 이 책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면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지요.” 성백효 한국고전번역원 명예교수(71·해동경사연구소장)은 최근 ‘대학·중용집주(大學·中庸集註) 부(附) 안설(按說)’(한국인문고전연구소)을 냈다. 대학·중용집주에 원문에 대한 이견과 여러 해석을 담은 ‘안설’을 붙였다는 뜻이다. 16일 그를 만났다. “대학의 요점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입니다. 그리고 치국과 평천하보다 먼저 수신제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게 핵심이지요. 오늘날 정치 불신의 원인도 그게 안 돼서입니다. 중용은 조선 성리학의 근간이 되는 책이지요.” 책은 성리학의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도표 등으로 소개했고, 1000여 항목의 역주를 달았다. 성 명예교수는 2013년 논어집주 안설, 이듬해 맹자집주 안설을 냈고, 이번 책 발간으로 10년 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사서(四書)집주의 안설을 모두 마무리했다. 요즘에는 ‘고문진보(古文眞寶)’의 후집(後集)에 주를 달고 있다. 충남 예산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고 부친과 저명 한학자 문하에서 공부했다. 1980년부터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90년대 중반까지는 서울대 국사학과 학생들을 상대로 10여 년간 논어 맹자 통감 시경 서경 등의 고전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가 20여 년 전 번역한 사서삼경의 집주는 대학 강의 교재로 많이 사용됐다. “논어집주의 번역본이 약 200종이 되지만 오역이 있거나 누구의 설을 따랐다는 설명이 없는 부실한 것이 적지 않아요.” 예닐곱 살 때부터 한학에 매달려 온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논어의 ‘독신호학(篤信好學·독실하게 믿으면서 배우기를 좋아함)’이라고 했다.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한국인의 병폐라고 생각합니다.” 전통 사상을 통해 사회의 도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국제화는 좋은 일이지만 ‘주체’는 있어야 한다”며 “먹고사는 일이 해결된 뒤 정신문화의 수준을 높이려면 전통 사상이 담긴 학문이 발붙일 곳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옛날에는 ‘독(讀)’이라고 하면 모두 소리를 내 읽는 ‘낭독(朗讀)을 의미했어요. 상엿소리나 김매는 소리를 녹음하는 것처럼 한학자들의 글 읽는 소리를 녹음해서 전통문화 자료로 남길 필요가 있습니다. 소리의 높낮이와 리듬이 지역에 따라 다르지요. 낭독할 줄 아는 한학자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 해야 할 일입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역사학에서도 ‘빅데이터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까. 조선 호적 자료 등 빅데이터를 활용한 연구는 10여 년 전부터 등장했지만 최근 컴퓨터 알고리즘(인공지능)을 이용해 자동으로 방대한 사료에서 의미 있는 텍스트를 추출하고 분석하는 연구가 시도돼 주목된다.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비정형 텍스트 데이터에서 유용한 정보를 찾아내는 기술), 기계학습, 세미-슈퍼바이즈드 러닝(준지도학습)….” 17일 경기 수원시 아주대에서 열린 학술대회 ‘디지털 역사학의 시작’은 용어만 들어서는 꼭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대회 같았다. 아주대 디지털역사연구센터와 세계학연구소가 주최하고 학제간융합연구팀이 주관한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컴퓨터공학, 미디어, 산업공학, 사학, 어문학 분야의 교수 및 연구원들이 공동 연구에 대해 중간발표를 했다. 연구책임자인 이상국 아주대 사학과 교수는 ‘기계학습 기반 조선 전기 권력 메커니즘 추론’에서 조선 전기 권력집단을 2부류로 나눴다. 연구팀은 1476년 간행된 족보로 당대 권력층 절반 이상의 신상이 담겨 있다고 평가되는 ‘안동 권씨 성화보(成化譜·성화 연간에 만들어진 족보)’를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분석해 1452∼1488년 관직에 있던 인물 1589명의 촌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어 이들이 실록에 기록된 사건에 대해 낸 찬성과 반대 등 의견에 따라 2개의 권력집단으로 분류했다. 문제는 1589명 중 일부(139명)만 의견을 낸 기록이 남아있고, 이들 역시 기준이 된 사건 모두(133건)가 아니라 일부에만 의견을 냈다는 것. 