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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일본 도쿄(東京) 국회 앞에서는 일본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광경이 벌어졌다. 시민들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안보법제 강행처리 방침에 반발해 도로를 점거하고 밤낮으로 시위를 벌인 것. 일본인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정치에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여겨졌던 대학생들이 시위의 중심부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지난해 9월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된 책 ‘민주주의란 뭔가’는 시위를 주도한 실즈(SEALDs·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긴급행동) 멤버들이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郞) 메이지가쿠인대 교수와 나눈 대화를 담았다. 책의 매력은 실즈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데모를 조직했는지를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책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이 달라진 계기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정부, 대기업, 언론 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이들이 생겨난 것. 2012년 여름 벌어진 원전 반대 시위는 이들에게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실즈의 리더 격인 오쿠다 아키(奧田愛基) 씨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게 어떤 것인지 보러 갔다”고 돌이켰다. 이 자리에서 뜻이 맞는 동년배들을 만나며 실즈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들은 2013년 말 아베 정권이 특정비밀보호법을 통과시킬 때 다시 뭉쳐 실즈의 전신인 SASPL(특정비밀보호법에 반대하는 학생모임)을 만들었다. 실즈의 트레이드마크인 힙합 스타일의 구호가 이때 만들어졌다. 오쿠다 씨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리듬감 있는 연설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힙합 스타일을 도입한 건 간접화법과 경어가 많아 강한 주장에 어울리지 않는 일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5월 드디어 아베 정권의 안보법제 강행처리를 막기 위해 실즈가 탄생했다. 실즈는 매주 금요일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기존 스타일과는 달랐다. 추상적인 구호를 외치는 대신 한 명씩 올라가 자신의 얘기를 했다. 오쿠다 씨는 “실즈의 의견은 없고, 개인의 의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 사람씩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했다. 회장 같은 거창한 감투를 없애고 소모임을 만들었고 소모임 리더끼리 수평적으로 소통했다. 실즈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면서 고등학생, 학자, 노인, 주부, 지방 모임 등 유사조직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소통했고 지난해 여름 국회 앞에 수십만 명이 모일 수 있었다. 실즈의 가장 유명한 구호는 누가 “민주주의란 뭔가”라고 물으면 참석자들이 “이거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독선과 권력욕으로 얼룩진 국회가 아니라 민주적 방식으로 시위를 조직하고 즐기는 이곳에 일본의 민주주의가 있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이들의 시위는 축제를 방불케 한다.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비민주적으로 작동하는 한국 정치권과 각종 단체, 그리고 문화제로 시작해 폭력 시위로 마무리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정부가 북한 4차 핵실험에 대한 독자 제재안의 하나로 인도적 목적 이외의 대북 송금을 원칙적으로 전면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존에 검토하던 ‘스톡홀름 합의’ 백지화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강경한 방안이다. 교도통신은 10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자신의 지역구인 야마구치(山口) 현 후원모임에 참석해 일본의 독자 대북 제재 방안에 대해 “자민당의 납치문제대책본부에서 제시한 안을 참고해 엄중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납치문제대책본부는 납치문제 해결에 진전이 없자 인도적 목적 이외의 대북 송금을 금지하는 내용의 제재 강화 방안을 정부에 제언했다. 또 미국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도록 호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북한과 일본은 2014년 5월 스톡홀름 합의 당시 북한이 납치 문제를 1년 동안 재조사하는 대신 일본은 제재 조치를 완화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북한 국적 보유자의 일본 왕래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 간부의 일본 재입국 금지 △모든 북한 국적 선박의 입항 금지 조치 등의 제재를 풀었다. 또 대북 송금 신고 의무 기준을 300만 엔(약 3030만 원) 초과에서 3000만 엔(약 3억300만 원) 초과로, 방북 시 미신고 반출 가능 금액을 10만 엔(약 101만 원) 이하에서 100만 엔(약 1010만 원) 이하로 완화했다. 이날 아베 총리의 발언은 스톡홀름 합의 백지화는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제재 수준을 올릴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조선인을 죽이자.” 최근까지 일본에서 벌어진 혐한시위에서 시위대가 들고 있던 플래카드의 내용이다. 도쿄변호사회가 이런 극단적 주장을 하는 이들이 공공시설 사용을 요청할 경우 거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정리해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배포했다고 10일 마이니치신문이 전했다. 혐오발언(hate speech)을 금지하고 싶지만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허가했던 지자체들을 지원한다는 취지다. 도쿄변호사회는 20쪽 분량의 소책자에서 일본은 인종차별철폐조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지자체에는 ‘차별행위에 관여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공공시설이 인종차별에 활용된다고 판단될 경우 이용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회는 소책자에서 먼저 신청서 및 신청 단체의 활동경력을 감안할 것을 권했다. 또 “(의심되는 경우) 혐오시위를 하지 않도록 사전에 경고하고, 시설 이용을 불허한 경우에는 만약을 고려해 반론 기회를 주는 게 좋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OO인을 죽이자’는 플래카드를 건 경우 △‘OO인은 범죄자의 자손’ 등의 발언을 반복한 경우 시설 사용을 불허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토 시게아키伊藤茂昭) 도쿄 변호사회 회장은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혐오시위는 개인의 존엄을 부정하고 인권옹호의 역사에 반한다.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허용되는 행위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도쿄=장원재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지난 해 여름 일본 도쿄(東京) 국회 앞에서는 일본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광경이 벌어졌다. 시민들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안보법제 강행처리 방침에 반발해 도로를 점거하고 밤낮으로 시위를 벌인 것. 일본인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정치에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여겨졌던 대학생들이 시위의 중심부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지난해 9월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된 책 ‘민주주의란 뭔가’는 시위를 주도한 실즈(SEALDs·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긴급행동) 멤버들이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郞) 메이지가쿠인대 교수와 나눈 대화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의 매력은 실즈가 어떤 배경에서 생겼고, 어떻게 데모를 조직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이 달라진 계기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정부, 대기업, 언론 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이들이 생겨난 것. 2012년 여름 벌어진 원전 반대 시위는 이들에게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태어나 처음 보는 대규모 시위였다. 