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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창간호인 1920년 4월 1일자 3면에 창간 축하 만평이 실렸다. 동아일보를 상징하는 아기가 손을 뻗어 벽에 걸린 ‘단군유지(檀君遺趾)’를 잡으려는 모습이다. 단군의 유훈을 언론에 담아 조선 민중에게 알린다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 열흘 뒤인 4월 11일에는 사고(社告)를 내고 단군 영정을 독자들에게 현상 공모했다. “우리는 앙모(仰慕)와 존숭(尊崇)의 충심으로 단군 존상(尊像)을 구하여 독자와 함께 배(拜)하려고 현상(懸賞)으로 존상을 모집하오니 강호형제의 많은 응모 바라나이다.” 창간 후 첫 사업으로 단군 영정을 공모한 것은 일제 식민 당국이 강압적으로 흔들어 댄 민족의 구심점을 바로잡으려는 취지였다. 동아일보는 창간 때부터 단군을 부각한 것을 비롯해 한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말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일제에 맞서 민족혼과 정체성을 고취하는 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보도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는 우회적 항일투쟁 수단이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특히 단군의 유훈을 지키는 데 공을 들였다. 조선총독부가 1926년 2월 산하 기관지에 단군을 비하하는 글을 싣자 동아일보는 2월 11, 12일 이틀에 걸쳐 사설을 통해 “이 논문의 이면에는 단군을 조선의 역사에서 제거하려는 일제의 조선정신말살 음모가 숨어 있다”고 통박했다. 충무공 이순신 유적보존운동을 주도한 것도 민족혼 고취의 하나였다. 빚 때문에 충무공 묘소의 위토(位土·묘소 관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된 토지)가 경매에 부쳐질 위기에 처하자 동아일보는 1931년 5월 13일자에 자세한 경위를 보도했다. 이광수는 1931년 5월 21일∼6월 10일 현지 사정을 기행문 형식으로 실었고, 6월 26일부터는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동아일보는 성금 모금도 주도했다. 1932년 6월 5일 새로 건립된 현충사에 충무공 영정을 봉안하던 날, 3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한민족이 일제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다. 현충사는 현재 홈페이지의 주요 연혁에도 ‘1932년 6월 5일 현충사 중건, 영정봉안-이충무공 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성금 모금’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는 또 김정호 을지문덕 권율 등 한국사의 큰 인물들을 조명함으로써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다. 동아일보는 민족혼을 고양하는 크고 작은 행사를 가리지 않고 지면을 통해 확산시켰다. 1920년 7월 일본에서 공부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한반도 전역을 돌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강연회를 시작하자 동아일보는 이 활동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강연단이 7월 18일 서울에 도착했을 때 단성사에는 3000여 명이 운집했다. 하지만 경찰은 ‘불온한 언사로 치안을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대회를 1시간 만에 중단시켰고, 강연단은 강제 해산됐다. 이를 비난한 사설을 실은 7월 22일자 동아일보는 발매금지됐다. 동아일보는 소설을 통해서도 민족혼을 고취했다. 1928년부터 1936년까지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지냈던 현진건은 1938년 7월 20일부터 역사소설 ‘무영탑’을 연재했다. 신라시대 불국사 석가탑 건립을 중심으로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것이지만 그 의미는 남녀의 사랑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근대소설사연구’에서 “‘무영탑’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다름 아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다.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던 현진건이었던 만큼 그의 내면의식에는 이 민족주의적 의식이 잠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동아일보가 1921년 8월 21일부터 연재한 기행문 ‘백두산행’은 민족의 웅혼이 깃든 백두산을 부각함으로써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드높였으며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통해서도 민족혼을 고취했다. 1925년 10월 21일자에선 무궁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찬양해 독립의식을 북돋웠다. “무궁화는…, 아침에 이슬을 먹으며 피었다가 저녁에 죽어 버리면 다른 꽃송이가 또 피고 또 죽고 또 피고 하여 끊임없이 뒤를 이어 자꾸 무성하는 것이, 찰나를 자랑하였다가 바람에 휘날리는 무사도를 자랑하는 ‘사쿠라’보다도, 붉은색만 자랑하는 영국의 장미보다도, 덩어리만 미미하게 커다란 중국의 함박꽃보다 끈기 있고 꾸준하고 기개 있고….” 1930년 1월 1일 신년호부터는 ‘동아일보’ 제호 바탕에 무궁화로 수놓은 한반도 지도를 새겨 넣었다. 이런 동아일보를 바라보는 총독부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이연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수가 쓴 ‘조선언론통제사’에 따르면 총독부는 제호의 배경인 한반도와 무궁화 도안을 빼도록 지속적으로 강요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극심한 언론 탄압으로 정상적인 신문 발행이 불가능해지면서 한반도와 무궁화 그림은 1938년 2월 10일자부터 제호에서 빠졌다.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파일럿 안창남 초청 ‘독립염원 비행’ ▼본사 주최 행사에 5만 운집… 청년들에 희망과 용기 심어“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 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1922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 주최로 서울 상공을 선회 비행한 21세의 청년 파일럿 안창남(1901∼1930). 행사 한 달 뒤 그는 당시의 심경을 회상했다. 고국 하늘을 비행한다는 자랑스러움보다 수난당하는 동포에 대한 안타까움이 청년 영웅의 마음속에 더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안창남 고국비행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6800원을 지출했지만 수입은 600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망설이지 않고 6200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일제의 압제로 열패감에 빠져 있던 조선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줄 거족적 행사로 여겼기 때문이다. 비행 한 달 전 동아일보 사설도 “안창남군의 1회 비행이 직접으로 오인(우리)의 모든 생활을 개혁 발전한다는 것은 아니나 간접으로 자중자신할 기회를 작(作)할 것은 확실한 사실이라 하노니(…) 조선인도 노력하면 이와 같이 될 것이라 하는 것은 실지적 교훈으로 오인의 두뇌에 인각(印刻)할 것 아닌가”라고 행사의 취지를 밝혔다. 안창남은 1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비행학교에 입학해 3개월 만에 비행사 면허를 딴 준재였다. 2년 뒤에는 민간항공대회에서 2등을 차지해 무시험으로 1등 비행사 면허를 따면서 일본을 놀라게 했다. 서울 상공 비행을 준비하기 위해 동아일보는 10월 29일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후원회’를 조직했다. 12월 5일 환영 인파에 파묻혀 경성역에 도착한 안창남은 10일 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했다. 그의 비행을 보려는 시민들이 서울의 대로 곳곳을 가득 메웠다. 하늘에서 그는 안창남, 동아일보,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후원회 명의의 성명서를 흩뿌렸다. “이 문명의 진운(進運), 이기(利器)의 발달에 선각하는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망합니다….” 