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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웹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드라마의 비율이 크게 늘고 있다. 문득 ‘그 많던 드라마 작가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궁금해진다. 여기 반가운 얼굴이 있다. tvN 단막극 프로젝트 ‘드라마 스테이지 2021’에 이름을 올린 10명의 신인 작가들이다. CJ ENM의 신인 스토리텔러 지원사업 ‘오펜(O’PEN)’ 공모전에서 당선된 10개 작품은 3일부터 다음 달 21일까지 매주 1∼3회씩 공개되고 있다. 이 공모전은 2017년 시작해 매년 열린다. 3일 방송된 ‘민트컨디션’의 방소민 작가(36·여)와 24일 선보이는 ‘러브스포일러’의 홍은주 작가(36·여)를 서면으로 만났다. “합격입니다.” 지난해 봄 방소민, 홍은주가 작가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집에서 양치하다 전화를 받은 방 작가는 입에 거품을 문 채 흐느꼈다. 홍 작가는 카페에서 소식을 듣곤 손님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로 엉엉 울었다. 드라마 작가는 ‘지망생’이 ‘신인’이 되기까지 문이 매우 좁다. 업계에 인맥이 있거나 명성이 높지 않은 이상 등단할 방법은 각 방송사 공모전뿐이다. 육아 중이던 방 작가는 2019년 공모전에만 매달렸다. 합격 전까지 3개의 공모전에 도전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당선작 없음’이라는 발표를 보면 허탈했다. 홍 작가는 2015년부터 공모전에 지원했고 보조 작가로 일했다. 홍 작가는 “단막도 ‘팔리는 스토리’를 고민하지만, 평소에 제가 궁금하고 아무도 안 써본 걸 써보려고 했다. 사랑의 유통기한을 알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하는 등 소재에 변주를 줬다”고 말했다. 이들은 합격 후 두세 달 동안 수상작을 수정했다. 지난해 9월 말 정형건 감독과 첫 미팅을 하고 촬영에 들어갔던 올해 1월까지 방 작가는 30분짜리 3부작으로 기획했던 대본을 1회 분량 드라마로 줄였다. 홍 작가는 드라마 ‘모범형사’를 보며 차래형 배우를 눈여겨본 뒤 캐스팅했다. 홍 작가는 “차 배우에게 반한 스태프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좋았다”고 했다. 단막극 공모전은 귀한 기회다. 또 단막극은 정규 드라마보다 분량이 적고 주요 편성 시간에 비껴 있어 색다른 실험도 할 수 있다. 현재 tvN 외 단막극은 KBS 드라마스페셜, JTBC 드라마페스타가 있다. 방 작가는 “당선된 시트콤 분야는 오펜에만 있다. 시트콤은 예능 작가 출신이 많기에 코미디 드라마 작가를 공모전으로 뽑는 건 화제였다”고 말했다. 오펜 공모전에 합격하면 1년여간 창작금 500만 원, 개인 집필실, 멘토링, 제작사와 연결해주는 지원을 받는다. 방 작가는 “단순히 작가를 ‘뽑는다’기보다 가능성 있는 지망생을 발굴해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힘겹게 데뷔전을 치렀지만 이들의 앞날은 아직 물음표다. 단막 데뷔 후에도 정규 드라마의 작가가 되기까지는 평균 3∼5년 정도가 걸리는 데다 그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청자를 설레게 하는 기발한 드라마들은 갖은 고난의 시기를 겪은 작가들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누군가가 제 드라마로 불쾌한 감정들을 털어냈으면 좋겠어요.”(방 작가) “답을 주진 못해도 ‘같이 생각해 봐요’ 하며 어깨를 톡톡 쳐주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요.”(홍 작가)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00명 넘는 마을 주민들이 한 제사상 앞에 모였다. 이들은 ‘할매신’을 모신다. 마을에서 신성시하는 산에 모여 “이고을 골매기 할매당산신 산왕대신님(이 마을 액을 막아주는 할매당산신 산신님)”을 왼다. 옛날 얘기가 아니다. 바로 2021년 ‘대한민국 제2의 수도’ 부산에서 열린 일이다. 매년 음력 12월 14일(올해 1월 26일) 부산 사상구 감전동에서는 할매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감전동은 일제강점기 때 만든 위패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7년간 제문을 읽어 온 이는 부산에서 나고 자란 심인택 감전동 당산제 보존회장(67). 심 회장은 “이날을 위해 한 달 전부터 집 기둥에 새끼줄을 매달아 부정을 쫓고 마을의 애경사에 모두 참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올해 ‘부산 민속 문화의 해’를 맞아 2019년부터 2년간 부산 16개 구군 전 지역의 마을 신앙에 대해 조사했다. 부산은 155곳에서 마을제가 열리고 있다. 가장 많이 전승되는 곳은 기장군과 강서구, 해운대구다. 비교적 최근에 개발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손정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원(38)은 “부산은 광역지자체 중에서 마을제가 가장 많이 전승되고 있다”며 “동해안과 남해안 해안 마을은 생업 때문에 신앙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마을제가 많이 남아 있는데, 부산이 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들이 보편적으로 모시는 신은 서낭신(할매신 할배신), 산신, 용신, 장승(솟대)이다. 특히 “○씨 할매” “골매기 할매”로 불리는 할매신을 주신으로 모시는 제당이 130곳으로 가장 많았다. 이 가운데 할매와 할배를 같이 모시는 제당은 29곳으로, 이는 남녀신이 부부관계를 맺어야 마을이 풍요롭다는 주술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제를 주관하는 ‘제주(제관)’는 주로 이장이다. 예로부터 마을제를 지내기 전 마을 회의에서 부정이 없는 높은 연배의 인물을 선정해왔다. 그러나 마을에 사고가 발생하면 제관이 지탄을 받게 되는 탓에 주민들이 제관이 되기를 꺼리면서 주로 이장이 맡게 됐다. 최근에는 제주가 고령이어서 절에 제를 맡기는 등 의례의 불교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5일 전남 구례군 상사마을 쌍산재 입구. 여기저기서 “애걔?” “생각보다 작네” 하는 말이 들렸다. 보통 대갓집 하면 떠올리게 되는 웅장함은 없었다. 대문 앞에 서면 한옥 3채의 기와만 보였다. ‘작은 한옥인가’ 하는 생각은 열 걸음쯤 떼자 바로 사라졌다.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 숲과 그 너머로 펼쳐진 뜰과 한옥. 들어가 보지 않으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택이 펼쳐졌다. 매년 이곳에 오는 이는 3만 명이 넘는다. 지난해 9∼12월 휴원했음에도 3만6000여 명이 방문했고, 이 중 10%가량은 외국인이었다. 2008년 KBS ‘1박2일’, 올해 tvN ‘윤스테이’의 촬영지로 소문나면서 관람객은 더 늘고 있다. 약 200년 전에 만들어진 쌍산재는 현 운영자인 오경영 씨(56)의 고조부 호 ‘쌍산(雙山)’을 따 이름이 붙여졌다. 쌍산재의 당몰샘은 고려 이전부터 있었다고 알려진다. 이 샘물을 마시면 젊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오 씨의 선조는 이를 주민들에게 개방하기 위해 담장을 샘 뒤편으로 물렸다고 한다. 오 씨 가문은 출세보다는 산사에 묻혀 한학을 공부하며 풍류를 즐기던 유학자의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등 참선비의 모습을 고수했다. 쌍산재가 지내온 시간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에서만 자라는 식물이자 멸종위기 야생식물인 히어리를 포함해 100여 종의 수목이 있다. 2018년 10월에는 전남도 제5호 민간정원으로 등재돼 전국 31개 민간정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임세웅 전남문화관광해설사협회 문화관광해설사(54)는 “한옥과 한옥 사이를 메우는 넓은 마당과 숲, 한국의 자연 문화자원이 공존하는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쌍산재 내 한옥은 9채가 있지만 총면적은 1만6000m²에 달할 정도로 여백이 많다. 대나무 숲을 중심으로 아랫동네, 윗동네가 나뉘는 미로 같은 공간 디자인도 방문자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아랫동네로 불리는 공간은 대문 오른쪽에 놓인 안채, 바깥채, 사랑채다. 안채는 할머니, 어머니 등 여성들이 주로 생활했던 살림 공간이다. 