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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충남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환두대도(環頭大刀·둥근고리자루큰칼). 자루 끝에 달린 용머리를 가운데 두고 쌍룡(雙龍)이 장식된 둥근 고리가 감싸고 있다. 서로의 꼬리를 물려고 휘감아 도는 쌍룡은 미세한 비늘까지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 손잡이는 금실과 은실을 번갈아 감은 뒤 끝부분에 금판을 붙여 화려함을 더했다. 당시 학계 일각에서는 이 칼이 너무도 정교해 중국 양나라에서 제작된 뒤 백제에 하사된 것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특히 동아시아 환두대도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일본 학계는 백제나 가야의 환두대도가 중국에서 전래돼 별다른 변용 없이 일본 열도에 고스란히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는 단순한 전달 통로에 불과했다는 논리다. 백제, 가야 환두대도의 도상들을 정밀 분석해 일본 학계의 ‘한반도 폄훼론’을 극복한 연구 성과가 최근 발표됐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신간 ‘삼국시대 장식대도 문화 연구’(서경문화사)에서 6세기 초반 조성된 무령왕릉보다 100년이나 앞선 시점에 환두대도에 적용된 고도의 금속공예 기술이 백제에 존재했음을 밝혔다. 5세기 초반 조성된 충남 공주시 수촌리 1호분에서 나온 환두대도를 분석한 결과 균일한 두께의 아말감 도금과 정밀 주조 기법 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백제는 이미 5세기 초반 고유한 양식의 최고급 금공품을 제작하고 있었다”며 “백제는 외교관계를 통해 가야와 일본 열도로 환두대도 완제품과 기술자들을 전달해 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중원 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꼽히는 환두대도의 용무늬 등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이와 관련해 이 교수는 최근 경기 화성시 기안동 제철유적에서 발견된 낙랑계 토기와 기와를 주목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313년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직후 낙랑 제철장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교수는 “백제 환두대도 주룡문의 계보를 서진(西晉) 금공품에서 찾을 수도 있다”며 “이런 맥락에서 낙랑의 환두대도 장인들이 백제로 이주해 기술을 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케네디는 공작정치의 달인이고 닉슨은 시대의 희생자였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아마 고개를 갸웃거릴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얘기한 것 아닌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이자 역사 저술의 대가로 손꼽히는 폴 존슨은 색다른 시각으로 케네디와 닉슨 시대를 재평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닉슨이 일삼았다고 여겨지는 도청 등 정치공작은 이미 전임자인 케네디를 비롯해 루스벨트, 존슨 대통령 시대에 폭넓게 활용된 수법이었다. 케네디의 동생이자 법무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는 FBI를 시켜 정부 정책에 반대한 US스틸 경영진의 자택을 급습하도록 했다. 국세청을 동원한 협박도 병행했고 특히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전화 도청 횟수는 기록적으로 증가했다. 그렇다면 왜 닉슨만 호되게 당한 걸까. 저자는 권력화된 당시 미국 언론이 닉슨에게 유독 적대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루스벨트나 케네디의 숱한 여성 편력과 외도, 비리를 알고도 집권 내내 침묵한 미국 언론들이 닉슨 타도에는 총력을 기울였다는 거다. 그 이유는 다분히 음험하고 정략적이다. 저자는 “워싱턴포스트는 닉슨이 자사 계열 방송국의 인가 신청을 고의로 반대한다고 믿었다”고 썼다. 워싱턴포스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1면에 79회나 게재할 정도로 닉슨 죽이기에 앞장섰다. 저자는 닉슨이 도리어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국가 이익을 지키는 등 훌륭한 성과를 거뒀다고 강조한다.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의 이스라엘 침공 때 빠르고 정확한 판단으로 수세에 몰린 이스라엘을 구해낸 것은 닉슨의 공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만약 닉슨이 더 빨리 사임했다면 이스라엘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조계종 군종특별교구는 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최근 군종교구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서해 최북단 도서지역인 백령도와 연평도의 해병대를 방문해 위문품 ‘자비의 선물’을 전달했다. 앞서 군종교구는 매년 자비의 선물 3만여 개를 90개 부대에 공급하고 있다. 올해는 예년보다 더 많은 3만5000개를 준비했다. 자비의 선물에는 합장주와 책, 과자, 음료수 등이 담겨 있다. 지난달 29일 백령도와 연평도의 해병대에서 열린 자비의 선물 전달식에는 군종교구장 정우 스님과 불자 장성 부인 모임인 성보회 회원 등이 참석했다. 군용헬기로 백령도에 도착한 방문단은 중대 관측소에서 근무 중인 장병들을 위문했다. 정우 스님은 “최근 남북 대치 상황에서 최북단 도서지역 장병들의 사기 진작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김태성 해병대 백령도 흑룡부대장은 “스님이 주신 자비의 선물이 연일 긴장 상태인 장병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고 화답했다. 이날 스님 일행은 백령도에 신축 중인 호국흑룡사를 방문하고, 천안함 폭침으로 희생당한 장병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군종교구는 ‘군 장병 핫팩(손난로) 보내기’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2014년 최전방 철책선 경계부대와 혹한기 훈련 부대 등 136개 부대에 총 49만 개의 핫팩을 보냈다. 지난해에도 77개 부대에 25만 개의 핫팩을 전달했다. 군은 “철책선과 해안선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서는 장병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장병들의 정서적 안정을 돕기 위한 ‘사랑의 독서카페’ 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주로 오지에 있는 철책선 경계부대 장병들에게 독서 공간을 마련해 주는 사업이다. 약 27m² 넓이의 면적에 탁자와 의자, 벽걸이 에어컨 등을 설치해 준다. 21사단을 비롯한 중동부전선 7개 부대와 해병2사단 등 서부전선 4개 부대에 독서카페를 마련했다. 입대하면 가장 생각이 나는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짜장면 아닐까. 군종교구는 짜장면을 부대 장병들이 함께 나누며 사기를 북돋우는 ‘짜장면 공양’을 실천하고 있다. 외부 음식을 사먹기 힘든 신병교육대 훈련병과 초임 부사관, 장교 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짜장면과 함께 계절별 과일이나 음료수를 후식으로 제공한다. 2013년 말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총 16개 부대, 2만여 명의 장병들과 짜장면을 나눴다. 1회 평균 1000여 명의 장병들이 ‘짜장면 파티’를 한 셈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올 초 판문점을 방문할 때부터 우아한 고려 사찰이 마치 꿈을 꾸듯 그려지더군요.” 