실즈인 리더 격인 오쿠다 아키(奧田愛基) 씨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게 어떤 것인지 보러 갔다”‘고 돌이켰다. 이 자리에서 뜻이 맞는 동년배들을 만나며 실즈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들은 2013년 말 아베 정권이 특정비밀보호법을 통과시킬 때 다시 뭉쳐 실즈의 전신인 SASPL(특정비밀보호법에 반대하는 학생모임)을 만들었다. 실즈의 트레이드마크인 힙합 스타일의 구호가 이 때 만들어졌다. 오쿠다 씨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리듬감 있는 연설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힙합 스타일을 떠올린 것도 간접화법과 경어가 많아 강한 주장에 어울리지 않는 일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지난해 5월 드디어 아베 정권의 안보법제 강행처리를 막기 위해 실즈가 탄생했다. 실즈는 매주 금요일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기존 스타일과는 달랐다. 추상적인 구호를 외치는 대신 한 명 씩 올라가 자신의 얘기를 했다. 오쿠다 씨는 “실즈의 의견은 없고, 개인의 의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 사람 씩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했다. 안보법제에 반대한다는 하나의 공통점 외에는 제각각의 개성을 가진 이들이 연단에 올라갔다. 회장 같은 거창한 감투를 없애고 소모임을 만들었고 소모임 리더끼리 수평적으로 소통했다. 실즈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면서 고등학생, 학자, 노인, 주부, 지방 모임 등 유사조직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소통하면서 지난해 여름 국회 앞에 수십 만 명이 모일 수 있었다. 실즈의 가장 유명한 구호는 누가 “민주주의란 뭔가”라고 물으면 참석자들이 “이거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독선과 권력욕으로 얼룩진 국회가 아니라 민주적 방식으로 시위를 조직하고 즐기는 이 곳에 일본의 민주주의가 있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이들의 시위는 공연이나 축제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비민주적으로 작동하는 한국 정치권과 각종 단체들, 그리고 문화제로 시작해 폭력 시위로 마무리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정부는 유엔 차원의 대북 제재 외에 독자적인 고강도 제재 조치도 검토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총리는 8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독자 (제재) 조치를 검토하는 것을 포함해 의연하고 단호하게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또 이날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지진 규모를 고려하면 일반적인 수소탄 실험을 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면서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기술적으로 성숙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는 2006년 10월 북한의 첫 핵실험 이후 단계적으로 대북 제재를 강화해왔다. 하지만 2014년 5월 북한이 납북 일본인 재조사에 합의하면서 일부 제재를 완화했다. 일본 언론은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그동안 완화된 제재 조치가 모두 원위치될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인의 북한 방문 및 북한 국적자의 일본 입국을 금지하는 방안이 우선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북한을 방문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간부의 일본 재입국도 금지할 방침이다.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도 2014년 인도적 목적에 한해 허용했지만 앞으로는 전면 금지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중·참의원은 이날 ‘북한의 핵실험은 핵 비확산 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유일한 피폭 국가인 우리나라가 용인할 수 없는 폭거다. 엄중히 항의하고 단호하게 비난한다’는 내용의 대북 항의결의안을 채택했다. 또 교도통신은 “아베 총리가 5월에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를 주요 의제로 상정할 방침을 굳혔다”고 보도했다.도쿄=배극인 bae2150@donga.com·장원재 특파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이끄는 일본 자민당 정권이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乙武洋匡·39·사진) 씨를 영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7일 “자민당이 오토다케 씨에게 도쿄 선거구에 출마하거나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베 총리의 염원인 개헌을 위해서는 압승을 거둬야 하는 만큼 참신한 인물 영입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오토다케 씨는 ‘선천성 사지 절단증’으로 팔다리 없이 태어났다. 와세다대에 다니던 1998년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담은 ‘오체불만족’을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긍정적이고 유쾌하게 다룬 이 책은 일본에서 580만 부 이상 팔려 역대 베스트셀러 2위에 올라 있다. ‘장애는 불편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는 그의 말은 유행어가 됐다. 한국에서도 1999년 출간돼 50만 부 이상 팔리는 등 인기를 끌었다. 오토다케 씨는 대학 졸업 후 스포츠 라이터로 일했으며 통신 과정을 통해 교원 면허를 따 2007년부터 3년간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그가 교단에 서는 것 자체가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토다케 씨는 이후 2013년 2월부터 도쿄 도 교육위원을 지내다 지난해 12월 사퇴한 후 여야 정치권의 러브 콜을 받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육아 세대를 지원하는 데 열심인 오토다케 씨가 집권당 안에서 땀을 흘려주면 좋겠다”는 자민당 간부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의 사무소 측은 “여러 곳에서 제의를 받고 있지만 지금으로선 출마 의사는 없다”고 밝혔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한국 경제가 ‘중진국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주변 국가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이용할 것은 이용해야 한다.” 새해를 앞둔 지난해 12월 9일 일본의 세계적 경영 사상가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 비즈니스브레이크스루대 대학원 총장에게 한국 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물었다. 그는 작심한 듯 중진국 딜레마에 빠진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경고했다. 중진국 딜레마는 성장 동력 다변화에 실패해 10년째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덫에 빠져 답보하고 있는 한국 경제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또 한국에 대해 일본인이 서운하게 생각하는 점을 빼곡히 적은 종이 한 장을 건네기도 했다. 한국이 왜 역사상 훨씬 많이 한반도를 침략한 중국에는 관대하고 일본에 대해서만 원한을 갖고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다른 나라를 비난한다고 자국(自國)이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강조했다. 이용할 건 이용하라는 당부였다. 그는 일본 기술력의 원천은 한국에서 배운 ‘도자기’ 제조 기술이라며 한국의 자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날 인터뷰는 그가 총장을 맡고 있는 도쿄(東京) 소재 비즈니스브레이크스루대 대학원 총장실에서 열렸다. 인터뷰는 열기가 더해지면서 예정 시간을 넘겨 점심시간까지 이어졌다. ―경영 컨설턴트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데, 먼저 ‘성장 절벽’에 부딪친 한국 경제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혁신의 부재, 기초과학의 경시, 베끼기 문화 탓에 벽에 부딪쳐 있다. 지금 방식으로는 딜레마에서 탈출할 수도, 노벨상을 탈 수도 없다. 그 뿌리에는 암기 위주 교육이 있다. 지금 한국은 ‘학교 수재’ 만능 사회다. 이래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국은 또 경제가 성공하면 원화 가치가 높아져 점점 더 괴로워지는 구조다. 전형적인 중진국의 딜레마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로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순식간에 두 배 이상 올랐다. 지금 한국 원화라면 달러당 갑자기 400원이 된 셈이다. 한국은 달러당 400원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가. 당시 일본은 경쟁해 살아남았다. 중진국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이런 난관을 이겨낼 인재 양성과 기술 혁신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 지도자의 연설 어디를 뜯어봐도 그런 얘기는 없고 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이 드디어 ‘헬 코리아’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진단보다 해법이 어려운 것 같다.