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대기 차량 덮친 건물잔해… 반지 찾으러 가던 예비부부 참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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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 철거건물 무너져 4명 사상

서울 도심에서 철거 중이던 건물 외벽이 무너지면서 건물 잔해가 인근 도로 차량을 덮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붕괴되는 건물 앞 도로를 지나던 차량에 타고 있던 20대 여성이 숨졌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30대 남성도 다쳤다. 두 달 전 가족 상견례를 한 남녀는 내년 2월 결혼할 예정이었다. 다른 차량에 타고 있던 60대 여성 2명은 머리를 다쳐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4일 오후 2시 23분경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동궁빌딩 철거 작업 도중 외벽이 무너졌다. 이 때문에 30t가량의 건물 잔해물이 바로 앞 왕복 4차로 쪽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지하철 3호선 신사역 방면 2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차량 4대를 덮쳤다. 붕괴된 건물과 가까운 쪽인 1차로에는 아반떼와 레이 차량이, 2차로에서는 코나와 렉서스 차량이 앞뒤로 있었다.

아반떼와 코나 차량이 붕괴된 건물 잔해에 매몰됐다. 아반떼 차량 조수석에 타고 있던 이모 씨(29·여)는 사고 4시간 10분 만에 매몰된 차량에서 구조됐지만 숨졌다. 운전석에 타고 있던 황모 씨(31)는 3시간 36분 만에 구조됐다. 매몰 당시 의식이 흐릿했던 황 씨는 인근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진 뒤 의식을 되찾았다.

사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인도의 전신주와 가로수도 덮쳤다. 건물 주변과 도로가 붕괴할 때 생긴 먼지로 뿌옇게 휩싸였다. 인근 주민들이 차량에 갇힌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도로 쪽으로 뛰어들다가 전신주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보고 놀라 물러서기도 했다. 붕괴 여파로 전신주 3개가 넘어지면서 붕괴된 건물 옆 성형외과 건물을 포함해 주변 건물에 정전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수술을 받기 위해 성형외과에 있던 환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급히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전력 공급은 오후 7시 20분경 정상화됐다.

긴박한 구조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건물 붕괴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건물 잔해에 깔린 차량의 
문을 절단한 뒤 탑승자를 구조해 척추고정판에 옮기고 있다. 한 소방대원은 차량 위 건물 잔해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떠받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긴박한 구조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건물 붕괴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건물 잔해에 깔린 차량의 문을 절단한 뒤 탑승자를 구조해 척추고정판에 옮기고 있다. 한 소방대원은 차량 위 건물 잔해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떠받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오후 2시 27분쯤 현장에 도착한 소방당국은 특수구조대 등 인력 98명을 투입해 구조작업을 진행했다. 굴착기 3대를 동원해 잔해물을 치웠지만 30t 콘크리트를 깨면 진동 탓에 추가 피해 위험이 커 2대는 구조물을 받치고 1대가 콘크리트를 깨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돼 구조 속도가 더뎠다.

붕괴된 건물은 1996년 10월 준공됐다. 지상 5층, 지하 1층 규모의 이 건물은 6월 29일부터 철거 공사가 시작됐다. 이달 10일까지 철거를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지하 1층은 주차장, 1층에는 카페, 2층에는 댄스스포츠 학원 등이 입주해 있었다. 이 건물은 5월 신축공사를 위해 건물을 철거하겠다고 서초구청에 알렸다. 하지만 서초구는 철거계획을 반려하기로 하고 건물주 측에 이를 알렸다. 이 건물은 철거계획을 보완 제출해 심의를 지난달 17일 조건부로 통과했다. 경찰 관계자는 “서초구에 제출된 첫 철거방법에 하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고 당시 건물 안에서는 작업자 4명이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작업자들이 지하 1층 천장을 뚫던 도중 굉음과 함께 건물이 기울면서 사고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천장을 뚫을 때 하중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사고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 작업자들은 모두 대피했다. 경찰에 따르면 작업자들은 ‘건물이 무너질 조짐이 보여 건물을 벗어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들이 건물을 벗어난 뒤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에 대해 조사할 방침이다.

붕괴된 건물 인근 주민들은 며칠 전부터 사고 조짐이 있었다고 한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주민 B 씨는 “전날 새벽부터 건물에서 시멘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 인근 주민 이모 씨는 “건물 부근에서 2, 3일간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고 말했다.

신사역사거리에서 가까운 사고 현장은 평소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지만 사고 당시 인근을 지나던 보행자의 피해는 없었다. 사고 발생 당시에 찍힌 인근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결과 다행히 붕괴된 건물 앞을 지나는 보행자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철거업체 관계자는 “우리도 이런 사고는 처음 겪는다. 건물 자체가 부실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5시 40분경 사고 현장을 찾은 박원순 서울시장은 “안전하게 구조하는 것이 최대 과제다.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말했다.

윤다빈 empty@donga.com·구특교·박상준 기자


▼ 숨진 여성 아버지 “내년 2월 결혼 앞두고…” ▼

“내년 2월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4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본보 기자를 만난 이모 씨(29·여)의 아버지는 두 눈이 충혈된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씨는 남자 친구인 황모 씨(31)가 운전하던 차량을 타고 서울 서초구 잠원동을 지나다 철거 작업 중 붕괴된 5층 건물 잔해에 깔려 숨졌다. 이 씨는 예비남편 황 씨와 함께 예물인 결혼반지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기자들에게 “병원에 찾아온 황 씨의 가족에게 ‘우리 예비사위는 괜찮냐’고 물어봤다”면서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 씨보다 30분 먼저 구조된 뒤 서울성모병원 응급실로 이송된 황 씨는 한때 의식을 잃었다가 의식을 되찾았지만 다시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와 치료를 받고 있다.

황 씨가 운전한 차량은 이 씨 아버지 명의의 차량이었다. 사고가 난 지 3시간쯤 지난 오후 5시 30분경 경찰이 이 씨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경찰이 딸을 구출했다고 해 경찰서로 가고 있었다. 운전 도중 라디오에서 여성 1명이 사망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듣고 ‘아뿔싸’ 했다. 설마 아니겠지 했는데 경찰이 영안실 얘기를 해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비정규직으로 회사에 입사한 뒤 정규직으로 전환된 이 씨는 친구의 소개로 황 씨를 만나 2년 넘게 교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의 아버지는 “자립심이 강한 딸은 대학생 때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직접 벌어 썼다”며 “결혼할 때도 부모에게 ‘키워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결혼 비용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더라”고 했다.

이 씨의 아버지는 영안실로 찾아온 철거업체 관계자에게 “내일모레 결혼할 애가 죽었다. 공사를 어떻게 했길래 이러냐”며 오열했다.

박상준 speakup@donga.com·김은지 기자

#서초구#철거건물#동궁빌딩#붕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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