이후 안창남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문맹타파 ‘브나로드’ 운동 불붙여 ▼규모 커지자 총독부 중지령… 농촌계몽 거센 열기 못 막아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농민 계몽운동을 가리키는 ‘브나로드(민중 속으로)’운동은 한국에서 야학운동, 농촌계몽운동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브나로드운동에도 앞장섰다. 1928년 3월 16일 동아일보는 문맹타파운동 ‘글 장님 없애기’를 공표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90%가 문맹이었는데, 이는 민족 발전에 적지 않은 장애라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간 8주년 기념일을 기해 본사와 전국의 지국을 총동원해 포스터를 내걸고 안재홍, 방정환, 최현배, 최남선 등 명사 30여 명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 계획을 안내했다. 조선 총독부는 불과 행사 사흘 전에 문맹타파운동 중지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 운동의 규모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민족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에 놀랐기 때문이다. 문맹타파운동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도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일제는 동아일보가 주도했던 문맹타파운동이 1930년대 전반 전국을 휩쓴 브나로드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동아일보는 1931년 7월 16일 ‘제1회 학생 하기(夏期) 브나로드운동-남녀학생 총동원, 휴가는 봉사적으로’라는 기사를 통해 브나로드운동을 재점화했다. 운동의 핵심은 문맹퇴치와 한글보급이었다. 첫해에는 62일 동안 학생계몽대 423명이 전국 127곳을 돌며 한글 강습과 학술 강연을 펼쳤다. 동아일보는 ‘한글 공부’ ‘한글맞춤법통일안’ ‘신철자편람’ 등의 교재를 제공했다. 동아일보가 주도한 계몽운동의 열기는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당대 문학작품에도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심훈의 ‘상록수’(1935년) 이광수의 ‘흙’(1932년) 등 두 작품은 모두 동아일보 지면에 연재됐다. 심훈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장편공모에 당선된 그의 대표작 ‘상록수’에서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젊은 남녀의 애정을 그려냈다. 이광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연재했던 ‘흙’을 통해 ‘농민의 속으로 가자’는 계몽운동의 기치를 설파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그 소중함을 잊기 쉬운 우리 동요의 아름다움을 되돌아보는 콘서트가 열린다. 한국동요문화협회가 17일 오후 7시 반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2010 한국 명품동요 콘서트-우리 가족 만세’. 1924년 윤극영이 지은 ‘반달’ 이후 86년에 이르는 우리 동요사의 명곡들을 무대에 올리는 자리다. 콘서트 제목처럼 가족의 소중함을 돌아보는 ‘내 동생’(조운파 작사·최종혁 작곡), ‘아빠의 얼굴’(하중희 작사·이수인 작곡), ‘엄마야 누나야’(소월 시·김광수 작곡) 등 25곡을 합창단 ‘노래마을 아이들’, ‘코콜로 중창단’ 등이 노래한다. 공연 후반부에는 출산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뮤지컬 ‘많을수록 좋아요’(이복자 김원겸 작사·김정철 조원경 작곡)를 작은평화예술단이 소개한다. 소프라노 강혜정, 테너 류정필 씨가 노래하는 국내외 가곡 무대도 마련했다. 48개월 이상 입장 가능. 2만 원. 010-5476-0746, 02-455-1924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한국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특징요? 빠르다는 겁니다. 빨리 배우고, 정보를 빨리 습득합니다.” 한국의 임동혁 손열음, 중국의 윤디리, 이스라엘의 예핌 브론프만…. 이 피아니스트들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노 명교수 아리 바르디(71·독일 하노버음대·사진) 제자라는 것이다. 6∼12일 한국피아노학회와 서울대 피아노과 주최로 마스터클래스를 가진 바르디 교수를 13일 서울 중구 의주로의 숙소에서 만났다. 바르디 교수는 제1회 동아국제음악콩쿠르 우승자인 아비람 라이케르트(서울대 피아노과 교수)를 비롯해 국제 음악콩쿠르협회 공인 콩쿠르 우승자만 30명 이상을 키워냈다.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유명 콩쿠르 심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그러나 ‘콩쿠르 정복 방법’을 묻자 그는 “콩쿠르를 잊는 것이 비결”이라고 말했다. “평소 연습도 콩쿠르에 맞추지 말고, 아름다운 연주를 내면에서 이끌어내려 노력하면 어느새 목표에 다가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어떤 교수법이 그를 명교수로 만들었을까. 그는 “교수법의 비밀은 없다. 좋은 학생을 받아들이는 감식안이 나의 비밀”이라고 설명했다. “손가락 기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제를 주고 즉흥 연주를 시키거나 낯선 악보를 주고 초견(初見)연주를 시키면 귀가 좋은 학생인지 알 수 있죠.” 그는 브론프만을 제자로 맞던 순간을 회상했다. “손가락 모양이며 앉는 자세 등 제대로 된 것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자기의 연주를 정밀하게 듣는 귀가 있었죠. 결국 대성하더군요.” 임동혁에 대해서는 “10대 꼬마 때 만났을 때부터 ‘머리 위의 후광’ 같은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말했다. 손열음은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고 섬세한 연주자인 데다 ‘한국에 관한 책과 영화 DVD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나의 한국문화 스승’이라고 설명하며 웃음 지었다. 그는 “일본만 해도 러시아 등지에서 교수를 데려와 한 세대 이상 체류시키며 피아니스트를 육성했다. 최근 5, 6년 사이 한국 피아노계가 세계무대에서 이룬 성취는 한국인 교수들이 이뤄낸 성과라서 더욱 놀라운 것”이라고 말했다. 13일 이스라엘로 돌아간 그는 내년 4월 동아일보와 서울시가 주최하는 ‘LG와 함께하는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심사위원으로 다시 서울을 찾는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9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린 라벨의 단막 오페라 ‘어린이와 마법’은 국립오페라단이 ‘내 생애 첫 오페라 시리즈’ 첫 무대로 제작한 작품이다. 시리즈 제목처럼 어린이들이 어렵지 않게 감상할 무대를 만든다는 게 기획 포인트다. 오페라는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공부하다 따분해진 어린이가 가구와 동물들을 못살게 굴다 보복을 당한다는 줄거리다. 극 중반 배경이 실내에서 야외로 바뀌면서 어린이 관객들의 눈이 커졌다. 실내 무대가 오른쪽으로 물러나고 멀리 있던 나무들이 회전하면서 전면에 등장하자 관객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고양이는 물론 시계와 찻주전자, 개구리나 잠자리를 형상화한 국립발레단의 무용이 정교했고 잦은 변화로 흥미를 주었다. 연출과 안무를 맡은 마거릿 돈론 씨는 주요 배역들이 무대에 이중으로 등장하도록 했다. 무대 전면에서는 무용수들이 해당 배역을 춤으로 표현하고, 무대 가장자리에서는 성악가들이 같은 배역을 노래로 표현하면서 색다른 효과를 낳았다. 타이틀롤인 ‘어린이’만 유독 소프라노 정시영 씨와 같은 역을 맡은 국립발레단 단원이 같은 옷을 입고 무대 안쪽에 등장했는데 두 사람의 인상이 흡사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반주는 정민 씨가 지휘하는 MFO 오케스트라가 맡아 한 편의 교향시를 연상케 하는 라벨의 유기적 관현악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올해 26세의 지휘자 정 씨는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의 3남이다. 오케스트라 피트에 관현악단이 다 들어가지 않아 팀파니 등 타악기와 하프 같은 덩치 큰 악기들을 무대 양쪽에 배치했다. 이 악기들을 연주하는 모습이 어린이 관객들의 주의를 끌어 좋은 효과를 낳았다. 성악진의 인상이 크게 두드러지는 작품은 아니지만 벽시계의 둔중한 인상이나 나이팅게일의 빠른 고음을 묘사하는 가수들의 기량도 불만을 남기지 않았다. 사족.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두 거장이 라벨과 드뷔시다. 드뷔시의 피아노 모음곡 ‘어린이 코너’는 첫 곡에서 피아노 연습에 지친 어린이가 공상에 빠져드는 모습을 그렸다. 두 사람이 ‘어린이’를 소재로 작곡한 작품들이 모두 ‘권태’의 묘사로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꿈처럼 모호한 것, 덧없이 부유하는 것, 때론 권태에서 출발하는 공상이 인상주의 예술작품의 주요 테마다. 