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영

김유영 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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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유영 부본부장입니다.

abc@donga.com

취재분야

2024-03-27~2024-04-26
칼럼100%
  • “동네의 자부심은 아파트 브랜드 아닌 마을의 역사서 찾아야”

    ‘어디 사세요?’가 단순히 사는 곳만 묻는 질문이 아닌 요즘, ‘마을의 자존감’을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 서촌 주민들로 이뤄진 ‘서촌주거공간연구회’ 회원들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의 지도와 오래된 신문 등을 뒤지면서 마을을 탐구하고 마을 보존 운동도 함께 벌이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 누하동의 한 커피숍에서 이들을 만나봤다. 서촌은 청와대 서편의 인왕산 기슭 아래 있는 동네. 종로구 통의동, 창성동, 효자동, 체부동, 통인동, 누하동, 옥인동 등 15개 법정동이 포함된다. 조선시대 사대문 안에서도 중심 지역으로 역사가 가득한 동네지만 2011년경 5∼6층짜리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모임이 결성됐다. 도시계획 엔지니어인 장민수 씨(52)와 광고 촬영감독인 최문용 씨(51)가 모임을 공동으로 이끌고 회사원부터 한의사, 정치인, 작가 지망생 등 5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인사동 삼청동 북촌 등이 상업화되면서 관광지로 변모한 선례를 봤잖아요. 서촌만큼은 ‘사람 사는 동네’, ‘아이 키우기 좋은 동네’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모임을 만들었어요.”(장 대표) “외국에선 역사의 작은 흔적이라도 의미를 부여해서 보존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동네의 자부심을 지역의 재력이나 아파트 브랜드에서 찾곤 하는 한국과 대비됐죠.”(최 대표) 이들은 지금도 옛 지도와 신문 등 각종 문헌을 뒤져 역사의 흔적을 찾고 있다.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이 무기를 은닉했다 발각되어 단원들이 체포된 장소, 헤이그특사인 이준 열사의 부인이 사망한 집, 1970년대 신문의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우승한 우량아가 살던 집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흔적을 찾아낸다. 특히 광복절에는 마을 초등학생들과 ‘항일 답사’를 벌인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조직이 무기를 숨긴 장소 등을 찾아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고 그 앞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퍼포먼스를 소소하게 벌이는 식이다. 실패했거나 주목받지 못한 항일 운동을 찾아내서 마을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자는 취지다. 이들의 활동은 마을 탐구에 그치지 않는다. ‘마을의 내일은 내 일입니다’라는 모토로 마을에 사안이 있을 때에는 이를 벽보로 만들어 게릴라식으로 붙인다. 카피라이터인 주민이 문구를 만들고 캘리그래피(손으로 쓰는 문자)를 하는 주민이 썼다. 성과도 적지 않다. 천재시인 ‘이상의 집’이 낡았다며 이를 헐고 지하 2층, 지상 2층의 건물을 신축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세미나 등을 열어 가옥 보존을 이끌어냈다. 또 80여 년의 체부동 성결교회가 중국인 손에 넘어가려 했을 때에는 담당목사 등을 설득해 서울시가 매입하게 했다. 배화여고 과학관이 헐리고 외국인 학생 기숙사로 될 움직임이 있을 때에도 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여 문화재 지정을 받아내는 데에 일조했다. 최근엔 예산 2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공영 지하 주차장 건설 움직임이 있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서촌을 아이들이 대를 이어 살아도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동네로 만드는 걸 목표로 한다. “오래된 건축물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하잖아요. 새것을 무조건 동경하기보다는 오래되고 소중한 것에 가치를 두고 역사성을 찾아서 마을의 자존감을 찾으려 해요. 우리 아이들의 삶에 자양분이 되는 동네로 만들고 싶습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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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들 땀이 밴 정직한 농산물에 디자인 날개 달았어요”

    농산물을 유통하는 청년이 글로벌 디자인 대회인 ‘2016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해 화제다. 이 상은 독일 ‘iF 디자인어워드’와 미국의 ‘IDEA’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힌다. 주로 대기업이 타는 상을 이례적으로 영세업자가 거머쥔 것. 주인공은 한민성 ‘둘러앉은밥상’ 대표(35).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20대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는 30대에 창업에 나섰다. 대학 재학 시절 자전거로 전국 무전여행을 다니며 시골 농가에서 숙식했던 기억이 창업 아이디어로 발전했다. “강원도에서 애호박 10개를 1000원에 넘기는 농부님을 보고 충격받았어요. 도시에선 1개에 1000원에 팔리기도 하는데…. 농부님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고 느꼈죠. 농산물 유통 단계가 예닐곱 단계이다 보니 도시로 갈수록 가격이 부풀려졌기 때문이죠. 농부도 제값을 받고 소비자도 몸에 좋은 농산물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한 대표는 농가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던 것을 떠올리며 회사 이름을 ‘둘러앉은밥상’이라고 지었다. 스스로도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정직한 농산물’을 찾으려 했다. 화학비료나 제초제, 성장촉진제 등을 최소화한 농산물을 발굴하는 것. 이를 위해 한 달에 보름은 농가를 돌면서 숙식했다. 농사일을 거들면서 농산물이 자라는 과정을 배우고, 때로는 불시에 방문해 이들이 정직한 방법으로 기르는지 살폈다. 또 농산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생생하게 알려 소비자가 믿고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가 아무리 제대로 농사를 짓고 아무리 좋은 농산물을 발굴해도 소비자들이 사고 싶게 만들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란 점을 깨달았다. 하지만 영세 농가 입장에선 디자인 비용도 큰 부담이었다. 농부들이 잘되어야 자신도 잘된다는 생각을 했던 그는 총대를 멨다. 단순한 농산물 판매자가 아니라 농산물 경영자라고 생각한 그는 디자인도 함께 떠맡았다. 이번에 디자인상을 탄 홍삼 제품의 패키지도 마찬가지. 제품 포장에는 반딧불이의 반짝이는 빛과 우직하게 농사지으며 말없는 농부를 표현하는 말줄임표(6개의 점)가 그려져 있다. 자연농법으로 길러 인삼밭에 반딧불이가 되돌아온 것을 살린 것. “통상 시장에선 통통한 인삼을 선호해요. 때론 화학비료로 과식시키고 항생제를 쓰기도 하죠. 이 제품의 수확량은 일반 인삼밭의 3분의 1에 그치지만 농부님의 우직함 덕분에 인삼 본연의 특성을 지닐 수 있게 돼요.” 자연 그대로의 농산물을 강조한 덕에 시장 반응도 좋다. 대표적인 게 ‘땡땡 터져가는 무화과’. 제때 영근 무화과는 유통 과정에서 터져버려 대부분의 유통업자들은 덜 익은 무화과를 판다. 하지만 무화과 본연의 맛은 덜하다. 그는 잘 익은 무화과의 장점을 미리 소개하고 무화과가 터질 수 있음을 미리 알려 소비자 불만을 없앴다. 실제로 올해 준비한 물량은 ‘완판’됐다. 지난해엔 파크하얏트서울호텔과 손잡고 회사 농산물을 식재료로 쓴 브런치 메뉴를 개발하기도 했고, 명절 때면 대기업 회장 비서실에서 제품을 사가기도 했다. “소농(小農)이 살아야 우리 먹거리도 산다고 생각해요. 농부들과 도시 소비자들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같이 잘살 수 있는 법을 찾고 싶어요.” 등산화 차림에 초대형 배낭을 멘 그는 지방 농가로 다시 향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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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대석]“한국, 성장-분배 모두 위기… 구조개혁 이끌 통합리더십 절실”