3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옆 원광사에서 만난 정우 스님(64·조계종 군종특별교구장·사진)은 충남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 사진을 가리키며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처마부터 기둥까지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일일이 확대하면서 설명했다. 정우 스님은 경기 파주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안에 법당 ‘무량수전’을 짓는 불사를 하고 있다. 그는 “수덕사 대웅전처럼 고려 사찰은 우아하지만 결코 뽐내듯 화려하지 않다”며 “겸손한 미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했다. 스님이 이곳에 법당을 짓기로 한 것은 JSA가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한 해 16만 명의 국내외 방문객이 JSA를 찾고 있는데, 현재의 법당은 미군이 사용하던 막사를 개조한 것이다. 스님은 “새로 법당을 지은 뒤 JSA의 의미를 담아 6·25전쟁 때 16개국에서 참전한 4만 명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패를 모시려고 한다”고 말했다. 위패에는 각국 언어로 인적사항 등을 기재할 예정이다. 하필 고려시대 양식의 법당을 짓는 이유가 궁금했다. 스님은 “고려 개국 초기에 통일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망국의 한을 달래려고 파주에 암자를 지은 일화가 전한다”는 역사적 연원을 들려줬다. 경순왕의 부인이던 낙랑공주가 파주 도라산에 영수암을 지었다는 설화다. 앞서 스님은 올 3월 JSA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김현집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무량수전 기공식을 열었다. 이 법당은 올 10월 완공된다. 1월 스님이 JSA를 처음 방문한 이후 1년도 채 안 돼 건립허가와 완공까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 JSA 안에 새로 들어설 무량수전은 법당 82.32m², 종각 9m² 규모로 조성되며 총 9억 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화제를 돌려 스님이 군 포교에 나선 인연을 물었다. 스님은 까마득한 43년 전 26사단 입대 당시를 떠올렸다. “보병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부대에 법당이 없었어요. 종교 활동 시간에 어쩔 수 없이 기독교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승려라는 사실을 소대장과 중대장이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분들도 불자이셨던 것 같은데 저에게 설법을 맡기더군요.” 이런 인연으로 스님은 연대와 사단에 각각 호국황룡사와 호국일월사를 세웠고 군승(軍僧)으로 활약하게 됐다. 스님은 경남 양산 통도사의 서울포교당인 구룡사를 통해 도심 포교의 모범을 보여왔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는 통도사 주지를 거쳐 2013년 7월 군종특별교구장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 후 40년 만에 자신이 26사단에 세운 법당을 찾았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부처님의 법을 갈구하던 그때의 절실함이 떠올랐습니다. 군종병과 장병을 대할 때마다 당시의 체험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틈날 때마다 최전방 일반전초(GOP)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는 스님의 눈에 비친 요즘 신세대 장병들의 군 생활은 어떠할까. “동기끼리 내무반을 쓰고 많은 부분에서 발전했지만 집만 하겠습니까. 스마트폰을 분신처럼 여기는 요즘 젊은이들이 입대해서 한동안 이걸 쓰지 못하게 하니까 정서적으로 꽤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불안감을 없애고 따뜻한 병영 생활이 되도록 불교가 장병들에게 ‘비타민’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고고학회가 7년 만에 내년 전국역사학대회에 복귀한다. 전국역사학대회는 20여 개 역사학회가 모여 매년 10월 개최하는 한국 사학계의 최대 학술행사. 고고학계를 대표하는 한국고고학회는 2011년부터 전국역사학대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고고학회의 복귀 움직임은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한사군 논란을 계기로 고고학계와 문헌사학계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이남규 한국고고학회장(한신대 한국사학과 교수)은 “내년부터 전국역사학대회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며 “올 3월 운영위원회를 거쳤으며 평의원회에서 최종 확정된다”고 3일 밝혔다. 이 회장은 “참여가 확정되면 내년부터 11월 초에 개최하던 한국고고학전국대회는 5월로 앞당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고고학회는 전국역사학대회협의회가 2011년 제54회 전국역사학대회의 개최 일을 기존 5월 말에서 10월 말로 바꾸자 불참을 결정했다. 매년 11월 초에 열리는 한국고고학전국대회와 겹친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고고학계와 문헌사학계의 불통이 빚은 자존심 싸움의 결과라는 시각도 있었다. 한 고고학계 관계자는 “당시 해외 유학파를 중심으로 굳이 전국역사학대회에 참여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제시됐다”며 “미국이나 유럽에서 고고학은 역사학이 아닌 인류학 파트로 분류되는 것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말했다. 양측의 소통의 필요성이 집중 제기된 계기는 지난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었다. 각 대학 사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반대 성명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고고학계의 대응이 늦었다는 자성론이 제기됐다. 이와 함께 재야 사학계의 한사군 공세에 맞서 한국고고학회와 한국상고사학회, 한국고대사학회 등이 고고학·고대사협의회를 구성해 공동 대응에 나선 것도 영향을 끼쳤다.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융합이 중요해지고 있는 학문 환경도 한몫했다. 문헌에 나오지 않는 서민들의 생활사를 규명하려면 고고학 연구가 병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고대사는 물론이고 중세사도 고고학 자료가 크게 늘어 재조명할 여지가 많아졌다”며 “고려시대의 생활사도 고고학 자료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학술원 회원)도 “청동기 이후 고고학은 고대사와 통합되는 흐름”이라며 “관련 학술발표회에서 고대사와 고고학 전공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서울지하철 1호선 역인 ‘동묘앞’의 명칭은 인근에 있는 동관왕묘(東關王廟·보물 제142호)에서 비롯됐다. 1602년 지은 이 묘는 벽돌로 쌓은 사당 옆면과 지붕 모양 등에서 중국풍이 물씬 느껴지는 독특한 조선시대 건축 문화재다. 명나라 황제 신종이 “임진왜란에서 관공(關公·삼국지의 관우)의 도움이 컸으니 사당을 세우라”며 건립비용으로 금화를 보내와 지었다. 