이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공부에 지친 한국 어린이들에게 이 작품은 일상을 탈출하는 유쾌한 체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i: 8100∼3만6000원. 18일까지 오후 7시 반(17일 오후3시, 7시 반)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86-5282}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12일 월드컵 우승컵을 놓고 맞붙는 결승전 킥오프 직전 국가 연주에서 축구팬들은 흥미로운 광경을 보게 된다. 네덜란드 국가에 ‘나는 평생 스페인 왕을 공경해왔다’는 대목이 있는데 네덜란드 응원단이 이를 따라 부르기 때문이다. 국가에 다른 나라의 이름이 나오는 게 드물기도 하지만 공교롭게도 결승전에서 맞붙는 상대가 스페인이어서 눈길을 끈다. 네덜란드 국가는 얼핏 스페인에 우호적인 내용인 듯하지만 이 노래에는 두 나라의 순탄치 않은 역사가 드러난다. 네덜란드는 16세기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홀란트와 위트레흐트 지역의 총독이었던 오라녀 공 빌렘은 처음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이후 스페인의 폭정에 반대해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주도했다. 네덜란드는 1588년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네덜란드 국가의 가사는 빌렘이 독립군 앞에서 했다고 전해지는 연설에서 따온 것이다. 1절에서는 ‘오라녀 공으로서 나는 자유롭고 용맹하며/평생 스페인 왕을 공경해왔다’고 노래하지만 6절에서는 ‘주여, 나를 용맹한 당신의 종으로 써주시고/사무치는 폭정을 물리치도록 해주시옵소서’라며 반(反)스페인 감정을 드러낸다. 이 노래는 독립전쟁 당시부터 애창됐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로 알려져 있다. 1932년에 공식 국가로 제정됐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2003년 5월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11만 관객을 동원한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가 돌아온다. 8월 12∼14일 오후 8시 15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공연하는 ‘2010 투란도트’. 7년 전보다 50m 넓은 폭 200m의 초대형 무대에 꾸미는 야외 오페라다. 2004년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공연한 비제 ‘카르멘’ 이후 6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야외오페라로서도 눈길을 끈다.○ 연출자 “화려한 시각효과 선뵐 것” 2003년의 야외 투란도트는 영화감독 장이머우가 1998년 베이징 쯔진청(紫禁城)에서 공연한 무대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재연해 눈길을 모았다. 이번 공연은 김홍승 연출(전 대구오페라하우스 관장)을 비롯한 국내 제작진이 무대 제작과 연출을 맡았다. 2003년 투란도트의 아이콘이 장이머우였다면 올해의 아이콘은 지휘를 맡은 로린 마젤 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다. 2008년 뉴욕 필 평양 공연을 지휘했던 그는 테너 호세 카레라스와 소프라노 에바 마턴이 주연한 CBS사의 ‘투란도트’ 전곡음반으로 탁월한 투란도트 해석을 인정받고 있다. 진교영 예술총감독은 “2003년엔 장이머우 감독이 웅대한 스케일로 감동을 안겼지만 당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업그레이드된 감동을 주겠다”고 말했다. 무대의 하이라이트는 높이 15m의 성벽. 2003년엔 무대 자체의 움직임이 없었으나 올해는 성벽이 열리고 닫히면서 극의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설명이다. 김홍승 연출은 “장이머우 판 투란도트가 경극(京劇)의 상징성에 의존해 중국 색채를 너무 짙게 드러낸 점을 넘어서겠다”고 말했다. 칼라프 왕자의 여종 류가 숨질 때는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영상으로 연출하고 투란도트 공주가 사랑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는 다른 무대에서 볼 수 없던 화려한 시각효과를 선보이겠다고 그는 밝혔다. 조명은 뮤지컬 ‘대장금’ ‘올슉업’ 등에 참여한 민경수 조명감독이 맡는다.○ 韓-日-브라질-우크라 성악가 캐스팅 2003년 5월 나흘간 공연된 투란도트는 제작비 60여억 원에 총수입 70억 원으로 순수익 10억 원에 가까운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같은해 9월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공연된 베르디 ‘아이다’는 제작비 80억 원에 총수입 40억 원에 그쳐 흥행에 실패했다. 이듬해 5월 같은 장소에서 공연된 비제 ‘카르멘’도 성공하지 못해 국내 야외 오페라 붐은 가라앉았다. 돌아온 ‘투란도트’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진교영 총감독은 “투란도트에는 관객을 유인하는 매력포인트가 많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칼라프 왕자의 아리아 ‘잠들지 말라’는 영국 TV쇼 ‘브리튼스 갓 탤런트’를 통해 테너 폴 포츠라는 스타를 탄생시킬 정도로 널리 알려졌고 쯔진청을 형상화한 무대도 ‘아이다’의 피라미드나 ‘카르멘’의 투우장보다 상상력을 펼치기 좋은 공간이라는 것. 그는 “2003년 공연을 본 관객들이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 등에 남긴 ‘감동 관람기’도 관객 흡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공연 티켓 가격은 5만∼40만 원으로 책정돼 “야외공연으로서는 지나치게 비싼 좌석이 많다”는 논란이 재연될 것으로 보인다. 2003년 투란도트 공연 때는 “비싼 좌석의 전망이 크게 낫지 않았다”는 입소문이 돌아 이후 ‘아이다’ ‘카르멘’의 고가석 판매에 장애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 히로인 투란도트 역은 이탈리아 푸치니 페스티벌에서 투란도트로 출연한 우크라이나 소프라노 안나 샤파진스카야, 칼라프 왕자 역은 브라질의 대표적 푸치니 테너인 리처드 바워, 류 역은 유미숙 명지대 교수 등이 더블 캐스팅으로 맡는다. 류 역으로 출연하는 일본 소프라노 오가와 류의 이력이 눈길을 끈다. 1999년 미스유니버스대회에 일본 대표로 참가했고 TV 연예 활동도 펼쳤으며 이탈리아 베로나 야외오페라에 류 역으로 출연했다. 1577-5470, 02-373-5570, www.turandot.co.kr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서울 예술의전당 김장실 사장(54·사진)은 지난해 12월 18일 취임 직후 “1000여 석의 중대형 극장과 600여 석의 체임버홀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김 사장은 최근 이 ‘공약’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달 9일 IBK기업은행으로부터 45억 원을 지원받아 내년까지 음악당 내 ‘IBK 체임버홀’을 만들기로 했고 CJ그룹으로부터 150억 원을 받아 현재 600석 규모인 토월극장을 2012년까지 1030석의 ‘CJ시어터’로 만드는 협약을 지난달 24일 체결했다. 취임 6개월 만에 ‘하드웨어 확충 개선’ 목표에 다가선 그를 5일 서울 예술의전당 사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기업으로서도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 거액을 내놓기 쉽지 않았을 텐데, 기대보다 빨리 협력을 이끌어냈습니다. “국가 대표 공연기관인 서울 예술의전당이 하드웨어 개선에 손을 못 대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실내악 공연 수요가 어마어마한데 적당한 공간이 없었어요. 취임 직후 ‘기업 순방’에 들어갔죠. 공연장으로서는 물론 기업도 사회 공헌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윈윈’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사장은 5월에는 신세계와 고객서비스 개선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신세계는 예술의전당의 고객만족도를 실사 평가했고 이달부터 예술의전당 직원 서비스 교육도 실시한다. 미술관 관람시간을 확대하는 것도 서비스 향상과 관람객 확대를 노린 것이다. 8월부터 화, 목요일 오후 10시까지 직장인 대상 기획전시 등을 연다. ―온라인 수입원도 개발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KT와 IPTV 방송을 위한 업무협약을 7월에 체결합니다. 음악회와 전시, 각종 강좌를 콘텐츠로 만들어 방송하죠.” 하드웨어 개선 노력에서 만족할 성과를 이룬 그가 지금 가장 힘을 쏟는 부분은 공연 전시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해 민간기업의 이름을 건 ‘아트펀드’를 조성하는 것. 수백억 원의 펀드로 명품 기획공연을 만들고 한국 예술가의 해외진출에도 역량을 쏟겠다는 구상이다. 한 금융기업과 구체적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그는 귀띔했다. ―취임 당시 동북아 공연기관 사이 협력을 강화한다는 구상도 밝혔는데…. “3월 중국 베이징의 국가대극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8월에는 일본 도쿄 신국립극장과 협약을 맺어 3국 대표공연장의 협력체제를 갖춥니다. 