    《 한국 경제 위기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최근 경제학자와 정책 당국자 사이에서 필독으로 읽히는 논문이 있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겸 중앙대 명예교수(80)가 집필한 ‘한국 경제의 위기와 구조개혁’이라는 논문이다. 그는 “평소 하고 싶던 말을 논문에 담았다”며 “아마 마지막 논문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경제학회가 발간하는 ‘한국경제포럼’의 최근호는 이 논문을 실었다. 박 전 총재는 한은 퇴임 직후부터 별도의 사무실이나 비서를 두지 않고 자택에서 혼자 집필·연구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1시간 반가량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경제의 현황을 조목조목 진단하면서 일부 지점에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경제의 위기 극복방안을 총체적으로 제언하는 모습에서는 오랜 기간 관계와 학계에 몸담은 관록이 엿보였다. 》 교육마저 세습 수단… 위험 사회 ―논문은 어떻게 구상하시게 됐습니까.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대목은 계층 상승의 희망이 사라진 것이에요. 어느 사회나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이 있죠. 하지만 적어도 내 자식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 살맛나잖아요.” ―스스로는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 타셨죠. “네. 전북 김제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개천에서 난 용’이 됐죠. 하지만 오늘날엔 이런 게 불가능해졌죠. 교육마저 계층 이동이 아닌 계층 세습의 수단이 됐으니까요. 흙수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의 어휘가 입증하죠. 대학 입학이 어렵고, 대학 가도 취업이 힘들고, 취업 돼도 집 사기 힘들고, 40대엔 퇴직을 고민하고, 60대엔 노후 보장 걱정하고…. 우리가 상당히 위험하고 불안한 사회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 위험한 사회라 보시는지…. “한국의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은 미국보다도 더 개인주의적인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이 자본 축적에서 중요한 수단이죠.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개인은 부(富)를 쌓았지만 사회적으로는 주거비와 생산원가가 올랐죠. 개인이익의 상당 부분은 사회이익의 희생으로 이뤄져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한 거죠.”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는 뭔가요. “한국 경제가 성장의 위기 못지않게 분배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거죠. 현실에선 잘난 사람뿐 아니라 못난 사람도 함께 살아야 하는데,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정부의 조정 기능이 미약해요.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 이르렀는데도 국민의 삶은 정체됐어요. 출산율과 노인 빈곤율·자살률 등 생활의 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죠.”‘가계 빈혈’ 따른 민생 위기 우려 ―국가는 잘살게 됐는데 국민은 나아지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엄밀히 말하면 ‘가계 빈혈’로 민생 위기를 겪기 때문이죠. 대기업 소득이 다른 부문으로 전달되지 않죠. 심장에서 나온 피가 온몸으로 돌아야 하는데, 순환이 안 되는 거죠. 대기업이 돈 벌어도 일자리를 창출 못해 혈관이 막히는 뇌졸중 위험도 있어요. ―일자리 불임 사회가 된 것이군요. “국내 실업자 80만 명, 이 중 청년 실업자가 40만 명인데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창출한 고용은 100만 명이에요. 임금과 땅값 교육비 등 각종 비용이 오르고 노사 분규가 투쟁적으로 바뀌었죠. 국내에 투자해도 수지가 안 맞아 해외에 나가는 기업이 많아졌죠. 연 평균 3%라는 성장의 과실조차 가계로 전달이 안 돼서 가계가 먹고살기 힘들어지는 거죠.” ―그간 경제 정책에서 가계를 등한시한 영향도 있지 않나요. 소비가 죄악시되던 시절도 있었는데…. “산업화 시대엔 대기업이 돈 벌면 국내 투자해서 고용을 늘린다는 낙수효과(trickling effect)가 통했어요. 가계가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기업이 투자하게 자금을 대주라는 논리죠. 지금은 대기업이 돈 벌면 해외 투자하거나 사내 유보로 쌓아두죠. 이젠 가계 소비를 늘려 기업 소득을 늘리게 하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분수효과(fountain effect)를 노려야 하죠.” ―소비를 늘리면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2013∼2015년 민간소비는 연 평균 1.9% 증가에 그쳤지만 이 기간 경제성장률이 연 3%임을 감안하면 경제성장률만큼만 소비가 늘어도 경제성장률이 4%로 높아질 수 있죠. 가계 소득을 늘리고 가계 부채를 줄여서 가계가 마음 편히 소비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산업화 시대 낡은 이념 버려야 ―대기업과 수출, 제조업 위주의 성장론이 약발을 다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나요. “산업화 시대 이념을 버리지 않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어요. 당시엔 투자처도 많고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죠. 자본과 기술을 수입하고 제품을 생산·수출해 고도성장했죠. 1990년대까지 투자 수출 제조업 모두 연 평균 10%대로 성장했고, 경제성장률도 연 평균 7∼8%나 됐죠. 하지만 나이 들면 잘 먹는다고 체력이 좋아지지 않아요. 지금은 성장률이 연 3%를 넘기기 힘들고 수출은 오히려 줄고 있죠.” ―지금의 침체 국면이 역대 위기와 다른 점이 있나요.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근본적으로 달라요. 과거엔 성장 능력(잠재성장률)이 양호해 성장을 떨어뜨린 요인을 제거하면 복원됐죠. 지금은 잠재성장률이 잘해야 3%일 정도로 곤두박질쳤고 실제 성장률과 잠재 성장률이 비슷해졌어요. 이건 경기순환적 침체가 아니라 장기적·구조적 침체로 봐야 해요.” ―올해 6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렸고 정부도 경기 부양책을 펴고 있는데…. “구조적 침체기에 금리 인하 등의 경기부양책을 펴면 치료제가 아니라 진통제가 돼요. 당장 효과가 있는 것 같아도 미봉책이죠. 일본도 1990년대 구조적 침체를 엔화 절상에 따른 일시적 침체로 ‘오진’해 경기부양책을 폈다가 자산 가격이 폭등했고 이후 거품이 꺼져 아직도 제로 성장을 하고 있죠. 한국도 이대로 10년 가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안 된단 보장이 없어요. 부동산 등 자산 거품만 남길 우려가 있죠. 최근 저금리로 가계부채 증가율이 가파르게 오르는 게 위험신호죠.” ―구조적인 침체에 대한 대응방안은 무엇입니까. “강도 높은 성장개혁과 분배개혁을 동시에 추진해야 해요. 노동·규제·교육개혁, 저출산 고령화 대책 등이 포함된 성장개혁과 양극화 해소, 빈부격차 축소, 사회보장 확대 정책을 아우르는 분배개혁을 추진하는 거죠.” ―개혁에는 비용이 수반되는데요. 세제 개편이 필요한 사안이 아닌가요. “각종 사회보험료 현실화, 공기업 흑자경영과 부채축소, 공공부문 연금 개혁 등 재정건전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으로 재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론 개혁에 연간 100조 원이 들 걸로 추산합니다. 증세도 포함되죠. 현재 최고소득에 대한 소득세율이 38%인데, 연 5억 원 이상 고소득자에겐 더 높은 누진세를 적용하고, 법인세나 개인소득세의 면세자 비율도 낮춰야 한다고 봅니다.”성장-분배 개혁 동시 추진해야 ―부동산 세제 개편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동산 보유세도 높여야 합니다. 자산에 대한 보유 과세도 한국은 선진국의 10∼20%에 불과해요. 전 평생을 단독주택에 살다가 관리가 힘들어 대형 아파트(200여 m²)로 이사했어요. 명절에 아들딸에 손자손녀까지 20여 명이 몰려와 대형 평수를 택했죠. 그런데 아파트 보유세가 연간 200만 원이에요. 일본·유럽 같으면 어림도 없죠. 저 같은 사람이 세금 제대로 내야 해요.” ―부동산 보유세가 오르면 집값에 영향이 있지 않겠습니까. “부동산을 경기부양책 수단으로 삼는 정책은 이제 그만해야 해요. 우리 세대가 집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으면 자식이나 손자 세대들이 희생하게 돼요. 한국 사회의 고비용 구조는 60년간의 부동산 가격 상승과 연관이 있죠. 다만 부동산 가격을 가파르게 내리면 부작용도 커서 현 수준에서 장기적으로 안정시키되 가계소득을 늘려 주거비를 내려야 합니다. 장기임대주택 건설을 중점 추진해 젊은이들이 살 집도 마련해야 하고요.” ―성장을 위한 구조 개혁과 관련한 의견은…. “현 교육 제도는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계층 대물림의 역할을 하죠. 또 대졸자 초임이 고졸자 초임보다 60%나 높은데 대졸자 실업률은 고졸자 실업률보다 높아요. 직업 교육에 대한 전면 개편이 필요해요. 고임금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위주의 노조가 강경 투쟁으로 기득권을 지키며 기업 경쟁력을 악화시키고 있어요. 대부분의 근로자가 노조에서 소외되어 있어서 노조가 대표성을 지니지 못하죠. 아울러 규제개혁, 공공부채 감축과 정부 개혁 등으로 체질을 바꿔야 해요.” ―일부 사안은 이해관계가 충돌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조개혁의 동력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구조개혁은 엄청난 변화를 수반하죠. 성장·분배 개혁을 패키지로 동시 추진하고 국민 통합운동과 연계하는 거죠. 대기업은 노동개혁, 규제개혁이 이뤄지면 법인세를 더 낼 수도 있고, 근로자는 소득재분배 정책으로 노동 복지가 개선되고 실업 노후 대책이 강화되면 노동개혁에 동의할 수 있겠죠. 2003년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노동개혁은 이런 식으로 성공했죠. 무엇보다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해요. 하루 속히 개혁이 이뤄져야 합니다.” :: 박승 전 총재는 :: △1936년 전북 김제 출생 △이리공업중고교,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석·박사 △1976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86년 한국국제경제학회장 △1988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1988년 건설부 장관 △1990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93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1997년 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1999년 한국경제학회장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2∼2006년 한국은행 총재  인터뷰=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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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영민 교수 “美대학생에 김소월詩 읽혀야죠, 그래야 세계화 됩니다”