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 일본은 이노베이션으로 엔화 강세와 미일 무역전쟁을 극복했다. 무엇보다 미국에서의 생산을 궤도에 올렸다. 지금 자동차 400만 대를 미국에서 생산하고 이익을 내고 있다. 한국도 몇 가지를 시도했지만 어느 것도 잘되지 않았다. 혁신과 생산성, 해외 생산 등 아직 일본에서 배울 부분이 있다. 다음은 스위스와 이탈리아다. 스위스는 인구 800만 명의 작은 나라가 세계적 기업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거시 경제는 안 좋지만 작은 도시나 마을이 세계를 상대로 상품을 만들고 있다. 나라는 망해도 도시는 살아남는다는 식이다. 파르메산 치즈나 토스카나 와인 등 세계적 상품을 만드는 마을이 1500곳이나 있다. 작은 마을들이 세계화를 주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만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기업공개(IPO)를 가장 많이 한 나라가 대만이다. 미국 통계에는 ‘차이나(중국)’라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 대만이다. 대만의 ‘차이완(차이나와 타이완의 합성어)’ 전략이 제대로 먹혀든 것인데, 일본에서 부품이나 기계를 사다가 중국에서 생산해 미국 등지에 파는 모델이다. 한국은 이제 일본을 활용하지 않지만 대만은 다르다.” 그는 일본을 외면하는 한국이 못내 서운한 기색이었다. “주변국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배울 것을 배우고 이용할 수 있다. 내 고향이 쓰시마(對馬) 섬인데 한국이 일본에 대해 1000년의 한을 갖는다면 우리도 몽골이 내습할 때 고려군에 당했다고 한을 품어야 하나. 또 한국이 옛 고구려의 영토 확장을 자랑스러워하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역시 교육 대개혁이 가장 중요하다”며 화제를 바꿨다. “한국 교육은 암기 위주 주입식인데 40년 전 일본식 그대로다. 이래서는 21세기형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21세기는 개인의 재능이 중요한 시기다. 덴마크 모델이 참고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덴마크는 1994년경 21세기는 정답이 없는 시대라고 봤다. 답이 없으니 가르칠 게 없지 않겠나. 가르친다는 건 ‘답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덴마크는 앞으로의 세상에는 답 같은 건 없다, 답은 모두가 생각해서 찾아야 한다, 한 반 인원이 26명이면 26개의 답이 있어도 좋다, 무엇을 실행할지는 함께 논의해 결정하자는 식으로 교육을 바꿨다. 멋진 교육이다. 오늘날 현실에서 답이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규격화된 대량생산 시대에는 서양에 답이 있었고, 일본과 한국이 차례로 ‘따라잡고, 앞지르자’며 달려왔다.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이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슬 각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한국 대표기업인 삼성도 위기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같은 문제다. 삼성이 예외적인 업적을 쌓아 왔으나 자신이 처음 내놓은 물건이 아니라 스피드와 규모, 마케팅으로 승부해왔다. 스피드와 규모의 승부는 중국 기업들도 할 수 있으니 벽에 부딪치는 게 당연하다. 삼성이 지금까지 잘해온 건 이건희 회장의 ‘예외적인’ 통찰력 덕이다. 또 한 가지, 한국은 우수한 학생이 사무직이 되려 하는데 이건 문제다. 회사에서 기술자의 위치가 낮다.” 그의 말대로 일본에서는 ‘장인 정신’이 남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노벨과학상 수상자도 쏟아진다. 그 원동력이 궁금했다. “한국에서 배운 도자기 기술이 하나의 원천이 됐다. 우리는 그걸 배워 산업에 접목했다. 예컨대 그게 강력한 세라믹 산업을 일으켰다. 거꾸로 묻고 싶다. 한국에선 왜 그게 안 되나.” 뼈아픈 지적이었다. 기자가 머뭇거리자 그는 말을 이어갔다. 기를 완성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산업도 마찬가지다. 한국 재벌들은 시간이 없으니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며 ‘돈은 줄 테니 기술을 사오라’는 식으로 해왔다. 이는 미국적 경영 마인드인데 미국도 결국 제조업이 뿌리째 사라졌다. 강연차 방한해 중소기업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기업은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자기들이 가져간다고 한다. 그러니 제안을 해도 손해만 본다는 것이다. 일본은 좋은 제안을 하면 이익의 반을 준다는 게 예컨대 도요타자동차의 명확한 정책이다. 그러니 좋은 제안이 자꾸 나온다. 한국의 전문경영인들은 임기 동안 실적을 내고 급여가 높아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근시안적이다.” ―한국 경제에 재도약의 기회는 남았다고 보나. “역시 인재에 달렸다. 정답을 달달 외운 엘리트로는 안 된다. 현대 일본의 대표 경영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 소이치로 등은 아무도 대학을 안 나왔다. ‘아카데믹 스마트’가 아니라 ‘스트리트(street) 스마트’가 필요한 시대다. 아카데믹 스마트는 낡은 것만 배운다. 빛의 속도로 세상이 바뀌는데 미국 비즈니스스쿨에 가서 케이스 스터디 외워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다. 미국은 그래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독특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경쟁한다. 한국과는 다르다. 무턱대고 따라 배워선 득이 될 게 없다.” ―한국 수출입액의 약 4분의 1은 중국이 차지한다. 그만큼 중국 변수가 큰데 최근 기업들이 고전하고 있다. “샤오미가 스마트폰을 만드는 등 중국 기업들의 성장으로 한국은 시장을 잃어가는 상황이다. 일본 기업도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의외로 중국에서 잘나간다. 젖병, 기저귀, 이마에 붙이는 해열제 등 별난 게 잘 팔린다. 중국인이 자국 회사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착안해야 한다.” ‘신뢰’가 향후 중국 시장에서의 성패를 가름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다. 끝으로 그에게 새해 세계경제 전망을 물었다.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 “가장 큰 걱정은 미국의 일극(一極) 번영이다. 금리 인상으로 세계의 돈이 미국으로 몰려들지만, 다른 나라는 금리를 올릴 환경이 아니다. 미국만 번영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중동 불안정이 테러라는 형태로 세계로 수출되면서 미국의 고립주의가 심화될 것이다. 미국의 번영을 세계와 공유하자는 태도와는 반대되는 진영에서 다음 지도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도 그런 경향이 있다. 좋은 일이 아니다. 내년은 미국 일극 번영과 폐쇄주의, 이로 인한 경제의 블록화가 진행되는 해가 될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누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한국 경제에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도쿄=배극인 bae2150@donga.com·장원재 특파원 ※ 오토마 겐이치 총장은1943년 일본 후쿠오카 현 출생으로 일본 와세다대, 도쿄공업대 원자핵공학 석사를 거쳐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원자력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적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에 입사해 일본지사장, 아시아·태평양지역 회장을 지내며 글로벌 기업 및 역내 주요 국가와 도시의 자문역으로 활동해 왔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1994년 그를 피터 드러커, 톰 피터스 등과 함께 세계 5대 ‘경영 구루(사상가)’로 선정했다. ‘국경 없는 경제학과 지역국가론’의 제창자로 ‘국가의 종말’ ‘지식의 쇠퇴’ 등 지금까지 270권을 저술했다. 2010년 인터넷으로 경영학석사(MBA) 교육을 하는 비즈니스브레이크스루대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일본 총리가 4일 개막한 새해 정기국회에서 지난해 외교 성과를 보고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 해결을 강조해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날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나 정부의 책임 인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연단에 선 아베 총리는 지난해 11월 2일 한일 정상회담을 거론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미래 세대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양국 간 협의를 가속화하는 것에 합의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의 합의, 저와 박근혜 대통령의 전화 정상회담에 의해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 말이 끝나자 의원석에서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베 총리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멈춘 뒤 “이를 통해 한일 관계가 미래 지향적 신시대로 들어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베 총리가 공식적인 사죄 표명을 해줄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한국으로선 씁쓸한 장면이었다. 