연구팀은 컴퓨터 알고리즘을 사용해 기록이 없는 인물들이 어느 집단에 속할지 추정했다. 자체 분석에서 이 알고리즘은 68%의 정확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존 역사학에서 권문세족-신진사대부, 훈구-사림, 동인-서인 등의 틀로 나누는 권력집단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상국 교수는 “학맥과 지연 등의 요소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면서도 “이 같은 방법론을 통해 권력의 양상을 정량적으로 추론할 수 있고, 새로운 분류 틀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연구는 기존 학계의 실증 연구 방법론과 근본적으로 달라 여러 비판이 예상된다. 당장 사료에 의견이 없는 이들을 특정 집단에 속한다고 확률적으로 추정했다는 문제가 있다. 박만규 아주대 불문과 교수와 예홍진 사이버보안학과 교수 등은 고려사와 실록 데이터에서 관직 임면, 상벌을 자동으로 인식할 수 있는 알고리즘의 개발에 대해 발표했다. 박 교수는 “방대한 텍스트에서 권력 이동과 관련된 정치 행위를 인식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언어 형태소를 분석하고 관련 단어를 사전(온톨로지)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 앞서 송양섭 고려대 교수 등은 10여 년 전부터 조선 후기 경상도 단성현의 호적 대장에 수록된 20여만 명의 빅데이터를 분석해 종래의 ‘신분제 붕괴설’이 과장됐다는 등의 결론을 얻기도 했다. 다만 컴퓨터 알고리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수작업으로 자료를 입력했고, 엑셀로 분석했다. 한국연구재단에서 6년 동안 인문한국(HK) 연구 과제를 심사했던 김태승 아주대 사학과 교수는 이날 토론에서 “보완할 것이 적지 않지만 역사학에서 체계적으로 융합 연구를 시도해 실제 결과물을 낸 첫 사례”라며 “인문학 자료의 전산화를 넘어 이제는 ‘디지털 인문학’으로의 전환이 시작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미국 필라델피아는 건국 초기 수도이자 독립전쟁을 알리는 ‘자유의 종’이 주조되고 독립선언서가 채택, 낭독된 미국의 대표적 도시였다. 직물과 의류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의 중심지로 ‘세계의 작업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신흥 산업도시에 밀리고 있었고, 이민 증가에 직면하기도 했다. 필라델피아는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한 만국 박람회를 개최해 전기를 만들려 했다.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필라델피아를 ‘국가의 영광을 투영한 도시’로 인식시키는 게 목표였지만, 오히려 박람회는 잠재된 분열이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계획됐던 여성관이 외국 전시관에 밀려나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독립선언서 낭독 행사에서 ‘여성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낭독했다. 백인으로 구성된 준비위원회는 박람회장 내에 흑인 교육자였던 성공회 주교의 동상을 건립하려던 흑인들의 요구를 거부한다. 전시물에서 흑인은 대부분 노예로 표현됐다. 박람회 뒤 필라델피아는 도시를 재정비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였지만 저소득층의 주거권은 무시됐다. 원주민사를 제외하면 유럽인의 이주로 시작되는 미국사는 기본적으로 도시의 건설에서 출발한다. 1607년 미 대륙 최초의 영국 식민지를 건설한 버지니아 컴퍼니도 요새화된 상업거점 건설을 제일 먼저 했다. 책은 영토가 넓어 지역별 차이가 큰 미국의 역사를 도시사를 통해 다양하게 보여준다. 시카고의 인종 갈등, 로스앤젤레스의 아시아 이민과 도시공간의 변화를 비롯해 미국 남부의 발전과 흑백 분리 문제(애틀랜타), 도시 재생의 역사(세인트루이스), 미국 원주민의 공간(앨커트래즈 섬) 등을 다룬다. 자연스럽게 도시 내 공간과 인종 분리 및 차별의 문제가 화두가 된다. 우리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과 마주칠 문제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미래의 한때, 사람들은 시간을 넘어 ‘이주’해 반강제로 일을 한다. 물려받은 빚을 사채업자에게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과 1000년 이상 떨어진 시대의 공장에 배치돼 남편을 다시 만날 기약이 없다. 