한국 최고 수준의 예술가를 해외에 소개하고 세계 최고의 예술가들을 한국 무대에 소개하는 데 3국 협력체제가 ‘아트펀드’와 함께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한류가 대중문화 중심이었다면 앞으로의 신(新)한류는 공연 전시를 비롯한 고급문화가 중요한 몫을 담당할 것”이라며 “앞으로 예술의 전당이 한류의 중심에 서겠다”고 자신했다. 직접 노래를 부르며 한국 대중가요사 강사로도 이름난 그는 ‘한국대중가요의 정치사회학’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영남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에서 ‘군사체제와 민주화’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문화관광부 예술국장 종무실장, 문화체육부 제1차관 등을 거쳤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화려한 인간 음성의 향연이었다. 베세토오페라단과 체코 프라하 스테트니 오페라극장이 공동 제작한 비제 ‘카르멘’이 3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주조연급 출연자부터 합창에 이르기까지, 한 군데도 빠지지 않는 가창이 귀에 뿌듯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타이틀 롤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갈리아 이브라기모바는 풍성한 성량과 선명한 음색, 적절한 즉흥성을 부가한 요령 있는 음성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유혹에 넘어가는 군인 돈 호세 역을 맡은 멕시코 테너 라파엘 알바레스는 다양한 표정의 음색을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서정적인 음색으로 공감을 이끌어냈다. 돈 호세의 고향 애인 미카엘라로 출연한 소프라노 김인혜 씨에게 쏟아진 갈채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3막에서 신께 보내는 절절한 간구가 객석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바리톤 고성현 씨의 칼칼한 음색에는 호방한 투우사 에스카미요 역보다 베르디의 ‘오셀로’의 이아고 같은 악역이 적역이지만 비교적 단구(短軀)임을 잊을 정도로 무대 위에서 그의 존재감은 탁월했다. 크지 않은 배역이지만 베이스 함석헌 씨의 주니가 역은 압도적이었다. 거대한 성량과 가사의 음절마다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음성 연기가 두드러졌다. 프라스키타 역의 클라라 주가노바도 투명한 음색으로 성악 앙상블의 최고음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나라오페라합창단과 송파 소년소녀합창단의 흠잡을 데 없는 노래도 큰 갈채를 받을 만했다. 체코 팀이 맡은 연출에는 두 가지 의문이 남았다. 1막에서 병사들을 따라다니면서 병정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실제 병사들보다도 더 ‘각을 잡고’ 줄맞춰 선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4막에서 카르멘이 돈 호세의 칼에 찔려 쓰러진 후 순백의 옷을 입은 다른 여인이 계단을 오르도록 한 점은 카르멘의 죽음을 상징한 것인지, 다른 무엇을 뜻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카르멘은 흰 옷으로 상징할 만한 ‘고결한 희생자’가 아니라 ‘팜 파탈’의 대명사격인 캐릭터다. 첫날 공연에서는 자막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무대에 등장하지도 않은 사람의 대사가 자막에 나오거나, 무대 위에서는 계속 언쟁이 벌어지는데 자막에 1분 가까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경우도 빈번했다. 음악과 무대를 완벽하게 꾸리고도 자막을 소홀히 해 실망을 안기는 한국 오페라계의 고질병이 남은 공연에서 해소되기 바란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i: 3만∼20만 원. 6, 7일 오후 7시 반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1544-1555, 02-3476-6224∼5}

《동아일보가 올해 창간 90주년을 맞았다. 동아일보 90년사에는 한민족이 겪은 격동의 근현대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1919년 3·1운동의 독립만세 함성은 1년 뒤 탄생한 동아일보에 그대로 울려 퍼졌다. 일제강점기 한민족을 이끌었던 선각자들의 민족혼과 자긍심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좌우 대립의 혼란을 비집고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과정, 이승만과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지킨 국민들의 열망도 동아일보의 지면을 뜨겁게 했다. 1963년 출범한 동아방송은 17년간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한국 방송 저널리즘의 신기원을 이룩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90년사에 기록된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사를 들여다본다.》 동아일보는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전 세계에 독립 열망을 선포한 지 1년 뒤에 그 정신을 이어받아 탄생했다. 전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의 함성에 놀란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조선어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했다. 이에 민족주의 중추세력은 민족의 독립 역량을 제고하고자 동아일보 창간사업에 모여들었고 동아일보 지면에 3·1운동의 정신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 정신은 설산 장덕수가 쓴 창간사 ‘주지를 선명하노라’에 나타난다. 창간사는 “한일합방 후 십년에 조선민중은 한바탕 악몽을 꾼 듯하다”며 “조선민중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앞길을 이끌어줄 친구를 열망하게 되었다. 이에 동아일보가 태어났으니 그것이 어찌 우연이리요”라고 밝혀 3·1운동으로 외친 독립 열망이 동아일보라는 결과로 태어났음을 명백히 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면서 국내 민족 세력은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핵심은 (1년 뒤 동아일보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가 이끄는 중앙학교 인사들이었다. 12월, 서울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교장 김성수, 학감을 지낸 고하 송진우, 훗날 고려대 초대 총장이 되는 현상윤이 회동했다. 세 사람은 육당 최남선을 통해 최린 등 천도교 측 인사들과 접촉하도록 하고 남강 이승훈에게는 김성수의 자금을 주어 평안도 및 서울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합동을 이끌어내도록 했다. 김성수는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귀국한 이듬해인 1915년 24세의 나이로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1917년에는 경성직뉴(織紐)를 인수해 1919년 경방(경성방직)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지 않았고 2차로 체포된 현상윤 송진우 등 48인에서도 빠졌다. 거사 직전 전북 부안군 줄포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은 3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3·1운동 주체세력들은 이 운동을 민족 독립까지 지속해야 할 꾸준한 운동으로 보았으며 이 때문에 운동 지속세력의 보호에 큰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2, 4, 6대 국회의원 유홍과 최형련 전 중앙고 교장도 훗날 “송진우 등이 운동 지속을 위해 김성수를 줄포로 내려가도록 강권했다”고 증언했다.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 연구’를 집필한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역사학)는 “김성수를 보호한 전략에 따라 3·1운동의 정신과 목표는 이후 김성수의 언론, 교육, 민족실업 사업으로 역량이 축적된다”고 설명했다. 김성수는 3·1운동 이후 상경해 투옥된 인사들의 옥바라지에 힘쓰는 한편 1920년 당시 경성방직 국민주 공모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도 총독부의 민간신문 허가 방침을 접한 뒤 한민족의 목소리를 낼 기회로 여기고 발행 서류를 알아보았다. 