이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도 정례 브리핑에서 위안부 소녀상 이전에 대해 “지금까지 한일 협상, 그리고 공동발표에서의 발언에 입각해 적절히 이전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그 인식에 변화는 없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소녀상 이전을 둘러싼 갈등이 확산되는 가운데 일본의 희망만 담은 원칙론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는 위안부 자료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록에 대해서도 “이번 합의의 취지를 감안해 한국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 신청에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 정부가 “민간 주도로 추진하는 사안”이라며 협상 때 다루지 않았다고 밝힌 것과 차이가 있는 주장이어서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한일 양국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 이후 한미일 삼각 공조를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3국은 이달 중순 한미일 차관회의를 개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상반기에 한일 정상회담 및 한미일 정상회의도 추진되고 있다. 일본 NHK는 3일 “한미일 3국이 이달 중순 도쿄에서 외교차관회의를 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외교부도 “세부 사항을 조율 중이며 일정이 확정되면 발표할 것”이라고 확인했다. 회의에는 임성남 외교부 1차관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부장관, 사이키 아키타카(齋木昭隆) 외무성 사무차관이 참석할 예정이다. 외교차관회의에서 3국 대표들은 지난해 12월 한일 양국이 발표한 위안부 합의를 재확인하고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위협, 중국의 해양 진출 등 동아시아의 안보 현안에 대한 한미일 공조 강화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3국이 위안부 합의에 대해 공동 의사를 발표할지도 관심거리다. 또 일본 언론은 3월 31일과 4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제4차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회의를 여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외교부는 “검토되고 있지 않다”고 일단 부인했다. 일본 측은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발목을 잡던 위안부 문제가 최종 해결됐다는 점을 정상 차원에서 재확인하기 위해 정상회의 성사에 적극 나서는 모양새다. 정상회의, 차관회의 등에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도 일종의 ‘증인’ 역할을 해 달라는 주문으로 보인다. 한일 정상회담과 한중일 정상회의 등 다양한 형태의 접촉도 추진되고 있다.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이달 20일부터 스위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마이니치신문은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정상회담을 하게 될 것”이라는 자민당 간부의 말을 전했다. 교도통신은 한일 양국 간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이행 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국장급 협의가 이달 중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위안부 문제를 협의하는 국장급 협의가 열리면 2014년 이후 13번째가 된다. 일본은 또 올 5월 미에(三重) 현 이세시마(伊勢志摩)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전후로 한중일 3국 정상회의 개최를 추진하고 있다. 이때 박 대통령의 방일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3국에서 한일 정상이 만나 의견을 조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의 여야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일한의원연맹 소속 의원들도 5월 한중일 정상회의 전 한국을 방문해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방일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지만 한국 정부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조숭호 기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에는 긴박한 한반도 안보 환경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해 12월 31일 기사에서 지난해 5월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수중 발사에 성공하는 등 안보 위협이 현실화되자 미국이 한국에 ‘한일 안보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보냈다며 이같이 전했다. 이 메시지 이후 박 대통령은 지난해 상반기에 위안부 협의를 진전시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신문은 한국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박 대통령이 지난해 6월 11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일본과의 위안부 협상에) 상당한 진전이 있으며 협상의 마지막 단계(final stage)에 있다”고 말했을 때는 이미 협상을 타결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고 지적했다. 당시 박 대통령의 ‘마지막 단계’ 언급에 대해 한일 양국 정부는 “협의가 진행 중”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했었다. 요미우리는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위협 같은 안보 문제와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협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지난해 12월 29일 자 동아일보 사설을 거론하며 합의 직후 언론의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한편 아사히신문은 2014년 4월부터 시작된 국장급 협의가 진전이 없자 지난해 초부터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의 협상 채널이 가동됐다고 보도했다. 별도 채널이 가동된 원인 중 하나로 “대일 강경론자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통해서는 박 대통령에게 일본의 의향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이 채널은 한국 헌법재판소가 한일 청구권 관련 헌법소원을 각하한 지난해 12월 23일 심야까지 가동됐고, 이 자리에서 합의 사항의 대부분이 결정됐다”고 전했다. 합의 사항은 다음 날 야치 국장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 보고했으며, 곧이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의 방한이 결정됐다는 것이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한 남성이 서류묶음이 1미터 정도 쌓인 쇼핑카트를 무겁게 끌면서 법정에 나타나 검사의 책상 위에 툭, 툭 소리를 내며 놓았다.…변호사가 귓가에 속삭였다. ‘저건 허세에요. 검찰이 이렇게 조사했으니 각오하라는 퍼포먼스입니다.’…개정 후 허세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기소 사실이 기재된 문서를 들고 있는 고○○ 검사의 손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최근 무죄 판결을 받은 가토 다쓰야(加藤達也)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31일 산케이신문 1면에 쓴 수기의 일부다. 이날 산케이신문은 ‘이상한 법정, 떨리는 검찰의 손’이라는 제목으로 가토 전 지국장의 수기를 게재했다. 가토 전 지국장은 2014년 11월 2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던 첫 공판의 풍경을 묘사했다. “고발한 (한국) 남성들이 소리를 지르고, (좌석이 꽉 차) 40명이 서서 지켜봐야 했을 정도로 이상한 법정 분위기에 압도된 것일까. 박 대통령의 안색을 본 법무부, 검찰 간부가 힘든 사건을 공판까지 책임지라라고 해서일까. 두려운 것은 전부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고 검사에 대해 “새끼손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8개의 손가락으로 리드미컬하게 조서를 작성하는 모습에서 프라이드가 높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느꼈다”며 “하지만 첫 공판에서 본 것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고 검사의 떨리는 손은 이후 검찰의 곤경을 상징하는 것으로 기억됐다”고 썼다. 가토 전 지국장은 2014년 8월 7일 출국 금지와 10월 8일 기소 사실 등을 직접 통보하지 않고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한 것을 ‘검찰의 흔들기’로 규정했다. 그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여 사죄를 이끌어내고, 기사를 취소하게 해 산케이신문의 신용을 실추시키는 시나리오가 있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그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민사상 형사상 법적 책임을 철저히 추궁하겠다’는 발언으로 나를 위축시키고 검찰에 소환하고 조사해 으름장을 놓으며 사죄 의사를 확인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며 “조기 사죄를 끌어내는 것이 어렵다고 본 한국 측은 (2014년) 9월 말부터는 ‘유감’이라는 말을 끌어내는 전술로 돌아섰다”고 썼다. 