    ‘채식주의자’ 등 한국 문학이 해외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가운데 평생 모은 문학 관련 서적 8000여 권을 미국 대학에 기증한 문학평론가가 있다. 그는 미국의 대학출판부들과 계약을 맺고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책을 펴내는 등 ‘한국 문학 전도사’로 나섰다. 주인공은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68). 최근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권 교수가 이번에 책을 기증한 곳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지난해부터 이 학교의 방문교수로서 한국 문학을 강의한 게 계기가 됐다. “버클리대에는 일본학과 중국학은 있지만 한국학은 없어요. 사실 미국에서 한국학 전공이 있는 대학은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시카고대 등 10여 곳에 불과해요. 전체 대학이 3000여 곳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미약하죠.” 그는 학교 측에 한국의 위상과 한국 문학의 중요성 등을 피력했고 버클리대의 총장과 담당 학장 역시 한국학 전공 설립에 공감해 이르면 내년에 한국학 전공을 개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공으로 개설돼도 관련 책이 부족하면 학생들이 한국을 제대로 배우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실제로 권 교수가 지난해 이광수와 김소월 등 한국 근대 문학자들의 작품을 강의해도 현지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구하기 어려워 애를 먹었다. 그는 한국 문학책이 국내 웬만한 도서관엔 있지만 미국에선 희귀본에 가깝다는 생각에 소장 도서를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책들은 1970년대 문학 평론을 시작할 때부터 수집한 8000여 권. 미국에 부치려 포장하니 라면 상자 100개에 육박했다. 중국에서 어렵게 수집한 광복 이후 시집도 일부 포함됐다. 권 교수는 버클리대에 소설가 조정래와 한강 등을 잇달아 초청해 현지 연구자들에게도 한국 문학을 적극 알릴 예정이다. “우리는 영어 번역서를 내면 미국 독자들이 읽을 것으로 여기지만 그럴 확률은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와 비슷해요. 미국에서 영어로 나온 문학 책 1만5000여 종 중에서 한국 문학은 10여 종 남짓한 실정이죠.” 그는 “한국 문학이 내부적으론 위축돼 있지만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무대를 세계로 넓혀야 한다”며 “우선 현지 문학 연구자나 문학인들이 한국 문학을 접할 기회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일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문학 하는 사람이라면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나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 중국의 모옌(莫言) 등 작가의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읽는 것처럼 한국 문학도 한국을 벗어난 국가에서도 문학 전문가들에게 두루 읽혀야 한다는 설명이다. 권 교수는 미국 명문대인 컬럼비아대 출판부와 UC출판부(버클리대 출판부)와도 계약을 맺고 한국 근현대 문학을 소개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특히 작품명과 등장인물, 작가명 등 명칭 표기법의 표준화에 주력하고 있다. “국내 최초 문학 동인지인 ‘창조’만 해도 더 크리에이티브(The Creative), 더 크리에이션(The Creation) 등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표기법이 표준화돼 있지 않으면 연구에 애를 먹을 수 있어요.” 평생을 문학평론가와 서울대 국문과 교수 등으로 지낸 그는 “한국 문학을 체계적으로 마무리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 문학 소개 서적의 집필 기간을 2년 정도로 잡았지만 할수록 어림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영시(英詩)를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가 ‘김소월 시가 기가 막히다’고 말하는 걸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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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인아 “생각의 힘 키우는 책방 마님 됐어요”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 한 건물의 4층에 올라서면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서재가 펼쳐진다. 큰 방(70m²)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10여 개 층의 높다란 서가엔 책이 빼곡하다. 서가 끝 목조 실내 계단을 올라가면 또 다른 서가가 있다. 높은 천장에는 오래된 샹들리에가 달렸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마룻바닥엔 안락한 소파와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다. 이곳은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55)이 이달 18일 문을 연 ‘최인아 책방’.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해 최초의 여성 상무, 최초의 여성 부사장 등 최초란 타이틀을 잇달아 거머쥔 그가 최근 ‘책방 마님’으로 변신했다. 독서량이 줄어드는 시대에 책방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2012년 돌연 사표를 내고 역사학을 공부했던 그는 일에 대한 갈증을 다시 느꼈다. 그러다 어느 조직의 부탁으로 지인들과 책읽기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늘 클라이언트(고객)를 염두에 두고 일했던 그에게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책읽기 프로젝트를 고객을 위해 벌일 게 아니라 차라리 우리가 하면 어떨까. 이젠 마음이 시키는 일, 가슴이 뛰는 일, 좋아서 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간 몰라서 못 하는 일보다 알면서 안 하는 일이 많지 않았던가….’ 그는 ‘생각의 숲’을 모토로 책방을 꾸미기로 했다. 스스로도 29년간 광고 일을 하며 책에서 생각의 자양분을 얻었다.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등 명카피도 책에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한 덕분이다. “‘광고쟁이’는 생각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싶어요. 광고쟁이라고 하면 톡톡 튀는 끼나 순발력을 떠올리지만 생각을 묵혀 본질을 꿰뚫는 힘이 더 중요하거든요. 아는 것이 힘이던 시대에서 생각이 힘인 시대가 됐어요. 창의력, 기획력, 문제해결력 등으로 통칭되는 생각하는 힘을 책방을 통해 북돋고 싶었죠.” 최 씨는 광고계 문화계 인사들에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해봄 직한 주제를 주고 그에 걸맞은 책을 추천받았다. ‘서른 넘어 사춘기를 겪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 고민할 때’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는 책’ 등이다. 지인 150여 명은 두툼한 추천서를 기꺼이 건넸다. 최 씨는 이를 바탕으로 책을 구비했고 책마다 추천인과 추천 이유를 손글씨로 정리해 끼워 넣었다. 나름대로 책을 분류·추천하는 북 큐레이션인 셈이다. “생각은 다양성에서 시작되잖아요. 모든 극장이 대작을 걸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모든 책방이 베스트셀러를 팔 필요는 없죠. 꾸준히 읽히는 책이나 좋은 책인데도 잊혀진 책을 책방에서 발견하게 해서 다양한 생각을 만나게 하고 싶어요.” 그의 책방은 오피스빌딩이 빽빽한 동네에서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체험하는 곳으로 통한다. 그는 앞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강의, 소규모 북클럽 등을 통해 책방을 다양한 생각을 접하는 플랫폼으로 만들 생각이다. “속도의 시대에 잠시 멈추고 생각하고 싶을 때, 마음이 흔들릴 때 들러주세요. 언제든 책방을 지키는 책방 마님이 될 거예요.”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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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는 행복한 놀이… 병원 지하서 ‘먹고 마시는 콘서트’도 열어”

    12일 인천 송도 신도시에서 열린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폭염 속에서 젊은 로커들이 열띤 공연을 하는 가운데 50대 포크 가수가 무대에 올랐다. 동물원 원년 멤버였던 김창기 씨(53)였다. ‘김창기밴드’의 리더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그는 이날 김광석 20주기를 기리는 스페셜 무대에서 절친한 친구였던 김광석의 노래를 열창했다. 최근 그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김창기소아청소년발달센터’를 찾았다. 막 진료를 마친 그에게 포크 가수가 로커들과 공연을 펼치는 게 어색하지 않은지 물었다. “잘하는 것보다 신나게 노는 게 목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백팩을 멘 채 병원 문단속을 마친 그는 같은 건물 지하 1층의 연습실로 내려가 바로 통기타를 멨다. 이곳은 김창기밴드의 ‘먹고 마시는 콘서트’가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공연장이기도 하다. 김 씨는 와이셔츠 차림으로 바로 기타를 치며 ‘혜화동’을 불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리메이크되어 다시 인기를 끈 노래였다. 그의 공연에는 50, 60대 중년은 물론이고 20대 젊은이 70∼80명이 몰려와 한바탕 놀고 간다. 이런 활동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답게 그는 ‘XYZ축 행복론’을 펼쳤다. “X축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Y축은 성취감으로 사회적 성공이 아닌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이뤘는지를 뜻하죠. Z축은 철학·종교로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에요. 이상적으로는 XYZ축 모두 선이 그어져야 하지만, 현실적으론 XY축만으로 충분해요.” 그에게 노래는 Y축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연세대 의대 시절 친구들끼리 서울 신촌의 카페에서 재미삼아 음악을 만들다 동물원을 결성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친구로 만나 서로를 ‘궁상 김창기’(궁상을 떤다 해서), ‘광토 김광석’(뭐든지 미친 듯이 열심히 해서)으로 불렀던 김광석도 함께했다. 당시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널 사랑하겠어’ 등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김창기 씨는 2000년 음악 활동을 접고 의사 생활에 전념했다. 어느 날 딸이 “아빠는 왜 노래 안 해”라고 말한 걸 계기로 2013년 음악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예전보단 반응이 미지근했다. 그는 생각을 바꿨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보다는 스스로 놀기 위한 욕망을 채우죠. 결과가 좋으면 좋겠습니다만 안 되는 건 수긍해야겠죠.” 그는 이번 페스티벌에서 비로소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다. 평소엔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김광석이 만든 ‘일어나’와 김광석의 애창곡 ‘나의 노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등으로 친구를 기렸다. 레지던트 시절 김광석의 죽음을 접하고 친구의 괴로움을 뒤늦게 알게 된 김 씨에게 김광석은 여전히 힘든 존재였던 게 사실. “형제나 다름없는 김광석을 사람들이 여전히 기억해줘서 고맙고, 김광석의 음악을 몰랐던 사람도 잘 아는 계기가 됐으면 하죠.” 현재 김 씨는 그동안 꿈꿔왔던 라디오 DJ 활동(CBS 그대 창가에 김창기입니다)을 하는 동시에 동아일보에도 ‘김창기의 음악상담실’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의 칼럼은 국내외 노래를 정신분석으로 풀이해 큰 호응을 받고 있다. 그는 다음 달 3일 ‘파주포크페스티벌 2016’(경기 파주시)과 다음 달 8일 ‘튠 업 콘서트, 영원한 청춘가객-김광석편’(충남 아산시) 무대에도 오른다. 각오를 물었다. “환희와 쾌락의 순간은 짧아요. 다시 한 번 신나게 놀다 올 겁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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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화하는 도시장터, 뒷얘기가 더 푸짐해요”