마침 여러 진영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도 민족 신문의 중심이 될 사람으로 김성수를 꼽고 그와 접촉하고 나섰다. ‘평양매일신문’의 한글판 주간을 지냈던 장덕준은 ‘매일신문’의 편집장을 지내다 사표를 낸 이상협,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냈던 진학문과 뜻을 모은 뒤 김성수를 찾아 민족 신문 창간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최두선도 “애국진영, 민족진영에서 (민간신문을) 하나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신문계의 원로 유근도 합류했다. 마침내 1919년 10월 9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신문발행 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10여 건의 신문허가 신청이 제출됐지만 동아일보 등 3개지만 1920년 1월 6일자로 허가됐다. 일제는 실업인 단체인 ‘대정(大正)실업친목회’에 조선일보를,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회에 시사신문을 허가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동아일보를 왜 일제가 허가했을까. 당시 고등경찰 과장이었던 시로가미는 “총독에게 ‘신문을 허가함으로써 그들(독립운동세력)의 동정을 낱낱이 알 수 있다. 그들을 모아 놓아야만 유사시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고 후일 동아일보 허가의 전략적 의도를 털어놓았다. 신문 허가가 난 뒤 김성수는 전국을 돌며 동아일보의 창간 취지를 설명하고 주식 인수를 호소했다. 자본금 마련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전국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민족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김성수는 경방 주식을 모집할 때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자긍심을 북돋는 독립운동’이라는 점을 들며 유지들을 설득했고 전국에서 78명이 주식을 인수했다. 1월 14일엔 발기인총회를 열어 사장에 박영효, 편집감독에 유근 양기탁 등 주요 인선을 결정했다. 편집을 맡은 주요 간부진은 이후 사시에 해당하는 3대 주지(主旨)를 결정했다. 주지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등 3개항이었다. 동아일보는 1926년 사설에서 이를 △민족주의의 표현 △민주주의 △신문화 건설로 요약했다. 창간의 주역들은 당초 3·1운동 1주년인 3월 1일자로 첫 호를 낼 예정이었으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당초 예정한 자본금 100만 원을 70만 원으로 줄여 4월 1일자로 창간했다. 타블로이드 배대판(倍大版)인 전지판 8쪽이었다. 동아일보 90년사의 첫 타종은 그렇게 울렸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편집감독 유근-양기탁… 소설가 기자 염상섭…당대 수재들 창간 참여 창간 당시 동아일보 직원은 사장 편집감독 주간 이외에 논설반과 편집국 22명, 영업국 17명 등 모두 74명이었다. 편집국에서는 국장 이상협이 27세, 정치부장 진학문이 26세였으며 평기자 중에서도 김정진(32)을 제외한 전원이 20대였던 ‘청년신문’이었다. 동아일보 창간을 맞아 경향 각처에서, 심지어 해외 유학을 마치고 모여든 이들은 한결같이 당대의 수재들이었다. 편집감독 유근은 황성신문, 양기탁은 영국인 베델(배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 창간 멤버였다. 창간기자 유광열은 “유근 선생은 겉으로 봐서는 온후한 군자인데 양기탁 선생은 모습부터 강직해 보이고 애국지사인 혁혁한 풍모가 역연했다. 양 선생은 독립운동에 열중하여 신문사에 별로 못 나왔다”고 훗날 회상했다. 이상협은 19세에 매일신문에 입사해 25세 때 편집장을 맡을 정도로 신문 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924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옮겼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소설가 횡보 염상섭도 동아일보 창간 기자였다. 1910년대에 영어를 ‘미국인처럼’ 했던 것으로 유명한 김동성 기자도 있었다. 그는 192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만국기자대회에서 ‘코리아’ 대표석에 앉았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총독부 감시하기 좋은 자리” 세종로에 사옥 마련1926년 준공한 옛 사옥은 일제강점기 민족 언론의 자취를 오늘날 전해주는 대표적 상징물.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 있는 동아일보사 옛 사옥이다. 근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져 1920년대 고층 업무시설의 전형이었던 이 건물은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됐다. 동아일보가 1920년 창간 당시 사용한 사옥은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중앙학교 교사(校舍)를 전용한 것이었다. 새 사옥을 광화문통(현 세종로 사거리)에 세운 데에는 ‘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총독부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인촌 김성수의 뜻이 반영됐다. 1925년 9월 27일 기공식이 열렸으나 반년 뒤인 1926년 3월 5일 동아일보는 두 번째의 무기정간조치라는 타격을 입었다. 정간으로 인한 자금 압박 속에서도 1926년 12월 11일 3층 총면적 1520m²(약 460평)의 새 사옥으로 입주했다. 이날 동아일보 사설은 “사옥의 불편과 싸우는 싸움은 끝이 났지만 정의를 위하여 불의와 싸우고, 자유를 위하여 압박과 싸우고, 진리를 위하여 허위와 싸우고…”라고 결의를 다졌다. 이 사옥은 1963년 동아방송이 개국하면서 지상 5층 건물로 증축했다. 1992년 10월 27일 동아일보 편집국을 비롯한 주요 시설이 서대문구 충정로 신축 사옥으로 이전한 뒤 1994년 일민(一民)문화관으로 명명됐고 1996년 일민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른다.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세계 여성 음악팬들을 설레게 해온 꽃미남 바이올리니스트 고토 류(22)가 본격적 한국 팬 공략에 나선다. '바이올리니스트 고토 미도리(39)의 남동생'으로도 널리 알려진 그는 2일 8시 호암아트홀에서 첫 내한 리사이틀을 열고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번과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1번 등을 토다 아야코 피아노 반주로 연주한다. 지난해 6월 호암아트홀 디토 페스티벌에 협연자로 출연해 파가니니 협주곡 1번으로 한개 스테이지를 장식한지 1년만이다. 그는 2003년 도이체 그라모폰(DG)사와 음반 발매 전속계약을 했고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르페우스 체임버, 워싱턴 내셔널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하며 떠오르는 국제 스타의 위상을 굳혔다. 1일 입국하는 그를 6월 28일 e메일로 인터뷰했다. -자라면서 특별한 체험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후지 TV가 10년 동안이나 당신의 일상을 '트루먼 쇼'처럼 찍어서 리얼리티 쇼로 방영했다는 점인데요, 그때의 경험은 어땠나요? "여덟 살 때 시작했으니까 당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쇼가 계속되면서 '공격적'인 촬영 방식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더라구요. 눈 떠서부터 잘 때까지 카메라가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그 쇼 덕분에 인지도가 높아졌고 연주가로서 제 커리어를 안착시키는데 도움이 됐죠." -누나가 1980년대 '신동 바이올리니스트'로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던 미도리 (본명 고토 미도리)입니다. 자라면서 누나와 비교되는 게 싫지는 않았나요. "나이도 17살이나 차이가 나고, 비교된다는 생각을 크게 하지는 않았어요. 누나는 내가 아는 한 역사상 가장 훌륭한(finest) 음악가 중 하나고, 누나를 굉장히 존경하죠. -서로 연주에 필요한 충고를 하지는 않나요. "어떻게 감히 내가 충고를…. 누나 쪽에서는 내가 연습할 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줘요. 예를 들어 브람스 바이올린협주곡 같은 경우는 누나에게서 많이 배웠죠. -브람스 협주곡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2일 리사이틀 외에 4일 오후 2시반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디토 오케스트라와 이 곡을 협연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곡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들었는데요. "물론 이 곡은 모든 협주곡 레퍼토리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진지하고, 복잡하면서도 중심 아이디어가 간명하죠. 언제나 이 곡은 내게 '꿈의 작품(Dream Piece)'이었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를 뒷받침해준, 또 내가 가장 잘 연주한다고 자신하는 곡이에요." -현재 하버드대 물리학과 재학중이죠. 