국제사회에서 이번 사태를 ‘정권을 비판한 외국 특파원에 대한 탄압’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측이 하루빨리 상황을 전환해야 했다는 것이다. 가토 전 지국장에 따르면 이후 자신과 산케이신문 경영진에게 “빨리 사과해 버리면 어떤가”, “유감이라는 말도 표명 못 하는가”라는 제언과 조언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는 그 사례로 △청와대와 관계가 있는 한일관계 전문 학자가 휴일 아침 전화해 “한일관계 악화가 걱정된다. 유감 정도 표명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청와대도 치켜들었던 주먹을 내려놓을 타이밍을 찾고 있다”고 언급한 것과 △신문사를 퇴직한 선배가 20년 만에 연락을 해 “회사를 사직하고 유감을 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그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물었지만 결국 사죄, 유감 표명을 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고 생각한다”며 “중도에 타협하지 않은 않았기 때문에 무죄가 되었다고 확신한다”고도 썼다. 또 “용의자, 피고인에서 무죄가 되기까지 500일 동안 박근혜 정권과 한국 검찰을 지켜봤다. 거기에는 스스로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한국의 모습이 있었다”고 비판했다. 가토 전 지국장의 이 같은 일방적인 주장에 대해 한국 검찰 측은 ‘대응할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분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철도 강국 일본의 고속열차 신칸센이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된다. 교도통신은 30일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와 휴스턴을 연결하는 길이 400km의 고속철 노선이 신칸센 방식을 채택한다고 보도했다. 고속철 사업을 추진하는 텍사스 센트럴 파트너스(TCP) 관계자는 “신칸센 기술을 사용할 것을 100% 약속하며 2021년에 영업을 시작하고 싶다”고 밝혔다. 텍사스 고속철이 완공되면 자동차로 3시간 넘게 걸리던 구간을 1시간 반 만에 갈 수 있다. TCP는 100억∼120억 달러(약 11조7000억∼14조 원)에 이르는 공사비를 조달하고 있으며 일부는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에서 융자를 받기로 했다. 사업이 예상대로 이뤄지면 신칸센은 이달에만 인도에 이어 두 번째 수출에 성공하는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이달 중순 인도를 찾아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뭄바이∼아마다바드 구간 505km에 대한 신칸센 수출을 확정했다. 공사비 150억 달러(약 17조6000억 원) 중 80%가량을 차관으로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신칸센은 일본 정부가 주력하는 인프라 수출의 핵심이다. 일본은 1964년 세계 최초로 고속철을 도입한 이후 반세기 넘게 노하우를 축적해 왔다. 신칸센은 안정성과 정확성 측면에서 다른 나라의 고속철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과 중국은 해외 고속철 수주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 왔다. 일본은 9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을 잇는 150km 구간의 고속철 사업에서 중국에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일본으로 기울던 사업권이 막판에 정부 보증이 없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중국으로 넘어갔다. 당시 중국이 제시한 건설 단가는 일본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이에 일본 정부 대변인이 “이해하기 어렵고 매우 유감스럽다”며 항의하기도 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9월 미국 방문을 계기로 중국과 미국이 합작해 로스앤젤레스∼라스베이거스 구간(370km)에 고속철을 건설하기로 했다. 중국은 이 밖에도 태국, 말레이시아 등에 고속철 수출을 추진하고 있다. 아베 총리도 “20여 개 나라에 고속철 계획이 있는 만큼 신칸센 기술을 널리 수출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중국과 일본의 고속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위안부 피해자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이 한일 관계에서 또 다른 뇌관이 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지통신은 29일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한국이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중국과의) 공동 신청을 보류할 것임을 확인했다”며 “다만 한국 측의 의향(요청)으로 공동발표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사실 무근”이라고 즉각 부인한 뒤 “세계기록유산 등재 문제를 일본이 지속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올리고 싶어 했으나 우리는 민간 주도로 추진하는 사안임을 줄곧 밝혀 왔다”고 설명했다. 민간이라고 하지만 한국이 참여한다면 일본은 합의 위반이라고 주장할 태세이고, 한국 정부는 이에 물러서면 한일 합의를 잘못했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올해 난징대학살 문건 등재 후 일본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던 유네스코는 각국 유네스코 위원회의 추천을 거쳐야 사실상 등재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바꿀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관 합동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5월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정부 백서로 만들고, 이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겠다는 계획을 광복 70년 기념사업으로 선정했다. 사업 소관 부처는 여성가족부이고, 국무총리실에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여가부는 올해 등재 추진 사업 예산으로 4억4000만 원을 배정했다. 여가부는 “민간사업을 정부가 외곽에서 지원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민간사업으로만 보기 어려운 요소가 없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선 합의, 후 설득’ 방식으로 봉합한 한일 외교부 장관의 위안부 문제 합의가 29일 여론의 시험대에 올랐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사전 설명 없이 일본과 합의한 정부를 성토했고, 일본은 국내용 언론 플레이에 나섰다. 외교부 임성남 1차관, 조태열 2차관은 이날 위안부 피해자 생활시설을 찾아 전날 합의한 내용과 후속 조치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용수 할머니(87)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쉼터(서울 마포구)를 찾아온 임 차관에게 “왜 우리를 두 번 죽이려고 하느냐”라고 항의했다. 김복동 할머니(89)도 “협상 전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정부끼리 뚝딱뚝딱 해 놓고 타결됐다고 하면 되느냐”라며 몰아세웠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가 거론된 것에 대해 김 할머니는 “국민이 모금해 세운 소녀상이다. 한국, 일본 정부가 치워라 마라 할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이 적절한 시점에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직접 양해를 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사죄 편지나 벳쇼 고로(別所浩郞) 주한 일본대사의 피해자 방문 등 일본의 후속 조치는 나오지 않고 있다. 반면 일본 언론에선 외교장관 발표에도 없는 ‘한국,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유산 등재 보류 합의’라는 보도가 나오는 등 여론전이 시작됐다. 극우파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전 오사카 시장은 트위터에 “군(軍)의 관여를 사죄한다면, 세계 각국도 사죄해야 한다”고 물타기를 하고 산케이신문은 “고노 담화가 파탄 나 ‘군의 관여’로 표현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우익단체는 총리 관저, 외무성, 언론사 앞에서 “모욕적 합의를 번복하라”는 시위를 시작했고 ‘매국노’ ‘할복하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청와대 고위 당국자는 “어제(28일) 합의로 끝난 게 아니다. 일본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이행하느냐에 따라 최종적 해결의 판단 여부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추가 행동을 이끌어 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일본 정부 인사와 언론들이 위안부 문제 합의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내놓으며 물타기를 하고 있다. 교도통신은 29일 “양보는 했지만,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확실하다”는 일본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보도했다. 