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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유영 부본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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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1~2024-04-20
칼럼100%
  • “과학 대중화-전문화 이끈 한국의 내셔널지오그래픽”

    과학교양잡지인 ‘과학동아’가 다음 달 창간 30주년을 맞는다. 1986년 1월 발행된 창간호부터 이달 나온 과학동아(360호)의 총 발행부수는 약 1300만 부. 한 줄로 쌓으면 에베레스트 산 높이의 12배에 이른다. 종이매체 위기론이 나오지만 과학동아는 예외다. 다른 잡지들은 광고수익에 기대지만 과학동아는 제값 주고 사려는 독자가 많다. 전체 매출의 90%가 구독료 수입이다. 창간 당시 막내 기자로 출발해 현재 과학동아를 이끌고 있는 김두희 동아사이언스 대표(58)를 최근 서울 용산구 동아사이언스 사옥에서 만났다. 과학동아가 처음부터 수익을 낸 건 아니다. 동아일보 사시(社是)인 문화주의에 따라 창간됐지만 10년 내내 적자를 면치 못했다. 독자들이 “과학동아를 읽고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며 큰 호응을 보였지만 정작 수익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지루하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과학을 재미있게 풀어내는 게 시급했다. 김 대표는 “과학동아는 여성지나 시사지를 경쟁 매체로 삼았다”고 했다. 부엌의 과학을 쉽게 소개하고, 영화·스포츠를 과학과 결합했다. 과학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이 시도는 적중했다. 외환위기 때 다른 잡지들은 고사 위기에 처했지만 과학동아는 오히려 독자 증가로 흑자 전환하며 안정 궤도에 올랐다. 당시 중견기자였던 김 대표는 여기서 가능성을 엿봤다. 그는 과학동아가 더 성장하려면 분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일부 직원은 반발했다. 구멍가게 같은 잡지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 하지만 그는 “과학 이슈에 적극 대처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려면 신문에서 독립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며 밀어붙였다. 당시 오명 동아일보 사장(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이 이를 지지했고 과학동아는 2000년 동아사이언스로 분사했다. 새로운 시작. 직원은 총 8명이었고 그가 대표를 맡았다. 직원들은 신용등급이 낮아져 은행에서 신용대출도 받기 힘들게 됐다. ‘한국에도 내셔널지오그래픽처럼 번듯한 과학매체가 있어야 한다. 과학동아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다들 버텼다. 김 대표는 이공계 석사 출신의 기자를 중점 채용했다. 대학 시절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는 야학을 하는 등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이공계 출신의 기자가 풀어내는 과학 저널리즘도 광의의 교육으로 이들이 과학계와 일반 대중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런 예상은 적중했다. 과학동아는 상대성이론과 블랙홀, 빅뱅, 게놈 등 굵직한 과학 이슈를 내보냈고 한반도의 지질, 생물, 공룡 등 한국 특화 콘텐츠를 소개했다. 이 덕분에 과학의 대중화 전문화를 이끌며 과학 저널리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원전 사고 당시 심층 기사를 발 빠르게 내보내 정문술과학저널리즘 대상(2011년)을 받기도 했다. 김 대표는 앞으로 종이매체를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과학 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이다. 용산 동아사이언스 사옥에서 운영하는 과학동아 천문대나 과학동아 필진인 과학자와 독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과학동아 카페’, 역대 과학동아를 모바일·PC로도 볼 수 있는 ‘D라이브러리’가 그런 계획의 일부다. “종이매체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독자들에게 줄 겁니다.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과학을 선사하겠다는 가치를 지키면서도 콘텐츠를 혁신해 잡지도 100년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습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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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소년에게 분홍을 허하라

    아버지와 아들이 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끔찍한 사고가 났다. 아버지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아들은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응급실 의사는 소년을 보자마자 기겁했다. 의사는 “난 얘를 수술할 수 없어. 얘는 내 아들이야”라고 소리쳤다. 이걸 읽고 고개를 갸웃한다면 ‘의사=남자’로 여기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아이 아버지는 이미 죽었는데 (아마도 남성인) 의사도 아이 부모라면 대체 누가 아버지인거야?’라고 착각하는 것. 하지만 이 의사는 여성이고 아이 엄마다. 이는 직업과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을 보여주기 위해 젠더 연구에서 많이 거론되는 일화다. 나 역시 공감한다.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나는 ‘기자’보다 ‘여기자’로 통칭될 때가 적지 않다. 남자 동료는 남기자로 불리지 않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여교사, 여의사, 여교수라는 단어는 여전히 익숙하지만 남교사, 남의사, 남교수란 단어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은 길러지는 걸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색상에 대한 인식이 단적인 예다. 네 살짜리 남자 조카에게 옷을 사주려 했다가 난감한 적이 있다. 얼굴이 더 화사해 보이라고 분홍 옷을 사주고 싶었다. 여성적인 감수성을 조금 길러주고 싶은 욕심도 살짝 있었다. 하지만 남자아이 옷은 역시나 파랑 계열 일색이었다. 분홍 옷은 여자아이 옷 코너에나 있었다. 실제로 아이들이 많이 접하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로보카폴리, 터닝메카드, 타요 등의 남자 주인공은 죄다 파랑색이 들어간 옷을 입고 나온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바뀔 조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로벌 색채 전문기업인 ‘팬톤’은 시대상을 반영해 이듬해 유행할 색상을 미리 발표하는데, 2016년의 색으로 분홍색(로즈쿼츠·13-150-TCX)과 하늘색(세레니티·14-3919-TCX)이 섞인 조합을 선정했다. 팬톤이 두 색상을 택한 건 처음이다. 분홍색은 여성을, 하늘색은 남성을 뜻했지만 최근 성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젠더 블러링·gender-blurring)는 설명이었다. 젠더 블러링이 해외에선 이미 시작됐다. 미국 하버드대 인문학부는 올해 9월부터 ‘제(ze)’라는 새로운 인칭대명사를 사용한다. 학생기록부에 학생이 자신에게 사용됐으면 하는 인칭대명사를 고르는 난이 있는데 그(he)와 그녀(she)뿐 아니라 성별 개념을 배제한 새 단어(ze)를 만든 것. 아이를 대상으로 한 움직임도 달라지고 있다. 완구업체 레고는 올해 여성 고고학자, 생물학자, 우주인 등의 피규어를 내놓아 첫날 다 팔아치웠다. 미국 유통업체 타깃은 장난감·의류 판매대에서 아예 남아용, 여아용이라는 구분을 없앴다. 바라건대 2016년은 서로 다름을 껴안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자신만의 잣대로 남을 쉽게 재단하지 않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그래서 다름이 틀림이 되지 않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길을 가다가 분홍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지나가면 뒤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될 것 같다.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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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동성교수 핀란드 1급 기사 훈장… 양국 경영학 교육 가교 역할 공로

    조동성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과 핀란드 간 ‘경영학 교육의 가교’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핀란드 정부로부터 1급 기사 훈장을 받았다. 조 교수는 16일 서울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에서 주한핀란드대사관이 주관한 훈장 수여식에서 마티 헤이모넨 주한 핀란드 대사로부터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이 친필 서명한 증서와 ‘핀란드 백장미장 1급 훈장’을 받았다. 조 교수는 1990년 핀란드 알토대(전 헬싱키경영대)의 초빙교수로 위촉되면서 핀란드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알토대에서 강의하면서 핀란드 기업들을 연구해 대학 교재로 개발하고 핀란드 기업들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다. 1995년에는 알토대와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이 운영하는 경영학석사(EMBA) 과정을 개설해 지금까지 34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2004년부터는 핀란드의 명예영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알토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 교수는 “핀란드와의 교류 활성화에 힘써 핀란드의 국가 경쟁력을 한국에도 이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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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석학 살아있는 경영학 수업 저성장의 덫 벗어날 해법 찾아”