동관왕묘 사당 안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을 그린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가 여럿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상당수가 사라졌다.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이 고(故) 김태곤 교수의 기증 유물을 2년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삼국지연의도 7점을 확인했다. 이 중 일부는 동관왕묘 내 사당인 동무와 서무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물관은 연구 성과를 정리해 총서를 발간한 데 이어 삼국지연의도 5점 등 총 20여 점을 모아 ‘신이 된 관우 그리고 삼국지연의도’ 특별전을 열고 있다. 박물관이 김 교수의 기증품이 동관왕묘의 삼국지연의도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증거는 안드레 에카르트가 1920년대에 발간한 사진집 ‘조선미술사’였다. 이 책에 당시 동관왕묘에서 찍은 삼국지연의도가 소개돼 있는데, 조사 결과 김 교수의 기증품과 일치했다. 이와 함께 그림의 테두리를 두른 청색 안료가 동관왕묘 정전 기둥에 쓰인 것과 같은 성분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또 그림의 녹색 안료가 1775년 스웨덴에서 개발돼 동양에선 19세기 후반에 사용하기 시작한 ‘셸레즈 그린’으로 파악돼 삼국지연의도가 이때 그려졌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특별전은 7월 4일까지. 02-3704-3279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여러 학문주제 중 가장 어려운 난제는 누구나 궁금해하는 사항을 새로운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왜 어떤 나라는 잘살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가?’ 같은 해묵은 질문이 대표적이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 같은 천재가 아니라면 이런 레드오션에서 성과를 거두기는 매우 힘들다. 대작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특유의 방대한 지식을 바닥에 깔고 이 책에서 명쾌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생리학자로 출발해 생물학, 문화인류학, 역사학, 지리학을 섭렵한 대가답다. 저자는 국부(國富)의 원인을 크게 지리적 요인과 제도적 요인으로 나눠서 설명한다.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위도에 따른 부의 차이(온대지역이 열대지역보다 잘사는 현상)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규명한다. 즉 빙하기와 간빙기 때 빙하의 침식으로 토양이 비옥해진 온대지역은 농업 생산성이 열대지역보다 높다는 것. 열대지역의 높은 기온은 병원균과 곰팡이의 번식력을 왕성하게 해 곡물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실제로 남부보다 북부가 더 잘사는 미국이나 이탈리아의 사례처럼 한 국가 안에서도 위도가 낮은 곳(적도에 가까운 곳)의 생산성이 더 낮은 걸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해 열대지역의 열악한 공중보건도 생산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평균수명이 41세에 불과한 아프리카 잠비아처럼 한창 일해야 할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는 경제성장에 치명타를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정부 붕괴와 가장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 예측변수가 ‘유아 사망률’이라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분석결과도 흥미롭다. 이에 따라 저자는 후진국에 생산 인프라를 구축해주는 것 이상으로 공중보건 강화를 돕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대 국가 옥저의 영토인 러시아 연해주에서 기원전 3∼4세기 부여계 동검(銅劍)이 처음 발견됐다. 이 동검은 옥저와 부여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위서동이전 등 문헌상 확인되는 부여와 옥저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2세기인데 이보다 앞선 유물이 발견돼 주목된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고고학)에 따르면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주(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 부근에서 부여계 안테나식(촉각식) 동검과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화폐인 ‘칠원일근(桼垣一釿)’이 현지 사학자들에 의해 최근 발견됐다. 동검은 손잡이 끝부분의 장식이 양옆으로 돌출돼 마치 안테나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부여의 대표적인 유물로 꼽힌다. 강 교수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총길이 약 40cm인 이 동검은 4개로 조각 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칼날 조각의 두께는 0.5∼0.9cm, 최대 너비는 2.2cm다. 칼날의 형태가 길쭉하게 떨어지는 전형적인 세형동검이다. 특이하게 손잡이 아랫부분에 T자형 홈이 파여 있다. 홈 아래로 돌출된 안테나 장식이 붙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새 두 마리가 부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동검은 곳곳에 닳은 흔적이 남아 있어 오랫동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 교수는 “조각들의 부러진 모습 등을 감안할 때 장례용으로 동검을 땅에 묻으면서 일부러 부러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동검 근처에서 발견된 칠원일근은 한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린 직경 3.5cm의 동전. 기원전 3∼4세기에 통용된 이 화폐는 극히 적은 수량만 제작돼 지금껏 한반도나 주변 지역에선 출토된 전례가 없다.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사람을 위해 동검과 동전을 함께 묻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강 교수는 “위나라 화폐는 당시 매우 귀했으며 중원∼요동반도∼연해주로 이어지는 모피 무역 과정에서 거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동검은 초기 옥저가 부여와 교역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아이고마 보는 사람 심장이 다 떨어지겠습니더.” 1978년 7월 28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 터 발굴 현장. 포항제철의 크레인 기사가 최병현 조사원(현 숭실대 명예교수)에게 소리쳤다. 30t 무게의 목탑터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을 대형 크레인으로 들어올리자마자 최병현과 동료가 그 아래로 들어간 것. 이들은 심초석 밑에 혹 유물이 묻혀 있는지 샅샅이 훑었다. 