춘궁기에 곡식을 채워두고 어려운 이웃에게 빌려주던 ‘나눔의 뒤주’도 있다. 안채 옆에는 운영자 오 씨가 태어나고 자랐다는 바깥채가, 그 옆에는 손님들이 묵었던 사랑채가 있다. 돌계단을 따라 대나무 숲을 거닐면 비밀의 문 ‘동백나무 터널’이 나온다. 터널을 지나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 탁 트인 정원과 하늘이 드러난다. 쭉 뻗은 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을 보면 가정문(嘉貞門)이 나온다. 쌍산재에서 가장 깊게 자리한 서당채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길 양쪽에 놓인 흰색 돌들은 달이 뜨면 빛이 반사돼 이정표가 된다. 길 끝에서 굽어 있는 사철나무는 고풍스럽다. 서당채는 집안 아이들이 모여 글공부를 하던 곳으로, 상사마을에는 그때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던 동네 아이들이 이제는 노인이 되어 여전히 살고 있다. 서당채 옆 건물인 경암당(絅菴堂)과 서당채 사이에는 작은 연못 청원당(淸遠塘)이 있다. 네모 형태의 연못 안에 둥근 섬이 있는 구조인데 네모는 땅(음)을, 원은 하늘(양)을 의미한다. 음양사상이 드러나는 구간이다. 놀라움은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는다. 경암당 바로 옆에 놓인 영벽문(暎碧門)은 쌍산재의 정수라고 불린다. 네모난 문 밖으로 펼쳐진 옥빛 사도저수지와 지리산은 액자에 걸린 그림 같다.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작은 계곡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화엄사 종소리가 계곡을 타고 들려온다고 해 ‘종골’이라 불렸다. 한두 시간 정도 쌍산재를 거닐면 이곳이 사랑받는 이유를 절로 알게 된다. 오 씨는 “집이란 무릇 사람이 드나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2004년 관람 및 숙박 운영을 시작했다”며 “아궁이 같은 한옥만의 특징과 온기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젊은이와 외국인들도 온전히 즐기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쌍산재는 ‘윤스테이’ 촬영 후 내부를 수리한 뒤 지난달 26일 재개관했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재정비로 아직은 관람만 할 수 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입장 가능하며 입장료는 1만 원. 숙박 재개일은 추후 공지할 예정이다. 숙박비는 15만∼35만 원으로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구례=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미국의 한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학생 ‘휴’가 있다. 그에게는 18세 때 신나치 패거리에 가담했다가 총격전에서 상대 패거리 한 명을 죽인 과거가 있다.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그는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다. 휴는 응시원서에서 이제는 백인우월주의와 완전히 손을 끊었다고 해명한다. 여러 질문이 떠오른다. ‘학교가 범죄자 출신 학생의 과거를 환자들에게 알려야 할까?’ ‘만약 살인이 아니라 금융사기범이라면?’ ‘음주운전자는?’ 저자는 생명과 정의에 관한 79가지 딜레마를 던진다. 의료계 종사자는 물론이고, 의학드라마를 즐겨보는 일반인 모두가 흥미로울 만하다. 20년간 윤리 강의를 해온 생명윤리학자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저자의 경력이 드러나는 주제들이다. 지금 당장 생각할 만한 질문도 있다. 치명적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미국의 한 대도시에서 발견됐다. 이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보균자는 단 한 사람. 의사들은 치료법이 개발될 때까지 보균자 ‘샌드라’를 무기한 격리하길 바란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샌드라를 영원히 격리하는 건 윤리적일까. 접촉 감염성이 매우 높은 사람을 단기 격리하는 데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조금 다르다. 무기한 격리됐던 유명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장티푸스 무증상 보균자였던 메리 맬런은 뉴욕시 이스트강의 노스브러더섬에서 무려 23년간 강제 격리됐다. 저자는 샌드라에게 격리를 요구하려면, 치료법을 찾고자 상당한 자원을 쏟아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를 격리함으로써 아낄 수 있는 의료비 모두를 치료법을 찾는 데 사용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다고 봤다. 책은 명확한 답변을 내주지 않는다. 그 대신 저명한 생명윤리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읽다보면 ‘나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질문이 절로 생긴다. 환자가 상담 도중 고백한 범죄를 알려야 하는지, 체외수정으로 만들어진 배아의 소유자는 아빠인지 엄마인지, 만만찮은 질문이 넘쳐난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하면 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황량한 사막을 혼자 달린다. 방해자를 만나면 끈질기게 추격한다. 치마 대신 망토와 바지를 입고, 발차기를 한다. 자신의 키보다 큰 검을 휘두르기도 한다. 4일 개봉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주인공 라야다. 디즈니의 13번째 공주는 여러모로 색다르다. 디즈니가 최초로 내세운 동남아시아인이자, 전투력이 가장 뛰어나다. 제작에 참여한 최영재 애니메이터(51·사진)는 지난달 26일 화상 인터뷰에서 라야를 “디즈니 공주 캐릭터 중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강인한 전사”라고 표현했다. 애니메이터는 컴퓨터그래픽(CG) 캐릭터의 근육과 관절을 조절해 표정과 움직임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그는 디즈니에서 14년간 ‘겨울왕국’ ‘주토피아’ ‘모아나’ 등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다. 라야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 분열된 땅 쿠만드라 왕국을 구하기 위해 전설의 마지막 드래곤 시수를 찾아 모험을 펼친다. 라야는 엘사처럼 마법을 부리진 못한다. 책임감 하나로 스스로 무술을 익혔다. 이번 작품은 이전 디즈니 영화들과 달리 뮤지컬이 아닌 액션 장르다. 최 애니메이터는 캐릭터의 움직임에 특히 많은 공을 들였고, 액션 장면에 만족감을 표했다. 영화 후반부쯤 라야와 라이벌 나마리는 결투를 벌인다. 이때 라야가 공중돌기를 두 번 한 뒤, 손에 쥔 칼끝으로 땅을 짚고 단상 위에 올라선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다시 공격을 한다. 그는 “무술 장면은 동남아시아 무예인 무아이타이, 킥복싱, 펜착실랏 등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며 “무술인들이 스튜디오에 와 장면별로 연기를 하면 카메라로 촬영한 뒤 참조해 움직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라야와 함께 훌륭한 ‘케미’를 보이는 시수도 흥미로운 캐릭터다. 용이라지만 외형은 뱀에 가깝다. 전설적인 캐릭터지만 시종일관 유쾌하고 때론 지나치게 솔직하다. 센스 넘치는 랩을 선보이기도 하고, 때로 덫에 걸리는 등 실수도 한다. 전지전능해 모든 걸 해결하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똑같이 실수하며 성장해 나가는 반전 매력이 있다. 이는 동남아시아 문화를 고려한 제작진의 의도였다. 시수는 동남아시아 물의 신 ‘나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나가는 몸통이 크고 날개가 있는 서양의 용이 아닌, 길쭉한 몸통을 가졌다. 동양에서 용은 희망과 불굴의 용기를 의미하고, 사람들은 용을 사랑하고 아끼기에 시수는 숭배받는 강력한 존재지만, 용에 대한 기대를 뒤집는 캐릭터로 설정했다. 