    “밥을 먹는다는 것은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게 아니라 벼에 스치는 바람, 비와 햇살의 속삭임, 나비의 춤사위와 농부의 땀방울을 느낀다는 것.” 농부와 요리사의 이야기를 담은 잡지가 나왔다. 잡지 이름은 ‘마르쉐@’. 서울에서 열리는 도심형 장터인 ‘마르쉐@’를 기획한 이보은 씨(48)가 펴냈다. 이 장터에 참여하는 청년 농부나 농부 2세 등 소농(小農)들과 요리사들이 제철 채소를 먹는 법, 자연과 하나 되는 삶, 이야기가 있는 식탁을 소개한다. 이 씨를 최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 씨가 마르쉐@를 고안한 건 여성환경연대에서 일하던 2000년대 중반 ‘슬로 라이프 운동’을 접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전히 제 시간의 중심이 되어 고속 사회에서 삶의 속도를 어떻게 늦출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죠. 그때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됐고 2011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공장 터에 도심 텃밭을 일구며 사람들과 작물을 기르고 함께 요리를 만들어 먹었어요.” 텃밭 농사를 통해 동료 농부들은 또 다른 가족이 됐다. 이 씨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2012년 10월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마르쉐@를 열었다. 프랑스어로 시장을 뜻하는 마르쉐(마르셰)에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인 at(@)을 붙여 ‘마르쉐@혜화’라 했다. 처음엔 텃밭 지인 30여 명으로 시작했다. 작은 규모였지만 친구가 생산한 작물을 친구가 소비한다는 우산우소(友産友消)의 취지를 살렸다. 참여자가 친구이기에 장터는 물건만 오가는 시장이 아니라 서로 ‘대화하는 시장‘임을 분명히 했고, 그 원칙은 계속 지켜지고 있다. 판매자를 뽑을 때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잘 풀어놓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 “소비자가 납득할 때까지 묻고 답하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요. 판매자도 소비자에게 어떤 요리와 농산물을 만들어야 할지 알게 되죠. 갖고 온 상품이 다 팔려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대화하는 게 불문율로 통해요.” 이 장터는 혜화동과 명동 등을 번갈아가며 2주에 한 번씩 열린다.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접할 수 있다는 입소문을 타고 하루 7000∼8000명이 다녀가며 ‘한국형 파머스마켓’으로 자리매김했다. 농부는 적채, 래디시, 고수, 루콜라 등 시중에서 접하기 힘든 신선한 작물을 들고 나온다. 요리사들은 산야초 김밥, 현미 케이크, 수수 와플, 앉은뱅이밀 빵, 곰취 모히토 등 우리 식재료를 쓴 음식을 내놓는다. 친구나 연인, 가족들이 이들과 대화하고, 장터 인근에서 음식을 먹는다. 그러는 동안 농부는 요리사에게 재료 가공법을, 요리사는 농부에게 재료 본연의 맛 등을 배운다. 처음엔 취미로 음식을 팔다가 서울 홍대 거리와 경리단길 등에 식당을 창업한 경우도 적지 않다. 달키친(채식 버거), 지새우고(수제 곡물잼), 댄디핑크(꼬치) 등이 대표적이다. 요리사에게 어떤 작물이 필요한지 알게 된 농부들은 유명 레스토랑에 납품하기도 한다. 농부들은 판매 수익의 10%를 기부해 장터 운영금을 대고 있다. 이 씨는 “이번에 잡지를 펴낸 것은 장터 안에서만 유통되는 이야기들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라고 강조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해지잖아요. 우리가 사는 환경과 어우러져 좋은 음식을 더 잘 먹을 수 있는 법을 함께 모색하고 싶어요. 잡지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장바구니를 챙겨 시장에 달려가거나 친구와 밥상에 둘러앉고 싶어진다면 좋겠어요.”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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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의 그늘 밝힌 1000개 ‘만두꽃’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동숭길 아르코미술관에서 ‘만두파티’가 열렸다. 가마솥을 여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꽃’이 피었다. 만두는 모두 1000개. 미술관 관람객과 행인들이 와서 만두를 먹었다. 노숙인을 위한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는 김현일 바하밥집 대표(51)와 직원들이 만든 만두다. 사람들은 만두를 먹으며 바하밥집에서 일하는 노숙인과 전과자, 미혼모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만두파티는 노숙인 등 전 세계 주거난민을 다룬 기획전인 ‘홈리스의 도시’와 연계해 열렸다. 전시를 기획한 목홍균 독립큐레이터가 노숙인의 생활을 알기 위해 김 대표를 찾아가 만두파티를 제안했다. 김 대표를 만나봤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 사업을 하다 빚더미에 올라 서울역 등을 전전하며 노숙을 했죠. 그러면서 안정적인 주거의 필요성을 절감했어요. 이후에도 퀵서비스와 포장마차, 생수 배달, 막노동을 하면서도 노숙인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그는 어린이집 차량 운전사를 하던 2009년 거리에서 남은 음식을 먹는 노숙인에게 컵라면을 사다준 것을 시작으로 혼자 ‘컵라면 급식’에 나섰다. 처음엔 5개로 시작했지만 차차 30개, 70개 등으로 늘었다. 동시에 사비를 털어 고시원을 빌렸다. “의식주가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먹는 건 무료 급식소 등지로 발품을 팔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만 주거 문제는 다르더라고요. 내 다리를 뻗고 안심하고 자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으면, 음식만 주는 건 일회성으로 그친다는 걸 절감했어요.” 그는 고시원에 노숙인을 데려와 공장 일자리를 소개해줬다. 이따금 자활에 성공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러다 2012년 김 대표에게 임대아파트가 생기자 큰 결심을 하게 됐다. 결혼 후 20여 차례 이사를 다녔지만 주거가 안정되니 평소 꿈꾸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2012년 어린이집 운전사를 그만두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바하밥집을 차렸다. 50m² 규모의 바하밥집에는 카페와 만두가게, 베이커리가 함께 있다. 김 대표와 알고 지내던 70대 만두 명인은 만두 제조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한 방송 작가는 노숙인 365명을 찾아다니며 백지에다 숫자를 쓰게 해 달력을 만든 뒤 이를 팔아 운영 자금을 댔다. 바하밥집 벽에서는 ‘브룩스가 여기 있다(Brooks is here)’란 문구를 볼 수 있다. 감옥생활을 다룬 영화 ‘쇼생크 탈출’의 인물 브룩스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고 출소한 후 적응을 못하고 모텔에서 자살하며 ‘브룩스가 여기 있었다(Brooks was here)’란 문구를 유서로 남겼다. 바하밥집은 이를 현재형으로 바꿔 노숙인들에게 희망의 빛을 나눠주고 있다. 실제로 28년간 수감생활 후 노숙을 하던 사람이 바하밥집에 와서 커피를 만들고 있다. 그는 “세상이 날 버렸고, 나도 나를 버렸었다. 술 취해 거리에 누운 나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준 이는 바하밥집 주인장이었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주택 2채를 월세로 빌려 노숙인, 미혼모, 새터민 등이 함께 사는 그룹홈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내가 쉴 수 있는 방 한 칸, 함께 기대며 살아가는 사람, 작지만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좋다”고 입을 모은다. 김 대표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노숙인 복지 문제라면 누구보다 먼저 팔을 걷는다. “이 도시에서 저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고 싶습니다. 따뜻한 한 끼의 식사가 뜻밖의 기적을 낳을 수 있다는 걸 믿거든요.”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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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년째 하우스콘서트 여는 음악인 “후원자 나타날 줄 알았는데…”

    정장을 차려입고 가야할 듯한 클래식 음악회. 가정집 마룻바닥에 앉아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피아노 선율뿐 아니라 진동이 몸을 관통해 울린다. 연주자의 거친 숨소리마저 연주와 어우러지며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바로 하우스콘서트다. 국내에서 하우스콘서트를 15년째 여는 음악인이 콘서트 무대를 오스트리아의 슈베르트 생가, 프랑스 왕립수도원, 도서관, 식물원, 학교 등 집밖으로 크게 키웠다. 이달 1일부터 31일까지 26개국 323곳에서 ‘2016 원 먼스(One Month) 페스티벌’을 여는 것. 예술가 1500여 명이 클래식, 재즈, 실험음악 등을 선보인다. 이달 4일 음악회 준비로 한창인 서울 종로구 동숭동 예술가의집에서 박창수 더하우스콘서트 대표(52)를 만났다. ○ 가정식 살롱 음악회로 시작 해외 음악회 일정 등을 조율하느라 보름 간 잠을 거의 못 잤다는 그는 멍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에게 축제 취지를 물었다 . “원먼스페스티벌의 모태는 하우스콘서트거든요. 서울예고 재학 시절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연습을 하다가 집에서 느껴지는 아담함과 아늑함이 좋았어요. 유명하고 화려한 무대보다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간에서 연주자와 교감을 하는 공연을 기획하는 게 꿈이었죠.” 2002년 7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하우스콘서트를 시작했다. 공연 후 연주자와 20~30명의 관객들이 와인과 치즈를 곁들이며 담소를 나누는 살롱음악회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다 10년쯤 됐을까. 그는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활동한 연주자들이 귀국해 2~3년이 지나면 기량이 떨어지는 경우를 종종 봤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봤더니 이들의 연주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고요.” 그가 조사한 바는 이렇다. 전국에 500석 이상의 공연장은 약 400곳. 인구 대비 적은 수준은 아니지만 대부분 연 10회 공연에 그쳤다. 통상 전체 예산 80% 안팎을 트로트 가수 섭외에 투입하고 나머지를 쪼개 클래식 국악 등 ‘기초문화’ 공연에 쓰는 식이었다. “하드웨어(공연장)와 소프트웨어(연주자) 모두 풍부한데 기가 막혔죠. 돈 되는 문화에만 매달리는 건 위험해요. 대중문화가 열매라면 기초문화는 씨앗이에요. 베토벤 바흐가 없었다면 대중음악도 지금과 달랐겠죠. 기초문화가 떠받쳐주지 않으면 남이 한 걸 따라하는 수밖에 없어요.” 문득 아이디어가 스쳤다. 매달 400여개의 공연장에서 공연이 한 차례 씩 연 12회씩 열리면 5000여회의 공연이 열리잖아요. 연주 팀 200개가 한 달에 두 번씩 공연하면 얼추 되지 않을까…. 불가능한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 무모해 보이는 도전…음악 거장들의 연주 ‘그래 연 5000회 공연에 도전해보자.’ 박 대표는 2013년 7월 12일(하우스콘서트 시작일) 전국 문화예술회관 65곳에서 일제히 음악회(하우스콘서트 대한민국 공연장 습격사건)를 열면서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 시작됐다. ‘관객이 올까’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만석인 공연장이 속출했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어 2014년 한중일 3국에서 한 달 간 ‘원 먼스 페스티벌’을 열었다. 2015년엔 유럽으로 개최국을 늘렸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산골 초등학교에서 어린아이들과 연주했고, 이경숙 전 연세대 음악대학장은 그랜드 피아노가 아닌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색소폰 연주자 강태환 등 쟁쟁한 인물도 무대에 올랐다. 연주자들은 무보수와 가까운 개런티를 받지만 작은 콘서트 특유의 분위기에 매료돼 흔쾌히 공연을 수락했다. 유명세를 타기 전부터 공연했던 의리로 참가하는 연주자도 적지 않았다. ‘젊은 거장’으로 통하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2003년 중학생 시절부터 하우스콘서트에서 연주를 시작해 2006년 리즈국제 콩쿠르 1위 입상한 뒤에도 인연이 이어져 원 먼스 페스티벌뿐 아니라 하우스콘서트에도 주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남들이 알아주기 전에 저희가 좋은 연주자를 미리 발굴해 이들의 기(氣)를 살려주는 공연을 하고 싶었죠. 국제 콩쿠르 입상으로 유명해진 뒤에야 섭외를 하는데 거액을 주고 섭외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우리 스스로의 안목을 믿어야 하는데 이를 스스로 폄훼하고 남의 인정을 더 중요시하는 풍토가 아쉬워요.”○ 재정난 겪어도 관람료는 15년째 2만 원 일각에서는 “거액을 후원하는 큰 손이 있느냐”고 궁금해 한다. 그는 “좋은 공연이라고 하면 오히려 후원자가 나타날 줄 알았지만 천만의 말씀”이라는 답했다. 사실 정부와 대기업 지원은 거의 전무하다. 지난해 집을 줄여 마련한 1억 원을 보태 행사를 진행했을 정도로 재정난을 겪고 있다. 하우스콘서트는 수익 사업이 아니다. 따라서 입장료를 15년째 2만 원으로 묶어놓고 있다. 누구나 콘서트를 부담 없이 즐기라는 뜻이다. 원 먼스 페스티벌 역시 공연장과 공연자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할뿐 입장료는 주최 측으로 돌아가지 그가 버는 돈이 아니다. 박 대표는 한때 정부 사업을 위탁받는 사업을 벌였지만, 사실상 접었다. 2014년에 전국 각지에서 ‘작은 콘서트’ 250개를 벌였지만 2015년 160개, 올해 9개로 줄었다. 특혜 시비 등으로 정부가 하우스콘서트의 참가 업체를 늘린 것이다. “하우스콘서트가 확산된 건 반길 일이긴 해요. 하지만 좋은 콘텐츠 만들어서 개발하려는 의지를 꺾는 것이기도 하죠. 이런 풍토에서 기획자 입장에서는 새로운 걸 도전해서 만들어내는 것보단 이미 있는 걸 카피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는 거죠. 독특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왜 북돋아주지 못하는지 아쉬워요.” 올해 원 먼스 페스티벌은 개·폐막식을 생략했다. 물론 예산 부족 때문이다. 대신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공연을 페이스북 라이브(https://www.facebook.com/thehouseconcert)로 중계해 누구라도 일상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실시간 공연은 물론 지난 공연도 볼 수 있다. 하루에 10개 안팎의 각국 공연이 올라온다. 미국 가정집 잔디밭에서 열리는 재즈공연부터 대한민국 서울 경회루 앞에서 청바지를 입고 피리를 부는 국악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공연 영상은 거칠지만 흐뭇하다. 일상에서 감동을 주는 음악회라는 입소문이 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예산·인력 적어도 잘 놀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박 대표와 매니저 2명,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공연 기획을 계속하는 까닭을 물었다. “싸이가 유명하고 대단하지만, 대중음악은 비교적 단순한 구조이고 빨리 소비되어야 하는 특성이 있어요. 클래식은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복잡한 구조여서 많이 들어도 쉽게 질리지 않고 무언가 자꾸 떠오르면서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죠. 한류나 대중문화에만 목메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전 클래식 신봉자가 아니지만, 사람들이 대중문화만큼 기초문화의 가치도 인정했으면 해요.” 느리지만 연 5000회 공연의 꿈도 이뤄가고 있다. 2012년 130회, 2013년 250여회, 2014년 510여회, 2015년 800여회 등 매년 공연 기회를 늘리고 있다. 원 먼스 페스티벌도 지난해의 경우 1400여명의 예술가가 참여해 관객 4만1800여명이 왔다. “올해 저희 축제의 경우 예산은 줄었지만 온라인 중계 등으로 스케일은 더 커졌다고 생각해요. 돈이 많지 않아도, 인력이 많지 않아도, ‘이렇게 좋은 공연 콘텐츠를 만들고, 이렇게 잘 놀 줄 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요. 개인과 개인이 합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잖아요.” 마침 박 대표의 휴대전화가 올렸다. 이날 저녁 예술가의 집에서 콘서트를 할 클래식계의 대모인 김남윤(바이올리니스트) 이경숙(피아니스트)이 리허설을 위해 공연장에 도착한 것. 공연계의 독립투사는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네, 선생님”하며 달려 나갔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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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골학교 작은 클래식… 선율만큼 강한 전율 선물”