    2일 ‘동아비즈니스포럼 2015’가 열린 서울 광진구 워커힐로 쉐라톤그랜드워커힐 호텔 비스타홀은 저(低)성장이 고착화된 시대에 혁신 전략을 통해 성장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열기로 가득 찼다. 이날 포럼에는 정·관계 고위 관계자부터 경영대학 교수, 기업 임원과 실무자,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석해 동아비즈니스포럼이 국내 최고의 경영포럼으로 자리매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포럼 개막식에는 황교안 국무총리와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 손경식 CJ그룹 회장,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 권선주 IBK기업은행장, 이광구 우리은행장,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김정관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송재희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황 총리는 개막식 축사를 통해 “세계 경제가 저성장의 장기화로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동아비즈니스포럼이 국내 기업 경영의 비전과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경영 석학의 깊이 있는 토론을 통해 저성장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김상훈 서울대 교수(경영학)는 “최근 제조업이 제2의 부흥의 시대를 맞이한 가운데 블루오션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 성장전략”이라며 “과거 한국 사회에 블루오션 전략이 무엇인지 소개됐다면 이번 포럼에서는 블루오션 전략이 경영 현장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프레임워크 등이 공유되어 유익했다”고 말했다. 김동재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전략 경영의 진수를 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컨설팅회사인 ‘L.E.K’의 조정민 상무는 “기업들이 일제히 고민하는 ‘저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심층적으로 다뤄 시의적절했다”고 평가했다. 참가자들은 동아비즈니스포럼이 ‘살아 있는 경영학 수업’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블루오션 전략을 주창한 르네 마보안 프랑스 인시아드경영대학원 교수는 중저가 럭셔리 호텔이라는 시장을 창조한 ‘시티즌M’의 마이클 레비 창업자, 호주 거대 금융그룹인 선코프의 패트릭 스노볼 전 최고경영자와 함께 무대에 올라 블루오션 전략의 적용 사례를 소개하고 청중에게 해당 기업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해법을 제시했다. 크리스 앤더슨 역시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드론을 제조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영국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는 김지원 메가스톤 대표는 “MBA 수업에선 케이스스터디를 교재로 접했지만 포럼에서는 기업 인사가 직접 사례를 설명해 실질적인 해법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송정만 한국디자인진흥원 글로벌사업협력실 유럽·미주팀장은 “막연하게 접했던 오픈소스와 이노베이션 등의 개념을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KAIST 경영전문대학원에 다니는 송치율 씨는 “기존 사업자도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신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날 포럼의 스타는 단연 마보안 교수. 연세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는 그는 강연을 ‘당신은 블루오션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한국어로 마무리해 박수를 받았고, 행사장 밖에서 연 저자 사인회에는 100여 명이 줄을 이었다. 김재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포럼코리아 대표는 “동아비즈니스포럼은 많은 기업이 놓치기 쉬운 경영 지식과 해법을 상기시켜 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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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똑똑한 그녀에게 2% 부족한 것

    요새 신입사원 면접에 들어간 기업 임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여학생들은 어쩜 그렇게 말도 잘하고 똑 부러지느냐”는 것. 심지어 “남학생들이 안쓰러울 정도다”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여학생’이 ‘여직원’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차장과 부장 등 관리자급에선 여성 비율이 현격하게 줄어든다. 굳이 통계를 대지 않아도 많이들 공감할 것이다. 너무나도 진부한 그 질문, ‘그 많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물론 여성은 결혼, 출산, 육아 부담 등으로 경력 단절이 생긴다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에 태어난 30, 40대 여성들 중엔 성취욕이 강한 이들이 적지 않다. 경력 단절만으론 설명이 안 된다. 다른 이유는 없을까. 여성 리더십 전문가로부터 생활용품 기업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여성 차장인 A 씨 사례를 들었다. 남들보다 성실했고 꾀부리지 않고 일했다. 야근과 주말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리와 과장까지는 남자 동기보다 뒤지지 않았지만 부장 승진 심사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미혼으로 출산, 육아의 변수는 없었다. 다만 “깍쟁이 같다” “자기 일만 잘하고 남과 일하는 데에 서툴 때도 있다”는 주변의 평가가 걸림돌이었다. 특정 업무를 잘해도 리더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례다. 이 전문가는 “A 씨가 팀의 성과를 자신의 성과로 착각하기도 했다. 일하고 싶은 상대가 돼야 한다. 조직에서는 때로 희생할 줄 알고 싫은 걸 참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만난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삼성그룹에서 공채 출신 여성으로는 처음 임원에 올라 부사장까지 지낸 입지전적 인물. 그렇지만 그는 “만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이 스스로에게 아쉽다”고 말했다. 더 편하게 대하고 소통을 잘했더라면 더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란 취지였다. 그는 머리의 똑똑함이 20대의 경쟁력이라면 40대로 갈수록 너그러우면서도 단단한 심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책임 질 일이 있으면 스스로 나서고, 상사이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을 냉정하게 살피고 성취에 취하지 않는 ‘해독제’가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그는 부사장 시절 스스로 사표를 던졌다. 그는 “해당 인물과 자리의 역량이 불일치할 때 조직의 비극이 발생한다”며 “(더 승진하기엔) ‘깜’이 안 된 것 같다”고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직장인들에게는 인사철이 시작된다. 나직한 목소리의 최 전 부사장이 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똑똑한 여자들이 대부분 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들어요. 하지만 ‘괜찮은 동료’가 되는 게 훨씬 중요하죠. 조직에서 혼자 하는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요. 승승장구할 때는 놓치기 쉬운 덕목이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태도가 곧 경쟁력이 됩니다.” 똑똑한 그녀들의 건투를 빈다. 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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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대석]“여자 벽 넘으니 나이 벽… 절망의 순간 정면승부로 두려움 극복”