최 애니메이터는 “라야가 황량한 풍경, 풍성한 색감으로 가득 찬 배경에서 역동적인 액션을 펼치는 모습이 특히 볼만하다”며 “디즈니는 매 작품 새로운 시도를 하며 도전하기에 즐거운 자극을 받으며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미나리’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거머쥐면서 4월 25일로 예정된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에도 한 발짝 다가섰다는 예측이 나온다. 골든글로브는 ‘미리 보는 아카데미’라고 불린다.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의 후보들이 상당수 겹치기 때문이다. 골든글로브 시상식 이후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가 진행되기 때문에 골든글로브 수상이 회원들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문라이트’(2016년), ‘노예 12년’(2013년), ‘아르고’(2012년)는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 동시에 수상한 작품이다. 지난해 ‘기생충’의 경우 주로 봉준호 감독에게 관심이 집중됐던 반면 ‘미나리’는 배우들의 수상 행진까지 이어지면서 기대감은 더 커지고 있다. 미국 4대 비평가협회상(전미비평가위원회·워싱턴비평가협회·LA비평가협회·시카고비평가협회)을 기준으로 보면 ‘기생충’은 외국어영화상, 작품상, 감독상이 주를 이룬다. 배우들의 수상으로는 송강호가 LA비평가협회상, 피닉스비평가협회상, 시카고인디비평가협회상, 도리안어워즈 4개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조여정이 뉴멕시코비평가협회상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반면 ‘미나리’는 윤여정이 미국 4대 비평가협회상 중 시상식이 끝난 3곳에서 여우조연상을 차지했고, 아직 시상이 진행되지 않은 시카고비평가협회에도 여우조연상 후보로 올라 있다. 윤여정이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26개나 휩쓸면서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 등은 그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로도 꼽고 있다. 기생충 때는 볼 수 없었던 양상이다. 다른 배우들의 활약도 기대할 만하다. 스티븐 연은 골드 리스트, 덴버영화제, 노스텍사스비평가협회에서 남우주연상을, 한예리는 골드 리스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미국 영화 전문지 ‘콜라이더’는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메릴 스트리프, 에이미 애덤스 등과 함께 한예리를 꼽았다. 할리우드 시상식 예측을 전하는 미국 연예매체 ‘골드더비’는 스티븐 연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예측 5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외신들은 미나리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도 점치고 있다. 골든글로브는 규정상 영화 대사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니면 외국어영화로 분류한다. 반면 아카데미는 대사가 영어가 아닌 영화에도 작품상을 수여해왔다. 모든 대사가 한국어인 기생충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아카데미 후보는 3월 15일 발표될 예정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게임 일수 14일. 상금 4억8104만 원. 당신은 얼마를 벌어서 나갈 수 있습니까?” 참가자 8명이 아무것도 없는 방에 갇힌다. 이들은 버튼을 눌러 물건을 살 수 있다. 다만 시중 가격의 100배. 2000원짜리 커피라면 이곳에선 20만 원을 내야 한다. 이렇게 8명이 2주간 쓴 돈은 상금 4억8104만 원에서 차감된다. 남은 돈을 8명이 공평하게 나눠 가지면 게임은 끝난다. 이 희한한 프로젝트는 두 달 전 유튜브 ‘진용진’ 채널에 올라온 참가자 모집공고다. 구독자 208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 진용진 씨(29)는 웹툰 ‘머니게임’의 룰을 자신의 채널에 적용했다. 촬영은 올 1월 13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됐다. 진 씨는 이달 초부터 약 1시간짜리 영상을 5, 6회에 걸쳐 업로드할 예정이다. 대형 유튜브 채널을 중심으로 TV 예능 프로그램 스케일에 맞먹는 ‘웹 예능’이 제작되고 있다. 지난해 유명 유튜버 ‘피지컬 갤러리’의 ‘가짜사나이’ 시리즈가 큰 성공을 거둔 뒤 생긴 트렌드다. 가짜사나이는 유튜버들이 해군 특수전전단 훈련과정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최근 극장판으로 제작돼 지난달 27일 상영되기도 했다. 가짜사나이에서 교관으로 이름을 알린 유튜버 ‘에이전트H’는 카레이싱 도전기를 담은 ‘영광의 레이서’를 현대자동차와 함께 제작해 ‘미션 파서블’ 채널에 올렸다. 카레이싱 훈련부터 대회 출전까지 전 과정을 6개의 에피소드에 담았다. 이 영상에는 “영상미나 편집, 연출이 TV 프로그램 수준으로 높아졌다”는 댓글이 잇달아 달렸다. 크리에이터 각자의 개성이 웹 예능을 통해 극대화되기도 한다. 구독자 133만 명의 ‘승우아빠’ 채널은 믹스커피, 껌, 콜라 등 기존 공산품을 힘겹게 직접 만드는 ‘○○은 사드세요 제발’ 시리즈로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가 새로 내놓은 웹 예능 ‘쇼미더오븐’은 토너먼트 형식의 요리 콘테스트. 16명의 요리 유튜버들이 대결을 펼친다. 셰프 에드워드 권, 개그우먼 김민경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차기 콘텐츠를 함께 만들 우승자를 뽑았다. 유튜버 간 협업도 속속 이뤄지고 있다. 웹 예능 ‘체인지업(業)’에는 유튜버 ‘도티TV’ ‘Raon Lee’ ‘피식대학’ ‘진자림’ ‘HIPchillin현석’ 등이 힘을 모았다. 뮤지션과 크리에이터들이 서로의 일을 경험하는 모습을 담은 관찰 예능이다. 뮤지션 강남, 크라잉넛, 던밀스, 유키카, 미노이가 출연해 유튜버들과 5곡의 음원을 제작하고 비대면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유튜버 기획사인 샌드박스네트워크 김태욱 선임 매니저는 “이제는 콘텐츠 경계가 유튜브에 한정되지 않고 영화나 케이블TV로도 진출할 수 있다”며 “채널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매력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유튜브와 케이블에 동시 공개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2017년)에는 몇몇 끔찍한 장면이 묘사돼 있다.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벌어진 한 남성의 살인사건 장면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생각이 난다고 하는 독자들이 많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16세 소년인 주인공 선윤재는 이 일로 자신에게 지극한 사랑을 준 엄마와 할머니를 잃는다. 참혹한 장면을 목격하고 홀로 남겨진 윤재를, 우리와 같은 시선에서 바라본 소설 속 인물은 없었을까. 작가는 사고 현장에서 스무 걸음쯤 떨어져 있던 한 남자를 주목한다. 그에게는 어린아이를 구해주다 트럭에 깔려 만신창이가 된 형이 있다. 남자는 형을 보면서 ‘절대로 나와 상관없는 일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사건 때 그가 나서지 않은 이유다. 손원평은 그랬던 그가 한 소녀의 선의를 마주하며 바뀌는 내용을 별도의 단편소설로 내놓았다. 이 단편 소설집은 기존 발표 작품에서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의 시선에서 본 새로운 세계를 담았다. 어떤 소설의 결말은 너무 소중해 다음을 생각할 수 없다지만, 독자로선 내심 마음 쓰이던 인물의 안부가 그리울 때도 있다. 이 책은 이런 아쉬움을 해소해준다. 이현의 ‘1945, 철원’(2012년) ‘그 여름의 서울’(2020년), 김종미의 ‘모두 깜언’(2015년), 구병모의 ‘버드 스트라이크’(2019년), 이희영의 ‘페인트’(2019년), 백온유의 ‘유원’(2020년) 등 8개 작품의 뒷이야기를 엮었다. 이 책은 창비청소년문학 100권째 발간을 기념한 기획이기도 하다. 이름을 올린 작가들은 ‘창비청소년문학상’이나 ‘좋은 어린이책’ 공모전 대상 수상자들이다.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2009년) 독자들도 등장인물들과 오랜만에 반가운 인사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남은 사람들은 잘 살까?’