연주가로도 성공했고 공부도 잘하니 한국에선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라고 불릴만한데, 물리학과 음악을 둘 다 잘할 수 있나요? "물리학과 음악은 둘 다 자연의 순리를 설명하는 분야니 공통점이 있어요. 이번 디토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스티븐 피 재키브도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저만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죠." -지난해 파가니니 협주곡을 서울에서 연주했는데, 당시 한국 청중들에게서는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미안합니다. 너무 판에 박힌 질문이로군요) "아닙니다. 한국 청중은 정말 따뜻하고 진지한 청중으로 세계 음악인들에 널리 알려져있어요.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청중이죠. 올해 디토 페스티벌에 참가하라는 제의에 제가 정말 기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에요. 서울 거리를 많이 돌아보지 못했는데, 다시 볼 수 있게 된 점도 신나구요." -이번에 연주하게 될 악기를 소개한다면. "1715년 제작한 스트라디바리우스고, 이름은 '엑스 피에르 로드'에요. '케임브리지 공(公)이라는 별칭도 있는 유명한 악기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대여 프로그램에 따라 제 품에 들어왔어요. 따뜻하고 엄청난 소리를 내죠. 내가 원하는 한 언제까지나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어요!" -20대 초반인데, 20년 뒤의 고토 류를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글쎄요. 그때도 지금처럼 여러 가지 관심사를 가진 남자겠죠. 멋진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라면 좋겠고…. 내 아이가 높게 평가해주는 그런 아버지 말예요." 2일 고토류 리사이틀, 4일 디토 심포니 '그레이트 브람스' 3만~5만원. 1577-5266 www.clubbalcony.com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나는 실로 오래전 태어났죠. 과거에 속한 사람입니다.”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투란도트’를 쓰기 전인 1920년대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시 그는 60대에 불과했고 생활은 꽤 현대적이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방문 뉴스 릴(reel)은 물론, 자택 부근 호수에서 물새를 사냥하는 모습까지 필름으로 남았다. 그런데 왜 ‘옛날사람’이라고 했을까. 푸치니가 태어난 19세기 중반 그의 고향 토스카나는 중세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기 작가들이 구할 수 있는 그의 청소년기 사진은 한 장뿐이다. 그의 생애는 주로 편지에 의해 재구성된다. 누나들이 보낸 염려의 편지는 그의 애정행각을 드러낸다. 후원자와 주고받은 편지들에는 당대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한 성찰이 나타난다. 푸치니보다 140세 어린 내 아이의 친구가 위대한 인물이 된다면 후세는 그 삶을 어떻게 추적할까. 기자의 선친은 일제강점기에 카메라를 소유했던 사진 애호가였지만 기자 형제들의 사진은 앨범 3권 분량을 넘지 않는다. 반면 아직 초등학생인 내 아이의 성장 과정은 20여 장의 DVD에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이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즈음이면 일상을 고화질(HD)로 촬영해 블로그에 올리는 일은 그 자체로 일상이 될 것이다. 오늘날 ‘트위터’로 대표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도 동영상 기반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런 서비스가 담을 수 있는 정보량은 폭증하고, 수십 초 분량의 동영상을 올리는 것은 140자의 단문을 쓰는 것보다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블로그나 트위터에 올린 글과 사진, 동영상은 언제까지 보존될까. 최근 미국 정보기술(IT) 전문 미디어 ‘와이어드’는 미국 의회도서관이 트위터 서비스에 올라오는 모든 정보를 영구 보존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개인 블로그의 정보가 사후 소멸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토론도 활발하다. 앞으로 블로그나 소셜 서비스를 운영하는 업체들은 특별한 예외사항이 없는 한 정보를 영구 보존한다는 약관을 제공할 것이다. 웹을 기반으로 한 영상정보의 양과 질도 풍성해진다. 동영상 서비스 ‘유튜브’는 이미 HD 기반으로 운영된다. ‘폰카’가 3차원(3D) 기능을 갖게 될 날도 눈앞에 왔다. 수많은 개인들이 촬영한 세계 곳곳의 3D 화면이 웹 공간에 차곡차곡 쌓여 언제 어디서나 그것을 꺼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결국 인류가 엄청난 정보량의 ‘과거’를 소유하게 됨을 의미한다. 앞으로의 위인전은 3D HD로 기록된 엄청난 양의 동영상을 기반으로 구성될 것이다. 주요 순간의 영상들이 실물처럼 후세 사람들 앞에 재현될 것이다. 개인 간의 의사소통 방식을 변화시켜온 통신혁명이 과거와 대화하는 방식까지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왜 그것이 중요한가. 인간은 기억에 의해 자신을 정의하고 자존감을 형성하며 도전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일기와 편지, 몇 장의 사진에 덧입힌 기억으로 과거를 구성해온 과거의 인류와, 어디서나 불러낼 수 있는 고화질 영상으로 과거를 구성한 미래의 인류는 자아에 대한 정의부터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일일까. 두려움을 갖는 것이 섣부를 수는 있으나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감각의 과잉 속에서 숙고와 반성은 줄어들고 있는 인류의 병폐가 개인적 자아의 정립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인류의 정체성마저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생소한 모습으로 바꾸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연출 ★★★☆ 관현악·합창 ★★★★ 주요배역 가창 ★★★☆사회가 성적 욕망의 배출구를 마련해 두고 그 도덕적 짐을 약자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관습이다. 오페라 연출가 장수동 씨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가 그 같은 부조리를 고발함으로써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으로 탄생했다고 설명한다. 19세기 부르주아 사회를 뛰어넘어 이 작품을 ‘우리 시대’ 오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가 생각하는 이유다. 장 씨가 이끄는 서울오페라앙상블이 25∼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했다. 이 작품을 동시대화하겠다는 취지는 성공했을까. 시대의 간격이 주는 거리감을 상당부분 없앴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무대장치와 복식, 소품에 21세기의 색깔을 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시대의 양식을 동시에 등장시켜 시대감을 탈색시키는 방식이었다. 19세기 양식의 야회복과 20세기 중반의 스포츠카, 21세기의 모던발레가 3막 무대에 동시에 등장해 주인공 비올레타의 비극이 ‘어느 시대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일깨웠다. 1막, 3막 전주곡이 흐르는 동안 비올레타가 가림막 뒤에서 ‘갈라진 길’을 걷도록 한 아이디어는 ‘길 잃은 여인’을 뜻하는 작품 제목에 비추어 설득력이 컸다. 그러나 같은 파티 장면임에도 1막 무대가 3막보다 훨씬 ‘전통적’이었던 점은 시차를 두고 관객의 눈을 적응시키겠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관객에게 낯설음을 안겨주었다. 2막에서 남주인공 알프레도가 골프채를 휘두르자 객석에서 흘러나온 웃음이 그 같은 ‘낯설음’을 표현했다. 불가리아 지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씨가 지휘한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고음현의 깔끔한 합주력이 요구되는 이 작품의 반주부를 완숙하게 소화했다. 서울필하모닉오페라합창단의 합창도 훌륭했다. 그러나 1막에서는 군데군데 관현악이 합창을 앞서 달리는 부분이 귀에 잡혔다. 27일 공연에서는 주요 배역진 가운데 제르몽 역을 맡은 러시아 바리톤 그리고리 오시포프 씨의 완숙한 노래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음성의 결부터 제르몽이 나타내는 준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상에 맞춰 입힌 듯이 들어맞았다. 