이 시간대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대부분 공동보육원으로 보내지만 ‘나’는 공장에서 자신의 아이를 직접 키우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자신도 임신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데…. 출판사가 시간여행을 소재로 연 ‘제2회 타임리프 공모전’ 수상작 ‘어느 시대의 초상’(차태훈)이다. 가난한 이들이 시간을 떠돈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책은 1, 2회 공모전 수상작 6편을 묶었다. 1만20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어제 임우재 씨와 함께 점심을 했는데 임 씨는 월간조선 기자와 인터뷰한 사실이 없다. 우연히 월간 조선 기자를 비롯해 7명이 함께한 자리였는데, 거기서 있던 대화가 어느새 인터뷰로 둔갑돼 기사화된 것에 분노한다”고 썼다. 혜문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자기가 임우재 삼성전기 고문과 월간조선 기자와의 점심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그는 “언론 보도 방향에 대해 가볍게 점심을 같이 하면서 기자들의 조언을 듣고 인사를 나누면 어떻겠느냐고 임 고문에게 제안했다”며 “내가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에게 연락해 만들어진 자리”라고 말했다. 혜문은 비(非) 보도를 전제로 하고 마련된 자리에서 임 고문이 가볍게 하소연으로 했던 말이 마치 삼성가에 대해 뭔가 폭로를 한 것처럼 보도돼 매우 당황스럽다고 했다. 그는 “나도 여러 번 ‘오프더레코드’라고 말을 하고, 임 고문도 ‘나중에 재판 다 끝나고 이야기할 때가 있을 것’이라며 직접 여러 번 ‘비보도’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대화 내용도 보도된 것과는 분위기가 꽤 달랐다고 했다. 혜문은 “임 고문이 자살 기도를 했다는 얘기는 ‘영어 공부를 하느라고 죽을 뻔 했다’는 데서 시작된 얘기다. 중간에 수면제를 먹었다는 얘기도 하기는 했지만 그 심경을 피력한 것이지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았다’에 방점이 찍힌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임 고문이 ‘수면제를 먹었는데, 체력이 좋아서 아침에 아무렇지도 않게 깨어났다. 일어나니 말짱했다’고 했다. 농담으로 들리는 얘기였다. ‘한 번은 수면제를 먹으려는데 이부진 사장이 찾아와서 위로하고 격려해 함께 울었다’고도 했다.” 혜문은 “영어 공부가 힘들었다는 것도 ‘이부진 사장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서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공부하느라 힘들었다’는 뉘앙스였다”고 말했다. ‘아들이 어려웠다’는 것에 대해 묻자 혜문은 “진짜 어렵겠나”라고 반문했다. 혜문은 “임 고문이 이 회장 경호원 출신인데, 회장님 손자라고 생각하면 어렵게 느껴졌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정확한 뜻은 ‘(아들이) 어색했다’에 가까웠다. 그런데 임 고문이 언어를 세련되게 구사하는 편은 아니다. 아들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지 않고, 맘대로 놀러가기 어렵고, 오래 못보고, 그래서 만나면 어색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점점 좋아져서, 지금은 어색하지 않고, 내 아들 같다’고도 했다. 그런데 보도에서는 말의 뒷부분이 잘렸다.“ 혜문은 ”임 고문이 ‘나는 아내와 이혼을 원하지 않는 입장이라서, 재판 끝날 때까지 아내에게 누가 되는 말을 하고 싶지 않고, 삼성 가(家)에 대해서도 속에 있는 말을 다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고 말했다. 임 고문은 ”재판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재판 끝날 때까지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을 것이다“고 여러 번 말했다고 한다. 혜문은 또 ”임 고문이 전산실 직원이 아니라 경호원이었다는 얘기는 기자들이 다 아는 얘기라서 ’그렇다‘고 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임 고문은 아들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고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데 못됐다‘고 했다고 한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올 3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인공지능이 한국사회의 화두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인공지능과 로봇 관련 서적(255종)은 올 1월 9400여 부가 판매됐지만 5월에는 1만6600여 부가 팔렸다. 