심초석을 옮겨서 내려놓을 때 잔존 유물이 파괴되는 걸 막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워낙 무겁다 보니 크레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릴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동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79)의 입술도 바싹 타들어 갔다. 22일 팔순에 가까운 김동현은 38년 만에 다시 그 자리에 섰다. 그는 지팡이를 짚은 채 약 8만 m²의 광활한 황룡사 터 한가운데 있는 9층 목탑 터로 서서히 걸어갔다. 심초석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이윽고 입을 뗐다. “들어올릴 때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갑자기 3년 전 월지(안압지) 목선 사고가 머릴 스치더군요. 머리카락이 쭈뼛 섰습니다.” 1975년 경주 월지 뻘층에서 인부들이 목선을 파낸 뒤 옮기는 과정에서 목선이 두 동강 나는 사고가 벌어졌다. 당시 현장을 지휘한 김동현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지만 곧 반려됐다. 그는 심초석을 옮기며 그때의 악몽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다행히 돌은 무사히 빈 땅에 안착했다. 사실 당시 누구도 탑의 심초석 아래를 발굴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석탑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수습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구태여 무거운 심초석을 들어내 발굴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이었다. 황룡사 터 심초석 발굴 때에도 일부 학자들은 사고 위험을 거론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건축공학을 전공한 김동현의 생각은 달랐다. 탑의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가장 아랫부분의 기초를 확인해야 한다고 봤다. “난 발굴에 들어갈 때 인문학적인 요소 이상으로 공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졌어요. 천마총 발굴 땐 소요 인력이나 흙, 돌의 양을 수치로 계산해 봤습니다. 정통 고고학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영역이죠.” 심초석 아래는 그의 예상대로 적심석(積心石·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이 설치돼 있었다. 평평하지 않은 자연 지형에서 거대한 하중을 지탱할 수 있는 구조였다. 신라인들의 지혜가 발휘된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의 존재였다. 심초석이 놓였던 자리를 10cm가량 파내자 청동거울과 금동 귀고리, 청동 그릇, 당나라 백자항아리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한꺼번에 나왔다. 탑을 세울 때 귀족들이 사용하던 장신구를 부처에게 바친 공양품과 액땜을 위해 땅속에 묻는 예물인 진단구(鎭壇具)였다. 이것은 한국 고고학사에서 새로운 해석을 낳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는 장례용 의례품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황룡사 공양품으로 발원자가 착용한 귀고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것이 신라시대 당시 실생활에도 쓰였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게다가 이 귀고리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 연도(645년)를 통해 시기가 확인되기 때문에 다른 신라 귀고리의 양식이나 편년을 비교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됐다. 무엇보다 고고학계가 꼽는 황룡사지 발굴의 최대 성과는 황룡사의 가람 배치가 1탑(塔) 3금당(金堂)식이라는 사실을 처음 규명한 것이다. 즉, 9층 목탑을 가운데 두고 북쪽에 3개의 금당을 나란히 세운 황룡사의 독특한 가람 배치를 알아낸 것이다. 1978년 이전까지 황룡사의 가람 배치는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전 도쿄대 교수가 1930년 논문에서 주장한 ‘1탑 1금당’이 정설이었다. 광복 33년 만에 일제강점기의 부실한 발굴 성과를 우리 손으로 극복한 것이다. “1980년 일본 도쿄대로 유학을 갔는데 지도교수에게서 ‘황룡사 발굴 현장에 압도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내가 최고로 치는 황룡사 출토 유물은 높이 2m짜리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입니다.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신라인들은 이 거대한 치미를 통째로 가마에서 구워 냈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 사찰은 나무로 짠 틀에 동판을 붙여 치미를 겨우 흉내 냈죠. 황룡사는 위대한 선조들이 남긴 압도적인 문화유산입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대한제국 시절 고종의 서재로 쓰였던 경복궁 집옥재(集玉齋)가 작은 도서관으로 꾸며진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6일 “경복궁 집옥재를 ‘작은 도서관’으로 조성해 27일 개관식과 토크콘서트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집옥재는 원형을 보존한 채 내부의 서가와 열람대 등을 새로 들여놓을 계획이다. 그동안 보존에만 치우쳐 꽁꽁 닫혀 있던 궁궐 전각을 역사적 맥락에 맞게 활용해보자는 취지다. 문체부는 집옥재 도서관에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인물 관련 책 1000여 권과 더불어 본래 이곳에 비치돼 있던 왕실 자료를 영인본(350권)으로 만들어 함께 보관할 예정이다. 영인본을 통해 관광객들이 왕실 서재의 역사적 위상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한국 문학 번역본(영어, 중국어, 일본어) 230여 권도 비치한다. 1891년 건립된 집옥재는 고종의 서재이자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됐다. 집옥재 좌우로는 ‘팔우정’과 ‘협길당’이 복도로 연결돼 있다. 문체부는 문화재청과 협의해 정자 건물인 팔우정을 북카페로 활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팔우정에는 휴식과 함께 궁중 다과와 한국 문학 번역본을 판매하는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앞서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의 ‘궁릉활용심의’를 거쳤다. 집옥재 서책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새로 개관하는 집옥재 도서관에서 유물 전시와 왕실문화 강좌를 맡기로 했다. 27일 ‘문화가 있는 날’에 맞춰 개최될 집옥재 작은도서관 개관식에는 김종덕 문체부 장관과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표재순 문화융성위원장 등 200여 명이 참석한다. 개관식에 이어 열릴 ‘문화가 있는 날, 궁을 읽다’ 토크콘서트는 △이배용 원장과 설민석 강사의 역사 강의 △김원중 단국대 교수의 ‘격몽요결’ 강좌 △전통무용, 부채춤 공연 등이 진행된다. 문체부는 개관식 참석자 전원에게 율곡 이이가 쓴 ‘격몽요결’을 나눠줄 계획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집옥재처럼 특화된 작은 도서관을 시작으로 전국에 분야별로 ‘건강한’ 작은 도서관 건립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독립운동의 원훈(元勳·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인물)을 살해한 통의부를 저주하며 난군배(亂軍輩)를 성죄(聲罪)하노라.” 