상대 배역이나 관현악의 일치감을 끌어내는 능력도 뛰어났다. 비올레타 역의 양기영 씨는 투명하고 청초한 음색의 질감으로 호소력 있는 비올레타를 펼쳐냈다. 1막 마지막 부분의 콜로라투라도 완숙했으나 ‘dee volare(날아가네)’의 상승음형에서는 관현악과 정밀하게 맞아들지 않았다. 알프레도 역의 하만택 씨는 이날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 듯했다. 목소리가 트이지 않아 관현악의 총주 부분에서 종종 소리가 묻혔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한국 피아니스트 김정은 양(16·사진)과 우크라이나의 안나 드미트렌코 양(17)이 20∼25일 미국 뉴욕 맨해튼 음대에서 열린 뉴욕국제피아노콩쿠르 앙상블(피아노 듀오)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김 양은 개인 부문에서도 3위에 입상했다. 뉴욕국제피아노콩쿠르는 미국 뉴욕의 스테처앤드호로비츠 재단이 격년으로 여는 대회로 이번에는 예선을 거친 22명이 경쟁했다. 김 양은 2009년 제1회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영재 캠프 콩쿠르에서 우승해 올해 4월 교향악축제 최연소 협연자로 장윤성 씨가 지휘하는 대전시향과 쇼팽 협주곡 2번을 협연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돈 많은 노인 돈 파스콸레. 피상속인인 조카가 자신이 정한 신붓감을 거부하자 조카를 내쫓고 대신 자기가 신붓감을 찾아 결혼한다. 그런데 그 신부, 실상은 그의 재산을 노리는 조카의 애인이었으니…. 나이 든 남자의 탐욕을 야유하는 점에서 한국 고전소설 ‘이춘풍전’이나 ‘배비장전’을 연상하게 하는 도니체티 ‘돈 파스콸레’다. 도니체티의 마지막 오페라 부파(18∼19세기 이탈리아 특유의 가벼운 오페라)인 이 작품을 서울시오페라단이 27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에서 공연한다. 도니체티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 쓴 이 작품은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하며 경묘하고 달콤한 멜로디로 전곡을 가득 채워 사랑받는다. 주인공의 조카 에르네스토가 부르는 아리아 ‘4월의 밤은 얼마나 부드러운가’는 테너 독창회에서도 사랑받는 아리아. 양진모 씨가 지휘하는 인씨엠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반주하고 이경재 씨가 연출을 맡았다. 돈 파스콸레 역에 한경석 정지철, 조카 에르네스토 역에 강신모 박준석, 그의 연인 노리나 역에 강혜정 한상은 씨 등이 출연한다. 1만∼7만 원. 24일 오후 7시 반, 25, 26일 오후 3시, 7시 반, 27일 오후 5시 개막. 02-399-1783∼6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섬세한 연주만큼이나 매력적인 외모로 특히 여성 음악 팬의 사랑을 받아온 국내외 피아니스트 두 사람이 피아노 듀오 무대를 펼친다. 27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피터 야블론스키 & 김정원 듀오 콘서트’. 모차르트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소나타’ K 521과 아렌스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1번’ 등 네 곡을 연주한다. 콘서트를 앞둔 김 씨를 21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야블론스키에게는 17일 e메일로 피아노 듀오의 매력, 이번 연주곡의 특징 등을 물었다. ―다른 악기를 협연하는 것도 그렇지만 같은 악기를 두 사람이 연주한다는 것은 각자의 개성을 양보해야 하는 작업인데…. 김정원=피아노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불릴 만큼 표현력이 넓지만 사람의 손가락은 10개뿐이라 한계가 있다. 두 사람이라면 피아노의 모든 음역을 동시에 충실히 울릴 수 있어 솔로 연주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욕구를 채울 수 있다. 야블론스키=나는 형과 아내가 피아니스트여서 평생 피아노 듀오 연주를 해왔다. 지성과 음악성을 갖춘 음악가라면 두 사람이 연주해도 서로의 개성을 살리면서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가. 김=야블론스키 씨의 연주를 음반으로 많이 접했다. 강렬한 개성을 내세우기보다 묵직하고 점잖은 연주를 들려주는 편이라고 느꼈다. 나로 말하자면 ‘감정을 절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는 편인데, 이 사람이라면 좋은 호흡을 이룰 거라는 느낌이 들어 협연을 결정했다. ―이번 콘서트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야=라흐마니노프의 모음곡 1번은 젊었을 때 쓴 작품으로 한껏 낭만적인 감성을 표현하고 있다. 루토스와프스키의 ‘파가니니 변주곡’은 내가 작곡가 자신으로부터 배운 곡이어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다. 김=라흐마니노프의 모음곡 두 곡 중에서 화려한 2번이 즐겨 연주되는데, 이번에 연주할 1번은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어떤 악장에서는 단 두 가지 화음만을 사용하는 등 신선한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30일 오후 7시 반에는 대전문화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 공연이 열린다. 서울 3만3000∼9만9000원, 대전 3만3000∼5만5000원. 1588-7890, 1544-1555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남쪽의 가요를 즐겨 듣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고전음악도 좋아하는지요. 정 선수와 함께 독일 작곡가 막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듣고 싶습니다. 이 곡의 세 번째 악장은 스코틀랜드 민요 ‘조니가 없어 슬프다(I'm A-Doun for Lack O' Johnnie)’의 선율을 따왔습니다. 학생 시절 이 멜로디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동해물과…’라는 한국 애국가의 가사를 붙여보곤 했습니다. 첫 네 음표의 진행이 애국가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애국가와 스코틀랜드는 남다른 인연이 있군요.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이 몰래 부르던 애국가도 송년의 노래로 사랑받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선율을 딴 것이니까요. 흥미로운 일은, 북한의 국가인 ‘애국가’ 선율도 ‘조니가 없어 슬프다’와 흡사하다는 사실입니다. 못갖춤마디에 ‘솔 도…’ 음계로 시작하는 점이 그렇고, 첫 두 마디 아홉 개 음표의 박자 진행까지 똑같습니다. ‘올드 랭 사인’과도 첫 네 음표의 진행이 같습니다. 남북이 통일돼 국가를 새로 만든다면 ‘조니…’의 멜로디를 써도 되겠다는 생각도 한때 했죠. 그러나 혼자만의 이 생각은 바꾸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훌륭한 작곡가를 많이 갖고 있는데 다른 민족의 선율을 쓸 필요는 없겠죠. 그 쪽에서 말하는 ‘공화국’의 애국가를 처음 들은 건 199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선율도 아름다웠지만 평화로운 가사가 인상 깊었습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반만년 오랜 역사에/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조선’을 ‘조국’으로, ‘인민’을 ‘겨레’로 바꾼다면 남쪽에서 애국 가요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듯했습니다. 말이 길었습니다만 정 선수와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듣고 싶다고 한 것은 우선 대한민국과 ‘공화국’의 ‘애국가’를 모두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정 선수라면 두 애국가 모두 알고 있겠죠. 또 하나 이유가 있습니다. 44년만의 북한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정 선수가 국가를 들으며 흘린 눈물, 그 눈물이 많은 사람의 뇌리에 크고 작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경기 직후 정 선수의 말은 ‘조국’의 무게에 눌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세계선수권대회에 드디어 나오게 됐고 세계 최강 팀과 맞붙게 돼 좋아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그 날렵함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선수의 그 눈물은 공감과 함께 뭔가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나 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사람이 그런 느낌을 얘기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명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들으며 눈물 흘리는 그 국가가, 국민의 인권과 복리를 보장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해 인정받는 나라의 것이었으면’이라는 아쉬움이었습니다. 하필 포르투갈 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때 이런 얘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많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울분을 삭이고 있겠죠. 그러나 다시 일어설 것을 믿습니다. 지난 경기의 경험은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우뚝 선 데 대한 얼마간의 ‘비용’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남은 한 경기를 멋지게 마무리한 뒤, 4년 뒤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본선에 진출하기를 기원합니다. 그 때는 나도 한층 마음 편히 응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서, 국민의 복리와 평화를 위해 한걸음씩 전진하는 나라를 응원한다는 기쁨을 갖고서 말이죠. 정대세 파이팅!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