    《 “이듬해 2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여사원을 뽑는 회사가 드물었다. 어떤 곳은 원서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막상 면접을 가도 결국 고배를 마셨다. 그러다 ‘전공불문, 성별불문’이라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한 광고사가 신입 카피라이터를 모집했다. 어렸을 때 소설가가, 대학생 때 기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글 쓰는 일이라기에 무턱대고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했다. 하지만 끼와 감각 있는 이들로 차고 넘치는 광고계에서 말수 없고 목소리까지 작은 그는 외계인이었다. 입사 반년이 지났을까. 한 선배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으니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했다.” 이 ‘숫기 없는 여사원’은 훗날 이름난 카피라이터가 됐다. 최인아 제일기획 전 부사장(54)이다. 삼성그룹에서 공채 출신으로 첫 여성 임원이 된 뒤 최초의 여성 상무, 최초의 여성 전무, 최초의 여성 부사장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겉보기에 화려한 길을 걸어왔지만 그는 스스로를 ‘실패의 달인’이라 했다.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이 주기적으로 슬럼프가 찾아왔고 그만둘까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내면은 늘 전쟁터였다. 다만 스스로를 단단하게 지켰고 외부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나긋하고 느리게 말하는 그는 차분함과 무난함이란 수식어가 어울려 보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영국 철학자인 알랭 드 보통이 만든 ‘인생학교’ 서울 분교에서 교사로 나서 흔들리는 직장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1984년 제일기획에 입사한 그는 소수민족과 다름없었다. 임원은커녕 나중에 차장이나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호봉은 남자 동기들보다 3년 뒤졌고 여자 동기들은 어느 순간 결혼하고 회사를 떠났다. ‘여사원을 뽑아도 금세 그만뒀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속으론 ‘그래?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별나지 않아도 ‘광고쟁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했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사물의 본질을 곱씹어보면서 카피를 만들었다. 가족이 아파 속상한 일, 상사에게 혼났던 일, 친구와 수다 떠는 일 등을 ‘나만의 언어’로 보여줬다. 내성적인 성격이 오히려 무기가 됐다. “혼자 여행하고 혼자 영화 보고 스스로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요. 저는 안테나를 바깥이 아닌 안에 세우고 제 안에서 답을 찾는 편이죠. 골몰하다 보면 답이 나오는 순간이 있어요.” 물론 이렇게 나온 카피를 고객사가 늘 채택하지는 않았다. 좋은 아이디어인데 채택이 안 되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이럴 땐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일단 제가 좋다고 생각하면 ‘자식들, 좋은 걸 못 알아보네’라고 넘길 줄 아는 배짱이 있어야 하죠. 스스로 중심을 잡고 단단한 사람이고 싶었어요. 남(광고주)이 선택했다고 좋아하고 아니라고 해서 가라앉으면 결국 내 삶은 남에게 휘둘리게 되죠.” 이렇게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고객이 OK할 때까지 OK! SK’, ‘자꾸자꾸 당신의 향기가 좋아집니다’ 등 히트작을 연이어 내놓았다. 당시 한국은 국제 광고계에서 변방에 가까웠지만 그는 칸 국제광고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나이라는 벽 2000년 그는 삼성에서 여성 공채 출신의 첫 임원으로 발탁됐다. 제일기획이 광고 대가에게 주는 ‘마스터’ 호칭도 처음 받았다. 하지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마흔 중반에 다가가면서 점점 중심에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여성이라는 벽을 넘었다고 여기는 순간 나이라는 장벽을 만났다. ‘간판급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이제 좀 있으면 바빠지겠거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후배가 그 일감을 맡아 이미 진행하고 있는 걸 알게 됐다. “일에 흥미도 자신감도 없었고 의미도 찾지 못했어요. 제 성과가 예전 같지 않음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죠. ‘앞으로 나이 들 일만 남았는데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이 밀려왔고 뿌리부터 흔들렸어요. 직장인의 본격적인 사춘기가 찾아왔다고 할까요.” 결국 2006년 휴직했다. 임원인 데다 진급을 앞둬 주변에선 어떻게 하든 자리를 지키라고 말렸다. 학위 따는 공부를 하라고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고민에 솔직하게 맞서고 싶었다. 스페인 산티아고로 일단 떠났다. “인생에서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 일이 많죠. 하지만 시간을 X축, 성과를 Y축으로 하면 계단식 그래프가 나와요. 한 달 공들여 운동했는데도 살이 안 빠질 수 있지만 어느 순간 살이 빠져 있는 식이죠. 뭔가 성취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확실한 구간을 어떻게 이겨내는지에 따라 갈리는 것 같아요. 절실하고 단단한 사람을 가리는 ‘우주의 테스트’인 셈이죠.” 산티아고에서 하루에 18km에서 34km까지, 총 36일간 800km를 걸었다. 무수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들락날락했다. 머리는 생각에 빌려주는 공간일 뿐, 그야말로 ‘온몸’으로 생각했다. 3주쯤 지났을까. ‘아, 내가 나이에 무릎 꿇고 싶지 않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불가능해진다는 게 아니라 다만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이 더 걸릴 뿐이란 걸 알게 됐죠. 20, 30대에 열흘 걸리던 일이 40대에는 3주가 걸리는 식으로요. 나이에 대한 두려움이 줄었어요.” 뾰족한 답을 찾지는 못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이젠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회사에서 ‘후진’ 일을 하라고 해도 쓰일 곳이 있다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모든 직원의 선배로 복귀한 그는 스스로의 역할을 다시 규정했다. 그간 회사에서 받은 걸 돌려주기. 전과 달리 이젠 모든 직원들의 선배가 되고 싶었다. “자기 이름 걸고 뭔가를 하기보다는 다른 직원을 끌어주고 저처럼 헤맸던 직원이 있다면 손을 잡아주고…. 그게 ‘밥값’을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질 게 뻔한 프레젠테이션(PT)에서는 스스로 총대를 멨다. 대개 10∼12년 차가 팀장으로 나서지만 지는 게임엔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전무였던 그가 팀장을 자청했다. 광고주 앞에서 ‘저는 여기 이기러 오지 않았지만 꼭 필요한 솔루션일 거 같아서 전해주러 왔다’고 말했다. 물론 ‘패(敗)’했다. 하지만 떳떳했다. “당장 불리해 보여도 ‘나다움’을 지키고 싶었고 그게 품위를 지키는 길이죠. 어릴 땐 스마트한 게 중요했다면 연차가 들어선 한 인간으로서 신뢰할 만한지와 강한 심장을 지녔는지가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했어요.” 제작본부장을 지낼 때 제일기획이 대한민국 광고대상을 3년 연속 석권하는 등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2012년 부사장을 끝으로 돌연 사표를 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여성 중에서도 최고경영자(CEO)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등 여성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여서 의외였다. 삼성 최초의 공채 출신 첫 여성 임원으로 끝까지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까. “저는 ‘깜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조직의 비극은 자리에 허용된 파워와 해당 인물이 갖춘 역량이 일치하지 않아 비롯될 때가 많아요. 부족한 재주지만 다 쏟아부어 미련이 없었어요. 프로젝트 몇 개가 잘되면 그 분야의 대가가 된 듯 쉽게 취하지만 저는 스스로 냉정하게 돌아보는 ‘방부제’를 지니고 싶었어요.” 현재 그의 공식 직함은 ‘연세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 휴학생’. 평소 못 해본 공부를 원 없이 하고 싶어 지난해 입학했다. 하지만 한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열띤 PT를 벌이는 장면을 보다 갑자기 맥박이 빨라졌다. 전에 밤새워 작업한 뒤 광고주 앞에서 PT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고민 끝에 창업을 위해 휴학했다. 마케팅·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세워 빠르게 변하는 매체 환경에서 또 다른 역할의 ‘광고쟁이’를 해보고 싶어서다. 그는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부족한 재주지만 주저앉지 않기 위해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했다.▼ “똑똑한 여성보다… 편하고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가 되세요” ▼ 성공한 것처럼 비치는 임원들조차도 돌이켜보면 스스로에게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최인아 전 부사장에게 물었더니 대뜸 “만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무 시절 회식 때였다. 술이 한 순배 돌자 선배 임원이 그에게 와서 “얘는 쪼끄만 게 어려워”라고 말했다. 윗사람조차 어렵게 생각할 정도니까 아랫사람은 더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직원의 일화를 꺼냈다. 빈 구석이 있어 보이는 A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B. 같은 일을 맡겼더니 A의 성과가 의외로 더 좋았다. A에게는 주변에서 이런저런 의견을 줬고 A는 그걸 받아들여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반면 B는 순전히 혼자 일했고 그 탓에 보완할 게 있어도 할 수 없었다. “어릴 때는 만만하지 않게 보이는 게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커서는 다르죠. 제가 선후배에게 더 편한 사람일 수 있었다면 그래서 더 소통이 잘되는 사람이었다면 더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들죠.” 여성 후배들에게는 “일하고 싶은 상대가 돼야 한다. 조직에서 때로는 희생할 줄 알고 싫은 걸 참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똑똑한 여자들이 대개 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습니다. 실제로 남자보다 더 똑똑할 때가 있고요. 하지만 ‘괜찮은 동료’가 되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조직에서 혼자 하는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요. 승승장구할 때는 놓치기 쉬운 덕목이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태도가 곧 경쟁력이 됩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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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부자가 부자다우려면

    서울 시내에서 매일 저녁 클래식 연주회가 열리는 곳이 있다. 연주자는 무명의 젊은이부터 해외 거장까지 다양하다. 객석 390석의 절반이 차지 않아도 거르는 법이 없다. 하프와 첼로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의 선율이 연중으로 흐른다. 이곳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금호아트홀이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2000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때에 언제든 수준급의 클래식 공연을 즐겼으면 한다”는 고(故)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마련됐다. 국내 음악계에서 박 명예회장은 이미 ‘키다리 아저씨’로 유명하다. 최근 세계 3대 피아노 콩쿠르로 꼽히는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조성진 씨(21)가 1위를 한 것도 그의 지원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박 명예회장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어려운 때에도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며 금호영재 콘서트를 만들었다. 금호는 2005년 이 콘서트를 통해 조 씨를 발굴했고 2011년 매년 연주 기회를 주었으며 때로는 항공권 등도 건넸다. 올해 5월 박 명예회장의 10주기 추모 음악회에서였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KAIST에서 유방암 줄기세포를 연구 중인 분자생물학 박사 겸 첼리스트 고봉인, 10대에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휩쓴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등 금호영재콘서트의 1기 삼총사가 무대에 올랐다. 삼총사는 차이콥스키가 스승이자 은인인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피아노 삼중주 a단조 ‘위대한 예술가를 위하여’를 협연했다. 박 명예회장을 그리는 애틋함이 묻어나는 연주 뒤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리셉션에서 이들은 박 명예회장의 기억 한 도막씩을 회고했다. 손열음은 “콩쿠르에서 탈락하면 ‘얼마나 속상하니, 울고 있을까 봐 연락을 못 하겠구나’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권혁주는 “국내 악기로만 연주했던 어린 학생에게 1700년대 만들어진 유럽의 명품 악기를 손에 쥐여 줬다”고 떠올렸다. 고봉인은 “또래보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는데도 세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줬다”고 고마워했다. 금호는 박 명예회장이 타계한 뒤에도 뜻을 이어받았다. 2006년 대한통운과 대우건설 인수로 자금난을 겪고 2010년 금호산업 등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등 경영난에 허덕여도 재단지원금을 줄이지 않았다. 젊은 음악가를 해외 거장이나 음악 단체에 연결해 줬고 최근에는 연세대에 클래식 음악당을 지어 기부했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비리 등으로 위기를 겪을 때 거액의 기부금을 쾌척해 죄를 씻으려는 ‘그린워시’를 하거나 사회공헌을 홍보 수단으로 삼으려는 일부 기업인과는 분명 대비되는 모습이다. 형 박 명예회장과 동생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2004년과 2014년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받았다. 형제가 이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금호아트홀에서는 오늘도 클래식 공연이 열린다.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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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물에 CCL 붙이면… 저작권 공유로 더 큰 가치 창출”