라는 질문을 되뇌었을 법하다. 우아한 거짓말에는 엄마 현숙과 언니 만지, 막내 천지가 나왔다. 셋 중 가장 밝았던 천지가 갑작스레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됐다. 만지는 우연히 천지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천지는 죽기 전 5명에게 편지를 남겼는데, 등장인물들의 회상과 천지의 독백으로 과거의 일이 서서히 밝혀졌다. 김려령은 이번 책에서 ‘언니의 무게’를 통해 동생 천지가 죽은 뒤 남겨진 언니 만지의 안부를 전한다. 만지는 동생이 겪은 괴롭힘을 막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산다. 천지를 괴롭힌 아이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언니로서의 무게가 가슴 시리게 담겼다. 만지에게 엄마 현숙이 전하는 “너는 너로만 살라”는 위로 한마디는 묵직하게 다가온다. 원작을 읽어야만 즐길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원작 속 세상 이전 혹은 이후의 새로운 주인공을 내세우기도 했다. 미래세대의 새로운 생명을 그린 소설 ‘싱커’(2010년)의 저자 배미주는 한 역학조사관이 기후변화로 물에 잠긴 옛 서울로 파견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완성도 높은 신작 소설집이자, 원작으로 이끄는 매력을 갖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세 번째, 네 번째 엔딩을 그리게 된다. 작품 속에서 스쳐지나간 인물이라도 모든 삶은 조명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첫 번째, 두 번째 작품에서 주인공이 아니었던 인물들도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본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길거리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커플이 싸움하는 걸 직관하는 기분이다.” 최근 종영한 카카오TV 드라마 ‘도시남녀의 사랑법’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 같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연스러운 연기와 더불어 인터뷰 형식의 ‘페이크 다큐’식 연출이 합쳐져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주인공들의 러브스토리도 상당한 공감을 샀다. 이은오(김지원 분)는 자신을 ‘윤선아’라는 인물로 속인 채 박재원(지창욱)과 사랑하다가 잠수를 탄다. 서린이(소주연)와 최경준(김민석)은 오랜 커플이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특히 주인공 모두 자신 안에 다른 자아를 품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춘인 만큼 2030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다. 종영 이후에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넷플릭스에서 TV 프로그램 순위 10위 이내를 유지하고 있다. 이 드라마를 연출한 박신우 PD(사진)를 25일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인터뷰 형식을 드라마 전면에 적용한 이유는…. “대본을 받고 형식을 고민했다. 남의 인생을 훔쳐보는 재미를 드라마의 매력이라고 하지 않나. 그 즐거움을 형식적으로 많이 끌어올리려고 했다. 배우들에게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살려 평상시 본인의 모습으로 촬영할 것을 주문했다.” ―애드리브도 많이 허용했겠다. “신(scene)의 일부로서 늘 있었다. 배우들의 습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13회에서 비 내리는 날 재원이 은오를 데려다주려다가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갑자기 재원이 선루프를 만지작거리는데 원래라면 뜬금없어 편집했겠지만 ‘페이크 다큐’ 형식이라서 살렸다.” ―형식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OTT 플랫폼을 선택했나. “반대다. OTT 플랫폼의 미드폼(회당 20∼30분 분량) 드라마를 만드는데 어떻게 템포를 올릴지 고민하다 보니 화법에 다양한 변주를 줬다. 인터뷰 장면을 보면 격식을 차려 카메라를 응시한 채 답하거나 자기 일을 하면서 말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일상을 카메라가 무작정 따라다니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뛰는 느낌이 나도록 카메라 워킹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럼 인터뷰어는 누군가. “개인적으로 만든 세계관에서 인터뷰어는 인터뷰 애플리케이션(앱) 제작진이다. 주인공들이 인터뷰에 참가하며 앱을 사용하는 거다. 앱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텍스트로 전달받을 수 있다. 다만 모든 내용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OST도 이를 의식해 만든 건가. “맞다. 이 세계관에서 히트곡들이 따로 있을 것 같았다. 남혜승 음악감독과 함께 록 밴드 ‘롤링 스톤스’를 표방한 새 밴드와 노래를 만들었다. 뮤직비디오도 새로 촬영해 쿠키 영상으로 내보냈다.” ―재원과 은오는 첫 만남 장소인 강원 양양과 서울에서의 캐릭터가 다르다. 그렇게 만든 이유가 있나. “사실 이 드라마는 설정이 다큐이기에 과거였던 양양 부분이 영상화되는 건 불가능하다. 이 부분은 둘의 회고이고, 그래서 미화가 있다. 우리가 과거 연애담을 이야기할 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과거가 되레 아름답게 정물처럼 표현됐을 때 현재 모습이 더 생동감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길거리에서 친구를 기다리다 커플이 싸움하는 걸 직관하는 기분이다.” 최근 종영한 카카오TV 드라마 ‘도시남녀 사랑법’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 같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연스런 연기와 더불어 인터뷰 형식의 ‘페이크 다큐’식 연출이 합쳐져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주인공들의 러브스토리도 상당한 공감을 샀다. 이은오(김지원 분)는 자신을 ‘윤선아’라는 인물로 속인 채 박재원(지창욱)과 사랑하다가 잠수를 탄다. 서린이(소주연)와 최경준(김민석)은 오랜 커플이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지는 이야기를, 오선영(한지은)과 강건(류경수)은 확실히 끝맺지 않은 커플의 일화를 다뤘다. 특히 주인공 모두 자신 안에 다른 자아를 품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춘인 만큼 2030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다. 종영 이후에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 넷플릭스에서 TV프로그램 순위 10위 이내를 유지하고 있다. 내용이나 표현법에서 ‘리얼 로맨스’라는 평가를 받은 이 드라마의 연출자 박신우 PD를 25일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인터뷰 형식을 드라마 전면에 적용한 이유는. “대본을 받고 형식을 고민했다. 남의 인생을 훔쳐보는 재미를 드라마의 매력이라고 하지 않나. 그 즐거움을 형식적으로 많이 끌어올리려고 했다. 배우들에게도 최대한 자연스런 스타일을 살려 평상시 본인의 모습으로 촬영할 것을 주문했다.”―애드리브도 많이 허용됐겠다. “신(scene)의 일부로서는 늘 있었다. 배우들의 습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13회에서 비 내리는 날 재원이 은오를 데려다주려다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갑자기 재원이 선루프를 만지작거리는데 원래라면 뜬금없어 편집했겠지만 ‘페이크 다큐’ 형식이라서 살렸다.”―형식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OTT 플랫폼을 선택했나. “반대다. OTT 플랫폼의 미드폼(회당 20~30분 분량) 드라마를 만드는데 어떻게 템포를 올릴지 고민하다보니 화법에 다양한 변주를 줬다. 인터뷰를 봐도 앉아서도, 일하면서도 한다. 정해지지 않은 형식으로 주인공의 일상을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뛰는 느낌이 나도록 카메라 워킹을 시도하기도 했다.”