국군 포로 중 처음으로 북한을 탈출해 돌아온 고 조창호 중위의 삶을 그린 악극 ‘아, 나의 조국!’이 22일 오후 3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에서 공연된다. 3월 5일 이 극장에서 초연된 지 3개월여 만이다. 소설가 복거일 씨가 대본과 연출을 맡았다. 3만 원. 6·25전쟁 참전용사는 무료. 1544-1555}

이 음악회에서는 도다 유키코 씨 등 성악가와 바이올리니스트, 플루티스트를 비롯한 일본 음악가 다섯 사람이 무대에 올라 윤용하 ‘보리밭’, 장일남 ‘기다리는 마음’ 등을 연주해 눈길을 끈다. 무엇이 이들을 이웃 나라 성악계 명사를 추모하는 무대로 불러들였을까. 고 오현명은 일본 도쿄 인근의 지바(千葉) 현 나라시노(習志野) 시에서 열리는 ‘마을의 음악사랑 네트워크’ 음악회에 2004년부터 3년 연속 출연했다. ‘마을의…’은 나라시노에 사는 음악가들의 앙상블. 무사시노 음대, 도호학원 등 명문 음대 출신의 음악가들로 구성됐다. 그가 이곳에 초청받은 것은 제자인 도다 씨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구니타치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도다 씨는 졸업 후 서사모아에 여행을 갔다가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 부르는 한국 가곡에 매혹됐다. 일본에 돌아온 뒤 한국 가곡 테이프를 찾아 들은 그는 한국 가곡의 서정미에 이끌려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1984년 한국정부 초빙 유학생으로 한국에 온 뒤 3년 동안 한양대 대학원에서 오현명을 사사하며 한국 가곡을 연구했다.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한국 가곡의 매력을 일본에 알리는 데 앞장선 그는 설득 끝에 오현명을 ‘마을의 음악사랑 네트워크’ 음악회에 모셔왔다. “함께 연주하는 음악가들 모두 오 선생님의 인간미에 빠졌죠. 피아노와 바이올린, 플루트 등의 실내악 반주로 ‘보리밭’ 등을 노래하셨는데, 이웃 나라의 선율을 처음 접하는 청중도 금세 열광하곤 했습니다.” 한국에서 ‘오 선생 1주기 추도음악회에서 연주해달라’는 전갈을 받았을 때 모임 회원 모두 콧날이 시큰해졌다고 했다.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를 한국에 부르시는 마음이 전해지는구나….’메조소프라노 도다 유키코 등 5명 참가“부모 같은 분”… 현지서 추모음악회도 이번 연주회에서도 이들은 ‘보리밭’을 연주한다. 오현명의 애창곡이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라는 가사가 추모의 마음을 담아내는 듯해서다. 한국 연주에 앞서 ‘마을의 음악사랑 네트워크’는 6일 나라시노 시민회관에서 오현명 추모음악회 ‘불가능한 꿈’을 열었다. 크고 작은 오페라에서 오현명과 화음을 맞춘 평생지기 테너 안형일 씨(83·서울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보리밭’ ‘고향생각’ 등을 협연했다. 안 씨는 “일본 청중의 반응이 뜨거워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오 선생은 우리 가곡을 연주 면에서 독자적인 경지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며 인간적으로도 소박하고 친근미가 넘치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13일 콘서트에는 베이스 이요훈, 테너 나승서, 베이스 김재찬 씨 등 고인의 제자들이 한국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등을 노래한다. 오세종 씨(서울시합창단 예술감독)가 지휘하는 제자들의 합창도 펼쳐진다. 안형일 씨는 역시 고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피아니스트 이성균 씨(서울대 명예교수) 반주로 변훈의 ‘떠나가는 배’를 노래한다. 2만∼10만 원. 02-2231-9001∼2, 02-580-1300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한때 나는 작곡에 재능이 있다고 믿었어. 그러나 꿈을 접었지. 여자가 작곡을 꿈꿔선 안 돼. 성공한 사람이 없잖아?” 클라라 슈만(1819∼1896·사진)이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쓴 말. 그러나 그는 20여 곡의 피아노곡과 실내악 작품을 남겼다.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과 프레데리크 쇼팽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슈만의 부인이었던 클라라를 비롯해 같은 시대 활동한 작곡가들의 활동을 조명하는 음악회가 열린다. 10일 오후 8시, 17일 오후 7시 반 서울 신문로 금호아트홀에서 열리는 ‘쇼팽과 슈만 사이’.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젊은 연주자들이 존 필드 ‘녹턴’, 파가니니 현악4중주 3번(10일), 클라라 슈만 피아노 3중주, 브람스 피아노 4중주(17일) 등을 연주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10일) 손열음 씨(17일)와 바이올리니스트 장유진 권혁주 씨 등이 출연한다. 주목할 만한 작품은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3중주. 결혼 전해 작곡했지만 짙은 마음의 그늘도 엿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3악장 안단테의 쓸쓸한 도입부는 한번 들으면 잊기 힘들다. 성인 2만∼3만 원, 청소년(학생증 지참) 8000원. 02-6303-7700, 1544-1555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조너선 도브의 ‘피노키오의 모험’은 2007년 영국 리즈에서 초연된 젊은 오페라다. 지난해 미국 미네소타 공연에서는 ‘고전에서 재미를 이끌어낸 독창적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작품을 오페라단 ‘더뮤즈’가 4∼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했다. ‘친환경 오페라단’을 표방해온 더뮤즈는 5일이 환경의 날임을 상기하는 의미도 담아 무대장치와 의상, 소품을 모두 재활용품으로 꾸몄다. 광고용 플래카드를 뜯어 만든 서커스단과 군중의 의상에는 ‘할인’ 등의 글자가 드러났다. 상징성이 강한 무대였지만 뜯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2막 고래 배 속 장면에서는 CD를 줄줄이 엮어 바닷속의 거품을 형상화했다. 깊은 바다의 느낌이 극사실주의적 무대 못지않게 가까이 다가왔다. 무대에서 아쉬운 부분은 한가운데 놓인 컨테이너였다. 1막 시작 부분에서는 컨테이너 전면을 개방해 제페토의 집 겸 작업실임을 드러냈으므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문을 닫은 채 무대 한가운데 방치해 버린 느낌이었다. 재활용 천을 바꾸어 덮으면서 색상 변화를 주었더라면 서커스 극장이나 바닷속 등 배경 전환에 방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브의 음악은 1막 시작 부분에서 관객의 귀를 사로잡지 못했다. 전통적 음악어법이 아니면서 일정한 반복 패턴이 없어 지루하게 흘렀다. 1막 인형극 부분 등 군중이 등장하는 장면이 도입되면서 음악은 활기를 찾았다. 20세기 초 거리음악에 최근의 미니멀 빅밴드 음향을 결합한 듯한 관현악부가 피노키오 이야기의 우화적이면서 떠들썩한 분위기에 맞아들었다. 타이틀 롤인 피노키오 역은 4일 공연과 5일 밤 공연, 6일 낮 공연을 테너 윤주현 씨가 맡았다. 다른 두 차례 공연은 원작대로 메조소프라노 윤영민 씨가 피노키오를 노래했다. 공명점이 높게 잡혀 여린 느낌을 주는 윤주현 씨의 노래는 피노키오의 캐릭터에 어울렸다. 그러나 자기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피노키오의 독백과 대화 사이에 적절한 음색의 변화가 없어 평면적인 느낌이었다. 인형극 감독과 서커스 단장을 맡은 바리톤 박찬일 씨의 여유로운 노랫결과 무대 장악력이 돋보였고, 여우 역을 맡은 카운터테너 박조현 씨도 인상적인 음성연기를 펼쳤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