    정장을 차려입고 가야 할 듯한 클래식 음악회. 편한 옷을 입고 가정집 마룻바닥에 앉아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음악 선율뿐 아니라 진동까지 몸으로 느껴진다. 연주자의 거친 숨소리마저 연주와 어우러지며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이런 ‘하우스콘서트’를 15년째 여는 음악인이 이달 1일부터 31일까지 한국을 주축으로 26개국 130개 도시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를 기획했다. 예술가 1500여 명이 클래식, 재즈, 실험 음악 등을 선보이는 ‘2016 원 먼스 페스티벌’이다. 무대도 슈베르트 생가, 왕립수도원, 도서관, 식물원, 학교 등으로 넓어졌다. 주인공인 박창수 더하우스콘서트 대표(52)를 최근 서울 동숭동 예술가의집에서 만났다. 하우스콘서트를 집 밖으로 끄집어낸 이유를 물었다. “2002년 서울 연희동 집에서 시작한 하우스콘서트가 10년 됐을 때였죠. 해외에서 공부한 연주자들이 국내에 오면 기량이 떨어지는 경우를 봤어요. 연주 기회가 많지 않다는 데에 답이 있었죠.” 그가 조사한 바는 이렇다. 전국에 500석 이상의 공연장은 약 400곳. 하지만 대부분 연 10회 공연에 그쳤다. 80% 안팎의 예산을 트로트 가수 공연에 투입하고 나머지를 쪼개 클래식 국악 등 ‘기초 문화’ 공연에 쓰는 식이었다. “하드웨어(공연장)와 소프트웨어(연주자) 모두 풍부한데 기가 막혔죠. 돈 되는 문화에만 매달리는 건 위험해요. 대중문화가 열매라면 기초 문화는 씨앗이에요. 베토벤이나 바흐가 없었다면 대중음악도 지금과 달랐겠죠. 기초 문화가 떠받쳐 주지 않으면 남이 한 걸 따라 하는 수밖에 없어요.” 2013년 7월 12일(하우스콘서트 시작일) 전국 문화예술회관 65곳에서 일제히 음악회(하우스콘서트 대한민국 공연장 습격 사건)를 열면서 그의 도전은 시작됐다. ‘관객이 올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만석인 공연장이 속출했다. 자신감을 얻어 2014년 한중일 3국에서 한 달간 ‘원 먼스 페스티벌’을 열었다. 2015년엔 유럽으로 개최국을 늘렸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가야금 명인 황병기, 피아니스트 김선욱 등 쟁쟁한 인물도 무대에 올랐다. “큰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지만 정부와 대기업 지원은 거의 전무하다. 연주자는 작은 콘서트 특유의 분위기에 매료돼 흔쾌히 공연을 수락한다. 이름을 얻기 전부터 공연했던 의리로 참여하는 연주자도 적지 않다. 박 대표는 지난해 집을 줄여 마련한 1억 원을 보태 행사를 진행했을 정도로 재정난을 겪고 있다. 그래도 하우스콘서트 입장료는 2만 원으로 묶어 놓고 있다. 올해엔 예산 부족으로 개·폐막식을 생략했다. 그 대신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공연을 페이스북으로 중계해 외연을 넓혔다. 이 모든 과정을 매니저 2명과 준비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축제를 이어 가는 이유를 물었다. “대중문화만큼 기초 문화의 가치도 인정받았으면 해요. 돈이나 인력이 많지 않아도 잘 놀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요.” 보름째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공연계의 독립투사’는 “두고 보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축제 리허설장으로 향했다. 원 먼스 페스티벌은 이달 1일부터 31일까지 국내에서는 예술가의집과 서울시 시민청, 세종문화회관, 지방의 문화예술회관, 산골 초등학교, 카페 등 96곳에서 155개의 공연이 열린다. 02-576-7061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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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이란… 양치질 하듯 하루 세번 가꾸는 것”

    ‘행복 전도사’로 통하는 부부가 있다. 주인공은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60)와 최성애 HD행복연구소장(60). 이들은 2006년 연구소를 함께 설립해 행복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조 교수는 미국 미시간공대 교수 출신으로 국내에 우수 교육법을 전파하면서 ‘교수를 가르치는 교수’로, 최 소장은 미국 시카고대 인간발달학 박사 출신이며 가족 심리치료사로 유명하다. 이들은 연구소 설립 10년이 되는 올해 지인들에게 의미 있는 선언을 했다. 재산을 상당 부분 환원해 우리 사회에 행복의 씨앗을 뿌리는 심리치료 재단을 만들겠다는 것. 나쁜 환경에서 자라난 부모가 자녀도 똑같은 방식으로 양육하는, ‘부정적인 돌봄의 대물림’을 막겠다는 구상이다. 이 부부를 최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자택에서 만났다. 이들이 돌봄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꼭 사고를 당해야 트라우마를 겪는 건 아니에요. 억압적이고 미성숙하며 무책임한 어른이 있는 환경에서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을 뿐 아니라 답답함과 절망감, 무기력감에 빠지죠. 양육 과정에서 안정적인 돌봄이 이뤄지지 않으면 ‘발달 트라우마’가 생겨요.” 부부는 맞벌이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자주 바뀌거나 형편이 어려워 방치되다시피 해서 애착 손상(attachment injury)을 입는 아이가 많아질 수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특히 마음의 빈곤함을 치유하기 위해 인성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흔히들 아이 실력이 안 좋으면 인성이라도 좋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인성이야말로 실력”이라며 “인성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학습으로 익히는 것이고, 일시적인 게 아니라 지속되는 습관”이라고 말했다. “욱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고 상대에게 화를 버럭 내죠. 일부는 욕설 폭행 등으로 후회할 행동을 저지르죠. 인간은 같은 자극이라도 반응 자체를 선택할 수 있기에 예측 가능한 행동만 하는 동물과 다르죠. 인성교육은 무조건 참으라는 게 아니라 행동엔 선택의 여지가 있고, 화나는 것(감정)과 화내는 것(행동)에 차이가 있다는 걸 가르치는 것이죠.” 부부는 지금까지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감정 응급 처치법’ 등 행복 씨앗심기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연구소를 거친 1200여 명의 수강생이 가세하고 있다. 그러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가 지난해 전 재산의 99%인 52조 원을 환원해 재단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걸 접하고 재단 설립에 대한 마음을 굳혔다. 재단은 내년에 설립하는 게 목표다. 기존의 행복 씨앗 심기 프로젝트를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저희가 열심히 일하고 아껴 저축한 재산이지만 재단 설립금이 세간의 관심을 끌 만한 규모가 아니라는 점은 잘 알아요. 그래도 세계 최고의 기부자가 누리는 멋을 조금이라도 맛보고 싶어요. 말로만 행복하자고 주창하는 게 아니라 교육자 출신인 저희 부부가 실천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게 스스로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기도 해요.” 행복 전도사들의 행복론을 물었더니 다시 가족 이야기로 돌아갔다. 부부는 “성공을 위해 행복을 미룬다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성공한 뒤 행복을 찾겠다는 건 난센스”라고 말했다. “행복은 양치질하듯이 습관처럼 평소에 자주하는 게 핵심이에요. 한 달 내내 이를 안 닦고 미루고 있다가 양치질을 10시간 한들 소용없잖아요. 가족에게 특별한 날에만 잘해 주려 하지 말라는 것이죠. 특히 가족일수록 함부로 대하기 쉬워요. 양치질을 오래 안 하면 음식의 찌꺼기로 이가 썩듯이 가족 관계에서는 감정의 찌꺼기가 가장 부패하기 쉬운 조건이죠. 명심하세요. 하루에 세 번씩 가족에게 관심을 표현하면 됩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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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21세기의 소작농들