이어 “일본 정부가 이 같은 내용에 대한 설명에 착수할 방침을 굳혔다”고 전했다. 교도통신은 또 이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을 만난 자리에서 “소녀상 철거를 위한 절차와 시기를 둘러싼 조정에 들어갈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에 대해 ‘적절히 해결하도록 노력한다’고 했던 한국 정부를 압박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위안부 합의 당일인 28일 도쿄(東京)의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한 것을 두고도 아베 총리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앞으로 일본 우익 정치인과 언론의 물타기 발언과 보도가 이어지더라도 ‘최종 해결’ 및 ‘비난 및 비방 자제’를 약속한 한국 정부가 대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일본군 위안부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막후 역할론’이 주목받고 있다. 한일 관계 악화에 조바심을 내 오던 미국 정부는 협상 타결을 크게 환영하며 “그동안 협상 과정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고 28일(현지 시간) 밝혔다. 미국이 다른 나라들 간의 외교 협상에서 막후 역할을 했다고 인정한 것은 이례적이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미국이 위안부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여 왔는지 보여 준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위안부 최종 협상은 한일 양국 정상이 주도한 것이지만, 동시에 미국은 그동안 적절하고 건설적인(appropriate and constructive)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미 정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권유와 충고를 해 줬으며 협상 타결이 미국은 물론이고 양국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도 설명했다”며 “이 과정에서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미리 막거나,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기 위해 은밀히 노력했다(work quietly)”고 밝혔다. 워싱턴의 한 외교관은 “미국이 막후 중재자 역할을 공개한 것은 한미일 동맹을 다시 결속시키면서 양측에 재발 방지를 경고하는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미국은 ‘미국 역할론’을 띄우며 환영 논평을 잇달아 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이날 논평을 통해 “우리는 용기와 비전을 갖고 합의를 도출해 낸 한일 양국 정상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며 “양국은 합의를 이행함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미국은 (합의의) 전면적인 이행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미 정부 관계자는 “미국 입장에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도쿄=장원재 peacechaos@donga.com /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일본 언론은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했다. NHK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생중계했으며 이후에도 특집 방송을 통해 발표 내용을 분석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 이전과 관련해선 “한국 정부가 얼마나 시민단체를 설득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신문과 통신의 인터넷 기사에는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최악의 합의’ ‘있을 수 없는 패배’ 등 격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일본 자민당과 민주당 등 여야 정치권은 일제히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은 이날 일본 기자들을 상대로 한 별도의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문제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록 움직임과 관련해 “이번 합의의 취지에 따라 한국이 신청에 참가하지 않을 것으로 인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 내 주요 인사들과 전문가들은 한일 최대 현안이었던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것을 높게 평가했다. 무라야마담화의 주인공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는 “일본 정부가 당시의 책임과 군의 관여를 인정한 것이 한국이 합의를 받아들인 최대 요인”이라며 “앞으로 한일 관계가 전향적으로 나아가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일부의 불만은 있겠지만 양국 지도자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라며 “점수를 준다면 70점 정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을 주도했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도의적 책임’을 ‘책임’이라고 한 것은 진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일본의 사과를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나와 있지 않다”며 “재단의 지원이 인도적 지원이 아니라 사죄의 대가라는 점을 명확하게 해야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는 이날 도쿄(東京)의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했다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야스쿠니는 태평양전쟁 전범들이 합사된 곳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이에 대해 “아베 총리의 지지층인 보수파를 배려한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고 전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은 입사 10년 차인 일본 기자에게 다가온 행운의 특종이었다.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1991년 8월 11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오사카(大阪)판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는 ‘한국 내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기자’가 됐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기나긴 악몽의 시작이라는 것을. 》우에무라 전 기자는 보도 후 일본 우익으로부터 ‘일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끊임없는 협박과 공격에 시달렸다. 지난해 초 신문사를 떠나 고베(神戶)의 한 여대 교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익들은 250통 이상의 전화와 e메일을 대학에 보냈다. 교수 임용은 결국 취소됐다. 불길은 그가 2012년부터 비상근 강사로 재직하던 삿포로(札幌)의 호쿠세이가쿠엔대에도 옮겨 붙었다. 지난해는 여론의 힘으로 1년간 계약이 연장됐지만 대학 측은 올해 ‘재계약이 어려울 수 있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그는 마침내 한국 가톨릭대 초빙교수 자리를 받아들였다. 가족들까지도 살해 협박에 시달리면서 2년 동안 고난의 시간을 보냈던 우에무라 전 기자. 16일 동아일보 도쿄(東京)지사에서 그를 만났다. ―1991년 위안부 증언을 처음 보도한 경위를 설명해 달라. “1990년부터 피해자 증언을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취재했다. 한국에 2주 동안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이듬해 서울지국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증언을 시작했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한국에 갔다. 윤정옥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공동대표를 만나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건네받았다. 당시 본인은 기자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 직접 인터뷰는 못했다. 그래도 최초 증언인 만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기사를 썼다. 보도 3일 후 김 할머니가 직접 기자회견을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 현안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김 할머니는 1991년 12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하지만 이듬해 방위청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설치 및 운영에 관여한 자료가 발견되는 등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잇달아 나왔다. 