독립신문 1924년 10월 4일자(제177호) 1면 기사의 부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의부(參議府)의 핵심 인물이던 채찬이 통의부 구성원에 의해 살해된 사건을 다루면서 통의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기사다. 당시 독립신문에는 고인에 대한 이시영의 조문(弔文)과 약력, 부고, 추모시 등이 게재됐다. 이에 통의부는 독립신문 구독 금지 결정으로 응수했다. 살해사건 보도의 여파로 김승학은 독립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제177호 기사는 최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의해 새로 발견된 독립신문 5개 호 가운데 하나다. 1919년 8월 창간호(사진)를 낸 독립신문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서재필이 1896년 창간한 독립신문과 다르다. 박물관은 ‘독립신문 영인본’(전 3권)을 이번에 새로 발간했다. 미공개본은 자료 수집 과정에서 인사동 고서점 등을 통해 입수한 것들이다. 신간 영인본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1919년 8월∼1926년 11월 발행한 신문을 포함해 총 194건이 수록됐다. 미공개본 5건은 1924∼1926년 사이에 발행된 제177∼180호와 제195호다. 독립신문 미공개본에는 임시정부에 재정을 지원하던 참의부와 통의부 사이의 갈등과 신문사 운영진 교체, 구미위원부의 갈등 등 임시정부 관련 역사 기록이 담겨 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해 ‘궁(宮) 스테이’를 포기한 문화재청이 대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무료 숙박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김대현 문화재청 문화재활용국장은 “제2회 궁중문화축전을 29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에서 동시에 진행한다”며 “궁중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고궁문화체험’을 경복궁 함화당과 집경당에서 무료로 실시한다”고 25일 밝혔다. 앞서 문화재청은 창덕궁 낙선재 석복헌과 수강재를 개조해 VIP 객실로 활용하는 궁 스테이를 추진했으나 고가(高價) 논란 속에 무산됐다. 문화재청은 올 궁중문화축전에서 왕실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연과 전시, 체험 등 32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경복궁 내 부엌인 소주방에서는 전통음식을 만들고 맛볼 수 있는 ‘수라간 시·식·공·감’이 열린다. 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급하긴 급했던 모양입니다. 저런 ‘거짓 해명’을 늘어놓는 걸 보면….” 24일 문화재청 관계자는 경주 황룡사지 신라유적 훼손 사건에 대한 경주시의 입장을 전해 듣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주시가 ‘황룡사 역사문화관’ 경계석축 공사를 급하게 진행하면서 통일신라 적심석(積心石·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을 훼손한 사실을 전한 본보의 단독 보도 직후, 시 관계자는 한 지역 언론에 “14일 불법 공사 현장을 적발한 뒤 문화재청 신라왕경사업추진단에 알렸다”고 밝혔다. 마치 시는 공사와 전혀 무관하며 전적으로 시공업체의 잘못인 것처럼 해명했다. 하지만 시의 해명은 진실과 다르다. 본보가 경주시와 문화재청 관계자들을 접촉한 결과, 경계석축 공사는 이달 11일부터 시작됐으며, 사흘 뒤인 14일 인근 남문지 담장을 발굴 조사하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의 제보로 유적 훼손 사실이 드러났다. 이 연구원은 문화재위원회의 허가도 없이 굴착기가 공사에 투입된 점을 수상히 여겨 현장을 직접 둘러본 뒤 신라왕경사업추진단에 이런 사실을 알렸다. 이는 기자가 역사문화관 공사를 담당한 경주시 공무원과의 인터뷰에서도 확인한 내용이다. 경주시가 사건 은폐에만 급급한 것은 이뿐이 아니다. 기자는 경주로 내려가기 전날인 20일 시 관계자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 관계자는 “경주 취재를 간다고 들었다. 한 번 만나자”라고 말했다. 민감한 취재동선이 노출된 데 대해 항의하자, 그는 “문화재청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했다. 21일 황룡사지 현장취재 때에는 공사장 관계자가 계속 기자를 감시했으며, 촬영을 시도하자 직접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 기자 맞지 않느냐?”고 추궁했다. 시는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거짓 해명을 중단하고 반성부터 하는 게 옳다. 시공업체의 공사 개시일자를 사전에 보고받지 못했다는 시의 해명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발주처로서 설계변경을 추진하고 철저하게 감독해야 할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본보 취재 결과, 시가 올 3월 뒤늦게 설계변경을 추진했음에도 6월 개관을 밀어붙인 사실도 드러났다. 황룡사지 내 불법공사는 단순한 지역 차원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국가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점에서 상황은 엄중하다. 현장조사를 다녀온 한 문화재위원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눈을 그대로 감고 돌아오고 싶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경주시는 “후손들에게 죄 짓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재발 방지에 나서야 할 것이다.김상운 문화부 sukim@donga.com}

국가사적 6호로 지정된 신라시대 최대 사찰 터인 황룡사지를 둘러싼 훼손의 전말이 드러났다. ‘황룡사 역사문화관’ 부대시설 공사가 진행되면서 통일신라 유구(遺構·옛 건물의 흔적)가 훼손된 과정에는 무리한 공사 기간 단축과 전문성이 없는 관리 인력, 법을 무시한 행정 등의 문제점이 겹쳐졌다. 22일 문화재청과 경주시에 따르면 시는 지난해 3월 역사문화관 내 경계 석축 공사와 관련해 조경 전문가들에게 자문했다. 그러나 인사로 담당 주무관이 바뀌면서 한동안 잊혀졌다가 올 초 새로 부임한 담당자가 자문 서류를 찾아내 3월 경계 석축 공사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경주시는 올해 3월 설계변경을 추진하며 “공신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공기(工期) 연장은 안 된다. 올 6월 개관 예정에 맞춰 공사를 진행하라”고 시공업체에 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경계 석축이 포함된 설계 변경이 급하게 추진돼 최근 바뀐 도면이 시에 제출됐다. 문제는 경주시가 이 변경안을 신라왕경추진단이나 문화재위원회에 보고도 하지 않고 허가 없이 공사를 진행했다는 점이다. 결국 11일부터 굴착기로 깊이 1.5m의 구덩이를 파다가 신라시대 유구를 훼손하게 됐다. 경주시 담당 공무원들의 잦은 인사로 황룡사지 복원 공사가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황룡사 역사문화관 담당자(주무관)의 경우 공사 기간 중 8번이나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올 초 담당 공무원이 새로 오면서 문화재 관련 규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주시 관계자 역시 “실무자와 책임자 모두 공사 마무리 단계에 인사 발령을 받아 업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고 했다. 