    15일부터 사흘간 전 세계에서 저작권 공유 운동을 벌이는 인사들이 서울에 집결했다. 저작권 공유를 주장하는 비영리단체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가 여는 ‘CC 글로벌 서밋’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 자리에선 저작권 공유 운동을 주창하며 CC를 설립했고 최근 미국 대선 참여를 선언한 로런스 레시그가 깜짝 등장했다. 공유경제 이론가인 요하이 벵클러, ‘위키미디어’의 라일라 트레티코프 사무총장, 아시아의 컴퓨터 아버지로 꼽히는 전길남 KAIST 명예교수 등도 발표자로 나섰다. 80여 개국 출신의 예술가 학자 공무원 등 400여 명은 디지털 시대의 저작권 공유에 대해 논의했다. 이 행사를 준비한 CC코리아의 윤종수 대표(49)는 법무법인 세종 파트너 변호사로 2005년 CC코리아를 설립했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한국정보법학회 총무였던 그에게 황찬현 학회장(현 감사원장)이 로런스 레시그의 논문을 번역하라고 맡긴 것이 계기였다. 이 ‘단순한 숙제’를 끝낸 뒤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당시엔 모든 저작권을 저작권자가 독점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윤 대표는 경우에 따라 일부 저작권을 풀어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면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노래에 저작권료를 받지 않고 공짜로 음원을 공개한다면 음원에 ‘CCL(Creative Commons License)’ 표시를 붙여 음악을 더 쉽게 알릴 수도 있고 듣는 사람도 이를 활용해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들 수 있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나 이미지 공유 사이트인 플리커 등도 CCL을 적용한 대표적인 서비스다. 이미 PC통신 천리안의 영화음악 동호회의 운영자를 맡아 ‘온라인의 힘’을 경험했던 윤 대표는 CC코리아의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판사가 대외활동을 하는 데 부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판사가 나서니 남들이 더 귀를 기울이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저작권 분야 사람들을 만나느라 10년간 주말을 반납하다시피 했다. 비영리단체의 특성상 후원금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만으로 운영했고 행사를 열 때는 장소 섭외부터 포스터 제작, 책상 정리 등 잡무를 도맡았다. 윤 대표는 그간의 활동이 쉽지 않았지만 방송통신·저작권·정보기술 분야의 전문성이 생기는 등 얻은 게 많았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CCL 인식이 높아져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포털도 CCL을 도입했고 블로거들도 글에 CCL 표기를 붙이는 게 일반화됐다. CC코리아는 2009년 사단법인으로 전환해 현재 서정욱 서울대 의대 교수가 이사장으로,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이인호 중앙대 법학대학원 교수, 구글 네이버 다음의 임원들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윤 대표는 지난해 판사 생활을 접고 세종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얼떨결에 한 문서 번역을 계기로 저작권 분야에 빠지게 됐잖아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열심히 하면 그게 저에게 도움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에 기여할 게 많아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윤 대표는 앞으로도 할 일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저작물 공유에 그치지 않고 공유된 저작물로 보다 가치 있는 걸 창조해야 한다”며 “CCL과 관련한 불합리한 규제나 경직된 법체계 등이 개선될 수 있게 힘쓰겠다”고 말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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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민정음 해례본에 담긴 세종의 마음 느껴보세요”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되살린 복간본이 광복 70주년인 올해 한글날을 앞두고 6일 출간됐다. 복간본의 발간에 맞춰 김슬옹 미국 워싱턴글로벌대 교수(53)가 해례본 해설서와 영문 번역본을 함께 냈다. 복간본은 광복 직후인 1946년과 1957년에 각각 나온 적이 있다. 이전 복간본이 사진으로 찍은 영인본인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현재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원본의 빛바랜 상태 등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냈다. 원본의 종이 질감은 물론이고 얼룩지거나 훼손된 부분까지 거의 똑같게 만들었다. 또 종이를 반으로 접어 앞뒤로 쓰는 ‘자루매기 편집’을 했고 원본처럼 4개의 구멍을 뚫어 노끈으로 묶는 4침 제본을 택했다. 복간본을 통해 해례본 원본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의 명확한 창제 원리와 문자를 조합해 표기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담고 있다. 해설서를 쓴 김 교수는 “해례본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글을 익혀 문자를 쓸 수 있게 하려는 세종의 꿈이 담겼다. 어려운 한자에 의존했던 사대부 위주의 시대에 일반 백성들도 한글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점에서 해례본이야말로 민본주의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복간본을 기획한 간송미술문화재단은 해례본 원본을 보관하고 있는 기관이다. 일제강점기에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이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1년간 수소문한 끝에 기와집 수십 채 가격에 해당하는 1만 원을 주고 사들였다. 이어 한글학자를 비밀리에 불러 필사하게 한 뒤 언론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게 했다. 이 해례본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이다. 김 교수는 “한글의 우수성을 담은 해례본은 소장하고 해설서는 널리 읽어 많은 사람이 우리 문화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해설서는 원로 국어학자인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에게 감수를 받아 철저한 고증을 거쳤고 중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서를 썼다”고 덧붙였다. 30여 년간 한글을 연구한 김 교수는 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문위원과 한글학회 연구위원,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 미국 워싱턴글로벌대 한국어과 주임교수 등을 맡고 있다. 이번에 3000부를 찍은 복간본과 해설서의 세트당 가격은 25만 원이다. 제작과 출간을 담당한 교보문고는 대중 보급판 출간 등을 검토하고 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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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책 읽지 않는 시대 ‘인디서점’이 사는 법

    지난달 자정 무렵의 서울 마포구 상암동 작은 책방. ‘그렇다면 정상입니다’라는 책을 펴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하지현 씨가 독자들과 만났다. 그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자신이 비정상일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사는 사람을 위해 책을 썼다고 했다. 여기 모인 20여 명은 하 씨와 함께 행복한 일상을 사는 법을 모색했다. 이 서점이 ‘심야치유 서점’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이곳은 ‘북바이북’이라는 서점. 저자와의 만남을 매달 서너 차례 연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을 매개로 모여 삶을 나눈다. 드로잉 수업이나 재즈 음악회도 열린다. 테이블은 서너 개가 전부. 커피나 맥주도 판다. 퇴근길에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단골들은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이렇듯 특색 있는 작은 서점이 최근 선전하고 있다. 일명 ‘인디 서점’이다. 한때 동네 서점들이 온라인·대형 서점에 밀려 문을 닫았지만, 최근 인디 서점이 서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방식은 다양하다. ‘퇴근길 책한잔’(서울 염리동)에서는 고전을 읽는 ‘고물모임’(고전에 물드는 독서대화클럽)이 진행된다. ‘프루스트의 서재’(서울 금호동)는 책 낭독회를 열고 ‘스토리지북앤필름’(서울 용산동)은 독립 출판물을 판다. ‘일단멈춤’(서울 염리동)은 유명 관광지를 소개하는 가이드북 판매를 지양하고 손님들에게 ‘나만의 여행책 만들기’를 가르친다. 책과 함께 숙박 서비스를 제공하는 ‘북스테이’도 등장했다. 가정집을 서점으로 만든 ‘숲속작은책방’(충북 괴산군) 등 6곳은 ‘책이 있는 집에서 하룻밤, 북스테이’를 결성했다. 인디 서점 20여 곳은 이달 서울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각 서점의 책을 전시한다. 우리나라 성인 1인당 연간 독서량은 9.2권(2013년). 한 달간 책 한 권도 채 읽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 수준. 책은 여느 상품과 달리 읽고 만지고 듣는 등의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 가까운 곳에 있을수록, 다양한 곳이 많을수록 책을 접할 토대도 두터워진다. 이런 점에서 인디 서점은 대형·온라인 서점이 채워주지 못하는 ‘문화의 자양분’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해외 유수의 도시에서 인디 서점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미국 뉴욕에서는 매년 ‘인디 서점 주간’이라는 행사가 열리며 ‘스트랜드 서점’이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80여 년째 같은 자리에 있다. 책 낭독회와 저자와의 만남이 꾸준히 열리고 희귀·중고서적을 판매해 늘 손님들로 부산하다. 서점 로고를 새긴 머그와 가방 등의 수익이 전체의 30%일 정도로 뉴욕 시민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됐다. 국내 인디 서점은 전국에 60여 곳. 아쉽게도 대부분 임차료와 인건비를 간신히 건지는 수준이다. 하지만 점점 세분되는 독자 취향과 책의 독특한 물성에 주목한다면 이름 없이 사라져간 동네 책방의 전철을 밟지 않고 ‘제2의 스트랜드’로 진화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국내 인디 서점의 ‘유쾌한 실험’은 이제 시작이다.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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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이 함께 만든 개성공단 최고 제품… ‘작은 통일’을 사세요”