    ‘보증금 3억 원, 월세 3000만 원.’ 회사 근처 빈 점포의 외벽에 이런 문구가 나붙었다. 커피집이 있던 자리였다. 단순 계산해 커피 한 잔에 5000원으로 치면 하루 200잔을 팔아야 임대료가 빠진다. 인건비 등을 건지고 이윤까지 남기려면 대체 커피 몇 잔을 팔아야 하는 걸까. 임대료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곱셈과 덧셈을 하자니 머릿속이 새삼 아득해졌다. 대도시의 웬만한 지역에선 ‘임대료 리스크’가 일상화됐다. 저금리 시대에 믿을 만한 건 역시 임대료인 걸까. 한 지인은 맥줏집을 하면서 월 170만 원을 내던 임차료를 월 250만 원으로 올려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이달 기준금리 인하로 건물주의 기대 수익률이 낮아졌는데 부동산 시장은 오히려 이런 흐름과 거꾸로 간다”고 하소연했다. 심지어 세입자인 자영업자가 다시 세를 놓는 경우도 있다. 생활용품 판매업자인 A 씨는 서울 강북에서 월 500만 원의 임차료를 낸다. 그는 이 돈을 바로 옆 옷 가게 주인에게 준다. 옷가게 주인이 불황으로 장사가 안 되자 자신의 가게를 쪼개 A 씨를 세입자로 받아들였다. 목돈이 부족한 A 씨는 보증금을 내지 않는 대신 월세를 시가의 2배가량 낸다. 임대료를 깔고 들어온다 해서 ‘깔세’로 불리는 전대차(轉貸借) 계약이다. 그는 “인건비 건지기도 힘들다”며 “목청 터져라 물건 팔아 남는 돈의 대부분을 임차료로 바치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자영업자는 지주에게 땅을 빌려 사용료를 내는 소작농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지대(地代·rent)는 공급 제한으로 발생하는 일종의 과점적 이익이다. 땅과 건물이 한정되어 있으니 지주는 노동이나 자본을 추가 투입하지 않아도 비교적 쉽게 이윤을 얻는다. 돈이 넉넉하다면 힘들게 일하기보단 건물주가 되는 게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문제는 월급쟁이 상당수가 ‘잠재적인 치킨집 사장님’이라는 점, 그래서 은퇴 후 자영업에 뛰어드는 이들이 과도한 임대료와 갑작스러운 임대료 인상 리스크에 상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외교관 출신으로 강남에서 우동집을 운영하는 신상목 씨는 “근로 계약에서 낮은 임금을 막기 위한 최저임금제가 필요한 것처럼 임대차 계약에서 지나친 소득 이전을 막기 위한 규범이 필요하다”며 “임차인이 영업의 지속을 보장받기 위해 건물주에 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영업 대책에 대한 논의는 10년 넘게 이어져 왔지만 그간 동네 사장님들의 사정이 딱히 나아졌다는 소식을 접해보지 못했다. 노후 보장이 미비한 사회안전망 탓일까. 좋은 일자리를 못 낳는 불임(不姙)형 산업구조 탓일까. 생산성이 낮은 데다 판박이형 창업을 되풀이하는 문화 탓일까. 어디부터 꼬인 건지 모르겠다. 다만 자영업에서 임대료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빈곤한 사장님’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어느새 회사 인근 점포에 또 다른 커피점이 들어섰다.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가게에서, 달뜬 표정의 새 사장님이 월 3000만 원의 임차료를 감당하려면 커피 몇 잔을 팔아야 할까. 다시 셈해본다. 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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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중풍으로 잃어버린 언어, 그림으로 대신해요”

    단편소설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으로 1960년대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던 소설가 김승옥 씨(75). 한글 1세대 소설가로 도시인의 일상과 일탈, 산업 사회의 모순, 인간의 상실감 등을 그려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절필을 선언한 뒤 작품 활동을 사실상 중단했다. 그런 김 씨가 다음 달 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그림전을 열고 화집을 출간한다. 최근 경기 파주출판단지에서 그를 만났다. ‘말·글 안 됩니다(뇌졸중).’ 희끗한 머리에 점퍼 차림으로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나타난 김 씨는 테이블 위의 A4 용지에 이렇게 썼다. 그러고 선한 웃음을 지으며 종이를 내어 보였다. 그는 세종대 국문과 교수였던 2003년 오랜 친구인 소설가 이문구 씨의 별세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섰다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교수직을 관두고 치료에 들어가 기적적으로 병을 이겨냈지만 소설가에게 무기나 다름없는 언어 능력을 잃었다. 거동에 불편함은 없지만 기본적인 의사소통 정도만 가능해 인터뷰도 필담으로 했다. “이번에 전시할 그림은 뇌졸중 투병 중 그린 수채화예요. 2009년 한 문예지에 그림을 실은 걸 계기로 다시 그림을 그려봤죠. 서울과 전라도 경상도 등지를 다니며 풍경을 담았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와 그리기도 했고요.” 김 씨는 ‘무진기행’의 배경이 된 전남 순천과 서울을 오가며 지낸다. 2010년 순천문학관에 김승옥관이 개관하면서 일주일에 2, 3일은 문학관에 머문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엔 순천의 자연이 유독 많이 담겨 있다. 그는 “문학관에선 주로 TV를 보거나 방문객을 만나고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어떻게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됐느냐고 물으니 그는 이젤 앞에 서 있는 어른과 아이의 모습을 그려 보였다. “1952년 순천북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본인 선교사에게 그림을 배웠죠.” 실제로 자신의 단편소설 ‘차나 한 잔’의 주인공이 신문사에 만화를 연재한 것처럼 대학생 때 서울경제신문에 시사만화인 ‘파고다 영감’을 싣기도 했다. 이번 전시의 다리는 카피라이터 이만재 씨가 놔주었다. “이만재 씨에게 그림을 몇 점 보냈고, 마침 이 씨 집에 놀러온 출판사 직원(21세기북스의 함성주 씨)이 그림을 보고 제게 연락을 해왔지요.” 김 씨의 소설은 최근 필사 열풍이 부는 등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고 있다. 출판사는 전시회를 앞두고 크라우드 펀딩도 벌이고 있다. 팬들은 4000만 원을 보탰다. 전시회 수익금도 김 씨 후원에 쓰인다. 현재 인세가 들어오지만 치료비 부담이 커서 김 씨는 경기 고양시 일산집을 처분하고 장인이 살던 서울 집으로 이사했다. 팬들에게 하고픈 말을 묻자 그는 ‘소설=신+악마’, ‘악마→신(부끄러움)’이라고 적었다. 뜻을 되묻자 김 씨는 무진기행 책을 펼쳐 마지막 문장인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에 밑줄을 친 뒤 ‘신!’이라고 적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인공이 자신의 속물성과 무기력 등을 자각한 부분으로 소설엔 신과 악마의 모습이 담겨 있으며, 악마가 부끄러움을 아는 순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뇌중풍으로 쓰러지기 전부터 신학을 공부하며 기독교에 몰두한 그는 “언젠가 스리랑카에 선교를 하러 꼭 가고 싶다”고 했다. 작품 활동을 재개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인터뷰 내내 필담 이외에는 “그렇지” “아니야” “그때” 정도만 내뱉던 그가 이 질문을 받고 처음으로 다른 말을 했다. “혹시”라는 단어였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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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산부인과라는 불편한 이름