문화재 전문 감리업체가 현장 사무실에 상주해 있었는데도 문화재보호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공사가 벌어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발주처인 경주시의 독촉에 감리업체가 사실상 불법을 묵인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한편 경주시는 이번에 유구를 훼손한 공사의 진행 사실을 몰랐다는 입장이다. 시공 업체가 자의로 터 파기 공사를 진행했다는 주장이다. 이상일 경주시 신라왕경2팀장은 “설계 변경을 추진했지만 공사가 시작된 것을 몰랐다”며 “공기를 연장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시공 업체가 무리수를 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이어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은 느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문화재계에서는 황룡사지뿐 아니라 경주 일원의 여러 복원 정비 과정이 ‘속도전’ 양상이라며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이 일대에서는 월성, 동궁, 월지 등 ‘신라 왕경 8대 핵심유적 복원 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올해 3월부터 월정교 문루 복원 공사에 들어갔고, 12월부터는 월성 해자 복원 공사에 착수한다. 문화재계의 한 관계자는 “경주 복원 정비 사업은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며 “현 정부 임기 안에 예산을 최대한 따내기 위해 경주시가 속도를 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경주는 온통 공사판이나 다름없고, 이번처럼 어이없는 사고도 벌어졌다”고 말했다.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해 이탈리아 피렌체를 취재차 찾았을 때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메디치 가문의 저택과 도서관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왕정의 군주가 아닌 메디치가 사실상 군주로 군림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아마도 메디치는 근대 자본주의 이전에 돈으로 권력을 산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금융업으로 돈을 번 가문답게 메디치는 명확한 회계 기준과 절차를 갖고 있었다. 회계의 혁명으로 불리는 복식부기도 메디치가에 의해 고안됐다. 조반니 메디치는 자신이 만든 금융기준을 준수하라고 유언으로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메디치가의 몰락은 회계를 우습게 본 데서 비롯됐다. 예술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으로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을 가져온 로렌초 메디치는 회계나 상업지식을 얕잡아 봤다. 그는 막대한 가산을 탕진한 끝에 피렌체의 재정마저 붕괴시켰다. 회계에 대한 몰이해가 도시국가의 수난으로 이어진 셈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회계를 통해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꿰뚫어 보는 독특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모든 길은 회계로 통한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특히 저자는 회계가 정치권력의 투명성과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에 주목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한국의 외환위기와 미국의 엔론 회계부정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대마불사(大馬不死)론에 빠져 분식회계를 일삼았던 한국 대기업의 부실은 외환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당시 김영삼 정부의 레임덕을 부추기면서 김대중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미국 엔론의 회계부정 사태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리더십에 치명타를 가했다. 17∼18세기 유럽 전제군주들의 부침도 회계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예컨대 루이 16세의 재무총감이던 네케르가 1781년 왕실 장부를 공개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불씨를 댕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도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적절한 시점에 재정개혁을 단행하지 않아 재정파탄을 맞았다. 재정수입의 68%를 외국에서 빌려온 빚을 갚는 데 쓸 정도였다.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신하들의 회계개혁 요구를 무시하고 무적함대 원정 등에 힘을 쏟다가 점차 제국의 쇠락을 맞게 됐다. 그렇다면 국가 시스템의 중추인 회계와 관련된 역사의 교훈은 무엇인가. 상업지식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고, 실용 수학이 인문학과 융합된 국가와 사회가 역사적으로 번영을 누렸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15∼16세기 피렌체,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이나 17세기 네덜란드, 18∼19세기 영국 등은 모두 회계를 종교 사상 예술 정치와 적절히 결합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예컨대 피렌체가 속한 15세기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는 학교의 절반이 주산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특히 은행가나 상인, 변호사들은 철학과 수학, 회계 등 다양한 학문을 교육받았다. 특히 복식회계를 연구한 성직자 루카 파치올리(1445∼1517)는 재무회계가 공화정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저자는 각종 파생금융상품의 등장 등으로 투명한 기업회계가 쉽지 않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역사적 관점에 입각한 회계에 대한 이해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북 경주시가 ‘황룡사 역사문화관’ 부대시설 공사를 진행하면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구조를 알 수 있는 흔적)를 훼손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또 국가 사적지인 황룡사지에서 문화재위원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공사를 벌인 사실도 밝혀졌다. 문화재청은 경주시 담당 공무원들에 대한 문책과 공사 관계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경주시에 요구했다. 문화재청과 경주시에 따르면 이달 11일부터 황룡사 역사문화관 주변을 두르는 석축 및 배수로 공사를 경주시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적심석(積心石·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을 훼손했다. 굴착기를 동원해 폭 2m, 깊이 1.5m의 구덩이를 파다가 신라시대 유구를 건드린 것이다. 이 사실은 며칠간 외부에 알려지지 않다가 14일 우연히 현장을 찾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의 제보로 신라왕경사업추진단이 조사에 나서게 됐다. 추진단은 현장 확인 직후 공사를 즉각 중단시켰다. 