―그럼 인터뷰어는 누군가. “개인적으로 만든 세계관에서 인터뷰어는 인터뷰 애플리케이션(앱) 제작진이다. 주인공들이 인터뷰에 참가하며 앱을 사용하는 거다. 앱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텍스트로 전달받을 수 있다. 다만 모든 내용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OST도 이를 의식해 만든 건가. “맞다. 이 세계관에서 히트곡들이 따로 있을 것 같았다. 남혜승 음악감독과 함께 록 밴드 ‘롤링 스톤스’를 표방한 새 노래를 만들었다. 밴드 이름과 뮤직비디오를 새로 촬영해 쿠키 영상으로도 내보냈다.”―재원과 은오는 첫 만남 장소인 강원 양양과 서울에서 캐릭터가 다르다. 그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나. “사실 이 드라마는 설정이 다큐이기에 과거였던 양양 부분이 영상화되는 건 불가능하다. 이 부분은 둘의 회고이고, 그래서 미화가 있다. 우리가 과거 연애담을 이야기할 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과거가 되레 아름답게 정물처럼 표현됐을 때 현재 모습이 더 생동감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920년 3월. 러시아어가 유창했던 조선인 청년 박영빈의 요청으로 체코군 군의관 베리코프가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 60정을 샀다. 한 달 뒤엔 박영빈이 직접 총 300정을 사들였다. 박영빈 뒤에는 당시 러시아 지역 대한적십자회 대표였던 박처후(1883∼?)가 있었다. 미국 한인소년병학교장이기도 했던 박처후는 항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 구매와 간호사 양성에 적극 나섰다. 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한 박처후와 채계복(1900∼?·여)이 다음 달 1일 열리는 3·1절 102주년 기념식에서 정부 독립유공자 훈장(애족장) 수여자로 선정됐다. 대한적십자회 활동을 주요 공적으로 정부 훈장이 수여되는 건 이들이 처음이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된 몽양 여운형이나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안정근(안중근 의사의 동생)은 일제강점기 대한적십자회 총재를 지낸 적이 있지만, 이 활동을 주요 공적으로 인정받은 건 아니었다. 1919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이던 안창호 등이 세운 대한적십자회는 그동안 구호사업 등 인도주의 활동으로만 일반에 각인됐었다. 그러나 최근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 대한적십자회는 1920년 2월 독립전쟁에 대비한 ‘간호원 양성소’를 설치하는 등 항일 투쟁에 적극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국제적십자사연맹에 가입해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한 것도 이들 노력이었다.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적십자회가 무장 투쟁에도 적극 나섰던 것이다. 1883년 평북 순천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박처후는 24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1905년 6월 제국신문에 “자유와 권리란 학식이 있는 자만이 아는 것이며, 학식이 있으려면 교육과 외국 유람이 중요하다”는 글을 남겼다. 이어 1908년 6월 공립신보에 ‘미주 유학생 박처후’라는 필명으로 “완전한 독립국, 완전한 자유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1909년 9월에는 신한민보에 “동포들은 탄식만 할 게 아니라 무기를 구입하고 전 국민이 군사훈련을 받아 나라를 다시 찾고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항일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1920년 1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연해주에서 양성한 간호사가 미국적십자사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리기도 했다. 대한적십자회에선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대거 활약했다. 이 중 채계복은 러시아 지역에서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함남 문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채성하의 맏딸인 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에도 수차례 등장한다. 대한적십자회 간호사였던 그는 1919년 12월 중국 간도에서 12명의 간호사가 미국적십자사로부터 간호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간도 15만 원 사건’ 기록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이 사건은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철혈광복단이 일제의 조선은행 자금을 탈취한 것이다. 채계복은 당시 거사에서 핵심 인물이던 독립운동가 최봉설의 총상을 치료해줬다. 이후에도 채계복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은 최봉설은 훗날 그의 이름 중간 글자를 따 ‘최계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박환 교수는 “대한민국 육군의 정통성이 신흥무관학교에 있다고 보듯, 국군간호사관학교의 정신적 모태는 대한적십자에 있다”고 말했다.전채은 chan2@donga.com·김태언 기자}

“쓱싹 쓱싹” 메밀을 키질(키로 곡식을 까부르는 것)하는 소리가 정적을 가른다. “사부작” 대더니 이어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뒤따른다. 메밀이 맷돌에 갈리고 있다. 이어 갈린 메밀가루를 “끼익 쿵” 소리와 함께 디딜방아로 찧는다. 이윽고 한 그릇의 메밀국수가 소복이 마련된다. 옛 방식으로 국수 한 그릇을 내기까지 발생하는 소리는 그 자체로 힐링 ASMR(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최근 유튜브 ‘문화유산채널’에 메밀국수 만드는 과정을 담은 ASMR 콘텐츠 ‘메밀꽃 필 무렵’을 선보였다. ‘K-ASMR’라는 타이틀로 다양한 전통의 소리를 담아낸 콘텐츠 중 하나다. 앞서 지난해 2월 업로드한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 ASMR편은 23일 기준 25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메밀국수 동영상에서 “오늘은 메밀국수나 한 그릇 해먹지?”라고 운을 떼는 주인공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 보유자인 김남기 옹(80). 그는 영상 중간중간 구성진 목소리를 선보인다. “이리 오게/저리 오게/내옆으로 오게/석삼년 그립던/손목을 잡아나 보세.” “늙지 말아라/인삼 녹용주 매일 장복했는데/원수 같은 홍안에/백발이 머리끝에 왔구나.”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과 늙음을 한탄한 가사에 맞춰 김 옹이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 겹친다. 하나의 소리만 극대화해 표현하는 일반 ASMR와 달리 이 영상에는 “빨리 (맷돌) 돌리면 안 되지”와 같은 일상의 대화도 자연스레 녹아 있다. 음향과 영상을 총괄한 이진원 미디어하마 대표는 “역사는 진행되는 것이다. 노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하는 말들도 하나의 역사이며 우리가 아련히 기억하는 정서를 건드릴 수 있다”고 했다. 메밀국수 만들기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건 아니다. 이 대표는 “지정문화재만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흘러가는 생활 자체도 문화재일 수 있다”며 “메밀은 구황작물로서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특수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역문화 포털 ‘지역N문화’에 따르면 메밀은 흉년에도 어느 정도의 수확량을 거둘 수 있는 작물로, 강원도 산골에서 많이 재배해왔다. 