결국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은 ‘강제성’과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다른 일본 언론도 크게 보도했는데 왜 당신만 타깃이 됐나. “아사히신문 기자이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은 위안부 등 식민지 치하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히 보도해 왔다. 이를 두고 ‘일본의 체면을 깎는다’며 거부감을 가진 우익들이 있다. 두 번째는 내가 기명 기사로 위안부 피해자의 첫 증언을 보도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장모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후(戰後) 보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냈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이다. 그러다 보니 ‘장모를 위해 일본 국익을 해치는 기사를 썼다’는 식의 말이 나돌았다. 결혼(1991년 2월) 전부터 위안부 문제를 취재해 왔는데도 말이다.” ―기사에서 주로 강제노동을 당했던 정신대와 성적 학대에 시달린 위안부를 혼동했다는 비판이 있다. “기사에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쓴 건 맞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도 그랬고, 일본에서도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본군이 위안부 피해자를 강제연행한 것처럼 보이도록 기사를 썼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다. ‘속아서 갔다’고 썼을 뿐이다. 오히려 (나를 공격하는) 산케이신문이 두 번이나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을 썼다. 문제의 본질은 강제연행 여부가 아니라 위안부가 된 후 끔찍한 인권 침해를 당했다는 것이다.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해 나를 공격하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 한국에서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불렀던 것은 정신대로 공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며 속여 위안소로 끌고 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사히신문이 자체적으로 만든 ‘위안부 보도 제3자위원회’는 지난해 말 보고서를 통해 ‘우에무라 전 기자가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거나, 장모를 위해 기사를 쓴 적이 없다는’ 취지의 결론을 내렸다. ―우익들의 협박은 언제 시작됐나. “1992년 4월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도쿄기독교대 교수가 시사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 ‘중대한 사실 오인’이라는 표현을 쓰며 내 기사를 비판했다. 이후 아사히신문 홍보부에 항의 전화가 걸려오는 등 공격이 이어졌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2월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에서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여대 교수로’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임용 예정이던 대학에 공격이 시작됐다. 대학은 신문과 달리 여론에 약하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일본 우익들은 그의 가족도 공격했다. 2월 대학에 배달된 편지에는 그의 고등학생 딸의 실명과 ‘반드시 죽인다. 몇 년이 걸려도 죽인다. 어디로 도망쳐도 죽인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인터넷에는 집 전화번호가 공개됐고 딸의 사진과 함께 ‘자살할 때까지 몰아붙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글이 게재됐다. ―협박은 어느 정도였나. “지난해 계약 연장 여부가 문제가 되자 대학에 협박 e메일과 전화가 쇄도했다. 집에도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딸의 실명과 사진이 노출되고 협박장이 도착한 뒤부터 딸의 등하교 때 경찰 경호가 시작됐다. 경찰차가 바로 뒤에 따라가니 딸이 눈치를 채고 부담스러워해 ‘조금 거리를 둬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전 딸이 여자 변호사와 대화할 때 눈물을 펑펑 쏟더라. 딸까지 공격을 받으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직도 순찰차가 가끔 집 근처를 돌고 있다.” ―얼굴이 많이 알려졌는데 불안하지 않나. “6월 신고베 역에서 신칸센 표를 사고 있었다. 한 남성이 다가와 ‘우에무라 다카시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갑자기 ‘매국노’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매국노가 아니다’라고 답하자 가 버렸다. 길거리에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처음이라 놀랐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날조 기자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신문기자에게 있어서 날조 기자라는 별명은 사형선고와 같다. 나는 날조 기자도 아니고 허위 사실도 쓴 적이 없다. 요즘 아내는 ‘무료로 유명해지니 좋은 거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지원 단체들의 도움도 받고 있어 진실이 점차 알려지고 있다. 대학에 오는 e메일이나 전화도 처음에는 항의 성격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응원 내용이 더 많아졌다.” 지난해 그의 거취는 일본 사회에서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도 대서특필했다. 호쿠세이가쿠엔대가 재계약 연장에 난색을 표한 이후 때마침 한국 가톨릭대의 초빙교수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 대목에서 “호쿠세인가쿠엔대가 협박에 무릎을 꿇었다고 보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우익들의 협박이 일단락된 상황에서 스스로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는 얘기였다. ―가톨릭대에 가는 경위를 설명해 달라. “호쿠세이가쿠엔대와 가톨릭대 사이에 학생 교환프로그램이 있다. 내가 가르치던 과목 ‘국제교류특별강의’도 원래 가톨릭대에서 온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절반가량이 가톨릭대 학생이다. 4년 동안 학생을 가르쳐 왔고 그중 일부가 한국에 돌아가 내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그런 영향인지 몰라도 10월 말 ‘한국에서 가르쳐 보지 않겠느냐’는 가톨릭대의 제의를 받았다. 우익들의 협박도 줄었고, 비상근강사에서 초빙교수가 되는 것이니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꼭 언급하고 싶은 제자가 있다고 했다. 9월 18일 자 동아일보 오피니언면에 ‘우에무라 교수를 지켜야 한다’는 글을 썼던 강명석 씨(가톨릭대 일어일문학과 4학년)였다. 우에무라 교수의 수업을 들었던 강 씨는 지난해 12월 유학생 스피치 대회에서 ‘의견이 다르다고 대학을 위협하고 교수와 학생을 공격하는 것은 유감’이라며 그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 측에서 ‘위험할 수 있으니 내용을 고치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강 씨는 한국에 돌아온 뒤 가톨릭대에서 그를 지지하는 학생 917명의 서명을 받아 일본에 전달했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그런 용기 있는 학생을 제자로 둘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 2월에 ‘우에무라 때리기’ 경험을 쓴 책이 출간된다. 날조라는 딱지를 붙인 니시오카 교수 및 슈칸분슌 등과 진행 중인 재판도 계속된다. 170명의 변호사가 자발적으로 대리인을 맡았다. 아내와 함께 서울에 온 뒤에도 재판이 진행되는 도쿄와 삿포로를 오가는 생활을 해야 할 것 같아 저비용 항공을 알아보고 있다. 가톨릭대에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형식으로 한일 교류 역사를 가르칠 생각이다.” ―1991년 위안부 기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 기사의 무거움을 다시 느끼고 있다. 사실 1991년 이후에는 위안부 관련 기사를 거의 쓰지 않았다. ‘장모를 위해서 기사를 쓴다’는 우익들의 공격을 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서울특파원 임기(1996년 12월∼1999년 8월) 중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지만 간단한 소식만 전했을 뿐 묘소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올 8월 마음을 고쳐먹고 한국에 다녀왔다. 나는 역사의 큰 전환점에 서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위안부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겠다고 각오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학순 할머니 묘소에도 다녀오고 나눔의 집도 갔다 왔다. 앞으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 한일 간 역사 화해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을 것이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은 25일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협의 관련 내용에 대해 질문을 받고 “상대가 있는 것이며 협의를 하는 중이기 때문에 (구체적) 내용은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발언 전후에 벌어진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이날 아침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일본 정부가 1억 엔(약 9억7000만 원) 규모의 새 기금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전했다. 