신간도 올해 40종이 나와 지난해 같은 기간(26종)의 1.5배다. 특히 인공지능 이슈가 초기와 달리 ‘2라운드’에 접어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동안 “이제 실업자 되는 거 아니냐”는 식의 충격과 불안에 휩싸여 인공지능의 정체를 궁금해했지만 지금은 인공지능을 포함해 ‘어떻게 살 것인가,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예지들은 이번 여름호에 ‘포스트 휴먼’ 시대의 철학과 윤리를 본격 조명하는 기획을 잇달아 실었다. ‘문학동네’는 특집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에서 전통적 인간관이 해체되는 가운데서 새로운 인간성의 모색 등을 다룬 글 4편을 실었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 휴먼이 되었는가’ 등을 낸 캐서린 헤일스 미국 듀크대 교수는 책에 실린 대담에서 기계와 인간의 공진화(共進化)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주변 환경과 함께 진화했는데, 최근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키는 행위가 전례 없이 활발해지며 인간의 진화와 기술의 관계도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일례로 디지털 정보 처리 기기들이 인간의 주의력을 변화시키고 있다. 장시간 특정 문제에 빠져들어 전문 지식을 만들던 데에서 문제를 개관(槪觀)하고 패턴을 발견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경란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는 포스트 휴먼과 관련된 여러 담론들을 개괄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육체와 기계를 결합시켜 한계를 극복할 것이라는 ‘트랜스 휴머니즘’과 같은 긍정적 전망과 젠더(사회적 성), 계층, 인종, 민족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교차한다는 것. ‘대산문화’도 여름호에서 특집 ‘포스트 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을 실었다. 단행본 시장에서도 인공지능 이슈가 주변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을 다루고 있지 않더라도 인류의 미래에 관한 책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인류의 내일에 관한 중대한 질문’(김영사)은 환경 인구 기후변화 불평등 등 세계적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한 책인데 4월 말 발간 이후 한 달 반 만에 출판사의 5개월 판매 예상치인 1만7000부가 나갔다. 인공지능 관련 서적 중에서도 인간 본연의 삶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일에 관해 질문한 책의 반응이 좋았다. 김대식 KAIST 교수의 ‘인간 vs 기계’(동아시아)는 4월 중순 발간돼 약 1만 부가 팔렸다. 예스24에 따르면 이세돌-알파고의 대국 전후 4개월 ‘사피엔스’ 등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관련 주요 서적(13종)의 판매량은 1만3255권에서 2만452권으로 54.3% 늘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인공지능 이슈 초기엔 기존 축적된 삶의 경험이 통째로 부인된다는 두려움과 함께 ‘인공지능이 무엇인가’ 라는 데 관심이 모였다면 이제는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지키고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로 관심이 옮겨졌다”고 말했다. 기술이 만능으로 인식되는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환경과 자연 등에 주목하는 서적의 판매도 증가하고 있다. 예스24에 따르면 이세돌-알파고의 대국 전후 4개월 동안 생태·환경 항목의 도서 판매량은 5421권에서 7100권으로 31% 늘었다. 동물 권익 옹호를 주장해 온 피터 싱어 미국 프린스턴대 생명윤리학 석좌교수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시대의 창)는 2014년 나왔는데 올 3, 4월 판매가 평소의 4배로 늘어나는 ‘역주행’을 했다. 이 책은 물질 소비에 기초한 사회의 폐해를 철학적 관점에서 지적한다. 서점들도 추세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오서현 경기 고양시 한양문고 마두점장은 “최근 인문 서적 진열대의 4분의 1을 ‘사라진 벌들의 경고’를 비롯해 자연과 문명 비판 관련 서적으로 채웠다”며 “최근 이처럼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책들의 판매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지난달 한국고전번역원에선 고전과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 특별 강연을 했다. 