총 17분 분량의 메밀국수 영상을 촬영하는 데 걸린 시간은 꼬박 일주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우려로 제작 인원을 당초 계획의 절반인 5명으로 줄여 촬영한 데 따른 것이다. 강원도 산골은 해가 빨리 지는 데다 비행기 소리 같은 소음을 피하기 위해 특정 시간대(오전 11시∼오후 3시)에만 촬영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제작진은 샷건 마이크(현장음)와 와이어리스 마이크(말소리)를 이용해 생생한 현장음을 잡아내기 위해 공을 들였다. 문화재재단은 메밀국수를 비롯해 고즈넉한 산사에서 차 만드는 과정을 담은 ‘제다’, 장인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장 담그기’ ‘옹기장’ ‘나전장’ 등을 다음 달부터 매달 한 편씩 순차 공개할 예정이다. 김한태 문화재재단 콘텐츠기획팀장은 “시청각적으로 편안한 한국의 자연과 무형유산이 ASMR 재료로서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며 “유튜브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세대가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누렸으면 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쓸 수 없는 날에는 아무리 해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 나는 집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화장실 안이다. 아니, 볼일도 없는데 여긴 뭐 하러 들어왔지.” 유명 작가들은 펜만 들면 글이 술술 풀리는 줄 알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마감 시간을 목전에 놓고도 쓰지 못하는 괴로움에 사무친다. 생전 40편이 넘는 작품을 쓴 일본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요코미쓰 리이치(1898∼1947)도 마감 압박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런 애타는 감정이 담긴 한 편 한 편 역시 또 하나의 명문이다. 이 책은 글 잘 쓰기로 유명한 일본 저명 작가들의 ‘마감 분투기’를 모았다. “이건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라며 원고지를 벅벅 찢는 주인공은 다자이 오사무(1909∼1948). 이 책의 첫 장을 여는 그는 소설 ‘사양’과 ‘인간실격’의 저자다. 다자이는 1940년 미야코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10장짜리 원고를 쓰느라 나흘 동안 끙끙댄 자신을 그렸다. 결국 술집으로 향한 그는 대작가의 차분함을 흉내 내며 조용히 술을 마시는가 싶더니 취기가 올라 형편없이 망가진다.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소설 ‘낡은 집의 춘추’로 최고 권위 문학상인 나오키상을 수상한 우메자키 하루오(1915∼1965)는 잡지 ‘신조’ 신년호 마감에 시달리던 어느 날 독감으로 앓아누웠다. 원고 독촉 전화를 건 편집자에게 열이 38.5도나 된다고 했건만 편집자는 꾀병을 의심한다. 이튿날 열이 37.2도로 내려갔는데 마침 편집자가 사나운 발소리를 내며 작가를 찾아왔다. 우메자키는 “체온이 38.7도나 된다”며 가냘픈 목소리를 짜내 마감 독촉을 면했다. 작가는 “사실대로 말하면 당장 일어나 글을 강요할 게 뻔했다”며 그날을 회상한다. 일본의 대문호로 꼽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마저 “글쓰기라는 천벌을 받은 것 같다”며 고통을 토로한다. 마키노 신이치(1896∼1939)는 도무지 써지지 않아 냉수욕을 하고 홧술을 들이켠다. 애초 마감을 지킬 마음이 없거나, 자기혐오에 빠지는 등 작가들의 인품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들을 바라보는 편집자도 괴로운 건 매한가지. 원고를 기다리는 편집자는 애간장이 녹는다. 아쿠타가와의 친구 무로 사이세이의 글을 보면 작가와 편집자의 씨름은 실로 살벌하다. 아쿠타가와는 여느 작가들과는 달리 “도저히 쓸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편집자도 물러서지 않는다. “원래 당신 소설은 짧으니 두 장이라도 괜찮은 소설이 된다”고 설득했다. 한참의 입씨름 끝에 다음 호에는 글을 쓰겠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편집자는 자리를 떴다. 작가와 편집자의 치열한 샅바싸움의 결실이 바로 우리 주변의 책들이다. 대문호로 평가받는 작가들이 마감을 앞두고 벌이는 기발하고 엉뚱한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우리 역시 저마다의 마감에 쫓기며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인, 주부, 프리랜서, 아르바이트 등 모든 직역에는 각자의 마감 시간이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은 모두에게 위안이 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존 분청사기실과 백자실을 합쳐 1년 동안 리모델링한 ‘분청사기·백자실’을 18일 열었다. 분청사기(粉靑沙器)는 회청색 흙으로 만든 그릇에 백토를 입힌 뒤 장식한 도자기. 고려 말 상감청자(상감기법으로 무늬를 넣은 청자)에서 비롯됐다. 백자(白磁)는 13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낸 최고급 도자기로, 조선 백자는 절제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박물관에 따르면 분청사기와 백자는 15세기부터 16세기 중반까지 함께 애용됐다. 그러다 1467년 국가가 운영하는 도자기 제작소인 ‘관요 체제’가 확립된 이후 백자가 주류로 부상했다. 전시에선 분청사기의 제작기법과 더불어 분청사기 표면에 백토를 씌워 백자로 이행하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국보 제259호 ‘분청사기 구름 용무늬 항아리’와 보물 제1437호 ‘백자 달항아리’ 등 총 400여 점을 선보인다. 이 중 달항아리 백자는 독립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은 “백자에 새겨진 자연의 생명들과 분청사기에 보이는 흙의 질감을 관람자가 느낄 수 있도록 연출했다”며 “조선 도자기에 담긴 한국의 자연미를 부각했다”고 밝혔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시간을 거슬러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일반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질문이자, 많은 드라마들이 주제로 삼는 의문이기도 하다. OCN은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의 후속작으로 타임워프(과거나 미래의 일이 현재에 뒤섞여 나타나는 것)물을 선택했다. OCN의 올해 첫 작품인 12부작 드라마 ‘타임즈’는 2020년을 사는 기자인 서정인(이주영)과 2015년의 기자 이진우(이서진)가 전화로 연결되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2015년 대통령이자 서정인의 아버지인 서기태(김영철)가 암살된 사건을 파헤친다. 한국 드라마에서 시간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타임즈와 설정이 비슷한 tvN 드라마 ‘시그널’(2016년)이 대표적이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시그널은 최고 시청률 12.5%로 두꺼운 팬층을 확보했다. 무전을 통해 연결된 현재와 과거의 형사들이 오래된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 방영 후 시즌2를 만들어 달라는 팬들의 요청이 적지 않았다. 이와 함께 OCN의 ‘터널’(2017년), ‘라이프 온 마스’(2018년)도 시간여행 드라마에서 수작으로 꼽힌다. 숱하게 쓰인 소재임에도 꾸준히 사랑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시간을 넘나든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재밌다. 국내 첫 시간여행 드라마로 평가받는 ‘천년지애’(2003년)를 비롯해 ‘인현왕후의 남자’(2012년),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2016년), ‘명불허전’(2017년), ‘철인왕후’(2020년) 등은 사극 요소를 가미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여기엔 서로 다른 시대의 언어와 생활습관이 빚는 코믹한 내용이 가미된다. 타임워프 혹은 시간여행 드라마는 판타지 요소만이 매력은 아니다.