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그때 그이야기]5회 스위스대회<하>

  • 입력 2002년 4월 16일 17시 07분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출전한 한국대표팀 ‘베스트11’이 터키와의 경기에 앞서 중앙선에 도열해 있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출전한 한국대표팀 ‘베스트11’이 터키와의 경기에 앞서 중앙선에 도열해 있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은 한국이 월드컵 무대에 첫 선을 보인 대회로 우리 국민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당시 6.25전쟁의 참화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국의 월드컵 출전은 너무나 극적이었다.

스위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 출전 신청을 낸 국가는 한국과 일본, 중국 등 단 3개국이었지만 마지막 순간 중국이 기권하며 1장의 월드컵 티켓은 한일간의 숙명적인 대결로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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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반일감정이 수그러지지 않은데다 양국간 국교까지 수립돼 있지 않아 홈엔드어웨이방식의 경기를 치르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국민 감정을 고려해 일본 선수들의 방한은 물론 한국 선수들의 일본 방문경기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 이에 축구인들을 중심으로 대통령에게 수차에 걸쳐 간청을 올렸고 결국 일본에서 두 번의 경기를 모두 치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하지만 일본을 꼭 이기고 돌아오라는 조건부 승인이었고 이에 선수단은 ‘일본을 꺾지 못할 경우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서로 대통령의 결단에 화답했다.

불퇴전의 의지로 일본 원정경기에 나선 한국 선수들은 첫 경기에서 5-1의 대승을 거둔 뒤 2차전에서 2-2로 비기며 아시아대표로 대망의 월드컵 본선행에 성공했다. 당시 1차전은 해방 이후 한일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하지만 한국의 본선 결과는 참담했다. 당시 열악한 항공 사정탓에 미공군 비행기를 가까스로 얻어타고 64시간의 비행 끝에 월드컵 개막일 오후에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했고 선수들의 피로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도착 다음날인 6월17일로 예정된 ‘최강’ 헝가리와의 개막전을 미룰 수는 없었다.홍덕영 박규정 박재승 강창기 민병대 주영광 정남식 성낙운 최정민 우상권 박일갑이 ‘베스트 11’으로 나선 한국은 헝가리와의 첫 경기에서 전반 20분까지는 0-0의 팽팽한 승부를 이어가며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전반 23분 첫 골을 허용한 뒤에는 체력의 열세에다 당시 미드필드를 강화한 새로운 축구전술로 세계를 풍미하던 헝가리의 가공할 공격력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0-9의 참패.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 한국의 초반 기세와 정신력에 감탄한 헝가리의 구스타프 시비스감독은 “한국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한국은 이어 터키와의 2차전에서도 0-7로 패하며 2패로 예선 탈락, 월드컵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당시 한국이 예선 2경기에서 기록한 16실점은 지금도 깨지지 않은 월드컵 출전국중 최다실점기록이다. 또 준준결승 오스트리아-스위스전에서 터진 12골(오스트리아의 7-5승)은 지금까지 역대 월드컵 본선에서 터진 한경기 최다골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상호기자 hyangs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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