    “철길 따라 세계로….”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의 한 상점 앞. 녹슨 철로가 놓여 있고 철로의 끝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남북이 통일해 서울에서 북한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뚫리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이곳은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해 운영하는 ‘개성공단상회’다.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남성 정장과 아웃도어 의류, 장갑, 양말, 속옷 등을 판다. 9월 중순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개성공단기업협회는 지난해 9월 이 가게를 추진키로 결정했고, 우선 이를 담당할 개성공단상회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개성공단상회협동조합 정기섭 이사장(63·개성공단기업협회장)은 “공단에 입주한 12개 기업이 우선적으로 참여했다”고 소개했다. 남북 관계가 냉각될 때마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은 늘 가슴을 졸여야 했다. 입주 기업들의 안정적인 수익모델을 찾고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개성공단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한국에도 가게를 만드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모았다. “개성공단 생산품 대부분은 국내 대기업에 납품되죠. 하지만 소비자들은 해당 제품이 개성에서 생산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때가 많아요. 이런 개성공단 제품을 한군데 모아서 팔자는 것이죠.” 사실 개성공단 입주 기업 대부분은 자체 유통망이 없다. 개성공단 생산품에 대한 ‘수출 길’도 사실상 막혀 있다. 북한은 ‘적성국’으로 분류돼 의류(완제품 기준)는 60∼70%의 징벌적 관세를 물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에 가게를 열면 입주 기업들도 활로를 모색할 수 있다. 개성공단상회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서인지 찾는 소비자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일단 와서 제품을 본 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다. 북한이 고향인 노년층이나 북한을 접해보지 못한 젊은이 등이 와서 신기해하면서 물건을 사간다. 가격도 합리적이라는 게 상회가 내세우는 장점이다. 남성용 정장 셔츠의 가격은 2만5000원. 닥스와 듀퐁 등 유명 브랜드에 납품되지만 브랜드를 달지 않았기에 가격을 낮출 수 있다고 했다. 정 이사장은 “품질만큼은 자신 있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개성공단이 현재 남북 경제협력의 사실상 유일한 통로임을 강조했다.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남북 교역의 99% 이상을 개성공단이 차지한다. 지난해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생산액은 4억6997만 달러(약 5500억 원). 2004년 개성공단이 출범한 뒤 크고 작은 위기가 있었지만 꾸준히 남북 교류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그런 개성공단의 성장이 정체돼 있다고 정 이사장은 우려했다. “현재 개성공단의 1단계 ‘100만 평 조성’ 계획 중 절반도 달성되지 못했고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5·24 경제 제재로 개성공단 신규 투자가 사실상 금지됐어요. 북측 인력난도 고질적인 문제죠. 최근 통일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지만 ‘준비된 통일’이어야 성공할 수 있어요. 독일도 경제 문화 등의 교류를 바탕으로 단계적으로 통일하지 않았습니까.” 정 이사장은 현재 전국에 5곳인 개성공단 상회(서울 안국점, 서울 북한산성점, 경남 창원점, 대전 둔산점, 인천 서경백화점점)를 내년까지 30곳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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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명치료 환자 두려움 속에서 눈감아… ‘웰다잉 권리’ 찾아줄 것”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고령화 속도가 빨라요. 삶의 질 못지않게 죽음의 질을 신경 써야 할 때입니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71)이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웰다잉(well dying)’ 전도사로 나섰다. 잘사는 것을 가리키는 웰빙(well being)의 마무리는 웰다잉으로 가능하다는 뜻에서다. 그는 올해 3월 발족한 ‘호스피스·완화의료 국민운동본부’의 대표를 맡아 웰다잉의 필요성을 알리고 관련 법안의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란 치료가 힘든 말기 질환을 지닌 환자들에게 연명치료에 매달리기보다는 가족 등 소중한 사람과 함께 편안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료행위를 말한다. “환경운동을 하다 나이가 들다 보니 자연스레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제게도 곧 닥쳐올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우리 사회가 죽음에 관한 논의 자체를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제는 어떻게 죽는 게 삶을 잘 마무리하는 것인지 사회적으로 공론화해야 하는 시점이 됐죠.” 그는 ‘좋은 죽음’의 사례로 지난달 세상을 떠난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를 들었다. 색스는 자택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피아노 치기, 편지 쓰기, 수영, 논문 마무리 등 하고 싶은 걸 모두 했다. 색스는 이런 활동을 통해 인생에 감사함을 지녔고 죽음을 긍정하며 궁극적으로 삶을 긍정했다. 반면 국내 현실은 이와 거리가 있다. 병원의 차디찬 기계에 둘러싸여 고독과 두려움 속에서 죽는 이들이 태반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아픈 상태로 생을 마감하는 기간이 선진국보다 길다. 호스피스 병동 역시 삶을 편하게 마감하는 곳이 아니라 ‘죽으러 가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는 게 현실. 실제로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2010년 40개국에서의 죽음의 질을 평가한 결과 한국은 32위에 그쳤다. 김 전 장관은 “연명치료를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환자가 죽음의 방식을 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웰다잉 논의는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말기 환자가 연명치료 중단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존엄사법’이 발의돼 있지만 해당 상임위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올해 7월부터 보건복지부가 말기 암 환자의 호스피스 의료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했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더 적극적인 대책을 촉구했다. “호스피스 의료비 지원 대상이 뇌중풍(뇌졸중)과 치매 등으로 확대돼야 합니다. 고령자 진료비는 전체 진료비의 35%(2013년 기준)를 차지하고 있어요. 관련 논의가 활성화되면 국가적으로도 의료비를 낮출 수 있겠지요.” 국민운동본부에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전윤철 전 감사원장,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 김우식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김모임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 성낙인 서울대 총장, 정갑영 연세대 총장, 염재호 고려대 총장, 이장무 KAIST 이사장, 강성모 KAIST 총장 등 총 1만400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서울대병원과 서울성모병원 등 80여 개 기관도 뜻을 같이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웰다잉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 우리 사회의 행복지수를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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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獨 글로벌기업 헨켈, 139년 장수 비결은 여전한 스타트업 정신

    “우리는 지금이 2025년이라고 가정해요. 어떤 기술이 필요할지, 또 그 기술을 구현하려면 어떤 파트너와 협력할지 역(逆)으로 추적해 성장동력을 찾지요.” 독일 중서부 라인 강 끝자락에 위치한 뒤셀도르프의 헨켈 본사에서 만난 신사업 개발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헨켈은 139년의 장수 기업이지만 회사의 시계는 미래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헨켈 매출액의 절반 정도는 개발한 지 3년도 안 된 제품에서 나온다. 헨켈은 주방용 칼로 유명한 헹켈과는 다른 회사로 세제 퍼실(Persil)과 살충제 홈키퍼, 홈매트 등을 생산한다. 주력산업은 접착제 사업이다. 지난해 매출 164억2800만 유로(약 22조 원) 가운데 접착제 사업은 49%로 세계 1위다. 1876년 세제회사로 출발한 헨켈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세제를 포장할 접착제를 구하지 못하자 자체적으로 접착제를 개발했다. 헨켈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고기능 접착제를 개발하기 시작해 현재는 과자나 음료의 패키지부터 박음질을 하지 않는 의류, 휴대전화와 자동차 등에 접착제를 납품한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우주항공 민간기업인 ‘스페이스엑스’가 개발 중인 로켓에도 헨켈의 접착제가 들어간다. 헨켈이 접착제 사업을 고도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회사 내 ‘신사업&스카우팅 사업 부문’의 역할이 컸다. 이곳은 최소 5년 이후의 시나리오를 상정한다. 예컨대 투명한 디스플레이와 숨쉬는 콘크리트벽, 인공지능이 내장된 기기 등이 상용화될 것으로 보고 이에 따라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계획을 수립한다. 헨켈은 이런 기술을 구현할 내부 스타트업을 본사에서 비행기로도 1시간 이상 떨어진 뮌헨에 만들었다. 본사와 가까이 있으면 기존 사업의 논리에 따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 힘들고 조직 내 위계질서의 영향을 받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다만 기술의 상업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엔지니어링 화학 물리학 경영 등 전문가로 팀을 이루되 경영 전문가를 팀장으로 앉힌다. 이들은 오스람 필립스 BMW 등의 기업들과 접촉하며 사업 기회를 찾고 있다. 뒤셀도르프=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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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지내십니까]“빵보다 책으로 빈곤 퇴치… 저개발국에 ‘교육 씨앗’ 뿌려요”