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어느 세대에나 통하는 명쾌한 주제를 전달하기에도 효과적이다.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2013년), ‘고백부부’(2017년), ‘아는 와이프’(2018년) 등은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바꾸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교훈을 준다. 20일부터 방영되는 ‘타임즈’의 제작진은 기존 작품과의 차별 요소로 ‘정치 미스터리’ 장르를 꼽았다. 제작진은 15일 보도자료에서 “선의든 악의든 이해관계가 강하게 상충하는 정치야말로 우리 인생을 가장 적나라하게 담은 곳”이라며 “아버지를 살리고 싶은 소망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 군상의 이야기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삼국시대 부장품인 5세기 백제의 금동신발 2점(사진)이 보물로 지정된다. 금동신발은 귀고리, 목걸이, 팔찌 등과 함께 고대 무덤에 부장된 대표적인 금속 공예품이다. 금동신발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건 처음이다. 16일 문화재청은 “전북 고창 봉덕리 1호분과 전남 나주 정촌고분에서 각각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신발 2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백제 고구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총 30여 점이다. 이 중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2점은 완형에 가깝게 보존된 보기 드문 사례다. 고창 봉덕리 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5세기 중반경 지배층의 장례에서 고인의 발에 신긴 의례용품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백제 중앙에서 제작돼 지방 유력 지배층에 내려준 물품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전체 모양은 배와 유사하며, 용과 연꽃 등의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바닥에는 못(스파이크)이 박혀 있는 등 백제 금동신발의 전형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다.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봉덕리 1호분 것에 비해 늦은 5세기 후반에 제작된 걸로 추정된다. 특히 발등 부분에 부착된 용머리 장식은 현존하는 금동신발 중 유일한 사례다. 최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이 신발의 주인공을 40대 여성으로 추정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일제강점기 상업학교를 졸업한 조선인들은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조선저축은행 취업을 꿈꿨다. 그러나 이들이 처한 식민지 현실은 냉혹했다. 조선인 졸업생들은 성적이 우수해도 은행보다 상대적으로 처우가 떨어지는 금융조합 등에 취업하는 게 보통이었다. 최근 발간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푸른역사)는 1920, 30년대 중 9개 연도에 걸쳐 충남 논산시 강경상업학교 졸업생 283명(조선인 161명, 일본인 122명)의 학업성적과 취업현황을 전수 분석했다. 이 가운데 조선·식산·저축은행에 취업한 조선인과 일본인은 각각 △졸업성적 상위 10% 이내 3명 △10∼30% 1명이다. 성적 상위 30% 이내 조선인 졸업생 수(59명)가 일본인(19명)보다 3배 이상으로 많은 걸 감안하면 민족차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인 정연태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민족 간 취업경쟁에서 성적 이외 변수가 영향을 끼친 걸로 봤다. 당시는 취업에서 학교장 추천이나 면접이 중요했다. 추천서에는 학적부에 적힌 학업성적, 담임교사가 작성한 행실 및 근태 평가, 학사징계 여부가 포함됐다. 행실 평가와 징계는 학교 당국의 주관적 판단에 달린 만큼 민족차별이 이뤄지기 쉬운 구조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광복 이전까지 총 25년 동안 강경상업학교 졸업생 977명과 중퇴생 512명의 학적부도 조사했다. 연구대상으로 이 학교를 선정한 이유에 대해 정 교수는 “강경상업학교는 당시 재학생의 한일 학생 비율이 엇비슷해 같은 조건 아래 민족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파악하기가 적합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중퇴생 학적부와 취업현황이 담긴 동창회 회원명부를 분석해 입학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과정에서 조선인이 차별받은 실태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실제로 이 학교가 3년제에서 5년제로 승격된 1925년 일본인은 40여 명이 지원해 29명이 합격했지만 조선인은 120여 명의 지원자 중 21명만 합격했다.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생 1인당 평균 징계건수는 조선인이 0.25건이었지만 일본인은 0.13건이었다. 재학생들의 퇴학에도 민족차별 흐름이 엿보인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42년까지 조선인 학생은 3100명 중 약 8%(240명)가 중퇴해 일본 학생들의 중퇴 비중(12%)과 비슷하다. 하지만 ‘비행’을 이유로 퇴학당한 조선인(14명)은 일본인(3명)의 4배가 넘었다. 더 눈여겨볼 점은 중퇴 사유다. 양측 모두 경제사정이나 사망으로 중퇴한 비중은 각각 24.3%, 26%로 비슷했지만 나머지에선 차이가 컸다. 조선인 학생은 결석(12.3%) 사상·운동(9.9%) 비중이 높은 반면에 일본 학생은 성적(23.1%) 질병(16%) 전학(13%)의 비중이 높았다. 1923∼1945년 1∼5학년에서 조선인 평균 성적이 일본인에 뒤진 경우가 단 2건에 그친 걸 감안하면 중퇴 사유에도 민족차별의 요소가 반영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 중인 배우 윤정희 씨(77)가 프랑스에서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75)와 딸 진희 씨로부터 방치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백 씨 측은 허위 사실 유포라며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영화배우 윤정희를 구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윤정희는 남편과 별거 상태로 배우자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파리 외곽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홀로 알츠하이머와 당뇨와 투병 중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처에 딸이 살기는 하나 직업과 가정생활로 바빠서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간병인도 따로 없고 외부와 단절된 채 거의 독방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 딸에게 형제들이 자유롭게 전화와 방문을 할 수 있도록 수차례 요청했으나 감옥의 죄수를 면회하듯이 전화는 한 달에 한 번 30분, 방문은 3개월에 한 번씩으로 정해줬다”고 주장했다. 청원 글에 있던 윤정희의 실명은 이후 ‘***’으로 지워졌다. 개인정보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이 포함된 청원은 관리자가 삭제하거나 일부 내용을 숨김 처리할 수 있다. 백 씨의 국내 소속사 빈체로는 7일 입장문을 통해 “백건우와 딸에 대한 허위사실이 유포되고 있다. 해당 내용은 거짓이며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빈체로 측은 “윤정희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생활해야 하는 요양병원보다는 가족과 가까이서 지낼 수 있는 백진희의 아파트 바로 옆집에서, 백건우 가족과 법원이 지정한 간병인의 따뜻한 돌봄 아래 생활하고 있다”며 “주기적인 의사의 왕진 및 치료와 함께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게시글에 언급된 제한된 전화 및 방문 약속은 모두 법원의 판결로 결정됐다”고 했다. 