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학생 또 자살]석달새 4명 자살… 충격의 KAIST, 학생측 요구 즉각 수용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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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경쟁일변도 학교 개혁정책이 숨막히게 해”

《 ‘국내 최고이자 최초의 이공계 연구중심대학’ ‘한국 과학교육의 메카’로 불리는 KAIST가 개교 40년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최고의 인재로 불리는 대학생들이 올해 들어 무려 4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2006년 서남표 총장 취임 이후 지난해까지 4명이 자살했지만 3개월여 만에 4명이 잇따라 숨진 것은 처음이다. 일각에서는 ‘베르테르 효과(모방자살)’를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영재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걸까. 학생들은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는 무리한 학교 측의 개혁 드라이브에 따른 심리적 압박과 학업 스트레스를 들고 있다. 캠퍼스 안엔 살벌한 경쟁만 있지 학문에 대한 진정한 추구나 행복감은 느낄 수 없다고 한다. 반면 학교 측과 교수들은 경쟁력 있는 일류 대학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진실은 무엇이고 해법은 뭘까. 》
서남표 총장이 도입한 학생 개혁정책의 골자는 성적에 따른 등록금 차등 부과와 8학기에 졸업을 하지 못한 연차 초과자에 대한 학업제한, 한 번 낙제한 과목에 대한 재수강 금지 등이다. 이와 관련해 과학고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학생이 최근 과학고 일반고 전문계고로 다양해지고 선발방법도 입학사정관제도가 추가됐으나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평가 기준을 적용한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여기에 100% 영어수업도 학생들에게는 스트레스였다. 영어수업 이후 학생들이 마치 고교생처럼 단어장을 들고 다니는 진풍경이 목격됐다. 학생들은 “우리말로 들어도 이해하기 힘든 강의를 영어로 들어야 하니 학습량이 대폭 늘었다”며 “일부 교수도 영어강의에 익숙지 않아 심도 있는 강의를 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학생들은 과도한 경쟁과 학업 스트레스를 불러온 학교의 개혁정책이 학생 자살의 원인이라며 책임을 학교 측에 돌렸다. 3학년생 A 씨는 교내 대자보에 쓴 ‘KAIST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우리 사천(4000) 학우다’라는 글을 통해 “학점경쟁에서 밀려나면 패배자 소리를 들어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 고민을 나눌 여유조차 없다. 이 학교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학교가 대외적으로는 개성 있고 창의적인 인재 육성을 표방하지만 (결국) 숫자 몇 개가 사람을 평가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잣대가 됐다”며 “그래서 듣고 싶은 강의보다 학점 잘 주는 강의를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 학교측 “국제경쟁력 위해 불가피한 측면… 개선 검토” ▼
“학생회와 논의중이었는데…”


KAIST가 성적에 따른 차등적 등록금제를 사실상 폐지하기로 한 것은 학생 측의 주장을 어느 정도 수용한 측면이 크다. 이승섭 학생처장은 “사실 올해 신학기부터는 학점 2.0 미만의 학생들에게도 국립대 수업료인 300여만 원만 내도록 제도를 보완했지만 학생들이 여전히 부담을 가져 학생회 등과 개선책을 논의해 오던 차였다”며 “하지만 등록금 부과정책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서 총장은 “2006년 취임하고 나니 학부 정원이 3000명인데 실제로는 3850명이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낙제과목을 다시 수강하면 이전 점수를 없애주는 제도 때문에 연차 초과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들이 사회에 빨리 나가 공헌하도록 하는 것도 학교의 책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영어강의에 대한 대책도 나왔다. 최병규 교학부총장은 “영어강의는 국제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며 “그동안에도 조교들이 일정 시간을 정해 우리말로 번역해 주는 등 부담을 줄여주고 있지만 아직도 힘들어하는 학생이 적지 않아 보완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고교에서 공부한 배경과 입학 경로가 다른 학생들이 성적이라는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받는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개선책이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자살 원인을 학업 스트레스와 연결하는 것은 외국에서는 일반적인 접근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에서 초중고교와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모두 마친 한 교수는 “최근 학생 자살의 원인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외국 대학의 경우 자살을 학업 스트레스보다는 질병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비교적 상담체계 등이 잘 갖춰져 있다”고 전했다.

반면 국내 대학의 경우 학생들의 심리상담에 대한 투자는 매우 소홀하다. 전국대학교학생생활상담센터협의회에 따르면 2008년 137개였던 등록 회원 대학은 2009년 118개, 지난해 113개로 지속적으로 줄었다. 협의회장인 유영권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는 “대학들이 수익과 곧바로 직결되는 취업률에는 신경을 쓰지만 직접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 학생들의 정신건강은 등한시한다”고 지적했다.

과학고에서 KAIST로 진학하면서 어려서부터 가정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업 환경도 정서적인 문제의 원인일 수 있다. 학생들은 컴퓨터에 익숙한 데다 외로운 나머지 기숙사에서 게임에 빠져들어 중독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 “학업부담 과도” vs “외국대학 비해선 적어” 엇갈려 ▼


상당수 KAIST 학생은 학업 부담이 과도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살사건이 잇따르자 학생 전용 사이트에는 학업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글이 쇄도했다. 한 학생은 학생전용 사이트에 “정말 여기서 살아남기 힘들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만날 말로만, 맘속으로만 ‘할 수 있다, 힘내자’라고 자위하지만 맘속에는 우울과 비관이 가득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유학파 교수들은 KAIST 학생의 학업 부담이 외국 유명 대학과 비교해 크다고 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1980년대 후반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은 한 교수는 “재학 당시 한 학년 가운데 절반가량이 성적 때문에 중도 탈락하거나 전학을 갔다”며 “KAIST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기 위해 학업강도를 높이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한 형편”이라고 귀띔했다. 최근 아들이 중국 베이징(北京)대를 졸업했다는 또 다른 교수는 “베이징대의 경우 성적 때문에 4년 사이에 한 학년의 20%에 이르는 학생이 탈락한다”며 “외국 명문대 학생들은 우리와는 달리 낭만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학업에 매달린다”고 말했다.

이처럼 엇갈린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견해차를 좁히고 해법을 찾아보려는 서 총장과 학생들과의 대화가 8일 오후 교내 창의관에서 열릴 예정이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장기우 기자 straw825@donga.com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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