다음 날 요미우리신문은 “한국 측에서 20억 엔(약 194억 원)의 기금 창설을 요청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산케이신문은 “한국 측에 기금 공동 출자를 요청하는 안이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협상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민감한 내용이 일본 정부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일본 언론을 통해 잇따라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일본 정부의 ‘언론 플레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일본이 언론 플레이를 한다면 목적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연내 타결을 요청한 것에 대해 일본이 성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미국과 국제사회에 어필하려는 의도다. 이번에 타결이 안 돼도 ‘우리는 할 만큼 했다’는 계산이다. 두 번째는 이번이 ‘최종 해결’이라는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위안부 문제에 종지부를 찍도록 한국을 압박하겠다는 속셈일 것이다. 일본 언론이 분위기를 한껏 띄운 탓에 이제 공은 한국 정부로 넘어갔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를 설득하는 것이 ‘최대의 난관(요미우리신문)’이라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은 이번에 위안부 문제가 ‘최종 해결’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합의문에 ‘최종적이고 되돌릴 수 없다’는 내용을 명기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또 미국 입회하에 한일 양측이 합의문에 서명하는 방안, 양측이 합의하면 미국이 환영 성명을 내는 방안까지도 거론되는 상황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교도통신은 협상이 타결될 경우 내년 3월 미국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 때 한일 정상회담을 열고 최종 해결을 확인할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까지 끌어들이며 ‘최종 해결’에 집착하는 이유는 8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발표한 ‘전후 70주년 담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베 총리는 당시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는 우리 아이들과 손자,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후 1세대인 자신이 사죄의 사슬을 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 해결이라는 것이 위안부 문제에 추악한 대못질을 해 역사 속에 묻겠다는 의도라면 협상은 깨질 수밖에 없다. 이번 협상은 위안부 문제를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는 첫 단추가 돼야 한다. 합의 후에는 1993년 일본 정부가 고노담화에서 한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 아베 총리도 고노담화를 계승하겠다고 밝혔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생존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 46명이 두 눈을 부릅뜨고 협상을 지켜보고 있다. 이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이들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어떤 협상도 국민적인 공감을 얻기 어렵다. 당장 휴일 아베 총리의 행보를 보면 실망스럽다. 그는 위안부 문제 국장급 협의가 진행된 27일 골프장에서 재계 인사들과 골프를 쳤다. 기자들에게는 “(외교장관 회담 전) 영기(英氣·뛰어난 기상과 재기)를 키우고 있다”며 거슬리는 발언도 했다. 전날은 관저에 나가지 않고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외식을 즐겼다. 아베 총리의 모습을 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어떤 생각일까.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아베 총리가 최종 해결을 보장받고 싶다면 ‘영기’보다 ‘마음의 힘’을 먼저 길러야 할 것이다. 언론 플레이와 기발한 묘수를 동원해 위안부 문제를 역사 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최종 담판이 벌어진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은 28일 오후 2시부터 정부서울청사에서 1시간 동안 회담한 뒤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결과를 발표한다. 일본은 ‘이번이 위안부 관련 최종 합의이며 재론 금지’에 쐐기를 박으려는 반면 한국은 △일본의 ‘정부 책임’ 인정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치유 조치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고위 당국자는 27일 양국 협상과 관련해 “피해자들에게 보낼 사죄 편지에 고노 담화에 나왔던 ‘군(軍)의 관여 인정’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을 담겠다고 밝힐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는 숨어있는 ‘뜨거운 감자’다. 일본 측은 이 문제까지 포함하려 했지만 ‘한일 협상이 타결되면 해결될 사안’이라는 한국의 원칙에 따라 회담에서 거론하더라도 기자회견에는 다루지 않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 장관은 이날 기자들에게 “한일 정상회담(11월 2일)을 계기로 협의가 가속화되는 시점에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일은 ‘창의적 해법을 찾자’는 공감대는 있다고 알려졌다. 정부 고위 당국자도 “한일 협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결단이 필요하다. 피해자와 시민단체, 국회를 설득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외교회담에서 합의 내용의 얼개를 공개한 뒤 여론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한일 정상회담에서 최종 타결을 선언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교도통신은 한일 외교장관이 합의하면 내년 3월 미국 핵안보정상회의 때 한일 또는 한미일 정상회담을 열어 “최종 해결 확인문서를 발표하는 방안이 부상하고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 도쿄=장원재·배극인 특파원}

일본 언론들은 한일 외교장관 회담 성사를 위해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의 ‘이병기-야치’ 라인이 물밑에서 움직였다고 관측했다. 지난달 초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조기 타결을 위해 협의를 가속화한다’고 합의하고도 돌파구를 못 찾자 야치 국장이 이달 22, 23일 한국으로 건너와 이 실장을 만났고 외교장관 회담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이 실장은 박근혜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비서실장이고, 야치 국장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교 브레인’으로 불린다. 양국 정상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측근 인사들이다. 이 실장은 주일 대사 시절(2013년 4월∼2014년 6월)부터 야치 국장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실장이 국가정보원장을 지내던 지난해 1월에는 국가안전보장국을 새로 만드는 야치 국장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병기-야치 라인은 이후 한일관계가 고비를 겪을 때마다 수면 위아래를 오가며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했다. 야치 국장은 지난해 10월 공식 방한해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이 실장을 만났으며, 올 6월에는 비공식적으로 한국에 와 이 실장과 위안부 문제 및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했다고 한다. 특히 6월 22일 서울과 도쿄에서 진행된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 양국 정상이 참석한 것에도 두 사람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일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단독 정상회담에 배석하며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그런데 정상회담 이후 두 차례 열린 국장급 협의에서 위안부 관련 논의가 평행선을 그리자 이병기-야치 라인이 재가동됐다. 요미우리신문은 “12월 들어 이병기-야치 협의가 수면 아래서 빈번하게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외교 고위관계자는 “국장급 협의뿐 아니라 중층적으로 협의를 이어 왔다”며 비선이 가동됐음을 시인했다. 공감대가 형성되자 야치 국장이 방한해 외교장관 회담을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야치 국장은 중일 정상회담 등 굵직한 이슈가 있을 때 현지를 찾아 사전 조율을 하고 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