이상일 경주시 신라왕경2팀장은 “지난해 조경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석축을 추가로 시공하는 방향으로 설계변경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경주시는 설계업체에 용역을 맡겨 경계석축이 반영된 도면까지 확보했다. 하지만 경주시는 신라왕경사업추진단이나 문화재위원회에 설계변경 사실을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경주시가 역사문화관의 6월 개관에 쫓겨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면서 실책을 저지른 것 같다”고 말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 99조에 따르면 사적 등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현상변경 허가 없이 무단으로 공사를 진행하면 최대 5년형의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황룡사지는 국가사적 제6호로 지정돼 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20일 경주시에 공문을 보내 경주시 책임 공무원들에 대한 감사와 시공업체 관계자들에 대한 형사고발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19일 사고현장을 조사한 강현숙, 김권구 교수 등 문화재위원들은 적심석 등 유구에 대한 긴급 수습조사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지시했다. 21일 기자가 둘러본 현장은 이틀간 비가 내리면서 토사가 흘러내리는 등 유구에 대한 보존 조치가 매우 열악한 것으로 파악됐다. 앞서 현장조사에 나선 강현숙 동국대 교수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눈을 그대로 감고 돌아오고 싶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권구 계명대 교수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며 “확실한 재발 방지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훼손된 유구는 발굴조사가 아직 이뤄지지 않아 성격이 명확하지 않지만 황룡사지와 붙어 있는 데다 인근에서 통일신라시대 연못 터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통일신라시대 왕경 시설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권구 교수는 “경주 북천이 예부터 자주 범람하다 보니 신라시대 당시 배수와 관상용으로 연못을 여기저기 지었다”며 “수로 관리시스템의 한 부분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계는 이번 사고가 예견된 참사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황룡사를 끼고 신라 궁성인 월성으로 이어지는 곳이어서 예전부터 통일신라시대 유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경주시는 황룡사 및 월정교 복원과 월성 발굴 등 일련의 신라왕경복원사업이 박근혜 정부의 대선공약 사항이라는 이유로 학계의 우려를 무시하고 너무 서둘러 진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학술원 회원)는 “경주시의 속도전이 발굴도 안한 지역을 굴착기로 훼손하는 참사를 낳았다”며 “문화재청도 감독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깊은 사색에 잠긴 미륵보살의 미소가 은은하게 번진다. 오른손 손가락을 뺨에 댄 채 한쪽 다리를 무릎 위에 올린 도상이 서로 닮았다. 6∼7세기 제작된 한국과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불교문화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문화재다. 우리나라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호)과 일본 국보인 나라 주구(中宮) 사 소장 목조반가사유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함께 전시된다. 주구 사 반가사유상이 해외에서 전시되는 것은 처음이다. 양국 최고(最高)의 반가사유상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기획한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특별전을 다음 달 24일부터 개최한다고 20일 밝혔다. 인도에서 유래된 반가사유상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국, 일본에 전해졌다. 6세기에 만들어진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7세기 아스카시대에 제작된 일본 주구 사 반가사유상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두 작품은 6월 12일까지 국내에서 전시된 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도 6월 21일부터 7월 10일까지 선보인다. 02-2077-9540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달 16일 서울 용산구 서울산업진흥원 ‘청년창업플러스센터’. 옛 용산구 청사였던 이곳은 딱딱한 외관과 달리 실내는 대학가 카페처럼 산뜻한 인테리어로 단장돼 있었다. 1층 회의실에서는 한 외국인 젊은이가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며 한국인 동료들과 한창 사업 계획을 짜고 있다. 이들의 열정적인 토론을 구경하는 사이 회색 티셔츠를 입은 앳된 얼굴의 30대 여성이 악수를 청했다. 유튜브에 올라 있는 미국 CNBC의 생방송 인터뷰에서 본 그 얼굴이다. 주인공은 놀라디자인(영문명 Yolk) 장성은 대표(33). 장 대표는 요즘 벤처업계에서 가장 ‘핫(hot)한’ 인물이다. 세계 최대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터넷을 통해 다수의 개인으로부터 투자금을 모으는 사이트)인 ‘킥스타터(Kickstarter)’에서 국내 최고액인 100만 달러를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 43일 만이다. 그가 모은 금액은 킥스타터에 등록한 전체 창업가 중 상위 1% 안에 드는 규모다. 킥스타터는 개인이나 기업이 신상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목표액을 제시하면 개인 투자자들이 상품 등을 대가로 돈을 투자하거나 기부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장 대표는 투자자들에게 시장가보다 약 30% 낮은 가격(5W짜리 89달러)으로 ‘솔라페이퍼’를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킥스타터에 올렸다. 솔라페이퍼는 휴대용 태양광 패널로 전력을 생산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블루투스 스피커 등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전자 기기다. 미국 유명 디자인 학교인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SAIC)’를 졸업하고 한때 디자인 회사에서 일한 그가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틈새시장을 개척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주효했다. 앞서 장 대표는 일반 충전기 사업을 벌이다 실패한 적이 있다. 이미 대기업까지 진출해 포화된 시장에서 제품을 차별화하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장 대표는 와신상담 끝에 보조배터리 시장의 3% 미만에 불과한 틈새시장인 휴대용 태양광 제품을 주목했다. 초기 시장이어서 독특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때 그의 장기인 ‘디자인’이 결정적인 돌파구를 제공했다. “수준 높은 디자인이 제품과 접목되지 않은 산업들이 꽤 많은데 그중 하나가 태양광 배터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뭔가 테크(기술)랑 융합한 디자인이 먹힐 것 같다는 느낌이 왔어요.” 