    “어휴, 말도 마세요. 아마 제가 지구상에서 악성 댓글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일걸요.” 민동석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63·전 외교부 차관)은 최근 기자와 만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던 대규모 촛불시위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농업 협상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의 한국 측 수석대표를 지냈다. 그는 광우병 파동 당시 온갖 저주와 협박을 받았다. 대규모 시위를 보면서 이 나라가 (분열로) 무너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어마어마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는 광우병 파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광우병 파동은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과 반미, 이념적 대립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해 표출된 문제라고 봐요. 지금 미국산 쇠고기가 상당량 수입되는데, 당시 미국산 쇠고기에 독극물이 든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외무고시 13회 출신으로 직업 외교관이었다. 2006년 한미 FTA 협상단이 꾸려지자 농림수산식품부 농업통상정책관으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에는 “왜 나인가”란 생각이 앞섰다고 했다. 협상이 끝나면 대표가 옷을 벗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에 대해 협상 대표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 실제 그 또한 농식품부 통상정책관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는 협상 대표가 희생양이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광우병 파동을 왜곡 보도한 MBC ‘PD수첩’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벌여 승소하기도 했다. 민 사무총장은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지만 오해를 바로잡아서 공직자로서 소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외교부 차관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을 맡았다. 외교관으로는 처음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전 세계 199개의 유네스코 국가위원회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민 사무총장은 취임 후 조직의 역할을 다지는 데에 주력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지난해로 60주년을 맞이했는데, 그는 향후 100년을 내다보고 새로운 비전을 선포하기도 했다. 가장 방점을 둔 부분은 저개발국에 대한 교육 사업이다. 그의 ‘외교무대’도 아프리카와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 오지로 달라졌다. 40시간의 비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지에 글자를 가르치고 직업교육을 하는 학습센터를 짓는 게 주 사업이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던 한국은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교과서를 발간할 수 있었죠. 1950, 60년대 초등학생들은 이 교과서로 공부했고, 이런 교육의 힘이 대한민국 성장의 토대가 됐죠.” 한국은 유네스코의 지원금으로 초등학교 교과서를 매년 3000만 권씩 찍었다. 1950, 60년대 학생들은 이 교과서로 공부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자신이 공부했던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를 감사의 표시로 2012년 유네스코 본부에 기증하기도 했다. “빵보다는 책입니다. 최근 40년간 아프리카에 국제개발원조로 투입된 자금이 1조7500억 달러(약 2100조 원)나 됩니다. 문제는 아프리카가 여전히 빈곤하다는 거죠. 교육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해요.” 그는 ‘제2의 반기문 발굴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바로 ‘유네스코 키즈 프로그램’으로 2003년부터 매년 전국 초등학교에서 학생을 추천받아 글로벌 리더가 되는 교육을 한다. 100명 선발에 2500여 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다. 교육을 받은 학생 중 25명을 다시 선발해 유네스코·경제협력개발기구(OECD)·유럽연합(EU) 본부 등에 직접 가서 국제기구를 체험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매년 하다 보면 언젠가 이 아이들 중에서 제2, 제3의 반기문 사무총장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미와 아시아 등지의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세계문화유산 등록의 노하우도 함께 전수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이 받은 걸 국제사회에 돌려줘야 할 때입니다. 저개발국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죠. 저의 30년 외교관 경험이 작으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심정으로 일에 매진할 겁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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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설탕 권하는 사회

    오랜만에 만난 친구 K의 얼굴은 갸름해져 있었다. 석 달 전 건강검진이 계기였다고 했다. 자칫 당뇨가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듣고는 설탕을 끊기로 했다. 처음엔 견딜 만했지만 2, 3일이 지나자 우울감이 왔다. 이른바 ‘슈거 블루스’(설탕 금단증상)였다. 그동안 설탕 중독에 빠져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래도 독하게 마음먹고 설탕 끊기를 이어갔다. 2주 만에 72kg이었던 체중이 68kg으로 4kg이나 줄었다. 먹는 양을 줄이지도 않았고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잠도 10분 이내에 쉽게 들었다. 이전엔 자리에 누워 20∼30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피부 트러블도 완화되고 머리도 맑아진 듯한 기분이라고 했다. 설탕은 유죄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설탕 자체가 해롭다기보다는 설탕의 양(量)이 문제다. 설탕을 과다 섭취하면 혈당을 조절하는 호르몬인 인슐린의 기능이 마비돼 대사증후군이 생긴다. 대사증후군은 당뇨와 고지혈증, 동맥경화 등 성인병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불린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설탕 과다 섭취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설탕을 경계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기에 음료를 주문할 때 ‘시럽을 빼 달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식사 후에는 ‘밥 배와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며 달달한 음식을 찾는다. 또 상당수 식당은 음식 맛을 쉽게 내려고 설탕을 넣는다. 외식이 다이어트의 적(敵)으로 불리는 이유다. 우리가 ‘피로사회’에 살고 있는 점도 한몫한다. 적지 않은 직장인들이 야근을 하고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들은 매일 아침 캔커피나 에너지음료, 커피믹스 등을 먹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설탕의 단맛은 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해 기분을 좋게 만드는 세로토닌을 분비시킨다. 단것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취하며 ‘가짜 행복’을 찾는 것. 이런 이유로 우리 국민의 하루 평균 당류 섭취량은 61.4g으로 세계보건기구(WHO)가 권장하는 섭취량(50g)을 웃돈다. 한국에 ‘슈거보이(sugar boy)’가 있다면 영국에는 ‘반(反)슈거보이’가 있다. 주인공은 영국의 인기 요리사인 제이미 올리버. 요리연구가 백종원 씨가 예능에서 설탕을 만능 조미료처럼 썼다면 올리버는 최근 ‘슈거 러시’라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설탕 과다 섭취의 위험을 경고했다. 학교 급식 개선 운동을 벌여왔던 그가 이번엔 설탕이 많이 들어간 탄산음료에 20%의 ‘설탕세’를 붙이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영국 의학협회는 설탕세를 도입하면 영국에서 18만 명의 비만을 줄일 수 있다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물론 인간은 원초적으로 단맛을 좋아한다. 먹는 즐거움이 없는 삶은 지루하고 고단하다. 하지만 단맛을 일상적으로 찾으면 문제가 된다. 슈거보이가 많은 사람을 ‘요리의 세계’에 입문시킨 것처럼 국내에도 반슈거보이가 등장해 ‘건강의 세계’를 알기 쉽게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 설탕을 덜 먹으면 국가 차원에서 공공 보건비용을 낮출 수 있음은 물론이다.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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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농업 살길은 혁신… IT 무장한 창농 기업가 육성”