이명학 고전번역원장이 초청한 강사는 김진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빅데이터MBA학과 주임교수. 고전과 빅데이터는 무슨 조합일까? “한문 번역을 꼭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도 고정관념입니다.” 10일 통화에서 김 교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컴퓨터 알고리즘(인공지능)이 고전도 번역할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번역된 내용과 그 원문을 컴퓨터에 학습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한문 문법을 하나하나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원문 문장이 끊어지는 지점과 앞뒤 단어 배열 등을 인식한 뒤 올바른 번역일 확률이 높은 우리말 문장을 도출하는 방식이다. ‘구글 번역기’와 같은 방식이라고 한다. 솔깃한 얘기다. 2억4300만 자에 이르는 승정원일기는 1994년 번역에 착수했지만 지금까지 번역률이 20%가 안 된다. 평상 시 40여 명이 번역하고 있지만 지금 속도라면 완역에 45년은 더 걸린다. 문집 1259종을 정리한 한국문집총간(500책) 번역도 그만큼 걸린다. 대부분의 현대인이 읽지 못하는 우리 유산을 빨리 번역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한문을 수십 년 익힌 이도 때로 막히는 고전 번역을 인공지능이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구글 번역기를 써 본 이라면 우리말 자동 번역에 아직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알 것이다. “그건 구글 번역기에 입력된 외국어의 우리말 번역 자료가 많지 않아서 그래요. 빅데이터 활용도는 데이터의 양과 질에 따라 달라집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구글 번역기는 유엔이 영어 프랑스어 등 6개 국어로 상호 번역해놓은 문서를 기초 자료로 활용했는데 여기에 한국어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후 데이터가 집적될수록 정확도가 높아져 6개 언어끼리의 번역 오류는 현재 약 6% 수준이라고 한다. 고전을 우리말로 번역해놓은 디지털 자료가 적지 않으니, 이를 활용하면 번역 정확도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혹시 흘려 쓴 글씨체인 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탈초(脫草)도 컴퓨터 알고리즘이 할 수 있을까. 많은 고전 자료들이 초서로 남아 있는데 지금은 초서를 제대로 읽는 이가 국내에 100명이 안 된다. 김 교수는 “요즘 이미지 인식 기술은 사람과 비슷한 수준”이라며 이 역시 가능하다고 봤다. 이 원장은 긍정적이면서도 신중한 의견이었다. “전례(典例)와 고사(故事), 즉 전고 인용 부분의 번역을 비롯해 난점이 있을 겁니다. 어쨌든 초벌 번역이 되면 사람의 번역도 수월해집니다.” 이 원장은 승정원일기 등 비슷한 문장의 반복이 많은 사서(史書)보다 개인 문집의 번역 난도가 더 높을 것이라고 봤다. 옛 사람들은 전고를 인용할 때 ‘누가 어떻게 했다’는 식으로 풀어서 쓰지 않고, 그냥 한두 글자로 압축해 썼다. 중견 번역자도 글자의 뜻 자체를 풀어야 하는지, 지칭하는 전고가 따로 있는 것인지 구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처럼 실제 활용 가능한 고전 번역 프로그램의 개발은 앞으로의 과제다. 하지만 고전과 첨단을 접목하려는 발상 자체가 반갑다. 조종엽 문화부 기자 jjj@donga.com}

일본 야마가타 현 쓰루오카 시의 한 전자제품 부품 공장에서 파견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던 청년 4명은 같은 날 계약 해지 통보를 받는다. 일개 부품처럼 쓰이다 버려졌다고 느낀 이들은 도쿄까지 600km의 도보 여행을 시작하고 대중매체와 블로그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에 항의하는 정치적 운동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각종 정치세력과 관청이 접근해 오면서 의미가 퇴색할 위기를 맞는다. 또 리더 격인 슈고에게 숨겨진 엄청난 비밀이 드러난다. 빛바랬지만 꿈을 잃지 않는 소설 속 청춘의 모습이 한국과도 다르지 않아 공감이 간다. 1만30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이 넓은 우주에 우리만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라고 했다. 