기존 휴대용 태양광 충전기들이 실제로는 핵심 기능인 ‘휴대’가 쉽지 않다는 점에 착안했다. 무거운 데다 부피마저 커서 커다란 배낭에 매달고 다녀야 하는 제품이 많았다. 장 대표는 필요한 전력량에 따라 태양광 패널 수를 손쉽게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이른바 ‘똑딱이식’ 디자인을 고안했다. 마치 스마트폰 케이스처럼 패널 사이를 자석으로 연결하는 기능이다. 패널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대신 전력 생산효율을 높일 방안도 찾아냈다. 다행히 제품 개발과 생산을 위한 사업 파트너를 구할 수 있었다. 그가 설계한 디자인과 제품 콘셉트(얇고 가벼운 충전기 제품)를 현실화할 길이 열린 것이다. 실제로 솔라페이퍼 패널 한 개의 크기는 세로 19cm, 가로 9cm, 두께 1.1cm에 불과하다. 딱 일반 다이어리 크기인데 무게도 장당 60∼70g으로 가벼워 들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다. 날씨만 좋으면 아이폰6를 충전하는 데 2시간 30분(흐린 날은 3시간)가량이면 충분하다. 마케팅과 유통 창구로 킥스타터를 충분히 활용한 것도 한몫했다. 흔히 인지도가 떨어지는 창업 초기 기업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마케팅과 유통이다. 장 대표는 킥스타터 덕을 톡톡히 봤다. CNBC와 BBC 등 해외 주요 매체에 인터뷰가 실리면서 작지 않은 홍보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 킥스타터 약정 고객 6000명을 제품 생산 전에 확보해 100만 달러의 안정적인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장 대표는 “킥스타터는 온라인 특성상 실물이 없는 상태에서 투자가 이뤄지기 때문에 신뢰가 생명”이라며 “시연 등을 통해 제품의 기술력을 충분히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농심은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이 신라면의 중국 시장 진출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고 평가한다. 농심이 이 대회를 유치한 것은 외환위기로 운영이 어려워진 ‘진로배 세계바둑대회’를 대신 맡아달라는 한국기원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신라면을 막 생산하던 상황에서 바둑에 대한 관심이 높은 중국인에게 브랜드 인지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이 제안을 수용했다. 이에 이례적으로 대회 명칭에 상품명을 집어넣어 ‘신라면배’라고 정했다. 농심은 1999년 7월 한국기원과 조인식을 가진 데 이어 그해 12월 제1회 대회를 중국 상하이에서 열었다. 2000년 3월까지 서울과 도쿄에서도 대회가 열렸는데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9단을 비롯해 한중일 최고수들이 모두 출전했다. 신라면배 바둑대회의 광고 효과는 상당했다. 1회 대회의 경우 중국 상하이TV에서 나흘 동안 매일 2시간 반씩 중계했다. 대회 운영비의 6배에 달하는 40억 원의 광고 효과를 거둔 것이다. 베이징에서 열린 2회 대회에서는 중국 국영방송으로 전국에 전파를 송출하는 CCTV가 중계를 맡아 더 큰 홍보효과를 거뒀다. 이처럼 현재 농심신라면배는 한중일 3국의 최고수가 참여하는 ‘아시아 바둑 올림픽’으로서 중국 언론들이 으레 주요 기사로 보도하는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지난달 막을 내린 17회 대회는 중국 내륙 지역 공략을 위해 충칭에서 개막전을 가졌다. 이에 힘입어 신라면의 중국 내 매출은 눈에 띄게 성장세를 보였다. 연간 제품 판매량은 1998년 40만 박스에서 2000년 200만 박스로 5배로 늘었다. 농심은 지난해 중국 시장에서 전년대비 16.6% 늘어난 2억1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려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이 중 신라면 매출도 전년보다 25% 늘어난 5000만 달러를 차지했다. 바둑 대회 개최에 따른 브랜드 홍보효과가 1등 공신이었다. 신라면은 1986년 출시돼 올해 30년을 맞았으며 지난해말 기준 누적 매출이 단일브랜드로는 국내 최초로 10조 원을 돌파했다. 신라면배는 세계 최고 바둑대회로서 위상을 굳히고 있다. 농심은 제17회 대회의 우승상금을 2억 원에서 5억 원으로 크게 올렸다. 우승상금 5억 원은 세계 기전에서 가장 높은 금액이다. 1988년 창설된 중국 최고 대회인 ‘응씨배’의 우승상금은 40만 달러이고 이마저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것이다. 박준 농심 대표이사는 “농심신라면배가 세계 최고의 바둑기전으로 우뚝 서는 동시에 신라면 브랜드를 13억 중국인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우승상금을 대폭 높였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 석벽은 너무 견고해서 스페인 정복민들이 해체하기 힘들었을 정도였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대성당은 무너졌지만 석벽들은 끄떡없었어요.” 수년 전 페루 쿠스코를 갔을 때 인디오계 현지인은 아르마스 광장의 대성당(La Catedral)과 석벽을 번갈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목소리에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사실 쿠스코 시내를 가면 정복자 스페인 문명의 자취가 가득하다. 대성당만 해도 잉카시대 비라코차 신전을 깔아뭉개고 그 위에 지은 것이다. 스페인은 잉카 문명을 욕보이고 정복자 행세를 톡톡히 했다. 어쩌면 남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을 백안시하는 우리의 인식도 당시 스페인 사람들과 닮았는지 모른다. 기자 출신의 영국인 역사학자인 저자는 지난 1만6000년 동안 구세계(유라시아)와 신세계(아메리카) 문명이 서로 다른 길을 걸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집중 추적하고 있다. 아메리카 문명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이들의 사회, 문화적 습성이 생긴 배경을 자연생태에서 찾는다. 예컨대 문명 발달 초기 몬순 기후가 지배한 유라시아는 유목, 농경 생활방식을 택한 반면, 사시사철 자연에서 식량을 구하기 용이했던 아메리카인들은 수렵, 채집에 의존했다. 이는 이후 두 문명 간 ‘거대한 단절’의 첫 분기점이 됐다. 이후 몬순 약화 등 기후 변화로 인해 농작물 생산이 부족해진 유라시아인들은 가축을 키우며 살길을 모색했다. 저자는 “포유동물 사육이 구세계 고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말 사육은 바퀴, 마차 발명과 더불어 다른 지역과 교역, 전쟁 등을 불러와 사상의 교류를 가능케 했다. 신세계보다 훨씬 큰 규모의 왕조가 유라시아에서 가능했던 이유다. 반면 농경이나 가축에 기대지 않은 신세계 문명은 아마존과 안데스라는 자연방벽을 넘어 다른 지역과 교류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 대신 이들은 주변에 흔한 환각성 식물(유라시아에 자생하는 환각성 식물은 8∼10종이나 아메리카는 80∼100종에 달함)을 이용한 종교적 체험에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엘니뇨 현상과 화산 등 자연재해와 결부돼 인신공양과 같은 폭력적인 종교 제의가 빈번히 이뤄졌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의 결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문명은 환경 적응의 산물이다. 구세계의 역사가 주로 양치기의 역할에 의해 규정됐다면 신세계는 주술사들에 의해 좌우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