    중학생인 지인의 딸이 최근 동네 산부인과에 갔다. 하굣길이라 교복을 입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흘끔거리는 시선을 줄곧 받아야 했다. 그는 “왜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산부인과는 결혼한 어른이나 가는 곳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럴 법하다. 국립국어원의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출산할 ‘산(産)’과 결혼한 여성인 ‘부인(婦人)’이 합쳐진 산부인과는 ‘임신, 해산, 신생아, 부인병 따위를 다루는 의학 분야’로 정의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성 질병은 부인만 걸리는 걸까. 여성들이 대체로 출산 관련 문제로 산부인과를 찾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산부인과에는 유방 관련 질병이나 생리불순, 여성 암 등 출산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진료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엄밀히 말해 산부인과는 부인이 아니어도 가는 곳이고 가야 하는 곳이다. 어쩔 수 없이 혹은 어쩌다 보니 아이를 낳지 않거나(못하거나) 결혼을 안한(못한) 여성도 많다. 여자 청소년도 산부인과에 가야 할 일이 제법 생겼다. 하지만 산부인과의 ‘심리적 문턱’이 높다 보니 여성이 산부인과에 가는 건 내과나 이비인후과, 정형외과에 갈 때와 좀 다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 미혼 여성의 82.4%는 ‘산부인과 방문이 꺼려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주변엔 마흔이 되도록 산부인과의 문턱을 밟지 않은 미혼 여성도 꽤 있다.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의 62.3%는 ‘산부인과에 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상 징후가 있어도 심각한 통증이 없다면 그냥 참거나 인터넷을 찾아본다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이상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국 특유의 보수성과 이중성의 영향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산부인과에 가면 성관계나 임신 낙태 등으로 온 것으로 여기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산부인과라는 고정관념이 주는 리스크는 생각보다 클 수 있다. 자궁경부암만 하더라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30대 여성 암환자 7명 중 1명꼴로 걸리는 병이 됐다. 이 병은 예방할 수도 있다. 암이 되기 이전, 즉 전암(前癌) 단계가 7∼20년으로 조기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병에 대비해 검진을 꼬박꼬박 받아야 하는 이유다. 한때 대한산부인과학회를 중심으로 산부인과를 여성의학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지지부진한 상태다. 내과 등 다른 과에서 진료과목이 겹치거나 여성 환자를 뺏길 걸 우려해 반대하는 데다 의료법도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산부인과는 일제강점기 때 이름으로, 그대로 쓰기에는 세태가 많이 변했다. 지금은 국가가 만 11∼12세 여아들에게 자궁경부암 백신을 무료로 접종하는 시대다. 또 올해부터는 자궁경부암 무료 검진 대상 연령이 만 30세 이상에서 만 20세 이상으로 확대됐다. 부인만 산부인과에 간다고 하기엔 다양해진 삶의 형태만큼 방문자 층위도 다양해진 것은 물론이다. ‘부인이 아닌 여성’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진료받을 권리를 이제 누릴 수 있어야 한다.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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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일론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푹 빠져 살던 소년이 있었다. 공상과학소설이나 만화책, 역사책도 하루 10시간씩 닥치는 대로 읽었다. 때로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주변 소리를 못 들었다. 소년의 부모는 그가 청각장애인 줄 알고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 억만장자이자 괴짜 경영자인 일론 머스크 씨(45)의 얘기다.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와 민간우주업체인 스페이스X의 최고경영자(CEO)인 그는 혁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대학에서 물리학과 경영학을 공부하며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 화석연료 고갈에 따른 지속가능한 에너지, 우주 탐사, 인터넷, 인공지능이 큰 영향을 미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곧장 실행에 들어갔다. 24세에 실리콘밸리로 가서 인터넷지도와 생활정보를 결합한 Zip2를 창업했고 이를 컴팩에 3억 달러(약 3600억 원)에 팔았다.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 돈을 다시 투자한다. 인터넷 결제업체인 엑스닷컴(현 페이팔)을 만들어 이베이에 팔아 다시 거액을 거머쥐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우주 정복의 꿈을 품고 2002년에 스페이스X를 세웠다. 천문학적인 비용의 사업에 손댄다 하니 조롱도 받았다. 그는 ‘재활용(reusable) 로켓’이란 개념으로 맞섰다. 당시 로켓은 다 쓰면 버려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를 제어해 원위치로 되돌려 다시 쓰면 비용을 10분의 1로 낮출 수 있다는 것. 미 항공우주국(NASA)이 그의 고객이 됐다. 2004년에는 테슬라를 통해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2006년에는 전기차 배터리 개발을 위해 ‘솔라시티’를 창업해 구글의 투자를 받아 태양열 패널 사업도 벌였다. 순탄치 않았다. 로켓 발사는 연이어 실패하고 전기차 양산도 미뤄졌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자금줄이 말랐다. 하지만 그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혁신적이지 않다는 방증”이라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단호함에 직원들은 지옥의 문이라도 따라갈 기세였다고 한다. 집념은 빛을 발했다. 4전 5기 끝에 이달 초 우주 로켓 재사용을 성공시켰다. 또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반값 전기차’(4만 달러)를 내놓았다. 사람들은 ‘바퀴 달린 아이폰’이라며 열광했다. 예약자가 벌써30만 명을 돌파했다. 솔라시티는 미국 최대 가정용 태양광 에너지 업체가 됐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비행기보다 더 빨리 운행하는 고속철인 ‘하이퍼루프’를 개발하며 극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아이언맨’의 실제 모델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파괴적 혁신으로 기존산업을 뒤흔들 거란 전망도 나온다. 문득 생각해 본다. 일론이 한국에서 사업을 했다면 그의 혁신을 알아봐주는 투자자가 있었을까. 그가 손 내밀 기초과학집단이 있었을까. 혁신 기업을 만들어도 이를 제값 주고 사들이는 기업이 있었을까. 혹시 그가 기업 매각대금으로 빌딩을 샀다면. 애초 그가 대기업 직원이 됐더라면…. 일론의 성공을 점치기 힘들지만 그는 ‘미래 설계자’답게 상상을 현실로 옮기고 있다. 혁신을 북돋겠다고 지역별, 기업별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세워 대통령이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관제행사를 보며 이런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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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필기 수재’를 키우는 학교

    최근 해외 석학이 강연하는 자리에 갔다. 강연장은 학구열로 넘쳐났다. 참석자들은 필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찰칵 소리를 내며 파워포인트 파일을 찍는 민폐를 불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강연 후. 그렇게 열심히 강의를 듣던 사람들은 “질문이 있느냐”는 사회자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강연은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보다 끝났다. 우리에겐 익숙한 한국적인 풍경일 것이다. 한국에 온 외국인 교수들은 굳이 강의실이 아니어도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정보를 받아 적기에만 바쁘다면 대체 교육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고 한다. 기자가 미국에서 대학원 수업을 들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럴 법도 하다. 수업을 이해하려면 학생들은 최소 30∼40쪽 분량의 교재를 읽어 가야 했다. 교수가 학생을 갑자기 지명해서 질문하는 ‘콜드 콜(cold call)’도 부담이었다. 교수는 자신을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촉진자)’로 칭했다. 학생들의 생각을 이끌어내 어떤 결론에 이르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 토론 뒤엔 ‘테이크어웨이(take-away)’를 내라는 교수도 있었다. 직역하면 수업 시간에 자신이 얻은 것을 적는 것. 정답은 없었다. 자신이 깨닫고 생각한 걸 내면 그만이었다. 10년 넘게 정답이 있는 교육을 받았던 기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고민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이미 누군가가 낸 결론을 외우는 데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던가. 실제로 학부 시절 영문학을 전공한 기자는 중세시대 영시에 고어(古語) 전치사를 끼워 넣는 시험이 고역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전치사, 굳이 외워야 했나 싶다. 정 필요하면 검색하면 되고, 오히려 영시에 나온 삶과 의미를 읽어내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김용학 연세대 총장은 말한다. 현재 대학교육 모델은 평균 수명이 60세였던 산업 사회 초기에 개발된 것으로, 전공지식을 주입해 산업현장에서 30년 동안 써먹기 위한 대량 교육 시스템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지식과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다. 시험 문제용 정답을 찾으려면 인터넷 등 지천에 널려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자신에게 필요한 걸 골라내고 생각하는 힘, 사고를 구조화해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역량을 기르는 교육일 것이다. 다행히 변화의 조짐은 있다. 학교에서 배우고 집에 가서 숙제하는 기존 교육과 달리 집에서 지식과 정보를 먼저 습득하고 학교에서 실험, 토론, 문제 해결 프로젝트 등을 하는 일명 거꾸로 교육(flip-learning)이다. KAIST 등 일부 대학이 실시하지만 여전히 제한돼 있다. 고성장 시대에는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성적 받으면 좋은 직장에 갔고 그걸로 좋은 삶이 제법 보장됐다. 지금은 저성장이 고착화됐고 게다가 100세 인생을 논하는 시대다. 좋은 학교 나온들, 좋은 성적 받은들, 좋은 직장에 간들 불안감에 떠는 게 현실이다. 고로, 틀리면 끝장인 시절을 견딘 우리에게 알파고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매년 수업료를 1000만 원이나 내는 대학에서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만 배우기엔 아깝지 않나요?”  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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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홈 퍼니싱’의 심리학

    시작은 포기였다. 친구는 분위기 좋은 커피숍과 와인 바에 종종 가곤 했는데 그간 쓴 돈을 따져 보니 ‘어마 무시’했다. ‘언젠가 집을 사면 카페처럼 꾸며야지’라고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도통 가늠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집은 포기했다. 대신 오늘을 즐기기로 했다. 혼자서 거실 한쪽을 파란색으로 칠하고 거실 중앙에 6인용 테이블을 들였다. 소파 밑에 러그를 깔고 니트 쿠션을 올려 안락감을 더했다.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 65만 원을 내는, 17평(약 56m²)짜리 허름한 아파트는 근사한 카페로 변신했다. 친구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행복감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세대 전·월세 유목민’이 늘면서 홈 퍼니싱(home furnishing)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이는 가구와 조명 벽지 침구 소품 등을 이용해 가볍게 집을 꾸미는 것을 뜻한다. 전·월세를 벗어나지 못하며 집 꾸미기를 미뤄왔던 젊은 세대들의 욕구가 터진 것이다. 1인 가구 증가도 한몫한다. 이들은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닌데 귀찮게 꾸며서 뭐하나. 나중에 집 사면 하지’라던 부모 세대와 다르다. 셀프 인테리어를 하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 아예 집 꾸미기를 취미로 삼기도 한다. 또 주말이면 늦잠에서 겨우 깨어 TV만 보던 기존 세대와 달리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거나 책을 읽고 무언가를 만든다. LG하우시스는 올해 트렌드로 ‘홈스케이프’(집으로의 탈출)를 꼽기도 했다. 혹자는 이들이 각박한 현실에서 집으로 도피한다고도 한다. 일견 맞다. 하지만 시각의 차이다. 신세대 집돌이 집순이는 남을 의식하기보다 내면을 돌보는 데에 우선순위를 두고 나만의 행복을 찾는다. 한 설문업체의 조사 결과 ‘집에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고 한 사람이 81.9%에 달했다. 이들은 천편일률적인 인테리어보다는 자신의 취향을 담은 공간을 능동적으로 만든다. TV 프로그램도 ‘쿡방’에서 ‘집방’으로 넘어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백종원식 홈 퍼니싱 레시피’를 알려준다. 덕분에 남성도 가세하고 여성도 전동 드릴을 들고 나선다. 실제로 1인당 국민소득이 2만∼3만 달러에 진입하면 인테리어 시장이 커진다. 이미 일본이 그랬다. 산업 지형도 바뀌고 있다. 한샘의 시가총액은 우리은행과 LG유플러스, 삼성카드, 현대백화점 등 쟁쟁한 기업을 넘어섰다. 이랜드(버터, 모던하우스), 신세계(자주, 더 라이프) 등도 홈 퍼니싱을 강화하고 있다. 집이 로또복권인 시대는 지나고 있다. 집은 투자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즐기는 공간, 즉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곳’으로 바뀌고 있다.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고 인테리어 책과 블로그를 탐독하며 홈 퍼니싱을 혼자 해낸 친구가 말했다. 집을 꾸미는 것처럼 행복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굴러떨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노력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 과정이 바로 삶이라고. 맞다. 누추한 방에 향초 하나 들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질 수 있다. 깊고 긴 이 불황이 언제 끝날지, 내 집을 언제 살 수 있을지 모든 게 불확실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여기서 행복할 수 있는 법, 오늘을 잘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일지 모르겠다.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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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짜 뉴스 홍수속 신문의 고급뉴스 중요성 높아져”