    “농업을 ‘한물간 산업’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농업에 이야기를 담거나 특별한 기술을 넣으면 평범한 농부도 첨단 벤처 못지않은 기업을 경영하는 ‘혁신가’가 될 수 있어요.” 7일 경북 포항시 죽장면의 상옥마을. 농민들과 포항시 공무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강연자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상옥마을은 사과 산지로 유명하지만 사과 재배에만 집중하다 보니 농민들 소득은 제자리였다. 이 강연자는 사과에 새로운 디자인을 입히고 사과 와인과 사과 스낵을 만드는 한편 사과 따기 등 사과와 관련된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사과 마을’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이 강연자는 농촌에서 ‘신(新)상록수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한 민승규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54). 농업경제학 박사인 그는 삼성연 연구원 시절이던 2001년 한국벤처농업대학을 세웠다. 지금은 졸업생 1500여 명을 배출한 ‘부농(富農) 사관학교’로 대학 교수, 셰프, 공무원 등도 강의를 들으러 찾아온다. 민 부사장은 2008년 대통령농수산비서관으로 발탁된 뒤 농림부 제1차관과 농촌진흥청장을 지내고 2012년 삼성연으로 복귀했다. 그는 최근 삼성그룹이 지원하는 경북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창조 농업 프로젝트를 이끌며 상옥마을 명예이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가 농촌 현장에 눈을 돌린 때는 1997년. 농민들이 컴퓨터만 다룰 줄 알아도 더 나은 생활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해 컴퓨터 15대를 들고 동료들과 경기 화성군을 찾았다. 농민들에게 정보화 교육을 했더니 일부 농민은 한술 더 떠 대학에 진학해 영농법인을 세웠다. 그는 이처럼 ‘숨겨진 보석’을 발굴해 농업 경영자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다 벤처 붐이 한창이던 2000년에 농업과 벤처를 접목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벤처 요람인 대전 대덕밸리에서 벤처 사업가와 농민의 만남을 주선했다. 벤처 현장을 둘러본 농민들은 ‘경영을 제대로 배워 보고 싶다’고 했다. 개인 자격으로 봉사했던 그에게 또 다른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찾아오기 쉬운 충남 금산군의 문을 두드렸고 금산군은 선뜻 폐교를 빌려줬다. 벤처농업대학은 2001년 이 폐교에서 탄생했다. 수업은 1년 과정으로 매달 한 차례 주말에 1박 2일로 진행됐다. 재정 지원이 없어 농민들에게 60만 원의 수업료도 받았다. 농민들은 명함과 e메일 주소가 없으면 입학할 수 없었다. 또 졸업논문 대신 농업 사업계획서를 내게 했다. 배운 지식을 농업에 활용하라는 뜻이었다. 농민들은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심야토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 농업이 망하려면’ 등의 주제를 두고 토론했다. 농민들은 정부 보조금에 기대기보다는 자체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점을 몸으로 깨달았다. 그 역시 휴일을 쪼개 금산을 오갔다. 힘들게 시작한 일이라 허투루 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 민 부사장 사무실 벽에는 커다란 대한민국 지도가 붙어 있다. 지도엔 스티커가 여기저기 빼곡하게 붙어 있다. 그가 다녀온 지역이다. 벤처농업대 수업이 없는 주말에 특별한 일 없으면 현장으로 간다. 2001년부터 전국을 세 번째 돌고 있다. “박사 딴 뒤 첫 일자리가 농촌진흥청 계약직이었어요. 당시 농진청에는 대한민국을 헐벗음에서 벗어나게 해 준 농업과학자인 우장춘 박사 묘소가 있었는데 이를 보고 세상에 쓸모 있는 농업경제학자가 되겠다고 다짐했죠. 농업 기업가 1만 명을 양성하는 게 꿈입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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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미나 “페북 친구 넘치는데 늘 허전…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삶을 배우는 학교가 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철학자인 알랭 드 보통이 2008년 영국 런던에 처음 세운 ‘인생학교’다. 행복, 직업처럼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봄 직한 화두를 인문학과 접목시켜 일반인에게 강연한다. 현재 프랑스 파리, 호주 멜버른 등 세계 9개 도시에 분교가 있다. 이 인생학교가 올해 말 서울에 10번째 ‘분교’를 연다. ‘인생학교 서울’의 운영자는 손미나 씨(43)이다. 지상파 방송의 유명 아나운서였던 손 씨가 처음부터 인생학교를 운영하려고 계획한 건 아니었다. 그는 2007년 방송사에 사표를 내고 유럽에 갔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대책 없이 노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걱정이 많았지만 그는 느긋했다. “방송 환경이 바뀌면서 아나운서라는 직업의 ‘천장’이 보이는 데다 전문성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총 쏘기에 비유하자면 그전에는 무차별적으로 쐈다면 10년차가 되면서 과녁을 정해놓고 쏴야겠단 생각을 했죠.”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여행. 하지만 현실의 여행은 달랐다. 다른 문화를 접하고 스스로를 발견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유명 관광지로 스케줄을 빡빡하게 메우는 ‘여행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여행 관련 에세이와 소설을 쓰면서 관련 사업도 구상했다. ‘손미나앤컴퍼니’를 세워 여행 강의·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단순히 돈만 버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일도 했다. 시각 장애 등으로 여행하기 힘들었던 10명을 뽑아 프랑스 프로방스에 보내주는 ‘여행 선물’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동시에 여행 관련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등 방송인으로서의 특기도 살렸다. ‘인생학교’ 일을 시작한 것도 여행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여행 에세이를 쓸 때였다. 한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보통을 인터뷰했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책을 많이 읽었지만,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아보니 학교가 나에게 가르쳐준 건 거의 없었다는 그의 말에 크게 공감했어요. 그가 재미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게 알고 보니 인생학교였답니다.” 얼마 후 보통이 인생학교 서울을 계획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손 씨는 “내가 해 보겠다”고 제안했다. 2013년 말, 인생학교 서울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막바지 개교 준비에 한창인 손 씨는 보통이 만든 프로그램을 뼈대로 하되 이를 한국적인 정서에 맞게 강연할 수 있는 연사 영입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 네이버 디자인을 총괄했던 조수용 JOH 대표이사,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하기로 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삶의 지혜를 알려주겠다는 생각이 뚜렷했다. 손 씨는 인생학교 서울을 통해 한국인이 삶의 여유와 만족,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얻기를 희망했다. 인생학교가 빡빡한 한국인들의 삶에 숨통을 틔워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작 손 씨에게 행복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남들이 이미 지닌 무기를 나도 가지려 하니까 힘든 거 아닐까요? 세상에는 수십억 개의 삶의 유형이 있습니다.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나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게 행복을 찾는 첫걸음이 아닐까요?”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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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유영]냉장고에 부탁하지 않는 삶

    부부에겐 냉장고가 3대 있었다. 대형냉장고와 김치냉장고가 있었지만 금세 차 버려 작은 것을 하나 더 샀다. 그러던 중 사업이 기우는 바람에 집을 줄여 이사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작은 냉장고 하나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처분해야 했다. 작은 냉장고만 있는 삶은 불편했다. 매주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던 습관은 쉬 고쳐지지 않았다. 음식은 넘쳤지만 이를 넣어둘 공간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결국 ‘음식 씀씀이’를 줄여야 했다. 내친김에 재래시장에 가서 음식을 사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때그때 필요한 음식만. 장을 보는 품목도 달라졌다. 기존에 대형마트에서는 과자와 라면, 즉석식품 등 가공식품 위주로 샀었다. 하지만 재래시장에 자주 가다 보니 야채나 과일, 고기, 생선 등 신선식품을 더 많이 사게 됐다. 이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요리도 자주 해야 했다. 냉동 만두처럼 물에 끓이거나 전자레인지에 가열만 해도 한 끼가 완성되는 즉석·가공식품을 사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대신 요리가 거창하지 않았다. 채소를 나물로 무치고 밑반찬 몇 개를 내어 소박한 밥상을 차렸다. 부부는 이런 과정을 겪으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식단은 건강식으로 바뀌었고 체중도 다소 줄었다. 돈도 아끼게 됐다. 대형마트에 갈 때마다 10만 원은 족히 썼지만 재래시장에서는 2000∼3000원 단위로 찬거리를 사게 됐다.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냉동식품이나 곰팡이가 피어난 과일 잼을 넣어 두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다. 부부는 “작은 냉장고 한 대만 있어도 충분한데 예전에는 있으나 마나 한 음식들을 왜 넣어두고 있었는지…”라고 말했다. 이들을 보고 ‘니어링 부부’가 떠올랐다. 철학자인 스콧 니어링과 환경운동가인 헬렌 니어링은 “세상에는 요리도 너무 많고, 요리책도 너무 많고, 요리사도 너무 많다”고 했다. 이들은 도정하거나 제분한 곡물이 아닌 살아 있는 통곡물로 식사를 준비했고, 직접 기른 채소와 과일을 먹었다. 일요일에는 사과만 소화할 수 있는 만큼 먹었다. 스콧은 92세까지, 헬렌은 100세까지 살았다. 물론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니어링 부부처럼 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최근 집밥 열풍으로 어떻게 먹는 게 행복한 것인지 등에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에서 이들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잡식동물의 딜레마’ 등을 쓴 마이클 폴란은 “우리는 음식의 홍수에 빠져 있지만 정작 ‘진짜 음식’은 드물다. 슈퍼마켓 선반에 ‘진짜 음식’이 사라지고 ‘그럴싸한 음식’을 가장한 가공식품이 빼곡히 들어찼다”고 꼬집는다. 그가 말하는 진짜 음식의 판단 기준은 증조할머니가 아는 음식, 즉 신선하고 살아 있으며 우리의 오감(五感)에 말을 거는 음식이다. 냉장고를 갖다 버린 부부는 “‘슈퍼마켓’보다 ‘마켓’(시장)을 가까이 하니 결과적으로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탐식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냉장고를 다시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 201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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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대석]“문화재 지켜낸 간송정신… 후대들 자부심 갖고 이어갔으면”