외계에 지적 생명체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을 감지할 수 있을까?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SETI) 계획의 창시자인 프랭크 드레이크는 1961년 ‘드레이크 방정식’을 제안했다. 항성의 형성 속도, 행성이 있는 항성의 비율, 지적 생명체가 나타나는 행성의 비율 등 변수를 곱하면 은하계에서 우리가 탐지할 수 있는 외계 문명의 수가 나온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값이 밝혀진 변수도 있지만 ‘발전된 기술문명의 수명’ 등 애매한 변수가 많아 정답은 없다. 미국 뉴욕의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드레이크를 비롯한 과학자들을 인터뷰해 외계 지적 생명체와 태양계 밖 행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역사를 생생하게 담았다. 사실 SETI 계획은 자금 부족으로 힘을 잃었다. 1993년 이후 정부 지원이 끊겼고, 민간 자금으로 샌프란시스코 북쪽 사막의 계곡에 접시 안테나를 설치하는 앨런 망원경 군(ATA) 건설을 일부 마무리했지만 역시 자금 부족으로 가동이 거의 중단됐다.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놓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탓이다. 그 대신 ‘태양계 외행성 탐사’가 활발하다. 지적 생명체의 신호를 포착하는 대신 생명과 문명이 생길 수 있는 태양계 밖의 적당한 행성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항성은 주위를 도는 행성이 있으면 마치 체구가 다른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도는 것처럼 그 자신도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가 관측하는 빛의 파장도 미세하게 요동친다. 요동의 주기로 행성의 공전주기를 알 수 있고 요동의 강도로 행성의 질량을 추정할 수 있다. 천문학자들은 ‘시선속도 분광학’이라는 이 기법으로 지구처럼 뜨겁지도 춥지도 않은 궤도에 있는 행성을 포함해 수백 개의 행성을 발견했다. 어쨌거나 지구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다. 수억 년 뒤 태양이 지금보다 10% 밝아지면 지구는 다세포생물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달궈진다. 바짝 마른 지표면 아래서 미생물이 수십억 년을 더 버텨낼 수도 있지만 50억 년 뒤에는 태양이 적색 거성으로 변해 지구를 삼켜버릴 것이다. 지구의 수명을 늘리고, 외계 문명과의 소통 가능성을 높이려는 천문학자들의 상상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거대한 규모다. 캘리포니아대 샌타크루즈캠퍼스의 그레그 래플린 교수는 카이퍼대(해왕성 궤도 바깥의, 소천체가 원반 모양으로 분포하는 곳)에 있는 대형 혜성이나 소행성이 지구 옆을 스쳐 지나가도록 만들어 차를 견인하듯 지구의 궤도를 수억 년에 걸쳐 화성 정도로 넓히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드레이크는 태양의 중력 렌즈 효과를 활용해 태양에서 1500억km 떨어진 곳에서 우주의 고해상도 이미지를 얻어내자고 말한다. 과학자의 말이 아니라면 가벼운 농담으로 들릴 정도다. 지구의 생명체는 50억 년 뒤 고독 속에 종말을 맞을까, 아니면 그동안 낯선 이들과 조우하거나 외계로 나갈까. 우주의 광막함을 상상하면 무엇인가 그리워진다. 수만 광년 떨어진 행성의 거주자가 수만 년 전 외계인을 그리워하면서 쏘아 보낸 신호가 지금 우리 곁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남학생은 여학생의 손을 잡고 더 깊은 수수밭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눈앞을 가로막는 수숫대 때문인지, 진한 풀 향 때문인지, 맞잡은 여학생의 손 때문인지 남학생은 현기증이 났다. … 서툴게 포갠 입술을 떼었을 때 남학생은 발바닥 근처에서 시작되어 몸을 통과해온 오래된 숨이 비로소 몸 밖으로 뱉어졌다.” 소설가 김형경이 황순원(1915∼2000) 소설 ‘소나기’의 이후 이야기를 쓴 ‘농담’ 중 일부다. 주인공 소년은 죽은 소녀와 함께 비를 피했던 수수밭에서 정신을 잃고, 고등학생이 된 뒤 다시 그 수수밭에서 한 여학생과 키스를 한다.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지난해 시작된 ‘소나기 이어쓰기’의 결과물이 책 ‘소년, 소녀를 만나다’(문학과 지성사·사진)로 출간됐다. 지난해 계간지 ‘대산문화’ 여름호에 실린 전상국 박덕규 서하진 이혜경 구병모의 소설에 김형경 노희준 조수경 손보미의 작품 4편을 보태 모두 9편이다. 소설을 헌정한 이들은 황순원이 23년간 교수로 재직한 경희대 출신 작가와 제자, 후배들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