빈체로 관계자는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청원인이 누구인지 추측되지만 가족과 관계되는 내용이어서 밝히긴 어렵다”면서 “상황을 지켜본 뒤 법적 대응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앞서 윤 씨의 동생 3명은 2019년 프랑스 법원이 백 씨와 진희 씨를 윤 씨의 재산·신상 후견인으로 지정한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파리지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지난해 11월 파리고등법원 항소심에서 윤 씨의 동생들이 최종 패소해 백 씨와 진희 씨가 후견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대표적인 ‘잉꼬 부부’로 불리던 윤 씨와 백 씨는 해외 연주와 행사에 늘 함께 다녔다. 그러다 2019년부터 윤 씨가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알츠하이머로 10년간 투병해 온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바 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대기업 계열사 임원까지 지낸 65세의 다케와키 마사카즈. 정년퇴직 송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그가 지하철에서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의식을 잃은 채 집중치료실에 사흘간 누워 있던 그는 별안간 포근함을 느끼며 깨어난다. 다케와키를 찾아온 사람은 ‘마담 네즈’라는 정체불명의 여인. 그녀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나온 다케와키는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다케와키는 어느새 일본 도쿄(東京) 신주쿠 고층빌딩 안 고급 레스토랑에 와 있다. 취향에 꼭 맞는 음식을 먹으며 그는 자신의 월급쟁이 인생을 반추한다. 1951년 태어나 고도 경제성장기에 자랐고 입사 후에는 꿈이나 취미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일만 했다. 밤에는 녹초가 돼 지쳐 기절한 듯 잠들고, 아침에는 벌떡 일어나 직장으로 향한 지 44년. 그런데 직장에서의 정년퇴직이 ‘인생 정년퇴직’이라니. 아직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마담 네즈는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라며 위로한다. 이후로도 여행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는 죽마고우를 만나거나, 젊어진 육체를 얻어 한여름 바닷가에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부모에게 버려져 아동보호시설에서 자란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아들의 죽음을 놓고 아내와 서로를 탓하며 타인보다 못한 타인으로 지낸 때를 기억하고는 자신을 꾸짖는다. 주인공은 우리 곁의 누군가, 혹은 나 자신이다. 직장에서,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서 부대끼는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상처를 감내하고 있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주인공은 위대한 사람이다. 자기반성을 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사람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타인을 좀 더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관대함이야말로 다케와키가 불행의 터널을 지나 ‘평범한 사람’이 되는 꿈을 이룬 것처럼, 우리에게 닥친 이 겨울을 버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는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카메라에 처음 비춰진 건 조선왕조 공주와 옹주가 입던 정통 예복. 이윽고 화면은 경복궁 교태전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공주로 옮겨간다. 이때 갑자기 그가 어디론가 뛰기 시작한다. 공주가 도착한 곳은 덕수궁 석조전. 여기서 체크무늬나 올 블랙의 현대식 한복을 입은 공주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경복궁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쇼는 끝이 난다. 2분 남짓한 이 영상은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지난해 12월 개최한 비대면 패션쇼 ‘코리아 인 패션(KOREA IN FASHION)’의 홍보용으로 제작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전시 플랫폼인 카카오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데 4일 오전 기준 누적 조회수는 약 93만 뷰에 이른다. 재단은 “문화유산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바꾸고 문화유산으로서 한복의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지난해 처음 기획했다”고 밝혔다. K드라마의 높은 인기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이 늘면서 경복궁 앞에는 한복 대여점이 잇달아 생기기도 했다. 코리아 인 패션쇼에 나오는 세련된 한복들은 김영진 디자이너(50·여)의 손을 거쳤다. 그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고애신(김태리)이 입은 한복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3일 동아일보와 만난 그는 책 ‘조선공주실록(역사의아침)’부터 보여줬다. 5년 전 여행 중 우연히 이 책을 읽고서 역사 속 숨겨진 공주들을 위한 패션쇼를 열고 싶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공주들은 정략혼을 강요받는 등 개인적인 삶을 희생당했다. 김 디자이너가 천진난만한 공주의 아름다운 시절이나 활쏘기, 서예를 즐기는 다양한 공주상을 그린 이유다. 재단이 “궁과 한복을 소재로 영상을 찍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공주를 테마로 할 것을 요청했다. 공주를 콘셉트로 작업을 시작했지만 왕, 왕비, 세자빈에 비해 공주 의복에 대한 사료는 많지 않았다. 그는 국립고궁박물관 도록 등을 통해 순조 둘째 딸 복온공주의 활옷(조선 중·후기 공주와 옹주가 중요한 국가의식 때 입던 예복)과 셋째 딸 덕온공주의 녹원삼(조선시대 공주와 옹주의 예복)을 소재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는 단순히 전통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현대의 공주라면 어떤 궁중복을 입을까’를 궁리했다. 대표적인 게 분홍색 한복. 조선시대 분홍색은 정3품 이상 남성 관리들이 입던 복식이나 궁인들의 속옷 색상이었다. 김 디자이너는 “속옷을 겉옷으로 만들고 남자 옷을 여자 옷으로 만드는 등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패션을 창조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낀다”고 했다. 공주들이 많이 입던 ‘당의(궁중 평상복)’도 각색했다. 특히 당의 앞뒤에 수놓은 ‘문자도’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조선시대 주요 덕목이던 삼강오륜을 나타내는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의 8자를 썼다. 하지만 김 디자이너는 대신 아(我)와 애(愛)를 새겼다. 그는 “문자는 시대를 반영한다. 현대사회에선 충효보다 내가 중요한 세상인 만큼 글자를 바꿨다”고 설명했다. 고증과 변화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김 디자이너는 한복도 패션임을 강조했다. 공작털이 달린 티아라(작은 왕관)를 이번 패션쇼에서 선보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고려시대, 삼국시대 한복이 달랐고,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전기·후기 한복 모양이 다르다”며 “과거의 전통을 물려받는 것도 좋지만 나는 지금의 한복, 21세기의 전통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