    《 삼대(三代)는 우직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만석꾼은 사재(私財)를 털어 문화재를 수집했다. 문화재 약탈이 횡행했던 일제강점기였다. 때로는 금싸라기 땅까지 팔았다. 지킬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들면 기와집 수백 채 값을 선뜻 내놓아 훈민정음 해례본부터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겸재 정선의 산수화 등을 지켜냈다. 어렵사리 이 땅에 남게 된 문화재 일부는 훗날 대한민국의 국보(12점)와 보물(10점)이 됐다. 만석꾼의 아들은 미국에서 촉망받는 화가였다. ‘코리아’라고 하면 한국전쟁 정도 떠올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서둘러 귀국했고 부친의 호를 딴 미술관을 만들어 세상에 공개했다. 손자의 꿈은 역사가였다. 이젠 연로한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뜻을 계속 받드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아버지를 도우러 뛰어들었다.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 일가 얘기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간송의 아들과 손자를 만나봤다. 이들은 성우 씨(81)와 인건 씨(44)로 각각 간송미술문화재단의 이사장과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과거 문화재로 나라를 지키다간송의 아들인 전성우 이사장은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림을 공부했다. 동양적인 색채로 추상화를 그려 유명해졌다. 미국 휘트니 미술관이 젊은 작가 35명을 뽑아 개최한 전시에도 참가했다. 이는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히는 ‘휘트니 비엔날레’의 전신. 한국인은 물론이고 동양인으론 처음이었다. 그러던 중 1962년 청천벽력 같은 편지를 받았다. 간송이 석 달 전 급성신우염으로 타계했다는 내용. 아들의 성공을 기뻐했던 간송은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작품 활동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간송은 문화재 수집에 대해 자식들에게 일언반구 않으셨어요.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지 않았던 분이세요. 다만 밤에 족자를 벽에 걸어놓고 보고 있거나 고려청자를 어루만지고 계셨던 게 기억나요. 내가 좋아하는 아버지가 저렇게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죠.” 전 이사장은 성인이 돼서야 간송이 힘겹게 문화재를 수집한 걸 알게 됐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문화재 수집은 재산과 안목만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었다. 기개가 필요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대표적이다. “조선어 교육 금지령 등 문화말살 정책을 폈던 일제는 ‘한글이 몽골 문자를 본 떴다’는 등 한글을폄훼했지만 반박할 증거가 없었어요. 한글 창제원리가 실린 해례본은 어디에도 없었죠.” 해례본 보유 사실을 총독부가 알기라도 하면 목숨마저 위태로웠을 1940년대 초반. 간송은 해례본이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에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10배인 1만 원을 줬다. 한글학자를 비밀리에 불러 필사하게 해 한글 창제원리를 언론에 실었다. 이 해례본은 국보 제70호와 세계기록문화유산이 됐다. 미국에서의 작품활동을 접고 귀국한 전 이사장은 간송이 세운 미술관인 ‘보화각’을 열어보고 말문이 막혔다. ‘빛나는 보물을 모아뒀다’는 이름이 무색하게 폐허로 변해 있었다. 6·25전쟁 때 인민군과 중공군, 터키군 등이 거쳐간 탓. 문화재를 뺏기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술관 복원이 급선무였다. 전 이사장은 1966년 동생인 전영우 씨(현 간송미술관장·전 상명대 미대 교수)와 함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워 수집품을 상세히 정리하는 등 문화재 연구의 기틀을 닦았다. 당시 참여했던 손꼽히는 고미술학자들은 ‘간송학파’로 불린다. 1971년부터는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바꾸고 매년 봄, 가을에 2주씩 꼬박꼬박 공개했다. 무료였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문화재가 손상되지 않도록 유지, 보수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당연히 무료로 공개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어요. 다만 우리 덩치를 감안해 능력껏 하자는 뜻에서 한시 개방했죠.”현재 더 많은 사람이 향유하라 간송의 수집품을 더 폭넓게 개방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린 건 장손인 전인건 사무국장이다. 미국에서 동양사를 공부한 그 역시 자신이 문화재 일에 매달리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연로한 아버지가 계속 끌고 가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할아버지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건 “해야 하는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난해 3월부터 전시 공간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옮겼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건축한 현대적인 건축물에 고미술을 전시하는 게 적합한지 등에 한때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간송의 수집품을 보고 싶은 이들은 언제든 와서 볼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30만여 명이 다녀갔다. 현재 열리는 ‘간송문화전: 매·난·국·죽 선비의 향기’에서 탄은(灘隱) 이정(1554∼1626)의 ‘풍죽(風竹)’ 전시실에 들어서면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대숲 영상이 펼쳐진다. 미디어아티스트 차동훈 씨(31)가 제작한 ‘풍죽예찬’으로 관람객들은 4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탄은이 대나무를 보면서 느꼈을 법한 감흥을 짐작할 수 있다. “풍죽의 잎들은 거센 바람에 누워 있지만 나무만큼은 잔가지조차 꺾이지 않고 있어요. 세파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해 조선시대 묵죽화의 백미로 꼽히죠. 그림만 덜렁 걸려 있으면 ‘이게 뭐야’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죠.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관심 있어 하고 편안해 하잖아요.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친숙하게 전하려는 시도입니다.” 대기업의 초고화질(UHD) TV를 활용해 그림을 교육하는 것도 같은 시도다. 정교하게 그리기로 유명한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근접 촬영을 통해 UHD로 보여줘 붓의 필치와 화려한 색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고미술 감정가들이 돋보기로 들여다봤던 것과 비슷한 원리다. 또 작품을 포털에 전시하거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사군자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도 간송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이다. 지금은 할아버지가 지켜낸 해례본의 영인본(影印本)을 교보문고와 함께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원본을 최대한 구현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에 각 가정이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광복 70주년인 올해 한글날 공개할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컨설턴트 출신인 동생 전인석 씨(41)도 참여한다. 해석본도 덧붙일 계획이다. 원로 국어학자인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감수를 맡았다. “미국에는 독립선언서 사본을 거실에 걸어둔 가정이 종종 있어요. 독일의 몇몇 가정도 구텐베르크 성경 사본을 갖고 있죠. 서양 최초의 금속 인쇄기술에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죠. 한글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정신이 온전히 집결된 문화재 아닙니까.”미래 우리 문화에 자부심 느꼈으면 현재 간송미술관은 삼성미술관 리움과 함께 ‘양대 사립박물관’으로 꼽힌다. 다만 간송미술관은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의 지원을 받는 리움과 형편이 다르다. 실제로 간송의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빚쟁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후손들은 그제야 간송이 빚까지 내서 각종 세금을 냈던 걸 알게 됐고 결국 서울 종로의 생가를 팔아 빚을 갚았다. “세상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문화재에 어떻게 가격을 매기겠습니까. 역설적이지만 아버님(간송)이 진짜 멋있게 (돈을) 쓰고 가셨어요. 엄청난 일을 하셨던 거죠.”(전 이사장) “신라 말의 금속 공예기술은 최고였어요. 청자는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고려 상감청자나 비색청자는 세계 최고로 꼽히죠.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은 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오지 않았나요. 훌륭한 문화를 만들어 낸 우리 조상의 유전자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을 것이라는 자긍심과 자부심, 자신감을 후대가 갖기를 간송이 바라고 있지 않을까요.”(전 사무국장) 간송의 후손들은 여전히 ‘간송 정신’의 실천을 고심하고 있다. 이들은 대구 간송미술관 분원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간송미술관 인근에 규모를 넓힌 상설미술관을 마련하는 방안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사립미술관에 대한 예산 지원 등이 여전히 미비해 어려움을 겪는다. 당장은 후원회 모집에 주력하고 있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후원회를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올해 6월 후원회 발족식을 열었고 연내 개인회원을 모집할 예정이다. 두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간송미술관의 종이 한 장도 팔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삼대가 우공(愚公) 같다’고 하니 전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버님이 모은 수집품을 지킨 ‘곳간지기’일 뿐이에요.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정신’을 더 알리는 건 후대가 반드시 해줬으면 해요. 저는 곧 갈 거예요. 나이도 많이 먹었고…. 다만 제가 간송을 (저승에서) 만나 뵙고는 야단맞고 싶지 않을 뿐이죠.”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겨 버린 아들의 눈은 어느새 벌게져 있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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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공대의 독보적인 교수? 10명도 안돼”

    “세계 주요 대학을 보면 분야별로 독보적인 교수들이 있습니다. 서울대 공대요? 전체 교수 300여 명 중에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줘도 10명이 안 될 겁니다.”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60·사진)은 14일 ‘2015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백서’의 발간 배경에 대한 질문을 직접 받자 이렇게 말했다. 최근 백서를 펴낸 서울대 공대는 야구에서 번트를 친 후 ‘간신히’ 1루에 진출하는 타자에 스스로를 빗대면서 탁월한 연구 성과(만루홈런)가 없다고 통렬하게 자기반성을 해 눈길을 끌었다. 국제적 대학평가의 하나인 QS순위 2015년판에 따르면 서울대 공대는 화학공학 19위, 기계항공 30위, 전기공학 31위 등 상위권에 올라 있다. 이 학장은 평가대로라면 이들 분야에서 유명 학자들이 적어도 한두 명씩 나와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수들이 ‘랭킹’이란 허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 교수들이 적당히 쉬운 주제로 논문을 낸다. ‘교수들만의’, ‘교수들을 위한’ 연구를 한다. ‘얼치기 연구’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공대는 더이상 ‘탁월한(excellent) 대학’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이 학장은 또 논문은 아이디어를 입증하면 되는 구조여서 연구 성과를 실제로 사용하는 본래의 목적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공대가) 자연현상을 관측하고 해석하는 자연대의 아류라고 할 정도로 전락했다”고 한숨지었다. 그는 많은 대학과 연구소가 창의적이고 성공이 불확실한 연구보다는 연구비를 더 많이 받아내려는 게임에 매몰돼 있다는 문제점도 지목했다. 그 결과 교수들이 단기성과 위주의 연구에 치중하고 살아남기 위해 연구량을 채우고 있다고 했다. 이 학장은 ‘탁월한 공대’는 실용적인 연구와 새로운 이론이 어우러지고 국가의 산업에 이바지해야 하는 곳이라고 역할을 규정했다. 하지만 서울대 공대, 나아가 대학 전체의 위기는 곧 국가 미래 경제의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졸업생을 많이 보내 대기업을 성장시켰으니 잘 했지만 삼성 현대 포스코 같은 대기업에 언제까지 기댈 수는 없다. 중국이 한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이제는 퍼스트 무버(시장 선도자)형 인재를 키워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 학장은 대학이 인재양성 기능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학생들이 졸업한 뒤 대학에서 많이 배웠다고 해야 하는데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학생들을 창의적인 인재로 키워야 하는데 대기업의 소모품을 양성하고 있을 뿐”이라고 자탄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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