    “공짜 뉴스가 많아지지만 신문의 미래는 낙관합니다. 독자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확하고 믿을 만한 뉴스를 찾기 때문이죠. 이는 언론사의 ‘브랜드’가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말이기도 해요.” 최근 문화관광체육부 초청으로 방한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조너선 포드 논설위원장(51·사진)은 기자와 만나 신문의 미래를 이같이 말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졸업 후 FT에 입사한 그는 기자로서 독특한 경험을 겪었다. 1990년대 말 닷컴 붐이 일면서 FT를 퇴사해 동료와 ‘브레이킹뷰스’라는 언론사를 창업했다. 초반엔 고전했다. 공짜 뉴스가 넘치는 온라인에서 그의 콘텐츠도 공짜로 유통됐다. 그는 “당시 30대 가장이었는데 돈을 못 버니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남과 다른 콘텐츠로 승부해야 했다. 그래서 뉴스에 독창적인 시각과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칼럼을 온라인에서 팔기로 했다. 고객을 아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런던 금융가의 투자회사와 로펌, 금융회사 등을 다니며 1만5000여 곳을 고객사로 확보했다. 그의 콘텐츠는 뉴욕타임스와 르몽드 등에 실려 상승세를 탔고, 글로벌 금융 서비스 회사인 톰슨로이터에 1800만 달러(약 200억 원)에 팔렸다. 그의 창업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후 2010년 FT에 돌아온 그는 신문의 미래를 낙관하게 됐다. 동영상 등을 활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쉽게 만들 수 있고 소셜미디어 확산으로 뉴스 유통 창구가 늘어난 점도 낙관론에 힘을 실어 주는 요인이다. 일례로 월평균 방문자가 2억5000만 명에 이르는 온라인 미디어인 ‘버즈피드’는 실리콘밸리 벤처에서 투자를 받아 순기업 가치가 15억 달러(약 1조8000억 원)로 추산된다. FT 역시 유료 구독자의 70%가 온라인 구독자로 콘텐츠 유료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신문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어떤 신문이 살아남을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는 이번 방한에서 CJ E&M 등을 둘러보고 “문화 콘텐츠 산업의 다양성을 살리고 글로벌화를 촉진하려면 정부 지원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창조산업의 본류 국가로 꼽히는 영국은 영상과 게임 산업 등에 대한 세제 등으로 관련 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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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 신문 10개 탐독… 관객과 자연스럽게 수다 떨게 됐어요”

    ‘글 쓰는 팝페라 테너’인 임형주 씨(30)가 11일 신문과 음악을 주제로 한 토크 콘서트를 연다. 학부모와 팬들을 초청해 글쓰기와 신문 읽기의 즐거움을 나누고 신문을 활용한 교육의 장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콘서트에서는 임 씨가 설립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팝페라(팝과 오페라, 클래식이 결합된 장르) 공연도 함께 선보인다. 임 씨는 이달로 동아일보 연재를 마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그는 2013년 1월부터 동아일보의 신문활용교육(NIE) 면인 ‘신문과 놀자!’에 ‘임형주의 뮤직 다이어리’를 연재해 왔다. 다이어리에는 팝페라의 뿌리가 되는 다양한 음악 장르와 함께 자신의 음악철학을 알기 쉽게 소개했다. “1년에 공연을 100번 정도 해요. 빡빡한 일정 속에서 원고지 15장 분량의 칼럼을 쓰는 게 만만치 않았죠. 처음엔 컴퓨터 앞에 앉으니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예원학교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줄리아드음악원 예비학교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합격하는 등 성공의 경험을 쌓은 그였지만, 음악이 아닌 또 다른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해외 공연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 공연 대기실에서, 집 앞 카페에서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날 때마다 글을 썼다. 일부에서는 논문을 쓰느냐고 물어왔을 정도. 이 덕택에 마감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3년간 꼬박꼬박 기고할 수 있었다. 임 씨는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내적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며 그동안의 성과를 밝혔다. 결론은 글쓰기를 통해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음악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으며 배움의 기회를 넓혔다는 것. 이와 함께 말을 조리 있게 하는 법을 터득하고, 어휘력도 풍부해지면서 무대에서 관객과 더 잘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저는 말할 때에도 리듬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에요. 그래서 같은 단어를 안 쓰려 하죠.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단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어요. ‘또한’이라는 단어도 ‘아울러’ ‘더불어’ ‘이와 함께’ 등으로 변주(variation)를 하면 고전적이고 우아해 보이잖아요.” 그는 ‘신문 열독’이 글쓰기에 큰 힘이 됐다고 설명했다. 임 씨는 신문을 10개나 구독할 정도로 ‘신문 중독자’로 통한다. 어렸을 때 웅변 선생님이 ‘신문을 소리 내어 읽으면 발음도 또렷해지고 문장의 육하원칙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다’며 신문 읽기를 권한 게 계기가 됐다. 그는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신문은 살아있는 교과서”라고 강조했다. “요즘 온라인으로도 기사를 많이 본다지만 저는 종이신문 특유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집중이 더 잘되고 기사 크기와 위치에 따라 기사의 중요도를 판단할 수 있거든요. 종이를 만지고 넘겨 읽는 ‘손맛’도 무시할 수 없죠.”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그는 1억 원 이상의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800호 회원이 됐고 세월호 참사 때에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추모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올해로 데뷔 19년 차를 맞는 임 씨는 “앞으로도 꾸준한 글쓰기와 신문 읽기를 통해 팬들과 잘 소통하는 음악가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11일 오후 7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자리 잡은 예술교육기관인 ‘소르고’에서 열린다. 전석 무료. 참석 희망자는 임 씨의 트위터(@1986LHJ)에 이름과 e메일을 남기면 추첨을 통해 티켓을 받을 수 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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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버려야 산다

    최근 친구들과 모임에서 새해 다짐을 공유했다. 저마다 체중 조절, 어학 공부 등 단골 메뉴를 꺼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독특한 선언을 했다. 그는 “1일(日) 1폐(廢) 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하루에 물건을 하나씩 버리겠다는 것.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그의 말은 이렇다. 서랍장을 열어 보니 안 쓰는 물건들로 차고 넘쳤다. 유효 기간이 한참 지난 쿠폰부터 홈쇼핑에서 충동구매한 마사지 기기, 야심 차게 샀으나 정작 신을 엄두를 못 내는 킬힐…. 심지어 고장 난 CD플레이어나 학창 시절 편지처럼 화석과 다름없는 물건도 적지 않았다. 그는 “이런 물건들 없이도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 수 있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일단 추억이 담긴 물건에 대해서는 ‘이별식’을 거하게 했다. 1년 이상 한 번도 손대지 않은 물건은 한데 모아 가차 없이 내다 버렸다. 그랬더니 방에 여유 공간이 생겼고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무엇보다도 주변이 정돈되니 집중이 훨씬 잘된다고 했다. 우리는 맞장구쳤다. ‘혹시’ 하는 마음에 물건을 버리지 않거나 버리지 못해 굳이 ‘생활의 군살’을 만든다.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상에 무턱대고 서류를 쌓아 놓는다. 서너 달 묵혀 놓아 맨 밑에 깔린 서류가 무엇인지 모를 지경인 때도 있다. 또 컴퓨터 바탕화면을 여러 아이콘으로 덮어 놓는다. 그 아이콘을 클릭할 일은 1년에 한두 번인데도 말이다. 전문가들은 버리지 못하는 습관은 물건의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의 문제로 본다. 심하게는 ‘저장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른바 ‘호더(hoarder)’들이 있다. 다시는 읽지 않을 신문 잡지 등을 쌓아 두며 일상이 힘들 정도로 잡동사니 더미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미루는 습관이나 우유부단함, 완벽주의가 사물에 투영되어 강박으로 이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이런 강박은 물건에만 그치지 않는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잡동사니(mental clutter)도 적지 않다. 시시때때로 e메일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확인하고 출퇴근길에는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인터넷 포털을 들여다보며 주말에는 무엇을 하든 TV부터 켜 놓는다. 인지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두뇌가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와 같아서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띄워 놓으면 과부하가 걸린다고 경고한다. 여러 업무를 번갈아 하면 뇌 인지 기능은 기존 업무와 관련된 규칙을 차단하고 새로운 업무를 위한 규칙을 새로 작동시킨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 추가로 걸리고 결국 생산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새해에는 더 많이 이루겠다는 결의에 앞서 더 많이 버리겠다고 다짐한다. 우리는 물질의 홍수와 정보의 홍수 속에 산다. 시간과 공간을 비워낸 뒤에 생겨나는 ‘잉여로움’이 오히려 미덕인 시대다. 이는 일의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하고 집중하는 삶의 태도다. 비워야 채워진다. 2016년에는 새로운 채움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길 기대한다. 나는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부터 당장 내다 버려야겠다.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6-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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